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석훈

이미아성도님 댓글에

아빠와 함께 2018. 8. 14. 07:53
2018-08-13 23:06:55조회 : 66         
이미아 성도님의 댓글에이름 : 정석훈 (IP:223.81.136.162)
풍랑 속으로 

*이 글을 몇 번이고 읽었는데, 왜 굳이 구원에 초점을 맞추어서 심판주 되심을 설명하시려고 했는지 이해가 안 갔다. 

-구원에 초점을 맞추어 심판 주되심을 설명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구원을 공격하는 심판 주되심을 설명했습니다.

*마치 꼭 심판주 되시는 분을 믿지 않으면 구원이 없다고 역설하시는 것 같았다.

-당연합니다. 심판 주되시는 분을 믿지 않으면 구원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떡합니까? 심판 주를 믿을 능력이 이 세상 어느 누구에게도 없는데 말입니다. 


*그리고 그 심판주를 전하시는 설교자 자신은 정당하다고 우기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보시는 것은 당연합니다. 댓글을 쓴 본인의 글도 그렇게 보입니다. 


*이번 수련회에서 사도행전 강의를 듣고선 이런 고백이 도출될 수는 없다고 본다. 

-무슨 고백인지 정확히 설명을 해 주어야 하는데 제 글에 대한 정확한 설명은 없고 본인의 느낌을 쓰셨습니다. 다음에 글을 쓰실 때에는 상대가 무슨 말을 하는 지 파악한 후에 글을 쓰시면 좋겠습니다. 


*오히려 그 배에 탄자들, 276명이든 멜리데 섬의 토인들이든 간에 지금 구원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도바울을 사라지게 하는 복음에 초점 맞춰야 된다고 생각했다. 

-사도바울을 사라지게 하는 복음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설명을 하셔야 합니다. 


*구원에 초점을 맞추면 사도행전은 풀리지가 않는다. 그렇게 된다면 이건 기존교회에서 내세우는, 그런 판에 박힌 설교를 얼마든지 내놓을 수 있을 것이다. "왜 그 일을 경험하고도 구원받았다는 내용이 없느냐? 주님은 심판주이시다. 회개하고 믿어야 구원이 있다." 아니면 "풍랑에서 살아나는 기적을 겪고도, 멜리데 섬에서 독사에 물렸는데도 독이 퍼지지 않았던 기적이나, 보블리오 추장의 부친의 열병을 낫게 하는 기적을 보고도(사도행전에서 일어났던 기적들 포함) 사도바울이 전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아서 구원받지 못했으니 우리는 사도바울이 전한 복음을 받아들여 구원받자."라는, 이런 드라마를 쓸 수 있지 않을까? 이 세상 교회에서 목사들이 전하는 설교들 들어 보면 다들 드라마 한편씩은 쓰고 베스트셀러 작가는 못 돼도 보조 작가들은 된다. 

-만일 인간 구원에 초점을 맞추어 사도행전을 보았다면 그것은 악마적입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심판 주에 대해 왜 그렇게 강한 반감을 갖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 속에 있는 주는 심판 주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오른편의 자리가 심판 주의 자리입니다. 이 자리는 인자됨을 인하여, 곧 자기 백성의 죄를 담당하심으로 아버지께서 주신 심판 주의 자리입니다. 


*차라리 풍랑에 직면되어 있는 죄수들이나, 멜리데 섬의 토인들이나 구원이라는 단어 속에 그들이 알고 있는 신의 개념이 사도바울이 전하는 신의 개념과 얼마나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구원받았다는 말이 없다고 해서 구원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27장에도 구원이라는 말이 많이 나온다. 그 구원의 개념은 풍랑 속에서의 구원이겠지만, 그 구원마저도 구원으로 봐야 한다. 왜냐하면 구원이라고 했을 때에 해석이 둘로 나누어지고, 우리의 해석은 육이 되고, 

-이렇게 해석하셔도 전파되는 것이 십자가라며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본인이 구원 중심으로 성경을 해석하지 말라고 하셔 놓고 여전히 구원중심으로 성경을 해석하고 있다는 겁니다. 


* 주님의 해석은 우리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주님의 해석은 우리가 알 수 없다고 해 놓고 본인은 이미 해석을 해 놓았습니다. 


*성령의 일은 반드시 구원과 저주로 나타나게 되어 있다. 

-당연한 말씀입니다. 심판 주가 보내신 분이 성령입니다. 성령님은 반드시 십자가만을 자랑하게 합니다. 그러니 십자가 앞에서 자기 공로를 내세우는 자와 한 것이 없다고 하는 정도가 아니라 죄인 중의 괴수라 하는 자 둘로 나누어지는 것은 당연한 겁니다.


*십자가만 자랑하는 자와 십자가도 자랑하는 자로 말이다.

-여기부터 본심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저를 십자가도 자랑하는 자로 규정했습니다. 그렇다면 제 글에서 십자가도 자랑하는 내용을 정확하게 지적하셔야 합니다. 참고로 제 설교문과 동영상 수백편이 인터넷에 게시되어 있습니다. 물론 그 글을 몇 편 읽었고 몇 편 들었는지는 제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수백편의 설교문이 올려져 있고 동영상이 올려져 있기에 좀 들어 보시고 저를 판단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주님의 주 되심을 드러내기 위함도 맞고 심판주 라는 것도 맞지만...이것은 좁은 공간에 가둬놓고 심판주만 전하니 질식할 것 같다. 

-왜 질식당하지 않으려고 할까요? 분명 자신은 죽었다고 고백하면서 이미 죽은 자인데 질식당해야지요. 아니면 난 죽었기에, 난 복음을 알았기에 살았다고 하는 것일까요? 왜 말씀 앞에 불모가 되지 않으려고 할까요? 바닥까지 다 긁어내어 보니 그 바닥에 십자가 복음을 아는 내가 자리 잡고 있지 않은가요? 죄인 되는 것이 그렇게 싫은가요?


