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강-여호수아 7장 1–4절(아이성에서의 실패)20181007-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여호수아 7장 1–4절입니다. 구약성경 327페이지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온전히 바친 물건으로 말미암아 범죄 하였으니 이는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 삽디의 손자 갈미의 아들 아간이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졌음이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진노하시니라, 여호수아가 여리고에서 사람을 벧엘 동쪽 벧아웬 곁에 있는 아이로 보내며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올라가서 그 땅을 정탐하라 하매 그 사람들이 올라가서 아이를 정탐하고, 여호수아에게로 돌아와 그에게 이르되 백성을 다 올라가게 하지 말고 이 삼천 명만 올라가서 아이를 치게 하소서 그들은 소수이니 모든 백성을 그리고 보내어 수고롭게 하지 마소서 하므로, 백성 중 삼천 명쯤 거기로 올라갔다가 아이 사람 앞에서 도망하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실패했습니다. 여호수아와 함께 있는데 실패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여호수아가 지시를 했음에도 실패했다는 것이 또한 중요합니다. 그것은 천국 만들기, 성도라 하는 것은 거듭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지는 것입니다. 한번 거듭나고 ‘되었다’가 아니라 거듭남의 원칙이 계속해서 새롭게 만들어 낸 원칙으로 집어넣고 개입하고 작용합니다.
작년에 거듭났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 거듭남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새로운 원칙이 들어 온 거예요. 철도가 대전에서 부산으로 가는 것과 그냥 광주 가는 쪽으로 갈라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풍경이 바뀝니다. 풍경이 바뀌고 바뀐 승객들의 말씨가 달라요.
이건 내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그런 경험을 천국 가면서 하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함께하므로 인생을 실패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이 함께하므로 성공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함께 했다는 단지 그 이유 때문에 인생 조지게 만들어 버립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조졌거든요. 하나님이 이 땅에 와서 인생 조졌습니다.
돈을 벌었습니까? 예수님이 투기에 성공을 했습니까? 결혼을 한 적이 있습니까? 뭐 내세울 만한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의 그 모든 탓을 세상 탓으로 돌리죠. 예수님 자신은 죄가 없고 흠이 없는데 “세상이 이런 식으로 나를 실패자로 만들었다. 너도 너 자신을 부인하고 나를 따를래?” 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자기의 의지로써 결코 천국 가는 길에 나설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달리 말해서 모든 인간은 천국 가는 길이라 할지라도 거부하는 본성을 발휘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은 어떤 일을 할 때 자기의 의지와 결심이 발동하는데 그 의지와 결심은 다른 원인에 의해서 결정 난 원인에 의해서 결정 난 원인에 의해서 또 다른 원인, 원인, 원인들이 복합적으로 지금의 나의 결정을 유발시킨 겁니다.
따라서 내가 결정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내가 결정해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경로와 연쇄 고리들이 시퀀스처럼 세상으로부터 마치 비온 뒤에 거미줄 치듯이 항상 거미줄 거미 망에 의해서 쫙 나에게도 영향을 미치죠. 따라서 그 원인들의 최종 원인을 알려면 모든 세상 질서를 다 알아야 돼요. 모든 변화를 완벽하게 다 아는 지식이 있어야 돼요.
그렇게 될 때 우리는 ‘아, 이런 원인 때문이구나.’ 라고 아는데 누가 그걸 다 압니까? 가로수잎이 개수가 7646개가 되는 이유를 누가 알겠어요? 7643개가 아니고 왜 7646개가 되는 이유를 아무도 몰라요. 과수원에 태풍 지나가서 사과 떨어진 개수를 주워보면 아는데 미리 몇 개 떨어졌는지 아무도 몰라요.
어떤 경우라도 우리는 내가 모르는 세계에 내가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거듭나기 전에 세계가 뭐냐 하면 모르면서도 개코도 모르면서 무조건 자기는 잘되어야 하고 무조건 자기는 살아남아야 되고 무조건 자기는 천국가야 하고, 그 무조건 무조건을 왜 거기에 거론을 하는지, 이건 터무니없는 망발을 유발하면서 계속해서 우기면서 모든 인간들은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걸 두자로 하면 ‘억지’죠. 억지. 인간이 사는 것이 억지예요. 고집이고 억지고 완악함입니다.
여리고성을 무너뜨리면서 이제 자기들은 승리만이 계속해서 이어질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패배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있기 때문에. 그러나 그들이 모르는 게 있어요. 하나님이 어느 길로 가시는지, 이 땅에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어떤 길로 데려가는지 하나님 자신이 그야말로 고장이 난 차처럼 어디에 처박힌다는 사실을 그들은 몰랐습니다.
