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강-여호수아 3장 13–17절(요단강 건너기)20180805-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여호수아 3장 13–17절입니다. 구약성경 323페이지입니다.
“온 땅의 주 여호와의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바닥이 요단 물을 밟고 멈추면 요단 물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끊어지고 한 곳에 쌓여 서리라, 백성이 요단을 건너려고 자기들의 장막을 떠날 때에 제사장들은 언약궤를 메고 백성 앞에서 나아가니라, 요단이 곡식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 궤를 멘 자들이 요단에 이르며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가에 잠기자,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그쳐서 사르단에 가까운 매우 멀리 있는 아담 성읍 변두리에 일어나 한 곳에 쌓이고 아라바의 바다 염해로 향하여 흘러가는 물은 온전히 끊어지매 백성이 여리고 앞으로 바로 건널새,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 가운데 마른 땅에 굳게 섰고 그 모든 백성이 요단을 건너기를 마칠 때까지 모든 이스라엘은 그 마른 땅으로 건너갔더라”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듯이 이스라엘의 이동은 곧 요단강의 이동이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가 요단강을 멈추게한 이스라엘을 통과하게 한 그 중심에 언약궤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언약궤가 강 한복판에 있으니까 요단강이 끊어졌어요. 그러면 그 다음부터는 한 번 요단강에 들어왔던 그 언약궤가 앞으로 언약궤 중심으로 계속 이동한다는 말은 요단강이 끊어졌던 그 사건이 언약궤가 가는 곳마다 동일한 원리와 원칙을 발휘하게 되어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신약에서 똑같은 원리가 있는데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그렇게 하도록 만드셨던 성령, 그 성령이 임하는 자에게는 예수님에게 일어난 동일한 결과가 주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첫열매이기 때문에 성령으로 예수님을 인정하는 사람은 예수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을 때 이미 그 사람도 십자가에 죽은자로 간주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자로 간주가 돼요.
마태복음 16장에서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때문에 “너희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라고 이야기 했지만 신약에 와서 이미 성령이 와 버리면 그것이 따라오라는 미래상황이 아니고 이미 지나간 상황 확정된 상황이 됩니다. 그 덩어리 전체가 우리에게 덮쳐 버리죠. 성도는 십자가에 이미 죽은 자가 돼요.
죽은 자가 되고, 십자가에 죽은 자가 되면,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고 난 그 다음의 예수님에게 일어나는 절차들 부활, 승천, 그리고 재림 이 모든 것이 동일하게 성도에게 그대로 복제되듯이 주어지는 겁니다. 주님의 일관된 일이 성령 안에서 되풀이 되면서 성도에게 주어집니다. 그러면 성도의 몸은 흙에 속한 몸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건강관리 할 때에 좀 이렇게 아쉬움 가지고 빠이빠이 한다는 마음으로 이 몸이 이제는, 이 몸을 관속에 넣으면 이 몸의 지긋지긋한 동거 생활, 몸과의 동거생활은 끝입니다. 그렇다고 미리 관속에 들어가 질식해 죽지 마시고요. 하여튼 주께서 알아서 죽이실 거예요. 태어날 때도 알아서 태어나게 해 주시듯이. 참새가 죽는 것도 주의 허락없이 일어나지 않듯이 성도의 죽는 것도 백날 죽으라 해도 안 죽습니다.
때가 됨에 주께서는 이 몸을 가지고 갑니다. 저는 그걸 아침마다 느껴요. 아침마다 쓰레기를 회수하잖아요. 쓰레기차가 와서. 바라기는 쓰레기차 옆에 이렇게 같이 누우면 좋겠는데 아직까지는 그것까지 허락이 안 되지만. 밖에 있는 쓰레기를 회수하듯이 8월 5일날 회수할 어르신네 시신들이 다 있어요. 저기 경북대 장례식장 이런 데 보면 알아서 회수해 가십니다. 천사들이 보람상조 직원들이에요. 보람상조. 뭐 선물은 안 주지만 보람상조 직원들처럼 제대로 알아서 다 거두어가십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아무 걱정없어요. 성령 받은 사람은 아무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순서대로, 절차대로, 우리에게 그 다음, 그 다음 절차 오는 겁니다. 그야 말로 정식중국요리 풀코스 딱 맞춰서 와요. 다 오게 되어 있어요. 그 원리를 오늘 본문에서 요단강 건너기를 통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그런데 아까 우리가 읽어 봤듯이 무슨 임금님 행차하는 것 같아요.
