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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전쟁(수10;28-30) 181223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8. 12. 24. 07:36
2018-12-23 14:55:52조회 : 26         
   낯선 전쟁 181223이름 : 이근호 (IP:119.18.87.190)   

낯선 전쟁(여호수아 10:28-30)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NInDF2siUHU, Hit:2
 이근호18-12-23 15:43 
낯선 전쟁   

2018년 12월 23일             본문 말씀: 여호수아 10:28-30 

(10:28) 그 날에 여호수아가 막게다를 취하고 칼날로 그 성읍과 왕을 쳐서 그 성읍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사람을 진멸하여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하였으니 막게다 왕에게 행한 것이 여리고 왕에게 행한 것과 일반이었더라 

(10:29) 여호수아가 온 이스라엘로 더불어 막게다에서 립나로 나아가서 립나와 싸우매 

(10:30) 여호와께서 또 그 성읍과 그 왕을 이스라엘의 손에 붙이신지라 칼날로 그 성읍과 그 중의 모든 사람을 쳐서 멸하여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하였으니 그 왕에게 행한 것이 여리고 왕에게 행한 것과 일반이었더라 

전쟁은 하다보면 성질나서 잔인하게 상황이 전개됩니다. 하지만 아예 대놓고 “한 사람도 살려두지 말아라”라는 것은 인간의 폭력성을 하나님께서 두둔하고 나선 느낌을 줍니다. 그렇잖아도 보다 잔인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성격인데 하나님께서 나서서 편을 드는 것 같습니다. 

‘사랑과 자비가 넘치는 하나님 이미지’하고는 잘 어울리지 않아보입니다. 만약에 이런 하나님의 명령에 이스라엘이 주저하게 된다면 이는 이스라엘 본인들이 이스라엘의 성격을 모르고 있다는 말이 됩니다. 이스라엘은 본인들의 전쟁을 벌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전쟁입니다. 

하나님의 전쟁의 특징은 ‘보이지 않는다’데 있습니다. 인간의 전쟁은 보고 판단하는 전쟁입니다. 그런데 이 ‘본다는 점’ 때문에 자신들이 마치 자동적으로 이스라엘인양 착오를 일으킵니다. 사실상 보이는 식으로 이스라엘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 계속해서 ‘보이는 이스라엘’로 넘어오는 바가 성립되어야 합니다. 

이 작업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적들을 처단케 하시는 겁니다. 구원의 길, 실은 없습니다. 천국의 길도 없습니다. 십자가라는 것도 없습니다. 이 ‘없음’을 전제로 했을 때, 비로소 제대로 된 구원의 길과 천국과 십자가와 이스라엘이 나타납니다. 쉽게 말해서 오늘 본문에서 살해당하는 이방민족들이 내일은 이스라엘 자신들이 될 수 있습니다. 

즉 누구나 마땅히 하나님에 의해서 살해당해야 합니다. 지금 전쟁의 주체자는 이스라엘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염두에 둔 이스라엘을 성립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로 하여금 이스라엘에 달려들게 하시는 겁니다. 이런 구약의 원칙에 신약에 적용시키면 이러합니다. 

흔히들 ‘십자가를 통해서 구원된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십자가 구입에 나서게 됩니다. 구원되기에 적절한 십자가를 나름대로 구상하게 됩니다. 그렇다보니 사람들마다 십자가 의미가 다 다르게 됩니다. 십자가는 특정 모델을 가져다가 자기에게 장착하는 식으로 구원을 성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 사건으로 직접 다가와야 합니다. 십자가 사건이란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가치를 다 말살하시는 사건입니다. “일체 너에게는 그 어떠한 가치도 없다”를 선언하는 것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즉 “너는 구원될 필요없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에게 있어 원수라는 것은 딴 게 아니라 “나는 꼭 구원되어야 돼. 나는 구원될 가치있어”라고 우기는 겁니다. 

