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작은 자 (마 25장 41-45절)
대전- 105강
이근호
2018년 10월 30일
본문말씀: 마태복음 25: 41-45절
(마 25: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 된 나라를 상속 받으라
(마 25: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마 25:36)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마 25:37)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마 25:38)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마 25:39)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마 25:40)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마 25: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 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마 25:42)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마 25:43)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 하였느니라 하시니
(마 25:44) 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 하더이까
(마 25:45)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오늘은 마태복음 25장 41절입니다.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 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이래 되어 있죠. 지옥이 사람 조지려고 만든 것이 지옥이 아닙니다. 지옥은 마귀 조지려고 만든 게 지옥입니다. 그럼 지옥 정 가고 싶거든 마귀 같은 사고방식을 가지면 됩니다. 마귀 같은 사고방식. 그럼 마귀 같은 사고방식을 어디서 얻을 수 있느냐, 광야에서 예수님과 마귀하고 붙었을 때에 마귀의 사고방식이 나왔습니다.
사람은 떡이 있어야 산다. 떡만 가지고는 안 되죠. 사람은 인기가 있어야 돼요. 사람들이 우와! 대단하다! 라는 인기가 있어야 돼요. 그 다음에 인기가 있고 떡만 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은 뭔가 포부가 있어야 되고 목표가 있어야 되죠. 세상권세, 눈에 보이는 것이 더 잠식하고 자기 영토를 넓히는 그런 야망이 있어야 된다. 혹시 주위에 그런 사람이 있거든 귀신 만났다고 보시면 돼요. 그런 사람만 만나죠. 그런 사람만. 밖에서나 어디서나 심지어 교회에서도, 집안의 명절 때도. 그런 사람들뿐이죠.
그게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천국으로 데려간 사람도 본인의 실력으로 간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모세나 엘리야도 하나님을 얼마나 모독했어요? 엘리야가 죽으려고까지 했어요. 엘리야가 죽으려고 했고, 모세도 그랬죠. 차라리 죽여주옵소서! 라고 했다 이 말이죠.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모세나 엘리야가 힘들었다는 말은 예수님이 힘든 것을 앞당겨서 약간 체험한 거예요. 그것도 약간.
그 고생하고 힘들다는 것은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주위에서 압박을 그렇게 해줬기 때문에. 압박을. 주위의 거머리들이 물어뜯었다 이 말입니다. 선지자들을 물어뜯는다 이 말입니다. 오늘날 성도도 마찬가지에요. 그래서 성도는 찾으면 없어요. 그런데 마귀에게 둘러싸여 있는 사람이 있거든 그 사람을 성도라고 보면 돼요. 마귀의 표적이 되고, 악마의 공격표적이 되는 어떤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백발백중 성도입니다. 성도는, 손들고 나오는 성도는 없어요.
아까 첫째시간에 한 것을 봅시다. 첫째시간에 우리가 제로라고 했죠. 1이 아니고 0이라고 했죠. 이 말은 뭐냐 하면 몸이 없다는 말이 아니고 내가 없다는 말이에요. 몸은 있어요. 몸은 있는데, 그 몸은 누가 접수하느냐 하면, 누가 결정하느냐 하면, “너 오른쪽이야.” “너 왼쪽이야.”라고 하는 결정은 몸의 주인인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결정해요.
여기 41절을 한번 봅시다. “또”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라이트right입니까? 레프트left입니까? “왼편에 있는 자들” 그 방향, 깜빡이 잘못 틀어서 지옥 가는 거죠. 왼편에 있는 자들. 왼편에 있는 자들은 어딜 가느냐 하면은 악마가 있는 곳에 가요. 이 말은 왼편에 있는 자들이 그 행동에 합당한 벌을 내리는 것이 아니에요. 그 사람이 나쁜 짓을 많이 해서 지옥 가는 것이 아니라 이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 지옥이라는 곳이 악마가 가는 곳이기 때문에, 악마가 가는 곳에 참여했기 때문에 본인의 죄가 아니에요. 마치 천국 가는 것이 우리가 착한 일을 많이 했기 때문에 천국 가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의 의가 있으면 강도든 세리든 창기든 상관없이 다 갑니다. 마찬가지로 지옥도 악마가 가기 위해서 만든 것이기 때문에, 악마의 성격만 갖고 있으면 얼마나 그 사람이 점잖고 효도했고 나라에 충성하고 몸 바쳐서 충성하고 백날해도 이 사람은 지옥 가는 거예요. 오른쪽 천국에 누가 가는가를 모르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지옥은 누가 가느냐 하면은 이방인들이 가는 겁니다. 이방인의 특징이 뭐냐, 비-언약입니다. 언약이 없어요. 언약이 없다는 말은 본인이 언약을 준수 안 했다는 말이 아니고, 언약을 주신 분에 의해서 조성되지 않은 단체. 그게 바로 이방인입니다. 그 사람들 입장에서는 되게 억울해 보이죠. 예수님께서 일방적으로 찾아오지 않은 사람들의 집합. 그걸 달리이야기하면 예수님이 안 찾아와서 너무 심심하고 너무 답답해서 본인이 예수를 조작해내는 집합. 그게 지옥 가는 거예요.
그 예수가 누굴 위한 예수냐 하면은 바로 나, 1을 위한 거예요. 나를 위한 거. 기도해도 돌아 돌아서 결국 내자리가 되는 것. “나는 우리가정보다도 우리교회가 잘 되기를 바랍니다.”라고 백날 교회 돌아다녀도 결국은 자기가 소속되었다는 것을 티내는 거죠. 나는 내가정만 이기적으로 하지 않고 나와 민족을 위해서, 그 민족에 누가 삽니까? 자기죠. 자기가 만약에 미국에 이민가면 트럼프를 위해서 기도할 거예요. 왜냐하면 소속이 미국이기 때문에.