뒤에 딸려 있는 일꾼들이 왜 그리 많은지, 언약궤가 중심입니다. 그러면 언약궤를 누가 보조하느냐, 제사장이 보조를 하지요. 제가 방금 임금님 행차라 했지요? 보이지 않는 분이 우리의 임금님이십니다. 그래서 그 임금님을 우리는 주라고 하고 주 예수라 하죠. 그리고 우리를 믿는 백성이라하죠.
임금님을 옆에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고 보좌하고 그 백성들은 어디 삽질하고 물 막고 있고 그런 거 없어요. 그냥 어디를 보고 있어야 하냐면 언약궤가 어디로 갔는지를, 신약에 보면 예수님이 성령을 통해서 어떤 코스로 갔는지를 보듯이 언약궤가 어디로 가는 지를 봐야돼요. 언약궤가 뚫어 놓은 길 만이 곧 길입니다. 천국 가는 길.
그래서 아침에도 이야기했지만, 천국 가는 길은 없습니다. 우리에겐 없어요. 없으면 안 가면 돼요. 쓸데없이 기도하고 헌금하지 말고 안 가면되는데 성령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느냐 하면 십자를 느끼게 만듭니다. 그러면 십자가에 특징은 절체절명이에요. 낭패와 낭패의 연속, 궁지와 궁지의 연속이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 앞에 막닥뜨렸던 그 체험입니다.
예수님도 오죽했으면 “할수만 있거든 내가 살아서 연이어 할 수 있는 일을 허락해 주옵소서. 내가 안 죽고 살아 있는 이 몸 가지고 연이어 할 수 있는 일을 연속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주옵소서” 하셨는데 주님께서는 “됐다. 거기까지” 하면서 스톱을 시켰어요. 우리 인생을 살면서 어린아이든 어른이든 간에 이런 경우가 있어요. 그냥 콱 죽고 싶은 생각이 굉장히 많습니다. 여러번 있어요. 심지어 어린 아이도 그래요.
할머니가 두 살 세 살 먹은 손자를 키우면서 엄마 몰래 초콜렡을 주는 거예요. 그런데 할머니가 약속을 위반해서 할머니 하라는대로 했는데, 시키는 대로 밥에 김치 얹어서 먹었는데 나중에 할머니가 “엄마 하라는대로 초콜렡 먹지 마라”할 때, 이렇게 약속을 위반해서 나올 때는 그 두 살 먹은 아이는 절체절명의 상태에 빠집니다. “나 죽을래!” 하면서 떼를 쓰지요. 그게 죽음입니다.
나름 궁지에 몰린 거예요. 자기가 초콜렡을 먹겠다는 인생 목표를 잡은 거예요. 자기 나름의 아주 중요한 인생 목표입니다. ‘오늘은 기어이 먹고 말거야, 초콜렡.’ 그런데 할머니가 아이 엄마가 주지 말라고 해서 안 주겠다고 했다면 그 아이는 하루 동안에 죽음을 감지하게 됩니다.
이런 일이 어른 되어서도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곗돈 탈 타이밍에 오야붕이 들고 날라버리는 것. 분명히 자기가 짝사랑했는데 그 짝사랑했던 여자가 이미 애인이 있는데 그 애인이 자기 부하직원. 정말 절체절명이에요. 그래서 이걸 어떻게 일반화 시켰느냐 하면 “화 날 경우가 어떤 경우인가요?” 로 일반화시키는 겁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경우에 화가 나던가요?
