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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되지 않는 것(수13;1) 190217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9. 2. 20. 03:05

정복되지 않는 것(여호수아 13:1)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Mr7LKeCgvBg, Hit:6
 이근호19-02-17 15:51 

정복 못한 것 

2019년 2월 17일              본문 말씀: 여호수아 13:1 

(13:1) 여호수아가 나이 많아 늙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나이 많아 늙었고 얻을 땅의 남은 것은 매우 많도다 

미처 정복하지 못하고 남아 있다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이 실패로 끝났다는 것은 의미하는 게 아닐까요? 아닙니다. 여호수아로 인하여 이스라엘 역사가 마감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 입장에서 보면, 주시마 했던 그 땅이 남김없이 다 정복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약속이 마감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모세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의 한계입니다. 모세언약이 하나님 언약의 전부가 아닙니다. 도리어 모세언약은 하나님의 일의 과정에서 실패성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면서 실패하셨다’는 말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실패처럼 보이는 과정을 필요로 하셨다는 말입니다. 

정복의 마무리는 신약에 와서 다른 세계를 겨냥합니다. 지상의 땅을 도리어 버리는 것이 정복이 됩니다. 왜냐하면 땅을 버린다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의 고향과 성장터와 자기 정체성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땅에서 올라오는 세상 유혹에 우리의 몸은 쩔어있습니다. 

무심코 내뱉는 말이나 행동은 전에 세상에서부터 불어오는 바람으로 절여진 결과들입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이 땅에서 계속 정복할 게 남아 있게 됩니다. 그리고 제대로 정복하지 못하면 우리는 신랄하게 우리 자신을 질책하고 욕합니다.“사람으로 태어나서 그것밖에 못하냐”라고 말입니다. 

이런 사고방식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는 앞으로 전개되는 이스라엘 역사 내부에서 찾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자신이 다른 민족보다 잘나서 그 땅을 차지한 것처럼 여깁니다. 이런 사고방식 내부에 놓친 게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희생’입니다. “나의 희생으로 성과를 거두자”가 아닙니다. 

‘외부의 희생덕분에 우리가 하나님편에 서 있다’는 사실을 놓친 겁니다. 즉 ‘나의 희생’이 아니라 ‘외부자의 희생’입니다. 여호수아가 아직 정복하지 못하고 남겨둔 지역이, 여호수아가 죽고 난 뒤에는 이스라엘을 못살게 구는 적폐적 요소가 되었습니다. 외세가 쳐들어와서 막무가내로 조공을 요구합니다. 

처음에는 이스라엘이 ‘자기 희생’을 가동시켜서 자기 선에서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조차 막다름에 도달했을 때, 출애굽 때에 도와주신 하나님을 찾습니다. 이는 결코 하나님보다 자기 대신 조공을 바쳐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이방민족을 심판해달라는 식입니다. 

이 변화가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과 협상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줄기차게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들어 있는 쪽, 곧 이스라엘과 하나님이 언약이 들어있지 않는 쪽, 이방민족 사이를 사정없이 갈라놓으시는 심판을 행사하시면서 해결지우십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성신을 받게 되는 자가 등장하는데 그들이 바로 사사들입니다. 이 사사들의 삶은, 숨겨진 하나님의 희생을 삶으로 다 보여주는 역할을 해야 될 자들입니다. 결코 본인의 솜씨나 잘나 보이기 위해서 살아서는 아니되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이런 정신을 가지고 살아야 모세와 여호수아의 대를 잇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사사가 되기 전에는 그냥 무명(無名)의 존재였습니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는 곧 여호수아가 죽은 이후에 이스라엘의 대를 이을 지도자를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지 않았다는 말이 됩니다. 이스라엘이 자체적으로 연합체를 만들어, 그들 소견에 옳다고 여기는 대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엉망이 된 겁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상주 지도자는 없고, 단지 하나님의 말씀만 유효할 때, 인간은 어떻게 처신해야 합니까? 신약에 오면 이 체계의 완전함이 등장합니다. 그것은 바로 ‘보이지 않는 분’의 종으로 살아가는 ‘보이는 자’의 등장, 곧 성도의 등장이 그러합니다. 