바로 이 우김을 하나님께서는 가차없이 제거해버릴 때, 비로소 우리는 구원을 경험하게 됩니다. 즉 구원이나 천국의 길이나 이스라엘이나 모두다 항상 방해물이 늘 들끊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특히 그 중의 우리 자신이 가장 큰 장애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은 세상에 보내어 해체시켜 버립니다. 

나 홀로 잘났다는 식으로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음을 배우는 겁니다. 즉 이스라엘은 함부로 들어가는 곳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신명기 23:1-6에 보면, “신낭이 상한 자나 신을 베인 자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사생자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십대까지라도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그들에게 속한 자는 십대뿐아니라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그들은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떡과 물로 너희를 길에서 영접하지 아니하고 메소보다미아의 브돌 사람 브올의 아들 발람에게 뇌물을 주어 너희를 저주케 하려 하였으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사랑하시므로 발람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그 저주를 변하여 복이 되게 하셨나니 너의 평생에 그들의 평안과 형통을 영영히 구하지 말지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여호와의 총회’의 엄정성과 그 총회가 완전에 완전을 기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손에 맡기시지 않고 친히 만들어내신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진멸’이라는 원칙이 중요합니다.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다 죽임’의 의미는 하나님 앞에 인간의 실존이 그러하다는 겁니다. 

이 하나님의 죽음의 취지를 아는 자들이 진정 이스라엘입니다. 그들이 죽였던 바로 그들은 자신들을 위하여 죽어야한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여 죽어야 하는 자들인 겁니다. 이스라엘을 환대하지 않았든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들은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합니다. 

이 사실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순수성을 유지하는 원칙은 역동적으로 갖추어진 셈입니다. 그렇다면 구원은 존재의 연속이 아니라 우발적 사건의 이어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구원의 존재를 움켜질 자들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신약적으로 말해서 십자가를 늘 소지할 자격자는 인간 가운데 아무도 없습니다. 

도리어 십자가가 성도를 그때그때마다 생산해냅니다. 기존의 모든 인간들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죽임으로서 가능한 일입니다. 죽여나가는 그 일이 곧 이스라엘의 윤곽이 드러나는 일이기도 합니다. 존재 구원이 아니라 사건 구원에 관해서 잘 드러나는 장면이 다니엘 3장에 나오는 ‘다니엘 세 친구의 불 속에 빠지는 사건’입니다. 

“이 사람들을 고의와 속옷과 겉옷과 별다른 옷을 입은 채 결박하여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질 때에 왕의 명령이 엄하고 풀무가 심히 뜨거우므로 불꽃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붙든 사람을 태워 죽였고 이 세 사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결박된 채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떨어졌더라”(단 3:21-23) 

이들 다니엘 세 친구는 자신들이 이런 식으로 죽게 된다는 사실을 사전에 미리 대비하거나 준비한 일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우상에게 절하지 않는다는 것도 돌발적인 사태에 해당되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서 이들은 의도적으로 순교하기 위해 나라의 법에 도전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오히려 국가가 이들에게 붙여지는 상황을 유발한 겁니다. 이를 통해서 ‘죽게 된 자만이 진정 산 자다’는 원칙이 수립됩니다. 우리 인간들에게 미리 죽게 된 상황이 찾아든다면 마지막 순간에 가서 누구도 급하게 인생의 핸들을 사는 쪽으로 돌리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그 어느 누구도 마땅히 이스라엘 될 자격자는 아닙니다. 구원은 늘 우연이기에 하나님에게만 감사하고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아예 나의 것을 상정하지 않고 인생을 살게 하옵소서. 내일이 없듯이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18-12-23 22:27 
216강-여호수아 10장 28~30절(낯선 전쟁)20181223-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여호수아 10장 28~30절입니다. 구약성경 333페이지입니다. 

