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강-여호수아 6장 16~19절(전쟁의 원칙)20180923-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여호수아 6장 16~19절입니다. 구약성경 326페이지입니다.
“일곱 번째에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 때에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외치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 성을 주셨느니라, 이 성과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은 여호와께 온전히 바치되 기생 라합과 그 집에 동거하는 자는 모두 살려 주라 이는 우리가 보낸 사자들을 그가 숨겨 주었음이니라, 너희는 온전히 바치고 그 바친 것 중에서 어떤 것이든지 취하여 너희가 이스라엘 진영으로 바치는 것이 되게 하여 고통을 당하게 되지 아니하도록 오직 너희는 그 바친 물건에 손대지 말라, 은금과 동철 기구들은 다 여호와께 구별될 것이니 그것을 여호와의 곳간에 들일지니라 하니라”
전쟁하는 전쟁의 원칙이 있습니다. 보통의 전쟁은 그 전쟁하는 당사자에게 혜택이 돌아가게 되어 있지요. 그게 원칙입니다. 전쟁하는 당사자에게 혜택이 돌아간다. 그러면 이 여호수아에서 읽은 본문에서 누가 전쟁을 시행하느냐, 그리고 누가 전쟁을 유발시켰느냐 하면 그 모든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하신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에게만 혜택이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에게 혜택이 돌아가면 그러면 이스라엘에게 돌아가는 혜택은 없느냐. 없습니다. 없어요. 그걸 이스라엘이 각오하고 인정해야 됩니다. 모든 전쟁은 하나님의 자기 좋으라고 하는 전쟁이죠. 그 전쟁의 원칙과 원리는 그 결론이 미리 알게 됨이 필요한데요.
그 결론이 에베소서 4장 8절에 보면 결론이 나와 있습니다. 7절부터 보게 되면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혔던 자들을 사로잡으시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하였노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올라가셨다 하는 말은 뭐냐, 9절에 보면 “올라가셨다 하였은 즉 땅 아래 낮은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에베소서 4장 8절, 9절에서 논리가 전개되는 부분에 하나님의 성도가 거기 같이 끼어들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지금 내가 논리를 전개할테니까 여러분들의 논리는 접어버리고 내 논리에 첨벙하고 뛰어들어오시기 바랍니다.”라고 하면서 제시한 논리가 뭐냐 하면 초월은 내면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하는 이런 이야기죠.
내가 방금 요약을 했거든요. “초월은 인간의 내면에서부터 시작된다. 초월은 이 세상에서부터 시작된다.”라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보통 초월이라고 하는 것은 위를 쳐다보기마련이거든요. 그런데 여기 에베소서 4장 8절과 9절에 보면 “올라가셨다 하였은 즉” 초월이죠. 하늘로 올라갔으니까. “초월하였은 즉 땅 아래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이렇게 되어 있어요.
올라갔다는 이 말은 올라가셔야 할 그분이 의도적으로 지상을 향하여 일부러 자기 뜻, 자발적인 뜻에 의해서 이 땅을 방문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찾아오셨다는 이야기예요. 그러면 위에 올라가실 그분이 그냥 위에 사시지, 사람 사는 이 땅에 왜 오셨는가? 전쟁을 벌이기 위해서 오신 거예요.
사로잡혔다는 말은 전쟁 벌이고 있는 중이란 말이죠.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이 말은 이 지상에서는 인간들이 사로잡아야 될 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능력으로 자기들을 사로잡고 있는 자를 사로잡지 못하고 있는 형국이고, 그런 형편에 있었다는 말입니다. 사도바울이 이야기하는 겁니다.
마귀를 인간이 사로잡아야 되는데 오히려 마귀에게 사로잡혀 있는 입장에서는 이 전쟁 자체가 성립이 안 되는 거예요. 그럼 전쟁을 하려면 위에 계신 분이, 이 지상에 안 계신 분이 위에서부터 와가지고 지상에서 사로잡을 자를 사로잡고 그게 끝이 아니라, 사로잡은 그다음에 우리에게 사로잡았던 분의 갖고 있던 노하우와 그분이 전쟁에서 승리했기 때문에 아버지로부터 부여받은 그 영광 같은 것을 선물로 자기 백성에게 주는 거예요.
