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강-여호수아 9장 22~25절(이질적 요소)20181202-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여호수아 9장 22~25절입니다. 구약성경 333페이지입니다.
“여호수아가 그들을 불러다가 말하여 이르되 너희가 우리 가운데에 거주하면서 어찌하여 심히 먼 곳에서 왔다고 하여 우리를 속였느냐, 그러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나니 너희가 대를 이어 종이 되어 다 내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나무를 패며 물을 긷는 자가 되리라 하니, 그들이 여호수아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사 이 땅을 다 당신들에게 주고 이 땅의 모든 주민을 당신들 앞에서 멸하라 하신 것이 당신의 종들에게 분명히 들리므로 당신들로 말미암아 우리의 목숨을 잃을까 심히 두려워하여 이같이 하였나이다, 보소서 이제 우리가 당신의 손에 있으니 당신의 의향에 좋고 옳은 대로 우리에게 행하소서 한지라”
무슨 내용이냐 하면 이 기브온 사람들이 가까이 있거든요. 예루살렘에서 북서쪽으로 얼마 멀지 않은 곳, 대략 10킬로 좀 더 되는 곳에 있는데, 그 가까운 곳은 여호수아의 점령 대상지가 되는 겁니다. 다 멸해야 하는데 그 사람들이 대적할 줄 알았어요.
기브온 사람들이 이스라엘에게 “어디 감히 우리 땅에 와.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뺀다고...외부에서 우리를 침략하다니. 우리 힘을 다해서 당신들을 격퇴할 거야”라고 바락바락 대들 줄 알았는데 그 사람들이 멸망 당하지 않기 위해서 거짓으로 뭐라고 위장을 했느냐 하면 “우리는 가까이 사는 사람이 아니고 멀리서 왔습니다”라고 하면서 마치 야곱이 아버지 이삭을 속인 것처럼 무리가 변장하고 먼 곳에서 온 사람처럼 해진 옷을 입고 곰팡이 핀 음식물을 내놓으면서 이스라엘을 속였어요.
속이니까 여호수아가 ‘아, 우리가 점령지 아닌 사람을 만났구나. 그렇다면 이 사람들은 우리가 해칠 수 없고 살려두어야겠다’라고 마음을 먹도록 그렇게 조치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이렇게 속은 것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일에는 조금도 속임이 없게 원활하게 추진되는 것이 사람들의 상식이거든요. 평탄하게 일이 잘되어야 지금 하나님 일이 잘되고 있다고 여기는데 울퉁불퉁은 이상하게 하나님의 하는 일에 잘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 들겠지요.
그러한 선입감과 상식이 이스라엘 전쟁 가운데 깨집니다. 하나님의 일이니까 마치 얼음판에 스케이트 타는 것처럼 쫙쫙 일이 잘되어야 한다고 여기는 그 의식은 어떤 의식이냐 하면 세상 권력에서 나오는 의식입니다.
세상 권력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느냐 하면 하나의 권력에 누수되는 것 없이 모든 통치하는 지역에서 반발이 없고 대들고 하는 것도 없이 완벽하게 권력으로 장악되는 상태를 좋은 상태, 선한 상태, 질서가 제대로 가동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상태, 제대로 통치가 통치답게 발휘되고 있는 상태로 그런 식으로 생각을 했던 거죠.
그래서 그러한 의식이 이스라엘 내부에도 그대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똑같은 아담의 자손들이니까 인간들이 생각하는 게 다 거기서 거기죠. 그래서 이스라엘이 이제 권력자, 갑질하는 나라로 나서는 겁니다. ‘감히 우리 하나님과 함께 있는 이스라엘에게 대들자는 없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거는 뭐냐 하면 앞으로 하는 모든 일이 매끄럽게 하자 없이 잘 진행될 것이 자명하다는 선입감이 작용한 겁니다.