미국만 잘 되면 우리나라가 못돼도 괜찮아요. 왜? 자기는 이미 미국시민이기 때문에. 캐나다시민이기 때문에 안 할 거예요. 그래서 이방인은 뭐냐 하면 언약이 없는 사람이 이방인이에요. 언약이 없는 사람. 같은 인간끼리 견주지 마세요. 누가 더 착하고 나쁘냐고 견주지 마세요. 언약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언약을 이 땅에 몰고 이 세상에 왔는데, 왜 사람들은 예수님이 갖고 온 그 귀한 언약을 왜 못 알아봤을까?
누가복음 16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상당히 이상한 이야기를 해요. 예수님께서 언약이라는 말을 뭐로 고치느냐 하면 이걸 지혜라고 이야기를 해요. 지혜. 너희들이 지혜가 없어서 망한다고 보는 거예요. 그러면 이 지혜를 예수님이 몰고 왔는데 왜 지혜를 안 받느냐, 그들이 자기의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자기 의에 의하면 예수님의 이론에 의하면 이 사람들은 지옥에 갔죠. 그러면 천국에 가는 사람들이 있어야 될 게 아닙니까?
누가복음 16장에서 천국 간 사람이 있는데 이렇게 되어 있어요. 청지기인데 어떤 청지기? 불의한 청지기에요. 불의한 청지기. 불의한 청지기가 천국가요. 왜? 불의한 청지기가 바로 이 세상에 예수님이 증거 해야 될 지혜를 대표로 보여주는 모델이기 때문에 그래요. 불의한 청지기. 의로운 청지기가 아닙니다. 의로운 청지기 아니에요. 불의한 청지기. 불의한 직원. 횡령한 회사직원. 직원이 이 더러운 세상에서 천국 가는 지혜가 방출되는 중심인물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천국 간다는 것을 언제 확신하고 언제 알 수가 있습니까? 우리가 어떤 자라는 것을 확신할 때입니까? 우리가 내세울 의가 없음을 확신할 때, “내가 이만큼 했으니까 복주세요.”라고 전혀 건덕지가 남아있지 않는 상태가 될 때, 내가 하나님보고 이거 달라 저거 달라고 하는 자체가 말도 안 되는 뻔뻔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기분좋아하면서 그걸 인정할 때, 나 같은 것은 밥 먹고 사는 것도 고맙다는 것을 너무나 알 때, 스스로 자기가 불의한 청지기 집단에 속했다는 것을 자기가 알 때, 그 사람이 바로 세상에 나가서 지혜를 발산하는 중입니다. 발산하는 중이에요.
“목사님, 요즘은 은혜가 없는 것 같아서 큰일 났습니다. 믿음이 없어서 큰일 났습니다.” 기다리세요. 저스트 어 모먼트 플리즈Just a moment, please,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만드실 거예요. 내가 불의함에서 오는 그 프리free, 자유함 이거는 돈 주고 못 바꾸십니다. 그동안 이 의로움 때문에 얼마나 악마한테 쪽팔려가며 시달렸습니까? “니 그 낯짝으로 어디 못 내민다.”라고 얼마나 구박을 받았어요? 설움을 받고? 불의해도 살 수 있는 세상이 아니잖아요. 의로워야 사람대우 받는 세상이 아닙니까?
그 대우라는 것,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기 위해서, 우리는 인정에 관한 투쟁을 어릴 때부터 해왔잖아요. 인정투쟁. 인정투쟁이라고 하는데. 인정을 받기 위한 투쟁을 해왔잖아요. 심지어 교회 와서도 우리는 그런 식으로 굉장히 추궁을 당하지 않았습니까? 도대체 우리가 언제까지 보이스피싱을 당할 겁니까?
소위 총명하고 똑똑하다고 하는 사람, 어떤 사람한테 이야기를 들었는데, 95세로 총명하기로 유명한 노인네가, 혼자서 당당하게 산다고 큰소리친다고 했던 노인네가 남은 재산 보이스피싱 당해서 다 날렸어요. 남들은 아이고, 안 됐다고 하지만 자식들은 어떻게 됩니까? 우리 아버지 재산 좀 있다고 우리가 안심 푹 놓았는데, 이 재산 다 날아갔으니까, 이제는 형제간끼리 이맛살을 찌푸릴 일만 남았어요.
“형님 좀 사니까 20만원 내소.” “형님은 공직에 있으니까 50만원 내소.” 뭐 이런 것. “니는 맞벌이 하니까 70만원 내라.” “형님, 그러지 마소. 우리 애 아빠 곧 퇴직합니다.” 돈 내라고 해도 돈은 내지 않고, 전화해가지고 “돈 얼마 됐나? 이번만 한번 봐줘.” “봐주는 것이 어디에 있어요? 약속해놓고.” “사람 약속은 변하기 마련이지. 약속 한번 했다고 니 나한테 그렇게 대드나?” 되도 않은 것을 가지고 또 싸움이 벌어지는 거예요. “다시는 니 낯짝 안 본다.”
갈수록 낯짝 안 보는 형제들이 많아졌어요. 낯짝 안 보면 전부 다 어디에 가 있어요? 전부 다 사이판에 가 있어요. 다 떠내려가고 태풍불어서 오지도 못하고. 이게 바로 개인주의 아닙니까? 나. 모든 게 나만 잘 되면 아무 탈 없다는 사고방식입니다. 이게 1이 문제에요. 몸이 있는 게 문제가 아니고 그 몸을, 1을, 그 있음을, 결과물인데, 원인을 주님께 찾아야 되는데, 그냥 단독자로 살아가는 거예요. 자기의 가치에 몰두하면서.
