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강-여호수아 11장 19~20절(강퍅)20190120-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여호수아 11장 19~20절입니다. 구약성경 338페이지입니다.
“기브온 주민 히위 족속 외에는 이스라엘 자손과 화친한 성읍이 하나도 없고 이스라엘 자손이 싸워서 다 점령하였으니, 그들의 마음이 강퍅하여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싸우러 온 것은 여호와께서 그리하게 하신 것이라 그들을 저주받는 자 되게 하여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하시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그들을 진멸하려 하심이었더라”
우리가 성경에서 인생의 해답을 얻기 위해서 성경을 보는데 사실 그러한 선입감조차도 잘못된 겁니다. 하나님은 내가 질문하는 모든 것의 해답을 다 쥐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인간이 다가갑니다. 그러나 우리 질문 자체, 존재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한다면 그런 하나님에 대한 접근, 성경을 대하는 태도 자체도 무의미한 겁니다.
그게 실제로 무의미하다는 것이 어디에서 드러나느냐 하면 실제로 하나님께서 이 땅에 손을 대고 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부지런하신 분이에요. 우리가 질문하기 이전에 우리가 주님에게 기도하기 이전에 이미 뭔가 변화가 우리부터 해서 우리 주변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찾는 것조차 우리의 뜻이나 우리의 의사대로 시작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몰아세울 때 가능합니다. 집어넣는 거예요. 네가 하나님 안 찾고 견디는가 보자는 식으로 세상을 운용해 왔습니다. 운용해 올 때 우리는 마치 하나님과 우리사이가 동등한 관계인 것으로 잘못 생각해서 하나님 앞에 우리가 필요한 것을 달라고 기도도 하고, 또 하나님 앞에 아양을 떨면서 중요한 일을 앞두고 어떤 큰 징벌이 오지 않도록 사전에 대비하는 그런 몸짓을 취하기도 하고 그렇게 하지요.
그러나 그러한 모습조차도 아직 우리가 정신을 못 차린 겁니다. 여기 20절에 보게 되면 전쟁이 일어나서 지금 19절에 전쟁하는 중이거든요. 하나님께서 친히 전쟁을 일으킵니다. 우리는 전쟁하는 이 내용을 보면서도 왜 하나님께서 세상을 조용하게 운용하지 않고 분란을 의도적으로 유도하시는지 전혀 감을 못 잡고 있어요.
그것은 전쟁을 해야 속에 감춘 것이 바깥으로 뒤집혀 나오게 되는 겁니다. 밭에서 쟁기를 갈 때 취지가 그 취지입니다. 한번 써먹은 것은 안으로 들어가고 안에 있는 것은 바깥으로 나오도록 그렇게 하지요. 뒤집는 겁니다. 인간이 자연스럽게 감추는 대목들이 있어요. 인간이 스스로 선별해서 남에게 보이고 싶은 그런 대목도 있고요. 그 두 개를 서로 반대로 바꿔치기하시는 겁니다.
그 바꿔치기 하는데 원리가 있어요. 그냥 바꿔치기하는 것이 아니고 원리가 있어요. 그 원리를 오늘 본문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20절 끝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진멸하려 하심이라” 모세에게 명했다는 것이 이게 모세가 요구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모세를 독대해서 산 위에까지 끌고 와서 앞으로 내가 일을 이렇게 진행 시키겠다고 주신 것이 있습니다. 그걸 두 자로 ‘율법’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세상을 율법으로 다스리겠다는 거죠. 율법은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은 그냥 통치방식이에요. 우리가 지킬 때 유리한 것이 아니에요. 그냥 통치방식이에요. 통치방식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겁니다. 시험문제를 학생이 내고 학생이 답하라고 한다면 학생들은 거의 백 점이에요.
학교에 내통하는 사람 있어서 올백 안 맞아도 괜찮아요. 그냥 내가 문제 내면 내가 다 맞아요. 왜 시험에 100점 맞기가 힘드냐면 출제를 학생이 하지 않기 때문에 그래요. 학생이 내지 않는다는 것은 선생님이 출제했다는 말이죠. 그 말은 학생의 모든 정신이나 이런 것들에 대해서 주도권을 선생님이 계속 쥐고 있는 겁니다.