벌써 이스라엘은 권력자다운 면모를 유지하려고 다들 그렇게 생각한 거죠. 상당히 이 말씀은 오늘날 성도들에게 굉장히 많은 교훈을 줍니다. 내가 이제 종교를 불교에서 기독교로 바꾸었기 때문에, 하나님 안 믿었는데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서 일 할 때 깔끔하게, 하자 없이, 무리 없이, 일을 잘 부드럽게 풀릴 거라고 여기는 거, 그 자체가 하나님의 전쟁에 대한 큰 오산입니다. 큰 오해예요.
따라서 이러한 기브온 주민들의 이스라엘 속임은 껄끄러움이 없이 인간은 자기 갱신이 될 수 없다는 거죠. 하나님의 전쟁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적을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 있다는 그 인간들의 계주와 관련되어 있어요. 우리가 보통 아는 상식을 제가 다시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천국은 천국이 있다고 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니라 거기에 합당한 사람이 되어야 해요. 그런데 우리가 알고 배운 것은 뭐냐, 이 세상에 적합한 인성으로 무장되어 있습니다. 그냥 나만 챙기는 것은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니까 그걸 전부 다 묵인하고 있는 거예요. ‘너는 네 것 챙기고 나는 내 것 챙기고 일 없지? 당연한 거 아니야?’ 이것을 고쳐야 하는 거예요.
이걸 뭔가 고쳐야 한다는 것은 모델이 있어야 하거든요. ‘지금 나는 이런데 저 사람처럼 될래.’라고 바뀌어야 할 어떤 표준 모델이 있어야 하는데 이 세상에는 모델이 될 만한 인물이 없습니다. 낮에도 이야기했지만 자기를 불사르게 내어주고, 구제하고 하는 그것 자체가 복음이 아니에요. 그게 복음이 아니라고요.
왜냐 하면 사람은 선하면 선한 대로 자기가 선하다고 자꾸 확인에 나서게 되고 악해도 언젠가는 선한 일을 하면 그만이라고 하면서 악해도 선한 일로 간주해요. 사람은 이래도 선하고 저래도 선하고 이래도 복 받을 만하고 저래도 복 받을 만하고 그 외에는 자기 자신을 달리 생각할 줄 모르는 이상한 존재입니다.
아주 고정적이에요. 자기가 훌륭하다는 것은 아주 고정적입니다. 그래서 하나의 질서 체제로 잡겠다고 할 때, 예를 들어서 어떤 단체에 열 명의 단원이 있다면 열 명의 단원이 전부다 각자각자 자기가 최고이기 때문에 내 위주로 평정하고 싶다는 생각을 열 명이 전부 다 갖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갖고 있어요.
논리라는 것은 핑계에 불과해요. 논리라는 것은 핑계에 불과합니다. 내 뜻이 관철되는 것이 최종 목표죠. 옳고 그른 것은 나중 문제예요. 내가 옳다고 하니까 큰소리 나는 거예요. 논리가 문제가 아닙니다. 왜 나를 개무시 하는 지가 큰 문제라니까요.
과학에 블랙홀이 있습니다. 스티븐 호킹이 주장하는 블랙홀. 이 블랙홀을 주장하면서 스티븐 호킹이 뭐라고 했느냐 하면 모든 정보는 블랙홀에 들어가면 지워진다고 했어요. 그 사람은 신자 아니에요. 복음도 물론 모르고. 그냥 물리학자예요. 물리학자인데 자신도 모르게 복음을 설명한 거예요.
복음이라 하는 것은 십자가는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실체가 없어요. “사도바울은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거늘 누가 널 꾀느냐?” 그 말을 듣고 사람들은 세상에 살 때 눈에 보이는 내가 좋은 것은 가지고 싶듯이 이제는 십자가도 가지고 싶어 하는데, 문제는 십자가는 블랙홀이지 실체라는 것이 없어요.
블랙홀의 특징이 뭐냐, 모든 정보는 그 안에 들어가면 없어지는 거예요. 모든 정보가 그 안에 있으면 모아진 정보는 내가 가지면 돼요. 내가 소유하면 되는데, 이게 아주 어려운 말이지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거울이 있는데 거울 자체가 구멍이라면, 분명히 거울 속으로 들어갔는데 가보니까 아무것도 없어요.
