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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멈추다(수10;12-14) 181216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8. 12. 16. 21:07
2018-12-16 14:56:22조회 : 17         
   해가 멈추다 181216이름 : 이근호 (IP:119.18.87.190)   

해가 멈추다(여호수아 10: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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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18-12-16 15:28 
태양이 멈추다 

2018년 12월 16일             본문 말씀: 여호수아 10:12-14 

(10:12) 여호와께서 아모리 사람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붙이시던 날에 여호수아가 여호와께 고하되 이스라엘 목전에서 가로되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 그리할지어다 하매 

(10:13) 태양이 머물고 달이 그치기를 백성이 그 대적에게 원수를 갚도록 하였느니라 야살의 책에 기록되기를 태양이 중천에 머물러서 거의 종일토록 속히 내려가지 아니하였다 하지 아니하였느냐 

(10:14) 여호와께서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신 이 같은 날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셨음이니라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은 도무지 성사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인간의 말을 들어 줄 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이스라엘과 하나님께 붙어지내신다는 것은 무슨 연유입니까? 그것은 이스라엘이 단순한 인간들의 군집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기는 현장이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더불어 전쟁에 나섭니다. 여호수아가, 이 전쟁의 주체가 하나님에게 있음을 인정한다는 점이 대단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수아가 단순히 자신이 구경꾼 노릇만 하고 있지 않다는 점도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를 앞장 세우시는가? 직접 전쟁하시지 않고서…”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 자체의 변화를 하나님께서는 외부와의 전쟁 방식으로 이끌어내시려는 겁니다. 이스라엘의 본질을 이스라엘을 전쟁에 참여시키므로 서 정립해 내시고자 합니다. 구약의 지리적 전쟁은 신약에 오는 마음 속의 전쟁의 양상을 띱니다. 

그 이유는 둘 다 약속을 구현하기 위한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벌리는 전쟁은 ‘약속’을 보여주고자 하는 전쟁입니다. 약속은 창조의 원리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 여호수아의 명령에 의해 해가 멈춘 것을 여호수아의 위력으로 봐서는 안됩니다. 여호수아가 어릴 때 취미가 하늘의 해 멈추는 것이 아닌 겁니다. 

어디까지나 필연이 아니라 우연한 일입니다. 필연이란 그 원인을 추적 조사 가능한 것을 뜻한다면 우연이란 그 일이 일어나야 하는 원인을 찾을 수 없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평소에 반복가능한 일이 아니다 는 말입니다. 여호수아보고 또 해를 멈춰보라고 요구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동일한 일은 두 번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세상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우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우연한 일’을 ‘기적’이라고 이해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그건 아닙니다. 왜냐하면 ‘기적’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것은 “제발 지금 있는 제 것을 다치지 말게 하소서”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즉 “더 주시는 것은 환영하지만 있는 것까지 앗아가지는 마소서”라는 자기 수호적 성격을 반영합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이 필요한 것을 기적적으로 주시는 분이 아니라 세상 모든 것을 우연적 존재로 간주하시는데 있습니다. 창조라는 것 자체가 우연입니다. 창세기 1:1-2에 보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혼돈과 공허’가 땅에 속합니다. 땅이 이런 상태에 있을 때, 창조의 가치가 빛납니다. 즉 땅은 혼돈과 공허함이 당연함입니다. 거기에 대해 ‘창조’란 ‘질서부여’를 말합니다. 

우연을 바탕으로 한 ‘필연적 구조 장착’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위한 필연일까요? 오늘 본문 14절에서 “여호와께서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신 이 같은 날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셨음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셨다’는 말은 창조의 필연적 질서를 위한 상대자가 지상에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를 듣고 움직이셨다는 겁니다. 그 상대자가 이스라엘입니다. 그렇다면 지상에서의 이스라엘의 역할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감사함입니다. 지상에서 인간들이 하는 기도는 ‘감사함’ 자체를 목표로 해야 합니다. 빌립보서 4:6에 보면,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되어 있습니다. 

