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원한 십자가 |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33 |
내가 원한 십자가
교회를 다니면서 말씀을 읽는다. 설교를 들으면서 말씀을 읽는다. 그런데 아무리 읽어도 설교하는 목사의 말과는 다르게 말씀하시는 것 같다. 그래서 책을 읽고, 주석을 읽고, 인터넷을 뒤지고, 유튜브를 헤엄친다. 그곳에서 내가 읽는, 내가 이해하는 목사님의 설교를 찾았다.
그들의 설교는 한 목소리로 기존 교회를 비판한다. 자신이 비판하는 그 비판과 동일한 비판을 가한다. 그것도 성경말씀에 근거하여서 가차 없이 공격한다.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철저하게 성경말씀에 근거하여 잘못된 것을 지적하니 주님의 말씀으로 보인다. 결국 이들은 자신이 이해하고, 납득이 되는 성경대로 설교하고 가르치는 목사에게로 향한다.
이제 이들은 그 목사와 한편이 된다. 비로소 자신은 구원 얻는 자요, 비로소 자신은 주님과 한편이 되었다. 이제부터는 사정없이 기존교회를 공격한다. ‘교회는 다 가짜다’라는 말에 백퍼션터 동의 하면서 그 외침에 동참한다. 예배당 세우는 것도 공격하고, 십일조 하는 것도 공격하고, 감사헌금, 기도, 전도하는 모든 것들이 비성경적이라고 비난한다. 기성교회에 다니는 모든 것들은 무엇을 해도 악마적이라는 것이다.
이와 달리 그곳에서 빠져나온 자신과 자신이 속한 집단만은 저들과 다르다고 한다. 심지어 어떤 자들은 자신이 속한 집단들이 아니라 자신과 자신 마음에 들도록 설교하는 목사와만 유일하게 진리라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자들은 자신들이 꿈꾸는 교회를 만들려고 한다. 목사가 없는 교회. 모두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교회를 꿈꾼다. 어떤 자들은 성경말씀대로 가르치는 교회를 꿈꾼다. 실상 성경말씀대로 하지 않는 교회는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자신이 속한 집단만이 성경말씀을 가르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이들의 적은 항상 다른 교회다. 내가 속하지 않는 집단, 내가 인정하지 않는 목사는 모두가 다 악마다.
그러면 자신은 그 어떤 교회에도 소속될 마음이 없다. 그야말로 천상천하유아독존이다. 이들은 이사야 선지자가 왜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로 들어가서 외치는지를 알지 못하는 자들이다. 어차피 청각장애인들이면 외칠 이유가 없다. 청각 장애인들에게 청각 장애인 만들기를 한다는 자체가 의미 없어 보인다. 그러나 청각 장애인을 청각 장애인 만들게 되면 짐승에게 잡아 먹혀 최종적으로 짐승으로 드러나게 된다.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증거 하기 위한 조치로 이사야는 참여된다. 이사야는 이미 정답을 알고 있다. 그러나 정답을 알고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 속으로 이사야는 합류된다. 그 합류된 자리는 어린양의 죽음을 증거하는 고난과 죽음이 일어난다.
그러나 자신이 원하는 교회, 자신이 원하는 집단, 자신이 원한 목사를 만난 자들에겐 이런 고난이 없다. 이렇게 말하면 이들은 자신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고난을 받는다고 주장할 것이다. 샤를보내 증후군이라는 것이 있다. 청각장애인인데 음악을 듣는다는 것이다. 이들은 실제로 듣지 못하면서 듣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은 육신을 입고 십자가 지신 죽음이다. 육신의 죽음만이 생명을 창조한다. 성령 받은 성도들은 모두가 다 이 죽음 속으로 합류되었다. 예수 죽인 것을 항상 짊어진 자 속에서만 예수님의 생명이 발생된다. 언약을 이루시기 위해 죽으신 예수님의 십자가, 내가 죽인 십자가, 타인이 나를 죽이는 십자가, 이 세 가지는 성도 몸에 항상 넣어 움직인다. 몸이라는 케리어 안에 이것들이 담겨 있다. 물론 그 안에 있는 것들이 외부로 나와 있고 밖의 것은 안으로 들어가 있다.