그래서 지옥 가는 사람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렇게 이야기해요. 41절 여러분들이 기억하시죠. 이 왼편에 있는 사람들, 이 사람들이 왼편에 가고 싶어서 갔겠습니까? 아니면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남은 자처럼 주께서 분류를 그렇게 했겠습니까? 주께서 그렇게 분류를 했어요. 주께서 그런 분류를 한 걸 가지고, 목사라는 빽으로 그 분류를 취소 못 시킵니다. 목사는 아무 능력이 없어요. 사람을 개조시키거나 구원시킬 능력이 전혀 없습니다. 목사는. 전도자는.
왜냐하면 왼편, 오른편은 본인 소관이 아니라니까요. 그냥 같은 집단에 속한, 그저 말씀 전하는 하나의 그 기능을 분양받은 것뿐이에요. 302호가 301호보다 더 좋은 집이 아니에요. 아파트는 똑같은 집이에요. 똑같은 집인데 하는 일이 다르죠. 한쪽은 피아노레슨하고 한쪽은 끼이익대고 바이올린레슨하고. 소리가 다르죠. 부부싸움도 하여튼 나오는 소리가 다르지, 그 아파트는 똑같은 거예요. 괜히 욕심내지 마세요. 평수가 같아요.
먼저 오른편에 있는 사람부터 이야기를 해봅시다. 오른편에 있는 사람에게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주님께서 이렇게 해요. 내가 목마를 때 니가 마실 것을 주었다고 이야기해요. 오른편에 있는 사람이 자기기억을 끄집어내 봅니다. ‘자, 주님이 오셨는데, 주님이 물 달라고 언제 이야기했지? 물 달라고 이야기한 기억이 없는데? 그리고 물 달라고 이야기한 기억도 없을뿐더러, 물 달라고 했는데 물 준 기억도 없고.’
자, 인간의 자아라고 하는 것은 아무리 체험이 다양해도 기억된 것만, 현재 기억된 것만 그것이 자아의 내용물이 되는 겁니다. 기억된 것만. 그래서 첫인상이라고 하는 것이 그렇게 무서운 거예요. 첫인상에 꽂혀버리면 주위에서 아무리 말려도 미친 듯이 좋다고 합니다. 나중에 6개월 살다가 이혼하든 말든. 첫눈에 반해버리면 모든 게, 그게 아름다워져요. 그리고 남녀가 사랑이 없기 때문에 조건을 따지잖아요. 사랑이 있으면 조건은 문제가 될 게 아닌데, 사랑이 없기 때문에 억지를 부리는 겁니다.
어떤 사람을 선을 보게 했는데, 아가씨 쪽에서 맘에 안 든 남자에게 핑계대기를 “우리 아버지 닮아서 쌍꺼풀이 있다.”라고 이렇게 이야기를 해요. “나는 우리 아버지가 쌍꺼풀이 없으면 좋겠는데 또 쌍꺼풀이 있네.” 이래 나온 거예요. 근데 남자가 좋아보세요. “세상에! 나는 우리아버지처럼 친숙하다.”이래 이야기할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이 해석한다는 것은 안에 있는 자기의 본심을 다 드러내는 겁니다. 그리고 인간은 자기의 본심을 기어이 숨기고는 못 살아요. 오른쪽 아니면 왼쪽, 왼쪽 아니면 오른쪽입니다. 이걸 어떻게 왼쪽이면서 오른쪽 흉내 내고 이렇게 못해요. 들통 다 납니다.
오른쪽 천국 간 사람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그렇지요. 나라는 인간은 갈만한 인간이 아닙니다. 제가 언제 그렇게 했습니까?” 자, 논리가 이래요. 예수님께서 문제를 낸 셈이 되는 거예요. 내가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었다. 문제를 냈어요. 문제를 냈으면, 제가 몇 월 며칠에 물 드렸습니다. 이래 하는 것이 인간세계에서는 정답이라고 보는 거예요. 그런데 주께서는 물을 안 주었다고 합니까? 주었다고 합니까? “너는 물을 내게 주었다.”로 정답이 포함된 문제를 낸 거예요. 물을 준 너를 내가 찾아온 거예요. 그러면 “제가 물을 준 기억이 없습니다. 물을 준 적이 없습니다.”라고 답할 때, 그게 이 문제의 정답이에요.
“내가 구원받는 것은 주님의 일방적인 선언이지, 나의 선행이나 나의 행함하고는 아무 무관한 일입니다. 그것을 제가 압니다. 제가 알게 되었습니다.”라는 게, 이게 천국 가는 사람들의, 같은 아파트에 사는 공통적인 고백이에요. 천국 가는 아파트단체가 있다고 칩시다. 101호부터 1025호 하나같이 이야기하는 것은, 이 아파트는 주님이 주신 것이라는 겁니다. 나는 주님이 장만한 인생에 들어와서 그냥 살뿐이라는 것.
목마를 때 물을 줬는지, 배고플 때 밥을 해줬는지, 전혀 기억이 없는 거예요. 뭐, 주님께서 한푼 달라고 돌아다니지는 않았잖아요. 그럴 필요도 없고. 주께서 일방적으로 그렇게 니가 한 적이 있다는 겁니다. 그럼 이 말을 이어버리면 뭐냐 하면은 내가 하루하루 내 뜻대로, 내 결정대로, 내 선택대로 했는데 주께서는 예수님께 물을 줬다는 것에 부합이 되도록, 내 인생을 그렇게 몰아세웠다는 결론에 도달되는 겁니다.
