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망 (마 26장 1-5절)
대전- 107강
이근호
2018년 12월 27일
본문말씀: 마태복음 26:1-5절
(마26:1) 예수께서 이 말씀을 다 마치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마26:2)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을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우리라 하시더라
(마26:3) 그 때에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가야바라 하는 대제사장의 아문에 모여
(마26:4) 예수를 궤계로 잡아 죽이려고 의논하되
(마26:5) 말하기를 민요가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말자 하더라
자, 시작하겠습니다. 마태복음 26장 할 차례입니다. 마태복음 26장부터 보게 되면, 본격적으로 십자가 사건 속으로, 소용돌이 속으로 진행해갑니다. 2절에 보면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을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우리라 하시더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는다는 것을 미리 다 아셨어요.
그리고 이 십자가사건에 관여되고 있는 인물들이 나오죠. 유월절 이전에 모든 것을 깔끔하게, 사회불안요소를 제거하자는 식으로, 정치적으로 이렇게 나온 겁니다. 십자가사건이라 할 때에, 우리 인간들이 제일 먼저 봐야 될 것은 이게 정치적사건이라는 겁니다. 정치적사건이라는 말은 이게 권력이 작용하고 있고, 이 정치적 권력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과 타인간의 권력으로 엮어진다는 거예요. 인간의 권력이라는 게.
사람은 이렇게 자기 일 같으면 그저 자기 일만 열심히 살면 그나마도 행복하다고 생각하죠. 근데 외부에서 경찰이 온다든지, 세무서에서 온다든지, 나라에서 군에 아들 보내라고, 전쟁 났으니까 입대시키라고 왔을 때 뭘 느끼느냐 하면은 나의 이 작은 힘이 감당 못할 외부의 강한 힘이 오는 거예요. 가택수색 하겠다는 감당 못할 힘이 오는 거예요. 이럴 때 뭘 느끼느냐 하면 권력이라는 것을 느끼는 거예요. 그냥 식구끼리 뭐 생일축합니다, 라는 것을 할 때 이럴 때는 안 느껴요.
아주 어려운 말을 쉽게 하게 되면, 쉬운지 어려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는 사이에는 정의로움은 없습니다. 아는 사이에 정의를 찾으면 어떻게 돼요? 아는 사이에는 그냥 정으로 가는 거지, 얼마나 정의로우냐 하는 것은 필요치 않아요. 아는 사이에서는. 손자가 할아버지 기업을 고발하고 하면 안돼요. 아는 사이에는 정의로우면 안돼요. 정의로움이라고 하는 것은 내 힘의 권력 말고 다른 힘의 권세가 들어올 때, 지적당할 때 우리는 힘을 느끼는 거예요.
음식이 있잖아요. 내 몸이 만져지잖아요. 실제로 있죠. 음식은 눈에 보이죠. 근데 권력은 눈에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안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남이 이렇게 차고 들어올 때는 권력이 오히려 보이는 것보다 안 보이는 권력이 더 실제적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뭐냐, 부들부들 떠는 공포가 유발되는 겁니다. 누가 따라오는 것 같기도 하고, 공포가 유발되는 거예요.
부부사이가 좋지 않을 때 여자들이 상담하는 사람들이 있죠. “나는 남편 꼬라지만 봐도 심장이 떨린다. 벌써 각방 쓴지 40년 됐다. 신혼여행 갔다 와서 각방 썼다.” 이런 이야기를 할 때, 그쪽 몸무게 70키로 잡고 이쪽 60키로 잡고, 몸체가 딴 몸인데 왜 벌벌 떱니까? 몸이 딴 몸인데. 아니 마네킹보고 떱니까? 아니죠. 근데 왜 떱니까?
이게 바로 인간과 인간관계는 그냥 눈에 보이고 만져지는 물체가 아니라, 이게 실제가 아니라 그 둘을 이어주는 권력이 실제가 되는 거예요. 권력은 눈에 안 보입니다. 따라서 악마가 실제입니다. 악마는 인간이 죽기를 무서워하는 그 죽음을 오므려 쥐고, “이러면 죽는데이~”하면서 협박 공갈하는 악마는 실제적입니다. 그 실제가 예수님 당시에는 정치적 권력을 통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이 아니요 공중권세 잡은 악마, 실제 하는 힘과의 싸움이에요. 지금 중국에서는 크리스마스 행사하는 사람들을 다 잡아두려고 하고, 부르네오 나라에서는 크리스마스 노래를 부르면 5년형입니다. 중국의 지하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목사 다 잡아가죠. 국가가 정복의 힘으로 다 잡아가죠. 예수님 살아있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그게 정복요소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세계가 옛날 십자가사건과 멀리 떨어져있는 것이 아니에요. 그럼 지금 한국은 이렇게 복음을 전하는데도 왜 가만히 있느냐? 첫째는 복음이 뭔지 몰라요. 왜? 교회만 있기 때문에. 복음을 외쳐야 뭐 핍박을 받죠. 복음을 전하는 자도 없고 자기들끼리 착한일 하는데 잡아가면 안 되죠. 자선냄비해서 구제하는데, 그건 착한일인데 왜 잡아갑니까? 복음이 아닌데.
크리스마스 때는 어떻게 했습니까? 아기예수가 태어났을 때는 누가 죽었어요? 헤롯이 베들레헴 두 살 아래 남자애들을 다 죽였죠. 이렇게 복음사건이 일어나는 현장에서는 아주 피 터지는 살인사건 같은 게, 험악한 분위기가 유발되는 거예요. 실제로 교회에서 복음전해가지고 교인들과 교인들 사이, 그리고 또 목사와 복음 아는 사람과 아닌 사람과 치열한 투쟁이 있습니다.