대학 수학능력시험이라는 것은 문교부가 주도권을 쥐고 있는 거예요. 율법의 출제자가 누구냐 하면 우리 인간이 아닙니다. 만점 받으라고 준 게 아니에요. 어떻게 노력해도 만점을 못 맞고 올 만점이 안되면 하나님께서는 거기에 대해서 저주를 내릴 뿐이에요. 그래서 율법을 준 것은 로마서 말씀 그대로입니다. 인간을 저주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겁니다.
인간을 살리기 위함이 아니고 살아있다고 생각하는 그 인간의 오해를 바꾸기 위한 겁니다. 네가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사실 율법에서 보게 되면 진작에 죽은 자가 되는 겁니다. 율법을 먹구름으로 봅시다. 먹구름 안에서 바깥은 하늘에 먹구름이 꽉 끼었는데 집안에서 환하게 전등불 켜놓고 있으면 마치 대낮 같지요. 하지만 바깥은 먹구름이거든요.
지금 우리 인생의 먹구름은 바로 말씀이고 율법입니다. 율법에 먹구름 껴 있어요. 나이트클럽에서 춤출 때는 기분 좋지요. 하지만 밖에 나가면 비 맞습니다. “모세의 명대로” 그다음 말씀이 “진멸”입니다. 모세의 명과 모세가 잘했다는 원칙은 어떤 결과를 낳는데 그 결과가 뭐냐 하면 진멸, 다 죽이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왜 살아있느냐. 그래서 이상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래서 희한하다는 말이죠. 하나님의 율법의 원칙대로 하게 되면 이방인이나 이스라엘이나 다 죽어야 해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왜 살아있느냐. 그래서 이상하다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하나의 살아날 만한 능력이 있어서 살아난 게 아니고 이스라엘이 있어야 될 이유조차도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주신 거예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율법대로 모세의 명대로 하면 다 진멸된다는 것을 누구 하나 살아있어야 그것을 후대에 전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깡패들끼리 싸우면서 깡패 조폭들 다 패면서 한 명은 살려주는 이유가 가서 네 두목에게 까불면 이렇게 맞는다는 것을 전하라고 살려주는 것처럼 이스라엘은 너희들이 아는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 아니었다.
전쟁을 일으키는데 인간을 살려주는 전쟁이 아니고 진작 다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통고하기 위해서 우리가 진짜 하나님 앞에서 벌벌 떨면서 그동안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동행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있는 겁니다. 그게 모세의 명이에요.
그러면 이 모세의 명에 의해서 모세의 명에 합당한 자가 등장합니다. 20절에 나옵니다. “그들의 맘이 강퍅하여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싸우러 온 것은 여호와께서 그리하게 하신 것이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이방인 앞에 보내는 것은 이스라엘이 없던 상황과 있던 상황에 차이를 두기 위함인데 이스라엘이 없으면,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함께하는 민족이 없으면 인간과 인간 사이에는 전부 다 우정이 싹틉니다. 우정의 무대처럼.
군대 이야기해서 미안하지만 군에서 경상도, 전라도, 제주도 전부 한군데 섞여 있죠. 처음에는 서먹서먹합니다. 그런데 같이 기고, 같이 훈련받고, 같이 고생하고, 같이 조교들에게 얻어맞으면 그때부터 뭔가 없는 게 생겨요. 그게 전우애입니다. 고생을 같이할 때 전우애가 생기는 거예요.
인간대 인간이 같이 붙여 놔 버리면 그들은 어떤 역경과 고난도 이겨내겠다고 단결하게 되어있어요. 그게 우정이라는 겁니다. 우정 또는 사랑이라고 할 수도 있고. 바벨탑이죠. 그래서 하나님이 개입하지 않게 되면 전 세계는 ‘We are the world’ 모든 세계는 오직 하나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말하는 것처럼 모든 세계는 하나로 뭉쳐지게 되어있어요. 그
걸 소통이라고 하죠. 소통하고 협력하고 이웃사랑하고, 어려운 사람 동정하고, 아프리카에 우물 없다고 돈 보내고, 이 모든 세계가 서로 어려운 사람 돌보면서 하나가 되는 거예요. 서로 싸우게 되지만 그 싸우는 가운데 정든다는 소리처럼, 이론상 원수지만 옆에 이웃에 이슬람교 있고, 여호와 증인, 안식교 교인 있습니까?
