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랑속으로 3
*목사님! 그렇게 조목조목 반박하시니까 목사님이 맞는 줄 생각하시죠? 그러나 틀렸습니다.
-틀리고 맞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느냐, 정확히 해석하느냐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피 공로에 손상을 가하는 자는 아무리 말씀을 제대로 알아도, 십자가만을 증거 해도 그 사람은 저주 받을 자입니다.
*목사님은 인간이 구원받고자 하는 구원욕구를 짓밟기 위해서 심판주를 내세웠습니다.
-글을 이런 식으로 오독하면 상대와 대화하기가 매우 힘듭니다. 심판 주의 자리는 십자가 지심으로 만들어진 자리입니다. 십자가 사건 발생은 인간이 살고자 하기 때문에 발생한 사건입니다. 물론 이것은 단순히 인간의 사고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언약으로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 중에 한 사람 그 해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저희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요 11:5).”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에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요 11:6).”
인간의 구원욕구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는 그 아들을 심판 주로 세우셨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이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끊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6-12).”
*근데 그것은 오히려 목사님의 의도에 맞는 효과를 가져 오기 위한 꼼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심판주의 마음을 달래는 행위를 부추기는 것입니다. 목사님 말씀대로 심판주를 믿지 않으면 구원이 없기 때문이죠. 그러면 심판주를 듣는 교인들은 물어보겠죠. “왜 심판주를 믿어야만 구원이 있는 것입니까?” 목사님은 “심판주를 믿어도 구원은 없습니다, 심판주를 믿을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답변하시겠죠. 그러니까 심판주를 내세우는 것입니다. 왜냐구요? 심판주라고 하면 뭔가 주눅이 들잖아요. 선악과 따먹었기에. 그래서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해야 하잖아요. 결국 구원을 받으려면 심판주를 믿어야 된다는 원점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목사님이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던 간에, 심판주를 내세우면 마귀는 한편이라고 좋아라 박수를 칠 것입니다. 그리고 심판주는 돈을 내라고 하는 소리거든요.
-이 말이 사실 댓글을 쓴 본인이 저에게 하고 싶었던 말인 것 같습니다. 제가 심판 주 용어를 사용해서 십자가의 피 공로를 조금이라도 손상했다면 제가 전하는 복음은 거짓 복음이 확실합니다. 그렇다면 제 글을 갖고, 제 설교를 갖고 분명한 근거를 대고 저를 십자가도 전하는 자라고 판단하시면 참 좋을 것 같은데 그런 내용은 없습니다. 늘 자기 생각, 느낌, 추측성 발언들로 지면을 채우면 결국 ‘내가 맞고 너는 틀렸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 밖에 되지 않습니다.
지금 댓글을 쓴 본인이 저에게 분노를 내는 이유가 왜 십자가만 전하지 않느냐는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십자가만 전하지 않는 근거를 분명히 말씀하시면 이 글을 읽으시는 모든 분들에게 유익하리라 생각됩니다.
*심판주에 대한 설명요, 제가 심판주를 몰라서 그런 글을 썼다고 생각하십니까? 목사님만 심판주를 아시는 줄로 착각하시는 것 아니십니까? 그런데 아무리 그렇게 말씀하셔도 목사님이 말씀하시는 심판주는, 우편의 자리에서 보내신 성령이 아닌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분명히 의에 대하여 죄에 대하여 세상에 대하여 심판을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심판 주를 아신다면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것이 어떻게 심판 주 사상과 연결되어 있는지를 분명히 소개해 주면 좋겠습니다. 내가 말하는 심판 주는 하나님 우편의 자리가 아니고, 본인이 말하는 심판 주는 하나님 우편의 자리에 계신 주님이라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를 ‘성령은 분명히 의에 대하여 죄에 대하여 세상에 대하여 심판을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맞습니다. 책망하신다고 합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어떻게 책망하십니까? 죄가 무엇인지, 의가 무엇인지, 심판이 무엇인지에 대한 기준이 있지요. 바로 십자가입니다.