*그렇기 때문에 질식하지 않기 위해서 뭔가를 해야 하는 것으로 나가게 한다. 질식해서 죽으라 하는데 안 죽으니까 더 죽을 것 같다. 그냥 죽여주면 좋은데... 십자가지신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하나님을 바라보게 한다.

-성령 받지 않은 자들은 말씀을 듣게 되면 자꾸 자신이 선한일, 말씀대로 행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십자가의 사랑의 깊이를 알아갑니다. 

-도대체 죄인이라는 것이 어떤 죄인을 두고 말하는지 참으로 궁금합니다. 
제가 어떤 분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지요. ‘술을 왜 마시냐고’ 말입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저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마신다’고요. 막 산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죄인이기 때문에 마구 마시세요.’ 그런데 ‘술 안 마시는 죄인도 있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왜 한풀이를 십자가를 갖고 할까요?

인간은 성령을 따라 사는 자와 악마의 종으로 나누어집니다.
막살라는 말은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에게 가장 분노를 야기하는 말입니다.
실상 지금까지 막살아놓고 새삼 막 살려고 덤벼드는 자와 난 결코 막 살수 없다고 앞발을 내밀고 엉덩이를 뒤로 내미는 자, 참으로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막 살면 되는데. 주님은 우리를 막살게 하셔서 십자가의 피만을 자랑토록 하십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은 막 살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이 아니라 목사 말을 따라 삽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말을 하면 되는 것일까요? 
성령께서는 반드시 죄인을 만들어 놓으시고 차후적으로 죄인임이 발굴되게 하시는데 혹 본인은 이미 죄인임을 알기에 죄인이 짓는 죄를 짓는 것이 아닐까요? 그렇게 되면 그렇게 하는 행위는 의가 된다는 사실을 본인이 더 잘 아실 것 같습니다. 

어떤 분이 이런 예를 들었지요. 우리 함께 들었습니다.
‘내가 살인을 해도 주의 일이고, 타인의 빰을 때려도 주의 일이고, 복음을 전해도 주의 일이다’라고 말입니다.
맞지요. 주님의 일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는 자신이 긍휼의 그릇인지 진노의 그릇인지 어떻게 압니까? 분명 주의 일이라고 했을 때에는 본인이 긍휼의 그릇이라는 전제를 갖고 말씀을 하신 것으로 들렸습니다. 주님의 일은 우리가 포착할 수 없고 우리가 그 일에 이용 당하면서 그 현상을 드러낼 뿐입니다. 우리가 여전히 시간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무시하고 묵시 속으로 집어넣어 일체화 시키려 하니 그러한 현상이 나온 것이라 생각됩니다.

태어나면서 죽을 때까지 인간은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속에서 죄가 드러나면서 변함없으시고 이미 일을 다 끝내 놓으신 십자가 지신 주님이 증거 됩니다. 



*그래서 심판 주 앞에서 두려워 떨게 만든다. 왜 심판주인지 그것에 대한 해석이 없다. 이미 죽은 자임을 알려 주지 않는다. 성령의 일하심을 배제시키시는 것이다. 어떻게 우리가 심판주를 알까? 심판주 하면 그냥 벌주는 무서운 하나님 정도로 생각하지 않을까? 
이 세상은 예수님의 심판 주되심이 전파되는 것을 절대 금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이 세상이 그것을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은 주님의 심판 주되심을 드러내는 현상들이 드러나는 현장입니다. 

성도의 삶의 현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는 당할 뿐이고, 그 당함 속에 그리스도의 피만 증거 될 뿐입니다. 그러면서 성도는 이 땅에서 얼음 녹듯이 어느 순간 형체도 없이 사라집니다.’

여기에 이렇게 써 놓았습니다. 그 뒷 글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 받은 자만 심판 주가 누구신지 증거하게 됩니다.


*오히려 그 심판주가 하신 일,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복음이 과연 무엇인가를 알고 싶을 뿐이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복음이 과연 무엇인지를 알아서 어디에 써 먹으시려고 하는 건지 궁금합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이 복음입니다. 다시 살아 나셨다는 말은 하나님 우편, 곧 심판 주의 자리에 예수님이 앉으셨다는 겁니다. 끝났다는 겁니다. 그 끝난 현상이 이 땅에서는 십자가만 자랑하는 것으로만 나타납니다. 주로 인하고 주로 말미암고 주께로 돌아가는 현상입니다. 


*우리가 봐야 할 관점은 성령께서 예수님의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신 그 복음을 앞장 세워서 일하신다는 것이다. 

-성령 받은 자는 십자가만 자랑합니다. 이 모습이 다시 살아나신 분의 권세가 드러나는 현장입니다. 


*사도바울에게는 로마가 아직 남아 있다. 로마에 가서 해야 할 일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이다. 풍랑으로 죽지 않음을 안다. 약속대로 죽어야 한다는 것을...복음은 이미 죽은 자요, 산자로 살게 한다는 것을.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다. 

-왜 갑자기 사도바울 중심으로 글을 전개하는 것일까요? 오히려 사도바울을 장악하고 있는 주님 중심으로 글을 써야 하지 않을까요? 오히려 이렇게 글을 씀으로 말미암아 본인이 저를 공격한 그 공격을 본인이 그대로 받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일까요?

결국 자기 주체로 돌아와 버렸습니다. 결국 십자가만 전하는 사도바울과 그 사도바울을 구경하는 구경꾼으로 갈라 버렸습니다. 


*그들의 구원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들의 구원을 생각하지도 않았다. 

-성경은 인간이 원하는 구원과 주님이 주시는 구원이 싸우는 현장입니다. 물론 주님의 구원이 대부분 튕겨 나감으로 말미암아 그 구원이 성공을 거둡니다. 이것은 구원론 중심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들의 구원을 보고 싶지도 않고 생각하지도 않은 자체는 말씀 속으로 들어가기 싫어서, 아니면 말씀을 심도 있게 묵상하지 않아서가 아닐까요? 