교회에서 신천지 보면 이단이고 삼단이고 하지요. 그런데 그거 감추고 떡 주고 받아보세요. “이사 왔습니다” 하면서 떡 주고 “아이고 이거 빈 접시 보내면 예의가 아니지요”하고 곶감 보내버리면 갑자기 모든 종교를 초월해서 이단 삼단 사단이고 다 초월해서 아주 친한 친구가 됩니다. “아이고 그렇지 않아도 안면이 익는데 거기 촌에서 어느 학교 나왔습니까?” 이렇게 나와 버리면 그거는 기독교 교리라는 게 아무 의미 없죠.
우리가 이단 공격해라, 이단 나쁘다 할 때, 어떤 경우에 그런 소리가 나오느냐 하면 자기가 외로울 때, 사는 게 팍팍할 때, 자기 기도 응답 없을 때 그때 하는 거예요. 내가 너무 찔렀나요? 사람이 이단 삼단들은 어디 자기 인생 맘대로 안되니까 화풀이할 곳이 없어서 만만하게 이단인 거죠.
사람이 사는 게 구질구질하고 어려울 때는 무슨 공부하는 줄 알아요? 성경 공부해요. 성경 공부는 왜 하는 줄 알아요? 내가 잘못해서 내 인생 이렇게 꼴아박았다는 소리 안 하려고, 자기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성경 공부하는 거예요. ‘너희들 내 인생 이렇게 망가져도 무시하지 마라. 나는 말씀대로 산다.’ 이거 대외적으로 비축하려고 갖고있는 거예요.
성경 공부고 뭐고 간에 내가 어려울 때 옆에서 “너 생활비 없지. 내가 월 200만 원 줄게”라고 하면 그 사람이 여호와증인인지 신천지인지 그런 거 묻지도 않아요. 나에게 잘해주면 이거는 천사고 하나님이 보내신 메신저입니다. 그 사람이 비록 종교가 다르고 교단 다르고 아무 문제가 없어요. 그런 거 아무 문제 없어요.
인간이 왜 싸우느냐? 자기 형편이, 꼬라지가 형편없기때문에 그걸 감추기 위해서 대외적으로 싸우게 되어있어요. 인생을 좀 아셔야지요. 학교 다녀온 자기 딸이 받아쓰기했는데 철자가 조금 틀렸어요. 그런데 엄마가 평소와 좀 달라요. “이 철자가 틀렸잖아, 이 멍청아.”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은 엄마가 몇 분, 몇 시간 전에 누구하고 싸운 거예요. 지금 정신이 딴 곳에 가 있으니 분풀이할 데가 없어서 글자 몇 개 틀린 것 가지고 “이 멍청아”라고 욕을 하는 거예요.
사람이 뜻대로 안 되게 되면 그걸 빨리 보충하려고 해요. 만회하려고 하거든요. 그 만회가 제대로 안 되면 분풀이가 되어서 분노가 일어나고 그 분노가 폭발하게 되어있어요. 일종의 보복으로 향락을 즐기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의 마음이 평안이 없고 불안할 때는 그 불안한 티를 바깥으로 쏟아 내게 되어있어요. 안정감이 없을 때는.
하나님 믿어 볼까, 예수 믿어 볼까, 성경 공부해 볼까, 온갖 것을 닦달을 내죠. 사람이 인형을 모으는데 마를린먼로라고 하는 유명한 미국의 케네디와 같이 놀았던 배우가 있거든요. 그 인형들이 있어요. 인형 가게에 그런 인형들이 있지만 막상 마를린먼로는 거기 없잖아요. 그러니까 인간은 항상 우상을 만들게 되어있고, 자기 화풀이를 대상으로 자기의 이상한 이미지를 새롭게 만들려고 해요. 그래서 그걸 통해서 현재의 비참한 내 모습을 감추려고 애쓰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대 인간들은 서로 우정을 나누고 서로 친하게 지내는 것은 서로 각자 집안에 사연들이 있어요. 그것도 괴로운 사연, 숨기고 싶은 사연들이 있는데 그걸 숨김으로써 서로가 서로에게 나를 좀 위로해 달라는 거예요. 교회 오는 목적도 그거 아니겠어요? 하나님이 나를 좀 위로해 달라는 거예요.
