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윤진

법에 의해 포위된 상가집 풍경

아빠와 함께 2018. 2. 23. 14:16
2007-09-21 12:47:20조회 : 4310         
법(法)에 포위된 상가(喪家)집 풍경이름 : 박윤진 (IP:210.182.130.66)

상가집에 다녀왔습니다. 회사 동료 모친상이었습니다. 회사 사람들이 첫날 많이 찾았습니다. 왜냐하면 내일은 명절 연휴가 시작되는 금요일이라 교통사정도 어렵고 다른 스케줄도 이미 꽉 들어찬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모두들 동의하는 바, 문상이라는 것이 성경에서 말씀하시듯 '우리의 마지막 모습'을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산 사람과의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하는 차원(예컨대, 내가 같은 일을 당했을 때 그 사람도 올 것이라는 기대감, 혹은 이미 그 사람이 와 주었기 때문에 이에 보답하는 차원 등)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니만큼 산 사람의 여건이 망자의 넋을 위로하는 것보다 항상 우월합니다.


상주와 총무과장은 휴가일수를 확정하기 위해 이야기를 나누고, 문상온 사람들은 집으로 어떻게 돌아갈까 차를 섭외하고 어떤 사람은 술에 취해 자신의 어머니 생각이 났는지 울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음식차리기 바쁩니다. 상가집 역시 죽음이 살아있음을 이기지 못합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산 사람이 먼저입니다.


상주들이 염을 마치고 돌아왔나 봅니다. 처음에는 죽음이 막연하게 느껴지다가 염을 하고 나오면 슬픔을 억누르지 못하고 오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통곡합니다. 갑자기 죽음이 살아있음을 이기는 듯한 광경이 벌어집니다. 산 자들의 온갖 잡다한 요청과 사정들이 가족들의 오열하는 울음 속에 모두 파 묻여 버립니다. 모두들 숙연해 집니다. 고개를 떨굽니다. 이제 자신들의 본질과 아주 잠깐 상봉하게 되었나요?


그런데, 참으로 어이없고 웃지 못한 일대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초상을 치루는 전문가로서 위치하는 집안의 어떤 어른께서 오열하는 가족들을 향하여 한수 가르치듯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울지만 말고, 곡을 해야지!"

그 순간 그렇게 슬프게 울던 가족 중 일부가 '곡하는 흉내'를 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아주 잠시 어안이 벙벙하였습니다. 그리고 곧 살짝 웃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법(法)에 얼마나 약한지, 아니 사람이란 법(法)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똑똑히 목격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천천히 상가집을 돌아보았습니다. 사람들이 찾아오고, 상주들은 상복을 입고, 염을 하고, 문상을 하고, 향을 켜놓고, 음식을 내놓고, 휴가일수를 정하고, 돌아갈 방법을 확인하는 모습들이 모두 법에 얽매여 있는 모습입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산 사람 중심으로 정해진 어떤 법들이 유구한 시간을 통해 다듬어지고 형식화되고 실용화되어서 여전히 인간들의 의사결정내용과 그에 따른 행위를 다스리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그 법에 따라 행동해야 마음에 편안함을 얻습니다. 내 행위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법을 준수함이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짐으로써 상호간의 인정과 동의와 수렴과 평가가 이루어집니다. 결국 법은 살아있는 나를 드러내는 공인된 통로인 것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괜찮은 인간인지 법을 통해 타인에게 알리고 타인으로부터 약속된 평가를 얻어내는 것입니다. 나 여기 잘 살아있음을 광고하기 위한 기준이 다름아닌 법인 것입니다.


인간은 법 때문에 죽음이라는 본질과의 짧은 만남의 순간조차 자신을 포장하게 되어버린 처지입니다. 마음껏 울지도 못합니다. 곡을 해야한다는 법과 충돌합니다. 그 법에 충실하기 위해 자신이 나름 알고있는 '곡하는 법'을 풀어내 봅니다. 다시 법의 전문가에게 교육받고 수정받습니다. 다시 해 봅니다. 그래서 좋은 평가를 받아냅니다. '참 슬프게 곡 잘 하는 구먼.....'