문제를 출제하신 분이, 문제의 정답도 출제하신 분이 강제로 그렇게 구성해버린 거예요. 천국 가는 사람은 그저 고맙죠. 성령 받음의 특징이 뭐냐, 그저 고마운 거예요. 그저 감사하고. 성령을 생각하지 않을 때는 어떻게 되느냐, 그저 입 튀어나오는 것. 항상 온종일 화내가지고 있어요. “어디 건드려 봐. 건드려 봐.” 항상 화를 내고 있어요. 그 화낸 이유가 뭐냐 하면 내 몸을 내가 관리하고 있어서 그래요. 화내고 있을 때 누가 뭐라고 하면 변명이 나와 버리죠. 이거는 변명이 아니잖아요. 뭐 한 게 있어야 변명이죠. 한 게 없는데 무슨 변명입니까?
1이 있는 사람한테는 변명인데, 제로가 된 사람한테는 변명이 없어요. 제로인데 뭐. 주께서 하게 하셔서 지금까지 살아왔는데, 내가 뭐 이렇게 잘했다, 못했다, 하는 이야기가 없어요. 잘못 한 것도 주께서 잘못하게 하신 것이고, 그것조차 천국 가는 조건에 부합되도록 나로 하여금 그렇게 했기 때문에 뭐 책임질 일도 없고, 배짱도 이런 배짱이 없는 겁니다.
그런데 반면에 지옥 가는 사람을 한번 보세요. 지옥 가는 사람은 뭐냐 하면은 “너는 내게 해준 적이 없다.”라고 선언을 해버렸어요. 지옥 가는 사람의 특징은 뭐냐 반발입니다. 둘째시간의 제목은 반발입니다. 반발. 자, 반발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내 안에 있는 생각과 바깥에 있는 주님의 생각과 충돌한다는 겁니다. 충돌.
그래서 제가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불의한 청지기이야기를 왜 끄집어냈습니까? 그리고 누가복음 16장에 이야기가 두 가지거든요. 앞에 나온 이야기는 불의한 청지기이야기고. 불의한 청지기를 본 받으라는 이야기고, 두 번째는 거지와 나사로이야기에요. 거지나사로가 충돌되잖아요. 거지가 평생 동안 한 업적이 뭐냐, 거지였습니다. 평생 살았는데, 나중에 회계하고 계산해보니까 거지에요. 부자가 평생 살았는데 계산해보니까 재벌 됐어요. 재벌 됐습니다. 날마다 파티를 열어요. 친구가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친구가.
잠언서에 보면 그런 게 있어요. 부자는 친구가 많지만 가난한 사람은 친구가 없다고. 상대적으로 보라 이 말이죠. 상대적으로 부자다. 거지다. 왜 예수님이 이 비유를 하느냐 하면은 너희들이 평소에 무엇을 목적으로 무엇을 목표로 해서 살아오고 교회에 왔느냐를 보라 이 말이에요. 우리가 빌 때, 기도할 때 거지되라고 간곡하게 한 것을 저는 본 적이 없습니다. “주시옵소서. 쫄딱 망하게 해주시고 빌어먹게 하옵소서.” 그것도 통성으로 하라고 누가 가끔 제창합니까? 통성으로.
금요철야 하는데 좁을 길 가자고 기도제목으로 겁니까? 아예 성경말씀 반대되는 것을 제목을 걸잖아요. 고객들이 그것 때문에 왔다는 것을 목사 본인이 알기 때문에. 정말 주님을 만나고 나의 모든 것을 주님이 책임진다는 것을 알 것 같으면, 뭐가 방해가 되느냐 하면은 교회가 방해가 돼요. 목사가 “교회 불나버리세요. 교회 망해버리세요.”라고 할 수가 있어야 돼요. 목사가 “나 빨리 굶어죽어야 돼. 빨리 천당 가게.”라고.
내가 속한 1이 주님의 1을 끝까지 훼방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뭐냐, 반발이 일어나요. 반발. “기도 열심히 하고 십일조 했는데 왜 내 뜻대로 안 됩니까?”라는 반발. 그 반발이 바로 하나님과 원수가 된 악마가 인간에게 분양을 준 거예요. 인간의 마음이라는 게 자기가 만든 게 아니고, 악마가 다 집어넣은 거예요. 이거는 아주 유명한 말씀이니까 여러분들이 안 찾아봐도 다 아세요.
에베소서 2장을 봅시다. 1절에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라고 되어 있죠. 우리가 죽었는데 암에 걸려서 죽은 것이 아니고 어디에 죽었다고 했습니까? 암, 감기, 교통사고로 죽은 것이 아니고, 음주운전으로 죽은 것이 아니고, 어디에 죽었다고 했습니까? 허물과 죄로 죽었다. 허물과 죄가 음주운전 한 벤츠로 보면 돼요. 허물과 죄 때문에 죽은 거예요.
그러면 부활이라는 것은 어디에서 벗어나면 돼요? 허물과 죄를 어떤 분이 오셔서 거기에서 용서하시고 거기에서 빼내주면 그 사람은 몸이 아파도 어떻게 돼요? 부활하는 자가 되죠. 안 죽는 사람이죠. 성경말씀 대단히 간단하지 않습니까? 죽었는데, 어디 뭐 망치에 맞아서 죽은 것이 아니고, 흉기에 맞아서 죽은 것이 아니고, 바다에 빠져서 죽은 것이 아니고, 허물과 죄에 빠져서 죽었다고 주님이 그렇게 해석을 하시는 거예요. 지금 이 시간 우리를 해석할 때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그런 너희를 살렸다는 거예요.
