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강-여호수아 11장 6~9절(병거와 말 뒷발)20190106-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여호수아 11장 6~9절입니다. 구약성경 336페이지입니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그들로 말미암아 두려워하지 말라 내일 이맘때에 내가 그들을 이스라엘 앞에 넘겨 주어 몰살시키리니 너는 그들의 말 뒷발의 힘줄을 끊고 그들의 병거를 불사르라 하시니라, 이에 여호수아가 모든 군사와 함께 메롬 물가로 가서 갑자기 습격할 때에, 여호와께서 그들을 이스라엘의 손에 넘겨 주셨기 때문에 그들을 격파하고 큰 시돈과 미스르봇 마임까지 추격하고 동쪽으로는 미스바 골짜기까지 추격하여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하고 쳐 죽이고, 여호수아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령하신 대로 행하여 그들의 말 뒷발의 힘줄을 끊고 그들의 병거를 불로 살랐더라”
우리가 지금 구약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늘 느끼는 것은 비현실적이라는 겁니다. 오늘날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는 옛날에 한때 있었던 다툼 이야기를 우리가 왜 이걸 봐야 하느냐고 우리에게 도움도 되지 않는 이야기를 왜 하느냐고 생각할 겁니다. 그것은 이미 우리가 옛날에 고대 민족끼리 전쟁하는 그것을 우리가 학교 역사 시간에 많이 배웠습니다.
운봉고원이라는 곳이 있어요. 어디냐 하면 남원읍 근처 지리산 가까이 있는 고원 지역인데 그게 옛날에 변두리 가야지역이었습니다. 그 600년 되는 고원이 있었는데 거기에 백제와 운봉고원에 있던 가야와 싸움이 일어나서 버티다 버티다 결국 전멸당했는데 백제가 왜 거기를 공격했느냐 하면 거기에 철광 광산이 있었기 때문에 거길 차지하기 위해서 전쟁을 한 겁니다. 여기에 임나설이라고 해서 일본 고대역사 속에 나오고 한국역사에는 나오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이 고대역사를 바라보면서 우리는 이것은 하나의 에피소드라는 느낌을 지울길이 없어요. ‘옛날에 사람들이 자기 지역을 살리기 위해서 다투었구나. 그래서 어쩌란 말이지? 지금 가야국가는 없는데’ 하는 겁니다. 고령가야, 금관가야, 대가야, 전부 지금은 고려, 김해로 다 바뀌었잖아요. 없어요. 없는 이야기를 끄집어낼 아무 근거도 없는데 왜 그걸 알아야 하는가.
유적이 발견된다. 고조선이 어떻고, 청동기 시대, 신석기 시대...이런 것들이 밥 먹여 줍니까? 그게 돈 벌어줘요? 아니잖아요. 최저 생계비가 문제지 청동기 문화, 고인들 그런 건 아무것도 우리에게 실감 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 시대의 산물이기 때문에 그래요. 이 시대의 산물. 우리는 옛날 가야 시대가 아니고 21세기의 생산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관심사라 하는 것은 지금 나에게 이득이 되는 요건을 갖췄을 때는 우리는 관심을 쏟는 겁니다. 그런데 그 고대 전쟁 이야기가 여호수아 11장에 나왔을 때 이 사실에 대해서 우리가 뭐 심각한 관심이나 중요한 대목을 뽑아낸다는 것이 우리의 선입감 때문에 가로막혀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 가로막혀 있는 것을 철거를 해줘야 합니다. 이 성경을 해석할 때는 우리가 21세기 사람이라는 그 선입관과 관심사를 뭘로 바꿔야 하냐면 21세기든 22세기든 하나님의 전쟁에 표적이 된다는 사실, 주님의 영적 전쟁에 표적이 된다는 사실을 일단은 바꿔 줘야 해요. 왜냐 하면 여호수아의 전쟁은 원래 이 땅이 토착민들의 땅이에요. 이스라엘 땅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도적이죠. 남의 땅을 내 땅이라고 억지를 부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누구의 편을 드느냐 하면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 편이에요. 상당히 억지스럽단 말이죠. 자기의 졸개라 할 수 있는 이스라엘을 내세워서 멀쩡히 사람 살고있는 집에 들어가서 집 비워라 하니, 이게 말이 되는 이야기입니까? 지금 살고 있잖아요. 잘 살고있단 말이죠. ‘집 비우세요. 언제까지요? 지금 당장. 안 비우면요? 다 죽여버린다’ 하는 이런 이미지가 하나님 이미지입니다. 구약에 나온 이미지가.