장벽에 마주칠 때, 어떤 펜스가 막을 때 화가 나지요. 그게 바로 뭐냐 하면 그 자체가 또 다시 주의 길이 아니고 구원의 길이 아닌데 나름대로의 뭘 잊어버리냐 하면 요단강이 양쪽에 다 막힌 채로 왔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한번 요단강 건너 왔기 때문에 더 이상 이제부터는 휘파람 불면서 내가 하고 싶은 거 다 하겠다는, 또 다시 자기가 왕이 되어 버리는 사태로 변경되었어요.
아까 왕이 누구라고 했느냐면 언약궤가 왕이죠. 그러면 언약궤가 가는 곳으로만 가야 되는데 언약궤를 잊어버렸어요. 살만하니까. 그 다음부터는 그 왕자리에 누가 들어가느냐 하면 본인이 들어서는 겁니다. 본인이 들어서니까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초콜렡을 안 주는 겁니다. 우리의 뜻대로 안 되는 겁니다. 우리로 하여금 궁지에 몰리게 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강력한 반발이 일어나는 겁니다. ‘주님 시키는대로 다 했는데 나는 이런 식으로는 못삽니다.’ 하면서 나자빠지고 발버둥거리고 난리도 아니에요. 나의 자존심, 나의 인생 설계 그런 거 한꺼번에 다 날라가는 겁니다. 그런 궁지를 우리에게 제공하는 것은 바로 그 때마다 언약궤의 위상과 언약궤가 가는 곳, 그 곳이 바로 천국이지, 언약궤를 알았다고 그 다음부터 네가 설계해서 가는 곳은 결코 천국의 길이 아니고 지옥 길이라는 것을 그때부터 깨우치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을 보게 되면 예수님이 하는 일도 마찬가지예요. 타이밍을 맞춰요. 그냥 마구잡이로 하는게 아닙니다. 때가 됨에 올라가고 말씀이 응하게 될 때까지 계속해서 유보하고 유보합니다. 여러사람을 고칠 수 있는데 여러사람을 안 고치고 딱 한 사람만 고치는 경우도 있고요. 꼭 하나님 아버지가 시키는대로, 이끄는대로 그렇게 가는 겁니다.
그러면 제가 그런 말 했으니까 여러분들이 응용하고 싶어하죠. “그러면 목사님, 잘 됐습니다. 우리도 아버지가 시키는대로 성령이 시키는대로 하려면 어떤 힌트를 얻으면 됩니까?” 우리는 그런 생각이 들지요. 예수님도 성령께서 인도하는대로 갔다면 그래서 실수가 없었다면 우리도 우리 인생에 실수가 없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실수 없으려면 사전에 실수 하기 전에 사전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정보를 주셔가지고 우리가 제대로 가게되면 우리는 두 번다시 절체절명 안 느껴도 되고 속 시원하게 할 수 있으니까 그 비법이 무엇인지를 묻고 싶죠.
여러분, 예수님이 가신 그 길이, 방향 틀기가 어떤 쪽이냐 하면 예수님이 잘 되는 쪽이 아니에요. 예수님이 망가지는 쪽이고, 뺨 맞는 쪽이고, 웃음거리 되는 쪽이고, 자기를 따라왔던 모든 사람에게 배신당하는 길이었습니다. 배신 한번 당해 볼래요? 그것이 얼마나 억울한지?
이야기를 끄집어 냈으니까 그냥 접어 넣을 수는 없고요, 해답을 제시해 드리겠습니다. 사도행전 3장 1절에 보면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그들이 성전에 올라갔어요. 이번에 사도행전 할 때 이 부분 잠시 언급했거든요.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가”
여기서 앉은뱅이가 나타날 때 앉은뱅이가 뭘 원하느냐 하면 금고 은을 달라는 거예요. 이 앉은뱅이를 사도요한과 베드로가 볼 때에 자기가 저 사람을 낫게 해주겠다는 의식으로 본 게 아닙니다. 앉은뱅이가 남이 아니고 곧 본인이라는 생각을 사도는 가졌어야 해요. 왜냐하면 앉은뱅이는 지금 절체절명입니다.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예요. 걷는 것이 소원입니다.
