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한 뜻

몸-이근호120804

아빠와 함께 2013. 4. 3. 17:34

서울 의존교회120713a (몸)―이 근호 목사

 

살전 4:9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것이 없음은 너희가 친히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

살전 4:10 너희가 온 마게도냐 모든 형제를 대하여 과연 이것을 행하도다 형제들아 권하노니 더 많이 하고

살전 4:11 또 너희에게 명한것 같이 종용하여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살전 4:12 이는 외인을 대하여 단정히 행하고 또한 아무 궁핍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여기 마게도냐라고 되어 있는데 성경에 지명이 나올 때는 그 지명이 그냥 지명이 아니고 그냥 장소가 아니고 그냥 공간이 아니고 무슨 일이 벌어진 공간, 장소 어떤 일이 벌어졌다는 거죠. 마게도냐가 어디 있느냐 하면 여기에 이탈리아 있고 아드리아파타가 있고 이쪽에 마게도냐가 현재 그리스라는 나라 거든요 북쪽을 마게도냐라 하고 남쪽을 아가야라고 합니다. 건너는 뭐냐 하면 지금의 터키죠. 터키를 옛날에는 뭐라 했느냐 하면 작은 아시아, 소 아시아라고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성경에서는 소아시아라고 할 때는 전체 중국, 일본, 인도를 다 합쳐 아시아라 하지 않고 터키를 소아시아라고 하고 시리야 쪽을 아시아라고 하는 거예요 이것은 지리적으로 옳고 그름을 떠나서 어떤 일이 거쳐 지나간 거예요 일이 벌어진겁니다. 여기 마게도냐라는 이 곳이 뭔가 어떤 일이 벌어졌었어요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마게도냐라고 일방적으로 보면 마게도냐라는 지역에는 나무도 있을 것이고 거기에 쥐도 있을 것이고 고양이도 있을 것이고 건물도 있을 것이고 마게도냐라고 하면 거기에 있는 모든 것을 통합해서 마게도냐라고 할 수 있는데 사도 바울은 마게도냐를 그렇게 보지 않고 성경다 포함시킬 수 있는 사건화된 마게도냐, 여기서 사건이라는 것은 무슨 사건을 말하느냐 하면 복음 사건입니다.

 

이게 언제냐 하면 AD 42년에서 50년, 60년 가까이 됩니다. 서기 이전에는 뭐가 마게도냐를 차지 했느냐 하면 인간들의 사상이 헬라철학이라는 것이 마게도냐를 도배를 했다고 보면 됩니다. 우리 조선 시대때에 사람들이 맹탕으로 있었던 것이 아니고 뭔가 사상적으로 하나로 결속되어 있었죠. 조선시대의 사상을 유교사상이라 합니다. 물론 그 중에서 유교사상에 대해서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무시하고 그냥 대충 유교사상이라 보는 겁니다. 그러면 통일신라 시대는 대충 뭡니까? 그것은 유교가 아니고 불교가 되는 거예요 분위가 불교 분위기에요 그러면 통일신라 시대말고 고구려 주몽시대는 분위기가 뭡니까? 그것을 가지고 토속종교, 제천의식, 신을 섬기는 토속종교가 있었던 거예요 불교가 들어오기 전일 때 소수림왕 이전에는 그냥 토속종교, 무속종교, 그것을 가지고 샤머니즘이라 합니다.

 

무당을 통해서 신의 계시를 받고 그리고 무당을 통해서 신에게 하소연하고 무당을 통해서 하늘과 땅이 소통이 되는 그런 시대라면 지금 사도 바울이 하는 마게도냐는 헬라철학말고 무슨 사건이 벌어졌다고 봅니까? 복음 사건이 벌어진거예요 그 복음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을 여러분 아시죠 그러니까 어떻게 하라 9절에 형제 사랑에 관하여 이야기할게 없음이라 하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복음을 이야기할 때는 그 안에 뭐가 포함이 되어 있습니까? 형제 사랑이 이미 그 안에 포함된 것을 여러분들이 익히 아시지요? 하고 반박하듯이 그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사랑이 뭐냐 하면 상대방에게 처분을 맡기는 게 사랑입니다. 함부로 사랑하면 안 되지요.

 

사랑이라 하는 것은 상대방에게 처분을 맡겨 버리면 뭐가 삭제 됩니까? 내 결심, 내 기대, 내 희망, 내 결단, 내 선택 전부 다 무엇에 빠져야됩니까? 사랑에서 다 제거 되야 되지요 나는 이렇게 했는데 당신은 왜 어떻게 합니까? 이게 들어가면 이것은 사랑이 아니죠. 그것은 흥정, 거래죠.

 

예수님께서 복음 사건을 가지고 사랑을 전한 것으로 봅니다. 그러면 사랑을 전했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예수님께 우리 모든 처분을 맡긴 거예요 죽이던지 살리던지 주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고 맡겼다 이 말이죠. 만약에 맡겨 놨는데 아무 소식이 없으면 어떻게 될까? 그것은 보통 걱정거리가 아니죠. 나는 주님을 믿습니다. 하고 있는데 조용해요 어떤 기적이 일어나지 않고 일상 그저 흘러가는 게 똑같아요.

 

고린도전서 16장 22절에 보면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찌어다 했잖아요 그래서 그것을 듣고 겁이 나서 주를 사랑하기로 작심을 했다 이 말이죠. 사랑합니다. 했단 말이죠. 그런데 오늘 강의 초반에 사랑이란 것은 상대방에게 자신의 처분을 몽땅 넘겨지는게 사랑이다 라고 들었다 말이죠. 그렇다면 주를 사랑해야 저주 안 받고 사랑을 해야 되니까 그러면 사랑이 뭐냐 주님 앞에 나의 존재를 모두 맡기는 것이다. 처분에 맡기는 것이다. 그렇게 작심을 하고 주님을 사랑하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그런데 아무 소식이 없으면 변화가 없으면 어떻게 할거에요? 주님 앞에 사기당한 겁니까? 속은 거예요? 사람 같으면 찾아가서 멱살 잡고 하는데 주님이 너무 높이 있어서 구름타고 올라가야 되니까 멱살을 잡을 수가 없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냐 말이죠. 어떻게 해야 될까요? 꼭 속은 기분이 들어요.

 

주를 사랑했는데 사랑한다고 다짐을 했고 심지어 끝까지 주를 사랑한다고 십자가 마을에 공개적으로 썼는데 아무 보상이라든지 댓가가 전혀 없어요. 똑같아요. 한 사람이나 안 한 사람이나 똑같아요.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될까요? 그것은 바로 방금 이야기한 사랑이 주님의 처분에 맡긴다는 말을 사랑한다고 하는 그 당자사가 지금 안 믿고 있는 겁니다.

 

처분에 맡긴다는 것은 내 선택과 내 기대와 내 희망마저 철수를 해서 이미 저쪽으로 넘긴 상태에요 넘긴 상태에서도 아직도 꿍하고 덜 넘긴 게 있어요. 이렇게 사랑해 주면 주께서 뭐 해 줄 건데요? 이러한 기대와 포부를 갖는 것은 아직도 뭐가 살아있다는 겁니까? 분명히 넘겼는데 아직도 남아 있는 게 뭡니까? 주님을 사랑하면 그 다음부터 우리는 꼴까닥하고 우리의 목숨이 끊어집니까? 주님을 사랑한다고 해 놓고 아직도 우리의 세포는 펄펄 뛰잖아요 사랑한다고 말은 공개적으로든 혼자서 하든지 주께서 아십니다 하고 했는데 뭐는 아직도 남아 있어요?

 

뭐가 남아 있느냐 하면 어렵게 가보면 몸이 남아 있지요 사도 바울은 뭐라 했느냐 지금 차라리 내가 이렇게 사는 것보다 몸을 벗어버리고 내가 죽은 몸이 되어서 주와 함께 거하고 싶다 마치 변화산의 엘리야나 모세처럼 내 몸이 이 몸은 껍데기이니까 껍데기를 벗겨 버리고 새로운 하늘의 몸을 입어서 주와 함께 거하고 싶은 것이 지금 마지막 소원이다. 그렇게 되어 있거든요 그 말은 뭐냐? 사도 바울이 왜 그 몸을 귀한 몸인데 벗으려고 해요?