이것이 하나님의 율법이 개입된 모세의 명이 개입되지 않고 인간대 인간이 만나서 결속될 때는 항상 서로서로 칭찬하기, 서로서로 위로하기, 서로 돌봐주기로 끝나버려요. 말씀이 없는 곳은. 그래서 교회에서 말씀이 없다는 것은 친목 단체를 의미하는 겁니다. 그걸 상대로 주님께서 전쟁을 일으켜요. 말씀을 앞장세워서 전쟁을 일으키는 거예요.
너무 징징대지마라는 거예요. “뭐 너의 사정이 어떠해서?” “지금 엉망입니다.” “내가 보기엔 엉망 아닌데. 네가 너무 눈을 높였잖아.” 나는 이 정도 되어야 자기답다고 자기 맘대로 높여 놓고 그걸 따라잡으려고 열심히 헌금하고 기도하고 아무리 우리가 망가져도 아직 우리의 본질하고는 멀었어요. 더 망가져야 해요.
더 망가져야 합니다. 세상에 뭐가 내 뜻대로 안 된다고 나에게 자꾸 분풀이하지 마세요. 그 본질을 주께서는 20절에 ‘강퍅’이라고 합니다. 강퍅. 하나님의 전쟁은 뭐냐 하면 우리가 애써 감추고 있는 우리의 본질을 바깥으로 끄집어내는 거예요. 바깥에 있는 건 안에 집어넣고 안에 있는 것을 끄집어내는.
바깥에서 우리가 뭔가를 한다는 것은 안에 있는 것을 점점 더 갈수록 점점 더 깊숙한 곳에 안 들키는 곳에 감추기 위해서 방어벽을 두껍게 갖추는 것을 의미하거든요. 평소에 기도하지도 않다가 기도해 보세요. ‘또 무슨 일 터졌구나. 집안에 일 터졌구나’라고 생각합니다. 강퍅함을 강퍅 그대로 깔끔하게 노출 시키는 그 일을 주님께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율법을 통해서 매일같이 우리를 건드리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얼마나 교만에 교만을 떨고 살아가는가를 보여주시는 거예요. 그럼 그 율법을 통해서 하는 그 원리원칙은 뭐냐? 그게 출애굽기 4장에 보면 나옵니다. 출애굽기 4장 8절에 보면 모세가 나오는데, 모세의 움직임 자체가 율법의 움직임이에요. 모세가 율법과 관련해서 움직입니다. 왜냐 하면 모세의 지팡이는 하나님과 옆에서 동행하고 있다는 표적이기 때문에 지팡이 옆에 있거든 하나님이 옆에 있다고 여기라는 말이죠.
그래서 모세가 일 할 때는 뭐를 자꾸 사용하느냐 하면 지팡이를 자꾸 사용해요. 지팡이를 가지고 강물에 댄다든지, 지팡이를 든다는지, 던지든지, 지팡이를 가지고 반석을 깬다든지 지팡이를 가지고 사용하거든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모세가 혼자 있어도 모세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대외적으로 보이기 위함입니다.
모세가 애굽에 내려가기 전에 역시 지팡이를 가지고 사용합니다. 약간 길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4장에 보면 모세에게 손에 뭘 들고 있는지를 물었고, 모세가 지팡이라고 이야기하니까 그다음은 지팡이를 던집니다. 지팡이를 던지니까 그게 지팡이가 아니고 그게 뱀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모세와 함께 있는 지팡이, 아주 쉽게 이야기하면 모세와 함께 있는 지팡이는 모세와 함께 있는 하나님, 그 하나님이 모세 옆에서 무슨 역할을 하느냐 하면 바로 뱀의 역할을 하면서 모세와 함께 동행하고 있다고 모시면 돼요. 뱀의 역할. 하나님이 뱀이라는 말이 아니고, 그러면 하나님이 악마가 되니까, 하나님이 뱀이라는 말이 아니고 이 세상이 바로 인간들이 흉하게 보는 뱀의 지배를 받고 있음을 동행하시는 하나님께서 딱 붙어서 그것을 모세를 통해서 그걸 까발리는 일을 하게 하신 거예요.
이게 바로 모세를 통해서 보여주는 기적입니다. 기적은 심판성의 노골화라고 정의하신 것이 제대로 정리하신 거예요. 기적은 뭐냐? 이 땅이 심판받아 마땅함을 노출 시키는 것이 기적이에요. 있는데 더 횡재하는 것이 기적이 아니고 만약에 제가 로또를 샀는데, 제가 살 일은 없지만 걸어가는데 바람에 로또가 날려 내 손에 잡혔다면 버릴 필요는 없고 한번 보니까 20억 되었다면 이것이 나에 대한 심판이에요. 나에 대한 심판.