그걸 경상도 말로 ‘앞앞에’라고 하는데 제각기, 각각에게 선물로 주는 겁니다. 그러면 “그 선물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을 수 있는데 그 선물은 바로 우리 자신이 선물이 되는 거예요. 우리 자신이. 가난한 총각과 처녀 사이에서 뭐 금반지 살 돈도 없고, 뭐 선물 할 것이 없으면 어떻게 하느냐. “생일인데 선물 없나?” 물으면 자기 머리에 꽃 하나 꼽고 “짜잔, 내가 선물이다”라고 하잖아요. 그리고 욕 되게 얻어먹고 하는데.
바로 선물이 뭐냐하면 좀 허접해 보이지만 우리 자신이 선물이 되는 겁니다. 지난 시간 이야기 한 것처럼 기생 라합이 선물이 되는 거예요. 기생 라합자체가. 우리는 선물을 소유하려고 하거든요. “내가 원하는 선물을 하나님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하는데 하나님은 “네가 원하는 선물을 나는 안 주겠다. 너 자신이 나의 선물이 되게하겠다” 이렇게 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선물을 받으려고 시도한다면 자기가 선물 받을만 한 인간이라고 그걸 정리하겠지요. 그게 하나님의 전쟁에서의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전쟁에서 하나님 편에 들려면 내 자신이 곧 하나님의 선물인 걸 알아야 되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선물을 내가 하나님에게 받아 챙겨야겠다는 그것을 포기해야 돼요.
그러한 자아상을 우리가 손을 놓아버려야 됩니다. 그러면 그러한 자아상은 어디서 흘러들어 오는가? 과거로부터 흘러들어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선물은 뭐냐, 망각입니다. 잊어버리는 거예요. 잊어버리는 것이 가장 큰 선물이죠. 어떤 의미에서는 연세 많아지면서 치매 안 걸리면 주위 사람들이 힘들어요. 너무 기억하는 게 많아가지고 자식들에게 꼬투리를 잡을 수 있어요.
그런데 건전한 치매, 점잖은 치매가 되어 버리면 다 잊어버려요. 다 잊어버리기 때문에 참 편합니다. 만약에 어떤 노인이 돈을 좀 가지고 있는데 자꾸 자기 과거에 ‘맏이한테 다 줘야지, 맏이한테 다 줘야지...’ 이런 생각을 치매 안 걸리고 갖고 있으면 돈 있어도 둘째, 셋째는 끝났어요. 아무것도 안 갑니다. 마지막 도장 찍을 때까지 정신 있으면 맏이한테 다 가버리고 둘째, 셋째는 헛물켜는 겁니다.
그런데 참 다행스럽게도 치매 걸렸단 말이죠. 그러면 맏이가 와도 맏이가 누군지, 둘째가 와도 둘째가 누군지 모르게 되면 나중에 끝나고 난 뒤에 1/N로 아주 공평하게 나눠지는 거예요. 오늘날 세계에서 가족끼리 제발 서로에 대해서 잊어버리면 좋겠어요. 추석때 조상 복받은 사람은 추석되면 해외 여행가고 복 못받은 인간은 제사 지낸다고. 집에서 전 굽고 있어요. 얼마나 복을 못 받았으면.
그 시간에 빠지지 못하고 그 짓하고 있는 거예요. 이처럼 세상에 모든 것은 자기 것이라고 할 때 “나는 내 것을 버립니다. 무소유.” 이러지 말고 아예 나를 잊어버려야 돼요. 그래서 가위가 있으면 과거를 과거의 그 꼬리를 아주 잘라버려야 됩니다. 모든 걸 잘라버려야 돼요.