 

여러분, 저녁 먹었지요? 왜 먹었지요? 몸이 밥을 달라는 거예요 몸이 있으면 몸 위주입니다. 엄마던 아빠던 심지어 자기도 자기 몸한테 이기지를 못해요 나는 깨끗하게 살아야지, 나는 바르게 살아야지 해도 몸이 뭔가 달라고 한다면 자기 몸을 이길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가 지금 힘들다는 거예요 어떤게 힘드냐 하면 남이 나를 괴롭혀서 힘든 것도 아니고 저쪽에서 이단이라고 공격해서 힘든게 아니고 내 몸이 나로 하여금 발목을 잡는 겁니다. 몸이 나빠서가 아니에요. 몸은 나쁘다고 하지 않습니다. 이 몸은 나쁜 것이다. 더러운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영지주의입니다. 몸이 있다는 것 자체가 나쁘고 좋고의 관계가 아니고 몸이 있는데 누가 있게 하느냐 내가 있게 한게 아닙니다. 주님이 있게 하신 거예요 몸이 있게 하고 그 몸은 점점더 아파가고 늙어가고 뭔가 자꾸 달라고 요구하고 그리고 나에게 내 뜻과 정신과 내 소망과 다른 것을 자꾸 요구하는 그런 몸을 주께서 여기다가 박아놓은 거예요

 

그리고 ‘나’라 하고 하는 것은 내가 몸을 가진 것이 아니고 박힌 몸을 나는 뭐라고 표현할 길이 없어 그냥 ‘나’, 영어로 ‘I' 그냥 나라고 표현하는 거예요 제가 보기에는 여러분의 자아는 안보입니다. 여기 한목사님의 자아는 아무리 봐도 안 보이는데 내가 보이는 것은 한목사님의 몸밖에 없어요. 몸만 있어요. 제가 보기에는 몸밖에 없는데 한목사님이 만약에 거울을 보고 거울아! 거울아! 나는 어떠냐? 거기에 나를 집어 넣어요 나는 없는데 나를 집어 넣어요 그래서 차라리 그럴 것 같으면 이 몸을 이제는 용도폐기해서 없애 버리고 이 몸하고 주님과 함께 하늘에 있는 몸, 그 몸을 저는 얻고 싶습니다. 이게 내가 마지막 남아있는 나의 욕망입니다.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이 말이 어려운 이유가 그 욕망이 어디서 나온 욕망이냐 하면 기존에 있는 몸에서 나온 욕망이죠. 내가 갖고 있는 욕망이 아니고 몸에서 나온 욕망입니다. 그러니까 없어야 될 욕망이 내 뿜는 욕망이 뭐냐 하면 내 몸좀 교체좀 시켜줘 하는 겁니다. 이 몸이 나한테 호소하는 거예요 ’어이, 몸 좀 빨리 교체해 줘‘ 불판 갈아라 이 말이죠. 힘들게 유지 못하겠다는 말입니다.

 

그 말은 이 몸이 사도 바울은 성령을 받아서 그리스도의 몸이 따로 있는 것을 알았는데 만약에 그리스도의 몸, 우리가 입을 몸이 없다고 여긴다면 이 몸은 성령을 안 받은 이상 예수님을 안 믿어요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냐하면 우리의 몸은 예수님을 때려 죽여도 못 믿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몸은 안 믿어요 이 몸은 자기 몸만 믿어요 눈에 보이고 만져지는 몸이 최고에요 그런데 우리는 교회에서 한 소리 들었다고 해서 예수님을 사랑한다 예수 믿는다 하니까 이게 몸 따로 나 따로 노는 겁니다. 몸은 안 믿는데 내가 믿는 척을 하고 있는 거예요 이것은 자기가 자기를 속이는 거예요

 

한번 물어 보세요 ‘어이 몸! 너 예수 믿냐?’ ‘보여야 믿지’ ‘그래 안보이지?’ ‘나 못 믿는다,’ ‘알았어’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자기 몸이 안 믿고 있다는 것을 감추기 위한 하나의 위선적인 행위가 되는 거예요 우리는 자기 몸을 거쳐서 그리스도를 봐야 되는데 이것은 몸을 거치지 않고 바로 예수님에 대한 정보, 예수님이 이야기한 것을 바로 습득하려고 해요 아무리 지식으로 습득해도 몸이 튕겨버려요

 

예를 들어서 여기 14절을 봅시다. 살전 4:14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찐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이 이야기가 내가 좋아하면 안되고 내 몸을 거쳐가는 누가 좋아해야 돼요? 내 몸이 좋아야 돼요 ‘야 죽어도 산데’ 내 몸이 빨리 죽어서 빨리 살고 싶어해야 할 텐데 내 몸이 환장해야 될텐데 ‘아, 이 몸을 어떻게 갈아치우지 불판 갈 듯이,,,,’ 이렇게 하고 있는데 몸은 ‘밥 줘!’ 이렇게 하고 있다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내 몸을 치고 가더라 ‘아 기분 나빠’ ‘니도 한 대 쳐라’

 

내 몸은 지금 이 데살로니가전서 4장을 튕기고 있더라 말이죠. 내 몸이 이 성경 말씀을 안 받아줘요 너는 그냥 정신적인 놀이 문화로서 취미 활동으로서 교회 다니고 신앙생활해라 하지만 내 몸은 이 성경말씀을 그냥 다 튕겨 버려요 이게 내 몸을 그냥 유지하는데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 이 소식이 무슨 도움이 되겠어요? 안 되지요

 

여러분, 단무지를 상품으로 공장에서 만들 때 단물이 다 잘 스며들도록 해야 되는데 어떤 악덕 업체가 단무지에 노랑 염료를 넣고 단무지라고 하면 분명히 색깔은 노란데 씹어보면 단맛이 안날 때 그게 뭡니까? 그것은 소비자를 우롱하는 것이죠. 바로 우리가 매일같이 내 몸이 나의 신앙과 나의 소망과 사랑을 지금 우롱하고 있어요. 나는 믿고 싶은데 몸이 안 따라 져요 몸이 그 딴거 믿어서 뭐할 건데? 그게 뭐 배가 부르나? 그게 뭐 나한테 부자를 되게 해 주나 그게 뭔데? 몸은 이야기합니다. 신앙이 필요한 이유를 대라 신앙이 우리에게 꼭 있어야 될 이유가 뭔데? 근거를 한번 대봐라 신앙이 있으면 이런 것들이 내 맘한테 유리하다는 근거를 대봐라 근거를 대보라 하면 근거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제가 그림을 하나 그립니다. 인간의 몸은 육인데 육은 누가 다루느냐? 육은 행함으로서 의로워 지려는 그런 노선에 따라서 우리가 만들어 졌어요 미리 이야기하면 우리의 몸은 율법이 얼마나 무섭고 율법의 저주와 심판이 무엇 때문에 저주 심판하는가를 알려주는 재료로서 이 몸이 우리에게 주어진겁니다. 우리 이전에 몸이 먼저 있고 차후에 우리는 그것을 ‘나’라고 이야기한 거예요. 나는 이 몸은 어디에 저촉을 받습니까? 율법 저주의 저촉을 받아요

 

에스겔 37장에 보면 해골이 나오죠. 거기 해골이 왜 해골이 되었어요? 이스라엘 백성이 율법에 어긋나서 다른 신을 섬기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바짝 마른 해골로 만들었잖아요. 그러니까 뼈 하나하나가 그냥 필요 없는 것이 아니고 말씀은 이렇게 무섭다는 것을 보여기 위해서 몸을 만들고 그것을 뼈다귀 전환시킨 겁니다.

 

BC 586년에 하나님께서 유다나라를 침공할 때 바벨론 기계같이 움직이는 바벨론 그것을 황충이라 하는데 황충처럼 질서정연하게 앞뒤 봐주는거 없이 그냥 공격하면 무자비하게 공격하는 그런 군대를 보낸이유가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에서는 봐 주는게 없다는 거예요 왜 그러느냐 하면 율법에 기준했기 때문에 봐주는게 없어요. 인물 이쁘다고 하나님께서 봐주고 키크다고 봐주고 하는게 없어요. 공부 많이 했으니까 내가 살살 때려줄게 이런게 없다 이 말이죠.