이 십자가사건은 정치적사건이에요.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은 십자가사건을 먼저 너무 복음적으로 다가서지마라는 말이죠.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아까 첫째시간에도 이야기를 했잖아요. 하나님이 없어요. 없고, 몸부림치니까 그때그때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우리가 느낄 수가 있는 겁니다. 그냥 복음으로 이렇게 돼버리면 교회가 복음을 전부 둘러쳐버려요.
그러면 복음이 있고 교회가 그 복음을 둘러쳐버리면 사람들은 교회를 믿지 복음을 안 믿게 되거든요. 교회가 복음이 있다는 소리를 가지고 뭐하냐면 정치적인 권력행사를 해버려요. 그러면 교회 목사 말 안 들으면 지옥 가는 것처럼 그렇게 된다 이 말이죠. 이게 전부 다 뭐냐 하면 권력행사거든요. 정치적사건입니다. 이 정치적사건의 특징이 뭐냐, 뭐로 움직이는가 하면은 법으로 움직여요.
그런데 우리가 알다시피 복음은 뭐로부터의 벗어남? 법으로부터. 법으로부터의 해방이에요. 어떤 법? 양심의 법이고 뭐고 어떤 법으로부터도 저촉 받을 필요가 없어요. 왜? 죽은 자는 죽은 자를 재판하지 못하기 때문에. 같은 가짜끼리 재판해봐야 그 재판이 하늘나라까지 유효하지 않습니다. 재판은 누구의 재판이 유효 하느냐 하면은 의인이 죄인을 재판할 때만 하늘나라에서 인정해줘요.
그 재판의 기준이 뭐냐 복음입니다. 십자가를 아느냐 모르느냐의 결정이지, 얼마나 악했느냐 안 악했느냐, 얼마나 성실했느냐, 기도 얼마나 했고 헌금을 얼마나 했느냐, 그런 것은 하늘나라에서는 일체 묻지도 않아요.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이야기입니다. 세리와 창기가 천국에 갔잖아요.
그러나 그렇게 이야기를 해버리면 뭐가 안 됩니까? 교회 목사 영이 안 서죠. 교회 목사 영이 안 서면 뭐가 안 됩니까? 정치적 세력화된 교회라는 조직체가 안서니까, 교회를 위해서라도 법이 있어야 되고, 그 법을 따라야 되고, 안 따르게 되면 저주받는다는 엄포와 협박공갈들이 줄줄이 이어져야 되는 거예요. 설교하는 것 따져보면 전부 다 협박공갈들이에요.
협박, 공갈한다는 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진리가 아니거든요. 진리가 아닌 이유는 협박, 공갈 여기에는 보복이 따라오거든요. 협박, 공갈한다는 것은 이 보복을 만회하기 위해서 여러분에게 회복될 행함의 여지를 교회단체에서 제공해버려요. 당신보기에는 당신 집안이 엄마도 아프고 나쁜 짓도 많이 했는데, 하나님은 너무나 사랑이 많으셔서 어떻게 행동을 똑바로 바꾼다든지, 반성한다든지 안 그러면 뭔가 충성하게 되면 행함을 통해서 만회할 기회를 제공합니다, 라는 것으로 장사를 하는 거예요. 교회는 협박주고 장사하고 협박주고 장사하고..., 협박은 돈으로 만회해주면 봐주는 겁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라고 했잖아요. 그런데 일반교인들은 회사 다닌다고 바빠서 못하죠. 돈으로 만회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거예요. 하나님나라에, 성령이 하는 일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라고 이야기를 해버려요. 돈만 내라. 우리가 대신 선교사, 기도부터 해가지고 모든 것은 전문가인 우리가 다 알아서 해줄 테니까, 이래 나온다고요.
다시 말씀드리면 십자가의 의미라고 하는 것은 인간들이 어디 권력 안에 잠겨있다? 정치적 권력 안에 잠겨있고, 이 정치적 권력 안에서 인간이 헤어 나오지 못한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 나오는 가야바나 제사장들은 예수님을 어디에다가 질식시킵니까? 자기가 갖고 있던, 예수님을 죽일 때 힘이 어디서 나와요? 무슨 힘이에요? 정치적 권력이죠. 정치적 권력으로 예수님을 죽임으로 사람들에게 본때를 보인다고 할까요? 우리의 말을 거스르면 결국 어떻게 되는지 똑똑히 보라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거예요.
근데 여기 2절에 보면 뭡니까?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우리라 하시더라” 예수님은 이 사실을 미리 알아요? 몰라요? 미리 안다는 것이 대단한 거예요. 미리 안다는 것이 중요한 겁니다. 다시 말해서 정치적 권력은 아무리 노력해도 영적인 세계에 진입을 못한다는 것을 나의 십자가로 그걸 까발려주겠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예수님이 죽었잖아요. 그러면 정치적 권세가 일단 이겼죠. 아무도 못 빠져나가잖아요. 못 빠져나갔죠. 못 빠져나갔는데, 그러면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못 빠져나오는데 빠져나온 거예요.
그런데 일단은 부활을 하기 위해서는 뭐가 먼저 선행이 되어야 하느냐 하면은, 아무도 못 빠져나갔다가 선행이 되어야 해요. 아무도 못 빠져나갔다. 그러니까 예수님 빼놓고 못 빠져나갔다는 말은 예수님처럼 구원에 성공할 수 있는 인간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는 거예요. 그러면 천국에 자기백성을 넣기 위해서는 빠져나간 주님이 도로 어디에 들어가야 합니까? 빠져나온 힘을 가지고 아무도 못 빠져나온 권세에 외부에서 타격을 가해가지고 구멍을 내야 되겠죠. 어떤 탈출구를, 봉창이라든지, 봉창을 내야 되겠죠.
