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7장은 멜기세덱에 대한 설명이다. 멜기세덱은 구약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라고 한다. 멜기세덱이 구약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라고? 그래서 그게 뭐 어떻다는 거냐? 그것이 정확한 사실이라 하더라도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냐고?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다. 의의 왕이요, 평강의 왕이다. 아, 이건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하는 구나. 나하고 전혀 상관없는 자의 이름이 정의와 평화의 왕이라니.
의와 평강의 왕이라는 그 이름이 현재 나에게 정의롭지도, 평화스럽지도 않은 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부모, 아내, 자식이 아프고 사업이 망하는 등 그 어느 하나 내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 속에서 의는 무엇이고, 평강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내 인생을 정의롭게도, 평화롭게도 만들지 못하는 의의 왕과 평강의 왕은 왜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가?
성경말씀과의 불화(不和)! 성경말씀과 내가 불일치하고 있는 현장. 이를 해결하기 위해 어디 한 번 따져보자. 단순한 가정으로부터 시작하자. 하나님 말씀과 나는 왜 불일치하고 있는가?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하나님 말씀이 잘못되었거나 내가 잘못되었거나.
하나님 말씀이 거짓인가? 이 질문을 누구에게 해야 할까? 하나님? 자기가 한 말을 스스로 거짓말이라고 할리 없지 않은가? 그럼 인간들에게 이 질문을 해야 할까? 말이 인간이지 그 안에는 60억 명 이상이 바글바글 있다. 어느 한 사람을 꼭 짚어 질문할 상황이 아니다. 어떤 한 사람을 대표로 뽑는 순간 수십억명은 수십조의 이해관계를 파생시킨다. 누구는 거짓이라고 하고, 누구는 참말이라고 하리라. 대답을 확정할 수 없는 대혼란에 빠진다. 결국 ‘하나님 말씀이 거짓이냐?’라는 질문은 대혼란만 만든다.
남은 하나는 나 자신에 대한 의심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시대의 생산물이다. 생물학적으로는 부모와 조상을 닮았지만,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은 지금 이 시대를 쏙 빼닮았다. 그럼 이 시대는 어떻게 생겼나? 이 시대를 구성하는 있는 세 가지 큰 틀은 정치, 경제 그리고 철학이다. 현대는, 정치는 민주주의, 경제는 자본주의, 철학은 공리주의가 득세하고 있다. 세 가지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모두 많은 숫자에 의와 평화를 선사한다. 민주주의는 대중적인 인기가 많은 쪽에게, 자본주의는 돈이 많은 쪽에게, 공지주의는 최대 다수에게 최대 행복을 선물한다.
문제는 대중, 자본, 최대 다수 속에는 그 어떤 구체적인 인물도 살 수 없는 진공상태라는 사실이다. 나를 포함해서 내 부모, 아내, 자식, 동료, 이웃 그 누구도 그 안에서 온전한 인격체로서 평가되지 않는다. 숫자일 뿐이다. 몇 % 중에 한 귀퉁이일 뿐이다.
나는 거짓인가 질문했더니 내가 없고 숫자만 남는 상황에 봉착한다. 나는 그저 숫자로서만 존재할 뿐 그 어떤 분야에서도 독자적인 의미를 만들어 내지 못하고 있다. 정치에서는 유권자로, 경제에서는 소비자로, 철학에서는 다수 혹은 소수자라는 멍에를 한 순간도 벗어나지 못한다.
이제 멜기세덱, 살렘의 왕이 나에게 더 이상 의의 왕도 평강의 왕도 아닌 이유가 밝혀졌다. 나란 아예 없다. 나는 없고, 유권자, 소비자, 최대 다수로 표현되는 이미지만 있다. 이 세상은 내가 필요하지 않다. 나 역시 이를 안다. 나는 필요할 때마다 지속적으로 자라고 베어지길 반복하는 버섯일 뿐이다. 버려지면 버려질수록 반대급부도 커져 간다. 나를 버리는 세상 속에서 죽을힘을 다해 나를 찾고 싶어 하는 인간. 나를 좀 인정해 달라는 하소연만 커져 간다. 이 때 종교가 유혹한다. 너를 구원해 줄게.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만나는 나는 바로 이런 처지에 있다. 나를 채워 넣고 나를 인정해 줄, 즉 나를 구원해 줄 누군가가 필요하다. 아무라도 좋다. 나만 인정해 준다면.
아무리 채워도 새기만 하는 나. 성경은 나를 주워 담아 주지 않는다. 오히려 단번에 그리고 영원히 용서하신 십자가와 대조하면서 나의 이미지마저 갈기갈기 찢어 흩어 놓는다. 찢어진 이미지의 막에서 돌출되어 나온 그것이 바로 죄인이다. 죄인은 실체다. 이미지가 아니다.
우리는 모두 죄의 종 아니면 의의 종이다. 실체이신 십자가 지신 예수님께서 상대해 주는 죄인. 그가 의의 종으로 실체다. 십자가 지신 예수는 죄인을 부르러 이 세상에 오셨다. 그는 나라는 욕망 속에서 피묻은 손으로 죄인을 꺼낸다. 그리고 용서하신다, 단번에 영원히! 나는 죄인 속에서 실존한다.
그 실존은 십자가 지신 분의 공로로 사랑의 증거물이 된다. 쉼 없이 죄인에서 의인으로 전화시키는 힘! 그것이 하나님의 지혜요, 능력인 십자가다. 그 외의 사태는 모두 죄를 구성하는 이미지일 뿐이다. 용서가 없는 죄인처럼 무의미한 것이 있을까? 죄인 없는 용서처럼 공허한 것이 또 있을까? 사도 바울이 십자가 말고 또 무엇을 자랑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