감사할 거리를 취득하거든 그 때 감사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미 감사함이 택한 백성 속에서 만들어져 있기에 기도를 통해서 그것을 방출하라는 말입니다. 그 예가 누가복음 18장에 나옵니다. “가라사대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이 있는데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주께서 또 가라사대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눅 18:2-6) 

이 말씀 자체가 필연이 아니라 성도 내부에서 우연적으로 작용되어야 합니다. 즉 해가 멈춤에 버금가는 기적으로 장착되어야 합니다. 혼돈에서의 창조가 엿보여야 합니다. 이 내용에는 우리는 어느 한 편에 속한다고 여겨서는 아니됩니다. 우리 내부에 ‘불의한 재판관’과 ‘원한 맺힌 과부’ 둘 다가 있게 됩니다. 

소위 ‘일인이역’을 하는 겁니다. 그것을 통해서 어떻게 불의함이 의로움으로, 달라지는지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주님은 자기 백성을 이스라엘로 부르신 겁니다. 우연한 해의 멈춤이 여호수아 개인적의 자랑거리나 영달을 뒷받침 하기 위함이 아닌 듯이 성도의 기도 또한 성도의 자기자랑을 위함이 아니라 말씀이 그대로 살아서 활동중이라는 사실을 알리는 영역이 되는 겁니다. 

우리를 위한 기도란 이스라엘에게는 용납될 수 없습니다. 누가복음 11:9-13에 보면,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아비 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게 필요한 것을 우리 이스라엘 속에 집어넣습니다. 기도라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따라서 기도는 불의한 재판관으로부터 감사함으로 전개되어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이 늘 우연 속에 살고 있음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15강-여호수아 10장 12~14절(해가 멈추다)20181216-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여호수아 10장 12~14절입니다. 구약성경 333페이지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모리 사람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넘겨 주시던 날에 여호수아가 여호와께 아뢰어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이르되,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서 그리할지어다 하매, 태양이 머물고 달이 멈추기를 백성이 그 대적에게 원수를 갚기까지 하였느니라 야살의 책에 태양이 중천에 머물러서 거의 종일토록 속히 내려가지 아니하였다고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여호와께서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신 이 같은 날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셨음이니라”

유명한 구절이죠. 하나님이 여호수아의 기도를 듣고 여호수아의 원대로 태양을 멈추게 했다는 겁니다. 성경에서 이런 기적이 나오면 ‘신기하다. 나에게도 이런 기적이 있었으면 좋겠다’라고 하는데 사실은 태양이 안 멈추고 그냥 조용히 사는 것이 제일 낫습니다. 번잡스럽게 뭐 암 걸리고 나았다는 그런 것도 짜증스러운 일이에요.

그러나 사람은 조용히 살게 되면 하나님의 기적 속에 산다는 느낌을 못 받지요. 그들은 어떻게 하느냐 하면 가끔은 틀어지게 해서 우리가 놓치고 잊었던 하나님의 도와주심을 새롭게 느끼는 기회를 주시는 겁니다. 그걸 지난 시간에 뭐라고 했냐면 우리 속에 이질적인 요소가 들어 옴으로써 평소에도 우리가 하나님의 은총을 듬뿍 받고 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닫는 기회를 부여한다고 했지요.

지난 시간에 기브온 사람이 들어 옴으로 말미암아 그게 개기가 되어서 그때부터 여호와 전쟁이 시작되는 겁니다. 그 기브온 사람들이 이스라엘 편을 하고 난 뒤에 기존의 토착민들이 기브온 사람을 공격하니까 기브온 사람들이 “도와주세요” 쉽게 말해서 “당신들 솜씨 한 번 보여주세요” 한 거예요.