그 봉창을 내는 것이 뭐냐, 이것이 바로 성령이 진입하는 요소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제가 방금 설명했으니까, 성령이 오게 되면 이 세상은 무슨 세상이다? 바로 지옥이다. 성령을 받은 사람의 특징은, 이 세상은 아무도 못 빠져나가는 지옥이다. 그런데 성공했다. 지옥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생겼다. 법이 있어서 성공했습니까? 법 없이 했습니까? 법 없이 성공한 거예요.
간통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아줌마가 있죠. 그 사람은 천국 갔습니다. 어떻게 갔습니까? 법이 있어 천국 갔습니까? 법 없이 갔습니까? 법 없이 구원받은 거예요. 그러면 그 간음법, 간음하지 말라는 율법은 뭡니까? 구원되는데 보탬이 됐다? 안 됐다? 전혀 안 됐죠. 전혀 안 됐지만 구원에는 참여했어요. 우리가 율법을 지켜서 간음을 안 함으로써, 이 말은 참 어려운데, 간음을 안 함으로써 이게 간음죄가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간음을 안 하게 되면 계속 어디에 저촉을 받습니까? 간음죄에 계속 해당되는 사항이 되는 겁니다. 그냥 군에 갔다 오면 되는데, 계속 입대를 미루는 거예요. 그러면 군에 갔다 와야 될 법에 저촉을 받는 거예요. 이 간음을 자랑하면 안 되지만 기죽을 필요는 없어요. 예수님의 십자가 의미가 뭐냐 하면 내가 빠진 세계입니다. 내가 빠져있는 세계. 내가 관여 안 해도 만들어진 세계. 내가 관여 안 한다는 조건하에 만들어진 세계입니다.
근데 이 세상의 모든 세계는 누가 관여해요? 필수적으로 누가 관여하느냐 하면 내 세계, 내가 관여해야 돼요. 그래서 오늘 본문 2절에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 진다는 것을 미리 알죠. 그게 뭐냐, 이래 보면 돼요. 예수님이 요구했고, 예수님이 그 요구에 충족하신 세계. 예수님이 인간에게 요구했고, 그 요구를 누가 들어줬다?
인간이 들어준 게 아니고 예수님이, 요구한 당사자가 그 요구를 충족시켜줌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생성된 세계가 무슨 세계냐 하면 예수님의 이름의 세계입니다. 예수님 이름의 세계. 예수님이 제시했고 예수님이 혼자 다 이루신 세계. 지옥 속으로 들어온 거예요. 부활은 이미 완성했죠. 탈출에 성공했잖아요. 탈출 성공한 능력을 다시 지옥 같은 세계에 집어넣는 거예요. 딱 집어넣는 겁니다.
바늘 찌르듯이 들어온 거예요. 바늘 뒤에 뭐가 달려 있느냐 하면 실이 달려있죠. 그 실이 뭐냐 하면 이미 죽음에서 부활한 능력이, 줄로 연결된 실이 성령이라는 바늘을 통해서 우리를 찌르게 되면 우리는 아야! 하죠. 아야! 왜? 자존심이 상하니까. 우리의 정당성이 소용이 없으니까. 내 잘났다는 것으로 평생을 살거든요. 갑자기 내가 못난 사람이 되는 거예요.
어제 수요일에 그런 설교를 했는데, 내가 살고자 하는 의지의 반대말이 뭐라고 했습니까? 죽고자 하는 의지가 아니고, 사는 게 의미가 없다가 반대말이에요. 의미 없다. 자살하나 사나 아무 의미가 없는 게 반대말이에요. 성령이 오게 되면 아무 의미가 없는 게 드러나요. 아무 의미가 없어요. 왜냐하면 내 행함이 소용이 없으니까. 내 행함으로 탈출이 가능한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탈출 못하는 세계에 있잖아요.
그런데 한번 보세요. 평소에 우리가 누구한테 주눅이 들었습니까? 내가 만든 양심의 법, 내가 만든 법에 우리가 주눅이 들은 거예요. 자기가 만든 환상에, 환영에 오므라들고 있습니다. 매일같이. ‘내가 부모한테 효도를 안 하면 남들이 나한테 뭐라고 욕을 할까?’ 이게 내가 만든 환영이에요. 특히 맏이, 장남장녀는 주의를 좀 해야 돼요. ‘무슨 일이 터지면 가까운 일가친척들이 나보고 뭐라고 볶아댈까? 얼마나 내 행동을 주시할까?’ 본인이 그렇게 환상을 생각하는 중입니다. 거기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는데.
그게 선행에 과욕을 내는 거예요. 철저함에 철저함을 더 가하는 겁니다. 뭐 마귀의 시험이죠. 어떤 사태가 일어난 것은 내가 소용없음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주께서 일으킨 사태거든요. 부모가 아프다, 시어머니가 아프다, 누가 아프다 하는 것은. 그걸 수발하면서 내가 아무 도움이 안 된다는 사실을, 내가 존재해봤자 이거는 거추장스럽기만 하고, 말해봤자 그 말이 무슨 실효가 있겠어요. 내가 말한다고 병이 낫습니까? 위로받는 것처럼 강요하지 마세요. 위로받는 것은 따로에요. 말 따로 위로는 따로입니다. 목사가 설교한다고 그들이 구원받는 것이 아니에요. 구원 따로고 목사의 설교 따로에요. 설교 잘해가지고 구원받는 사람은 이 세상에 한명도 없습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십자가라는 것은 누가 빠진 세계라고요? 내가 빠진 세계. 다시 말해서 십자가 질 때, “아서라 고만. 따라오지 마! 너희들이 할 수 없는 일이야!”라고 외치면서 십자가 지시는 거예요. 얼마나 감사합니까? 엄마가 잡채를 하는데 두 살, 세 살 먹은 딸애가 지가 돕겠다고 나서봤자 이게 잡채가 아니고 엉망진창이잖아요. “아서라 고만. 니는 주는 잡채나 먹어라” 이렇게 사랑으로 말리죠. 우리가 너무 나서서 문제에요. 우리가 너무 부지런해서 문제에요. 그 부지런함이 뭐냐, 나의 철저함에서 나오는 거예요.