아니며 구원론은 무조건 나쁜 것이니 나는 인간 구원론 입장으로는 성경을 보지 않는다는 겁니까? 만일 그렇게 되면 죄가 어디에서 나옵니까? 성경말씀은 인간을 죄인 만들고 예수님을 죽이게 만드는 말씀입니다.


*오로지 이번 사도행전 수련회에서 들었던 것처럼 사도바울은 지금 약속된 죽음에 직면되어 자기가 지금까지 전했던 복음에 빨려 들어가고 있는 것을 보고 싶었을 뿐이다. 예수님이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복음의 주인공이신 주님의 일하심을 말이다. 사도행전은 역사가 아니라 단 하나의 사건이니까. 그래서 기록된 죄수들의 구원이나 멜리데 섬에서 일어났던 일은 단 하나의 사건, 십자가 사건을 증거 하기 위하여 파생된 사건으로 보게 된다. 그런데 이 글에서는 구원을 상정해놓은 것 자체가 엄청난 꼼수다. 주님의 주되심, 심판주를 증거 하기에는 뭔가 역부족이고 노림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심판주를 설명하기 위해서, 주님의 주 되심을 설명하기 위해서 구원과 연결시킨 것이 매치가 안 되는 것이다. 적어도 사도행전강의를 함께 들었다면 말이다. 이 글의 제목이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를 다녀와서니까. 

-그래서 지금까지의 글이 쓰여진 겁니다. “수련회에서 들었던 것처럼”
왜 당신은 이근호 목사님이 들려주신 생명의 말씀대로 그 용어와 표현을 하지 않느냐는 분노에서 이 글이 출발 되었다는 사실을 짐작케 합니다. 내 짐작이 잘못 되었기를 바랍니다.

그동안 저에게나 저와 탕자교회 성도들에게 질문한 내용들을 보게 되면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서울 강남강의는 누구의 주도로 만들어졌습니까?”
-주님이 하게 하셨습니다.

“탕자교회는 몇 명이 모입니까?”
-알아서 뭐하려고 그럽니까? 그렇게 말씀을 들어놓고 왜 숫자를 묻습니까? 숫자가 많으면 권력이 되는 줄 생각하는 것 아닙니까?

“훌륭한 이근호 목사님이 강남에서 두 번이나 말씀을 전하시는데 왜 잘 알지도 못하는 정 목사가 강의하느냐?”
-주님이 하게 하셨습니다. 
심지어 이근호 목사님의 말씀은 성령이 부어주는 말씀이기 때문에 인터넷으로 연결해서 다른 목사들은 설교를 하지 말고 이근호 목사님의 말씀을 들었으면 좋겠다고 주장하는 자도 있는 것으로 들었습니다. 생각이야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그것이 얼마나 악마적인가를 본인이 모르는 것일까요?

그래서 나온 이단들이 우리 목사님의 말씀만이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전달 받았다고 하는 이단들 아닙니까? 신천지도 그렇고 다락방도 그렇고, 하나님의 교회도 그렇고, 지방교회도 그렇고. 이들은 모두 정답을 갖고 있습니다. 십자가 마을도 정답을 갖고 있습니까? 정답을 갖고 있다면 그 정답 안고 사시면 됩니다. 

“이근호 목사님은 찾아오는 사람들, 요청하는 사람들에게만 가서 복음을 전하는데 정목사는 왜 귀찮게 사람을 찾아 다니느냐?” 
-주님이 그런 맘을 주셨습니다. 

십자가마을 후계자 이야기를 언급하면서 저에게 본인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정말 십자가 마을을 물려 받을 생각이 없냐고?”
-제가 왜 물려받습니까? 그것이 뭐라고 물려받습니까? 그냥 두어도 그냥 복음이 전파 될 수 있는데 말입니다. 그리고 그럴 마음도 없고, 제가 먼저 갈 수도 있는데..

사람들이 이런 질문들을 하는 의도가 무엇일까요?
복음에 관심 있어서일까요 아니면?


*그럼에도 굳이 구원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면 사도바울의 움직임의 현상으로 인해 나타난 자들이 있었다거나, 아니면 사도바울 때문에 동원된 자들이 있었다고 봐야 되지 않는가? 저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도바울이 중요하니까. 

-사도바울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도바울과 동행하시는 주님이 중요합니다. 그러니 심판 주의 능력이 사도바울의 움직임을 통해 드러내는 겁니다. 물론 그가 전파하는 것은 십자가입니다.


*살면 살수록 성령 받은 사도바울의 인식에 수정이 일어나고 심화되어졌던 것처럼 우리 모두 그렇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율법에 막힌 베드로를 사도바울이 막아섰고 이방인인 고넬료가 가르쳤다. 예루살렘 선교본부를 없애니, 안디옥을 선교의 베이스캠프로 삼았다. 사도바울에게 그렇게 잘해줬던 바나바도 삐졌다. 그 외에 사도행전에서 일어난 모든 일들은 역사가 아니라 사건이다. 그래서 복음은 예수님의 십자가 영이 전하신다. 

-결국 이근호 목사님이 말씀하신 내용을 앵무새처럼 내뱉는 것으로 결론이 나는 모습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제가 이해한 이 목사님의 말씀은 십자가는 그 어느 누구도 장악할 수 없다는 말씀으로 들렸습니다. 그러니 그 십자가를 증거 하는 사도바울조차도 사라집니다. 풀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 지신 분이 친히 홀로 다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살면 살수록 더 죄가 깊어지고 죄가 더한 곳에 그리스도의 은혜가 넘칩니다. 정답을 알고 있는 자들은 이것이 지식일 뿐입니다. 그러나 본인이 말씀하신대로 이것은 사건입니다. 

*글이나 설교에 꽂혀 있는 심판주 사상은 과연 뭘까? 복음일까?

-십자가라는 자체가 드러내는 결과물이 심판 주입니다. 심판 주의 자리는 십자가가 만든 자리입니다. 생소한 용어, 잘 사용되지 않는 용어라 해서 너무 과하게 표현하시는 것 같습니다. 성경을 좀 더 열심히 읽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이 심판 주를 말씀합니다. 주의 이름으로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주셨습니다. 