가장 큰 패배자의 자리로, 주님께서 거기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그들은 상상도 못했죠. 왜 패배자의 자리에 가셨느냐 하면 하나님 빼놓고 모든 인간 세계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개코도 모르면서 전부다 성공해야만 한다는 쪽으로 가니까 주님께서는 그들과 정반대의 방향으로 외롭게 가십니다.
가시면서 자기 백성을 데리고 가시면서 자기 백성 안에 담겨 있는 기존의 잘못된 생각,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함으로써 우리는 성공한다는 생각, 우리가 아니라 사실은 내가 성공한다는 것, 내가 성공한다는 그러한 곡해와 오해를 왜곡된 사고방식을 주께서 수정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수정하시는데 구약과 신약이 달라요.
구약에서는 보는 것으로 수정을 시킵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보이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왜곡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습니다. 인간은. 안 봤으면 괜찮은데 봤기 때문에 확신 가지고 살아가는 겁니다. 간증이라는 것이 그렇게 위험해요. 경험했기 때문에 다시 성공이 오리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방언을 해 봤기 때문에 자기는 누가 뭐래도 천국 간다고 우기게 돼요. 차라리 방언을 안 하면 더 좋을 뻔 했는데. 더 나아가서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더 좋을 뻔 했는데. 뭔가 태어나서 봤기 때문에 자기는 자신만만한 겁니다. 마치 어린 아이 같아요. 아이들은 세상 앞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아이들을 보세요. 여기가 밀라노인지, 미국인지, 일본인지 이야기해도 두 살 먹은 아이들은 관심 없어요. 중요한 것은 일본이냐, 미국이냐가 아니라 지금 엄마가 앞에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한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실체를 드러내기 위해서 경치 구경하라고 데려가는 것이 아니고 사람을 만나게 합니다. 다른 사람을 통해서 너와 그들 사이에 차이점을 발견하게 해요. 그러면 차이점이 어떻게 있느냐 하면 이스라엘을 만난 사람들은 여호와 하나님, 애굽에서 자기를 구원한 하나님이 없이 살아가는 겁니다. 홀로 살아가는 거죠.
거기에 비해서 이스라엘은 지금 하나님이 함께 있다고 했습니다. 거기까지는 괜찮았어요. 문제는 하나님이 함께 있기 때문에 무조건 적으로 하나님께서 승리하신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점을 오늘날 신약에 적용 시켜봅시다. 뭐든지 해도 주의 뜻이다. 문장을 만들어 보면 ‘내가 뭐든지 해도 그게 주의 뜻이다.’ 라는 문장을 우리 자신에게 적용시켜버리면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주의 일이 되는 건 틀린 말이 아니고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처음에 ‘뭐든지 해도 주의 일이다’ 라는 것이 입꼬리가 올라가고 미소를 머금는 이유는 그 말뜻에다가 뒤에 뭘 보탰어요. 무슨 일이든지 주의 일이기 때문에 나에게 이득이 될 것이라는 그거는 살짝 감춰요. 주의 일이기 때문에 차마 주가 나를 버릴 일은 없을 것이라고, 주께서 나를 힘들게 하시지 않을 거라는 그 뒤에 문장이 따라오는데 그건 살짝 감추고 “내가 하는 일은 주의 일입니다.” 라고 하면서 내가 뭐 잘못했느냐는 식이죠. 그것을 오늘날 신약에 적용하면 그렇게 되는 겁니다.
기도 열심히 하면 주께서 응답하신다는 말은 보통 기존 교회에서 많이 하죠. 주께 응답받았다 하면 갑자기 입꼬리가 올라갑니다. 기분 좋습니다. 그런데 원래 성경에는 주의 뜻이 뭐냐 하면 좁은 길로 가는 거예요. 좁은 길로, 찾는 사람이 없는 길로 가는 겁니다. 그리고 그 길은 평탄한 길이 아니고 협착한 길이에요.
그 길이 있을까 할 정도로 없던 길에서 좁은 길 툭툭 튀어 나옵니다. 입꼬리 올라가 하등 이유가 없어요. 혼자 상상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니까 그 다음부터는 주의 길이다. 영생 길이다. 맞지요. 그런데 그 영생길이 성경을 한번 보시면 이건 정말 가기에는 사양하고 싶은, 이건 내 힘으로는 도저히 들어설 용기가 나지 않는 길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주님께서 이방민족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제대로 이스라엘을 알려주기 위한 용도로 그들과 전쟁을 붙여 줬습니다. 적은 너의 바깥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너의 내부에 적이 있다. 그 적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이제 하나가 되었다는 그것이 바로 오해라는 겁니다. 하나가 된 것이 아니에요. 그럼 어떻게 된 것이냐?