돈 횡재했을 때와 예수 믿을 때와 어느 것이 너의 기분이 좋은지를 우리에게 묻는 거예요. 우리는 20억 없을 때는 예수 믿는다고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고 아주 입에 발린 소리를 하는데 막상 20억이 딱 들어오니까, 지팡이가 뱀 기능을 하니까 주께서 이런 기적을 주셨구나. 무슨? 돈벼락? 돈벼락 맞는 것이 아니고 우리 자신이 평소에 얼마나 강퍅하게 얼마나 추잡스럽게 살아왔는가를 돈 20억을 통해서 노출 시킨 거예요. 20억 좀 주셨으면 좋겠어요. 노출될 때 되더라도 좀 줬으면 좋겠어요. 고생 좀 덜하게. 쓸데 좀 쓰고.
그다음에 손을 내밀어서 품에 넣어 보라 해서 자기가 지팡이 가진 손을 품에 넣어 보니까 문둥병이 되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서 모세 자체가 문둥병이에요. 율법 앞에서는 모든 인간은 죽어 마땅한 문둥병자입니다. 저주받아 마땅한 거예요. 기적은 그 심판성을 노골화시키는 것이 기적이에요.
그 기적들, 이 기적들을 통해서 뭐냐 하면 여호와 전쟁의 본질을 설명합니다. 전쟁이라 하는 것은 잘난 체하는 인간들 강퍅 안 하다고 우기는 인간들에게 너희들이 얼마나 강퍅한 가를 시작부터는 몰라요. 전쟁이 마감하고 난 뒤에 진멸하고 난 뒤에 뒤돌아봐서 ‘아, 강퍅이 들어 있었네’라고 차후에 우리를 다시 한번 보게 하는 작업으로 하나님의 전쟁을 유발시킨 겁니다.
다시 설교 처음부터 하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해답을 갖고있다고 생각하는데, 해답을 갖고있다는 그것은 해답이 아니고, 내 뜻대로 안 될 때 비로소 그것이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해답이었어요. 내 소원대로 내 기도 응답 되지 않을 때, 매사가 내 인생이 내 식으로 잘 풀리지 않을 때 그게 바로 해답이에요.
우리는 그렇게 일 안 되는 그런 인생을 맞이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으로도 족해야 하고, 감사할 정도로 우리는 처절하게 낮아져 있어야 한단 말이죠. 사람이 낮아지는 것이 그렇게 쉽게 되는 줄 아세요. 성경 공부한다고 될 문제가 아니에요. 성경 공부하고 헌금하고 봉사했으니까 내 가정에 좋은 일 있을 거라 여겼는데 있기는커녕 전보다 더 나빠졌을 때 그때의 성경 공부와 기도가 뭐냐, 바로 우리의 강퍅을 교묘히 감추려는 그런 강퍅에 강퍅의 시도를 내가 평소에 지난날에 해 왔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는 거예요.
‘아, 내가 참 간사하게 굴었구나. 주님 앞에서’ 어디 감히 인간이 하나님을 상대합니까? 옆에 있는 꽃나무에 꽃잎 수가 몇 개인지 아십니까? 모르죠? 하나님은 알아요. 우리는 모르잖아요. 가로수 백날 봐도 나무 하나에 꽃잎 수가 몇 개인지 모르잖아요. 그 정도로 우리는 무식해요. 그 무식한 인간이 하나님을 상대해서 뭘 어떻게 얻어 내겠다는 말이에요. 정말 건방 떠는 것이 끝이 없어요.
이것을 다시 정리하면 우리 안에 병이 있어요. 우리 안에 태어나면서 질병이 있습니다. 이건 못 고칩니다. 왜냐 하면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DNA에 의한 질병이기 때문에 이 병을 못 고쳐요. 그래서 주님의 방법은 뭐냐 하면 전쟁을 하는데 무슨 전쟁을 하느냐 하면 얻어맞아 죽어도 싸다고 생각하는 사람만 다 오라는, 나는 병이 있어서 나는 인간이라고 할 수 없다는 사람만 다 오라는, 나는 사람이라고 부칠 가치도 없다는 사람만 다 오라는 전쟁.