심판 주가 보내 주신 성령은 반드시 십자가라는 결과물을 낳게 합니다. 그래야만 아들만이 영광스럽게 되고 아버지도 영광스럽게 되기 때문입니다.
나는 맞고 너는 틀렸다는 방식이 아니라 십자가 복음만을 드러내는 식으로 글을 쓰면 좋겠습니다.
* 새로운 용어, 낯선 용어로서의 심판주이기 때문에 거부반응을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님의 글에서 느낀 대로 구원을 상정했고, 영생과 직결된다는 말씀이 없기에 구원받지 않았다고 했고, 인간은 구원을 받았으면 하는 욕구가 있고, 이런 연결고리를 가지고 심판주 되심을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 이런 느낌을 받았을까요? 본인이 그런 식으로 느끼면 타인도 그런 식으로 느껴야 하나요? 어떤 분은 십자가가 너무 또렷하게 보여서 심판 주라는 용어가 너무 감사하다고 하시는데 그런 분은 왜 그런 느낌을 받을까요?
*왜 그렇게 해야 하는데요? 심판주보다 복음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을 말씀하시면 안 되고요?
-복음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요? 내용을 좀 채워주시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은 우편의 자리에 앉으셔서 놀고 계십니까?
- 그 자리가 심판 주의 자리입니다.
*성령을 보내셔서 일하시고 계시잖아요? 예수님이 죽으신 것이 죄고, 다시 살아나신 것이 의고, 그 예수님이 세상을 심판하고 계시고. 그 성령은 십자가지신 예수님, 죽었다가 살아나신 예수님을 증거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굳이 성령 대신에 심판주라는 용어를 내세우는 이유가 뭡니까? 뭐, 그 누구와 차별화를 두기 위해서입니까?
-차별화를 두기 위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차별화해서 어디에 써 먹으려고요. 권력 만들어 남을 짓밟으려고 그러겠습니까? 아니면 나를 따르는 사람들을 모아 조직을 만들려고 그럴까요? 왜 이런 식으로 이해할까요?
심판 주, 예수님 이라는 용어는 동일한 용어임이 빌립보서 2장을 통해서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자기만 알고 있는 언어 정의를 갖고 남을 판단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다 알고 계신 분은 한 분,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제가 여기서 심판 주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싶지만 여기에 대해 너무 거부감을 갖고 있으니 이렇게 씁니다. 그런데 댓글 쓴 본인이 아시다시피 그 이름은 기능을 담고 있지요. 그러니 이름, 용어가 아무리 정확해도 그 내용을 담지 못하면 우상에 불과합니다.
*우리 함께 사도행전 강의를 이근호 목사님께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27장이나 28장이 당연히 사도바울에게 초점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도바울은 주님의 약속대로 죽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십자가마을여름수련회를 다녀와서 라는 글을 쓰면서 정말 엉뚱하게도 사도바울을 쓰고 버리시고자 하시는 주님의 일이 아니라, “죄수들의 구원이나 토인들의 구원을 보고 싶었을 것입니다.”라고 하시는 거예요. 참 황당했습니다. 왜 목사님은 함께 들었으면서도 관점이 다른 것입니까? 여름수련회 후기가 아니라면 가능하겠죠. 근데 후기를 쓰시면서 왜 이런 고백이 도출되느냐 이 말이죠. 목사님 마음이니까요? 아니면 더 새로운 것을 끄집어내기 위함입니까?
-참으로 답답합니다. 맛있는 홍시를 먹었는데 어떤 사람은 아름답다. 어떤 사람은 멋지다. 어떤 사람은 달콤하다. 어떤 사람은 죽어도 좋다라고 표현했습니다. 문제가 무엇입니까?
제 글에 분명 십자가의 피 중심으로 심판 주되심을 언급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글은 아마 댓글을 쓴 분이 보시기에 요깃거리로 썼다고 생각하실 겁니다. 그렇지 않고는 이런 식의 비판이 불가능할테니 말입니다.
