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인간의 문자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인간들은 그 문자를 해석하고 자신의 말로 풀어 성경의 진정한 의미를 전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의 모든 언어는 은유라는 점입니다. 은유라는 말은 어떤 실체(A)를 그려냄과 동시에 A 자체는 숨기는 기능을 합니다. A의 가장 도드라지는 특징을 잡아 그것을 표현한 탓에 A의 전체적 의미는 몰각되어 버립니다.
인간의 언어가 은유인 탓에 어떤 특징은 더욱 잘 표현되고 발달하는 반면, 그것에서 제외된 의미는 점점 쇠퇴하여 아예 없어지기까지 합니다. 이러한 발달과 소멸로 말이암아 언어는 점점 변화되고 결국 처음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 정말 A였을까 의구심이 들 정도로 진의(眞意)가 크게 훼손되고 맙니다.
언어의 발달과 소멸을 결정하는 기준은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의 변화와 이것에 대응해 온 인간의 경험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렇게 행동했을 때, 가장 인간에게 유리했다는 것이 집약되고 이 집약된 것을 드러내기 위해 언어에 수정이 가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수정이 처음에는 국지적으로 일부 사람들에게만 일어날 수 있으나, 전체 구성원들의 경험칙에도 부합하면 힘을 얻게 되고 결국 그 언어의 용법으로 굳어집니다.
이렇게 굳어진 용법은 그 속에 녹아있는 인간의 행위 축적분(역사)을 등에 업은 채, 전 세대에서 후 세대로 자연스럽게 학습되어 오고 후 세대 역시 자연스럽게 자신의 행위가치를 그 언어에 반영하게 됩니다. 이런 시간이 오래 흐르면, 같은 단어내에서도 일치하는 부분과 이질적이 부분이 공존하게 됩니다. 같은 문화권에서 같은 경험을 많이 하면 할수록 일치하는 부분이 커질 것이고, 다른 문화권에서 다른 경험을 많이 하면 할수록 이질적인 부분이 커질 것입니다.
신이라는 단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신이라는 단어만큼 많은 이미지를 포함하고 있는 단어도 드물 것입니다. 그러나 신이라는 단어에 포함된 그 많은 이미지에는 공통코드가 있습니다. 이것을 알면 신이라는 단어가 지금까지 엄청난 힘을 발휘하게 된 이유가 쉽게 포착됩니다. 그것은 바로 "생존"입니다. 다른 말로하면 "죽음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존재를 완전하게 소멸하는 죽음 앞에 인류는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형태가 무엇이던(육신의 부활이던 영의 부활이던) 그 방법이 어떤 것이던(경전읽기, 예배하기, 참선하기, 고행하기 등) 나의 생존을 돕는 도우미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 바로 신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이미 존재하고 있다. 그런데 내 존재를 없애버리는 죽음도 존재한다. 나는 죽기 싫다. 이 욕망을 긍정해 주고, 영원히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는 누군가 필요하다! 그렇게 발명된 것이 신입니다. 그 신으로부터 파생된 욕망의 집합체가 바로 종교라는 것입니다. 무조건 나는 살아 남아야 겠다는 욕망의 배출구, 그것이 신입니다.
선지자는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 자신의 경험을 송두리채 압류당한 자들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는 그 진의를 표현하고자 그동안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인간적 언어의 기초와는 전혀 다른 현실을 경험하면서 기록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말한 복, 저주, 은혜, 사랑, 징계, 율법 등의 단어는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 지배를 받고 있지 않은 인간의 언어와는 전혀 다른 뜻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인간의 언어로 기록된 탓에 은유의 특성이 유감없이 발휘되면서 인간들은 성경을 읽고 해석하고 이해했다고 주장할 수 있게 되어버립니다. 성경을 기록한 배후는 그리스도의 영인 반면에, 그것을 이해하겠다는 쪽의 배후는 그리스도의 원수의 영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죄에 의해 구축된 행위의 누적분으로써 그 유용성만을 강조하여 발달되어 온 언어내에서 그 죄의 권세를 멸하는 권세에 의해 작성된 성경은 애시당초 인간의 이해와 동의를 얻어내려는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인간의 문자로 기록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오히려 그리스도 예수라는 비밀이 인간에게 영원히 비밀로 남겨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이해하고 이해한 대로 그대로 행동했다는 허상만을 끌어안고 좋아하도록 버려두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아주 자신있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귀 있는 자는 들을찌어다."
정리하자면, 성경의 언어는 이중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죄인에게 쉽게 발각되어 그가 죄인됨을 마음껏 발산할 수 있도록 하는 죄양산 부분과 그 어떠한 죄이던지 완벽하게 용서하신 십자가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사랑 부분이 바로 그것입니다. 복, 사랑, 은혜, 저주, 율법, 행위, 믿음 등 그 어떤 성경적 의미도 성도에게는 나의 죄인의 괴수됨을 확증하는 증거요, 동시에 그 죄인의 괴수까지 사랑하신 십자가지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확증하는 증거가 됩니다.
신이라는 단어 속에 숨겨진 지독한 인간의 자기애와 욕망을 내 안에서 발견한 자라면,
예수를 신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예수는 신이 아닙니다. 예수는 신을 완벽하게 철거하신 분입니다.
우리가 열망하는 신의 자리를, 결핍의 웅덩이를 메워주시는 분으로 착각하는 것은
아직도 성경 속의 숱한 죄와 십자가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경해석은 피비린내가 물씬 풍겨야 합니다.
내 죄로 인한 하나님 아들의 피 냄새 말입니다.
나에게 늘 핍박받는 모습으로 발견되는 하나님! 다음은 이것을 아주 잘 보여줍니다.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행 9: 3, 4, 5)
성경에는 십자가지신 예수님과 그를 죽인 하나님의 원수가 공존하고 있습니다. 놀랍게도, 성도는 하나님의 원수들 사이로 자신의 얼굴을 발견합니다. 더 놀라운 것은 하나님의 원수 편에서 활개를 치고 있는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 그리스도의 몸된 새로운 나도 만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만남 가운데 피어나는 것이 바로 감사라는 관계입니다. 나는 저기 저렇게 하나님의 원수가 맞다는 회개와 함께 감사가 피어납니다. 그리스도의 몸쪽에 편입된 일에 나는 아무 공로 없고 오직 십자가 지신 예수의 공로만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는 신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평생 나의 결핍을 해결해주는 신의 자리에 예수를 감금할 것입니다.
성도는 예수를 감금하고 있는 하나님의 원수된 나를 보면서 십자가 공로만을 찬양하게 됩니다.
그 찬양은 다시 한번 아래의 대화가 되풀이 되면서 울립니다.
"성도야 성도야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주여 뉘시오니이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