이제부터 어렵습니다. 나의 철저함에서 나오는데, 나를 둘로 나눕시다. ‘내가 이해하는 나’와 ‘주님이 이해하는, 주님이 생각해둔 나’, 이 두 가지로 나눕니다. 이 두 가지로 나누어지는 이유가 바로 십자가 사건 때문이에요. 십자가 사건 때문에. 일단은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모든 인간은 다 죽은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예수님 십자가를 통해서 인간에게 하는 이야기는 뭐냐, 일단 좀 맞자. 니 좀 맞자. 뭐 구원해주세요, 라는 그런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좀 맞자. 다시 말해서 일단 좀 죽자 이 말입니다. 제발 좀 죽어다오. 근데 이 죽는다는 것이 숨을 멎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죽음의 힘이 사는 힘보다 강할 때 죽음이라고 할 수가 있어요.
이걸 설명하려면 할 수 없이 어렵게 할 수밖에 없어요. 관계 또는 관계망인데, 십자가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은 새로운 관계가 나와요. 관계망이 나와요. 관계망이 되려면 나와 너가 성립이 되어야 둘 사이에서 관계망이 있죠. 어떤 애가 시골에서 혼자 공부 잘 한다고 생각합니다. 뭐가 안 됩니까? 혼자서 공부해서 관계망이 안 되죠. 요새 하도 섬이나 촌에는 애가 없어가지고 교장선생님 한명, 애 하나 하고 달랑 둘이 분교가 있죠. 걔가 어느 정도 잘하는지 모르잖아요. 그런데 누구 하나 전학을 왔다. 이제 난리도 아니죠. 드디어 비교대상이 생기잖아요. 관계라고 하는 것은 하나가지고는 안 돼요. 너와 나가 있어야 해요.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은 너와 나의 관계보다도 뭐가 우선되느냐, 나가 우선이 돼요. 혼밥, 혼술이라고 하죠. 혼자 사는 기술을 습득하는 것이 오늘날 20대입니다. 어떻게 결혼할거가 아니라 어떻게 혼자 사느냐가 우선이에요. 결혼은 뭐냐 하면 내가 시키는 대로 하면 결혼하고 안 그러면 말고 그런 거예요. 그냥 혼자 사는 거예요. 기술이 점점 늘어가지고 20대는 혼자 사는 것이 힘들지만, 자꾸 혼자 살다보면 30대쯤 되면 얼추 전문가 수준이 됩니다.
아가씨들이 옛날에는 결혼을 생각했거든요. 남의 애보면 아유, 예쁘다고 해가지고 나도 결혼해서 애 낳고 해야지 했는데, 이제는 20대 아가씨들이 직장에서 일하고 돈모아가지고 배낭 메고 해외 놀러가기 바빠요. 놀러가는 것도 처음가게 되면 뭐 놀라고 설레고 떨리고 하는 것이 있지만, 두 번 세 번 가게 되면 뭐 떨리지도 않아요. 하여튼 보너스 타게 되면 간지러워서 가만히 있지를 못해요. 가까운 일본이라도 갔다 와야 돼요. 지금 연말이라 일본 가면 한국아가씨들이 거기에 다 가 있을 거예요. 비행기 값이 얼마 안 하니까. 보너스 타면 무조건 여행이에요. 여행.
요새 아가씨들 돈 안 모아요. 쓰고 보자는 거예요. 즐기고 보자. 인생은 즐기는 것이라는 겁니다. 세대차가 난 게 아니라 완전히 찢어졌어요. 세대차가. 말이 안 통할 정도라니까요. 말이 안 통해요. 혼자 사는 재주를 자본주의가 제공하는 거예요. 혼자 사는 거. 관계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언제까지 우리 관계가 있을 것이냐 하는 그것은 그냥 만날 때부터 헤어지는 카운트에 들어갔다고 보면 돼요. 100일 하고 빠이빠이. 200일 하고 빠이빠이. 전부 다 헤어지려고 만나는 것 같아요. 헤어지려고 만나요.
근데 십자가에서는 어떻게 됩니까? 십자가에서는, 십자가 지신 분이 누구냐 하면은 예수님이라는 사람이죠. 이미 사람이고 또 그 분은 하나님이죠. 하나님과 사람, 벌써 관계가 됐죠. 요한복음 8장 17-18절에 나오죠.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에 율법에는 두 사람의 증인이 필요하다. 내가 곧 증인이고 아버지가 곧 증인이다. 이래 되어 있어요.
요한복음 8장 16절,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 관계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때는 아버지와 예수님 사이의 관계,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 이걸 고기 잡는 그물이라고 합시다. 그물을 우리에게 던지는 거예요. 우리에게 고기 잡는 그물이 철렁하고 덮쳐서 구원받는 겁니다.