그런데 그건 어차피 안 될 것이라는 것을 본인이 잘 알아요. 그러면 베드로와 요한처럼 이미 성령받아서 구원받은 사람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느냐 하면 나는 애초부터 천국 갈 수 없었다를 계속 유지해줘야 합니다. 이게 젤로 중요합니다. 아버지의 뜻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우리 마음이 ‘나같은 인간은 이 땅에서 어떤 식으로 개판되고 깨지고 인생 망가져도 그건 정당한 거고 애초부터 인생 깨지는 것은 기본이요, 아예 천국도 못 살 사람이이다’ 라는 것을 계속 유지시켜 주는 이것이 아버지의 뜻이에요.
‘천국 갔으니까 이제부터 복이나, 상급이나 받아 볼까, 자식 잘되도록 기도나 빡세게 해볼까?’ 라는 식으로 나오면 안돼요. 그건 언약궤의 왕 됨을 완전히 잊어버리는 겁니다. 누구 덕으로 요단강 양편이 다 막혔습니까? 저쪽이 막혔죠. 저쪽은 물이 빠지니까 자동적으로 물이 없죠. 지난 시간에 이야기 했잖아요. 30킬로나 빠졌다고. 넉넉하게. 오십만이든 백만이든 건너살 수 있도록 물이 제대로 확 빠졌어요.
처음부터 강이 없었던 곳이 아닙니다. 강이 있었던 곳이고 그 강은 천국과 지옥을 가름하는, 신약적으로 이야기해서 천국이냐 지옥이냐를 가로막는 장벽이에요.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약속의 땅에 들어갈 자격 없어요. 요단강이 들어오지 마라고 지금 버티고 있는 거예요. 갈 수 없는 곳이에요. 우리는 천국 못 가는 겁니다. 우리가 예수님 알고 부터는 이걸 더 철처히 해야 돼요. 더 철저해야 돼요.
제가 수련회 때 우리 교회 예를 들었는데 화장실에 누런 것이 끼어 있으니까 어떤 집사님이 짜증나서 못 보겠는 거예요. “내가 락스랑 염산 가지고 확 씻어 내면 좋겠다”라는 이야기를 했거든요. 물론 좋겠다로 끝날 수도 있어요. 좋겠다로. 어쨌든 간에 화장실을 갈 때마다 짜증이 나는 거예요. 그래서 그 이야기를 듣고 참 좋은 예라고 생각했죠.
락스를 부어서 밀대로 청소를 막 한다고 칩시다. 이건 진짜 이야기 아니고 예입니다. 그런데 청소를 하다가 어떤 생각이 드느냐 하면 자기가 등신같다는 생각을 해요. 다른 사람들은 팔짱끼고 누가 청소하나 가만히 있는데 왜 마치 자기 듣 떠밀면서 ‘네가 해라. 우리는 편안하게 즐기자.’라는 식으로 하고 있느느데 내가 나서서 등신같이 왜 하고 있느냐 생각하면서 락스를 붓고 있는데 신경질이 나서 스톱했을 때, 성질이 나거든 그 자리에서 붓다가 스톱해야 돼요. 그만 안 두면 그거 교회 아닙니다. 그만 둬야해요. 그러면서 제가 뭐라 했냐면 ‘피 발린 교회 아니고 락스 발린 교회 된다’ 라고 했어요.
사람은 주님께 봉사하는 마음으로 하다가 ‘구원을 나만 받았나? 다른 사람도 받았는데 이 힘든일을 내가 쪼다도 아니고 바보도 아니고 왜 나만 희생이 돼야 되?’ 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그 사람은 그것을 스톱을 해 줘야 됩니다. 사도행전 5장에 보면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헌금을 안 했어야 돼요. 안 하면 부부가 오래오래 장수 했을 겁니다.