그 다음에 왜 살렸느냐, 2절을 봅시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이래 되어 있죠. 한번 적어볼게요. 공중의 권세 잡은 자니까 위치가 공중이죠. 지상이 아니잖아요. 지상에서 어떤 특정지역에서만 활동하는 악마가 아니고, 악마는 전체를 다 관장해요. 주님이 악마한테 통치하도록 권한을 일임한 거예요. 공중이라니까요. 공중. 공중의 권세에요.
개인이 감히 이 권세를 탈취하거나 수정할 이유가 없어요. 근데 공중의 권세인데요, 공중의 권세가 악마인데요, 악마의 권세가 지상에 파급이 되면 이게 뭐냐 하면 “세상”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세상 풍속”이거든요. 이 세상 풍속이 뭐냐 하면 이거 전통이에요. 아버지가 날 낳으시고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낳으시고 하는 그 집안의 가품, 그 나라에 일반화된 여론, 뭐 촛불집회 이런 거요. 사람들이 쉽게 동조할 수 있는 그러한 주장들. 쉽게 납득이 되는 거. 쉽게 납득이 되는 거예요.
사람들이 뭐 이렇게 안 따져도 으응~ 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그런 것들. 그게 왜 그러냐 하면 어릴 때부터 익숙해진 이야기거든요. 어릴 때부터. 착하면 복 받고 나쁜 짓하면 벌 받는다. 이거 아니요,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잖아요. 아니요, 라고 할 사람. 제가 지난 수요일에 영어도 모르면서 영어를 썼어요.
지난 수요일에 도덕과 윤리를 구분했죠. 도덕과 윤리를 뭐라고 했느냐 하면 라이트right와 롱wrong으로 나눴어요. 옳음과 그름으로 나눈 것은 도덕이에요. 윤리는 뭐냐 하면 굿good과 배드bad에요. 굿과 배드는 좋다, 나쁘다, 이잖아요. 굿, 배드는 우리 몸에 체험적이에요. 우리 몸을 웃게 만들면 굿이고, 울게 만들면 배드에요. 신체에. 몸이 아프면 배드고 안 아프면 굿이 되는 거예요.
사람들은 어디에 은혜를 받았다고 합니까? 신체적으로 뭔가 편하면 이걸 가지고 은혜 받았다고 하는데, 라이트, 롱은 뭐냐 하면 배부를 때, 뭔가 내가 무탈할 때, 잘난체해볼까? 정의롭게 해볼까? 그래서 이걸 따질 때, 그때 여유가 있으니까, 배부르고 살만하니까 그때 정의를 외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주일에 했잖아요. 사람이 불의는 못 참아도 불이익은 참는다고요. 불의는, “물러가라! 박근혜 물러가라! 최순실” 하면서 불의는 못 참아도, 그게 나한테 이득이 오게 되면, 손해가 오게 되면, “예, 예, 나는 입 다물겠습니다.” 그렇게 되죠.
갈라디아서 1장 10절에서 사람을 좋게 하면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고 했죠. 사도바울이 그런 이야기를 왜 했겠습니까? 이게 풍속이에요. 이 세상의 풍속인데, 그걸 누가 전염시키고 유포시켰습니까? 세상 위에 있는, 공중에 권세 잡은 자가 한 거예요. 거기서 누가 빠져나옵니까? 못 빠져나와요. 거기서 빠져나오면 지역공동체에서, 집안이라는 공동체에서 사람 취급을 못 받는데요. 벌벌 떨어요. “니 우리 집에서 호적 뺀다.”라고 이렇게 하면 벌벌 떨잖아요.
그러니 서로가 서로를 속이고, 속여진 나를 속이고. 개뿔도 아무것도 아니면서 괜찮은 사람이라고 자부하고. 그걸 들고 또 아침에 출근해서 남한테 견주고. 속고 속는 세상이라는 노래가 있죠. 늘 속고 속는 세상이에요. 속이고 속는 세상~~♬ 그런 노래가 있어요. 남한테 나쁜 짓 안 하고 살면 그만이 아니냐는, 막 이런 식으로 자기가 세상을 사는데, 그런 식으로 또 사람들이 하는데, 그게 뭐냐 하면 별 다른 게 아니에요. 익히 알던 악마의 소리를 또 듣는 겁니다.
자, 여러분 여기서 또 정리해봅시다. 자, 악마가 그렇게 유포한 이유는 뭘 거부하느냐 하면은 복음의 소리를 못 듣게 하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고린도후서 4장 4절이에요. 이 세상 신은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만드는 거예요. 되게 바쁘게 만들든지, 사업이 바쁘든지, 뭔가 아들문제, 가정문제로 힘들어서 전혀 관심이 없게 하든지 해서 복음에 눈 못 돌리게 만들면, 그게 악마로서는 “나이스~성공 했네!” 늘 성공한 거예요.
그럼 신자는 늘 복음에 관심을 둬야 돼야 하느냐, 아니에요. 신자도 마찬가지에요. 바쁘게 일하면 복음에 관심이 없어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오른편에 천당 갈 사람을 왼편에 둘러싸이게 해서 그들로 하여금 복음 때문에 핍박을 받는 경우를, 사건을 유발시킵니다. 복음 때문입니다. 복음 때문에.
그렇다면 다시 마태복음 25장을 봅시다. 어려운 거 합니다. 마태복음 25장에서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이 복음을 믿었느냐, 아니에요. 그럼 왼쪽에 있는 사람들이 복음을 거부했느냐, 아닙니다. 복음 거부하기 궐기대회에 참석하고 해서 지옥 가는 것이 아니에요. 둘 다 그냥 살았어요. 그럼 뭐냐 하면 바로 몸입니다. 복음은 뭐냐 현재 이 몸을, 1이 되는 것을 내가 다루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제로로 만들고, 주님께서 직접 천국 갈 몸을 만들고, 지옥 갈 몸을 내가 친히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지금 마태복음 25장에서 하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무덤에서 확인 작업에 들어가는 겁니다. 그 확인 작업을 한번 볼까요. 43절에,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 하였느니라 하시니” 44절에, “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 하더이까” 라고 반문하는 겁니다.