“그 날에 여호수아가 막게다를 취하고 칼날로 그 성읍과 왕을 쳐서 그 성읍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사람을 진멸하여 바치고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하였으니 막게다 왕에게 행한 것이 여리고 왕에게 행한 것과 같았더라, 여호수아가 온 이스라엘과 더불어 막게다에서 립나로 나아가서 립나와 싸우매, 여호와께서 또 그 성읍과 그 왕을 이스라엘의 손에 붙이신지라 칼날로 그 성읍과 그 중의 모든 사람을 쳐서 멸하여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하였으니 그 왕에게 행한 것이 여리고 왕에게 행한 것과 같았더라” 

여기 붙였다는 말 나오지요. 이스라엘은 파리채 그리고 이스라엘 앞에서 눈에 보이는 그 토착 민족들은 파리. 하나님께서 전기로 파리를 잡는 전기 파리채 있잖아요, 그처럼 파리가 와서 달라붙어서 알아서 진멸되고 죽게 되는 이러한 이상한 현상들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 진멸이라는 말이 오늘 본문 28절에서는 뭐라고 표현되느냐 하면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했다”로 되어있어요. 다 죽여 버린 거예요. 그렇게 몰살시키는데 그렇게 되면 남는 것은 이스라엘만 남겠지요. 그런데 이게 상당히 인간적인 면에서 너무 매정하고 참혹하게 누구를 살해한다는 느낌이 들 겁니다. 

하나님이 뭐 사랑의 하나님이니 자비의 하나님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그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통해서 이방 민족에게 보여주었던 하나님은 살벌한 하나님, 사정없는 하나님, 봐주기 없는 하나님, 오직 이스라엘과 섞이지 않기 위해서 철저를 다 기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이 친히 이스라엘과 더불어 전쟁을 벌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일종의 말이라고 치면 그 말 타시는 분은 누구냐 하면 하나님이 말을 타시고 전쟁에 나가서 그 이방 민족들을 다 살해합니다. 그러면 그렇게 살해하는 이유가 뭐냐. 문제는 그 땅이 이미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이라고 규정을 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약속의 땅은 약속된 사람만 거기에 거주하게 되어있어요. 다른 사람은 거기 거주 못 합니다. 약속된. 

그러면 그들이 약속을 믿으면 될 것이 아니냐고 하는데 약속이 없어요. 이게 어려운 거예요.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교회에 와서 저에게 “어떤 사람이 구원받습니까?” 하면 보통 “십자가를 믿으시면 구원받습니다” 하지요. 문제는 그쪽에서 “십자가를 믿습니다”라고 이야기를 해요. 그러면 저는 “십자가 없는데요”라고 하죠. 

십자가가 서문시장에서 한 근에 얼마 하는데요? 백화점에서 십자가 요즘 얼마나 합니까? 십자가가 없는데요. 없어요. 십자가 있으면 구입해서 하면 돼요. 안 그러면 택배로 보내든지, 홈쇼핑에서 전화번호 눌러서 하면 되는데, 십자가 있으면 구해서 나에게 집어넣으면 되는데 십자가가 없어요. 없는데 구원은 받고 싶어 환장해서 “십자가 믿습니다”라고 할 때는 지금 헛발질하고 있는 겁니다. 

십자가를 가장 쉽게 설명하는 방법들 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 이 십자가가 하나님의 꿈입니다. 예수님의 꿈이거든요. 예수님의 소망이었고 완성하신 건데, 우리가 남의 꿈을 수입해서 쓸 수 있습니까? 내 꿈도 다 잊어버리는데 남의 꿈을 내 것으로 만들 수가 없어요. 십자가는 예수님 고유의 것입니다. 본인의 것이에요. 본인 것을 내 것으로 가져와 그것으로 구원받겠다는 건 터무니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어떻게 되느냐, 오늘 본문에서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하고 다 죽였다고 했잖아요. 토착민들. 그 죽은 사람들 중에 우리를 포함 시키면 돼요. 그러면 이해가 되는 겁니다. 십자가를 가져오게 되면 안 죽은 상태에서 십자가 덕분으로 버티게 돼요. 그런데 진짜 십자가는 내가 소유할 대상이 아니고 그 십자가가 나를 살려주지 않고 죽여버리는 십자가이기에 비로소 우리는 십자가 안으로 쑥 들어온 샘이 되는 겁니다. 