*그러니 뒤에 나오는 심판주를 설명하기 위해서 구원을 상정했다고 생각이 드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닙니까? 누가 봐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영생이라는 말이 없다고 해서 구원이 안 됐다고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까? 안 됐어도 그만이지만. 몇 번이고 이야기하지만 굳이 구원을 공격용으로 삼아서 심판주를 설명하려고 사도행전 27장, 28장을 꿰맞추지 않았으면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심판주를 전하는 목사님만은 정당하다고 우기는 것입니다.
-정당하다고 한 적이 없습니다. 십자가에 피 흘리신 그분이 심판 주가 되셔서 홀로 다 이루셨습니다. 이 말도 오해를 야기 할 겁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 언제는 분리해서 대응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와 부활은 반드시 한 묶음입니다. 부활은 그냥 부활이 아니라 주의 자리에 앉는 부활입니다. 이 자리가 마련된 자리가 십자가입니다. 그러니 십자가만 자랑하는 것이 주님을 영화롭게 하는 겁니다.
부활의 신앙, 곧 인간 구원을 위한, 인간 행위를 집어넣는 것 때문에 기존 신학의 부활을 공격한 것이지 십자가의 완료성을 부정하는 부활부정이 아닙니다.
*심판주로는 질식당하고 싶어도 질식을 당하지 않습니다. 복음으로 질식을 당합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심이 없이는 아버지가 주께 주신 심판의 자리는 없습니다. 그러니 복음부터 먼저 전하십시오. 심판주부터 전하지 마시고요. 심판주를 전한다는 것은 복음을 모르는 것입니다. -복음이 뭔가요?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 아닙니까? 이번 사도행전 말씀대로라며. 그러면 제가 묻겠습니다.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또 한 가지는 복음으로 질식당한다는데 그 내용을 이야기 해 주면 좋겠습니다.
*저는 목사님의 글이나 설교를 많이 듣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알았으면, 복음을 알았으면, 죄인인줄 알았으면, 이라고 하면서 사명이 있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십자가만이 아니라 십자가도로 규정할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십자가를 알았으면, 복음을 알았으면, 죄인인줄 알았으면, 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판단은 마음대로 하셔도 됩니다.
*그래서 어쩌라고요? 알았으니까 모이기를 힘쓰고 헌금하라고요?
-댓글을 쓴 본인이 두 가지를 언급했는데 지금 본인이 모이기를 힘쓰고 있고 강의 들으러 올 때 만원씩 내라고 하십니다. 자신이 광고를 올려 모이기를 힘쓰는 모습을 보이는 것과 회비 만원씩 내라고 하는 것은 도대체 왜 그렇게 합니까? 주님이 마음을 주시면 장소까지 알아서 다 모이게 하실 건데 말입니다. 말씀을 듣고 감동 받든 어떠하든 회비 내라고 왜 압력을 가합니까? 서울강의가 돈 주고 강사 불러서 좋은 이야기 듣는 시간입니까?
왜 모두가 마음대로 하지 못하게 광고를 올리고 회비 만원이라고 올립니까? 그 의도가 무엇입니까? 자신이 행하는 죄는 의롭고 타인이 행하는 죄는 악합니까?
인간 몸에서 나오는 모든 것이 악합니다.
*다 죄니까 좋아하는 죄만 짓지 말고 하기 싫어하는 죄도 지으라고요? 죄도 골라 짓는다고 얼마나 타박을 많이 했습니까? 목사님의 강의나 설교나 글의 모토가 이것인데, 수많은 동영상이 있은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본질은 같은데요. 막 살라고 해놓고 성도는 사명이 있다고 합니다.