*십자가마을은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이 글을 쓸 수밖에 없었다. 이 글을 읽고 그냥 느낀 그대로 썼을 뿐이다. 다른 의도는 없다.

- 다른 의도가 다분히 깔려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글을 이렇게까지 억지로 해석해서 저를 공격할 이유가 없습니다. 글을 완전히 엉터리로 읽어서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은 다분한 의도가 깔렸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내가 안 붙들어도 됩니다. 그 사상을 몰라도 됩니다. 성령이 오게 되면 죄인 되는데 무슨 앎이 필요하고 공부가 필요하고 연수가 필요합니까?

놀라운 것은 십자가를 알았기에 바울파가 생기고 아볼로 파가 생겼습니다. 그러나 바울, 아볼로, 게바 그 어느 누구도 십자가를 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 파벌이 생겨났을까요?

그 이유는 자신이 참 진리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십자가만을 자랑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들은 말씀의 함정에 빠져버렸습니다. 여기에서 바울은 발을 빼 버렸습니다.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았다고 말입니다. 






 이미아 (IP:122.♡.170.138)18-08-14 01:05 
드디어 실체를 드러내셨습니다. 기쁩니다. 짝짝짝! 
단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저는 십자가마을을 물려받을 생각이 있냐고 물어본 적이 없습니다. 
십자가마을이 아니라 우리교회 후계자였습니다. 
“이근호 목사님 후계자 될 것 같아!” 또는 “이근호 목사님 후계자 되는 것 아냐?” 
둘 중의 하나일 텐데, 후자가 맞을 것입니다. 부정적이었지 긍정은 아니었으니까요. 
이렇게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었기에 목사님께 말씀드렸고, 저는 그럴 생각이 없냐고 물었습니다. 언제 적 이야기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초창기에 몇 번 강의 들으러 갔다가 함께 차를 타고 돌아오는 길이었을 것입니다. 아마 저는 그때 복음 전하는데 힘이 되라고 그런 호의(?)를 베풀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만큼 단호하게 복음을 전하시라고요. 그리고 저는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사명과 열의에 충만한 가운데 있는 목사님께 복음만 전하시라고요. 왠지 붕 떠있는 모습이 안쓰러워서 그랬을 것입니다. 지 주제파악도 못하고서 잘난 체 한 것입니다. 자기가 지금 어느 자리에 앉아 있는지 자기는 자기 자리를 보지 못합니다. 누가 알려 주게 되면 그때 되돌아볼 수 있는 자리가 되는 것입니다. 목사님이나 저나 마찬가지입니다. 그 누구는 주님이실 것입니다.
 이미아 (IP:122.♡.170.138)18-08-14 01:12 
개인적으로 비공개로 물어볼 수도 있는 문제였지만, 그러나 비공개로 하기에는 너무나도 큰 걸림돌이 있었기에 공개적인 댓글을 단 것입니다.

 이미아 (IP:122.♡.170.138)18-08-14 04:02 
목사님! 
그렇게 조목조목 반박하시니까 목사님이 맞는 줄 생각하시죠? 
그러나 틀렸습니다. 
목사님은 인간이 구원받고자 하는 구원욕구를 짓밟기 위해서 심판주를 내세웠습니다. 
근데 그것은 오히려 목사님의 의도에 맞는 효과를 가져 오기 위한 꼼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심판주의 마음을 달래는 행위를 부추기는 것입니다. 목사님 말씀대로 심판주를 믿지 않으면 구원이 없기 때문이죠. 그러면 심판주를 듣는 교인들은 물어보겠죠. “왜 심판주를 믿어야만 구원이 있는 것입니까?” 목사님은 “심판주를 믿어도 구원은 없습니다, 심판주를 믿을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답변하시겠죠. 그러니까 심판주를 내세우는 것입니다. 왜냐구요? 심판주라고 하면 뭔가 주눅이 들잖아요. 선악과 따먹었기에. 그래서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해야 하잖아요. 결국 구원을 받으려면 심판주를 믿어야 된다는 원점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목사님이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던 간에, 심판주를 내세우면 마귀는 한편이라고 좋아라 박수를 칠 것입니다. 그리고 심판주는 돈을 내라고 하는 소리거든요. 

심판주에 대한 설명요, 제가 심판주를 몰라서 그런 글을 썼다고 생각하십니까? 목사님만 심판주를 아시는 줄로 착각하시는 것 아니십니까? 그런데 아무리 그렇게 말씀하셔도 목사님이 말씀하시는 심판주는, 우편의 자리에서 보내신 성령이 아닌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분명히 의에 대하여 죄에 대하여 세상에 대하여 심판을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새로운 용어, 낯선 용어로서의 심판주이기 때문에 거부반응을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님의 글에서 느낀 대로 구원을 상정했고, 영생과 직결된다는 말씀이 없기에 구원받지 않았다고 했고, 인간은 구원을 받았으면 하는 욕구가 있고, 이런 연결고리를 가지고 심판주 되심을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하는데요? 심판주보다 복음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을 말씀하시면 안 되고요? 예수님은 우편의 자리에 앉으셔서 놀고 계십니까? 성령을 보내셔서 일하시고 계시잖아요? 예수님이 죽으신 것이 죄고, 다시 살아나신 것이 의고, 그 예수님이 세상을 심판하고 계시고. 그 성령은 십자가지신 예수님, 죽었다가 살아나신 예수님을 증거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굳이 성령 대신에 심판주라는 용어를 내세우는 이유가 뭡니까? 뭐, 그 누구와 차별화를 두기 위해서입니까?  