그래서 뭔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크게 오해를 하고 있고 착오를 일으키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해요. 그 착오의 원인은 뭐냐 하면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서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계속해서 압력을 가해서 네가 누구인지를 좀 동네 사람들 옆 사람들하고 비교해서 내가 이렇다고 하지 말고 여호와가 벌이시는 전쟁 속에서 과연 나는 어느 위치에 있는가를 살펴보라고 이 말씀을 주신 거예요.
여호와 전쟁이라는 그 관점. 다 죽여버리고 씨도 남기지 아니하고 다 죽여버리는 그것을 가지고 주님은 뭐라 하느냐 하면 사랑이라고 하거든요. 사랑. 다음 주 수련회 하는데 아가를 합니다. 아가의 주제는 사랑, 아가는 최고의 노래를 사랑에 바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최고의 노래가 사랑인데 그 사랑의 내용이 뭐냐 남녀상열지사예요. 남자 여자 연애하는 내용입니다.
남자 여자 연애하는 이야기를 통해서 무엇과 연결해야 하느냐 하면 싸그리 진멸해야 한다는 잔인무도한 하나님 속에서 사랑을 끄집어내야 해요. 이에 보통 작업이 아닙니다. 우리의 견해는 묻지도 않아요. 우리의 선입관은 묻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그런 남녀의 사랑을 가지고 뭐라 하느냐 하면 음란이라고 합니다. 음란. 세속이라는 말을 붙입니다. 주님이 말합니다. “그렇게 네가 잘 났느냐?”
그래서 이 구약 여호수아를 보려면 일단 우리가 대한민국 사람이라는 것을 국적을 포기하고 이스라엘 국적으로 옮깁시다. 이스라엘 국적으로 옮기면 어떤 현상이 있느냐 하면 역사를 재편해요. 어떻게 재편하느냐 하면 현재 입장에 옹호하는 쪽에서 역사를 재편합니다. 가나안 족속은 죽을 만해서 죽었다는 것. 완전히 일방적이죠. 일방적 해석입니다.
마치 우리가 지금, 마치라는 말은 안되지만, 이미 우리가 천국에 와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천국에 왔을 때 천사가 묻습니다. “너는 왜 천국에 와 있는가?” 그러면 천국 올만 해서 왔다는 말을 아주 거침없이 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 땅에서 세리와 창녀로 살던 사람을 천국에서 만났다면, 강도로 살다가 주님 십자가 옆에서 얻어걸린 강도를 만났다 칩시다.
강도에게 묻습니다. 세리와 창기에게 묻습니다. “너는 왜 천국에 와 있는가?” 천국 올만 해서 천국 왔다고 말을 해요. 천국 올만 해서. 그럼 이 지상에 있는 우리 입장으로는 세리와 창기와 강도는 누가 보더라도 천국 올 만한 사람이 못 된다는 것을 평소에 우리가 우리 자신을 다듬으면서 파생된 결과거든요.
누가복음 16장 이야기입니다. 주님께서 천국을 설명하면서 천국 가는 지혜로운 사람을 대표적으로 누굴 세웠느냐 하면, 주님이 직접 붙이신 명칭인데 ‘충실한 청지기’라고 하지 않고 ‘불의한 청지기’라고 하셨습니다. 불의하기에 천국은 너의 나라라는 겁니다. 불의하기에. 얌체처럼 굴었기에 천국은 너의 나라라는 겁니다.