한번 예를 들면, 예수님께서 일부러 변장해서 허름한 차림을 해가지고, 춘향전에 나오는 이도령처럼 변장해가지고, “나 예수인데 물 한 그릇 주세요. 나 예수거든. 그러니까 물 한 그릇 주세요.” 그럴 때, “예수 저리 꺼져! 나 예수 싫다고. 에이, 재수 없어. 소금 뿌려라!” 이렇게 했다면, ‘에고, 그때 오신 분이 예수님이 맞네. 나는 농담인줄 알았는데.’ 지옥 간 사람이 기억을 해가지고, ‘아이고, 그때 인심 좀 쓸 걸.’ 이래가지고, ‘아이고, 타이밍이 중요한데 그때 그걸 놓쳤구나.’라고, 이렇게 후회가 될 건데. 그게 아니라니까요. 그게.
예수님은 왔다는데 온 적이 없어요. 45절을 읽겠습니다.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라고 했죠. 여러분들이 첫째 강의하고 대번에 연결이 되죠. 개인구원이 아니고 무슨 구원이라고 했습니까? 집단구원이죠. 이스라엘구원이죠.
자, 임금님이 계신데, 임금님이 이 땅에 뭘 파견했다는 거예요? 작은 어린애. 소자니까 어린애. 어린아이 같은 사람들을 파견했다는 겁니다. 어린아이 같은 사람들을. 지극히 작은 자거든요. 지극히 큰 자 같으면 대접을 할 건데, 지극히 작은 자를 왜 보냈을까? 여러분, 힘들더라도 이 대목만 참으시면 됩니다.
마태복음 11장에 25절 보면, “그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어린 아이들에게 나타내심을. 26절,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소원이 아니면 아무도 하늘나라에 갈 수 없습니다. 그런 내용입니다. 그런 내용이거든요.
여기에 보면 왜 어린아이를 이렇게 부추겼느냐 하면은, 어린아이의 특징이 이 시대에 어떤 이미지이냐 하면은, 슬기롭고 지혜 없는 대명사가 어린아이들의 부류에요. 철딱서니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이건 뭘 의미하느냐 하면은 이 세상의 풍속이, 공중권세 잡은 악마가 이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뭘 자꾸 부추겼다는 겁니까? 보다 더 지혜로워라, 보다 더 슬기로워라, 라는 것을 전통적으로 계속 부추겨온 거예요. 니가 많이 안만큼 하늘나라 상급이 많을 것이고, 니가 그만큼 복을 더 받을 것이라는 그런 비전, 희망 같은 기대감을 계속 부여해준 거예요.
이왕이면 예수 믿고 부자 되면 좋잖아, 라는 식으로 계속 어떤 내 소망에 불을 지르고 약을 올려요. 소자가 되어야 될 그 방향을, 소자를 빨리 버리고 대단한 사람으로 되는 것에 이거는 경쟁적으로 그렇게 부추긴 겁니다. 대단한 자입니까? 인생의 목표가 대수롭지 않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대수롭지 않는 자. 그러니까 초라한 행객 있잖아요. 이름 없이 초라하게 살다가도 괜찮은 나라거든요.
그러면 이왕 초라하게 살다가도 괜찮은 나라 같으면 초라 해봐도 그거 재밌지 않습니까? 남들이 오해를 하게끔. 재미있잖아요. 세자가 되었으면 가끔은 송경나루에 잠행해가지고 기억을 잃었을 때에 자기 옛날 애인을 만나고 오면 좋지 않습니까? 세자 복장 벗어버리고 그냥 양반복장으로. 드라마 백일의 낭군님을 봐야 알죠. “자, 불편하구나. 나만 불편한가?”라는 대사.
그 드라마가 시청자를 기분 좋게 하는 이유는, 젊은 애가 그렇게 똑똑한데, 그냥 일반적인 양민이 아니고, 적어도 재벌 2세라는 겁니다. 세자인데 아닌 척하는 것이 기분 좋은 거예요. 이중존재죠. 속은 천국인데 겉은 천국 가는 티를 안 낼 때에 나오는 그 여유만만. 누려~~ 우리 누립시다. 그 여유만만. 그걸 즐길 수가 있어야 돼요. 그걸 즐길 수가 있어야 됩니다.
악바리처럼 남 보여주는 식의 신앙티를 내지 마시고, “고마해라, 나도 마이 했다. 마이 해라.” 좀 이런 식으로 여유를 부릴 수 있는, 자유를 누릴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래서 주님께서 “니가 나한테 열심히 했다.” “저는 열심히 한 적 없습니다.” “니가 믿음이 있구나.” “저는 믿음 없는데요.” “니가 참 하늘나라를 소망하는구나.” “주님, 지금 잘못 봤습니다. 저는 세상만 좋아해요.” 이렇게 여유만만해도 괜찮다는 거죠. 왜냐하면 내가 하는 괜찮은 고백 때문에 내가 구원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주께서는 목표가 있어요. 주께서는 이 땅에서 예수님처럼 살게 하는 거예요. 예수님처럼 산다는 것은 뭐예요? 변변치 않게 살게 하는 거예요. 바라기는 여러분들이 부동산 한 15억쯤 있는 변변치 않은 사람들이 되길 바랍니다. 차는 한 세 대 정도 있고. 외제차 한 대 끼어있는, 그런 식으로 변변치 않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집이 한 백평이 넘는 그런 변변치 않는 그런 사람.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고린도후서 6장 10절에서 내가 아무것도 없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라고 했습니다. 이거 뭐 허풍입니까? 워낙 없어서 지금 정신이 나간, 못 먹다보니까 그냥 객소리 하는 거예요? 내가 죽은 자 같으나 실상은 내가 살아있다. 누가 언제 지보고 죽었다고 했어요? 근데 나는 죽은 자다. 그러나 살아있다. 사도바울의 진가는요, 제가 주일 낮에 했잖아요. 폭풍 속에서 논다. 276명중에서(행27:37) 누구에게만 찾아왔습니까?