헌금을 안 해야 되는데 하고 싶은 거예요. 교회니까 헌금 해야하지 않겠느냐 싶어서. 그거 하고 둘다 죽었어요. 교회를 무시한 거예요. 교회는 인간들의 아이디어를 가지고 유지되는 것이 아닙니다. 철저하게 성령께서 이끄는대로 해야 돼요. 왜냐하면 성령께서는 누구나 왕이라고 간주를 해주지 않기 때문에.
너는 왕이 아니고 왕의 쪼다이고 왕의 시다바리로 구원받은 거예요. 이 말은 왕 없으면, 왕을 돌아보지 않으면 나의 구원은 날라가 버리고, 나는 구원 받지도 못하는 거고, 왕이 먼저 발을 띄어 줘야 그 왕이 밟았던 그 요단강, 그 뒤에 발자국 보고 뒤따라 가게 되면 그것이 바로 우리 성도의 할 일이고 갈 길입니다.
따라서 “그 갈길을 어떻게 가면 됩니까?” 라고 만약 여러분이 묻는다면 성전에 앉은뱅이 나타날 거예요. 내가 경험했던 절체절명의 경우를 내 앞에 나와 똑같은 절체절명의 궁지를 가진 사람을 보낼거예요. 그러면 건방지게 내가 그 사람을 구원한다거나 고친다는 그런 생각하지 말고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보자는 말이죠.
그 사람의 입장이 뭐냐 하면 그 사람은 이미 절체절명의 입장을 알거든요. ‘나는 절대 천당에 못가. 살아 있는 동안 돈이나 벌자’라는 식으로 금이나 은을 달라고 한거예요. 그런데 이미 구원받은 베드로와 요한의 입장에서는 옛날에 자기가 그랬었던 사람이에요. 자기가. 내가 여기 있음에 돈으로 살고 권력으로 산다는 것을 이미 경험적으로 알아요.
그러니까 이런 인간은 돈으로 사는데 돈 주면 아쉬운 것도 없고 절체절명도 없어요. 그런데 주님께서 찾아와서 이처럼 돈 밝히고 건강만 밝히고 이 세상에만 살기를 원한다면 그것이 천국가는데 절체절명에 가로막힌 장벽 앞에 놓여 있는 꼴이 된다는 것을 성령이 와서 가르쳐 주니까 가르쳐 줌과 동시에 거기서 벌써 구원받은 거예요. 가르침과 동시에.
그래서 그것을 똑같이 하는 거예요. 우리에게는 먼저 그 사람이 원하는 것을 이야기 합니다. “네가 은과 금을 원하지만 나에게는 은과 금이 없다.”라고 하면서 “주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라”라고 하죠. 왜? 자신이 그랬던 사람이기 때문에. 예수님 붙들고 이 땅에서 권력 키우려고 했던 베드로, 하지만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배신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습니다.
이제 자기는 그냥 고기잡으로 돌아 왔을 때 주님이 다시 찾아오셨어요. 자기를 사도라고 불러 주었을 때에 절체절명과 궁지는 내 힘으로 뚫을 수 없고 왕되신 주님께서 요단강 건너가듯이, 하나님의 언약궤가 뭡니까? 약속의 완성이잖아요, 약속을 완성하는 그 입장에서 “네가 보탤 것도 없고 더 손 댈 것도 없다” 이미 완성된 것이 우리 안에 쑥 들어와서 우리에게 삽입될 때에 우리는 움직이는 언약궤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나 같은 인간이 구원되었다는 것을 알지요. 또 비슷한 이야기가 20세기 초에 독일 시인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라는 시인이 있는데 그 시인은 장미의 가시에 찔려서 죽었던 사람입니다. 장미 가시에 찔려 죽었어요. 어제 뉴스에 보니까 새우 꼬리에 찔려 이틀만에 죽은 아줌마 있었어요. 새우 잡을 때 좀 조심하면 좋겠어요.