인간은 법에 의해 죽음조차 살아있음을 자랑하는 계기로 삼아버립니다. 여기서 자유로운 얼굴은 영정속의 얼굴 뿐입니다. 곡을 해야 하는 법, 상복을 입어야 하는 법, 문상하는 법, 서로 살아있기 때문에 주고받아야 하는 거래의 법으로부터 자유로운 오직 한 사람, 그 사람은 죽은 사람뿐입니다.


그렇다면 영정 너머의 세계는 어떤 법이 다스리고 있을까요? 인간에게 한 번 죽는 것은 정해 놓으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심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기준으로 벌어집니다. 

그 기준을 언약속에 담아 단 한번도 취소나 후회하지 않으시고 성실히 일하신 결과, 마침내 다 이루었다고 선포하신 그 분에 의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심판은 작동될 것입니다.


곡을 아무리 잘 해도 소용없습니다. 부지런히 상가집에 찾아다닌 것도 소용없습니다. 교회 출석율도 헌금의 총합도 노력봉사의 세부내역도 소용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것들은 법이 만들어낸 환상에 이끌려 허우적거린 인간의 자기 긍정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부정해야만 했던 하나님 아들의 사랑의 법만이 우주를 지배하는 유일한 법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법은 법과 그것을 지켜야 하는 어떤 주체를 별도로 남겨두지 않고, 그 주체 자체를 법과 일치시켜버립니다. 그 방법은 사랑의 법을 제정하신 분의 죽음과 연합하는 방법 뿐입니다. 십자가의 죽음과 연합된 사람만이 은혜의 법의 통치를 받는데, 통치 받음을 우리에게 확실히 인식시키기 위해 죄와 사망의 법이 마치 여전히 유효한 것처럼 우리 죽을 육체를 겨누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쏘아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은혜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 위에서 이미 속죄되었음을 확인시키면서 '죄와 상관없음'을 선언하기 때문입니다.


'죄와 상관없음'이 선언되기 위해서 '죄와 상관있음'과 똑같은 환경이 설정되고 이 과정에서 죄와 상관없음을 홀로 이루어내신 '십자가 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만 찬양받게 되는 것입니다. 법에 의해 살고 법에 의해 인정받고 싶어 발버둥치다가 결국 법에 의해 버림받는 처지에 있는 벌레같은 죄인에게 하나님 아들의 피가 뿌려졌다는 사실, 이것을 누가 믿을 수 있겠습니까? 오직 믿음이라는 선물이 들려진 자들 뿐입니다.

 관리자 (IP:124.♡.87.70)07-09-21 23:45 
박철수 감독 학생부군신위 (1996, Farewell My Darling) 의 영화를 보면 제사를 통한 인간의 단면을 웃지 못할 웃끼는 코메디로써 나타납니다. 글을 읽고 이 영화가 생각 나더군요.
 이근호 (IP:117.♡.144.217)07-09-24 07:44 
우리 내부에서 법을 만들어냅니다. 법이 없으면 '자기 의'와 '자기 죄' 사이를 구분 지을 수가 없고, 그런 식으로 '자기 의로움'을 따로 챙기고 확인하지 아니하면 본인이 세상 사는 보람을 찾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항상 "내가 잘했나?", 혹은 "내가 못했나?"를 돌아보면서 그 차이나는 의로움만이 세상을 사는 힘으로 작용합니다. 최선을 다 하는 것, 이것은 딴 게 아니라 이 세상을 내가 만든 법 중심으로 이해하겠다는 본성입니다. 성경을 버리고, 율법을 버려도 또 자체적으로 법을 쉴새없이 생산해서 자기만의 자기 의를 간직하려는 자들, 이들이 인간들입니다. 십자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쳐다볼 때마다 우리는 다시금 죄인의 괴수임을 압니다.

 박윤진 (IP:58.♡.52.254)07-09-26 10:28 

'율법외의 한 의'가 어떤 의미인지 새삼 머리가 쭈뼛 설 정도입니다.
의는 인간 밖에 위치하시면서 

우리가 가진 법과 그것에 의해 양산된 의가 결국 하나님의 아들을 살해할 정도까지 

스스로를 신으로 삼고 싶어하는 죄인의 괴수임을 너무나도 잘 지적해 주십니다.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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