사도바울에게만 찾아와서 “내가 일부러 풍랑을 일으켰다. 일부러 일으켰다. 내가 다른 사람을 살려주는 것은 다른 사람이 이뻐서 살려주는 것이 아니고, 니가 어떤 존재인가를 알려주기 위해서 다를 사람을 살려줬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에게 그게 무슨 뜻이냐 하면은, 살라고 애써서 살았다가 아니라 나는 풍랑이 일어나기 전부터 진작 죽어야 될 건데, 어떤 할당받은, 분양받은 임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임무가 나보다 더 중요해요. 그 임무가 1이라면 나는 제로에요. 이 임무, 사명 때문에, 나에게 맡겨진 역할 때문에 나는 못 죽어요. 폭풍 속에 빠져 죽을 것 같아도 못 빠지게 되어 있어요. 죽을 때까지는 안 죽는 거예요. 주님이 일방적으로 할당해준 그러한 사명입니다. 그 사명이 딴 게 아니에요. 나는 내 행함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라는 사명. “너희들 많이 행해라.” 그걸 행하면 행할수록 주님을 계속 가리는 결과만 낳습니다.
그냥 행함이 아니네, 라는 이걸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 행함은 인간의 기억창고에 쌓이게 되어 있고 그것이 자기의 일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 변명과 변명으로, 연쇄적인 변명으로 계속 나오는 거예요. 그것은 일종의 뭐냐 반발입니다. 반발. 끊임없는 반발. 그럼 반발이 없는 사람이 누가 있어요? 아무도 없어요. 항상 우리는 이 세상에서 남하고 비교하기 때문에, 남처럼 되지 못한 어떤 억울함 같은 거, 울분 또는 분노, 이것으로 하여금 우리 몸을 지치게 만들고 피곤하게 만들어요.
아로나민골드 먹어봐야 처음에만 효과가 있지 나중에는 피곤에 소용이 없습니다. 먹는 날이나 안 먹는 날이나 똑같이 돼버렸어요. 세상에 찌들면요, “에이, 그레이색이야.” 회색, 이게 욕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명인제약 메이킨 큐 변비약 광고. 항상 우리는 그렇게 살아요. 화장실에 가서도 화내고 밖에 나가서도 화내고. 마땅히 변비 안 돼야 되는 것처럼 우기는 것. 이거는 자기 자신의 방향성이 지극히 작은 자가 되어야 된다는 방향보다도 자기를 위대하게 만드는 심보가 강렬해서 그렇습니다. 이게 오늘날 매일같이 반발해요.
성도는 반발하면 할수록 감사가 더 나오죠. 이렇게 성깔 더럽고 못됐는데, 어떻게 주께서 오른편에다 제켜버렸잖아요. 오른편에다가. 오른편 왼편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단체로 버스를 탔는데 버스 번호가 달라요. 저쪽 지옥 가는 사람은 401번, 이쪽은 급행 6번. 완전히 노선이 다르다니까요. 처음에는 같이 가요. 가다가 중간에 갈라져버린다니까요.
처음에는 안 믿는 사람들하고 히히거리면서 커피마시다가 어느 때 쯤 돼버리면 뭐 대꾸하는 것도 건성건성 대꾸하게 되고. 우리 애가 어떻다고 하면 그래, 뭐 대충 대답하고. “전에는 니 자랑하더니 이제는 왜 안 해?”라고 물어보면 “우리 애 자랑할 게 뭐 있어. 나는 지극히 작은 자 할래.” 이래가지고 대화가 자꾸 마른 엿가락처럼 뚝뚝 끊어지는 거예요. 그럼 나중에 “니, 나 싫나?” 이래 나오고. “뭐, 싫다 좋다 그런 게 있겠어.” 이래 나오고. “예전하고 좀 다르다?” “글쎄, 그것도 내 맘대로 안 되네.” 친구가 뚝뚝 다 떨어져나가는 거예요.
나이 50넘어서 친구라고 하는 것은 남자나 여자나 술친구밖에 없어요. 술친구가 제일 오래가요. 술 먹고 싶어서 환장해서 그냥 핑계대고 친구하는 겁니다. 세상 사람들에게서 술이 빠지면 친구 다 떨어져나갑니다. 술 때문에 이렇게 간당간당 연결이 되죠. 다 떨어져요. 교회도 경제적 이권과 연결이 되면 오래가요. 그런데 경제적 이권이 없으면, 처음에는 자매님, 형제님 하다가 나중에는 인사도 안 하고 밥도 안 먹고 다 가버려요.
다시 생각해봅시다. 이게 언약을 집어넣어야 해요. 이 사람과 저 사람 사이에 언약이 있을 때, 뭘 이해하느냐 하면 지극히 작은 자가 주님의 목표라는 사실. 돈이 있든 없든 간에 주님보시기에는 지극히 작은 자로 보는 거예요. 지극히 작은 자가 주님께 대접을 해도 뭘 했겠습니까? 밥을 해줘도 얼마나 해줬겠어요? 실컷 밥 얻어 잡수고 옷 받아놓고는, 지극히 작은 자의 영광성. 지극히 작은 자의 보배로움, 이런 것을 우리가 자랑할 수 있어야 돼요.