십자가 목걸이 해서 달랑달랑 달고 다는 것이 십자가가 아니라 십자가는 십자가의 고유한 능력이 있는데, 그게 성령의 능력인데, 그 능력이 나를 덮쳐버리면 나는 그 안에서 죽고 예수님에 의해서 십자가만 자랑하는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거듭 태어난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거듭 태어났다는 말은 처음에 십자가로 인해서 구원시키는 그 능력이 반복해서 우리에게 제공됨으로 가능합니다. 반복돼서 하는 거예요 

자전거 타는 것이 좋은 예가 되는데 한번 자전거를 타고 그다음 내일 되면 다 잊어버리는 그런 것이 아니라 완전히 자전거 타게 되면 자전거라는 그것이 몸에 배서 그다음 반복해서 탈수록 자전거 타는 요령들이 내 안에 발생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 밖에 있는 십자가가 나를 공격하면서 들이닥치게 되면 이제부터 내가 제2의 십자가, 제3의 십자가가 되어버려요. 

십자가를 믿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와 한 덩어리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것을 가지고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치는 게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그냥 말이에요. 말 타신 분이 저 인간들을 진멸하게 하는 거예요. 그럴 리는 없겠지만 이스라엘 사람들 진멸하는데 저 맞은 편에 적들이 가만히 보니까 같은 고등학교 동창생이었다면 진멸하기가 주저되지요. “어, 친구야~” 하면서 죽여버리면 말이 안 되잖아요. 

내가 알아서 저 사람을 구원할 자니까 내가 내 것으로 삼고 아니면 버리고 이런 건 안 돼요. 알라딘이라는 인터넷 서점에 보면 이런 게 나오잖아요. 쇼핑도 그렇고. ‘장바구니’라는 게 있지요. 필요한 건 바구니에 담고 그러잖아요. 우리는 누구를 내 바구니에 담을 수가 없어요. 전도한다는 것은 또 한 사람 꽂혀서 등록시켜서 내 업적 책에 집어넣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그럴 능력이 없어요. 

내가 주님 앞에 살해당하듯이 그 사람도 주님에 의해서 살해당한다면 우리는 다 같은 동지가 되는 겁니다. 내가 죽이는 건 아니에요. 주님이 알아서 기도할 때 그 사람을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 주는 겁니다. 제가 한 이야기가 상당히 낯설게 느껴진다면 신명기 23장 3절에서 6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와요.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그들에게 속한 자는 십 대뿐 아니라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라고 되어있습니다. 

여기 보면 여호와의 총회가 나옵니다. 여호와의 총회. 다른 교회 같으면 다음 주에 총회 한다고 난리입니다. 목사 월급 정하고, 선교비 정하고, 임직 새로 할 사람 정하는데 우리교회는 어제도 새날이요, 내일도 새날이라 달력 완전히 무시하고, 몇월 며칠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왜냐 하면 내일까지 살지 그건 아무도 보장 없거든요. 나이 어리다고 나중에 죽는 게 아니거든요. 그건 보장 못 해요. 항상 날마다 새롭게 모이고 새롭게 할 뿐이고, 다음 날 되면 확 빠질 수도 있고 들어올 수도 있고 그건 주님 소관이기 때문에 회의한다는 게 의미가 없거든요. 

그런데 여호와의 총회라는 것은 이스라엘을 두고 이야기합니다. 이스라엘 총회에 암몬 사람 모압 사람뿐만 아니고 1-2절에 보면 “고환이 상한 자나 음경이 베인 자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사생자들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십 대까지 그렇고,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한다”라고 되어있어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이런 사람은 거룩한 천국에 들어오지 못한다는 조건 하에 신체의 남성 생식기에 문제가 있는 사람, 출신이 사생자인 사람, 그런 사람은 총회에 못 들어오고 모압과 암몬 사람은 총회에 못 들어오는데 그 이유가 4절에 나옵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나올 때 떡과 물로 너희가 길에서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메소포타미아의 브돌 사람 브올의 아들 발람에게 뇌물을 주어 너희를 저주하게 하려 하였으나”라고 되어 있어요. 