이 점을 쉽게 하기 위해 어떤 영화를 소개하겠습니다. [월요일이 사라졌다 What Happened to Monday?]라는 영화입니다.( 2017 제작) 미래의 나라에 자원이 부족하고 전 지구적으로 인구가 폭발하니 필히 한 가정당 한 명의 자녀만 용납이 되는 법이 제정됩니다. 그런데 어떤 가정에서 여아 일곱 쌍둥이를 낳게 되었습니다. 

한 명 빼놓고 여섯 명을 다 죽여야 하는데 아버지는 그 여자 아이 7명을 다 살리는 쪽으로 계획을 짭니다. 집 밖으로 나갈 때, ‘카렌 셋맨’이라는 동일한 이름으로 한 명만 밖에 나가고 나머지는 집 안에 박혀있어야 합니다. 집에 있을 때는, 각자 “일요일,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 목요일, 금요일, 토요일” 이름으로 통합니다. 

그러니까 ‘카렌 셋맨’이라는 것은 대표 이름일 뿐이지 실제 이름을 가진 인물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궁극적으로 완성될 천국은 오로지 ‘주의 이름’으로만 통하지 개인의 이름은 용납되지 못합니다. 따라서 진정한 정복이란 성도의 마음 속에 ‘주의 이름’이 들어오는 겁니다. 

이것은 바로 ‘마음의 할례’입니다. 곧 자기 이름에 대한 제거입니다. 누가복음 10:17-20에 보면, “칠십 인이 기뻐 돌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숨겨진 ‘주의 이름’의 원수가 예수님의 정복 행위, 곧 심판 행위로 말미암아 실재적으로 존재함이 발각된 겁니다. 그리고 그 사탄은 결코 인간의 이름으로 이길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주의 이름’으로만 처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의 마음이 먼저 ‘주의 이름’으로 정복당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나의 이름’으로 살던 인생이 ‘주님의 십자가’로 인하여 먼저 심판받아 죽어야 하는 겁니다. ‘나의 이름’이 죽은 이름이 되게 하시는 그 ‘주의 이름’으로 성도는 움직이게 됩니다. 성도는 자기를 욕하지 마세요. “네 인생 꼴이 그래 뭐야?”라고 자신에게 질책하지 마세요. 주의 이름이 들어온 성도는 모든 일에 ‘아니요’도 없고 ‘실패’도 없습니다. 모든 일이 주님이 지시에 따라 그 자체가 곧 성공이기에 따로 실적이나 업적을 내세울 필요없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비난하지 말게 하옵소서. 주님의 희생이 우리 자신의 희생으로 이어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19-02-18 05:54 
224강-여호수아 13장 1절(정복되지 않는 것)20190217-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여호수아 13장 1절입니다. 구약성경 339페이지입니다. 

“여호수아가 나이가 많아 늙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얻을 땅이 매우 많이 남아 있도다” 

여호수아가 다 정복하지 못하고 남아 있는 땅들이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왜 이렇게 제대로 정복하지 못했는가. 그것은 여호수아가 하나님 나라에 최종인물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침에도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만 현재는 과거 때문에 현재가 있는 것이 아니고 현재는 미래 때문에 미리 현재가 와 있는 겁니다. 

그래서 특히 구약의 여호수아 같은 경우에는 여호수아가 뒤에 올 완벽한 하나님의 나라를 미리 앞당겨서 조금씩 조금씩 그 면면을 보여준 거예요. 보여주면서 여호수아가 볼 수 있는 것은 장차 올 나라는 이러이러한 원칙과 원리대로 움직인다는 것을 여호수아를 통해서 약간이나마 사실은 많이 보여주었지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민족들을 이겨나갔으니까요. 

그런데 이겨나가는 그 모습이 보통 ‘정복’이라고 하는데요, 그래서 정복되지 못한 지역이라고 하는데, 이 정복이라는 것이 남의 땅 정복이라고 하지만 이것을 같은 뜻이지만 말을 약간 바꾸면 더 의미가 쉽습니다. 심판을 제대로 못 하고 남아 있는 지역, 심판을 제대로 못 한 지역이라고 보시는 게 좋아요. 
왜냐 하면 정복이라고 하는 것은 차지한다는 의미가 더 강렬한데, 심판한다는 것은 부동산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질적으로 너희들은 이 땅에 살만한 가치가 없고 징벌을 받아야 마땅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이스라엘은 어느 편에 서 있는가 하면 저쪽을 징벌할 징벌 자, 심판자와 더불어 함께 있다는 그러한 뉘앙스가 강하겠죠. 