그냥 예수님하고 우리하고 하게 되면, 우리 쪽에서 나온 믿음소망사랑이기 때문에 이거는 주님께 도달이 안돼요. 그냥 열심히 하는 거예요. 그냥 열심이고 악바리고 낮추고 또 낮추고 겸손이고 온갖 거룩과 경건을 다 동원해도, 가봤자 중력에 의해서 자기 얼굴에 침 뱉기밖엔 안돼요. 모든 교회 앞에 붙어야 돼요. 침 뱉는 교회. 자기한테 자기 침 뱉는 교회. 침 뱉는 우리교회. 전부 다 자기한테 침 뱉기에요. 도달이 안돼요.
이 관계망이 되어야 하는데, 기도해놓고 오늘 나 두 시간 기도했다. 다시 자기에게로 돌아와요. bring it back~ 보헤미안 랩소디 프레디 머큐리가 부른 노래. 다시 자기에게로 돌아온다고요. 누굴 사랑한다고요? 내 사랑이에요. Love of my life 내 인생의 사랑. 다시 내 사랑으로 돌아와요. 내가 없는, 내가 아닌, 그 사랑으로 채우지 마세요. 너무 심화문제를 냈구나. 내가 없는 내가 아닌 자리에 사랑으로 채우지 말라고 하는 것은 백지영이 불렀던 ‘사랑 안 해’라는 노래 가사에 보면 나와요. ‘내가 없는 내가 아닌 그 자리에 사랑 채우지 마’
이게 뭐예요? 비록 나는 내가 떠나도 떠나고 난 뒤에 니는 다른 여자를 만나지 말라는 이 말이거든요. 아내는 뭐라고 합니까? 내가 죽고 난 뒤에 새장가 들지 말라고 이러거든요. 왜 아내가 못 죽느냐 하면은 자기 남편 다시 장가갈까봐 화가 나서 악바리같이 살라고 하는 거예요. 이게 나에요. 나. 관계가 사라진 나. 관계없는 나에요. 오직 나뿐이에요. 혼자라니까요. 혼자. 왜? 창세기 3장에서 뭘 따먹었어요? 선악과를 따먹었어요.
선악과 따먹기 전에는 따먹지 말라는 분과 내가 관계로 형성되어 있죠. 따먹지 말라는 그물망으로 이렇게 연결이 되어 있어가지고, 계속해서 연결되고 연결이 되어 있었는데, 마귀가 와서 그까짓 거 가위로 잘라버려라. 그래서 선악과 자체를 강탈했다 했잖아요. 선악과 과실을 도둑질 했다는 것은, 이제는 선악과를 누구 맘대로 한다? 선악을 누구 조정 하에? 내가 선이라면 선이고 내가 악이라면 악이야. 자기의 수하에 두겠다는 거예요. 이게 악마가 하는 짓이고 우리가 그 마음을 닮은 겁니다.
엄마가 아프다. 남들이 판단을 어떻게 할까? 선과 악을 내가 판단한다고요. 주님께서는 그 법에 얽매이지 말라고 했거든요. 남이 뭐라고 하던 간에 얽매일 필요가 없어요. 왜냐하면 주님과 나와의 관계거든요. 주님 때문에 집안에 누가 아프고 하는 일이 생겨서 주님과 나 사이가 어떤 사이인가를 알려주려고 했는데, 우리는 그것을 나의 정당성, 나의 옳음, 나의 성실함, 나의 철저함, 나 이만큼 훌륭함, 그것을 남한테 보여주기 위해서 지금 활동을 그런 식으로 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우리 인간의 한계가 그래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십자가 사건에서 뭐가 나온다고 했습니까? 관계가 나와요. 관계. 관계가 나오니까 이 관계에 의해서, 아까 나는 어떻게 된다고 했습니까? 좀 맞자고 했죠. 십자가 사건에서 나는 어떻게 됩니까? 죽어야 되죠. 그럼 나는 있어요? 없어요? 죽어서 없어지고, 주님과 구원되는 새로운 나가 어디서 나옵니까? 십자가 사건에서 나오는 거예요.
왜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율법의 완성이거든요. 율법의 완성은 바로 형제를 위해서, 원수를 위해서 사랑하는 주님의 사랑이 나옵니다. 사랑은 마치 역기봉처럼 바벨이 양쪽에 달려있어야 돼요. 그 안에 작대기가 사랑이라면 누구와 누가 사랑할 거냐, 라는 그 실체를 위해서, 사랑을 사랑답게 하기위해서 매달리는 양쪽이 있어야 돼요. 이쪽은 의인이신 주님이고, 이쪽은 죄인이 되는 거예요. 의인이 죄인을 구원하는 겁니다.
아, 이게 억수로 어려운 이야기에요. 강의를 하지만 아마 사람들이 제일 모르고 있는 것이 이 점이에요. 의인이 죄인을 구원한다는 이 점을 제일 모르고 있어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여러분들이 의아해할 거예요. 다 알고 있는 이야기인데, 그거 뭐 쉬운데, 목사님 왜 어렵다고 합니까? 라고 하는데, 누가 한번 찾아보세요. 누가복음 23장 34절. 제가 읽겠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예수님 입장에서, “아버지. 저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 이 사건은 아버지와 나의 사건이잖아요. 저들은 철딱서니가 없어가지고 일이 어떻게 되는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분명히 제가 방금 알려드렸죠. 우리는 성령이 오기 전에는 십자가에 대해서 알아요? 몰라요? 모르잖아요. 이제 어려워집니다. 우리는, 내가 생각하는 나는 모르죠. 모르는데 우리는 모른다고 할 위인들이 아니에요. 이미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서 모르는 것을 가지고 자꾸 악마의 시험을 받아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십자가에 대해서 안다고 하는 거예요. 이 안다를 쪼개보면 뭐가 들었는가 하면 선악이 나와요. 선악이. 선악이 뭐냐 하면 참 의로우신 분이 억울하게 죽었다, 라는 쪽으로 십자가를 이해해요. 이게 화근이에요. 이게 문제가 되는 거예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라는 영화가 있죠. 멜 깁슨이 감독한 예수님이 얻어맞는 영화. 그 영화를 보시면 참 주님이 불쌍하다, 안 됐다, 그런 생각이 들죠. 예수님이 십자가지고 가실 때 거리에 아줌마들이 나왔어요. 예수님보고 하는 말이 참 안 됐다, 불쌍하다고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예수님께서 그들의 동정에 대해서 좋게 생각했습니까? 아니면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휙 돌아보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있어요. 니나 챙기세요. 니나. 나를 위해서 울지 말고 니 딸들을 위해서나 울라 이 말이죠. 누가 누구를 걱정하고 있느냐 이 말이에요.