그렇다면 이건 아무것도 없는 것이 모든 있는 것을 빨아 당기는 현상, 바로 블랙홀 현상입니다. 블랙홀 현상이에요. 그리고 그 블랙홀 현상을 반대로 바꾸면 물리학에서 세상의 천지창조는 빅뱅(빵터짐), 우리말로 하면 ‘빵’하는 큰 총소리거든요. 총알 쏘듯이 세상은 빵하고 터지는 순간에 다 있게 되었다는 거예요. 없는 데서 있게 되었다는 거예요.
그 소리 듣고 교황 측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빅뱅이론은 기독교와 맞기 때문에 우리가 인정한다고 하는 거예요. 제가 강조하는 것은 블랙홀에서는 인간의 정보가 없다는 겁니다. 이쪽에 있는 것을 저쪽에 옮겨 놓으면, 김장할 때 해봤지요, 이쪽에 있는 생배추를 간해서 저쪽에 놓으면 이쪽 배추가 저쪽에서도 살아 있어요.
그런데 블랙홀은 이쪽 배추를 집어넣었는데 저쪽에 아무것도 없어요. 모든 정보는 지워지니까. 네가 어떻게 하면, 무엇을 하며 살았는지 희미한 등불 아래서 아무리 봐도 없어요. 십자가는 내가 없어지는 거예요. 그걸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이야기하거든요.
사람들이 일가친척이 죽는 것을 굉장히 슬퍼하고 안타까워하게 되죠. 왜냐 하면 자기 정보가 거기 담겨 있으니까. 그러나 일가친척 식구가 죽는 거는 죽음이 아니에요. 연습문제예요. 죽음의 연습문제. 심지어 거기에 보탭시다. 나의 죽음까지도 연습문제예요. 진짜 죽음은 십자가 죽음이에요.
내가 죽는 것을 왜 연습문제로 보느냐 하면 모의고사에 불과한 이유가 내가 죽고 난 뒤에 나는 천국 가서 편히 쉴 것이라는 자꾸 블랙홀이 아니고 현재 있는 내가 저쪽으로 이동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소위 신자가 돼서 블랙홀도 몰라요. 내 모든 정보가 없어진다는 말은 내가 했던 내가 알고 있는 기억조차도 없어지고 기억이 없어지면 자아는 없는 거예요.
저쪽 세계에서는 예수님의 형상으로 다시 제조하고 만들어 내는 겁니다. 그러니까 기존의 고물단지 가지고 계속 고쳐달라고 닦달하지 마세요. 이 몸이 거룩하게 되고, 이 몸이 착하게 되도록 자꾸 그렇게 내밀지 마세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우리의 기억력 감퇴와 더불어서 정보가 소실 됩니다. 기억이 감퇴 되어서 얼마나 감사한지요.
심지어 치매 걸리면 맏아들 보고 아저씨라고 해요. 이건 실제 상황입니다. “아저씨, 누구예요?” 간만에 왔으니까 아들인지 모르죠. 늘 옆에 있는 둘째 아들만 생각하지 멀리서 오면 몰라요. “아저씨, 누구예요?”... 나중에 가면 내가 누구인지를 몰라요. 얼마나 감사할 일입니까? 그것 때문에 평생을 나를 감지하느라 밤잠을 못 이뤘잖아요.
‘나 어떻게 살아야 해? 나 내일 되면 어떻게 되는데?’ 맨날 걱정 근심 공포 같은 것들이 바로 ‘나’ 때문에 생기잖아요. 고마우신 주님께서는 실컷 모의고사 연습문제 실컷 하게 하신단 말이죠. 오늘 본문에 보면 기브온 사람을 배워 보세요. 그 사람들이 왜 거짓말 했는 지. 또 오늘날 우리는 왜 거짓말 하는 지.