그러면 성경에서 여호수아 본문이나 에베소서에서 전쟁이 끝나고 전쟁에 승리의 결과는 뭐냐 하면 제가 선물이라고 했지요. 이 선물을 에베소서나 다른 곳에서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모든 형식과 제도가 무용지물인 상태. 우리가 그동안 얼마나 형식, 남에게 형식 챙긴다고 주춤했습니까? 그리고 이 제도에 억매여서 체면치레 한다고 얼마나 자기를 옥죄었습니까? 힘들게 살았어요.
그런데 천국가면 형식도 없고 제도도 없어요. 얼마나 좋아요. 정말 천국 갈만한 나라 아닙니까? 어떤 형식도 우리에게 요구하지 않고 어떤 제도도 우리에게 압박하지 않는 세계. 그 세계가 어떤 세계냐 하면 그냥 그대로의 세계, 못났으면 못난 그대로 세계, 모든 것을 그대로의 세계로 가져오라는 겁니다.
제가 괜히 하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민수기 31장에 보면 전쟁 끝나고 난 뒤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민수기 31장에 보면 전쟁 끝났을 때 이렇게 하라고 이미 민수기 율법을 통해서 이야기했는데 거기에 22절에 보면 “은, 금, 동, 철, 납 무릇 불에 견딜만한 물건들은 불에 지나게 하라” 이 말은 뭐냐 하면 네가 전쟁에서 가져온 그 모든 것을 그냥 그대로 가져오라는 겁니다.
제가 과도히 해석하는 게 아니에요. 민수기 31장 17절에 보면 “그러므로 아이들중에 남자는 다 죽이고 남자와 동침하여 사내를 안 여자는 다 죽이고 남자와 동침하지 아니하여 사내를 알지 못하는 여자들은 다 너희를 위해서 살려두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남자 모르는 처자는 그냥 오란 말이죠.
그냥 그대로 오란 말이 뭐냐 하면 인간대 인간이 엮이지 않는 상태가 그것이 전쟁에 전리품이라는 겁니다. 어떻게 세상 살면서 엮이지 않을 수가 있느냐? 그러면 엮이지 않거든 내가 밀쳐낸 사람은 천국에 오라는 겁니다. 밀쳐낸 사람. 저 사람이 왔을 때 밀어낸 사람, 오지 말라고 밀어낸 사람. 제가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잖아요. 기생 라합이요.
자기 동족과 자기 일가 친척을 밀어냈어요. 내가 믿는 하나님은 이미 이곳을 접수한 하나님이시라는 그런 안목을 가지고 기생 라합은 자기가 태어난 그 자리를 해석했습니다. 그걸 파악했어요. 놀라운 겁니다. 현재라 하는 것은 과거의 집대성인데 과거를 살면서 미래가 주어지지 않는 법인데 기생 라합은 자기 여리고성을 향하여 광야에서 쳐들어오고 있는 그 이스라엘 백성들의 그 내력과 일어난 사태를 보고 뭐라고 했느냐 하면 이스라엘의 미래를 보장하는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라고 한 겁니다. 그걸로 이해한 거예요.
이스라엘은 비록 광야에서 고생은 하지만 그들의 하나님은 그들에게 약속한 바가 있다는 겁니다. 이런 식으로 가되 결국 약속의 땅은 너희가 접수한다는 거예요. 그것은 이스라엘에게 이야기했고 이스라엘에게 그 차원에서 당부한 것이 뭐냐 하면 과거를 잊어버려라, 뒤를 돌아보지 마라, 애굽으로 가지마라는 겁니다. 애굽 시절의 너는 이미 하나님이 거절한 자아라는 겁니다.
주님께서 천국에서 거절한 자아를 왜 자꾸 고집스럽게 그걸 붙들고 있습니까? 과거에 우리는 뭐냐? 사람과 사람에게 엮였던 과거거든요. 우리의 과거를 한번 생각해보세요. 전부 다 일가, 친척, 친구 모든 것이 사람과 엮었던 그러한 스토리가 역사가 과거잖아요. 그런데 주님이 생각하는 관계라 하는 것은 인간의 엮었던 과거를 전부다 뻥뻥하고 구멍을 다 뚫어 버렸어요.