거기 올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재주가 자기 잘났다고 하는 재주 외에는 없기때문에 아무도 안 옵니다. 그래서 전쟁을 일으켜야 해요. 전쟁을 일으켜 놓고 다 죽여 버려요. 이방 민족을. 그래놓고 어디를 보느냐 하면 이스라엘 그들을 쳐다봐요. “이스라엘아, 이리와. 너희들 어떻게 이겼지?”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때 이스라엘에서 나오는 정답은 전쟁하기 전에 전쟁 끝나고 난 뒤에 비로소 나올 전쟁 이유가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 그것은 오늘 전쟁의 정답을 이렇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들로 하여금 강퍅게 해서 하나님에게 대들게 만들어서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저주를 퍼부음이 하나님의 정당한 행위인 것을 하나님께 찬미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전쟁을 일으켰습니다”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항상 우리는 시작을 여기서 시작하면 안 돼요. “하나님, 저들은 지옥 가는데 나는 저들이 아니라서 너무나 다행스럽습니다”라고 여기는 거, 그 교만, 강퍅을 찢어 버려야 해요. “저들은 지옥 가는데 우리는 천당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이런 정신머리, 사고방식, 썩어빠진 사고방식 가지고는 하나님을 상대하면 안 돼요.
저들과 똑같다고 이야기해야 해요. 저들과 똑같은 거예요. 저들이 지옥 가면 나도 당연히 지옥 가야 해요. 교회 나오는 식으로 지옥 간다는 것을, 그들은 지옥 안 나오는 식으로 지옥 가지만 우리는 교회 나오는 식으로 지옥 가요. 지옥 가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나온다고 천당 가는 거 아니거든요. 그렇다면 교회는 뭐냐 교회는 바로 말씀, 율법이 있는 곳, 하나님의 뜻이 있는 곳이에요. 모세 언약, 모세의 명이 있는 곳이에요.
왜 우리는 같이 강퍅하고, 같이 강퍅한데 우리는 저주 안받는다는 것은 정말 이상한 일이라고 여겨야 해요. 자기 자신을. 저주 안받는 거. 그것은 강퍅함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전혀 감출 필요가 전혀 없는 인간으로 살아가게 하시는 겁니다. 사람이 혼자 있으면 자기를 감춰야 해요. 그러나 나를 날마다 들춰주시는 누군가가 옆에 계시면 우리는 더이상 나 이런 사람이라고 그 사람을 재낄 필요가 없어요.
나를 낮추고 내 옆에 분은 이런 분이라고 이야기해야 해요. 이번 아가 수련회 할 때 언급한 성경 구절 하나가 바로 창세기 2장입니다. 창세기 2장 끝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어요. 이 말씀 하고 마치겠습니다. 창세기 2장 25절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자기 망가진 인생 보고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기 집에 불난 거 보고 부끄러워하지 않고.
지난번 보니까 인천 순복음교회 활활 타고 있더라고요. 활활. 만약 우리가 인천 순복음교회라면 그 교회 불타는 거 보고 우사스럽고 부끄러워하지 않아야 해요. 자기 인생을 보면서 부끄러워한다는 것은 나는 지금 나 혼자 있다는 것을 그냥 노출 시킨 거예요. 왜 혼자 삽니까? 인간은 혼자 산다는 자체가 그건 살아도 진멸 대상입니다.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말씀과 같이 동행해서 남을 보면서도 그건 남이 아니라 남이라고 하는 것이, 활활 불타는 교회가 우리 교회 고, 항상 남을 볼 때 나와 다를 바 없다는 거, 다만 우리는 구원받기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로 작정 되었기 때문에, 이건 하나님께서 이건 내 솜씨가 내 자랑거리가 아니라 저쪽에 저주가 임해야 될 필연성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로 작정 되었기 때문에 그냥 아무 이유 없이 그냥 사랑을 누리고 있는 거예요.
그 사랑 앞에 우리는 아무것도 한평생 살 때 전혀 어떤 행동을 해도 부끄러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엄연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늘 내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얼마나 어설픈 수작을 벌이고 있습니까. 주여, 있는 그대로 얼마나 우리가 강퍅하고 나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인 것을 노출 시키며 주님 앞에서 늘 감사하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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