우리 함께 사도행전 강의를 이근호 목사님께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27장이나 28장이 당연히 사도바울에게 초점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도바울은 주님의 약속대로 죽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십자가마을여름수련회를 다녀와서 라는 글을 쓰면서 정말 엉뚱하게도 사도바울을 쓰고 버리시고자 하시는 주님의 일이 아니라, “죄수들의 구원이나 토인들의 구원을 보고 싶었을 것입니다.”라고 하시는 거예요. 참 황당했습니다. 왜 목사님은 함께 들었으면서도 관점이 다른 것입니까? 여름수련회 후기가 아니라면 가능하겠죠. 근데 후기를 쓰시면서 왜 이런 고백이 도출되느냐 이 말이죠. 목사님 마음이니까요? 아니면 더 새로운 것을 끄집어내기 위함입니까? 그러니 뒤에 나오는 심판주를 설명하기 위해서 구원을 상정했다고 생각이 드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닙니까? 누가 봐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영생이라는 말이 없다고 해서 구원이 안 됐다고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까? 안 됐어도 그만이지만. 몇 번이고 이야기하지만 굳이 구원을 공격용으로 삼아서 심판주를 설명하려고 사도행전 27장, 28장을 꿰맞추지 않았으면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심판주를 전하는 목사님만은 정당하다고 우기는 것입니다.  

심판주로는 질식당하고 싶어도 질식을 당하지 않습니다. 복음으로 질식을 당합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심이 없이는 아버지가 주께 주신 심판의 자리는 없습니다. 그러니 복음부터 먼저 전하십시오. 심판주부터 전하지 마시고요. 심판주를 전한다는 것은 복음을 모르는 것입니다. 저는 목사님의 글이나 설교를 많이 듣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알았으면, 복음을 알았으면, 죄인인줄 알았으면, 이라고 하면서 사명이 있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십자가만이 아니라 십자가도로 규정할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십자가를 알았으면, 복음을 알았으면, 죄인인줄 알았으면, 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어쩌라고요? 알았으니까 모이기를 힘쓰고 헌금하라고요? 다 죄니까 좋아하는 죄만 짓지 말고 하기 싫어하는 죄도 지으라고요? 죄도 골라 짓는다고 얼마나 타박을 많이 했습니까? 목사님의 강의나 설교나 글의 모토가 이것인데, 수많은 동영상이 있은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본질은 같은데요. 막 살라고 해놓고 성도는 사명이 있다고 합니다. 막 살면 막 사는 것이지 사명은 뭡니까? 막사는 것이 사명 아닙니까? 죄를 알고 죄 짓는 사람 봤습니까? 막 사는 게 뭔지 알면서 막 사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죄도 모르고 막 사는 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냥 삽니다. 그냥. 그러면 목사님은 여기에도 토를 다시겠죠. 그냥이 뭔지 알면서 그냥 산다고요. 도대체 어쩌라고요? 

인간은 변하지 않습니다. 죄인만 변합니다. 주님이 죄인의 괴수로 변하시게 하시니까요. 이것이 사도바울의 사라짐입니다. 복음을 알아서 써먹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알고 싶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을 복음 속으로 사라지게 하신 그 분의 일하심을 말입니다. 저도 사라지게 하시는 은혜를 주시면 말입니다. 안 주시면 할 수 없지만요. 사도행전을 들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사도바울은 사라지고 싶지 않은데, 사도바울을 사라지게 하는 주님은 사라지고 싶지 않은 성도를 사라지게 하십니다. 사도바울처럼 성도는 사라지는 것이니까. 그래서 사도바울과 주님은 결코 나눠지지 않습니다. 사도바울이 쓴 가면을 벗으면 실체가 들어있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을 구경하지 않습니다. 구경꾼은 고정되어 있지 움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사도바울의 움직임을 따라갑니다. 따라가다 보니 사도바울은 보이지 않고 주님이 보이는 것입니다. 창세전부터 동행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맞습니다. 저는 앵무새입니다. 이근호 목사님이 복음 전하셨으면 이근호 목사님의 앵무새가 되었을 것이고, 만약에 정석훈 목사님이 복음을 전하셨으면 정석훈 목사님의 앵무새가 되었을 것입니다. 뭐, 다른 목사님이 복음 전하셨으면 그 목사님의 앵무새가 되었겠죠. 그래서요? 복음은 소유가 아니잖아요. 단, 복음이라야 합니다. 누가 복음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복음의 주인공이 따로 있는데 두렵지 않습니다. 앵무새가 된들, 어차피 앵무새니까. 그렇다고 앵무새라고 해서 아무거나 따라하지 않습니다. 앵무새를 키우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보이는 목사가 아니고요. 참새나 앵무새나 같은 새 종류잖아요(마10:29-31). 다른 의도는 없었습니다. 나에게 일어난 사건으로 인하여 목사님의 메시지를 주목하게 되었고 과연 심판주는 복음인가? 했습니다. 목사님이야 말로 십자가마을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긴긴 글을 쓰셨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목사님의 의도를 잘 알거든요. 결론은 복음이 없이는 심판주도 없습니다.

이근호 (IP:119.♡.83.168)18-08-14 05:52 
풍랑 속으로 

*이 글을 몇 번이고 읽었는데, 왜 굳이 구원에 초점을 맞추어서 심판주 되심을 설명하시려고 했는지 이해가 안 갔다. 

-구원에 초점을 맞추어 심판 주되심을 설명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구원을 공격하는 심판 주되심을 설명했습니다. 

 *마치 꼭 심판주 되시는 분을 믿지 않으면 구원이 없다고 역설하시는 것 같았다. 

-당연합니다. 심판 주되시는 분을 믿지 않으면 구원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떡합니까? 심판 주를 믿을 능력이 이 세상 어느 누구에게도 없는데 말입니다. 


 *그리고 그 심판주를 전하시는 설교자 자신은 정당하다고 우기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보시는 것은 당연합니다. 댓글을 쓴 본인의 글도 그렇게 보입니다. 


 *이번 수련회에서 사도행전 강의를 듣고선 이런 고백이 도출될 수는 없다고 본다. 

-무슨 고백인지 정확히 설명을 해 주어야 하는데 제 글에 대한 정확한 설명은 없고 본인의 느낌을 쓰셨습니다. 다음에 글을 쓰실 때에는 상대가 무슨 말을 하는 지 파악한 후에 글을 쓰시면 좋겠습니다. 