만약에 하나 예를 듭시다. 피자 판이 하나 있는데 그 피자 판에 구멍을 다 뚫었다고 합시다. 듬성듬성 구멍을 뚫고 겨우 윤곽만 이렇게 엉성하게 있다면 거미줄과 같은 집이 될 거예요. 거미줄같은 집이 뭐냐 하면 약한 관계로만 엮여 있지 본체는 다 빠져버린 거, 네가 나와 알았던 적은 있지만 너와 내가 주고받았던 것은 다 잊어버렸다는 겁니다. 그런 관계.
본체가 다 빠져버리고 얼키설키 섞여 있는 그런 모습을 거미집, 거미줄로만 형성된 거미집이라고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거미집에 장마졌거나 비 올 때 한번 보세요. 그 물방울은 중간중간에 다 빠지고 어디만 겨우 매달려 있냐 하면 새벽에 보면 거미줄에 아롱아롱 매달려 있잖아요. 우리네 인생은 뒤돌아보면 이 거미줄 같은 거예요.
전부 다 허망이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헛되고 허망한 주고받던 모든 이야기가 지나고 보면 다 실없는 이야기, 아무 실없는 농담 같은, 낭망이라고 하기엔 지나고 보면 다 실없는 이야기, 해도 되고 할 필요도 없는 이야기로 주고받으면서 그냥 살아오는 겁니다. 꼭 오후 예배 시작되기 전에 하는 그 이야기, 아무 쓸데없는 이야기, 그냥 시간 보내기 지루해서 하는 농담 같은 이야기, 제가 이 말을 하는 이유는 인생에 늘 구멍 뚫려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게 구멍이 안 뚫리면 너무 챙겨줘야하고 일일이 생각해야되고 골치 아파요. 명절 되면 세계에서 챔피언급 되는 경우 바른 우리 사돈 때문에 골치 아파요. 늘 챙겨줍니다. 우리는 안 챙겨주지요. 그래서 아내가 챙겨주려고 하니까 제가 말렸어요. 경우바르기 배틀하는 것도 아니고. 제발 그러지 맙시다. 고맙다고 하면 되지 또 그거 다 하게 되면 둘 다 자꾸 실없는 내용이 자꾸 채워지게 돼요.
인생을 버려야 가볍잖아요. 무거운 책임감 같은 것을 자꾸 바보같이 짊어지게 되면 그건 어리석은 짓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민수기에 나오는 이 은과 금 이야기를, 이게 전쟁이야기 인데 이것의 해답은 역시 신약에서 풀어야 해요. 구약에서 아무리 들여다 봐도 해답이 안 풀립니다. 도대체 전쟁의 원리가 뭐냐? 신약에서 찾아야돼요. 신약 고린도전서 3장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3장 9절에 보면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궁금하죠? 천국이라는 것이 어떻게 구성되는지. 일단은 제가 에베소서 4장 언급했기 때문에 우리 자신이 전리품이라는 것은 알았는데, 우리 자신이 전리품이라는 것은 전쟁에서 어떤 의의가 있는지 그걸 11절에 보게 되면 “이 터는 곧 그리스도 예수라” 다시 연결시켜 보면 예수님과 우리 사이가 어떤 사이냐 하면 구원 될 수 없었는데 예수님의 공로로 구원되었다는 그 이야기입니다.
그럼 이걸 구체적으로 하면 어떻게 되느냐?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이렇게 나와 있어요. 13절에 보면.
이 말씀을 보았는데 이제 민수기 31장으로 다시 오는 겁니다. 22절에 “금, 은, 동, 철과 주석과 납 등의 무릇 불에 견딜 만한 모든 물건은 불을 지나게 하라 그리하면 깨끗하려니와” 주님께서 전쟁할 때 주님 나름대로 복잡해요. 그냥 얻은 거 당겨가지고 곳간에 넣으라면 간단하잖아요. 그런데 이게 간단치가 않아요.