가만히 있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린 겁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대단한 하나님인 것을 토착민들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되는데 건드렸어요. 건드리니까 어느 정도로 여호와 하나님이 대단한지를 본격적으로 공개하는 현장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조용히 살면 되는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을 시키실 때는 뭐냐 하면 우리에게 혼란이 유발될 때, 잃어버린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 한번 기억나게 하는 기회를 부여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 태양이 멈추게 되는데, 이 태양이 멈추게 될 때 우리는 보통 기적이라고 하잖아요? 이것을 고상하게 이야기해서 우연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럼 기적과 우연의 차이를 구태여 나누는 이유가 뭐냐, 기적이라 하는 것은 내가 여기 고정적으로 있는데 예상 못 할 행운을 가져다줄 때 우리는 기적이라고 해요. ‘나에게 이렇게 구축되어있는 것은 내가 못 놓겠습니다. 나는 항상 이렇게 단단하게 구축되어있어야 마땅합니다’라고 전제를 할 때는 ‘기적을 주옵소서. 내 것은 다치지 말고.’ 이렇게 되는 것이 보통 기적이라고 하거든요.

제가 이런 이야기하는 이유가 있어요. 기도할 때 기도 자세가 기적을 달라고 하는데 그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미리 선언하고 들어가는 겁니다. 기도할 때는 반드시 내 쪽이 와해 되어야 해요. 단단히 구축된 내 토치카처럼 벙커처럼 구축된 것은 따로 있고 이것에다가 더 보태 달라고 하게 되면 그것이 아무리 기적이라는 이름으로 아부를 해줘도 그건 내 쪽에 변화가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이건 진정한 기적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한번 정리해 봅시다. 기적이란 뭔가 더 획득하는 것이 기적이 아니고 획득하려는 나 자신이 달라지는 거. ‘과연 나 자신이 획득할 자격이 되는가.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마땅하다고 우기는 것이 아닌가’라는 자기 자신의 건방짐을 주께서 낮추는 그것이 진정한 기적이에요. 

그러면 그건 뭐냐? 좀 어렵게 이야기하면 우리는 필연적 존재가 아니고 우리는 항상 우연적 존재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필연과 우연의 차이가 뭐냐 하면 필연이라는 것은 내가 지금 여기 있기까지 확실하게 어떤 원인이 있기에 그 결과가 마땅히 지금의 내가 있다는 것이 필연입니다.

우연이라는 것은 원인을 찾을 수 없어요. ‘내가 왜 말씀을 전하지? 내가 왜 예수를 믿었지? 내가 왜 이 교회에 왔지?’ 도무지 원인을 알지 못해요. 누가 전도해서 왔다는 식으로 이렇게 되면 그 사람은 누구에게 묶이느냐 하면 자기 전도하는 사람에게 묶이는 가련한 인생이 되는 거예요.

제가 지난 금요일 안양 강의에 가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복음이란 뭐냐 하면 이 땅에서 복음이란 뭐냐 하면 그 누구도 믿지 않지 않고 누구에게도 엮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 누구에게도 엮이지 마라. 사기를 왜 당하느냐? 엮이기 때문에 당하는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자기는 우연적 존재이기 때문에 내가 누구를 이용하지 않더라도 이미 누구에 의해서 우리는 우연에서 필연으로 전환되는 것이 아니고 우연에서 우연으로 계속 가야 해요.

원인이 없는데 오늘 살았고, 원인이 없는데 내일 살 것이고 원인도 없는데 천국가게 될 거예요. 원인. 그러면 “예수님 때문에 가지 않습니까?”라고 하실 텐데 예수님 때문에 간다고 했을 때 그게 문제가 되는 거예요.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으면 우리가 예수님을 이용한 것이 되어버려요. 

예수님을 위하여 우리가 구원받으면 나는 그야말로 우연적 존재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은 필연이 되고. 주님께서 손을 대서 구원이 된다면 그다음부터 어떤 문제가 생기느냐 하면 주님께서 손을 안 대면 나는 탈락할 여지가 생기는 거예요. 그런데 그런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해요. 그래야 우리가 우연적 존재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 오늘 본문에 태양의 기적이라 하는 것을 저는 우연적 존재라고 시작했는데 여기 이스라엘도 우연적 존재예요. 그러면 “이런 우연적 존재에서는 어떤 원인도 없습니다. 기도했기 때문에 태양이 멈췄습니다”라고 하면 안 돼요. 그러면 여호수아가 기도해서 태양이 멈췄다면 여호수아보고 저는 이렇게 장난을 칠 수도 있어요. “또 해봐라. 또 해봐”라고 이렇게 장난칠 수 있어요.

