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윤진

예수를 신이라고 할 수 있는가?

아빠와 함께 2018. 2. 23. 13:23
2008-02-25 22:09:13조회 : 4814         
예수를 신(神)이라고 할 수 있는가?이름 : 박윤진 (IP:121.88.9.186)

성경은 인간의 문자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인간들은 그 문자를 해석하고 자신의 말로 풀어 성경의 진정한 의미를 전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의 모든 언어는 은유라는 점입니다. 은유라는 말은 어떤 실체(A)를 그려냄과 동시에 A 자체는 숨기는 기능을 합니다. A의 가장 도드라지는 특징을 잡아 그것을 표현한 탓에 A의 전체적 의미는 몰각되어 버립니다.


인간의 언어가 은유인 탓에 어떤 특징은 더욱 잘 표현되고 발달하는 반면, 그것에서 제외된 의미는 점점 쇠퇴하여 아예 없어지기까지 합니다. 이러한 발달과 소멸로 말이암아 언어는 점점 변화되고 결국 처음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 정말 A였을까 의구심이 들 정도로 진의(眞意)가 크게 훼손되고 맙니다.


언어의 발달과 소멸을 결정하는 기준은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의 변화와 이것에 대응해 온 인간의 경험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렇게 행동했을 때, 가장 인간에게 유리했다는 것이 집약되고 이 집약된 것을 드러내기 위해 언어에 수정이 가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수정이 처음에는 국지적으로 일부 사람들에게만 일어날 수 있으나, 전체 구성원들의 경험칙에도 부합하면 힘을 얻게 되고 결국 그 언어의 용법으로 굳어집니다.


이렇게 굳어진 용법은 그 속에 녹아있는 인간의 행위 축적분(역사)을 등에 업은 채, 전 세대에서 후 세대로 자연스럽게 학습되어 오고 후 세대 역시 자연스럽게 자신의 행위가치를 그 언어에 반영하게 됩니다. 이런 시간이 오래 흐르면, 같은 단어내에서도 일치하는 부분과 이질적이 부분이 공존하게 됩니다. 같은 문화권에서 같은 경험을 많이 하면 할수록 일치하는 부분이 커질 것이고, 다른 문화권에서 다른 경험을 많이 하면 할수록 이질적인 부분이 커질 것입니다.


신이라는 단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신이라는 단어만큼 많은 이미지를 포함하고 있는 단어도 드물 것입니다. 그러나 신이라는 단어에 포함된 그 많은 이미지에는 공통코드가 있습니다. 이것을 알면 신이라는 단어가 지금까지 엄청난 힘을 발휘하게 된 이유가 쉽게 포착됩니다. 그것은 바로 "생존"입니다. 다른 말로하면 "죽음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존재를 완전하게 소멸하는 죽음 앞에 인류는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형태가 무엇이던(육신의 부활이던 영의 부활이던) 그 방법이 어떤 것이던(경전읽기, 예배하기, 참선하기, 고행하기 등) 나의 생존을 돕는 도우미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 바로 신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이미 존재하고 있다. 그런데 내 존재를 없애버리는 죽음도 존재한다. 나는 죽기 싫다. 이 욕망을 긍정해 주고, 영원히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는 누군가 필요하다! 그렇게 발명된 것이 신입니다. 그 신으로부터 파생된 욕망의 집합체가 바로 종교라는 것입니다. 무조건 나는 살아 남아야 겠다는 욕망의 배출구, 그것이 신입니다.