주님께서 인간을 만날 때는 신약에 누가복음 15장에 나오지만 잃어버린 탕자가 아버지를 만나는 식이에요. 그걸 제가 쉽게 예를 들면 전지현이 나왔던 ‘엽기적 그녀’ 라는 영화가 있어요. 아마 경건하신 분들이라 세속적인 영화를 잘 모르실 텐데 그게 뭐냐 하면 둘이 연애하면서 마지막 하이라이트가 나무 밑에다가 우리가 살았던 추억을 묻습니다. 청소년 때, 대학교 때, 연애할 때, 그런 이야기 많이 해요. ‘십 년 후에 우리가 무엇이 되어 만날까?’
그런 소설도 있지만, 우리가 십 년 후에 무엇이 되어 만날 거냐는 겁니다. 15살 같으면 25살 때에, 18살 같으면 28살 때에 만나자는 겁니다. 헤어질 때 캡슐 같은 것을 묻는 것도 좋지만 이런 것이 있어요. 옛날 조선시대 때에 보면 헤어질 때 뭔가 사랑의 표식을 반으로 부러뜨려서 반반 떼어가지고 나중에 다시 만날 때 그 깨진 부분을 맞춰 볼 때 딱 맞으면 “아이고, 내 딸 맞구나~” 하고 만날 수 있도록 반 조각씩 각각 나누어 가지고 다시 만날 때를 위해서 표식을 만드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는 말이죠.
그러면 이거는 그런 표식을 그냥 붙이면 되는데 하나님은 그냥 붙이지 않고 본드를 가지고 붙여요. 만날 때. 그 본드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왜 인간들은 하나님과 결별할 수밖에 없는가하는 그 이유가 내포된 풀을 가지고 그것을 붙여야 온전한 하나가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함께 하셨다는 그들은 자동적으로 하나님과 함께 있는 줄 알고 있어요.
이미 이스라엘도 육이거든요. 이건 죄인이잖아요. 하나님이 의인을 만날 때는 그냥 만나주지 않습니다. 아까 이야기 했지만 성도는 거듭났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만들어 가는 거예요. 어느 쪽에서냐면 주님 쪽에서 만들어 가는데, 만들어 갈 때 원칙이 있습니다. 도저히 하나 될 수 없는 것을 하나 되게 하는 원칙을 주님 쪽에서 만들어 내야 돼요.
만들어서 그걸 본드로, 그 풀을 가지고 헤어진 자기 백성에게 딱 갖다 들러 붙여야 돼요. 누가복음에서는 탕자라고해서 아버지 입장에서 그냥 받아 주지만 그냥 존재와 존재를 만난다고 해서 하나 된 것이 아닙니다. 어떤 인간도 다른 인간과 하나의 존재로 결합될 수가 없어요.
이번에 겨울 수련회에 아가를 하는데 아가서를 쭉 하면서 정말 너무 어려워요. 그 노골적인 성의 표시와 관능적 표시가 다 나오거든요. 나오는데 제일 궁금한 것이 남녀가 둘이 사랑한다. 사랑하면 하나입니까? 문제는 이게 하나가 안 된다는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조건이 유지 될 때만 하나지, 조건이 나중에 만났는데 틀어져 버리면 조건 안 맞는데 하나를 유지할 수 없으면 이건 헤어져야 돼요.
처음에 연애할 때 좋다고 했지요. 안 좋은 사람과 연애하겠어요. 좋다고 했는데 그 연애를 할 때 왜 좋았는지, 무엇 때문에 좋았는지, 갖가지 이유가 있을 거예요. 제일 큰 이유가 뭐냐 하면 그 때는 젊었다. 그냥 반했다. 그냥 좋아서. 젊음이 좋아. 그러나 젊음이 좋다면 나중에 결혼해서 5년~10년 아이 낳고, 몸매도 엉망 되고, 약간 늙었다면 어떻게 됩니까? 이미 하나 됨의 조건이 달라졌으니까 헤어지는 것만 남았죠.
과연 이 아가에 나오는 남녀가 사랑하는데 그 사랑의 조건이 어떠한 조건이기에 어떻게 죽음보다 더 강렬하냐는 겁니다. 죽음보다 더 강렬한 그것을 찾아내고 발견하는데 나름대로 애를 먹고 있습니다. 뭐, 해결책 있겠지요. 그것을 찾아내야지요. 이미 힌트는 알고 있어요. 예루살렘이라는 거. 예루살렘의 왕이라는 것까지. 하나님의 다윗 언약 개통의 왕이라는 언약이 풀이 되는 겁니다. 본드가 되는 거예요. 딱 붙는 풀(glue)이 되어요.