어떤 사람이 기도했는데 암이 나았다면 저는 그 사람에게 말하죠. “또 해봐라. 암이 낫는가.” 그래서 또 낫는다면 아예 병원을 하나 차리죠. 기도해서 낫는 전문병원을. 기도가 우연히 낫게 해준다면 그냥 우연으로 그쳐야 해요. 그걸 필연으로 장난질 치면 안 됩니다. 필연으로 넘기면 안 돼요.

강의하면서 자녀 교육에 대해서 하나 예를 든 게 있어요. 어떤 아이가 반에서 중간쯤 하다가 일등 했다면 그때 엄마의 심정은 어떤 심정이냐 하면 “네가 소 뒷걸음치다가 뭐 밟듯이 우연히 일등 했구나”라고 자식에게 이야기해줘야 해요. 그런데 그 자식이 일등 하고 난 뒤 그다음에 전교에서 일등 했어요. 그러면 엄마가 이렇게 해야 해요. “또 우연히 네가 아는 문제만 그렇게 우연히 나왔구나.”라고 해야 해요. 

그런데 그 아이가 나중에 서울 의대를 갔어요. 요즘 서울 의대가 대세거든요. 그러면 엄마가 “내 아들 잘났다” 하지 말고 “또 우연히 뭐가 잘못돼서 네가 그렇게 합격했겠지”라고 이렇게 교육이 되어야 한단 말이죠. 그러면 코디가 필요 없어요. 그렇게 교육이 되어야 한단 말이죠.

왜냐 하면 ‘내가 천국 갔다’라는 이거는 그냥 내 쪽에서 원인을 찾지 마세요. 내가 기도했다는 둥 그런 원인을 찾지 마세요. 이건 뭐 누가 장난질 치는 거 같아요. 태양이 멈췄다. 여호수아 기도했다. “우리도 기도하면 우리교회 부흥됩니다.”라는 그런 말에 넘어가지 마세요. 이건 교회부흥과 태양 멈추는 것 자체가 레벨이 달라요. 레벨이.

교회부흥은 자기들끼리만 보지만 태양이 멈추는 것은 전 세계가 다 쳐다보고 있잖아요. 어떻게 같은 레벨이 될 수 있습니까? 따라서 오늘 내용은 이겁니다. 우리 내부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그래서 그 결과로써 태양이 멈췄다는 그 절차, 그 프로세스를 우리가 추적해야 하겠지요.

창세기 1장을 보겠습니다. 1장을 보게 되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하고 그다음에 천지를 창조하시는데 그 바탕이 어떤 바탕이냐 하면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다”라고 했어요. 땅이 공허하고 혼돈하기 때문에 천지 창조할 수 있는 어떠한 요소도 혼돈과 공허에서는 나오지 않습니다. 

우리 쪽에서 내세운 것이 우리를 구원하지 못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그냥 혼돈하고 공허해야 해요. 그래야 주님의 창조 값이 창조하신 티가 마음껏 나오도록 우리는 계속 혼돈하고 공허해야 합니다. 그러면 내 마음이 혼돈하고 공허한 것은 누가 이렇게 조장하느냐 하면 지난 시간에 했던 이질적인 요소가 우리 속에 들어와 버리면 우리는 어떻게 감당을 못해요.

허둥지둥 일을 처리 못 해서 당황스럽게 되는 겁니다. 많은 사람이 복음을 안다고 했어요. 복음을 알면서 이렇게 합니다. “당신은 이미 구원받았습니다”라고 할 때 그 사람이 생각하기를 그러면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할 때 그 사람이 뭐라고 이해를 하느냐 하면 ‘내 속에는 어떤 정리 정돈되는 것이 없어도 괜찮지요?’라는 생각을 하게 돼요.

그걸 혼탁, 또는 혼선이라고 하게 되는데 성경에서는 여러분들이 아는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여러분 속에 불의함이 있어요.

그 불의함을 자체적으로
주님께서
외부에서 주어진 요소에 의해서, 원인이 있으니 필연이죠, 요소에 의해서
불의함을 의로움으로 바꾸는 작업을 합니다.