마태복음 20장에 보면 어떤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호감을 얻었냐 하면 남들은 아침부터 와서 열심히 일했는데 달랑 퇴근 시간 한 시간 전에 일했던 사람, 그 사람은 룰루랄라 아주 기분 째집니다. 그리고 마태복음에 또 나오죠. 혼인 잔치에 누가 가느냐 하면 길에서 놀던 사람, 그들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세자로 ‘아무나’입니다. 아무나 가는 곳.
조건은 누가 정한다? 조건은 저쪽에서 정한다. 주님이 정하는 거예요. 주님이 조건을 정하면 그전에 무슨 조건을 폐기처분 하느냐 하면 내가 나다움에 유용했던 모든 조건들은 이게 폐기할 것을 요구할 때 그게 여호와 전쟁입니다. 주님의 일방적인 조건을 집어넣고 이미 기존에 나의 나다움의 조건을 무장해제시키는 거예요. 그만큼 그것이 하나님의 전쟁 이유입니다.
전쟁의 이유가 안 맞다는 겁니다. 너희들은 안 맞고 너희는 맞다는 거예요. 그러나 지상에서 우리가 평소에 우리 자신을 살리기 위한 입장에서는 주님이 하는 조치는 어처구니없는 겁니다. 사극에 어떤 사람이 대사 하는데 이렇게 대사 했어요. “길가는 과객인데 물 한 컵만 주세요”라고 했어요. 얼른 빨리 지나가면 무슨 말인지 모르겠죠?
원래 컵(cup)이라고 하는 것은 영어거든요. 사극에서 무심코 나왔어요. 물 한 컵만 주시겠습니까? 평소에 내가 살던 사고방식의 대사를 하니 물 한 컵이라는 말이 막 나온 거예요. 마치 사극에 전봇대 나온 것처럼. 우리가 천국 가면서 물 한 컵이라는 컵을 지상에서 내가 나를 지키기 위해서 나답기 위해서 했던 용어들이 툭툭 튀어나오는 거예요.
“그러면 목사님 그것만 고치면 되겠습니까?”라고 이렇게 나오는데 그렇다면 그건 전쟁이 아니죠. 치료죠. 치료. 힐링이고 치유죠. 성경에는 치유나 치료 없습니다. 다 죽여버립니다. 십자가에서 다 죽으라고 했지 언제 “이 부분만 잘 못 되었으니 고쳐라”하는 그런 것은 없습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새끼손가락 때문에 온몸을 다 망칠 수 있겠습니까? 이 말이 안 되잖아요. 그 새끼손가락 하나 살리겠다고 온몸을 다 없앨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회사라든지 기업이라든지 조직사회에서 누구 하나 살리겠다고 나머지를 다 없앤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주님은 반대로 이야기 하죠. 새끼손가락을 양보시키는 겁니다. “오른눈을 빼버리고 오른손을 잘라버려라” 여러분 이것이 잔인해 보이십니까? 참 잔인하죠. 우리가 모르는 전체가 있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학교에서 가정에서 배우는 게 뭐냐 하면 ‘너 개별자만 잘되면 된다’는 이 개별자 의식으로 우리는 교육을 받았습니다. 너만 잘되면 잘 되는 거라는 식으로 교육받았어요. 우병우. 스물네 살에 사법고시 합격한 소년 천재부터 해서 우리 주변에서 칭찬받는 거, 코디 잘해서 서울 의대 들어가는 거, 뭔가 내 가족만 잘 되면, SKY(서울대, 연대, 고대)만 간다면, 하버드만 간다면 무슨 짓이든 다 하겠다는 압박감이 아이를 미치게 만들었잖아요. 드라마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게 문제라는 것이 없어요. 왜냐 하면 전체를 놓치고 있기 때문에, 전체에 대해서 무지몽매하기 때문에, 전체보다 더 중요한 것이 ‘나’라고 보는 겁니다. 나를 희생할 만큼 괜찮은 전체를 우리는 들어 본 적도 없고 사실은 우리는 그런 것을 내 속의 본색이 그걸 거부했죠. 강력하게 거부했습니다.