 

애굽에 죽음의 천사가 애굽 나라 각 지방마다 맏 아들을 칠 때에 그게 독자라고, 형제가 없이 아들 하나라고 그냥 봐주고 넘어간 일이 있습니까? ‘아이고 이 집은 아들 하나밖에 없구나! 대를 못 이으니까 그냥 넘어가주자 어이 천사야 넘어가주자’ 이런 게 있었어요? 없었어요? 없어요. 이것은 무조건 어린 양의 피가 없으면 다 죽이는 거예요 바로 우리의 몸은 그 사실과 결부되어 있는 몸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죽는 이유는 죄값 때문에 죽는 겁니다. 우리가 이 몸에서 나오는 것이 율법에 주어져서만 뭐가 되느냐 하면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낳는다 이것은 내가 우리를 판단하면 안 나타나고 율법의 하나님 판단에 볼 때는 기어이 우리는 이 피곤함을 이기지 못하고죽어야 되는겁니다. 왜? 끊임없이 욕심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욕심은 욕심도 아닙니다. 율법으로 봤을 때 욕심이에요.

 

바리새인들이 바르게 살고 착하게 살고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기도하고 십일조하고 그게 다 욕심입니다. 요새 말로 하면 헌금하고 전도하고 기도 하고 예배 참석하고 하는 것들이 이게 욕심입니다. 아이 목사님! 욕심 아닌게 어디 있습니까? 그럼 어떤 것이 욕심이 아닙니까? 몸이 있는 한 욕심 아닌게 없습니다. 그러면 욕심 아닌게 없으면 그러면 욕심 없이 살면 어떻게 됩니까? 이 몸이 욕심 내게 되어 있는 몸인데 무슨 딴 소리를 하십니까? 이 몸이 욕심을 내게 되어 있는 욕심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말을 욕심을 안내려면 어떻게 삽니까? 욕심 내야 될 몸이 내야지 그것을 욕심 안 내려면이란 조건이 거기 왜 붙어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이 몸은 선천적으로 예수를 사랑하지 않고 몸 자체를 사랑하고 주님의 저주 앞에 서서 그것을 함구하고 ‘나 같은 인간은 죽이면 안 돼! 나는 휼륭해야 돼’하는 것을 내 뿜어내는 그러한 본성의 몸을 이미 우리는 부모로부터 하나씩 타고 났어요

 

어떤 사람은 강도로 살다가 어떤 사람은 세리 창기로 살다가 그 몸으로 사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몸은 몸을 다루어서 몸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왜 유월절에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랐습니까? 그 어린 양이라는 것이 누구 집에 살던 어린 양입니까? 옆집입니까? 자기 집에 같이 살았죠 자기 집에 하나의 식구처럼 살던 그 몸을 그 식구를 다른 식구를 위해서 대신 죽는 몸의 역할을 하라고 어린 양을 잡는 겁니다. 이것이 또 율법 안에 들어 있어요. 그러니 율법 안에 들어 있던 것을 우리가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이 알아서 전부 다 완전히 폭격하고 지키고 구원하고 버릴 것 버리고 알아서 다 해 주는 거예요 알아서 다 훌고 지나 가는 겁니다. 우리는 우리의 몸은 욕심만 팍팍 내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신앙인입니까? 그러면 자기 신앙을 스스로 제대로 깨고 우리가 기독교입니까? 우리가 기독교를 제대로 비판 할 수 있어야 돼요 평가 할 수 있어야 됩니다. 무에 노란 페인트 칠하면서 매일 같이 감 잡고 눈치 채야 됩니다.

 

그림을 하나 그리겠습니다 우리의 몸이 어떤 몸이냐 하면 여기에 A가 있고 뒤쪽에 B가 있으면 만약에 B가 좋은 나라, 천국이라면 우리의 몸의 성질은 이것을 기어이 올라갑니다. 올라가서 정상에 올라가서 저 산 뒤에 있는 이런 미지의 세계에 도달하려는 것이 우리의 몸이에요. 그리고 이것이 우리의 선배 되는 바리새인들이 이것을 실시 했습니다. 예수님이 여기 지켜서서 하는 말이 너희들이 바리새인들보다 더 낫지 않으면 어디를 못간다 했습니까? 천국에 못 간다는 거예요 이 말은 예수님께서 인간들이 몸이 추구 하는 노선을 다 알고 그 길로 갈 것을 알고 그 길 위에 먼저 가서 지켜 보는 겁니다. 그러면 바리새인들이 그 부분에 있거든요 어느 누가 봐도 바리새인들의 의가 제일낫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어디 있습니까? 바리새인들 엉덩이 밑에서 반복하면서 따라오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노력하고 애쓰고 기도 하고 금식하고 백날 해 봐야 이미 그 짓 다 해 본 사람이 있습니다. 누가 해 봤습니까? 어느 누구도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 그러니까 제일 선봉자는 누구에요? 바리새인이에요. 인간이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해 봐라 그게 바리새인입니다.

 

바리새인 중에 오야봉이 누구입니까?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 사도 바울입니다. 주님께서 사도 바울을 보낸거예요 해 봤다는 거예요 너희들 네 몸 가지고 신앙생활이라고 여기는 그것을 이미 사도 바울이 다 해 봤어요 우리가 성경 말씀을 지킬 수 없는 이유가 있어요. 성경말씀은 단어로 되어 있어요. 문장, 언어, 단어로 되어 있어요. 두부 만들 때 정 사각형으로 구분하잖아요 구분할 때 선을 긋잖아요 그을 때 A,B,C,D,E,F가 있을 때 여기에 있는 콩가루가 있다면 자르기 이전에 이쪽에 있는 이 콩가루하고 이쪽에 있는 콩가루하고 둘이 친구사이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잘라 버리니까 한쪽은 F에 한쪽은 D에 속합니다.

 

언어라고 하는 것이 결국은 평분화, 동일화, 같이 되는 겁니다. 여러분들에게 이제부터 5분 동안 기도 합시다. 하면 분명히 기도가 다 다른데 저는 다들 5분 동안 기도 하셨네요? 이렇게 합니다. 어떻게 봅니까? 여러분들이 기도 한 것을 개인을 무시하고 하나로 묶어서 두자로 ‘기도’라고 한 겁니다. 평준화시키는 겁니다. 두 부부가 드라마를 봅니다. 아내보고 ‘재밌나?’ ‘나도 재미있어’ 아들이 있다가 아빠, 엄마 어떤 게 재밌어? 재미있다고 하니까 다 재미있을 줄 알았는데 물어보니까 재미의 포인트가 달라요 깊이가 달라요

 

그러니까 사람이라고 같이 재미있다고 둘다 재미있다고 보면 안 되고 재미있다는 단어가 일방적으로 그 사람을 무시하고 잣대를 자기 마음대로 그어놓은 거예요 우리는 그 그어 놓은 그 단어를 나한테 입히는 겁니다. 나는 오늘 기도 했다 전도 했다, 오늘 바르게 살았다, 오늘 죄 안 지었다, 일방적으로 그렇게 한 겁니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의 정신이 우리의 몸을 왕년에 억지로 폭력을 사용해서 오늘 기도 한 몸이야 하고 일방적으로 뒤집어 씌운겁니다. 그 기도 하는 시간에 2분동안 잤는데? 5분동안에 딴 생각 3분 했는데? 그래도 기도 한 거야 그때 놀았는데, 재미나게 놀았는데? 이게 한국사람입니다. 말도 안돼요 내가 일방적으로 생각한 성경 단어가지고 내 몸한테 그렇게 강요하면 안돼요 강요하면 안되는데 왜 강요하느냐? 우리는 구체적인 모델을 만들어 내요 억지로 내 정신에 합당한 내 몸의 길을 억지로 만드는 겁니다. 내 마음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지만 몸이 안따라 주지만 내 마음이 사랑한 것으로 몸이 같이 따라 온 것으로 억지를 부리는 거예요 그 억지가 남한테 통하지만 우리 자신과 하나님 앞에서는 그것은 인정받지 못하고 거부당합니다. 오히려 교만과 위선이라고 인정하지요

 

다시 해 봅시다. 산 넘어서 천국이라면 우리는 바리새인이 이렇게 산을 넘어서 넘어갈 때 이 지점이 하나는 지옥이고 하나는 천국이라면 넘어갈 때는 얼마나 기분이 좋겠어요? 드디어 지옥 안녕, 나는 이제 천국백성 이 넘어가는 지점을 우리는 갖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어요. 이 지점만 넘으면 이 지점을 품에 안고 자격증 만들어서 이것을 가지고 나 구원받았다고 누구한테 내 밀고 싶은 충동이 있다 이 말이죠. 이것은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산거예요 그런데 주님은 뭐라 하느냐 하면 네 속에 들어 가는 것이 더러운 것이 아니고 뭐가 더럽다? 네 몸에서 더러운 것이 계속 끊임없이 나오는데?