왜 이스라엘이 이렇게 남들 보기에 건방져 보이는 자기 자신을 심판 주처럼 행세하는가? 그건 여호수아 11장 20절에 보면 나와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강퍅하여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싸우러 온 것은 여호와께서 그리하게 하신 것이라 그들을 저주받는 자 되게 하여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하시고” 

그들 이방 민족들로 저주받는 자 되게 하여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한다는 말은 뭔 뜻이냐 하면 반대로 이스라엘은 저주에서 벗어났으며, 은혜를 입었다는 겁니다. 그들이 잘해서 심판자 측에 있는 것이 아니고 “너는 저쪽을 심판해”라는 그런 기능을 은혜로 은총으로 부여받은 민족이 이스라엘 민족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은혜를 받을 자격이 되느냐 하는 그것에 대해서 11장 20절 마지막에 보면 이렇게 되어있어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진멸하심이라”라고 되어있어요. 모세에게 명한다는 말은 율법이죠. 그 이스라엘 민족이 다른 민족과의 차이점이 뭐냐고 물으신다면 달랑 하나예요. 그들에겐 율법이 있었고 이방 민족에겐 율법이 없었다는 겁니다. 

율법이 있다는 이유 때문에 율법이 없는 자를 징벌한다는 겁니다. 저주하고 그들을 진멸할 수 있는 자격을 얻는다는 겁니다. 율법 빼놓고 하나님께 받은 계시 빼놓고 누가 똑똑하게 아이큐 높고 누가 성실하고 착하냐는 그 대결을 하는 게 아니에요. 본인의 실력과 자질을 내놓으라는 말이 아니라, 저쪽에는 하나님께 받은 게 없고 이쪽에는 하나님께 받은 게 있는 그 차이점뿐입니다. 

따라서 그 이스라엘이 그들을 진멸하는 것은 이스라엘이 진멸한다기보다도 이스라엘을 하나의 수레로 여기고 그 위에 타고 계시는 하나님이 직접 겉으로는 이스라엘이라는 민족 형식으로 이방 민족을 진멸하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게 되면 이런 질문이 나올 수 있어요. “왜 하나님은 이방 민족을 심판하려고 하느냐?” 

애초부터 심판할 거 같으면 그냥 만들지 말지, 만들어 놓고 왜 또 심판에 나서려고 하느냐는 그러한 생각을 할 수 있어요. 만들기는 만들어 놓고 심판하기 위해서 만들었다고 하니까 좀 이상하잖아요. 만드는 자체가 사랑이 아니냐는 이 말이거든요. 

사랑이 아니거든요. 이 땅에 인간으로 태어나서 산다고 해서 사랑이 아니에요. 은혜는 입지만 그것은 사랑해서 주는 은혜가 아닙니다. 결국은 너희는 은혜를 몰랐다는 것을 지적하기 위해서, 책임 지우기 위해서 이 땅에 잠시 은혜를 준 거예요. 그걸 로마서 1장에서는 그들로 하여금 은혜는 줘놓고 내어 버려두신다는 뒤에 조치가 붙는 거예요. 

은혜는 줬는데 내어버려 두시는 거예요. 이스라엘도 사실은 후반기에 마찬가지입니다. “너희가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은혜를 받아 놓고도 네가 소보다 못하다. 소는 임자를 알지만, 너희들은 너희를 만든 아비를 잊어버렸잖아”라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추궁해요. 이 성경 전체가 도대체 뭘 이야기하느냐 하면 네가 있는 것이 우선이 아니고 이 하나님이 있는 것이 우선인데 왜 자꾸 너는 그것을 놓쳐버리느냐 하는 겁니다. 

“모든 되는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고, 주로부터 주로 말미암아 주께 돌아간다고 되어있는데 너는 누구에게 배웠느냐? 누구를 모방하고 살았는지 어떻게 모든 것이 너로부터 시작해서 너로 말미암아 되느냐?”라고 지적질 해주시는 겁니다. 그리고 이방 민족을 심판해주신다고 하지만 심판이 곧 지옥이 아니에요. 여러분 잘 들으셔야 합니다. 