-크루즈 타는 사명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바울처럼, 스데반 집사님처럼 받은 사명도 있습니다. 그런데 댓글을 쓴 본인은 왜 그렇게 자신이 싫어하는 죄를 짓기를 싫어할까요? 솔찍히 말하면 좋겠습니다. 난 나를 사랑한다고. 그러면 그런 죄인임을 아는 자는 상한 심령이 될 것인데 오히려 자신을 의롭다고 하니 참으로 답답합니다.
저녁밥도 제대로 드시지 못하고 복음만을 전하는 사명이 있다면 그 시간에 크루즈 타는 사명도 있습니다. 결국 한 보자기로 싸 버리면 십자가만 남게 됩니다.
*막 살면 막 사는 것이지 사명은 뭡니까? 막사는 것이 사명 아닙니까? 죄를 알고 죄 짓는 사람 봤습니까? 막 사는 게 뭔지 알면서 막 사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죄도 모르고 막 사는 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냥 삽니다. 그냥. 그러면 목사님은 여기에도 토를 다시겠죠. 그냥이 뭔지 알면서 그냥 산다고요. 도대체 어쩌라고요?
-그러니 이 땅의 모든 인간은 받은 대로 삽니다. 막 사는 것이 사명이라고 어디에 기록되어 있습니까? 단어에 갇혀 버린 사람 같습니다.
*인간은 변하지 않습니다. 죄인만 변합니다. 주님이 죄인의 괴수로 변하시게 하시니까요. 이것이 사도바울의 사라짐입니다. 복음을 알아서 써먹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알고 싶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을 복음 속으로 사라지게 하신 그 분의 일하심을 말입니다. 저도 사라지게 하시는 은혜를 주시면 말입니다. 안 주시면 할 수 없지만요. 사도행전을 들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사도바울은 사라지고 싶지 않은데, 사도바울을 사라지게 하는 주님은 사라지고 싶지 않은 성도를 사라지게 하십니다. 사도바울처럼 성도는 사라지는 것이니까. 그래서 사도바울과 주님은 결코 나눠지지 않습니다. 사도바울이 쓴 가면을 벗으면 실체가 들어있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을 구경하지 않습니다. 구경꾼은 고정되어 있지 움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사도바울의 움직임을 따라갑니다. 따라가다 보니 사도바울은 보이지 않고 주님이 보이는 것입니다. 창세전부터 동행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저에게 심판 주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에 분노를 내시면서 본인이 사용하는 주님이라는 의미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주님이라는 의미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말해 주면 참 좋을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저는 앵무새입니다. 이근호 목사님이 복음 전하셨으면 이근호 목사님의 앵무새가 되었을 것이고, 만약에 정석훈 목사님이 복음을 전하셨으면 정석훈 목사님의 앵무새가 되었을 것입니다. 뭐, 다른 목사님이 복음 전하셨으면 그 목사님의 앵무새가 되었겠죠. 그래서요? 복음은 소유가 아니잖아요. 단, 복음이라야 합니다. 누가 복음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복음의 주인공이 따로 있는데 두렵지 않습니다. 앵무새가 된들, 어차피 앵무새니까. 그렇다고 앵무새라고 해서 아무거나 따라하지 않습니다. 앵무새를 키우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보이는 목사가 아니고요. 참새나 앵무새나 같은 새 종류잖아요(마10:29-31).
-주님이 만든 앵무새는 십자가만을 자랑 합니다. 자신이 배운 내용과 외운 내용을 자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본인 말대로 주님이 키우시는데 왜 이렇게 글에서 감사가 나오지 않고 짜증과 분노가 묻어 있는지....
*다른 의도는 없었습니다. 나에게 일어난 사건으로 인하여 목사님의 메시지를 주목하게 되었고 과연 심판주는 복음인가? 했습니다. 목사님이야 말로 십자가마을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긴긴 글을 쓰셨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목사님의 의도를 잘 알거든요. 결론은 복음이 없이는 심판주도 없습니다.