 *오히려 그 배에 탄자들, 276명이든 멜리데 섬의 토인들이든 간에 지금 구원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도바울을 사라지게 하는 복음에 초점 맞춰야 된다고 생각했다. 

-사도바울을 사라지게 하는 복음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설명을 하셔야 합니다. 


 *구원에 초점을 맞추면 사도행전은 풀리지가 않는다. 그렇게 된다면 이건 기존교회에서 내세우는, 그런 판에 박힌 설교를 얼마든지 내놓을 수 있을 것이다. "왜 그 일을 경험하고도 구원받았다는 내용이 없느냐? 주님은 심판주이시다. 회개하고 믿어야 구원이 있다." 아니면 "풍랑에서 살아나는 기적을 겪고도, 멜리데 섬에서 독사에 물렸는데도 독이 퍼지지 않았던 기적이나, 보블리오 추장의 부친의 열병을 낫게 하는 기적을 보고도(사도행전에서 일어났던 기적들 포함) 사도바울이 전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아서 구원받지 못했으니 우리는 사도바울이 전한 복음을 받아들여 구원받자."라는, 이런 드라마를 쓸 수 있지 않을까? 이 세상 교회에서 목사들이 전하는 설교들 들어 보면 다들 드라마 한편씩은 쓰고 베스트셀러 작가는 못 돼도 보조 작가들은 된다. 

-만일 인간 구원에 초점을 맞추어 사도행전을 보았다면 그것은 악마적입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심판 주에 대해 왜 그렇게 강한 반감을 갖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 속에 있는 주는 심판 주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오른편의 자리가 심판 주의 자리입니다. 이 자리는 인자됨을 인하여, 곧 자기 백성의 죄를 담당하심으로 아버지께서 주신 심판 주의 자리입니다. 


 *차라리 풍랑에 직면되어 있는 죄수들이나, 멜리데 섬의 토인들이나 구원이라는 단어 속에 그들이 알고 있는 신의 개념이 사도바울이 전하는 신의 개념과 얼마나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구원받았다는 말이 없다고 해서 구원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27장에도 구원이라는 말이 많이 나온다. 그 구원의 개념은 풍랑 속에서의 구원이겠지만, 그 구원마저도 구원으로 봐야 한다. 왜냐하면 구원이라고 했을 때에 해석이 둘로 나누어지고, 우리의 해석은 육이 되고, 

-이렇게 해석하셔도 전파되는 것이 십자가라며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본인이 구원 중심으로 성경을 해석하지 말라고 하셔 놓고 여전히 구원중심으로 성경을 해석하고 있다는 겁니다. 


 * 주님의 해석은 우리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주님의 해석은 우리가 알 수 없다고 해 놓고 본인은 이미 해석을 해 놓았습니다. 


 *성령의 일은 반드시 구원과 저주로 나타나게 되어 있다. 

-당연한 말씀입니다. 심판 주가 보내신 분이 성령입니다. 성령님은 반드시 십자가만을 자랑하게 합니다. 그러니 십자가 앞에서 자기 공로를 내세우는 자와 한 것이 없다고 하는 정도가 아니라 죄인 중의 괴수라 하는 자 둘로 나누어지는 것은 당연한 겁니다. 


 *십자가만 자랑하는 자와 십자가도 자랑하는 자로 말이다. 

-여기부터 본심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저를 십자가도 자랑하는 자로 규정했습니다. 그렇다면 제 글에서 십자가도 자랑하는 내용을 정확하게 지적하셔야 합니다. 참고로 제 설교문과 동영상 수백편이 인터넷에 게시되어 있습니다. 물론 그 글을 몇 편 읽었고 몇 편 들었는지는 제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수백편의 설교문이 올려져 있고 동영상이 올려져 있기에 좀 들어 보시고 저를 판단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주님의 주 되심을 드러내기 위함도 맞고 심판주 라는 것도 맞지만...이것은 좁은 공간에 가둬놓고 심판주만 전하니 질식할 것 같다. 

-왜 질식당하지 않으려고 할까요? 분명 자신은 죽었다고 고백하면서 이미 죽은 자인데 질식당해야지요. 아니면 난 죽었기에, 난 복음을 알았기에 살았다고 하는 것일까요? 왜 말씀 앞에 불모가 되지 않으려고 할까요? 바닥까지 다 긁어내어 보니 그 바닥에 십자가 복음을 아는 내가 자리 잡고 있지 않은가요? 죄인 되는 것이 그렇게 싫은가요? 


 *그렇기 때문에 질식하지 않기 위해서 뭔가를 해야 하는 것으로 나가게 한다. 질식해서 죽으라 하는데 안 죽으니까 더 죽을 것 같다. 그냥 죽여주면 좋은데... 십자가지신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하나님을 바라보게 한다. 

-성령 받지 않은 자들은 말씀을 듣게 되면 자꾸 자신이 선한일, 말씀대로 행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십자가의 사랑의 깊이를 알아갑니다. 

-도대체 죄인이라는 것이 어떤 죄인을 두고 말하는지 참으로 궁금합니다. 
제가 어떤 분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지요. ‘술을 왜 마시냐고’ 말입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저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마신다’고요. 막 산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죄인이기 때문에 마구 마시세요.’ 그런데 ‘술 안 마시는 죄인도 있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왜 한풀이를 십자가를 갖고 할까요? 

인간은 성령을 따라 사는 자와 악마의 종으로 나누어집니다. 
막살라는 말은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에게 가장 분노를 야기하는 말입니다. 
실상 지금까지 막살아놓고 새삼 막 살려고 덤벼드는 자와 난 결코 막 살수 없다고 앞발을 내밀고 엉덩이를 뒤로 내미는 자, 참으로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막 살면 되는데. 주님은 우리를 막살게 하셔서 십자가의 피만을 자랑토록 하십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은 막 살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이 아니라 목사 말을 따라 삽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말을 하면 되는 것일까요? 
성령께서는 반드시 죄인을 만들어 놓으시고 차후적으로 죄인임이 발굴되게 하시는데 혹 본인은 이미 죄인임을 알기에 죄인이 짓는 죄를 짓는 것이 아닐까요? 그렇게 되면 그렇게 하는 행위는 의가 된다는 사실을 본인이 더 잘 아실 것 같습니다. 