거기에 대해서 우리 성도는 강력하게 주님을 반대하고 싫어하고 주님을 거부하는 힘들이 나와줘야 해요.


본문을 이야기하면 제일 못 알아듣는 대목이 그 대목입니다. 구원을 받았으면 깨끗한데 깨끗하면 불의함이 없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여러분 목욕탕은 왜 있습니까? 때가 끼니까 있는 거죠. 한번 가고 끝납니까? 정기적으로 목욕탕 가잖아요. 적절한 예가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목욕탕 좋아라고 우리 몸이 있다는 이야기예요. 주님 좋아라고 우리가 있는 겁니다.

우리가 우연적 존재가 되어야 할 것은 필연적 존재가 따로 계시고 그분의 가치를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는 우연적 존재가 되는 거예요. 여기 지금 여호수아가 어릴 때, 세 살 네 살부터 취미가 태양을 멈추는 취미를 갖고 있었습니까? 아니거든요. 그냥 당황스러워서 정말 당황스러워서 적들을 치다가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서 그리할지어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지금 여기 남의 나라 지명이 나왔는데 이게 예루살렘에서 북서쪽으로 약간 올라가면 거기 기브온 있고 그쪽에서 올라가게 되면 그다음부터 내리막길로 되어 있어요. 약간 올라가다가 좀 평탄하다가 쭉 내려가는 지형이거든요. 올라가서 있는 요 대목에 왕의 길이라 해서 2차선 도로가 나 있어요. 지금은 팔레스타인이 점령하고 있지만.

그쪽을 쭉 달려보면 거기 베델도 있어요. 그런데 적들이 예루살렘을 공격하려고 하다가 쫓기니까 내리막길로 간 거예요. 그 내리막길을 가는데 여호수아가 아모리 사람들을, 그들도 연합군인데 기브온 건드렸다가 예루살렘에 당하는 거예요, 쳐부수려고 쭉 내려가거든요. 내려갈 때 해가 지려고 하니까 어두우면 못 쫓아가니까 여호수아가 급조해서 태양을 좀 멈추게 해달라고 한 거죠. 마저 쳐부술 수 있게.

이렇게 해서 갑자기 태양이 멈추고 만 거예요. 원래 낮과 밤은 요 창세기 1장에 보면 혼돈 가운데 있었고 빛이 있으라 하매 있었고 그다음부터는 빛이 있으매 낮이라 칭했고 어두움은 밤이라 칭했다는 말이죠. 낮과 밤은 구분되어 있어요. 지금 여기는 혼재되어 있습니다. 낮과 밤이 같이 있는 거예요. 붉은 달 푸른 해인가?

같이 낮과 밤이 함께 있는 겁니다. 그런데 함께 있는 이것에 대해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그것이 여호수아가 먼저 제시한 기도예요. 터무니없는 걸 기도한 거죠. 여호수아가. 그런데 기도할 때에 본인이 개인적으로 원하는 걸 기도한 게 아닙니다. 여호수아는 지금 뭣을 내면에 집어넣었느냐 하면 약속을 위한 하나님 전쟁의 요소가 여호수아 안에 벌어지고 있기 때문에 자기도 그 전쟁에 참여하다 보니까 그 전쟁에 필요한 기도를 외부로 내뱉은 겁니다.

그래서 여기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하여 응답했고 14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신 이 같은 날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셨음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전쟁할 때 이 전쟁의 요소 가운데 뭐가 있느냐 하면 인간 내부에서 요청하는 기도도 하나님의 전쟁 요소 요건으로써 개입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게 해주는 겁니다.

그러면 그 말을 들을 때 우리가 어떤 생각이 드느냐 하면 ‘그런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시는 것이 맞네요. 여호수아의 기도를 들어 줬다면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는 것도 당연하지 않습니까?’라고 생각할 겁니다. 다시 오늘날의 기도문제로 돌아와 버렸죠. 