그러면 나를 지키는 방법이 뭐냐 하면, 바로 말과 병거입니다. 오늘 본문의 핵심은 뭐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기 보면 북쪽 연합군이라고 나오는데 이게 무슨 전투냐 하면 메롬 전투라고 해요, 그 전투에서 포인트가 되는 것이 뭐냐 하면 그 병거를 불사르고 말의 힘줄을 끊어 버리는 겁니다.
이것은 사적으로, 고립적으로 버틸 수 있는 모든 환경을 너희가 끊음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대 가나안 북쪽 연합군들의 싸움에서 도대체 이 싸움의 의미가 뭐냐 하면 큰 것을 알고 있는 여호와의 큰 프레임, 계획을 알고 있는 이스라엘의 입장과 내가 점령한 땅에서 내가 평생 행복하겠다는 소박한 꿈을 쥐고 있겠다는 그 소박함, 사적인 꿈이죠.
이게 우리 사회에서는 그게 존중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보는 겁니다. 우리는 내가 살아가는 것처럼 남을 보기 때문에 그냥 욕심 없이 월급 따박따박 받아서 아주 조그만 아파트, 한 70평 80평 하는 아주 조그만 아파트 한 채 장만하고, 아이는 그냥 자기 실력대로만 가면 돼요. 뭐 서울 의대 그런 곳. 이렇게 살면 나라가 뭐 정권이 바뀌고 뭐가 바뀌더라도 난 거기에 신경 안 쓰고, JTBC도 안 보고, 조선일보도 안 보고, 그냥 소박하게 살고 있다는 그 소박한 꿈 있잖아요, 이런 것들이 범죄가 되고 주님에 대한 모독이 될 줄을 우리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내비게이터라는 기독교 선교단체가 있어요. 제가 몇 년 동안 그쪽에 있는 사람과 교제를 하면서 ‘아, 내비게이터가 저렇게 움직이는 구나’하고 약간 놀랐던 것이 있어요. 뭐냐 하면 그 내비게이터가 하는 일이 성경 본문을 그대로 외워서 시험을 치는 겁니다. 시험을 치면 승진하는 구조로 되어 있어요. 성경 구절을 외우게 하는 거예요. 많이 외우면 높은 자리에 앉는 겁니다.
이게 제가 내비게이터라고 이야기했지만, 일반 선교단체도 그런 걸 많이 해요. 대학생도 많이 하고 어른 되도 하고. 이게 뭐냐 하면 그렇게 외울 때 외우는 목적이 뭐냐 하면 그것이 내 구원을 이루는 병거가 되고 힘줄이 되고 내 말이 된다는 겁니다. ‘나’라는 인간을 구성하는 요건이 뭐냐 하면 나만 잘되면 되잖아요. 나만.
주님의 전쟁은 나만 잘되는 것과 망가진 예수님의 모습과 한번 대조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살기 힘들고 경제가 어렵고 통장의 돈 다 떨어지고 아이들 몸 아프고 애먹게 하고 남편 아프고 아내 아플 때 그 순간 예수님의 살았던 삶과 한번 딱 대조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주님의 생애는요 아래로의 통합이에요. 하나님의 통합이 위로 통합이 아니고 저 높은 곳을 향한 통합이 아니고 저 낮은 곳에서 통합되는 거예요. 예수님이 십자가 죽기까지 복종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이 다 이루심의 유일한 절차가 돼요. 다른 프로세스, 다른 과정은 없어요. 그 길로 가야 생명이 있습니다. 넓은 길로 가면 안 돼요. 좋은 길로 가야 해요. 그런데 누가 자진해서 좁은 길로 갑니까? 이거는 미친 짓이죠. 안 돼요, 인간은. 인간은 자기 손해 보는 짓은 절대로 안 할 겁니다. 내가 그만큼 나 살기 위해서 노력했던 것들이 많이 있거든요.
살아온 것이 뭐냐 하면 내가 그나마도 이 만큼이라도 애썼기 때문에 이렇게 살았다는, 나는 나의 결과물로 자꾸 그것을 증명하고 싶어 하기때문에 스스로 자기 힘줄과 자기가 필요하다고 여기는 것을 스스로 폐기처분하는 일은 없습니다. 이거는 정말 주님이 오셔서 나의 멱살을 잡고 전쟁을 일으켜서 내가 완전히 패배자가 되는 경우 같으면 우리가 구원받죠.