그 아줌마들은 선악체계를 가동시킨 거예요. 자기는 괜찮다 이 말이에요. 자기는 십자가 안 졌으니까 편안한데, 예수님은 죄 없는 분이 저렇게 억울하게 됐으니까 참 안 됐다가 되는 거예요. 자기는 지금 배부르다 이 말이거든요. 십자가 성령은 바로 이러한 지층을 뚫고 들어오면서 우리가 이처럼 철딱서니가 없다는 것을 전부 다 까발립니다. 트랙터로 밭을 갈 때 보면 밑에 있는 흙들이 다 까발려지죠.
십자가가 지나가게 되면은요,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 가지고 고민했고, 신경 쓸 필요도 없는, 정말 이거는 신경 쓸 필요도 없는, 그것마저도 은혜인데 고민고민하고 있었다는, 우리의 정당성에 부합된, 이 정도는 가져야 된다는 그 오기의 죄성을 완전히 LA이 갈비 하듯이 다 뒤집어내는 거예요. 뒤집어내요. 성령이 오게 되면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우리가 고민할 것은 주께서 주신 적이 없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내 몸이 아프다. 그래서 뭐? 죽으라고 아픈 건데 죽어야지.
자, 여기서 모른다고 했죠. 그럼 진도 한번 나가봅시다. 나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내가 이해하는 나. 내가 이해하는 나는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선악과에서 나와요. 선악과. 선과 악을 누가 통제 하겠다? 내가 통제하고 관리하겠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 항복하고 이익이 되면 이걸 뭐로 봅니까? 선으로 보고. 나에게 불리하면 이걸 악으로 보는 거예요.
만약에 내가 베트남 사람이다. 근데 박항서 감독이 와서 스즈키 대회에서 우승을 했다. 내가 베트남 국민인데, 그럼 그게 뭐가 돼요? 악이 돼요? 선이 돼요? 선이 되죠. 박항서 감독 때문에 우린 악한 나라라고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베트남 축구가 우승을 하니까 베트남 국민이 왜 좋아합니까? 이게 잘못된 거예요. 우리 애가 성적이 올라가는데 내가 왜 좋아해요? 내가 이해하는 나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내가 이해하는 나.
그런데 성령이 오게 되면 뭐냐 하면 공부 잘하고 못하고 거기에 대해서 니가 신경 쓸 필요가 없다, 라고 이야기를 해요. 왜냐하면 나를 이미 죽은 자로 다루시기 때문에 그래요. 죽은 자가 어떤 목표 같은 것을 정하고 한다는 것은, 자기가 죽은 자라는 인식이 그만 사라지고 앞으로는 악바리처럼 더 살아야지, 왜? 희망이 있으니까. 갑자기 또 희망을 만들어내 버렸어요. 희망을 만들어냈어요. 그래서 이 나, 다른 말로 자아는 뭐냐, 늘 구성적이라고 했어요. 구성적이다. 나라는 것을 내가 구성, 조성하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이 이해하는 나는 십자가 안에 들어있는 나에요. 십자가 안에 있는 나는 뭐냐 하면 이거는 구성적이 아니고 돌발적이에요. 우연적이고 사건적이에요. 그래서 내 안에는 두 개가 들어있어요. 내가 스스로 괜찮은 나를 다듬기위해서 만들어낸 구성적 자아가 있는 반면에, 구성적 자아를 만들어버리면 그 자아가 나한테 우상이 되잖아요. 우상이 되고, 그 우상이 권력단체가 되어서 또 다시 예수님을 핍박하게 돼요. 쉽게 말해서 예수님을 핍박한다는 것은 못 박아 죽이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보다는 누가 중요하다? 역시 내가 중요하다. 이래 되는 거예요.
그래서 성령께서 십자가 사건을 일으키게 되면 나와 나 사이를 대조를 시킵니다. 대조를 시키면서, 대조하는 가운데서 무슨 사건이 일어나느냐 하면, 십자가 사건을 개입하게 되면 나 말고 다른 나, 다른 나 말고 나, 두 개의 나 사이를 갈라지게 하는 그러한 결과를, 십자가 사건이 성령을 통해서 오게 되면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거예요.