-제 의도가 무엇인가요? 정확하게 표현하시면 좋겠습니다. 저도 궁금합니다. 제 의도가 무엇인지? 십자가 마을을 이야기하기 위해 긴 글을 썼는지 십자가만을 말하기 위해 십자가 마을 이야기를 했는지는 각자 읽는 사람에 따라 다를 겁니다.
지금 본인 말대로 복음을 전해야 하는데 자꾸 엉뚱한 소리를 하면 결국 본인의 의도만 드러날 뿐입니다.
결론은 복음이 없이는 심판 주도 없다는 말을 하셨는데 복음이 뭔지 심판주가 뭔지 설명을 하시고 그런 결론을 냈으면 좋겠습니다. 본인이 말을 하면 상대가 다 알아 들을 것이라는 착각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결국 복음이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라고 하실 겁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그런데 좀 더 구체화 하면 예수님의 죽으심이 아버지께서 아들을 심판 주로 세우셨습니다. 그래서 복음이 십자가라는 겁니다. 죽으심과 부활이라고 하니 또 죽으심과 부활(살아나셨다)이 복음이다라고 할 겁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 말이, 이 문장이 어떻게 복음이 됩니까? 언어에 주님이 갇힙니까? 주님이 살아 계시지 않다면, 심판 주가 살아계시지 않다면 언어에 갇히겠지요. 언어로 복음을 전하시고 그 언어를 벗어나 버린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말로는 성령을 수도 없이 말해놓고 결국 성령을 자기가 믿는 십자가 복음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십자가 복음이 자신을 장악하게 되면, 달리 말하면 성령께서 성도를 장악하고 있기에 끊임없이 예수님의 피 공로를 드러내기 위해 성령께서는 인간의 죄를 끝까지 파헤치는 겁니다. 책망은 여기에 있습니다. 물론 십자가에서 다 완료 되었고 드러난 죄일 뿐입니다.
이미아 (IP:122.♡.170.138) | 18-08-15 00:41 | “십자가 사건은 인간이 살고자 하기 때문에 발생한 사건입니다.” 이 말은 출발이 나로부터 되어 십자가 사건을 바라본 것이다. 그러나 주님 쪽에서 출발하게 되면 십자가 사건은 모든 인간은 죽었고 저주아래 갇혀 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사건이다. 창세전 아버지와 아들의 언약은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된 것이다. 그렇다면 그 분이 왜 길이 되고 진리가 되고 생명이 되시는지를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것이다. 십자가에 죽고 다시 살아나신 분은 예수님 한 분 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십자가가 곧 길이고 진리고 생명 되심의 증거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길 자체가 우리에게는 막혀있고, 진리가 무엇인지 찾아 헤매지만 찾을 수도 없고 알 권한을 준적도 없고, 그러니 모든 인간은 죄 아래 갇혀 죽어있을 뿐이다. 생명이 아니다. 이것이 선악과 따먹은 증거고, 선악과는 생명나무를 위해 만들어진 용도였다.
빌립보서 2장 6-12절의 성경구절은 십자가로 말미암아 모든 만물로부터 영광을 받으시는 예수님을 말씀하고 있다. 십자가만이 모든 심판의 기준이 되고 십자가만이 모든 구원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목사님께서 이 말씀을 인용하심으로 심판주를 내세우지 마시고 왜 십자가인지를 먼저 이야기를 해주시기를 바랄 뿐이다. 지금 몇 번째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심판주를 구원과 연관시켜서, 인간 구원을 공격용으로 삼으시면서 오히려 더 살리는 식으로 나가게 하는 것일 뿐이다. 차이는 분명하다. 십자가가 복음이기에 복음이 없이 심판주는 있을 수 없는데, 심판주를 가지고 복음을 설명하는 것이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둘 다 똑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저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출발이 다르면 끝도 다르다.