샤를보내 증후군, 성경을 읽은 모든 자들이 이와 같은 정신병을 표출한다. 육은 성경말씀을 문자로 읽기 때문이다. 영으로 읽을 능력이 없다. 그래서 문자 속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은 샤를보내 증후군이 되는 것이다.
십자가만 자랑한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샤를보내 증후군이다. 죄인이기에 어떠한 형편에 처할 줄 안다고 한 사도바울과 죄인이기에 어떠한 형편에도 처할 마음이 없다는 오늘날 자칭 복음을 안다는 신앙인들의 차이가 여기서 드러난다. 이들은 고상한 잘, 괜찮은 자리만을 찾는다. 그리고 평소에는 돈 벌기에 바쁘다. 돈 버는데 미쳐있다. 그러면서 자신에게 복음 전하는 목사는 돈을 사랑하면 안 된다고 요구한다. 십자가를 전하기에 당신만큼은 부처가 되어라는 것이다. 성불하라는 것이다. 이들에게 헌금하라는 설교를 하면 버럭 화를 낸다. 분명 어떤 형평에 처할 줄도 안다고 했는데, 헌금하는 형편에 처할 마음은 없다. 기도하는 형편에 처할 마음이 없다. 사람들이 모이는 모임에 갈 마음이 없다. 왜냐하면 그러한 곳과 그런 상황은 나와 충돌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십자가만 자랑한다는 것은 그 상황 속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일어나지 않는 현상이다. 이렇게 말하면 똑똑한 자들은 왜 당신은 자신의 의지를 내세우느냐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렇게 말하는 당신은 당신의 의지대로 살고 있지 않는가?
그래서 홀로 있는 것을 좋아한다. 그 어느 누구도 내가 아는 진리를 건드리면 가만 두지 않겠다는 것이다.
집단이 되었던 개인이 되었던 십자가만 알 뿐이다. 여전히 눈이 감겼고, 귀가 닫혔다. 샤를보내 증후군이다. 진리를 알고 싶은 욕망이 만들어낸 군상들이다. 이들은 십자가 지신 주님이 지금 친히 십자가로 일하심을 당하지 못하는 자들이다. 그러니 이들에겐 자유로움이 없다. 그래서 언제나 선악을 구분한다. 자신이 아는 진리를 근거로 선과 악을 나눈다.
당할 마음이 없다. 그래서 들리지도 않는데 들린다는 것이다. 일곱 귀신이 덮쳐버렸다.
막 살면 될 것을 이들은 막 살지 못한다. 철저하게 선악을 구분한다. 무슨 행위를 하더라도 선악을 구분한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가한 것이 아니요가 되어야 하는데, 모든 것이 가하지 않다고 해 버린다.
갈라디아서 2장에 게바의 외식 사건은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는 자로 드러나는 성령받은 자의 본보기다. 선악을 구분하는 자들은 처음부터 그런 자리에 가지 않기를 바란다. 아니면 그런 자리 가서도 외식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십자가만을 자랑토록 자기 백성을 다루신다. 막사는 자의 대표가 오순절 날 성령 충만 받은 게바다. 사도 바울이 이름을 게바라고 부르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교회가 세워진 자리가 어디인데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이다.
다른 복음 전하는 자로 드러난 게바, 십자가 피를 증거 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조건이 없다.
또 똑똑한 자들은 ‘그렇게 살자’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들어 온 적이 없기 때문에 십자가를 조롱한다.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하실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은 육이 죽는 날까지 십자가 피만을 뿜어내는 육으로 사용하신다. 성령의 인도하심이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9).” 190811소감-자신의 이야기인가? 돈을 사랑하면 안되는 형편에 처할 마음이 없네,맞네,그렇구먼... 목사는 돈을 사랑하면 안 된다고 요구한다. 십자가를 전하기에 당신만큼은 부처가 되어라는 것이다. 성불하라는 것이다. 이들에게 헌금하라는 설교를 하면 버럭 화를 낸다. 분명 어떤 형평에 처할 줄도 안다고 했는데, 헌금하는 형편에 처할 마음은 없다. 기도하는 형편에 처할 마음이 없다. 사람들이 모이는 모임에 갈 마음이 없다. 왜냐하면 그러한 곳과 그런 상황은 나와 충돌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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