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키퍼가 높이 공을 차 올렸습니다. 공은 허공을 날아갑니다. 흡사 새처럼 말입니다.
마침 지나가던 새 한 마리가 축구공에게 묻습니다.
“너도 스스로 날 수 있는 새니?”
이 때, 축구공의 대답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긍정 혹은 부정이지요. 축구공이 마치 스스로 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말한다면 자신을 차 올린 골키퍼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반면, 자신은 누군가에 의해 잠시 허공에 잠시 떠 있을 뿐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입니다.
‘날 수 없는 내가 지금 잠시 허공에 있는 것은 나를 차올린 어떤 분이 따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며, 결국 나는 추락해야만 하고 그 추락으로 말미암아 내가 스스로 날 수 없었음을 모든 세상에 알릴 것입니다. 동시에 나의 추락을 통해서 나를 조정하신 그 분에게 모든 관심이 집중되게 될 것입니다.’
성도는 마치 골키퍼되신 예수님께서 세상으로 차 올린 축구공과도 같습니다. 허공의 공이 날고 있는 것처럼, 성도 역시 마치 독립적으로 살아있는 듯 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차인 날을 날 생, 날 일이라고 하여 생일이라고 이름짓습니다. 자신에게 생명이 부여되었다고 그 날을 기념하며 주위의 사람들로부터 축하한다는 인사를 받습니다.
그러나, 축구공이 스스로 날 수 있는 새가 아니듯이 성도 역시 스스로 생명을 거머진 존재가 아닙니다. 성도가 지금 살아 있는 것은 죽기 위해서입니다. 그냥 생물학적 죽음을 미루고 미루다 어쩔 수 없이 발버둥 치며 당하는 처지가 아니라, 본래 나에게는 생명이 없었음을 증명하기 위해 태어난 것입니다. 나를 차 올린 진정한 생명이 계심을 평생 증거하라고 인정사정없이 내다 버려진 것입니다. 나를 지배하고 계신 분이 죽음조차 이기신 분이심을 증거 하라고 죽음 같은 삶을 감사하며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신앙의 선배들은 한 결 같이 자신의 생일을 저주합니다. 예레미아 선지자는 이렇게 자신의 생일을 표현하도록 닦달당합니다.
저주받을 날, 내가 세상에 떨어지던 날... 모태에서 나오기 전에 나를 죽이셨던들
어머니 몸이 나의 무덤이 되어 언제까지나 태속에 있었을 것을!
어찌하여 모태에서 나와 고생길에 들어서 이 어려운 일을 당하게 되었을까?
이렇게 수모를 받으며 생애를 끝마쳐야 하는가!
(예레미아 20:14, 17-18, 「예언자들」에서 인용)
전도서에는 사람이 비록 백 명의 자녀를 낳고 장수한다고 해도 그가 매장되지 못했다면, 즉 아직 죽지 않았다면 빛 한 번 보지 못한 채 죽은 낙태된 자가 낫다고 합니다.(전 6:3)
이렇듯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 사랑을 온 몸에 받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자신의 생일(生日)을 사일(死日)로 깨닫게 되고 낙태된 자의 평안함을 부러워하는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 목자를 따르는 양에게는 쉴만한 물가가 있는 푸른 초장이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선택할 권리가 없습니다. 단지 목자의 지팡이가 툭툭 치시는대로 발길을 옮길 뿐입니다. 그것이 바로 안위함이라고 감사하면서 말입니다.
내 삶인 줄 알았으나 모든 선택권을 목자에게 압류당한 자들 속에는 구약의 선지자들의 내면에서 그들의 생일조차 저주하게 했던 바로 그 주인공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 분의 이름은 바로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성령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은 선지자 속에서 오직 그리스도의 영광과 고난만을 상고하도록 끌어당겼으며, 선지자의 몸에 그 고난을 문신처럼 새겨넣었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는 것입니다. 주의 이름이 이미 몸의 주인입니다.
‘다시는 주의 이름을 입밖에 내지 말자. 주의 이름으로 하던 말을 이제는 그만두자.’ 하여도
뼛속에 갇혀 있던 주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라 견디다 못해 저는 손을 들고 맙니다.(예레미아 20:9, 「예언자들」에서 인용)
그러나 요즘 말씀을 깨달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자신이 말씀을 소유해 버린 것입니다. 말씀에 의해 자신의 심장이 터지고 뼈마디가 갈라지는 번제물의 처지가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갈기갈기 찢어 죽인 그 처음 아담의 모습 그대로인 것입니다. 내가 살아가는데 도움만 된다면 언제 어디서나 말씀을 난도질합니다. 십자가의 그 현장에서 단 한걸음도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아들을 살해한 공동정범들입니다.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살육의 현장에서 귀한 주님의 은혜로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매달린 성도들에게 위로가 되는 말씀은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는 것이라는 고백입니다. 태어나는 날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할 용도로 태어나 어쩌면 낙태된 것보다도 못한 것 같지만, 나를 지배하고 계신 그 분의 사랑 덕분에 감히 범사에 감사하게 되어 버렸노라고 찬양하는 삶이 바로 성도의 삶입니다.
성도의 삶은 주님의 옆구리와 손과 발을 사정없이 찔렀던 위치에서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버린 위치로 날마다 이동당하는 삶입니다. 나에게 불리하다며 내 손에 들렸던 창과 칼로 도살하듯 베어낸 그 분의 살과 피 때문에 이제서야 나의 죄를 알았노라고 털어놓는 삶입니다. 펑 차일 때마다 나를 차 올려주신 분만 이야기하게 된 삶입니다. 생일(生日)을 사일(死日)로 기억하는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