“심판주가 보내주신 성령은 반드시 십자가라는 결과물을 낳게 합니다.” 십자가라는 결과물을 낳게 한다는 말씀을 십자가만 증거 한다는 것으로 이해하면 될까? 말의 차이인지 잘 모르겠다. 성령은 이미 십자가영이다. 심판주가 보내주신 성령? 성령의 활동을 제한시키지 말라. 예수님은 성령의 도움이 없이는 십자가를 질 수 없었고, 성령은 예수님의 십자가 없이는 증거 할 것이 없는 것이다. 심판주라는 완료를 놓고 십자가를 설명하게 되면, 그렇게 되면 십자가 자체는 미완료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십자가는 죽으심, 다시 살아나심, 승천, 우편의 자리에 앉으심, 재림, 영원토록 영광 받으심까지 다 들어있는 것이다. 그러니 심판주 안에서 십자가를 꺼내는 식은 안 된다고 말하고 싶다. 오히려 십자가 안에서 심판주를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복음은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이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우리 대신 죄 때문에 죽으신 것이고, 다시 살아나신 것은 예수님 외에 어떤 그 무엇도 다 죽었고 저주받고 심판받아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이 복음 앞에 질식당하지 않을 인간은 없다. 그래서 성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날마다 죽고 날마다 다시 산다. 복음 앞에서 죄인이요, 저주받아 마땅한 자임을 알게 하기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 죄다. 나올 것은 죄밖에 없다. 알았기에 하는 것이 아니다. 알았기에 하라고 해도 하지 못한다. 죄인이기에 헌금도 하고 죄인이기에 모이기도 힘쓰고, 죄인이기에 헌금도 안 하고 죄인이기에 모이기를 힘쓰지도 않는다. 죄인이기에 죄 짓는 일만 한다. 할 수밖에 없다. 안 하고 어떻게 못 산다. 그 무엇을 해도 다 죈데, 굳이 알았으면 하라는 식은, 좋아하는 죄만 짓지 말고, 싫어하는 죄도 지으라고 하는 구분을 왜 짓는지 모르겠다. 죄면 그냥 다 죄지. 그리고 여기서 제일 중요한 것은 성령이 일하신다는 것이다. 죄 짓도록 말이다. 하라, 하지마라는 결국 성령께서 죄인으로 만들어버리시는 것이다.
지금까지 글을 읽으면서 느낀 점은 수련회 후기를 자기 받은바 대로 쓰면 된 것이었다. 근데 이상한 것은 섞는다는 것이다. +α를 한다는 것이다. 이근호 목사님 말씀에 갇혀있다고 공격하면서 본인은 이근호 목사님의 말씀을 깔고, 자기 것인양 심판주를 덧붙여서 복음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타인을 향하여서는 이근호 목사님 복음을 정답처럼 외워서 되풀이 하고 있는 앵무새라고 몰아붙인다.
감사하다는 말을 안 한다고 해서 감사한 것이 아니다. 언어가 과격하다고 해서 짜증과 분노라고 판단하지 말라. 웃으면서 과격하게 썼다. 언어에 갇혔다고, 언어유희를 하고 있으니.. 더 이상 말장난은 하고 싶지 않다. 물 만난 고기처럼, 때는 이때다 하고 자기복음을 퍼붓고 있는 이 장난에 놀아나고 싶지 않다. 지금 나는 언어에 갇혀 있고 본인은 외계어로 이야기하고 있다고 자랑하고 있다. 십자가마을이나 교회를 존재로 알고 있기에 공격하는 것이다. 공격당할 대상도, 존재도 아닌데... 허상인데... 그야말로 진짜 허상에 갇혀있다.
**어쩌면, 아마도 우린 둘 다 복음도 아닌데, 복음을 가리고 있는 일을 지금 하고 있는 것이다. 정말 언어에 둘 다 갇혀있는 꼴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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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규 (IP:42.♡.176.146) | 18-08-15 01:16 | 아멘..아멘 우리의 글과 말들은 다 복음이 아닌데,,복음을 가리고 있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밤 늦도록... ㅋ 정신이 번~~쩍 드네요...잠 다 깼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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