장미 가시에 찔려서 파상풍에 걸려 죽었는데 그게 정설이지만 더 보탠다면 파상풍을 이겨 내지 못할 정도로 백혈병에 걸려서 죽었다는 사람도 있어요. 그 사람이 장미를 굉장히 좋아해요. 장미를. 그래서 이런 일화가 있어요. 자기 동네에 어떤 거지가 있는데 은과 금을 달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 사람은 은과 금을 줬어요. 아침에 이야기 했지만 은과 금을 줘도 자책감이 드는 거예요. 줘봐야 다시 또 거지가 돼서 은과 금을 또 달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여자 거지에게 실험삼아 무엇을 주었느냐 하면 장미꽃다발을 주면서 “이 장미꽃 보면서 사세요.”라고 했더니 그 다음날 그 여자 거지가 거기에 없었답니다. 무슨 생각이 나느냐 하면 사도행전 3장이 생각나요. 아름다운 인생이 따로 있는 것을 나는 구질구질하게 돈만 얻으며 살았다는 것을 장미꽃을 통해서 알게 된거죠. 가진 자만 아름다움을 누릴 권리가 있는 것이 아니고 나 같은 거지도 마음만 낮추면 장미의 아름다움과 더불어 살 수 있다는 것을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그 기회를 준 거예요.
자 그렇다면 언약궤가 돈입니까? 우리 이 세상은 요단강이 뭡니까? 돈이라는 요단강에 가로막혀 있습니다. 천국 좋지요. 그러나 그건 보험이에요. 그거는 죽으면 가겠지. 아니요. 평소에 관심사와 나의 기쁨과 나의 즐거움은 돈에 있습니다. 아까 기도제목이 뭡니까? ‘생계냐, 최후 심판이냐?’라고 했죠? 우리는 최후 심판은 관심도 없어요.
그저 돈 많이 벌면 해결 안 될것이 없다는 것을 꾸준히 차곡차곡 우리 안에 쌓아 왔습니다. 자식도 돈 잘 벌면 이쁘고 돈 못 벌면 천덕꾸러기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갖고 있던 이 본성을 그대로 유산으로 주위 사람들에게 퍼트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요단강은 없는 게 아니에요. 지금도 요단강은 있어요.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요단강을 우리가 뚫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걸 통과 할 수가 없어요. 그걸 무슨 수로 통과합니까? 돈이 좋은데 아니 돈보다, 찬송가에 그런 내용 있잖아요,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우리는 애국가 4절은 못 외우지만 심지어 어떤 사람은 이 찬송가 4절까지 막 외우는 사람 있다고요. 그러면 그 사람은 진짜 돈 안 좋아 합니까?
성경에서 예수님 좋다고 할 때에 “예수님 좋냐?” “좋아요” 이렇게 묻는 게 아니에요. 예수님 옆에다가 사람들이 평소에 좋아 하는 것을 놔두고 어느게 좋은 지를 묻는 거예요.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이렇게 묻는 거예요. 주님의 우리의 얄팍한 수에 속아 넘어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약속의 땅은 꽉 차있어요. 그곳을 본토인들이 다 차지하고 있어요. 비어있는 곳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겁을 집어먹는 거예요. 왜? 하나님께서 알아서 텅텅 다 비워놓고 우리는 그냥 들어가기만을 원했지만 그게 아니에요. 꽉 차있어요. 예수님이 “언약궤가 무섭냐? 꽉 차 있는 저기가 무섭냐?”를 묻는 겁니다. 언약궤가 중요한지, 너의 생존이 중요한지를 묻는 거예요.
우리는 궁지에 빠져가지고 “주님도 좋지만 우리는 사는 게 급선무입니다.”라는 이야기가 거침없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언약궤 없이는, 언약궤와 떨어져서는 우리가 천국에 갈 수가 없지요. 그래서 다시 이야기 합니다. 우리의 천국가는 길은 여전히 5킬로 왔지만 보이지 않고, 10킬로 왔지만 또 보이지 않고 10년 째 왔지만 내일 또 구원의 길이 보이지 않아요.