 

바리새인들이 끝까지 자기 몸을 포기를 못했어요. 그리고 자기의 마음과 몸이 하나인줄로 자꾸 억지를 부리는 겁니다. 주님이 나한테 가까이 하면 할수록 우리의 몸은 점점 더 치졸하고 더럽고 우리에게 나올 것은 죄밖에 안 나온다는 사실을 그리고 이 몸은 자신의 몸을 위해서만 존재하지 그 외에 어떤 몸을 위해서 존재하지 않는 다는 사실을 점점 느낍니다.

 

그래서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인 사도 바울이 최선봉에 있을 때 무슨 사건이 벌어졌습니까? 누구를 죽였습니까? 스데반 집사를 죽이는데 자기가 증인 섰지요 저 인간은 죽어야 돼 내가 증인 할 게 내가 하나님 앞에 대표해서 증인할게 해서 옷을 맡기면서 사울이라는 청년이 거기 있었잖아요 예루살렘에 유학 와서 거기에 가담해서 유학티 낸다고 그렇게 한 모양이에요. 유대인의 열심을 내서 나는 배운 것을 실천한다고 거기에 간 겁니다. 자 이 지점에 스데반 집사를 돌로 쳐 죽이는 데 가담을 했습니다. 이 지점에 왔을 때는 사울은 자기의 최고 정점에 와 있다 이렇게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그 최고 정점에서 예수님은 뭐라 하느냐 하면 스데반 집사를 죽이는 것이 곧 누구를 죽인 것이라 했습니까? 예수님을 죽인 것이라 했습니다.

 

그 말은 사울보고 나무라는 게 아니고 사울이 갖고 있던 몸을 증오하는 거예요 너는 몸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 몸이 어떤 몸인지를 너는 예수님 없이 니 몸을 평가 한 거예요 예수님의 십자가 없이 그냥 남들하고 비교하니까 남들보다도 더 괜찮은 몸, 나쁘지 않은 몸, 착한 일 많이 한 그 몸이었어요. 그런데 그 몸을 가지고 스데반 집사란 성령 받은 사람과 맞다뜨리니까 그 스데반 집사 안에 뭐가들어 있어요? 성령이 들어 있지요 그 성령이 누구의 영입니까? 예수님의 영이잖아요 예수님의 영 앞에 설때에 비로소 들통난겁니다. 내 자기의 몸의 정체가 들어 난거예요 그 몸 가지고 천국가겠다고 깝죽된 겁니다. 이게 사울이 받았던 축복입니다. 뭐가 축복이냐 내 몸은 내가 관리할 대상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세자로 하면 ‘손 놔라’ 이 말이죠. ‘손 떼라’ 이 말입니다. 누구에서? 내 몸에서 손을 떼고 우리는 우리의 정신만 관리하면 돼요 말을 더 어렵게 해서 미안합니다.

 

우리의 정신만 관리한다는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몸 따로 정신 따로 놀 밖에 없음을 수긍하고 인정하라는 말입니다. ‘주여, 제가 이렇게 주 앞에 기도하는 것 아시죠. 정신적으로 이렇게 사랑하는 것 아시죠. 하지만 내 몸이 배고프다고 할 때에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이 감사할지 안할지 제가 몸에 따라가지 제 정신에 따라 가지 않습니다.’하는 것을 고백하라 이 말이죠. 주여, 지금은 제가 기분 좋습니다. 하나님 감사 합니다. 하지만 내 몸이 이빨이 아플 때는 내가 내 정신도 어떻게 화를 낼지 그것은 내가 장담 못합니다. 하는 것을 인정하라 이 말입니다. 정신의 내막과 몸의 내막 두 가지 이야기를 다 해 봅시다.

 

정신의 내막은 그림으로 설명하면 바리새인이 여기 있고 사울은 여기와 있고 중간에 깨졌고 스데반 집사는 죽고 그 뒤에 우리가 뒤 따라 가는 거예요 왜? 같은 몸이니까 내 몸이니까 네 몸이나 다 아담에서 나온몸, 아담의 몸이 말하는 몸은 다른 코스 없습니다. 이 코스로 다 가는 겁니다. 가는데 여기에 성령이 임했다, 성령이 임한다고 몸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성령이 임한다고 몸이 갑자기 욕심을 버리고 돈 안 좋아 하는 그런 일은 아예 없습니다.

 

다만 성령이 임했으니까 정신적으로 무엇을 조정해 나갑니까? 돈을 좋아하지만 ‘안 돼’ 하고 지적하죠. 로마서7장에서 사도 바울이 뭐라 합니까? 내가 무엇이 악하고 무엇이 선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뭐가 안 받쳐줍니까? 이 몸에서 나오는 다른 법이 이 정신을 내 참된 취지를 받아줘요? 안 받아줘요? 안 받아줘요 그러면 거기서 나오는 아이디어가 어떤 아이디어일까요? 몸은 계속해서 눈치 코치 없이 계속가요 만약에 주님을 사랑했다면 이 몸은 그 만큼 점수가 또 올라가요 야 내가 생각해도 니가 기특하다 네가 오직 주님만 사랑하는구나! 눈만 뜨면 바리새인 따라 가는데 이 몸은 감당이 안되고 어떻게 하느냐 하면 정신을 낮추는 방법을 사용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산을 넘을 생각을 안 하고 몸은 그냥 자기 마음대로 가는 거고 말릴수도 없기 때문에 자기 마음대로 가는 거예요 정신은 저 낮은 곳을 향하여 두게 되는 방법을 사용하는 겁니다. 이 방법 사용하면 구원됩니까? 그래 나는 죄인이야 나는 부족해 그래 나는 마음을 낮춰야 돼. 몸은 고집불통이라 자기 마음대로 가는데 내 마음은 주여 절대로 안 그렇다는 거 아시죠? 구원되겠어요? 이 고개를 넘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안 되지요 그것도 안 됩니다.

 

그러면 어떤 방법이 있느냐 하면 이 몸을 옆으로 비켜 가는 방법이 있거든요 이것은 무엇을 포기해야 됩니까? 최고의 자리를 포기해야 되겠죠. 내가 남보다 앞섰다 나는 남한테 뒤지기 싫어 저 나보다 못 배운 것이 잘 풀린다 속 터진다 이런 이런 최고의 자리를 없애 버리고 바로 옆으로 오고 싶은 거예요 이게 누구의 아이디어이냐 하면 변화산에서 베드로가 이야기한 여기가 좋사오니 초막 셋을 짓고 이렇게 된 겁니다.

 

자기의 몸을 띠를 띠고 원치 않는 길로 가는 것이 아니고 그냥 편안히 예수 믿다가 내 몸도 편하고 고민도 안하고 그렇게 죽었으면 좋겠다는 것, 아무도 나를 건드리지 않고 편안하게 갔으면 좋겠다. 나는 주님을 찬양하는 그것만, 찬양하는데 별로 힘들지 안잖아요. 찬양 찬양하면 되니까 자기 몸은 자기 마음대로 편한대로 두면서 구원은 구원대로 되고 마음은 낮춰줬으니까 더 이상 하자 없다 하면서 이런 식으로 반대편 세계를 들여다 보는 것, 그것이 되겠어요? 안 되겠어요? 이것도 안됩니다. 바리새인 1번 2번 3번 전부 다 이게 실패로 끝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요? 이것도 안되고 저것도 안되면 그러면 어떤게 되느냐? 제가 몸을 이야기하면서 하나 의도적으로 이야기 하지 않은게 있습니다. 그것을 적어 볼께요 ‘몸은 수동적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몸은 사탕주면 헤헤거리고 독을 주면 뱉어버리는 몸은 독자적으로 자기 환경을 못 만들어 내요 주변의 환경에 따라서 몸이 거기에 순응하는 식으로 반응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나쁜 친구 만나는 것을 조심해야 된다는 것이 거기에 있어요. 몸이 흉내를 잘내요 주위에 담배 피우는 사람이 없으면 담배 피우는 것을 안 나쁘게 여깁니다. 주위에 술꾼들이 많으면 술 먹는 것이 뭐가 나쁘냐고 변명조로 나옵니다. 몸은 수동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가 옛날에 하양근처 경산에 대구살기 이전에 목욕탕을 갔는데 어떤 아저씨가 탕속에서 남인수 노래를 크게 부르는 거예요 그게 한 15년 전입니다. 제가 탕속에서 남자가 노래 부르는 것은 1950년대, 60년대는 허락이 되었어요 그런데 1990년대도 아직도 초이니까 노래를 불러요 제가 또 오지랖이 넓어 나서서 이야기를 하려다가 찬스를 놓쳐서 못했어요 들어 가려고 했는데 노래를 끝내버렸어요