뭘 통과시키느냐 하면 불테스트를 해요. 불로 견딜 수가 있는 가를 테스트를 해요. 테스트를 시험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전쟁을 하면서 하나님이 누구하고 자꾸 테스트를 하느냐 하면 우리 인간하고 테스트하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이 하나님하고 테스트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에게 약속을 주고 약속을 내리신 하나님, 성부 하나님이죠, 약속을 받아서 그것을 실천하시는 하나님, 성자 하나님. 하나님과 하나님 사이에서 일어난 일이 마감되면 거기서 선물이 발생하고 그 마감된 내용을 곳간처럼, 선물을 담아야 될 그릇처럼 사용한 것이 오늘날 성도입니다. 성령을 보내서 성도 만드는 거죠.
그러면 성도 안을 쪼개면 뭐가 있느냐? 성도 안에 쪼개보면 하나님이 전쟁을 어떻게 치르고 어떤 원리로 치르고 그 결과가 이미 완료되었다는 내용이 들어있어요. 이걸 제가 주일학교 설교할 때 사무엘 쪼개면 그 안에 하나님의 은혜 들어있다고 제가 언급을 한 것과 같은 취지입니다. 우리 안에 쪼개면 그 안에 주님의 은혜가 들어있어요.
그런데 은혜라는 것이 너무 모호하고 너무 개념이 불명확하잖아요. 뚜렷하지 않지요. 그 뚜렷하지 않은 것을 주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말씀을 통해서 은혜는 은혜인데 뚜렷하게하기 위해서 계속 말씀을 주시는 겁니다. 말씀을 주면서 모든 형식과 모든 제도를 다 무용지물로 만드는 작업도 세밀화시키는 작업중에 하나예요.
“주님, 교회법을 지켰습니다. 뭘 했습니다.” 이런 것들은 세밀화 작업에서 “이런 것들 신경 쓰지 마라” 하면서 다 빼내는 거예요. 그리고 이런 것도 있어요. “성경에는 우리가 마귀를 이기라 했고, 우리가 세상을 이기라 했으니까 제가 세상을 이겼습니다.” 하면 주께서 하신 말씀이 “그건 상대보고 이야기한 것이 아니고 너를 보고 이야기 한 것이다.”
상대가 변하기를 바라는 것이 승리가 아니고 그 상대를 통해서 너 자신이 네가 예상도 못한 너 자신으로 달라지는 거, 그것이 바로 주님의 전쟁이에요. 내가 불신자에게 공격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은 나를 공격해요. 내 생각이나 의도를 묻지 않고 나에게 쳐들어옵니다. 쳐들어오게 되면 어떤 변화가 생기느냐 하면 전에는 “주님, 제가 이것을 원합니다”하는 인간에서 나중에는 고백이 바뀝니다. “주님, 제게 원하시는 것이 뭡니까? 도대체 나에게 뭘 원하십니까?”라고 묻는 겁니다.
전에는 “주님, 이것 원합니다. 이것 주세요.” 하다가 바뀌죠. 도대체 주님께서 원치 않는 무엇을 담아 놓고, 그 원치 않는 그것을 통해서 도대체 무엇을 원하시는지 물으면 “내가 너에게 내가 홀로 전쟁해서 얻어진 그 원리와 원칙이 너의 안에 들어있다는 것을 네가 알기를 원한다.”라고 답변이 되는 겁니다.