강남강의에서 했습니다만, 성령은 무슨 사건 이후에 오게 되어 있어요? 십자가 사건이죠. 십자가 사건 이후에 성령이 온다는 말은 십자가 사건이 없어버리면 성령은 온다? 안 온다? 안 오죠. 그런데 오늘날 한국교회는 십자가와 관련이 없는 성령을 언급했어요. 왜 그러냐 하면 삼위일체 때문에 그래요. 삼위일체 이론 때문에, 세 분의 하나님이 5분 대기조로 대기상태에 있어요. 성부 필요하면 성부 제공하고 성자 필요하면 성자 제공하고 성령 필요하면 성령 제공하고. 세 분의 시어머니가 사이좋게 한 집에 살고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이때 성령이 필요하면 “성령을 주시옵소서. 성령 충만케 하옵소서.” 이랬다가 “성자여 오시옵소서.” “성부께서 오시옵소서.” 이러니까 성부성자성령 한꺼번에 세트로 해서 다 찬양을 받으옵소서 라고, 이런 식으로 한다고요. 순서가 있는데. 성령은 십자가 사건을 전달하기 위해서 오신 분이에요. 그럼 십자가 사건을 전달하게 되면 예수님의 정치적인 비극적 사건이 우리에게 반복되는 거죠. 그럼 여기서 권력에 의해서 죽으신 예수님이잖아요. 그 권력에 대해서 우리가 가하다, 선하다, 옳다, 라고 여겼기 때문에 예수님을 죽인 거예요.
참, 이런 말이 어려운데 우리가 선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죽였다. 이 말도 맞지만 더 정확하게 말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구현하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선악과를 따먹고 자칭 선하다고 우기게 만들어가지고 십자가사건을 유발시킨 거예요. 하나님께서. 그래서 2절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는 것을 미리 아시는 거예요. 내가 십자가 질 것이라고.
쉽게 말해서 나를 죽이라 이 말이에요. 안 죽이면? 죽일 때까지 예수님은 계속 나서시는 거죠. 기어이 안 죽이고는 못 배기도록 만드시는 거예요. 우리가 그런 인간입니다. 왜냐하면 나라는 자체가 선악이잖아요. 선악으로 있잖아요. 내가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뭐가 살아있다? 내 안에 선악이 살아있어요. 그러나 선악은, 인간인 피조물은 절대로 먹어서도 안 되고 알아서도 안 되는 거예요. 이거 알게 되면 에덴동산하고는 빠이빠이입니다.
다시 천국에 가려면 이걸 어떻게 처리해야 돼요. 선악을. 선악과와 더불어서 우리를 죽여 버려야 돼요. 선악을 아는 나를 선악과와 더불어서 죽여야 돼요. 그럼 우리는 이렇게 선한데, 선악을 알 정도로 선한데, 나를 왜 이렇게 죽음으로 몰아넣고 힘들게 하십니까? 하고 반항하겠죠. 반항 그것이 예수님이 맥없이 죽게 만드는 요인으로서 그걸 거기다가 부각시키는 거예요. 약을 올리게 해서, 그 약을 올린 자에 의해서 예수님이 죽게 만드는 겁니다. 피 흘리도록 만드는 거예요.
아까 첫째 시간에 그런 이야기를 했죠. 은혜가 임하면 주체와 객체가 바뀐다고 했죠. 십자가가 임하면 내가 어떻게 살아도 주께서 십자가를 증거 하기 위해서, 또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통일하게 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유발된 사건이기 때문에 나는 뭐로 드러나면 돼요? 죄인으로 드러나게만 되면 감사한 겁니다. 다시 이야기합시다.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알기만 하면 모든 것이 감당이 돼요. 내가 죄인이 아니면 도망치기 바빠요. 숨고 도망치고 도 닦으러 지리산에 들어가고.
이게 뭐냐 하면 지가 잘났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냥 시장바닥에서 장사하고 물건사면 되는데, 꼭 뭔가 기도원에 가서, 또 집에서 빌면 안 돼요. 기도원 한적한 곳에 가서 기도한다고요. 근데 기도하러 갈 때 휴대폰은 왜 들고 가요? 휴대폰을 들고 가는 이유는 어머니 돌아가셨다는 그 소리 듣고 싶어서 그래요. 또 들고 가는 이유는 내가 거기서 죽었을 때 자식이 와서 내 시신 찾아가라고 연락취하는 거예요. 여전히 나에요. 나. 혼자 있는, 혼자 선과 악을 판단할 권리가 있다고 우기는 이 나. 나는 처치곤란입니다.
며느리하고 시어머니가 만났다. 며느리고 시어머니고 뭐 계급장 다 떼고 합시다. 그럼 나와 나의 만남이에요. 그 만남의 대화가 뭡니까? “내가 정당하니까 이런 권리를 누릴 수 있습니다.” “아니야. 애기야! 내가 정당하니까 이런 권리가 있다.” 결국은 뭡니까? 둘 다 자기 정당함의 논조가, 대화가 오고 가는 겁니다.
“내가 김장해서 경비실에 맡겨 놀 정도니까, 그 다음에 내가 아파트에 연락 없이 와도 되잖아. 김장까지 해줬으면 그만한 자격이 있잖아.” 며느리가 있다가 “그 김장김치 갖다가 버리세요. 내가 마트에서 사서 먹는다고 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니가 시어머니의 김장솜씨를 우습게 보는구나.” “우습게 보는 것이 아니고 내 영역에 쳐들어오지 말라는 이야기에요.” 막 이런 식으로.
“우리가 살 때는 그리 안 했다.” “요새는 시대가 다른데 왜 이러십니까? 그러면 옛날로 돌아가서 사시든지요.” 지금 시대가 혼자 사는 시대에요. 허락 맡아야 돼요. 자식 키워줬다고 권리주장 못합니다. 부모가 빚졌다. 자식이 안 갚아줍니다. 뭐 연예인 됐다고 다 갚아주는 것이 아니에요. 물론 그 부모는 연예인 자식 팔아서 돈 빌렸겠지만.