무엇이든지 기도하면 들어주신다고 하니까 그러면 이것이 성도의 특권이라면, 어떤 사람은 기도를 성도의 호흡이라고 하는데 그런 말이 너무 맘에 안 들어요. 왜냐 하면 그 사람들은 전혀 기도라는 것이 뭔지 모르기 때문에 그런 공식을 내놓는데, 기도라 하는 것은 빌립보서 4장에 잘 나와 있어요.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그다음이 중요합니다.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구하라”라고 되어 있어요. 감사함으로.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필요한 것 다 챙기면 기도할 것 없네요”라고 말합니다. 제가 수천 번 들었던 말인데 그렇게 기도할 게 없다고 해요. 

저는 그것이 아니고 우리 속에 있는 그리스도와 하나님이 계속해서 교제하고 관계를 맺도록 우리가 자신을 그 현장에 내 준거예요. 주님이 하시는 일에 내놓았기 때문에 끊임없이 우리 자신이 살아 있는 성경 말씀이 되는 겁니다. 뭐가 나와야 하느냐 하면 감사함이 계속 나와야 하는 겁니다. 

그럼 그냥 감사함이 나오질 않아요. 그럼 뭐가 나오느냐 하면 아까 제가 이야기한 불의함이 우리 속에 들끓어야 해요. 우리 속에. 우리 속이 전쟁터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주님을 싫어하고 하나님을 귀찮아해요. 우리는 하나님을 믿지만, 하나님이 너무 가까이 오는 것을 거북스러워합니다. 상당히 부담스러워하는 거예요.

그런 요소에 대해서 제가 아침에도 언급했지만 거듭나지 않는 자아와 거듭난 자아가 싸우고 내가 나름대로 살고자 하는 것과 죽어도 괜찮다는 것과 내부에서 싸운다고요. 이것이 혼돈이 아니고 정돈된 거예요. 우리 안에서 뭔가 나라는 것이 정돈되어 있어야 하고 내 안에서 그리스도가 정돈되어 있어야 해요.

정돈되어 있어서 나는 구원받았으니까 아무것도 안 한다가 아니라 날마다 우리 속에서 불의함이 나와야 해요. 예수님에게 대적하는 요소가 계속 들끓어야 해요. 몸에서 계속 때가 나와야 목욕을 하듯이, 그래야 주님에게는 주님의 전쟁터로써 주님에게 감사함이 이어지는 겁니다.

그러면 그 불의함이라는 것은 예를 들면 누가복음 18장에 어떤 과부가 기도하는 게 나오는데 18장에 보면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그 원수에 대해 나의 원한을 풀어주소서” 이렇게 기도하는 대목이 나올 때, 이 기도를 설명하는 주석이나 목회자들이 대부분 잘못되게 해석하는 것이 뭐냐 하면 과부가 끈질기게 애를 먹이면서 귀찮게 기도했더니만 결국은 그 부르짖음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셨다고 결론을 맺어요.

제가 이렇게 결론을 안 맺는 설교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어떤 원한이 있다면 주께서 그 원한을 반드시 들어 주시는데 여러분이 인생을 힘들게 사는 이유는 기도를 안 해서 그렇다는 거예요. 그것도 기도해도 건성으로 기도해서 그렇다는 겁니다. 악바리같이 악착같이 기도하게 되면 주께서 그 불쌍한 과부의 기도도 무시하지 않은 것처럼 반드시 응답해 주시니 여러분들은 희망을 가지시고, 용기를 가지시고, 좌절하지 마시고, 낙담하지 마시고, 하면 된다, 기도하면 된다는 꿈을 꾸시고, 그것이 살아 있는 믿음으로써, 순수한 믿음으로 하시면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백성 된다는 겁니다. 갑자기 은혜가 막 되지 않습니까?