어떤 심리학자에 의하면 인간은 하루에 300번 거짓말한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안 믿겠다고 해요. 한 5번이나 할까. 300번 거짓말한다고 하면 거짓말을 수시로 한다는 거죠. 그 수시로 하는 거짓말 다 모아 보세요. 뭐라고요? 내 주장이 옳다고요? 거짓말 주장이 옳은 거예요? 그것 가지고 큰소리 내고 싸우고. 내 주장 가지고 300번 거짓말했는데.
기브온 사람이 속였는데 오늘 본문을 한 번 봅시다. 그들이 왜 속였는지 나옵니다. 왜 속였냐고 하니까 24절 끝에 보면 기니까 끝에만 보겠습니다. “모세에게 명령하사 이 땅을 다 당신들에게 주고 이 땅의 모든 주민을 당신들 앞에서 멸하라 하신 것이 당신의 종들에게 분명히 들리므로 당신들로 말미암아 우리의 목숨을 잃을까 심히 두려워하여 이같이 하였나이다”
인생의 공포 공포 하지만 그 마지막 공포의 이유가 뭐냐 하면 이 목숨을, 우리 생명을 잃을까 심히 두려워한다는 거예요. 히브리서 2장 15절 팍 떠오르지 않습니까? 악마가 인간을 가지고 노는 이유는 죽을까 싶어서 평생토록 종으로 산다고요. 그게 저주 상태라고요.
욥에게 하나님께서 다른 것은 다 사탄에게 허락했지만, 욥의 생명에 대해서는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건 우리에게 뭘 이야기하느냐 하면 네가 걱정 안 해도 될 것을 악마에게 속아서 평생토록 걱정하고 있다고요. 아파트에서 뛰어내리든지, 번개탄 하든지 그건 그때가 됨에 그 조건이 맞춰진 거예요. 본인의 의사가 아닙니다.
자살하는 것도 본인의 의사가 아니에요. 이거 중요한 문제예요. 이거 밑줄 쳐놓고 알아야 해요. 어떤 사람이 자살했다. 아닙니다. 주께서 그렇게 몰아세운 겁니다. 자살 아닌 죽음은 없어요. 모든 인간은 자살로 끝나는 겁니다. 편안하게 살다 죽었다. 편안하게 살다 죽은 게 아닙니다. 평생토록 그 죽음 하나를 위해서 모든 일들이 일어났어야 했어요.
영천에서 집 사서 웃통 벗고 운동하고, 신성일이 그렇게 한 것도 전부 다 사흘 뒤에 죽기 위한 하나의 연습을 하는 겁니다. 죽음을 반겨야 해요. 물론 스스로 좋은 걸 미리 당기려고 자살하지 말고. 뭐냐 하면 주님께서 여호와 전쟁을 벌이신 것은, 이스라엘 전쟁을 벌이신 것은 “기븐온 사람들이 하는 짓거리를 봐라. 어쩌면 이스라엘과 그렇게 닮았냐” 다를 바가 없다는 거예요.
죽기 무서워서 속이는 것과 그들 이스라엘이 죽는 것이 무서워서 다른 신을 섬기는 것과 다른 여호와 다른 예수 섬기는 것과 다를 것이 뭐가 있느냐는 말이죠. 똑같지요. 하나님 전쟁은요, 그냥 평탄하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늘 울퉁불퉁하는 겁니다. 끊임없이 왔다 갔다 해요.
그러면 이런 본문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기브온 사람을 자기 안에 품어야 합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이스라엘 속에 이질적인 것이 이미 들어왔다는 겁니다. 들어 온 것을 가지고 그걸 빼낼 수가 없어요. 왜 빼낼 수가 없느냐 하면 여기 본문 20절에 보면 “우리가 그들에게 맹세한 맹약으로 인해 진노가 우리에게 임할까 하노니”
그들이 속였다는 것을 알고 “이 괘씸한 것들, 우리를 무시하고 하나님을 모독하다니 어디 죽어봐라”라고 할 수가 없는 것은 그들과 언약을 맺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언약을 맺을 때 인간이 대표가 아니에요. 하나님의 이름으로 언약을 맺었기 때문에 이건 어쩔 수 없이 자기를 속인 사람을 내부요소로 받아들여야 하는 겁니다.