어떤 분이 이런 예를 들었지요. 우리 함께 들었습니다. 
‘내가 살인을 해도 주의 일이고, 타인의 빰을 때려도 주의 일이고, 복음을 전해도 주의 일이다’라고 말입니다. 
맞지요. 주님의 일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는 자신이 긍휼의 그릇인지 진노의 그릇인지 어떻게 압니까? 분명 주의 일이라고 했을 때에는 본인이 긍휼의 그릇이라는 전제를 갖고 말씀을 하신 것으로 들렸습니다. 주님의 일은 우리가 포착할 수 없고 우리가 그 일에 이용 당하면서 그 현상을 드러낼 뿐입니다. 우리가 여전히 시간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무시하고 묵시 속으로 집어넣어 일체화 시키려 하니 그러한 현상이 나온 것이라 생각됩니다. 

태어나면서 죽을 때까지 인간은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속에서 죄가 드러나면서 변함없으시고 이미 일을 다 끝내 놓으신 십자가 지신 주님이 증거 됩니다. 



 *그래서 심판 주 앞에서 두려워 떨게 만든다. 왜 심판주인지 그것에 대한 해석이 없다. 이미 죽은 자임을 알려 주지 않는다. 성령의 일하심을 배제시키시는 것이다. 어떻게 우리가 심판주를 알까? 심판주 하면 그냥 벌주는 무서운 하나님 정도로 생각하지 않을까? 
이 세상은 예수님의 심판 주되심이 전파되는 것을 절대 금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이 세상이 그것을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은 주님의 심판 주되심을 드러내는 현상들이 드러나는 현장입니다. 

성도의 삶의 현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는 당할 뿐이고, 그 당함 속에 그리스도의 피만 증거 될 뿐입니다. 그러면서 성도는 이 땅에서 얼음 녹듯이 어느 순간 형체도 없이 사라집니다.’ 

여기에 이렇게 써 놓았습니다. 그 뒷 글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 받은 자만 심판 주가 누구신지 증거하게 됩니다. 


 *오히려 그 심판주가 하신 일,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복음이 과연 무엇인가를 알고 싶을 뿐이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복음이 과연 무엇인지를 알아서 어디에 써 먹으시려고 하는 건지 궁금합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이 복음입니다. 다시 살아 나셨다는 말은 하나님 우편, 곧 심판 주의 자리에 예수님이 앉으셨다는 겁니다. 끝났다는 겁니다. 그 끝난 현상이 이 땅에서는 십자가만 자랑하는 것으로만 나타납니다. 주로 인하고 주로 말미암고 주께로 돌아가는 현상입니다. 


 *우리가 봐야 할 관점은 성령께서 예수님의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신 그 복음을 앞장 세워서 일하신다는 것이다. 

-성령 받은 자는 십자가만 자랑합니다. 이 모습이 다시 살아나신 분의 권세가 드러나는 현장입니다. 


 *사도바울에게는 로마가 아직 남아 있다. 로마에 가서 해야 할 일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이다. 풍랑으로 죽지 않음을 안다. 약속대로 죽어야 한다는 것을...복음은 이미 죽은 자요, 산자로 살게 한다는 것을.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다. 

-왜 갑자기 사도바울 중심으로 글을 전개하는 것일까요? 오히려 사도바울을 장악하고 있는 주님 중심으로 글을 써야 하지 않을까요? 오히려 이렇게 글을 씀으로 말미암아 본인이 저를 공격한 그 공격을 본인이 그대로 받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일까요? 

결국 자기 주체로 돌아와 버렸습니다. 결국 십자가만 전하는 사도바울과 그 사도바울을 구경하는 구경꾼으로 갈라 버렸습니다. 


 *그들의 구원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들의 구원을 생각하지도 않았다. 

-성경은 인간이 원하는 구원과 주님이 주시는 구원이 싸우는 현장입니다. 물론 주님의 구원이 대부분 튕겨 나감으로 말미암아 그 구원이 성공을 거둡니다. 이것은 구원론 중심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들의 구원을 보고 싶지도 않고 생각하지도 않은 자체는 말씀 속으로 들어가기 싫어서, 아니면 말씀을 심도 있게 묵상하지 않아서가 아닐까요? 

아니며 구원론은 무조건 나쁜 것이니 나는 인간 구원론 입장으로는 성경을 보지 않는다는 겁니까? 만일 그렇게 되면 죄가 어디에서 나옵니까? 성경말씀은 인간을 죄인 만들고 예수님을 죽이게 만드는 말씀입니다. 


 *오로지 이번 사도행전 수련회에서 들었던 것처럼 사도바울은 지금 약속된 죽음에 직면되어 자기가 지금까지 전했던 복음에 빨려 들어가고 있는 것을 보고 싶었을 뿐이다. 예수님이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복음의 주인공이신 주님의 일하심을 말이다. 사도행전은 역사가 아니라 단 하나의 사건이니까. 그래서 기록된 죄수들의 구원이나 멜리데 섬에서 일어났던 일은 단 하나의 사건, 십자가 사건을 증거 하기 위하여 파생된 사건으로 보게 된다. 그런데 이 글에서는 구원을 상정해놓은 것 자체가 엄청난 꼼수다. 주님의 주되심, 심판주를 증거 하기에는 뭔가 역부족이고 노림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심판주를 설명하기 위해서, 주님의 주 되심을 설명하기 위해서 구원과 연결시킨 것이 매치가 안 되는 것이다. 적어도 사도행전강의를 함께 들었다면 말이다. 이 글의 제목이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를 다녀와서니까. 

-그래서 지금까지의 글이 쓰여진 겁니다. “수련회에서 들었던 것처럼” 
왜 당신은 이근호 목사님이 들려주신 생명의 말씀대로 그 용어와 표현을 하지 않느냐는 분노에서 이 글이 출발 되었다는 사실을 짐작케 합니다. 내 짐작이 잘못 되었기를 바랍니다. 