“하나님께서 너를 사랑하시므로 발람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다”라고 되어있어요. 여호와의 총회라 하는 것은 역시 마찬가지로 없는 겁니다. 없는 거예요. 지금 없다는 말을 여러 개 했지요. 십자가가 없고, 여호와의 총회도 없고, 한 가지 더 이야기하면 천국 가는 길은 없어요. 

없다는 말은 뭐냐,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내가 저걸 보고 “어, 저기 있네” 하면서 내 손으로 구입해서 행함으로 끄집어 내서 내 것 만들 대상이 아니라는 뜻이에요. 그러면 대상이 아닌데 천국 가는 사람이 있고, 길이 있고, 그리고 전쟁이 있고, 총회가 있다는 말이 뭐냐 하면 여기서 사건이 발생 되어야 합니다. 우연한, 우발적인 사건. 

예를 들면 설교가 굉장히 어려워져요. 이건. 이건 왜 그러냐 하면 예를 들어서 ‘길이 없다’라고 할 때, 천국 가는 길은 없어요. 천국 가는 길이 없는데 주님에 의해서 “이 적들을 쳐라” 하시니까 여호와를 모르는 우상숭배 하는 사람들을 칠 때, 치는 현장에 보면 없던 길이 생깁니다. 없던 길이. “당신은 새로운 무기를 장착했습니다”라고 하듯이. 

그걸 제거할 때, 이 세상에는 길이 있는데 인간에게는 안 보여서 없는 거예요. 그런데 그 길을 누가 막고 있느냐 하면 바로 쳐야 될 그들이 가로막고 있는 거예요. “너는 나와 한편이잖아. 같은 마음이잖아. 우리 여호와 생각하지 말고 우리 인간들 끼리 인간의 정과 관계를 가지고 한번 맺어보자”라고 하는데 인간의 관계 때문에 가로막혀 있는 것이 천국 가는 길이에요. 

그 관계를 재조정해야 합니다. 복음으로 그 관계를 엮으면 돼요. 복음으로 그 관계가 엮이려면 복음이 십자가 복음이기 때문에 “우리는 둘 다 이미 하나님의 죽은 자인데 매일같이 주께서 살려낸다”라고 예수님을 경유 해서, 하나님을 경유 해서 하나님의 뜻으로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그 사람은 자기주장에서 벗어난 사람이라고 간주 되어서 서로 서로가 복음으로 연결이 되어있습니다. 그게 바로 여호와의 총회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생자나 이런 사람들은 그 신체 가지고 못 옵니다. 못 오지만 그들이 그들은 못 온다는 것을 알고 그들을 제거하든지 배척한다면 그 배척한 사람에 의해서 여호와의 총회라는 것은 순수한 사람만 들어온다는 것이 새롭게 사건으로 드러나게 되어있어요. 말을 해놓고도 참, 이게 너무 어려운데. 

아주 쉽게 말해서 우리는 아는 사이라고 해서 봐주는 건 없다는 겁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이 땅에서 내가 가지고 있는 것 가지고 살겠다는 것을 주께서는 용납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땅에 있는 사람들은 전부 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살겠다는 사람 외에 다른 사람은 없어요. 그렇다면 여호와의 총회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존재하지 않지만 그런 자를 모은다고 했을 때, 자기주장이 아니라 주님의 주장을 경유 해서 이야기하기 때문에 그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라 할 수 있지요. 아까 하신 말을 다시 이야기하면 애굽에서 나와서 광야를 지나면서 이스라엘 사람이 힘들어했을 때 암몬과 모압 사람들은 그들에게 물도 주지 않고 떡도 주지 않고, 영접하지 아니했습니다. 그것 때문에 그들은 여호와의 총회에 못 들어옵니다. 