선지자는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 자신의 경험을 송두리채 압류당한 자들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는 그 진의를 표현하고자 그동안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인간적 언어의 기초와는 전혀 다른 현실을 경험하면서 기록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말한 복, 저주, 은혜, 사랑, 징계, 율법 등의 단어는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 지배를 받고 있지 않은 인간의 언어와는 전혀 다른 뜻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인간의 언어로 기록된 탓에 은유의 특성이 유감없이 발휘되면서 인간들은 성경을 읽고 해석하고 이해했다고 주장할 수 있게 되어버립니다. 성경을 기록한 배후는 그리스도의 영인 반면에, 그것을 이해하겠다는 쪽의 배후는 그리스도의 원수의 영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죄에 의해 구축된 행위의 누적분으로써 그 유용성만을 강조하여 발달되어 온 언어내에서 그 죄의 권세를 멸하는 권세에 의해 작성된 성경은 애시당초 인간의 이해와 동의를 얻어내려는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인간의 문자로 기록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오히려 그리스도 예수라는 비밀이 인간에게 영원히 비밀로 남겨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이해하고 이해한 대로 그대로 행동했다는 허상만을 끌어안고 좋아하도록 버려두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아주 자신있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귀 있는 자는 들을찌어다."


정리하자면, 성경의 언어는 이중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죄인에게 쉽게 발각되어 그가 죄인됨을 마음껏 발산할 수 있도록 하는 죄양산 부분과 그 어떠한 죄이던지 완벽하게 용서하신 십자가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사랑 부분이 바로 그것입니다. 복, 사랑, 은혜, 저주, 율법, 행위, 믿음 등 그 어떤 성경적 의미도 성도에게는 나의 죄인의 괴수됨을 확증하는 증거요, 동시에 그 죄인의 괴수까지 사랑하신 십자가지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확증하는 증거가 됩니다.


신이라는 단어 속에 숨겨진 지독한 인간의 자기애와 욕망을 내 안에서 발견한 자라면, 

예수를 신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예수는 신이 아닙니다. 예수는 신을 완벽하게 철거하신 분입니다. 

우리가 열망하는 신의 자리를, 결핍의 웅덩이를 메워주시는 분으로 착각하는 것은 

아직도 성경 속의 숱한 죄와 십자가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경해석은 피비린내가 물씬 풍겨야 합니다. 

내 죄로 인한 하나님 아들의 피 냄새 말입니다.


나에게 늘 핍박받는 모습으로 발견되는 하나님! 다음은 이것을 아주 잘 보여줍니다.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행 9: 3, 4, 5)


성경에는 십자가지신 예수님과 그를 죽인 하나님의 원수가 공존하고 있습니다. 놀랍게도, 성도는 하나님의 원수들 사이로 자신의 얼굴을 발견합니다. 더 놀라운 것은 하나님의 원수 편에서 활개를 치고 있는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 그리스도의 몸된 새로운 나도 만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만남 가운데 피어나는 것이 바로 감사라는 관계입니다. 나는 저기 저렇게 하나님의 원수가 맞다는 회개와 함께 감사가 피어납니다. 그리스도의 몸쪽에 편입된 일에 나는 아무 공로 없고 오직 십자가 지신 예수의 공로만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는 신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평생 나의 결핍을 해결해주는 신의 자리에 예수를 감금할 것입니다. 

성도는 예수를 감금하고 있는 하나님의 원수된 나를 보면서 십자가 공로만을 찬양하게 됩니다. 

그 찬양은 다시 한번 아래의 대화가 되풀이 되면서 울립니다.


"성도야 성도야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주여 뉘시오니이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이근호 (IP:117.♡.140.48)08-02-26 08:48 

하나님에 의해 선택받은 자는 '불가능한 영역' 안으로 들어와 버렸다. 홍해 바다가 갈라지는 것이 인간의 능력으로 불가능하듯이, 여리고성 무너짐과 태양이 멈춤이 불가능하고 앗수르 군대가 하루밤에 144,000명이 죽은 사건이 불가능하듯이, 별 하나가 동방박사를 인도하는 것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듯이, 오늘날 성도 한 사람이 등장한다는 것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섬김과 봉사와 희생과 사랑을 총동원해도 성도 하나 나타난다는 보장도 없고 붙잡아 둘 재주도 없다.  
 따라서 기껏 한다는 것이 '성도 조작'이다. 서로 기만하면서까지 '유사 성도'로 행세해 보자는 식이다. 만날 때에 복음 이야기로만 주화제가 되어 주고 받는다. 그러다가 자신의 존재를 남이 안 알아준다든지 자신의 위신을 훼손했다 손치면 당장 자기 정당성을 크게 외치면서 그의 입에서 더이상 복음에 관한 이야기는 소멸되어 버린다. 애초부터 복음에는 관심 없었다. 그는 '기적의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복음이라는 거죽을 덮어쓰고 흉내를 내면서 주위를 속이면서 살아온 자였다. 오로지 자신의 가능성에만 관심을 가진 자였다.   