그럼 우리 몸을 한번 그려보게 되면, 이거 보면 여러분이 확실히 압니다. 우리 몸에 마태복음 25장이 몽땅 다 들어있는 셈이 되죠. 몸이 곧 복음이 되는 겁니다. 우리 몸의 현상이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발산되라고 거기에 맞춘 몸으로 인생을 우리가 살게 되는 겁니다. 항상 살다가 풍기는 것이 뭐냐 하면 말씀의 실제성이 풍겨 나오죠.
자, 25장 끝부분을 정리하고 마치겠습니다. 말로 하면 어려우니까, 자, 몸이 있다고 하면 몸이 제로라고 했죠. 몸에다가 구멍을 하나 뚫어봅시다. 구멍 뚫린 돈을 뭐라고 하죠? 엽전이죠. 엽전이 되어야 될 이유가 뭐냐 하면 구멍이 생기죠. 그럼 그 구멍사이에 뭔가 줄이 관통하죠. 옛날 돈을 줄에다가 엮어서 했죠.
참된 교회가 뭐냐 하면은 다 구멍 난 사이사이에 예수님의 십자가 피가 관통하는 사슬, 그 목걸이가 바로 교회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교회만 그런 게 아니고, 천국 가는 사람만 그런 게 아니고, 지옥 가는 사람들도 이게 전부 다 구멍 난 것처럼, 거기에 악마의 정신이 거기로 꿰뚫어지니까, 전부 다 이거는 세상적인 일에 동감하고 공감하는 거예요. 그들은 고개 끄덕이고 납득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복음 아닌 것에서는, 어떻게 딱 복음만 전해버리면 쫙 완전히 갈라져요. 완전히 갈라진다고 해서 50대 50으로 갈라지는 것이 아니고, 99.99대 0.01퍼센트로 갈라지겠죠. 거의 없어도 모여 놓으면 천군천사같이 수많은 사람이 종려나무 들고, 요한계시록에 나옵니다. 그 숫자가 너무 많아서 144,000이라고 하는데, 절정의 숫자는 144,000. 많다의 더 절정, 최종 종결된 풍성함의 극치, 144,000입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관통하니까, 중간에 구멍이 났다는 말은 이 중심부분의 생각이, 물론 우리의 몸은 엉망이에요. 육이에요. 육이지만 중심 부분에 관통하는 주님의 영이, 이스라엘 영이죠. 주님의 영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도 반발을 하죠. 하지만 더 센 중심부가 이 가치를 위해서 회개하게 만들고, 다시 자기 자신의 주제파악을 하게 만들고, 참 내가 지극히 작은 자가 되기 위해서 주께서 살게 하셨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자, 끝으로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작은 자가 되어야 하는데, 어느 정도 되면 작은 자가 됩니까? 어느 선을 가지고 여기까지 오면 작은 자고 여기까지 안 오면 작은 자가 아니고, 그 경계선을 뭐로 정하면 좋겠습니까? 강냉이 두 개 먹으면 건방진 자고 한개 먹으면 작은 자입니까? 뭐로 정했으면 되겠어요? 어렵죠.
그게 내 존재가 되게 되면 도로 1이 돼요. 그래서 쉽게 말씀드립니다. 예상 밖의 시간과 공간에서 예상 못한 어떤 현상이나 사건이 터질 때, 순간적으로 우리는 내가 주님보시기에 되지 않는 자라는 것을 압니다. 그 순간 아엠 낫씽I'm nothing이 되는 겁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닌 자에요. 설교를 하던 뭘 하든 애를 잘 키우든, 그건 남들이 하는 소리고 나를 잘 몰라서 하는 거예요. 애를 잘 키우고 뭘 하고, 인품이 좋다고 하는 것은 남들이 하는 소리. 내가 생각하는 나를 잘 몰라서 그냥 좋은 말로 하는 거고. 주님보시기에 나는 구멍 뚫린 자고.
구멍이 뚫린 이유는, 내 독자적으로 고유한 것으로 아무런 가치가 없어요. 그렇다면 우리가 세상에 나올 때 늘 이렇게 생각을 안 하잖아요. 그러면 구멍이 메워지죠. 구멍이 메워지는 것이고 지 자존심을 위해서 하겠죠. 그러면 남들하고 사귈 때 안 지려고 하겠죠. 안 지고, 의미 있고, 가치 있고. “주여, 이 나만의 고유한 가치만큼은 손을 안 댔으면 좋겠습니다. 이거 다 드리고 이거 다 드리겠습니다. 이거는 손대지 마세요.”라는 것이 있어요. 마치 아브라함에게 이삭 같은 것.
그게 구멍이 나야 돼요. 고거. 보자~~하고 그거 들통 나게 했을 때 우리는 감사해야 됩니다. 왜? 내가 기어이 남겨두려는 그 마지막, 궁중족발의 마지막 자존심이 있잖아요. 궁중족발 마지막 자존심, 되지도 않는 자존심, 세상 풍속이죠. 그 마지막 남은 그것을 보면서 우리는 허해야 합니다. 언제 우리가 북한 핵폭발해가지고 여기가 붕 떴지? 왜 여기 없지? 내 자신을 볼 때 내가 없는 것을 늘 되새기면서 확인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무것도 없으면서 있는 체 하는 것을 용서해주시옵소서. 아무것도 아닌 자를, 정말 우리를 천국백성 만들기 위해서 없는 자리에 예수님의 살과 피로 채워주셔서, 의롭다 하신 걸로 건지시는 이 은혜를, 우리는 이 사명을 귀하게 여기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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