그처럼 여기에 오늘 본문에서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 두 조각 난 것을 하나로 붙이는데 그것을 붙일 때, 이스라엘의 건방 떠는 것을, 건방진 그것을 완전히 작살내야 됩니다. 오늘 주보 요약에 밑에서 여섯 번째 보면 “우리 자신이 얼마나 건방진 포즈를 취하고 있는지 실감해야 됩니다.” 건방진 포즈거든요.
오늘 본문에 아이성 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뭐냐 하면 올라가서 아이성을 정탐하라고 정탐꾼을 보냈는데 여호수아에게 돌아와서 3절에 보면 “백성을 다 올라가게 하지 말고 이삼천 명만 올라가서 아이를 치게 하소서” 아이 성이 작은 성이에요. 작은 성이 만만하니까 치라고 한 거예요. 이게 바로 건방진 포즈입니다.
주님께서 일을 이렇게 하셨습니까? 그렇지 않거든요. 주님께서 자기백성 건질 때 하나님이니까 말씀만 해도 돼요. 손잡고 뭐 발라주기만 하면 돼요. 그러나 산상설교에서 좋은 말씀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자기백성을 위해서 자기의 아끼는 살과 피를 다 쏟아버렸어요. 그걸 없애 버렸습니다. 살과 피, 자기 목숨을 버리지 않으면 어느 한 인간도 만만하게 구원될 수 있는 인간이 아무도 없어요.
우리 눈에 보기에는 인간들이 만만하지요? 악마가 쥐고 있습니다. 악마의 인질들이에요. 지금 하나님은 악한 영들과 싸우고 있습니다. 만만하게 싸울 수 없어요. 악한 영들과 싸우기 위해서는 먼저 인간들이라면 적들과 어떻게 어떤 사고방식으로 싸울 것 인가를 먼저 보여줘야 되죠.
그것 때문에 먼저 하나님께서는 아이성이라는 만만한 성을 붙여 준거예요. 아니나 다를까 자기의 본성이 싹 드러났습니다. 교회에서 전도한다고 하는데 사실 인간은 전도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저 사람은 성품이 좋고 평소에 잘 아는 친구니까, 만만하니까’ 몇 번 점심 사주고 식사 대접하면서 교회 오라고 하면 옵니다. 교회 올수는 있겠지요. 체면과 체면의 만남이니까.
올수는 있지만 그게 구원받은 거예요? 혼자 왔다가 혼자 듣다가 혼자 갔는데. 나 홀로 왔다가 나 홀로 앉아 있다가 나 홀로 갔는데 그게 뭐가 구원입니까? 혼자 사는 거죠. 혼자 왔는데 주님과 깨어짐의 사랑의 표식을 붙여서 갔다. 이것은 주님의 몫이지, 사람이 할 수 없는 겁니다. 혼자 왔는데 나갈 때는 주님과 동행해서 나갔다. 이렇게 되어야 하거든요.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저 사람이 정말 올 때는 ‘네가 불러서 여기 앉아 있다. 그러니까 내가 너의 체면치레 해주려고 앉아 있는 것이다. 나는 나의 할 도리 다 했어.’ 라고 생각하면서 앉아 있다가 성령이 임하는 순간 이건 친구가 부른 게 아니고, 어떤 집사나 권사나 목사가 부른 게 아니고, 내가 결정한 것이 아니고, 어떤 결정도 모르죠, 주께서 천국가라고 나로 하여금 이 자리에 몰아넣었다는 것까지 나서야 돼요.
그렇게 주께서 하실 때에는 왜 내 힘으로 내가 결정해서 천국 못 가느냐 하면 나는 바로 악마의 인질로 잡혀 있기 때문에 주께서 뜯어 주지 아니하면, 악마의 사슬을 가위로 끊어주지 아니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악마는 뭐라고 요구하느냐 하면 공포심을 유발하는 거예요. “네가 그렇게 살아서 지옥 간다. 너 나쁜 짓 많이 했잖아. 너 열심히 안 살잖아. 앞으로 어떤 실수나 실패가 있을지 모르는데 그래가지고 천국 가겠어?