그동안 저에게나 저와 탕자교회 성도들에게 질문한 내용들을 보게 되면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서울 강남강의는 누구의 주도로 만들어졌습니까?” 
-주님이 하게 하셨습니다. 

“탕자교회는 몇 명이 모입니까?” 
-알아서 뭐하려고 그럽니까? 그렇게 말씀을 들어놓고 왜 숫자를 묻습니까? 숫자가 많으면 권력이 되는 줄 생각하는 것 아닙니까? 

“훌륭한 이근호 목사님이 강남에서 두 번이나 말씀을 전하시는데 왜 잘 알지도 못하는 정 목사가 강의하느냐?” 
-주님이 하게 하셨습니다. 
심지어 이근호 목사님의 말씀은 성령이 부어주는 말씀이기 때문에 인터넷으로 연결해서 다른 목사들은 설교를 하지 말고 이근호 목사님의 말씀을 들었으면 좋겠다고 주장하는 자도 있는 것으로 들었습니다. 생각이야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그것이 얼마나 악마적인가를 본인이 모르는 것일까요? 

그래서 나온 이단들이 우리 목사님의 말씀만이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전달 받았다고 하는 이단들 아닙니까? 신천지도 그렇고 다락방도 그렇고, 하나님의 교회도 그렇고, 지방교회도 그렇고. 이들은 모두 정답을 갖고 있습니다. 십자가 마을도 정답을 갖고 있습니까? 정답을 갖고 있다면 그 정답 안고 사시면 됩니다. 

“이근호 목사님은 찾아오는 사람들, 요청하는 사람들에게만 가서 복음을 전하는데 정목사는 왜 귀찮게 사람을 찾아 다니느냐?” 
-주님이 그런 맘을 주셨습니다. 

십자가마을 후계자 이야기를 언급하면서 저에게 본인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정말 십자가 마을을 물려 받을 생각이 없냐고?” 
-제가 왜 물려받습니까? 그것이 뭐라고 물려받습니까? 그냥 두어도 그냥 복음이 전파 될 수 있는데 말입니다. 그리고 그럴 마음도 없고, 제가 먼저 갈 수도 있는데.. 

사람들이 이런 질문들을 하는 의도가 무엇일까요? 
복음에 관심 있어서일까요 아니면? 


 *그럼에도 굳이 구원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면 사도바울의 움직임의 현상으로 인해 나타난 자들이 있었다거나, 아니면 사도바울 때문에 동원된 자들이 있었다고 봐야 되지 않는가? 저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도바울이 중요하니까. 

-사도바울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도바울과 동행하시는 주님이 중요합니다. 그러니 심판 주의 능력이 사도바울의 움직임을 통해 드러내는 겁니다. 물론 그가 전파하는 것은 십자가입니다. 


 *살면 살수록 성령 받은 사도바울의 인식에 수정이 일어나고 심화되어졌던 것처럼 우리 모두 그렇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율법에 막힌 베드로를 사도바울이 막아섰고 이방인인 고넬료가 가르쳤다. 예루살렘 선교본부를 없애니, 안디옥을 선교의 베이스캠프로 삼았다. 사도바울에게 그렇게 잘해줬던 바나바도 삐졌다. 그 외에 사도행전에서 일어난 모든 일들은 역사가 아니라 사건이다. 그래서 복음은 예수님의 십자가 영이 전하신다. 

-결국 이근호 목사님이 말씀하신 내용을 앵무새처럼 내뱉는 것으로 결론이 나는 모습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제가 이해한 이 목사님의 말씀은 십자가는 그 어느 누구도 장악할 수 없다는 말씀으로 들렸습니다. 그러니 그 십자가를 증거 하는 사도바울조차도 사라집니다. 풀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 지신 분이 친히 홀로 다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살면 살수록 더 죄가 깊어지고 죄가 더한 곳에 그리스도의 은혜가 넘칩니다. 정답을 알고 있는 자들은 이것이 지식일 뿐입니다. 그러나 본인이 말씀하신대로 이것은 사건입니다. 

 *글이나 설교에 꽂혀 있는 심판주 사상은 과연 뭘까? 복음일까? 

-십자가라는 자체가 드러내는 결과물이 심판 주입니다. 심판 주의 자리는 십자가가 만든 자리입니다. 생소한 용어, 잘 사용되지 않는 용어라 해서 너무 과하게 표현하시는 것 같습니다. 성경을 좀 더 열심히 읽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이 심판 주를 말씀합니다. 주의 이름으로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주셨습니다. 


 *십자가마을은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이 글을 쓸 수밖에 없었다. 이 글을 읽고 그냥 느낀 그대로 썼을 뿐이다. 다른 의도는 없다. 

- 다른 의도가 다분히 깔려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글을 이렇게까지 억지로 해석해서 저를 공격할 이유가 없습니다. 글을 완전히 엉터리로 읽어서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은 다분한 의도가 깔렸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내가 안 붙들어도 됩니다. 그 사상을 몰라도 됩니다. 성령이 오게 되면 죄인 되는데 무슨 앎이 필요하고 공부가 필요하고 연수가 필요합니까? 

놀라운 것은 십자가를 알았기에 바울파가 생기고 아볼로 파가 생겼습니다. 그러나 바울, 아볼로, 게바 그 어느 누구도 십자가를 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 파벌이 생겨났을까요? 

그 이유는 자신이 참 진리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십자가만을 자랑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들은 말씀의 함정에 빠져버렸습니다. 여기에서 바울은 발을 빼 버렸습니다.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았다고 말입니다.


'정석훈'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미아님 댓글2에  (0) 2018.08.14
이상규집사님 댓글에  (0) 2018.08.14
하나님께 영광-로마서강해  (0) 2018.01.26
저주 받은 자(정석훈)070326  (0) 2013.07.24
정석훈 목사님의 멋진 설교(오용익)  (0) 2013.0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