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데후서는 영적 아버지인 사도바울이 영적 아들인 디모데에게 뭔가 도움이 되고자 쓴 편지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디모데후서를 읽으면서 신앙의 선후배들에게 꼭 전달하고 싶은 말씀을 뽑는다면 제법 많은 구절이 선택될 것입니다. 디모데후서는 익히 암송하고 있을 법한 인기 구절들이 많이 있으니까요.
저 역시 모임이나 글을 통해서 전달하고 싶은 어떤 ‘좋은 것’을 디모데후서에서 찾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과연 좋은 것이라는 게 뭘 의미할까요? 신화학이라는 학문이 있습니다. 신화학자들은 신화, 설화, 전설 등의 이야기를 통해서 인류가 후손들에게 좋은 것을 전달했다고 합니다. 특히 그 중 레비-스트로스 같은 구조주의자들은 이야기, 즉 서사가 일정한 구조를 갖고 있다고 하는데, 이분대립항, 중간매개자 등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분대립항은 극과 극으로 사물을 분리하는 대립적 사고방식을 의미합니다. 천국-지옥, 하늘-땅, 선-악, 좋음-나쁨, 남자-여자, 아름다움-추함 등이 그 예죠. 중간매개자는 이렇게 극과 극으로 나누어진 것들을 연결하기 위한 장치입니다. 천국-예수님-지옥, 하늘-인간-땅, 선-양심-악 등에서 예수님, 인간, 양심 등이 바로 중간매개자입니다.
구조주의자들의 논리에 따라 디모데후서를 이분대립항과 중간매개자 구조로 본다면, 좋은 복음전파자-나쁜 복음전파자라는 이분대립을 사도바울이라는 중간매개자가 해소하고 있다고 설명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럼 디모데는 자연스럽게 자신이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일을 구조적으로 배우게 됩니다. 이러한 배움은 결국 디모데에게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처한 환경이 결코 좋은 상태가 아니라는 겁니다. 사도바울은 현재 갇혀 있습니다. 사슬에 묶여 있습니다. 게다가 복음을 전했더니 모든 아시아인들이 사도바울을 버렸습니다. 버려지고 갇히고 묶여진 사람의 입에서 나온 가르침을 디모데가 자신에게 ‘좋은 것’으로 쉽게 생각할 수 있었을까요? 사도바울과 디모데 사이에 놓인 좋은 것은 분명 우리의 예상을 벗어나 있습니다.
그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구절은 아래와 같습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딤후 3:12)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노력하면 박해를 받는 구조. 모순인 것이 서로 수용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디모데후서에서 참 좋은 말씀이라고 뽑아놓은 구절들, 예컨대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딤후 1:13~14) 의 선택은 결국 박해를 받기 위함입니다. 망령된 말을 하지 않는 것도 청년의 정욕을 참는 것도 모두 박해를 향해 있습니다. 이것들 모두가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노력이니까요.
경건의 노력이 박해의 원인이 됩니다. 우리가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 것의 정체입니다. 예상치 못했던 범주 속으로 우릴 던져 버립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일이 벌어져야만 할까요? 그것은 딤후 1:9에 잘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경건의 노력을 한 마디로 정리한 것이 바로 ‘우리의 행위’입니다. 구원과 거룩의 소명은 바로 그것을 비켜갑니다. 오직 영원 전부터 예정되어 있던 예수의 은혜대로만 구원되고 거룩하게 됩니다. 결국 디모데후서의 모든 말씀은 구원이 우리의 행위대로 될 수 없고, 오직 예수님의 건져주심으로만 가능하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나의 교훈과 행실과 의향과 믿음과 오래 참음과 사랑과 인내와 박해를 받음과 고난과 또한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당한 일과 어떠한 박해를 받은 것을 네가 과연 보고 알았거니와 주께서 이 모든 것 가운데서 나를 건지셨느니라(3:10~11)
나의 교훈과 행실과 의향과 믿음과 오래 참음과 사랑 등등을 행위로서 묶어 버립니다. 이것은 그저 죄일 뿐입니다. 죄는 은혜를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 조건 없이 피 묻은 손이 그것을 건져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오직 건져내시는 분으로 등장합니다. 나는 죄인으로서 잊혀 집니다. 우리에겐 미쁨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는 나를 목적으로 역사하지 않습니다. 스스로를 스스로가 부인할 수 없는 유일한 분입니다.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딤후 2:13)
이쯤해서 글을 마무리한다면 여러분의 판단에 이 글은 좋은 글입니까, 나쁜 글입니까?
저는 나쁜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앞서 신화학자들의 서사 구조에 대해 말씀드렸는데, 그 중에 의도적으로 빼먹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모순의 조화’입니다. 경건의 노력이 박해의 원인이 되고, 죽은 자가 살리고, 묶인 자가 자유한 것과 같은 해결방법은 이미 세상 지혜도 알고 있는 전략입니다. 이런 전략을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는 종교가 불교라고 하더군요.
디모데후서를 이분대립적으로 나누고 중간매개체를 넣어 모순을 조화롭게 수용하는 방법은 다분히 불교적입니다. 이 글은 불교도의 글입니다. 사사기적으로 표현한다면, 자기에게 좋게 보이는 소견일 뿐입니다.
이 글이 여러분에게 유익한 글이 되려면 완전히 다른 경로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비밀의 경로입니다. 왜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려고 하는 자가 박해를 받는 지, 우린 모릅니다. 아무도 모릅니다. 더욱이 그것이 우리의 행위대로 구원하지 않으려는 예수 그리스도의 창세전 의지라면 비밀의 속성은 가공할 정도로 위력적입니다. 십자가의 구원이 비밀로서 여전히 현실을 도려내고 있습니다. 예수의 이름을 부른다고 아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불러도 불릴 수 없는 비밀의 이름, 그것이 바로 예수입니다. 아무리 예수의 십자가 지심만을 알기로 작정해도 그것이 “항상 배우나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는 행위였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결국 디모데후서는 설명할 수 없음을 드러내기 위해 설명한 것입니다. 침묵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증명하기 위해 웅변한 것입니다. 이런 불교적 글쓰기조차 쓰시고자 한다면 은혜로 건져내시는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기억하기 위해 쓰여 진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이나 박해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딤후 1: 1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