심판함으로써 심판받아 마땅함을 깨닫게 될 때 그게 심판 가운데서 쏟아져 나오는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구원은 심판이 형성되어야 거기서 구원이 나오지 심판이 없는 데서는 구원조차도 나오질 않습니다. 떡을 넣어야 떡가래가 나올 것이 아닙니까? 심판을 집어넣어야 ‘아이고, 이게 웬 떡이고?’ 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감사가 나오는 거예요. 심판을 집어넣어야. 

사실은 이스라엘도 하나님께 앞으로 본격적으로 심판받을 거예요. 지금은 신이 났지요. 하나님이 함께하셔서 이방 민족을 친다고 신이 났는데 앞으로는 이스라엘 차례입니다. 왜냐 하면 정복되지 못한 영토가 있어요. 그 정복되지 못한 것과 이스라엘 심판받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 

정복되지 못한 사람이 이스라엘을 빙 둘러서 포위하는 포진을 형성합니다. 정복하지 못한 나라가 이스라엘을 빙 둘러서 포위하고 있는 겁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은 마찬가지예요. 남쪽에는 이집트, 옆쪽은 요르단, 그리고 북동쪽에는 베냐민, 그리고 북서쪽에는 시리아, 그리고 내부에는 팔레스타인 자치지구, 완전히 이슬람국가로 빙 둘러있어요. 

그리고 이스라엘도 150군데나 되는 정착촌이라는 곳을 만들어서 일방적으로 이스라엘 국민을 그쪽에 살도록 만들어 놓고 그다음 장벽을 만들어 버려요. 마치 뭐와 같으냐 하면 우리 남한에서 평양시 대동강 변에 대한민국 대구 시민을 거기에 한 5000명 살게 하고 빙 둘러서 장벽을 치는 겁니다. 그러면 북한이 영토가 자기 영토라고 우기는 그것을 완전히 묵사발 내는 거예요. 

너희들은 완전히 우리 지배하에 있다는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정착촌 전략입니다. 현재 150군데에 사는 사람이 50만 명이 살고 있습니다. 정착촌은 관광객들은 못 들어가요. 베델같은 그곳에 우리가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이건 하나님이 주신 행운이었습니다. 차 타고 가는데 옆에 가는 유대인을 우연히 태워줘서 그 사람이 자기 동생 만나러 가는 통에 거기로 같이 가서 카메라로 베델을 찍었습니다. 지금은 거기 관광객들 못 들어가는 곳입니다. 왜냐 하면 거기가 팔레스타인 지구이기 때문이에요.

그게 바로 정복하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면 모세에게 주신 그 율법대로 여호수아가 정복을 못 했으면 그다음 기수에 가서 정복하면 되지 않느냐고 생각하는데 이거 끝까지 정복 안 됩니다. 왜냐 하면 나중에 신약에 가면 땅 정복이 아니에요. 정신 정복이고 인간의 마음 정복으로 나갑니다. 

이스라엘이 땅을 점령한다고 이게 이스라엘이 되는 게 아니거든요. 그건 유대인들이 아직도 오해하고 있어요. 우리의 마음을 정복하는 걸 가지고 성경에서는 마음에 할례받았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중심 부위가 내 인생, 내 행복이 아니고 주님의 이름을 위해서 살게 될 때 온전한 정복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호수아가 여기서 정복을 못 했는데 여기 보면 여호수아가 나이 많았다고 되어있거든요. 그러면 여호수아의 후계자가 누구냐 하면 여호수아의 후계자가 없어요. 이게 어려운 거예요. 후계자가 없습니다. 그럼 후계자가 없으면 이스라엘은 누가 있느냐. 이스라엘 지파 전체가 연합체로 움직이는 겁니다. 

그러면 그거 아주 신이 났겠다고 하겠지요. 지도자가 없으니까 각자 지도자가 되면 되지 않느냐고 하는데, 그래서 각자 이스라엘이 지도자 없이 내버려 둘 때 그들은 엉망진창이 된 거예요. 그래서 남아 정복하지 못한 이방 민족이 이스라엘을 빙 둘러 포위해서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서 수시로 이스라엘을 쑤십니다. 

수시로 이스라엘을 괴롭혀요. 처음에 괴롭힘을 당할 때, 이스라엘은 자력으로 버텨보려고 하다가 결국에는 누굴 찾게 되느냐 하면 ‘하나님이여, 옛날에 출애굽 때 유월절 하신 하나님이여 우리를 도와주시옵소서’라고 하며 과거에 자기를 도와준 그 하나님이 함께 있음을 그때 서야 관심 있게 보고 도와달라고 하는 거예요. 