하나님이 제공하신 '불가능 영역'을 사람들은 싫어하고 무서워한다. 아무리 해도 성과가 전혀 없다는 점을,그 사실을 심히 무서워한다. 왜냐하면 자기 존재 가치가 죽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렇다! 불가능한 영역에 들어온 자는 이미 '죽은자'이다. 남은 것은 '십자가 체험' 뿐이다. 복음을 위하여 희생하고 봉사하고 헌신하면서 예수님의 쓴 잔을 마셔대는 날들 뿐이다. (마 20:23) 그것이 다음의 말씀의 성취다. 그런데 이것조차 인간의 힘으로 불가능하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 2:21)

 박윤진 (IP:210.♡.130.143)08-02-29 09:39 
성도는 성령을 통해 예수 안이라는 구원의 영역이 불가능의 영역임을 인식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의 행동으로 성취 가능하다고 여겼던 모든 성경적 의미달성이 허상이며 착각이었음을 함께 깨닫게 됩니다. 반대로, 성도가 아닌 자는 불가능의 영역 전체를 자신의 가능성이라는 허상에 속고 있으므로 불가능의 영역이 있다는 것 조차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거룩도 그렇게 가능의 영역에 놓여 있기에 자신의 행위만이 거룩 도달의 성패를 좌우할 것이라고 깊이 확신하게 됩니다. 

성도는 불가능의 영역안에서 지금껏 가능 영역이라고 속았던 허상의 본질까지 알게 되었습니다. 불가능의 영역에 있다는 것은 죽은 자의 영역에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성도가 생물학적으로 죽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성도의 모든 행위가 아무 소용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즉, 죽은 자의 영역이라고 할 때, 이 죽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인하여 유발된 죽음이어야 하지, 자신이 선택한 혹은 자신이 설정한 죽음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은 자는 (가능 영역이었다면 성패의 핵심 열쇠가 되었을) 자신의 행위가 예수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장본인이며, 그 죽음의 영역안에서까지 자신의 행위로 죄인의 괴수로서의 면모를 끊임없이 확인하는 것입니다. 죽은 자가 무엇을 확인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죽음에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죽음에 포함된 성도에게 무엇을 확인시키고 계신가가 바로 핵심인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오직 십자가지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그 죄인의 괴수를 용서하시는 사랑의 은혜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지금껏 인간들이 사용해 온 ‘신’이라는 단어로 덮어쓰는 것은 애시당초 틀린 일이라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성도 조작’ 혹은 ‘유사 성도’라는 의미는 ‘참 성도를 알고 있음’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지 않음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조작과 유사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는 참 성도까지 행위 영역에서 굴절된 가상적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불가능의 영역에 들어가 있는 자만이 불가능과 가능의 영역을 모두 알 수 있듯이, 참 성도만이 성도 조작과 유사 성도를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이 정립한 ‘참 성도는 이러이러하다’ 라는 것까지 예수의 피에 의해 무너져 내려야 할 대상이라는 사실이 인정되는 것입니다. 

어떠한 방법으로 인정된다는 말입니까? 내가 바로 매일 같이 성도 조작에 나서고 있는 유사 성도이기 때문입니다. 참 성도라는 존재는 예수의 죽음의 영역안에서 자신이 하고 있는 조작과 유사행동이 이미 예수의 공로만을 증거하기 위한 수많은 죄의 행위양상 중 하나에 불과하다고 고백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 피만이 나를 구원한다고 앵무새처럼 내뱉어도 그 행위 때문에 구원받지 못합니다. 오히려 정죄받을 자임이 밝히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그 죄까지 용서하신다고 하면 아무도 막을 수 없지만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