 

이것은 뭐냐 하면 그 사람이 탕속에서 노래 부르는 것은 자기 아버지하고 자기 형님들하고 그 시대에 자연스러운 일이었어요. 요새 또 조폭도 문신하고 노래 부르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없거든요 몸은 옳고 그름이 없어요. 주변에 있는 색깔에 따라서 얼추 비슷하게 맞춰나가면 그게 선이에요. 옳고 그름을 따지지 못합니다. 몸 자체에는 옳고 그름이 없어요. 비슷하게 그냥 묻혀가는 거예요 안 묻히면 왕따 당하니까 그냥 묻혀가는 거예요 청소년들이 술, 담배 하는 것이 왜 나쁜지 몰라요 친구들이 하니까 만약에 담배를 안 피우면 안 놀아주고 도박에서 돈 떨어지면 돈을 또 가져와야 하는 이유가 돈 떨어지면 그 다음부터 안 놀아주니까 도박판에 안 넣어줘요 돈 없는 인간을 왜 넣어줍니까? 그러니까 강도짓해서 금은방 털어서 돈 만들어서 또 거기에 놀아줘 하고 또 가는 겁니다.

 

몸은 한 마디로 ‘놀아줘’ 놀아 주세요. 몸은 고상스러운 철학이 필요 없어요.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의 몸은 옳고 그름도 아니고 하나님도 아니고 예수, 부처도 아니에요 그러면 뭐냐 하면 제발 나랑 좀 놀아달라는 겁니다. 이게 동질성입니다. 인간의 몸은 같은 몸을 그리워하게 되어 있고 그것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적 동물 또는 사회적 동물이라 했습니다. 대화하는 가운데 인간이 되지 혼자 살면 그것은 인간이 아니라는 겁니다. 대화하는 가운데서 사람은 살 의지와 살 이유가 생긴다는 겁니다. 그냥 혼자 도를 닦으면 그것은 전혀 인간적이 아니라는 겁니다. 인간은 타인을 통해서 자기를 다시 비춰보기 때문에 대화라는 게 필요한 겁니다.

 

그러면 오늘날 교회가 교인들이 큰 교회 가는 이유가 뭡니까? 뭐에요? 정신적이고 뭐고 다 핑계고 거짓말입니다. 몸이 가지고 있는 본성이 뭡니까? 그냥 놀아달라는 거예요 나의 존재를 인정해 달라는 겁니다. 내가 여기 있음을 남들이 좀 이야기를 해 달라는 거예요 만약에 그것을 안 해 주고 왕따 시키면 자살합니다. 애들은 성질이 급해서 안 놀아주면 자살해요 학원 폭력 사건은 옛날부터 있었습니다. 있었는데 옛날에는 왜 자살을 안 했느냐? 얻어 맞는 것도 하나의 그들과 놀아주는 노는 방법이었어요 자기도 또 후배 때리면 되니까 아무 문제 없었는데 자기 집에서 안 맞다가 맞았기 때문에 집에서 맞다가 학교에서 또 맞고 하니까 맞는게 일이 되어서 자기 노는 일에 의의가 없는데 집에서 귀하게 키우다가 여기와서 맞으니까 내몸이 나는 안 맞을 몸인데 맞았거든요 그러면 자기 정체성이 깨져 버리는 거예요 나를 찾을 수가 없어요.

 

인간은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누구한테 처분을 넘기지 않고, 항상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처분은 누가 해야 됩니까? 끝까지 내 몸은 누가 책임져야 됩니까? 내 몸을 관장하는 것은 내가 책임져야 되니까 누가 사랑하는 사람이 없으니까 나는 나만 사랑하기 때문에 처분을 나한테 맡기니까 나한테 정신적으로 괴로울 때는 이 괴로움의 원인을 조사해 보니까 이 몸이 남들에게 안 알려준 몸이니까 그 몸과 더불어서 장렬하게 자기 자신을 산화시키는 거예요 그냥 태워 버리죠.

 

그러면 본인이 자살한게 아니고 누가 그 사람을 죽이는 거예요? 몸이 죽이는 거예요 몸은 수동적이니까 안 놀아주면 안 죽더라도 이미 죽은 몸이 되는 거예요 우리의 몸은 주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한게 아니고 누가 나를 인정해 주고 놀아주면 몸은 신나고 내가 아무리 믿음 좋아도 누가 안 알아주면 나는 괴로운 겁니다.

 

고상하게 삼위일체 동원해서 성경 복음 십자가 이야기 해도 그것은 포장지고 그것 벗겨 버리면 남는 것은 내 몸, 이 몸은 누구한테 처분할 필요 없고 내가 알아서 내가 처분한다 하는 그 정신, 그 불신앙만이 우리에게 고스란히 남는 겁니다.

 

그러면 이 첫 시간을 마감하면서 그러면 그 대책이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대책은 이거요 14절 봅시다. 살전 4:14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찐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우리의 몸은 우리가 관리를 못합니다. 제가 50분 동안 계속 이야기 했습니다. 관리를 못하면 처분을 누가 하느냐? 복음이 사랑이니까 십자가 사랑하시는 주님께서 우리 몸을 그냥 가져가 버려요 우리 몸을 가져가 버리면 무엇에 사용하느냐 하면 우리 몸은 우리가 관리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식으로 우리를 사용해 버려요 그러면 누가 괴로우냐 하면 바로 우리 자신이 괴롭습니다. 그 괴로운 것이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11절에 나옵니다.

 

살전 4:11 또 너희에게 명한것 같이 종용하여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살전 4:12 이는 외인을 대하여 단정히 행하고 또한 아무 궁핍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그러니까 네 몸은 그냥 몸을 놀리지 말고 하나님께 맡겼다고 하나님이 밥먹여 줄꺼라고 생각하지 말고 네 몸의 본능대로 네 몸을 위해서 한번 해 봐라 어느 시선 밑에서? 이 몸은 이미 하나님께 맡긴 몸이라는 그 안목과 시선 아래에서 옛날 네가 잘하던 행세, 다시 말해서 예수 믿기전에 내 몸은 내가 관리해 왔습니다. 하는 그것을 다시 한번 되풀이 해서 죽을 때 까지 해 봐라 이 말입니다.

 

중요한 교훈이 들어 있습니다. 제가 중요한 교훈을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도 바울이 손수건 가지고 죽은 사람 살렸지요? 맞지요? 사도 바울이 손수건 가지고 죽은 사람 살렸으면 우리 같으면 손수건도 사람을 살리는데 그 손수건 주인 되는 사도 바울을 하나님께서 죽이면 안 되지요 그렇잖아요. 사도 바울은 로마에서 AD 63년경에 참수 당했다 하거든요 자기 손수건 가지고 사람까지 살렸으면 유두고를 누가 살렸습니까? 사도 바울이 살렸지요 바도 바울이 밤새도록 설교하니까 졸다가 3층에서 떨어졌던 청년, 죽었다가 살렸거든요 사도 바울이 말씀 전했는데 떨어져 죽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기도 해서 살렸잖아요 자기는 남을 살렸잖아요 남을 살릴 수 있는 정도의 능력이라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안 죽도록 해 주셔야 되잖아요

 

내가 이 물을 마셨다면 콜라도 마실 수 있고 사이다도 마실 수 있는 능력이 여러 가지 있는데 그 중에 하나 이것을 마신게 되잖아요 이것은 마셨는데 주께서 물 한 컵 안주는 겪이 되고 말았다 말이죠. 왜 그렇게 하느냐 이 말입니다. 어렵지요? 남은 병을 고치주면서 남은 죽은 자를 살리면서 왜 죽은 자를 살린 당사자는 주께서 죽이게 만드느냐 이 말이죠. 이것이 우리의 몸이 수동적이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의 몸을 이미 예수님께 일임해 버리면 우리의 몸은 우리가 관리하는 게 아니고 누가 관리합니까? 예수님이 관리하잖아요. 예수님이 관리하게 되면 우리의 몸은 옛날 예수 믿지 않을 시절에 그동안 우리의 몸이 우리의 몸을 어떻게 다루었는가를 본격적으로 우리는 실시를 해야 되는 겁니다. 아, 이렇게 힘들구나! 내가 나를 사랑하고 나를 관리하는 것이 나에게 괴로움을 주는구나! 그것을 기쁨 가운데서 그 괴로움을 만끽해야 됩니다. 사도 바울이 사람을 살릴 능력을 그 정도 해 줬으면 나머지 기본적인 것은 제공해야 하나님답잖아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이 말이죠. 왜? 사도 바울이 아플 때 몇 번 기도 했습니까? 세 번 기도 했잖아요. ‘하나님이여 아픕니다.’ ‘어쩌라고?’ 남의 병은 고치면서 자기 병은 못 고치게 만든 이유가 뭡니까?