금방 도와달라고 하지 않습니다. 꼭 자기 힘으로 버틸 만큼 버티다가 그 버팀의 마지노선이 완전히 무너졌을 때 그때 가서 ‘하나님 살려주세요’하고 비는 거예요. 그때그때 하나님이 살려 줄 때, 살려주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성신이 임하게 하는데, 성신이 임한 인물들이 특별한 사람이 아니에요. 보통 이웃 사람이에요. 방앗간 주인, 왼손잡이 깡패, 기생오라비, 그냥 변변치가 않아요. 

그런데 단지 외부에서 뭐가 주었다 하니까, 하나님의 성신이 주어졌다고 하니까, 그 힘없다고 못 이긴다고 그렇게 불평하던 이스라엘이 성신의 도움으로써, 더 분명하게 이야기해서 자기희생으로써, 성신 받은 사사의 자기희생으로써 이스라엘이 잠깐 숨이 트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을 움직이는 원리가 뭐냐 하면 힘이 아니고 ‘희생할 사람 혹시 계세요?’라고 희생자를 찾는 거예요. 물론 희생할 사람이 손들고 나오지 않습니다. 아무도 희생할 마음이 없어요. 성신이 임하니까, 요즘 같으면 성령이 임하니까 그 사람은 가차 없이 하늘나라를 위해서 희생되어야 할 인물로서 채택되고 뽑힌 겁니다. 

그 성령이 임한 사람을 성도라고 해요. 성도 맞습니까? 성도가 되면 희생한다는데 그러면 돈을 낼까요? 아니면 시간을 바칠까요? 아닙니다. 뭘 바치느냐 하면 자기의 명예와 자기의 공로와 의를 포기하고 희생하는 겁니다. 자기 잘남을 포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천국이라 하는 것은 결국 자기 정복입니다. 

자기가 하나님의 영, 주님의 이름에 의해서 정복당해야 해요. 정복을 안 당하게 되면 자기 잘난 맛, 자기 공로, 자기 희생했음을 자랑해요. 그렇게 되면 그건 전혀 그리스도의 모습이 아닌 겁니다. 제가 말은 아주 쉽게 쭉 이어졌습니다만 약간 더 자세히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여기 11장 20절에 보면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진멸하려 하심이라”라고 하면서 모세 이야기가 나오거든요. 

그러면 여기 13장에 여호수아가 나이 많다고 나왔단 말이죠. 이게 뭐냐 하면 여호수아는 모세의 시다바리입니다. 더 어렵게 이야기해서 모세는 이미 죽었어요. 죽은 자의 시다바리가 되는 겁니다. 쫄다구란 말이죠. 죽은 자의 쫄다구예요. 다른 말로 말하면 없는 자의 쫄다구로 살아가는 거예요. 

거기에 비해서 모든 인간은 살아있는 자기 자신의 가치를 드러내고 내가 여기 있음을 그걸 분명히 남에게 각인시키기 위해서 살아가는 겁니다. 완전히 다르지요. 이게 뭐가 어려우냐 하면 이게 어려워요. 신학적으로 아무리 따져도 이걸 제대로 설명하는 신학이 제가 보기엔 별로 없어요. 이게 너무 어려운 거예요. 

내 이름으로 살지 않고 예수 이름으로 산다는 것이 너무 어려워서 신학적으로 따져도 납득이 안된다니까요. 신학을 이야기 한 사람도 무슨 말인지 몰라요. 그래서 제가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월요일이 사라졌어요’라는 영화가 있어요. 2072년도의 미래를 표현하는 SF 공상과학영화인데요, 그때 영국에서는 아이를 한 명만 나아야지 둘을 나으면 강제로 다 죽이는 그런 단체를 만들었어요. 