누가복음 23장 34절에 보면, 저희가 모른다고 했거든요. 모른다는 그 증거가 뭐냐 하면 관계망인데, 관계망의 형성은 십자가로 돼야 돼요. 다시 설명하면 이겁니다. 예수님 혼자 있습니까? 아버지하고 함께 있습니까? 아버지하고 함께 있죠. 여기서 생겨난 것이 하나의 그물망이라고 했죠. 이불 또는 그물망. 이걸 우리한테 뒤집어씌워서 우리로 하여금 아들 아닌 자를 아바아버지라고 부르짖으면서 아들 되게 하는 거예요.
아들 되게 하려면 아버지가 예수님에게 했던 그 관계망이 완성이 되어야 하고 인정이 되어야 돼요. 우리가 천당 가려고 해서 천당 가는 것이 아니고, 이 이불, 이 관계망, 그물망이 우리한테 덮쳐져야 해요. 이 관계망이 인정될 때 우리는 아들로 인정이 되는 겁니다. 성령께서는 이 관계망을 줘요. 예수님이 아버지 앞에 아들 됨으로 할 때, 십자가로 인하여 됐잖아요. 그 십자가의 관계망을 우리한테 주는 겁니다.
주게 되면 우리는 혼자 살고 있다가, 그 다음에 어떻게 산다고 했습니까? 복습입니다. 혼자 살고 있다가, 혼자 산다는 그 자체가, 아무리 선하게 살아도 이 자체는 뭡니까? 아들이다? 아니다? 아들이 아니죠. 관계망이 형성이 안 됐기 때문에 아들이 아닌 거예요. 그럼 우리가 하나님하고 사귀면 되지 않느냐? 나라는 인간과 하나님과 사귀면 이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가 아닌데요?
아버지와 관계망을 할 수 있는 예수님의 그 관계망이 와야지, 내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고 해서 내가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나 자체가 멀쩡하기 때문에 그래요. 예수님에 의해서 나는 죽고, 새로운 그 죽은 자리에 예수님이 생각해둔 나가 심어져야, 그 심은 나와 이 아버지의 사이가 성령에 의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겁니다.
임플란트 있죠. 임플란트 할 때 뒤집어씌운다고 해서 그냥 뒤집어씌우면 다 떨어져요. 먼저 나사못으로 잇몸에 박아야 되죠. 박고 난 뒤에 거기에 씌우잖아요. 이 박는 역할, 새로운 나를 박아 넣어서 거기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명분을 주는 거예요. 이 박아 넣을 때, 박아 넣은 이 나가 누구냐 하면 바로 십자가 안에 있는 나. 예수님에 의해서 주어진 새롭게 태어난 나. 또는 율법 완성, 법에 저촉이 필요가 없는, 더 이상 간음이고 살인이고 일체 법에서 벗어난 나를 심어놓고, 심어진 그것을 가지고 주께서는 우리를 아들 만들게 하신 거예요.
그것이 구약 이스라엘에 나옵니다. 이스라엘백성들에게 모세가 언약을 세울 때, 자 백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시내산, 불붙는 시내산에 계십니다. 다 같이 합심으로 하나님을 부르세요. 부르면 하나님이 응답하십니까? 아니죠. 여기 누가 대표로 다녀와야 되죠. 누굽니까? 모세죠. 모세가 손에 뭘 들고 왔느냐 하면 돌판, 법 들고 왔고 또 하나는 뭐냐 하면 희생의 피, 제사법이죠. 피를 뿌려버립니다. 법을 이야기하고 그 다음에 피를 뿌리고. 그럼 법 플러스 뭐가 돼요? 법+피.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언약백성이에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법 앞에 모든 인간은, 인간이 생각하는 선악은 일체 하나님은 인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선악을 판단할 때, 그 판단하는 판단 자체가 우리한테 없어야 될 판단이거든요. 선악을 판단하는 자체를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허락을 안 한 거다 이 말이죠. 이거 악마가 집어넣은 겁니다. 악마를 처벌하기 위해서 만든 것에 악마가 그걸 가지고 인간을 밀어 넣어 방패막이 삼은 겁니다. 선악을 벗어나서 이미 선악이 종결된 상태에 나를 집어넣은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뭐냐 하면 주님보시기에 우리는 죄인이 되는 거예요. 예수님만 의인이고 나머지기는 죄인 되는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율법에 의해서 모든 인간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기 때문에. 그거 심어놓고 그 죄인을 주님의 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얻는다는 말이 어디에 나옵니까? 에베소서 1장 7절에 나오죠. 그 대목을 볼 때 제가 심쿵했죠. 심쿵. 가슴이 뛰었죠.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우리의 죄 사함이 우리의 선행이 아닌가요? 우리의 경건이 아닌가요? 아닙니다. 피로 말미암아. 다시 말해서 니는 혼밥, 혼자 살면서 먹는 밥처럼, 홀로 산다는 인간 자체를 주께서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피와 맺어진 관계망. 피의 관계망만 주께서 인정하시는 거예요. 마귀가, 세상의 악마, 정치적 세력, 이 모든 마귀가 한결같이 커버하고 안 들려지게 하려고 애쓰는 것이 뭐냐 하면 주님의 행위로 우리가 용서받는다는 사실. 우리가 용서해달라고 해서 용서받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피로 말미암아 용서가 되거든요. 그걸 적극 저지하고 안 들려지게 하는 거예요. 지금 교회도 마찬가지고. 선한 게 진리가 아니고 진리는 십자가에서 진리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십자가에서 새로운 관계망이 형성돼서 우리에게 죄 사함의 영역으로 넘긴 사실을 말 할 수 있는, 이제는 저희들에게 유일한 기쁨이요 비밀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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