그러면 여호와의 총회는 뭐냐 하면 누구를 대우하라는 이야기인데 누구를 대우하느냐면 하나님의 이스라엘 사람을 대우하라는 거예요. 그러면 이스라엘 사람을 어떻게 대우하느냐. 이스라엘 사람은 없어요. 없는데 주님께서 그들 눈앞에 한 떼거리가 몰려오는 사건을 보게 하는 겁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 사람들이 살고자 했던 사람이 아니고 그 사람들은 한 떼거리로 40년 동안 다 죽어버리고 나머지 하나님에 의해서 새로 발생 된 사람을 이스라엘이라고 지금 언급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건 하나님에 의한 사건에 의해서만 이스라엘 되는 겁니다.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제거된 인간, 천국 가는 원래 인간은 보이지 않는데 제거된 인간만 있는데, 제거된 인간을 제거할 때 비로소 원래 인간이 그 뒤에 까꿍 하고 등장하는 거예요. 

내가 날마다 칼 가지고 나를 베 버릴 때 까꿍 하면서 주께서 준비한 진짜 구원받은 내가 등장한다는 말입니다. 그걸 날마다 자기를 부인한다고 하고 다른 말로 칼로 자기의 목을 치는 거예요. ‘나 아니고 예수님 때문에 살아가고 있습니다’를 날마다 인정하는 겁니다. 지금 표정들 보니까 그래도 모르겠다는 표정이죠. 

그렇다면 다니엘 3장 22절을 보시면 ‘아, 그런 뜻으로 이야기했구나’라고 생각하실 겁니다. 3장 22절에 보면 다니엘의 세 명의 친구가 나오는데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 세 사람이 우상숭배를 안 해서 왕의 명령에 의해 7배나 뜨거운 용광로 풀무 속에 던져 넣으라 해서 던져 넣었습니다. 

21절에 보니까 “그 사람들을 겉옷과 속옷과 모자와 다른 옷을 입은 채 결박하여 맹렬히 타는 풀무 불 가운데에 던졌더라, 왕의 명령이 엄하고 풀무 불이 심히 뜨거우므로 불꽃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붙든 사람을 태워 죽였고” 세 친구들을 붙든 소방대원이 있었는데 방화복 다 입었는데 얼마나 불이 뜨거웠던지 그 사람이 타버렸어요. 관계되는 공무원이 죽었다니까요. 

불꼿이 다 태워 죽였고 “이 세 사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드고는 결박된 채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 떨어졌더라” 이게 세 사람이 그렇게 노린 게 아니에요. ‘극적으로 순교해 볼까?’ 하면서 자기가 드라마틱하게 만든 것이 아닙니다. 그냥 들이닥친 거예요.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적들은 그냥 들이닥치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저런 적들을 물리치겠다’라는 생각을 할까봐 그냥 급작스럽게 들이닥치게 되면 이스라엘은 ‘아이고, 저런 적은 우리가 못 이기는데...어, 이겼네.’ 이게 바로 아까 말한 파리채와 파리의 관계란 말이죠. 이제 이해되시죠? 내가 저 사람을 이길 만해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그냥 들이닥치는 거예요. 

요즘 바둑대회 할 때 인공지능이 하는 중개방송이 같이 떠요. 보게 되면 두 상대 선수 중에서 누가 이길 확률이 몇 퍼센트인지 딱 뜹니다. 인공지능이 사람보다 더 바둑을 잘 두니까. 중국 선수 탕웨이싱하고 우리나라 1등인 한국 선수가 둘이 붙는데 중국 선수는 이길 확률이 90 퍼센트이고 우리나라 선수는 10 퍼센트였어요. 

결과는 우리나라 선수가 이겨서 결승전에 올라갔습니다. 바둑둘 때 인공지능이 예측한 것이 뜰 때, 인간들은 예측을 못 해요. 인공지능은 도사니까 예측하지만, 인간들은 예측을 못 해요. 한 수 한 수 놓을 때뿐이에요.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이미 다니엘 세친구를 구원하기로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구원방법에 대해서 미리 예측을 못 해요. 칼을 간다든지 미리 소방 옷을 준비하든지 이런 준비를 미리 할 수가 없어요. 파리가 와서 붙이심에 죽었다는 말은 파리가 저절로 와서 저절로 죽는 길로 가는 거예요. 이스라엘은 가만히 있었는데 자기들이 알아서 기어들어 와서 죽는 겁니다. 그때 비로소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되는 거예요. 