그러면 여기서 한꺼번에 구원의 길을 확 보는 방법은 없는가? 알려 드리겠습니다. 좀 유치하고 천박한 예라도 용납해 주시기 바랍니다. 조폭이 자기 조직원들에게 훈시를 하는데 “그 당구장 몇 개하고 나이트 클럽 관리 잘 하란말야!” 라고 하면서 훈시를 하는데 이 조폭 두목이 키가 작아요. 키가 작아서 둘러보다가 “어이, 너 나와. 나와서 여기 엎드려.” 하고 그 등짝에 키 작은 조폭두목이 올라가서 훈시를 합니다.
그러면 이 엎드린 조폭은 분명히 자기 때문에 훈시가 잘 되고 있는데도 자기 공로를 들을 수가 없어요. 고개를 좀 돌리니까 “가만히 있어. 너는 고개 돌리지마. 너는 그냥 엎드려 있어.”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 말은 뭐냐, 우리가 날마다 제사장 되는 거예요. 우리는 언약궤만 받들어 모시는 제사장, 십자가만 증거하는 제사장으로 살게 되면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 하루 세끼 먹는 일, 날씨 더워서 피서 가는 일, 그 모든 일이 주의 일이 되는 겁니다.
저 보현산 계곡에 가도 언약궤 거기 있는 거예요. 십자가가 거기 가 있는 거예요. 외국에 놀러가도 언약궤가 거기 같이 가 있는 거예요. 어디를 가도 내 공로로 돌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엎드려있고 우리 등짝 위에서 주님께서 일하시고 있는 중입니다. 물론 시원한 바닷가에서 일 하세요. 어디를 가더라도 주와 떨어지지 않고, 주와 함께 있는 게 우리가 주님과 손잡고 동행하는 거 아닙니다.
우리를 엎어 놓고, 우리는 엎어져 있는 그 상태에서 제 할 일 다 한거예요. 주님께서 우리 등짝 위에 올라타서 그 현장을 주님의 십자가만 증거되는 현장으로 사용하시는 겁니다. 좀 이렇게 유치하고 천박해도 용납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또 성질 나잖아요. ‘에이’ 하면서 이렇게 일어 나려고 할 때 주님은 넘어지거든요. 주님의 훈시가 없어져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낮춰야 됩니다. 지금 불행하십니까? 덜 낮춰서 그래요. 죽고 싶어요? 죽으면 안돼요. 죽는 것도 자기 지킴입니다. 아주 마음이 교만한 겁니다. 살아야 돼요. 온도가 45도로 올라가도 살아야 돼요. 야무지게 살아야 돼고 하여튼 갈 때까지 가 봅시다. 가보면 벌써부터 이미 천국의 언약궤와 함께 천국에 들어 와 있다는 사실, 주께서 다루었다는 사실, 뒤돌아보면 전부다 주께서 다루신 거예요.
끝으로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이번 수련회 때 그런 예를 들었습니다. 카우보이 영화에 보면 권총 찬 무법자가 기차에 올라탔는데 앞에 안 타고 저 뒷칸에 있다고 했지요. 우리 인생의 본성은 그저 내일 잘 되게 앞을 보는데 가끔은 저 뒷칸에 가서 오고오는 모든 일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였던가를 뒤돌아 보면 고생고생했던 그 길도 주께서 우리를 종으로 부리고 우리를 제사장으로 삼아서 언약궤에 실려서 우리를 이끌었다는 사실을 항상 뒤돌아 보면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혼자 가는 게 아닌데, 나 혼자 들어갈 수 없는 길인데, 우리는 이상하게 성질이 뭐 좀 되면 우리 혼자 하고 싶은 고집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모실 어른이 있어야 되고 우리가 모실 임금님이 있어야 되는데 자기 잘난 맛에 살고 뜻대로 안되면 원망 불평하는 저희들, 다시한번 우리의 등을 주님에게 제공할 수 있는, 내세울 수있는 종의 자리에 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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