지구가 자원은 한정되어 있는데 인구가 너무 많아서 지구가 유일하게 살 수 있는 것은 아이를 하나만 낳는 것이라고 판단 한 겁니다. 인간의 가족애에 거슬리는 거죠. 무조건 하나를 나아야 다 같이 조금이라도 더 살지 그렇지 않으면 같이 멸망한다는 취지로 그렇게 한 건데, 이게 공상과학영화입니다. 월요일이 사라졌다는 영화가 거기서부터 출발하는데 제목이 좀 이상하죠. 월요일이 사라졌다니.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어떤 집에 아이를 하나만 나으려고 했는데 무려 일곱 쌍둥이가 태어난 겁니다. 욕심을 부린 것이 아니고 아이를 하나만 나으려고 했는데 정책에 맞도록 살려고 했는데 무려 일곱 쌍둥이가 나온 거예요. 그러면 하나 빼고 다 죽여야 하는 거예요. 이 정책은 이미 출애굽기 1장에서 히브리인들이 애굽에서 당했던 정책이에요. 히브리인들은 아들을 낳으면 다 죽이라는 정책. 여자는 빼고 남자는 다 죽이라고 한 거예요. 

모세가 그 죽음을 이겼잖아요. 물에서 건져지기 이전에 이미 하나님에 의해서 죽음에서 살림을 받은 것이 모세예요. 모세의 운명과 똑같은 운명으로 점철된 것이 이스라엘의 운명입니다. 그들은 물에서 기어 나온 민족이라는 별명을 다른 이방 민족에 의해서 얻게 돼요. ‘저 민족은 물에서 기어 나왔다’ 물고기도 아니고 물에서 기어 나왔다는 거예요. 그게 신약에 오면 물세례고 우리 같은 신약 성도 같으면 물에서 기어 나온 것이 아니고 불에서 기어 나왔어요. 하나님의 심판, 지옥에서 기어 나온 사람이 성도예요. 

그러니까 자기 마음의 할례는 내 이론으로 사는 것을 하나님께서 그만한 혜택을 주었기 때문에 용납을 안 하는 거예요. 내 자랑, 내 것, 이런 것들을 용납을 안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영화 이야기를 계속하게 되면 아버지가 이름을 지었어요. Sunday, Monday, Tuesday, Wednesday, Thursday, Friday, Saturday라고 일곱 명의 딸들에게 요일별로 이름을 지었어요. 

정해놓고 월요일 되면 월요일을 밖으로 내보내고, 화요일 되면 화요일, 요일에 맞춰 한 명씩 나가는데 나갈 때는 자신들의 요일 이름을 버리고 오직 한 이름 ‘카렌 셋맨’이라는 이름으로 나가서 일을 봐요. 어른으로 성장해서 은행 직원으로 일을 하는 거예요. 요일마다 자기 이름에 맞춰서 계속 교체하면서 나가는 거예요. 

이건 뭐냐 하면 ‘카렌 셋맨’이라는 있지도 않은 이름으로 자기들 각각이 돌아가며 살고 있는데 그 이름을 예수 이름으로 봅시다. 그러면 우리는 뭐냐 하면 일곱 명의 예수가 되는 거예요. 매일같이 자기 이름으로 못 살아요. 몸은 Sunday, Monday, Tuesday...이렇게 제 각각 부모로부터 받은 몸이 있는데 세상에 나왔을 때는 주님께서는 내 이름 아닌 죽은 분의 시다바리로 살아있는 이 몸이 이미 죽은 분의 이름, 예수 이름으로 살게 하시는 거예요. 

이것은 신학으로 설명하는 것보다 이것이 더 쉽습니다. 보통 인간은 자기가 자기에게 전부입니다. 자기가 자기에게 전부란 말은 내가 죽으면 말짱 도루묵이고 소용없는 거예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고 예수고 내가 죽으면 그만인 거예요. 그런데 이스라엘 하나님의 모세 언약에 의하면 심지어 죽는 것도 사나 죽으나 주의 뜻으로 죽어야 해요. 

죽고 싶다고 자살하면 안 돼요. 주께서 자살하게 하시면 자살하면 돼요. 그런데 주님이 그렇게 계획적이신 분이 아니에요. 넥타이는 몇 센티, 번개탄은 몇 초 피우고 하는 것은 성신의 일이 아니고 너무 이성적이라 그냥 어떻게 충동으로 자살할 수도 있는 문제인데 그것 가지고 지옥 간다고 말은 안 하겠는데요. 대부분의 자살은 너무 계획적입니다