 

그게 바로 우리가 이 몸을 주님께 의탁하기 이전에 우리의 몸이 우리를 관리했을 때 우리는 우리 몸에게 아무런 능력을 행세할 수 없고 우리 죄악대로 우리의 죄지은 대로 힘들게 고생스럽게 이 몸 끌고 살아가도록 하는 그것이 예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용도로서 우리의 몸을 버리지 않고 폐기 처분되지 않고 지금도 힘차게 다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10분 쉬고 합시다.

 

서울 의존교회120713b ()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사도바울이 사도되기 전에 사울이 스데반 집사를 죽이는데 주동적으로 가담을 했습니다. 스데반 집사에게 만약에 자식 있고 어디 친척이 있다면 그 사람이 사울이라는 사람에게 복수를 해야 될까요? 하지 말아야 될까요? 스데반 집사의 가족이 있다면 돌에 맞도록 충동질 했던 사울에 대해서 누가 복수를 해야 됩니까? 죽은 삼촌 살려 내 놓으라고 달려들어야 되겠습니까? 어떻게 해야 됩니까?

 

몸은 환경에 따라서 반응을 나타낸다고 했습니다. 그 반응이 정신인데, 몸의 반응이 정신이에요. 그러면 우리 삼촌 죽였으니까 사울 너는 내 손에 죽어봐라 이렇게 하면 그것은 정신적으로 그 사람에게 복수 하겠다고 나설 때 그러나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그냥 몸과 몸의 만남이죠. 스데반 집사 몸, 사울이라는 사람의 몸, 스데반 집사의 조카의 몸, 결국은 스데반 이름 떼어 버리고 사울 이름 떼어버리고 스데반 집사의 조카 이름 떼어버리면 남는 게 뭡니까? 몸과 몸이 남지요 그런데 이 몸이 술을 마셨다, 술을 마셨다 하면 이 몸이 수동적으로 반응을 한다고 했죠. 반응을 할 때 개가 되잖아요 개가 될 때 이쪽의 사람이 나는 개한테 얻어맞고 싶어 하면 곤란 하다. 왜냐 하면 이 몸도 반응을 나타내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이름을 다 떼어 버리면 뭐밖에 없느냐하면 몸의 몸 만남과 충돌 그것만 남아요 이 말은 뭐냐하면 사람이 아무리 신사의 품격을 갖춘다 할지라도 결국은 입을 것, 먹을 것, 마실 것, 이게 기본적으로 안 되면 사람은 미쳐 버려요 완전히 소나 개하고 똑같아요. 좀 멋있게 보이는 것은 뭐가 됐다? 먹는 것 입는 것이 되었다 이 말이거든요

 

오늘 본문 11절에 보면 살전 4:11 또 너희에게 명한것 같이 종용하여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살전 4:12 이는 외인을 대하여 단정히 행하고 또한 아무 궁핍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몸에 대해서 다른 사람의 정신이나 동정심이나 사랑에 이 몸을 호소 하지말라 말입니다. 왜냐 하면 그 사람의 정신이나 동정이라는 것은 그 사람의 정신에 불과하고 그 몸도 나름대로 주변에 다른 사람을 만나서 확인을 통해서 그 몸도 살려고 애쓰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살려고 밥 먹고 살려고 애 쓰는 것이나 삼성 재벌 이건희 회장이 먹고 사는 것이나 나머지 다 떼어 버리고 남는 것은 그냥 입는 것 먹는 것 뿐입니다.

 

나는 엘비스 프레슬리를 좋아해 나는 고상한 발레 춤을 배우고 싶어 이것은 뱃속에 뭐가 들어갔다는 뜻이거든요 일단 배부르니까 다른 소리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것을 다 떼어 내면 결국은 인간은 자기의 기본 몸이 본능을 드러난다 이 말입니다. 드러나는 그것을 주의 말씀에 의해서 드러날 때로 좀 드러내라 이 말입니다. 그래서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로 알라는 말이 그래서 나온 겁니다.

 

사랑이라 하는 것은 주님에 대해서 위탁 사랑이라는 것은 내가 지금 먹는 것 입는 것은 내가할 수 있는데 스위스 여행 가는 것은 주께 기도해서 축복 받아서 그 돈 가지고 가야 겠다 이런 것은 사랑이 아니에요 주여 저를 키워 주시고 사랑 해 주세요이러면 주께서 그래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 알라이러면 끝난다 이 말이죠.

 

저 사람이 입은 좋은 옷을 입고 싶습니다.’ 하면 주께서 하는 말이 들풀도 솔로몬의 옷보다 더 이쁘거든이렇게 나온다 말입니다. ‘나도 놀이동산 가고 싶습니다.’하면 오늘 아침에 눈 뜨고 일어난 것도 감사하게 여겨라이렇게 나옵니다. 그러니 은근히 자기 몸을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로 알라에서 갑자기 더 플러스 알파 더 뭔가 정신적으로 키우려는 모든 것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느냐 하는겁니다.

 

그것이 바로 새로운 영적 세계에서 나와요 악마의 지배를 받아서 그래요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 동안 시험을 당했습니다. 시험을 당할 때 가장 인간에게 필요한 게 뭐냐를 이야기하는 대목입니다. 마귀는 당신은 기도를 해도 하나님의 일을 해도 기본적으로 먹는 게 있어야 하지 않느냐 돌이 떡이 되게 해서 떡으로 먹고 나서 힘내서 기도 빡세게 하고 주의 일을 나서라 이렇게 하니까 결론적으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뭡니까?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주의 말씀으로 산다고 하지요 이것은 우리 인간의 몸으로 될까요? 안 될까요? 이것은 안 됩니다. 왜냐 하면 이미 우리의 몸은 돌마저 떡이 되고 남한테 인기 얻고 스타 되고 세상 부귀영화를 차지하는 그런 정신의 지배를 받는 몸으로 되어있습니다.

 

일단 먹을 것 있으면 그 다음에 추구하는 것이 뭡니까? 세상의 권력을 추구하게 되어 있어요. 따라서 우리는 이것을 내 몸이 말릴 수가 없어요. 사람이 빵을 주면 감사합니다. 하는 것은 일시적인 문제에요 일단 빵을 주면 감사하다 해 놓고 또 그 다음에 빵을 주면 화를 냅니다. ‘아까 줬잖아요 딴거 줘요 사람을 돼지로 아나?’ 이렇게 된다 이 말이죠.

 

사람이 들어가게 되면 다른 것을 찾게 되어있어요 나는 지금 밥 먹고 살기 힘들지만 나는 그래도 연기하면서 겨우 밥 먹고 삽니다.’ 장동건이 그런 소리 안 하지요? ‘이 정도 생겼으면 좀 큰 집에 살아도 되잖아이렇게 나온다 말이죠. 너는 못 생겼으니까 나 같이 좋은 집에 살지 말라 그 말이거든요 그게 바로 예수님께서 그 세계에 파고드는 거예요 선악과 따먹은 인간의 모든 몸은 악마, 어둠의 권세 안에 이미 지배를 당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아침이 오지 않는 세상, 아침이 오지 않는 세상이니까 백날 헤매봐야 깜깜한 것 밖에 없어요. 깜깜하니까 중요한 것은 새벽별이 뜨는 것입니다. ? 새벽별이라는 것은 가장 어두울 때 뜨는 거예요 가장 어두울 때에야 보이는 별이 새벽별이에요. 훤한 대낮에 별이 보입니까? 자기 자신이 얼마나 어둡다는 것을 알아야 보이거든요

 

우리의 몸은 다른 사람의 몸을 흉내를 내잖아요. 흉을 내는 그것이 뭐냐하면 어둠이 더욱더 어두움으로 짙어지는 거예요 학교 아이들이 폭력 받고 자살하는 것은 그게 잘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밥을 못 먹어서 자살하는 게 아니잖아요. 그래서 문제인거예요 때린 학생도 문제지만 죽은 학생도 문제인 것이 밥 못 먹고 사는 게 아닙니다. 주의 말씀 못 지켜서 죽는 게 아닙니다. 왜 마귀가 허락한 것을 다른 사람은 누리는데 왜 마귀가 주는 그것을 나는 누리지 못 하느냐 하면서 죽었다 말이죠.