기브온 사람들을 이스라엘에 편입시켜 줘야 해요. 편입시켜 주게 되면 이제는 이스라엘 역사가 이스라엘 사람들의 뜻대로 굴러가지 않는다는 사실이 이제는 분명해지는 겁니다. 제가 오늘 아침에도 그런 이야기 했지만, 우리가 내 인생을 설계할 때 우리가 생각하는 설계가 있지요. 그 설계의 대부분의 성격은 뭐냐 하면 평탄하고 조용하고 풍족하게 그냥 무탈하게 가기를 바라는 겁니다. 누구 소원대로? 내 소원대로.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천국 가려면 인간이 달라져야 합니다. 달라질 때 외부에 우리가 기피하고 피하고 싶은 요소가 주님에 의해서 우리 내부요소로 들어와 버려요. 그러면 그전에는 우리가 미리 알았으면 기브온 사람을 안 받았을 거예요. 이스라엘이. 그러나 그쪽에서 속였기 때문에 이거는 어쩔 수 없이 받아 줄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러면 이게 뭐냐 하면 한 번 설교를 정리해 봅시다.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이 가나안 땅은 우리가 평정해야 해. 완벽하게 고요하게 평정해야 해’라고 잘못 생각하는 그 속에 기브온 사람에게 속임 당하는 사건이 벌어졌고 그 사건을 인하여 이스라엘은 울퉁불퉁하게 이제는 언약의 이름으로 본인이 원치 않는 이질적인 요소를 내포하게 되었습니다.
드라마 보면 그런 거 있잖아요. 출생의 비밀 때문에 원치 않는 자식을 내 자식처럼 키워야 하는 그런 게 있거든요. 원치 않는 요소가 들어와 버리면 그 들어 온 그것 때문에 이게 말썽의 소지가 돼요. 내 뜻이 좌절돼 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이것이 우리가 개조되는 것과 변하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
빌립보서 2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오실 때, “나는 하나님이다. 너희들 까불지 마” 하면서 오신 게 아니에요. 예수님 요소에 이질적인 요소를 집어넣습니다. 예수님은 의인이거든요. 그런데 의인은 의인에게 죄가 오면 안 된다는 것이 그 당시 바리새인, 서기관들의 철두철미한 자기 거룩 자기 성화를 하기 위해서 철저히 커버하려고 했던 거예요.
그들은 하나님의 신이 임하면 나쁜 짓 하지 말고 착한 일 하라고 신이 임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신이 임해서 바르게 살자는 주의가 바리새인 주의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하는 것과 똑같이 그들이 선배격으로 한 거예요. 그런데 자기가 남 앞에 들키기 싫은 과거라는 것이 들어온 것이 싫은 거예요.
나는 옳은 것만 보고 바른 것만 말하고 이걸 불교에서는 팔정도라고 하거든요. 바른 생각, 바른 마음, 바른 행동. 그처럼 오늘날 기독교나 불교가 똑같으니까 똑같은 성경 보고 착한 것만 하겠다는 거예요. 뭔가 숨기고 싶은 과거가 있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경쟁에 이기는 방법은 딱 하나밖에 없어요.
그 사람의 약점을 찾아내면 이깁니다. 아무리 잘난 사람도 “당신이 지난 8월에 한 일을 내가 알고 있다”하면 게임 오버입니다. 게임 끝나는 거예요. 왜 부부가 갈라설 수가 없는가? 서로의 약점을 쥐고 있기 때문이에요. 왜 부모가 자식에게 큰소리 못 치는가? 자식이 부모의 약점을 쥐고 있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그 약점을 장점이라고 여기면 안 됩니까? 천국 가려면 약점이 장점이 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이게 천국 가는 거예요. 주님은 의인인데 죄인을 받아 줬잖아요. 그러면 우리를 죄인 되게 하신 이유가 뭐냐 이미 주님이 우리 안에 이질적인 요소로 들어있기 때문에 그 의가 어떻게 죄를 이기는지를 주님에게 일임하면 되는 겁니다.