‘오늘 마포대교에 와보니 물이 너무 차가워 보이는데 다음날 와야지’라는 식으로 화요일에 가고 수요일에 가도 다 내 이름으로 가는 거예요. 죽은 분 이름으로 가는 것이 아니고 내 이름으로 가는 거예요. 은행가면 사인도 내 이름으로 하고. 그러나 그 일곱 쌍둥이는 사인도 자기 이름으로 사인하는 것이 아니고 ‘카렌 셋맨’이라는 사인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제가 영화를 이야기했지만 이게 실제가 그런 겁니다. 왜 그러냐 하면 열두 제자가 있거든요. 똑같아요. 일곱 쌍둥이와 열두 제자가 똑같이 마찬가지예요. 가서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쫓아내도 자기 이름 아닙니다. 그걸 보고한 것이 누가복음 10장 17~18절에 나와 있어요. “칠십 인이 기뻐하며 돌아와 이르되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여러분, 이 성경 본문 어떻게 할 거예요? 이 성경 본문 감당하실 수 있겠습니까? 믿으셔야 합니다. 여러분. 이 성경 본문. 사탄이 어디 있어요? 주님이 어디 있어요? 그러나 지금 우리는 우리 이름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로, 다시말해 주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이거 남에게 이야기한다고 먹힐 이야기가 아닙니다. 

남이 안 알아줘요. 그래도 우리가 감당해야 해요. 주님을 믿으셔야 합니다. 이걸 감당해야 해요. 누가복음 11장 20절에 보면 “만일 내가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늘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이 말은 사도행전 3장에도 나오는데 성전 미문에 앉은 앉은뱅이를 낫게 할 때, 사람들은 누구나 베드로와 요한이 낫게 했다고 쳐다봤어요.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이 손사래를 치며 말합니다. “아줌마 아저씨들, 제가 한 것이 아니에요” 사람들이 “너희들이 아니면 누가 했는데? 방금 뭐 했잖아. 예수 이름으로 걸으라고 했잖아.” 합니다. “그러니까 내 이름으로는 아니란 말이죠” 우리는 그냥 목격자입니다. 내가 있는 곳에 당신들에게는 안 보이지만 주님이 그 현장에 계셔서 주의 능력으로 하나님 나라의 능력으로 그 사람을 낫게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사람을 낫게 했다는 것은 걷게 했다는 말이 아니고 사도행전 3장 6절에 보면 “베드로 요한 당신들이 나를 낫게 한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나를 낫게 했습니다”라는 마음가짐으로 앉은뱅이가 변화된 그 기적은 사람의 힘이 아닙니다. 오직 주님이 하신 거예요. 

“어떻게 해서 교회 오게 되었습니까?” “저 권사님이 전도했습니다.” 그건 변화된 것이 아니에요. 눈에 보이니까. 그러면 Sunday, Monday, Tuesday... 이니까. “보이지 않는 주님이 저 권사님을 통해서 저에게 교회 오고, 복음 듣게 하셨습니다”라고 까지 변화되어야죠. 그렇게 변화되어야 해요. 교회 열심히 다니고 지옥 가지 마시고요. 

실적 위주가 아닙니다. 성과 위주가 아니에요. 교회 몇 명 전도했는지의 성과 위주 아니에요. 주님에게 무슨 성과가 있습니까? 주님은 모든 것 자체가 성과인데. 또 거기에 무슨 추가적인 성과가 있고 실적이 있습니까? 인생에 무슨 실패가 있고 성공이 있습니까? 주의 이름에 실패가 있습니까? 

고린도후서 1장에 뭐라고 되어있느냐 하면 모든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아니오’가 아니고 모든 것이 ‘예’라고 했어요. 괜히 우리가 ‘아니오’라고 하는 거예요. 우리가. 우리가 실적과 업적을 미리 계산해서 안 나오니까 괜히 우리 자신이 자신을 그렇게 모멸하고 짓밟고 망가진 인생 왜 사냐고 내가 내 인생 엉망진창이라고 내가 나에게 욕을 하는 거예요. 

그러나 우리는 내가 욕 받을 이름이 벌써 사라졌어요. 우리에게 욕하는 것은 주님에게 욕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내게 능력 주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했어요. 모든 것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현재 주어진 결과가 내 일이 아니라는 그런 뜻이에요. 이런 걸 설명하려고 하면 정말 어려워요. 우리가 세상일에 너무 몸이 베이다 보니까 이런 설명이 힘들어지는 거예요. 

누가복음 마지막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와 있어요. 전에 이야기했지만 글로바라는 사람이 길을 가고 있는데 마지막 장 30절에 보면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저희 눈이 밝아져서 그인 줄 알아보더라” 같이 다녀도 어떤 아저씨인 줄 알았죠. 