 

마귀 못 따라서 죽었고 마귀가 주는 지옥 가는 방법에 동참 못해서 짜증나서 죽은 거예요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잘 죽었어요. 사람들이 화나는 이유가 뭡니까? 왜 남들은 가졌는데 그것을 못 가졌기 때문에 화를 내잖아요. 그것을 예수님이 광야에서 보면 그게 주의 말씀도 아니고 아버지를 섬기는 것도 아니고 왜 그것 달라고 안 하고 왜 주께서 시험 당한 것 안 주냐고 그렇게 화를 내냐 말입니다.

 

제가 안양에서 들은 이야기인데 어떤 분이 애가 세 명인데 주일날 컴퓨터를 한 시간만 한다는 거예요 그 소리 듣고 깜짝 놀랐어요. 아이 셋이 데모해서 반란을 할 수 있잖아요. 요새 그렇게 착한 아이들이 어디 있습니까? 그 컴퓨터를 매일 한 시간도 아니에요. 일요일만 배급 주듯이 돌아가면서 한 시간만 하는 거예요 시간을 재서 딱 한 시간만 하는 거예요 문제는 그것에 아이들이 순응을 한다는 거예요 진짜 효심이 많아서 그런 건지 아니면 내가 여기서 살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지 상황 파악을 잘해서 그런 건지 모르지만 세상에 요새 그런 애들이 있답니다. 결국은 그 가정은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줄 알라입니다. 그것을 그 가정이 실천에 옮겼겠어요? 아니면 그런 상황이겠습니까? 그런 상황입니다.

누가 한 2천억 대주고 컴퓨터 일주일에 한 시간 하라고 하면 집에 2천억 있으면 아이들이 데모할겁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언급한 것을 분명히 또 다시 이야기합니다. 우리 몸이 예수님의 말씀을 거북스러워서 우리는 기피합니다. 안 믿습니다. 이 몸은 이미 세상 부귀영화에 맛 들어져 있고 길 드려진 몸이에요. 그런데 주께서 말씀이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 알라,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 이게 어떻게 감동으로 감격으로 어떻게 다가옵니까? 한 순간에 올 때 있어요. 어떤 순간인지 아세요? 이 몸이 병원에 입원해서 몸이 아플 때, 그때는 주여 이 몸은 이제 그만 데려가 주시옵소서! 진짜 이 몸 가지고 버틸 마음 없습니다. 아예 이참에 주의 몸이니까 깔끔하게 해서 하늘의 새 형상 입도록 이 몸을 떠나고 싶습니다.’ 라고 그때는 하는데 암 걸려 죽으면 괜찮은데 이게 나아 버리네요. 전이도 안 되고 나으니까 생각이 또 살살 일단 몸은 괜찮은 상태이고 그런데 뭐 먹고 살지? 또 슬슬 수동, 몸은 수동적 이라고 했지요. 이미 몸을 점령한 어둠의 권세에 이 몸은 이미 순응적이에요.

 

그리고 악마가 제시한 목표외에 다른 목표는 아예 거들떠 볼 생각도 안하고 우리 몸에서 강렬하게 반발해 버립니다. 주께서는 그 몸을 기어이 유지시킵니다. ? 그래야 주의 용서가 니 몸 보다 더 소중하다는 것을 알려 줌으로서 다른 사람에게 나 이래도 구원 받았다는 예수님의 기쁜 소식을 증거하기 위해서입니다.

 

만약에 우리 몸이 아프지도 않고 재벌 되어 버리면 세상의 악마의 권세에 있던 것들이 주님의 축복처럼 와전되어서 증거 될 수밖에 없는 거예요 당신 나처럼 예수 믿으면 당신 복 받아 부자 된다고 증거하는 것은 예수님이 광야에서 마딱뜨렸던 그 마귀의 선물을 증거 하는게 되는 거예요 이것은 마귀 편이 되는거예요 그렇게 세상 것을 원하면 무슨 주의 말씀을 생각할 이유가 없고 하나님 섬길 마음도 없어요.잘 되고는 있는 나를 섬기고 싶지 나 섬기기 바뿐데 언제 다른 누구를 섬길 머리가 갑니까? 안 가지요 정신 없지요

 

그래서 사도바울이 말 하기를 자기 몸에 가시 빼달라고 그렇게 할 때 주께서 하신 말씀이 네 은혜가 너한테 족하다, 충분해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니 몸은 니가 관리 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너가 나를 사랑할 때, 아까 사랑이란 뭐라고 했죠? 처분을 누구한테 맡긴다고요? 가시가 있든 없던 처분을 내가 사랑 하는 분에게 맡겨버리면 그 다음에 그분의 몸으로 처분되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주께서 맡겨놨는데 주께서 안 받는다면 튕겨내면 어떻게 됩니까? 그때는 할 수 없이 다시 건져와야죠. 그러면 지옥 가야죠. 주님에게 맡겼는데 니 몸은 안받아 하고 튕겨 버리면 그것은 할 수 없는 거예요 그것은 지옥 가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주님께 맡겼다고 해 놓고 다시 내 몸이 생각 나거든 그 때마다 계속해서 주께 맡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 계속 이어집니다. ? 주님이 알아서 계속해서 주님을 사랑하도록 조치를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내 몸을 처리 하지 않도록 그때마다 사건을 주셔서 주여 제 몸은 주님 것이지 제 것이 아닙니다. 자꾸 미루는 일들이 벌어져요

 

제가 생각해도 삶이 곱게 조용하게살 수 없습니까? 조용하지 않습니다. 14절을 다시 봅시다. 살전 4:14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찐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이것이 우리의 사는 것 보다 더 중요한 문제라고 이야기 했지요 이것을 위해서 주께서 우리의 몸을 여기에 집어넣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살전 4:15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이 말을 살아 있는 우리 보고 구태여 해야 될 이유가 뭐냐 이 말이죠. 무슨 뜻이냐 하면 어차피 우리가 이것을 믿으나 안 믿으나 장차 그렇게 될 것 아닙니까? 될거잖아요 무슨 이야기를 하냐 하면 요나가 받은 계명이 니느웨에서 니느웨는 40일 지나면 멸망한다는 것을 받았어요 그러면 요나의 생각은 뭡니까? 내가 가나 안가나 망하는 것 내가 구태여 갈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주께서 구름타고 오실 때 되면 죽은 자가 살아나리라 그것을 왜 나한테 이야기합니까? 언제 나한테 물어보고 계획한 것도 아니고 그것을 왜 나한테 먼저 언지를 주느냐 나하고 상관이 없는데 왜 하느냐 이 말 아닙니까? 제가 지금 던지는 질문은 그거에요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 처분을 맡겨 버리면 그 때부터 우리는 무슨 소망이 떨어지느냐 하면 이 땅에서 이런 이런일을 했다는 소망이 소망으로 간주가 되지 않고 주께서는 그것을 밀쳐 버립니다. 왜냐 하면 우리의 소망이라고 하는 것은 전부 다 마귀가 장식해 놓은 아름다운 것들이거든요 마귀가 사람들을 꼬시기 위해서 먹음직도 보암직도 한 그런 것들이기 때문에 진짜 주님께 맡긴 사람은 주님의 뜻이 그 안에 들어오게 되면 세상에서 더 이상 귀한 것은 없어요. 세상에 우리가 기대하고 바랄 것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습니다.