이스라엘은 강하다가 아니라 이스라엘은 주님과 함께 계시다는 것을 티 내고 표 내는 것이 성도고 이스라엘입니다. 주께서 너는 성도 맞는 것을 주께서 너와 함께 있다는 것을 티 내기 위해서 돌발사태가 일어나요. 우리가 예측한 사태 같으면 그래서 우리가 대비를 하게 되면 내 힘으로 그 역경을 극복해 나가게 돼요. 

그거는 성도 아닙니다. 그건 자기 자랑하게 되어있어요. 우리가 성도라고 했을 때 바로 그러한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우리가 성도라는 증거가 내 인생 굽이굽이 역경을 이겼다는 것이 증거가 아니라, 나는 아무리 봐도 신자 아닌데 신자라는 본인만이 아는 돌발사태가 있어요. 

그럴 때 나는 나 자신이 신자라는 것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십자가가 내 인생에 돌발적으로 개입하셨다는 것을 아는 겁니다. 그런데 다니엘 세친구가 그게 좀 심해요. 그 개입이 깜놀, 정말 깜짝 놀랄만해요. 다니엘 세친구가 나쁜 짓 한 친구가 아니에요. 이 사람들은 그냥 착실하게 기도하고 착실하게 말씀대로 사는 사람인데 그러나 결과는 불속에 들어가서 죽게 됩니다. 

이 인공지능의 결과는 죽게 된다는 겁니다. 100퍼센트 죽습니다. 그런데 인공지능을 꺾어 버립니다. 100퍼센트 살아났습니다. 그럴 때 다니엘 세친구들이 자기의 능력과 자기의 실력을 자랑하겠습니까? 자랑 못 하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오히려 더 놀라 버려요. ‘주여, 주께서 일을 벌이셨지요’라고 하며 주님의 실존, 주님의 실재함을 절실하게 느끼는 겁니다. 

‘아, 인생 나만 사는 게 아니구나. 내 곁에 누가 계시는구나. 그래서 그분이 나를 붙들고 십자가만 자랑하라고 내가 예측 못 하는 어디에도 가시는구나.’라고 인생 굽이 굽이에서 느끼게 되는 겁니다. 깜짝 놀라지요. 그러면 에스더가 이야기한 것처럼 우리가 죽게 될 때 어떻게 됩니까? 죽게 되면 정답은 이미 성경에 나와 있어요. 

죽게 되면 죽으세요. 죽게 되면 죽으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죽게 되면 갑자기 핸들을 틀어버리죠. “안돼!” 하면서 핸들을 틀어버립니다. 트세요. 트시면서 우리가 이방 민족인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내가 구원받고자 하는 시도 자체를 좌절시키는 그 방법으로 내가 성도라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 겁니다. 

내가 예상한 성도가 아니고 내가 예측 못 하는 성도로 거듭 태어나는 겁니다. 언제. 핸들을 꺾을 때. ‘살고 싶어라. 그렇지. 네가 언제까지 버티는 가 보자.’ 못 버팁니다. 성도가 아닌 사람은 이러한 여분의 경험이라고 하거든요. 어려운 말로. 정말 내가 예상 못 했는데 뭔가 난국이 벌어진 후에 숨겨진 무한한 은총, “나는 네가 이미 구원받기로 창세 전부터 작정했다”라는 그 후에 뒷면, 그 뒷면이 놀라 자빠질만한 경험을 겪으면서 새삼 확 다가오는 거예요. ‘아, 주께서 의도적으로 나를 잠시나마 성도 되게 하려고 그렇게 하셨구나’를 깨닫게 되는 겁니다. 

일종에 이건 트라우마같은 건데요. 여러분들이 2차대전 때, 우리나라 2차 대전을 볼 때 자꾸 미국 연합군 편을 보잖아요. 그런데 일본과 우리나라를 점령하고 3년 통치를 당할 때 우리 쪽에서 일본을 공격하고 하죠. 그런데 이렇게 생각해 보죠. 일본 국민은 무슨 죄가 있는지 생각해 보세요. 일본 국민은. 