그러나 나중에 눈을 떠보니까 사흘 전에 돌아가신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올라가기 전에 밀착해서 같이 동행하신 거예요. 그리고 눈뜨고 주님이시죠 하니까 예수님은 벌써 그 현장을 떠나고 없어요. 예수님은 자기 맘대로예요. 오고 싶으면 오고 가고 싶으면 가고. 우리 같으면 주님 딱 수갑 채워서 “여기 부활했잖아. 봐라. 여기 보고도 안 믿을 거야? 천국 안 갈 거야?”라고 전도용으로 쓰고 싶은데 그게 아니고, 전도는 주님이 하시지 선교는 주님이 하시지 선교사가 하는 게 아닙니다. 

선교사가 할 일은 하나밖에 없어요. “제가 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말만 하면 돼요. “제가 선교하지 않고 전도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내 인생 이 만큼 살아왔습니다”라고 말만 안 하면 돼요. 그러면 그 사람에게 우리는 지금 선교사입니다. 대한민국 선교사. 멀리 필리핀까지 가지 마세요. 대한민국 사세요. 살아도 선교 잘하고 있는데 왜 멀리까지 가려고 하십니까? 

오늘 본문으로 다시 돌아오면 여호수아가 정복하지 못했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남아 있는 땅이 있어요. 이것은 이스라엘 내에 무슨 순환을 이야기하느냐 하면 구원의 악순환을 계속 이야기하는 겁니다. 뭐 괜찮은 사람 없나? 뭐 대단한 영웅 없나? 삼손이 했다고? 삼손처럼 뛰어난 사람 없을까? 

어떤 기드온 사사가 300명으로 많은 적군을 이겼으니까 그다음부터 사람들이 기드온을 하나로 고정시켜 놨어요. 우리의 위대하신 영웅이여. 왕의 옷을 입혀서 왕으로 만들어 놨어요. 기드온은 “이러지 마세요. 이러지 마세요. 제가 한 것이 아닙니다” 손사래 치며 말하는 거예요. 목포에서 손혜원이도 좀 그랬으면 좋겠어요. 지금 목포 가니까 손혜원이 많이 떴어요. 사람이 뭘 좀 하게 되면 붕 떠요. 

우리 이름은 Friday고 Saturday고 아무 의미 없어요. 예수 이름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남 정복할 생각 하지 마세요. 그 마음이 나를 정복해야 해요. 나를. 내 안에 하나님의 모세 언약이 살아있는 정도가 아니고 십자가의 새 언약이 살아있어요. 주의 살과 피가 살아있습니다. 죽었는데 이미 살았어요. 그래서 성도는 어디에 산다고 했느냐면 새로운 공간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살아있습니다. 예수 안에서 살아있다는 말이 그런 의미에서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끝으로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구약에서는 지리적으로 정복한 지역과 정복되지 않는 지역이 뚜렷하게 구분되지만, 오늘날 신약에서는 다층구조입니다. 다층구조. 이 세상에 눈에 보이는 층이 있고 눈에 보이지 않는 층이 함께 섞여 있습니다. 그래서 아까 말했던 것처럼 부활 같은 경우에는 예수님 만나 놓고도 “예수님 만났다며? 보여줘!” “안돼” 왜냐면 이 아래층 땅의 구조에서는 하늘의 구조를 임의로 수갑 채워서 붙들어서 예수님 나타났다고 쇼하듯이, 서커스 원숭이 키우듯이 이렇게 선교용으로 써먹을 수가 없어요. 

오히려 우리가 주님의 원숭이죠.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는. 간지러우면 긁고 뭐 주면 감사하는. 그 모든 것이 보이지 않는 분에 종속되고 예속되는 거. 왜 그래야 되는 가. 모든 것이 ‘아니요’는 없고 실패가 없고 하자가 없고 그리스도 안에서는 완벽하게 ‘예’가 되고 패스가 되고 그 자체가 성공이고 예수님의 향기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정복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구약과 신약을 나누어 보았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땅을 지키려고 하다가 결국 실패로 끝났습니다. 오늘날도 예배당이나 키우고 사람들 끌어모으고 실적 올리려고 하다가 다 실패로 끝난 교회뿐입니까? 주여, 우리 마음속이 하나님의 성전이 되고 항상 ‘Yes’가 되는 주님이 함께 사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