계속해서 악마는 이 말씀을 가지고 율법을 가지고 우리에게 공포 분위기를 조성합니다. 사람이 아무리 성공해도 공포 분위기 있어요. 그래서 좀 어려운 이야기지만 성경에서 뭐냐 하면 모든 전쟁의 마감을 안식일에 담아 버려요. 6일 동안 인간은 일한다. 하지만 그 6일은 아무소용 없어요. 중요한 것은 6일 일하고 하루 쉴 때 고생했으니까 하루 쉬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 안식일 날 뭐냐 하면 제사를 지내요. 네가 네 식대로 사는 그 모든 것에 죄가 묻혀 있고 죄가 묻어 들어 온 거예요. 주님에게 안식은 용서할 자에게 용서했을 때 비로소 주께서 안식하는 거예요. 따라서 구원은 내 일이 아니고 주님이 자기 편하기 위해서 우리를 구원하는 겁니다. 그런데 제대로 주님과 하나가 되지 못한 사람은 내 구원을 위해서 주님께서 일했다고 우깁니다.
여전히 자기라는 것이 우뚝 살아 있어요. 그러니까 공포분위기가, 악마가 계속 찾아오는 거예요. “너 그러면 붙든 구원도 나중에 놓치게 된다. 너는 그 정도로 나쁜 짓 했으니까 탈락이야.” 주님께서 구원하시면 탈락도 없을뿐더러 내가 신경 쓸 것도 없어요. 우리는 만들어져 간다고요. 거듭남이 한 번에 끝나는 것이 아니고 계속해서 거듭나야 돼요.
내 것이 털어내져 버리니까 내 것을 향해서 오는 모든 공포와 불안도 떨어져 나가는 겁니다. 이번에 태풍 불 때 세차 안 해도 됐지요? 다 떨어져 나갔잖아요. 주님의 피의 태풍이 몰아치면 피만 남게 되고 나는 피만 증거 하는 죄인일 뿐이라는 그것만 남게 돼요. 피를 주신 분이 알아서 하실 거란 말이죠. 왜냐면 내가 나를 만드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러면 주께서 피를 흘렸다면 우리는 그 피에 가담하기 위해서 우리는 피 흘리기까지 실패하고 또 실패하고 또 실패해야 돼요. ‘주여 너무 하십니다’ 라는 말이 안 나올 때 까지. 계속해서 ‘고맙습니다’ 라는 말이 나올 때가지 계속 나가야 돼요. 주께서 일부러 백성들로 하여금 여기 몇 명 죽이냐 하면 5절에 보면 “아이 사람이 그들을 삼십육 명쯤 쳐죽이고 성문 앞에서부터 스바림까지 쫓아가 내려가는 비탈에서 쳤으므로 백성의 마음이 녹아 물 같이 된지라, 여호수아가 옷을 찢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함께 여호와의 궤 앞에서 땅에 엎드려 머리에 티끌을 뒤집어쓰고 저물도록 있다가, 여호수아가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어찌하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요단을 건너게 하시고 우리를 아모리 사람의 손에 넘겨 멸망시키려 하셨나이까”
“주님이여, 우리가 원하는 주님 맞습니까?” 이런 말입니다. 이게 바로 만들어지는 과정 속에서 우리가 수시로 계속 내뱉는 튀어나오는 말씀입니다. “주여, 내가 지금 주님 잘 믿는 겁니까?” 라고 내 쪽에서 예수를 믿는다고 또 우기고 있어요. 내 쪽에서 예수를 믿는 게 아닌데 믿음을 선물로 줬는데 우리는 자꾸 선물로 받은 그것을 내가 간직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제 말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처음에 이 땅은요 장자 상속제예요. 처음에 우리가 신명기에서 봤듯이 장자 상속제라고요. 이게 우리가 차지하는 것이 아니고 상속하는 겁니다. 그냥 주는 거예요. 천국은 그냥 주는 건데 문제는 아직까지 들어갈 인간이 안 되었어요. 주님은 그냥 주시는 건데 주시는 거라고 생각을 안 하고, 내가 쟁취한다, 나니까 얻은 거다, 그러니까 나는 잘 났잖아, 이런 것들이 계속 남아 있으니 주께서 밟으시고 또 밟으시고 또 터트리고 또 터트리고.
붕어빵 사서 한번 밟아 보세요. 앙꼬가 팍 튀어 나옵니다. 주께서는 우리를 이렇게 만드십니다. “나는 너보다 고생했는데 뭐 그 쬐금 고생했다고 그렇게 길길이 뛰면서 네 인생, 네 청춘 돌려달라고 하느냐? 네 인생이 어디 있다고?” 내 인생이란 건 없어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스라엘 전쟁을 통해서 눈에 보고 있다는 것이 화근이 되고 말았습니다. 내가 날마다 나를 점검한다는 것이 이것이 화근이고 내가 나를 측정한다는 것이 사탄의 짓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저 범사에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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