제가 알기로는 시베리아에 끌려가서 강제동원 할 때 일본 국민 60만 명 끌려갔습니다. 그 추운 곳에서 거의 다 얼어 죽었다고 보면 돼요. 물론 돌아온 사람도 있죠. 누가 그렇게 했는가? 정치적으로는 알죠. 군국주의자인 정치적 지도자들이 그렇게 했다고 하는 겁니다. 본인 농부들이나 어부들은 아무것도 몰라요. 

60만 명이 자기 나라 전쟁을 위해서 강제동원 된 거죠. 전쟁에 동원된 것이 아니고 물자 수송하러 갔는데 그러면 그 사람이 그만큼 죽었는데 그 책임은 누가 질 것인가 하는 거예요. 이게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이 세상에는 나만의 필연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전쟁이 그들이 원했던 것이 아니에요. 

그냥 군국주의자들이 미쳐서 전쟁하자 하니까 자기들은 전쟁하면 농사지으며 식량을 대면 되는 줄 알았지, 남의 나라에 끌려갈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죠. 그럼 우리는 이야기 합니다. “반항하지 왜 끌려갑니까?” 국민이 반항하면 국가법에 의해서 사형당하는 데요. 그러니까 뭐냐 하면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고 결국 인간이라 하는 것은 내 것이 없어요. 

나의 인생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누군가 주무르는 데로 누가 와서 내 인생을 우연 적으로 주무를 수밖에 없는 입장입니다. 그런데 내 인생을 이렇게 살았다 저렇게 살았다 하는 것은 사태파악을 못 한 거예요. 그러면 주님께서는 내 힘으로는 예수 못 믿고, 내 힘으로 끌려가는 거 못 막고, 내 힘으로 살고 죽는 것도 못 한다면 주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주님의 뜻은 우리 학교 다닐 때 만든 바람개비라는 게 있는데 색종이 가지고 접지요. 접고 난 뒤에 그 중앙에 뭐냐 하면 핀을 꽂아 버립니다.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에 응집되도록 십자가 중심에 모이도록 주께서는 일하세요. 그 십자가가 뭐냐 하면 나로 인한 일이 아니고 주께서 일하신 그 일에 우리가 참여 되었음을 내 가슴 한복판에 바람개비가 십자가라는 그 핀이 꽂혀야 해요. 

꽂히게 되면 시베리아 가서 일찍 죽게 되든, 일본 남쪽 섬에서 어업 하다가 죽든지, 그건 별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에요. 우리는 어디 한 곳에 꽂혀야 해요. 제가 수요 설교에 그런 이야기 했죠. 꽃이 그냥 있으면 옆으로 쓰러진다고요. 꽃이 꽃병에 담겨야 해요. 그 꽃병에 꽃이 담겼다 하면 그건 이미 인생 성공한 사람이에요. 

주님의 꽃병에 담겨야 해요. 그러고 난 후에 여러분들 하고 싶은 대로 맘대로 막사세요. 어차피 꽃병에서 솟아있는 꽃이고 바람개비가 어떤 바람이 불어도 이미 십자가에 꽂힌 채 돌아가기 때문에 인생은 마음대로 살 수밖에 없어요. 어차피 마음대로 해도 마음대로 안 되니까 문제예요. 

정권 바뀌고 나라 바뀌고 우리는 시베리아 아니고 저 북한에 나무 심으러 끌려갈지도 모르는 일이란 말이죠. 그러니 어차피 내 인생은 내가 관리 못 합니다. 주어진 바람대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데 어디를 가든, 북한을 가든 십자가는 가슴에 꽂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이스라엘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본래 구원받은 우리 인간, 우리가 시도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차라리 우리 자신이 우리를 제거된 인간으로 간주할 때 비로소 그 현장에 새롭게 나타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주께서 준비한 우리의 영혼, 우리의 생명, 우리의 목숨이 지상에 있는 우리의 목숨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