아침에도 이야기했지만 믿음 있으면 안 돼요. 믿음 없어야 해요. 우리는 믿음 없음 외에는 내놓을 게 없기때문에 믿음 없음이 믿음 있음이에요. 그게. 그리스에 안 가봤지만, 한번 가보고 싶긴 해요, 그리스에 가면 아리스토텔레스, 소크라테스 유적지, 뭐 아테네 그런 거 보는데 사람들이 뭘 놓치느냐 하면 이 그리스가 과거 역사 속에서 얼마나 이슬람이나 다른 곳에서 얼마나 핍박을 많이 받았는가 그리고 그걸 지켜내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는가는 다 잊어버려요.
그리스라는 섬에 그레테 섬이 있는데, 사도행전에 나오는 섬이에요, 그 섬에서 신부들이 뭘 차고 있느냐 하면 권총을 차고 있어요. 신부인데. 그 신부가 지키는 것은 바로 그리스의 국기를 지키는 겁니다. 거기에 갔던 리포터가 물어요. “만약에 이 나라에서 국기를 훼손하면 어떻게 되지요?” 그 사람이 “권총 맞고 죽지요”라고 해요.
2차 세계대전에 군인들이 와서 그레테 사람들이 반항하니까 보복하기를 모든 남자와 1킬로 바깥에 모든 남자를 다 죽이라고 해요. 마치 베들레헴 이야기 같아요. 다 죽이라고 해요. 그래서 내 나라와 내 국가는 내가 지킨다고 해서 신부들이 권총을 찰 뿐만 아니라 이 그레테섬에 권총과 무기의 숫자는 남녀노소 모든 숫자보다 두 배나 많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은 뭘 하느냐 하면 늘 야외 사격장에서 총 쏘는 연습을 해요. 내 나라 내 섬을 내가 안 지키면 아무도 지킬 사람이 없다는 거예요. 그것이 바로 믿음이에요. 그게 바로 교회에서 가르치는 믿음이라고요. 내가 믿지 않으면 아무도 믿지 않는다는 그게 믿음이라는 거예요. 그게 바로 기독교라는 종교에서 유통하고 있는 믿음이에요.
그래서 지옥 가는 거예요. 믿을 놈은 나밖에 없는 거예요. 믿을 놈은 나밖에 없는 거예요. 내가 믿는 믿음만 믿지 그냥 주는 믿음은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거예요. 왜냐, 내 조건에 안 맞으니까. 나를 폐기하고 나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믿음은 애당초 우리 집에 들어오지 말라는 겁니다. 모든 걸 놔버리라는 말을 못 믿겠다는 거예요. 왜? 믿음이 없어서.
재미있지 않습니까? ‘정말 물 한 컵 주세요’와 똑같은 거예요. 뭔가 천국 가기 위해서 믿음이 필요한데 그 믿음의 내용은 전부 다 이 땅에서 지옥 가는 용어와 개념들로 가득 연결 연결되어 있어요. “주여 제가 믿나이다” 그러면 넣어줍니까? 앞에를 문제 삼습니다. “네가 누가냐”라는 거죠. “나요? 그냥 나 지요.”“아니야. 너는 나를 핍박하는 자다”
예수님이 사도바울에게 제일 먼저 찾아와서 가장 먼저 한 것은 내가 어떤 예수인지를 그냥 말한 것이 아니고 내가 이런 분이라고 전지적으로 말한 것이 아니고 너와 나를 관련시켜 버립니다. 나는 너를 경유 하지 않으면 파악될 수 없는 나인데 어떤 나냐 하면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는 말이죠. 네가 살고자 하고 구원받고자 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그 자체가 나에게 핍박 핍박으로 돌아왔다는 겁니다.
십자가에 상처받으신 예수님을 믿어야지 왜 멀쩡한 우리 자신을 믿으려고 해요. 그건 양육이고 교육이고 학원 강사에게 듣는 거예요. 어디 공인중개사 시험 칠 일이 있습니까? 천국에는 그런 시험 치지 않습니다. 시험도 필요 없어요.