살려고 하니까 위선이 점점 생기는 겁니다. 위선자가 되고. 그들은 죽음이 무서워서 비겁하게 변장을 하고 이스라엘에게 항복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다른 나라에게 안 그렇겠습니까? 하나님이 무서운 것이 아니에요. 자기 죽음이 무서운 거예요. 나에게 진짜 이질적인 것은 안 죽어야겠다는 악마의 사고방식이 나의 본 중심부를 차지하고 있는 이상 우리는 달라져야 합니다.
‘안 죽어야 해’를 이제는 죽어 마땅함으로 달라져야 해요. “그러면 목사님 그렇게 달라지면 어떤 현상이 일어납니까?” 기브온은 아무리 변장해서 항복하고 물 긷는 사람이 돼서 종노릇하지만 기브온은 희망 없어요. 기브온 사람은 구원받지 못합니다. 왜냐 하면 그 사람에게는 기다림이 없어요.
이스라엘 역사의 특징이 뭐냐 하면 지금 내가 얼마나 잘 사느냐가 아니라 누구를 기다린다는 겁니다. 여러분 누구를 기다립니까? 기다림이 성립되려면 자기 자신을 항상 가볍게 여길 수 있어야 해요. 왜냐 하면 기다리는 그분, 만날 수 있는 그분, 만남이 성립되는 그분이 지금 나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에 나 같은 것은 아무렇지도 않은 겁니다.
가볍게 보는 거예요. 무게를 달면 저울에 ‘0’, 제로가 되어야 해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죽어도 괜찮아요. 왜냐 하면 그분이 본고사니까. 기다린다는 것을 신약에서는 재림이라고 하지요.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자가 진정한 이스라엘이라고 신약에서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왜냐 하면 나의 구원은 기다림 앞에서는 의미가 없습니다.
“나 구원받았다”라는 말은 소유개념이거든요. 이제는 그거 버려야 해요. “나는 누구 기다린다” 이게 믿음 소망 사랑은 항상 있을 것인데 그 기다림이 우리 안에 항상 중심을 차지해야 해요. 이제 우리를 소멸시킬 모든 정보를 소멸시키는 그 블랙홀에서 어떤 분이 등장하실 거예요.
우리를 죽이려고 모의고사 쳤던 그분이 생명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있던 그 정보를 주님 자신의 정보라고 이야기하시면서 “네가 살아온 것은 네 인생이 아니고 나의 인생이고 내 정보였다”라고 이야기하면서 우리 정보 안에 우리를 품어주는 방식으로 우리를 구원하는 겁니다.
그 예수님이 오늘날 우리에게는 너무나 이질적이에요. 세상 사람들은 다 자기 힘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그 이질성이 있는 그 사람, 그분은 우리를 속인 것이 아니고 늘 우리는 항상 속였지만, 그분은 이스라엘이고 우리는 기브온 이지만, 그 이질적인 요소가 만남을 통해서 새로운 이스라엘로 변화시키는 작업을 지금도 주님께서는 기브온같은 비겁한 우리를 죽기가 무서워서 벌벌 떨면서 주님에게 살려달라고 매일같이 하소연하는 이 비겁한 기브온 사람을 주님께서는 늘 지워주시는 은혜를 주시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지금이 전쟁 중인 것을 매일같이 깨닫게 해주시고 우리가 조금만 편하면 만족하고 아프면 짜증 내지만 사실 우리의 영원한 기쁨은 누구를 기다린다는 여기에 있음을 저희들이 몰랐습니다. 저희 속에 나쁜 것이 온 게 아니라 우리 자신이 의로움 속에 나쁜 죄인으로 같이 함께 있음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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