내 안에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이 어떤 식으로 해서 생겼는지를 알기를 원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 대목에 대해서 우리가 좀 더 세밀해질 필요가 있지요. 도대체 하나님께서 전쟁을 어떻게 하는지 그것을 오늘 본문을 한번 봅시다. 여호수아 본문을 보게 되면 6장에 17절에 보면 “나팔을 불 때 이 성과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은 여호와께 온전히 바치되”
다시 한번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전쟁은 하나님의 전리품이 있을 때 영광이 되는데요, 따라서 하나님께 바치라는 말은 그 전쟁에 인간은 일체 관여한 바가 없다는 겁니다. 이 전쟁에서 인간은 관여하기를 용납하지 않는 겁니다. 무슨 뜻인지 잘 모르는 것 같은 눈치가 보여서 제가 결론을 미리 설명할게요.
왔다 갔다 어지럽게 해서 죄송합니다. 고린도전서에서 아까 터 위에다가 불로 공력을 나타낸다는 말이 뭐냐 하면 고린도전서 3장 8절을 이야기합니다. 7절에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라는 생각을 이미 우리 안에 유지하고 있느냐를 묻는 겁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이게 원리고 원칙이에요.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한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라고 되어 있어요. 인간 자체가 금이고 은이고 동이라 이 말이죠. 그런데 “내가 금이다. 은이다.” 하지 말고 이걸 공력에다, 불에다가 테스트를 해봐야 해요.
내가 심어서 내가 구원받았는지, 내가 뿌려서 구원받았는지, 내가 물 줘서 구원받았는지 한번 공력이 어떠한지를 해보잔 말이죠. 해보는데 거기에 내가 남아 있다면 그건 공력이 불타버리는 거예요. 아까도 기도시간에 기도했지만 우리가 살아 있는 것이 잘 살기 위해서 살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잘살기 위해 살아 있는 것이 아니고 도대체 살게 하시는 이 요구가 내 쪽이 아니고 주님 쪽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살아 있습니다. 주께서 살려주시니 사는 거예요. 전쟁이라 하는 것은 인간은 전쟁을 싫어하지만, 전쟁 벌인 분이 주님이고 주님의 전쟁 벌인 대상은 바로 우리 자신이에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고방식 때문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와서 전쟁을 벌인 겁니다.
우리는 마귀의 꾀임에 빠져서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이 들어 주기를 원해요. 이게 바로 원수 된 사고방식이죠. 그러면 주님께서 말합니다. “그러면 그렇게 해서 너에게 이익이 뭐냐?” 우리가 대답하죠. “내가 잘 되잖아요.” 내가 잘 된다는 거예요. 참, 이런 내가 잘 된다는 이러한 의식을 우리가 숨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주께서 빛으로 가까이 오죠. 빛이 오게 되면 성도의 느끼는 감은 어떤 느낌이냐 하면 빛이 오게 되면 그림자가 더 짙어집니다. 전봇대에 빛이 와보세요. 그림자가 바로 생기잖아요. 빛이 오게 되면 점점 더 나의 어두움이 짙어지죠. 그래서 내가 원하는 식대로의 인생이 아니고 주의 원하는 식대로 나의 인생이 진척되어왔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게 바로 꼬리 자르기예요.
‘나는 심었고, 나는 물 주었다. 아, 왜 그렇게 했는가?’ 바로 그것이 주님을 통과할 때 통과하지 못하는 속성임을 미리 내가 챙기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내가 심었고, 내가 물 주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벌써 이 전쟁이 계속해서 세밀화되는 겁니다. “ 이 성 가운데서 모든 물건은 여호와께 바치되” 다시 설명해드릴까요? 바친다는 말은 이게 하나님이 벌이는 일이기 때문에 내 소유가 될 수 없다는 겁니다.
“기생 라합과 무릇 그 집에 동거하는 자는 살리라” 여기서 비로소 왜 우리는 우리 소유가 안 되느냐 하면 우리는 죽었단 말이죠. 죽인 인간에게서 하나님의 전쟁전리품으로 전쟁이 끝났을 때는 이런 자만 살게 된다는 그 모델케이스로 등장한 것이 기생 라합입니다. 여기 25절에 보면 “여호수아가 기생 라합과 그의 아버지의 가족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살렸으므로 그가 오늘까지 이스라엘 중에 거주하였으니”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나님은 전쟁을 벌이게 하셨고 그 전쟁 가운데서 여리고 성은 다 죽이고 진멸해야 하는데 진멸하는 그 가운데서 진멸함으로써 비로소 모든 게 죽었다 하는 곳에서 비로소 생명이 나오고 살아 있는 사람이 등장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은 다 죽이지 아니하면 생명이라는 것은 가짜가 될 가능성이 큽니다.