설교 다시 하겠습니다. 세리와 창기가 그리고 강도가 지금 천국 갔습니다. 묻습니다. “당신은 왜 천국 왔습니까?” “천국이 올 만해서 내가 갈 만한 나라가 이 나라입니다. 내가 갈만한 나라가 이 나라입니다. 죄인들의 집합소가 이 나라입니다. 이 땅에서의 변화는 내가 잘난 체하다가 졸지에 죄인으로 바뀐 겁니다. 내가 미친 거지. 내가 왜 죄인이에요?” 그러나 내가 죄인이 아닐 거라는 그것이 내가 악마에게 속은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발견할 때 죄인 맞는데...죄인 맞거든요.
춘향전의 한 대목에서 전에도 이야기 드렸지만, 춘향이가 이 도령을 봅니다. 이게 아가서 내용과 비슷하거든요. “이리 오너라 앞태를 보자~ 저리 오너라 뒤태를 보자~사랑 사랑 내 사랑이여~” 제가 아가서 수련회 공부를 하면서 제일 난해했던 것은 여자도 나이를 먹는다는 사실을 아가서에서 누락시키고 있어요.
이뻤겠지요~한때. 그러나 나이 들면 안 이뻐요. 팩트입니다. 안 이뻐요. 호르몬 작용 때문에 이쁘질 않아요. 실례가 될지 모르지만 맞는 말이에요. 너는? 이라고 물으면 마찬가지예요. 안 멋져요. 안 이뻐요. 그러나 용서가 우리의 과거를 재편합니다. 그것을 성경에서는 과거완료라고 하고 그걸 중간 태로 사용하면 이미 확정되었다는 겁니다.
“이쁘고 안 이쁘고는 네가 판단할 문제가 아니고 내가 이쁘다면 이쁜 거야. 이쁘지 않은 것 다 죽이고 이쁜 것만 남겨서 천국 보낸다”라는 조건에 부합되도록 우리는 평생을 그 조건에 맞춰서 우리는 그동안 살아왔습니다. 내 인생, 내 조건 맞춰서 온 것이 아니고 주님에 맞춰서 살아온 거예요. 그걸 가지고 오늘 본문에 붙이심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6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그들로 말미암아 두려워하지 말라 내일 이맘때에 내가 그들을 이스라엘 앞에 붙였으매” 여기 이스라엘에다 세리, 창기, 강도를 집어넣어 보세요. “내가 그들을 세리와 창기와 강도들 앞에 붙였노니” 소위 잘났고 잘난 인간들은 다 지옥 가라는 전쟁을 주께서는 벌써 시작하고 있습니다.
죄지으라는 말이 아니고 죄짓기 이전에 이미 우리는 죄인으로 다뤄지고 있다는 것 을 우리는 무한한 영광으로, 이런 죄인을 용서해 주신 이 불의한 청지기 같은 나를 구원시키신 것을 큰 영광으로 최고의 지혜로 사용한 것입니다. 이제 불의한 청지기 이야기하고 마치겠습니다. 불의한 청지기가 분명히 자기가 잘못한 것을 알기 때문에 자기의 지혜에 대해서 칭찬을 누가 하게 된다면 그 사람에게는 최고의 보람이고 자랑거리이고 영광입니다.
나 같은 것을 구원했다는 거, 이것을 그 원리 그대로 적용하기 위해서 주께서는 십자가 지시고 지신 채로 우리에게 와서 나는 너 때문에 핍박당했다고 찾아오실 때 그 찾아오심의 축복 외에는 더 큰 축복 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만 자랑하고 십자가만 뽐내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지금도 전쟁 중인 것을 우리가 몰랐습니다. 소박하게 사는 것이 의롭고 내 영토 내가 지키는 것이 착실한 줄 알지만, 그것이 속임수이고 그것이 지옥 생활로 간다는 사실을 우리는 왜 진작 몰랐는지요. 이제는 주신 것까지도 거저 주시는 주님의 용서에 표시이고 흔적인 것을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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