이 대목은 그런 내용이 아니고 여기 6절에 보면 “주께서 가라사대 불의한 재판관”이라고 하는데 불의함을 부각하는 거예요. 불의한 재판관이 처음부터 불의한 사람이 아니에요. 불의하다를 티를 낼 때는 어떤 티를 내느냐 하면 그 끈질긴 과부가 막무가내로 뭔가 재판을 요청해 줄 때 그 점잖은 재판관도 “이거는 뭐 시도 때도 없이 귀찮게 하는지. 나도 잠 좀 자자. 밤중에 잠자고 있는데 찾아와서 근무시간 끝났는데 왜 찾아오느냐?”라고 화를 낼 때 그 재판관은 졸지에 불의한 재판관으로 판정되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 속에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전부 다 불의한 거예요. 주께서 진짜 응답하는 것은 뭐냐 하면 그 불의함이 너의 불의함이 하나님의 의로움으로 전환되었는가를 그 그릇을 보여주는 현장의 요소로 너희들이 존재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필요한 것을 기도하세요. 기도하면 그것이 불의한 것임을 기어이 드러내게 하십니다.

우리 자신이 불의한 재판관이고 우리 자신이 거북스러운 과부 노릇을 다 하는 거예요. 1인 2역을 하는 거예요. 우리 내부에서. 이 말씀 자체가 우리에게 통째로 증거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과부 역할과 불의한 재판관 역할을 다 동시에 우리에게서 일어나야 우리 속에 말씀이 생생히 살아 있는 겁니다.

우리가 불의한 재판관 못 돼서 환장한 건 아니잖아요. 제가 방금 읽었던 빌립보서 4장에 나오는 기도는 항상 결과적으로 감사함이 나와야 해요. 제가 다시 이야기하지만 감사함이 나오면 성령의 일이고 억지가 나오면 성령의 일이 아니에요. ‘고맙고 감사합니다. 세상에 내가 뭐라고 천국에 이렇게 아무것도 생각 안 하고 그냥 넣어 주십니까?’라고 나오려면 먼저 시작은 우리 속에서 전쟁이 일어나야 한다는 거.

‘이것 때문에 나 손해 봤습니다. 이것 때문에 내 인생 망쳤습니다.’라는 불의가 먼저 촉발이 되어야 해요. 그것이 촉발되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 전쟁터로 몰아넣습니다. 그러면 여호수아의 기도가 응답 되듯이 우리의 기도가 응답 되는데 누가복음 11장 9절에 보면 그 기도의 응답이 나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라” 자 이렇게 할 때 이것만 딱 보게 되면 어떤 오해를 하게 되는가 하면 내가 달라는 대로 주께서 주실 것이라는 오해를 하게 돼요. 그러나 그 오해는 진짜 오해입니다.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고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라” 이 대목만 프린트해서 복사해가지고 딱 재수하는 아이 앞에다가 걸어 놓고 그러지 말고 그 뒤에 것을 봐야죠. “너희 중에 아비된 자가 누가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주시는데” 이게 뭐냐 하면 성령이에요. 이게 미치는 겁니다.

그것을 반대로 해서 성령을 주시는데 왜 주시는가? 악하기 때문에 주시는 거예요. 악하기 때문에. 악한 자이기 때문에 십자가의 영, 성령을 주시는 겁니다. 감사함이 안 터져 나올 수가 없어요. 왜냐 하면 성령을 받는 순간 나는 악하기 때문에 줄 필요도 없고 내 기도 응답은 할 필요도 없고.

그런데 성령을 주셨다는 말은
바로 아까 기도한 것처럼 너를 통해서 예수님을 배출하고 예수님을 증거 하는 용도로 사용하겠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그게 여호수아예요. 여호수아가 평소에 태양 멈추는 것을 취미로 한 것이 아니에요. 그냥 다급해서 한 거예요. 이미 본인도 모르게 하나님의 일에 말려든 거예요. 우리는 원하지 않았는데.


그래서 악하세요. 이래도 저래도 악하니까. 악한 것에 대해서 우리가 그다지 어렵고 힘들 것이 없으니까 그냥 악하세요. 그러나 그것이 감사로 이어지길 바랍니다. 그러나 악함에도 불구하고 이 혼동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피조물로 창조해주시는 주님, 그것이 이스라엘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 믿고 착하려고 했습니다. 예수 믿고 완전하려고 했습니다. 착하게 살면 복 받는 줄 알았습니다. 주여, 그것이 주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님을 저희들이 알았습니다. 주님의 운반체가 되게 해주시고 주님의 살아계심을 증거 하는 매개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