불에 공력을 태운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네가 한 거 말고 네가 한 것 중에 괜찮은 거 남기지 말고 네가 한 것은 다 태워버리라는 겁니다. 모든 게 죄고 죄 아닌 게 없고 너는 죄인 중에 괴수라고 인정해버려라. 그러면서도 네가 뭔가 고백 되는 거, 네가 할 수 없었는데 생겨버린 것을 네게 고백한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전리품이고, 하나님의 그런 선물을 보고 싶다는 겁니다.
열심히 삽시다. 그리고 그것이 죄라는 것을 인정합시다. 그 가운데 죽어 마땅한데 예상 못 하게 등장하는 그거 ‘주님 저에게 뭘 원하십니까?’라는 이런 고백, 그런데 이것은 공부한다고 될 문제가 아니고, 교회 나온다고 될 문제도 아니고, 성령께서 오실 때에 소유가 이미 내 쪽 소유를 일체 인정 하지 않는 것이 즐거움이 되고, 나에게 고마움이 되고, 나에게 자유가 되고, 나에게 기쁨이 되는 그런 고백 있잖아요. 그런 고백.
살아온 모든 것이 엉터리인 거예요. 살아온 모든 것이. 그런데 엉터리이기 때문에, 거기서 엉터리라고 고백한 그것 때문에 그 속에서 엉터리 아닌 게 등장하는 겁니다. 그동안 왜 구원을 못 받았고, 왜 영생이 없었습니까? 참, 이런 이야기 하는 내 가슴이 참 아픕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우리교회에 왔다가 갔습니까?
그들은 계속 뭔가 소유하려고 하는 거예요. 본인에게 문제가 있는데, 본인에게 문제 있다는 것을 모르고 뭔가 자기를 살릴 수 있는 진리 같은 것을 계속 얻고자 하는 거예요. 그러지 말라고 하니까 삐져가지고 다 간 거예요. 목소리 좋으면 뭐합니까? 그런데 안 나가고 버틴다는 건 뭐냐 하면 나를 이뻐해 달라고 버티는 것이 아니고 그게 옳은데, 우리가 못난 건 맞는데 못난 것을 못났다고 지적하는 그 무엇은 생생하게 살아 있는 거예요. 그것이 우리를 살리는 겁니다. 기생 라합처럼.
기생 라합도 라합이라는 이름 앞에 꼭 ‘기생’이 붙어요. 인간도 아니라는 거예요. 인간도 아니기 때문에, 개같기 때문에 우리는 비로소 산 거예요. 불에서 불의 공력을 통과한 겁니다. 그리고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고백을 하게 된 겁니다. 형식, 제도, 목사냐, 장로냐, 권사냐 하는 그런 거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몇 평짜리 아파트 사느냐가 무슨 의미가 있어요. 얼마나 착실하냐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주님이 주신 선물은 송이버섯 2톤이 아니에요. 송이버섯 2톤 그거 똥 됩니다. 제가 비속어 잘 안쓰는데 진짜 쓰고 싶다. 오히려 송이버섯을 배설물로 만들어 내는 뭔가 들어 온 거, 삽입된 거,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기생 라합 만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냥 있었으면 주님 앞에서 멸망 당할 도성에서 같이 멸망 당할 수밖에 없는 그런 존재였는데 어떻게 주님의 미래약속을 미리 알아차려서 주님만이 승리자 됨을, 우리는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게 해 주시니 이게 바로 하나님의 주신 선물인 것을 감사합니다. 모든 영광을 주께 돌리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