 

남아 있지 않은데 문제는 내 몸의 악마에 있던 버릇 때문에 자꾸 하늘 나라 보다는 이 세상 것을 소망할 수밖에 없는 그런 몸이 계속 있는 거예요 그러면 주께서는 그런 몸을 어떻게 하느냐하면 죽음으로 자꾸 잡아 당겨요 너는 죽는다. 죽어라는 말을 자꾸만 해 줘야 되는 거예요 네가 죽을 몸으로 설치고 탐을 내봐야 결국 너는 죽는 몸이야 죽는 몸으로 이미 장착 되어있어이렇게 이야기 해 줌으로 말미암아 그 다음에 뭐가 주어지느냐하면 그 죽을 몸도 주께서 재림하시면 다시 살아난다는 이 사실을 우리 몸을 가지고 더욱더 기쁘게 우리에게 안겨 주기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주께서 너는 죽어도 다시 살거든 하면 우리는 뭐라 합니까? 주여 그거 내가 알거든요 데살로니가 전서 4장에 나온거 내가 달달 외우거든요 그러면 주님이 뭐라 하느냐하면 그래 이제 네가 한번 죽어볼래? 이렇게 나온다 말이죠. 그러니까 그것을 네가 믿느냐?’ ‘믿습니다.’ ‘네 몸도? 네 마음이 믿는 거야? 네 몸이 믿는 거야?’ ‘마음으로 믿지요’ ‘몸은 안 당기지?’ ‘몸은 다른데 반대로 가지요그러니까 주님으로 하여금 그 반대로 하는 그 몸의 누리는 그것, 그 몸과 다른 몸을 주께서 준비 하는데 그 구름타고 오시는 몸이죠.

 

우리 몸과 전체의 대비는 무슨 몸을 바라보게 되어 있다? 다시 오실 예수의 몸을 내 몸보다 더 기쁘게 영접하고 고대하고 있느냐? 그것을 지금 묻고 있는 겁니다. 그 이야기입니다. 죽을 너의 몸보다도 지금 살아계신 몸을 네가 더 보고 싶어 하느냐 하는 겁니다. 매일 거울을 보면서 바르고 있는 이 몸보다도 빛나는 주의 영광, 주의 얼굴을 생생하게 보는 네가 보고 싶어 하느냐? 라고 묻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음은 봤는데 우리 몸은 시쿵둥 하고 있지요 아직 자식도 키워야 되겠고 적금 탈 날도 남아있고 한 15일 지나면 런던 올림픽 하는데 메달 따는 것도 봐야겠고 sk가 만날 지고 있는데 부산가면 야구가 종교거든요 지금 2등 하고 있는데 롯데가 우승하는 것 가을에 야구하는 것 보고 재림하던지 해야 될 것 아닙니까? 부산가니까 야구가 난리났어요 상상을 초월합니다. 부산은행도 야구이기면 이자를 더 쳐줘요

 

그러니까 사람 사는 것이 정신으로 종교로 사는 게 아닙니다 몸이 어디로 당기느냐에 따라서 사는 거예요 제가 다시 이야기합니다. 이 몸은 이 세상 분류가 안 됩니다. 우리 몸을 혼자서 가져다 놔도 다시 거기서 드라마 보고 있을 거예요 이 몸은 도저히 감당이 안 되고 가누지를 못해요 그러니까 이 몸은 다루지를 못하니까 누구한테 맡긴다? 그냥 주님한테 맡깁시다. 주님께 맡기면 우리가 몸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몸의 정체를 생생하게 잘들 보여 주실거에요 그것도 환경에 따라서 상황에 맞춰가면서 우리의 몸이 이 정도라는 것을 보여 주는 적지않은 상황까지 만들어 주시면서 봐라 네 몸이 네가 관리가 안돼지? 관리 불가능하지? 봐라 이 몸 내가 건진다. 죽을 몸을 내가 친히 살릴 몸으로 찾아온다. 그 몸이 바로 예수님의 몸이라는 거예요

 

사도행전 1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구름타고 올라갑니다. 그때 천사가 등장하지요 제가 주일학교 애들한테 설교하면서 설교한 제가 마음이 참 무거워요 요새 천사 믿는 아이가 누가 있습니까? 실제로 천사가 왔거든 하려니까 목사님 그것은 시험에 안 나오는데요하는 이런 소리 나올까 싶어요. 요새 천사가 인기가 없어요. 성령도 인기 없고 예수도 인기 없어요. 가짜 예수는 인기 있지 진짜 예수는 인기 없어요.

 

주일학교 설명하면서 은혜 받은 것이 뮌가 하면 천사가 하는 말이 주께서 올라 간대로 오신다는 거예요 올라 가신대로 온다면 우리는 주님 만나려면 어디 가야 되냐 하면 비행기 대절해서 감람산에 올라가야 돼요 그 산에 올라가야 돼요 그런데 주님께서 뭐라 했습니까? 우리 몸 위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몸 위주로 하게 되면 우리가 나이지리아에 가도 가야산 숲속에 가도 주의 재림을 주의 오심을 봅니까? 안 봅니까? 우리는 허접스런 몸을 가지고 있더라도 항상 주님 재림하실 때 화투나 쳐다보고 있는 그때라도 주의 재림을 볼 수 있는 몸으로 다른 몸으로 그때 그 몸으로 오는 거예요 그 말은 뭐냐 하면 우리의 시간과 공간을 내 몸 중심의 세상 공간은 완전히 주께서는 무시하는 겁니다.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현재 세상을 보는 모든 세상관이 내 몸 쪽으로, 내 몸 중심으로 깔려있어요. 오늘 몸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내 몸 중심으로 활주로가 깔려있어요. 내가 여기 있다. 내가 여기 있으니까 당신은 저기 있다. 저기 있다는 것은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전제로 했을 때 저기있다가 되는 겁니다. 이런 식으로 깔려있어요.

 

하나 예를 들면 어느 도시가 있다 그런데 어느 도시가 없다는 말은 그 안에 무슨 뜻이 있느냐 하면 도시는 없고 도시대신 폐허가 있다는 말을 하는 거예요 도시가 와 있었는데 지금 그 도시가 없거든 그것을 다른 말로 하면 지금 폐허만 남아 있다는 거예요 폐허만 남아 있음, 전에는 도시 있음 그러니까 폐허 떼고 도시 떼면 남는 게 뭡니까? 뭐든지 있음으로만 있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에서 있음은 누구밖에 없느냐 하면 예수님 중심으로 볼 때만 있음이 있어요. 예수님만 중심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뭡니까? 우리가 있어도 없음이 되는 거예요 주님께서 오시면 비로소 모든 것이 없던 것들이 주님과 엮여져서 있을 것은 있고 없을 것은 없는 것으로 전부 다 드러나는 겁니다. 너는 구원받아야 되고 너는 영광된 부활되야 되고 너는 저주의 부활로 되야 되고 예수님만이 있음으로서 제 효과와 제 기능을 발휘하는 그때가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날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는 그날을 안 기다릴 수가 없어요. ? 그동안 우리는 내 중심으로 산다고 너무 피곤해요 올 12월에 대선에 누가 될까 기다리느냐고 피곤해요 그것을 안철수 피곤감이라 해요 나올지 안 나올지 온 백성을 피곤하게 만듭니다. 사실 우리는 밑에 벌레처럼 기다리는데 기다리면서 우리는 자꾸 높이를 가져요 너는 몇 쎈치? 네 지위가 어느 정도? 우리는 사실 벌레인데 기어가면서 나름대로의 자기가 후광을 만들어서 서로 서로 장난감 자동차 색깔 칠해서 반짝반짝 빛나는 것처럼 만든 것처럼 그렇게 기어가봐야 그것은 전부 다 현재 우리 몸이 있음에서 나온 있음의 연결 고리입니다.

 

그 있음을 철학에서 뭐라 하느냐 하면 선이나 good이라 하는 겁니다. 미국의 나이야가라 폭포가 좋지요 그게 왜 good인지 압니까? 내가 거기에 그것을 보고 싶어 하고 내가 돈을 내서 그 자리에서 구경하고 싶어 하는 대상이기 때문에 내가 그 자리에 합류하는 그림이 되기 때문에 good이 되는 거예요 북한의 아오지 탄광은 good입니까? bad, 나쁜 겁니까? 나쁘지요 왜 나쁜지 알아요? ;내가 거기 있다이것은 상상도 못하지요 아이고 안 돼, 나는 안 돼,‘ 지금도 남자들도 꿈에 군대생활하면 , no good!' 군대는 조폭이니까 날마다 얻어맞고 살다가 힘들어 못 살겠어요 반항도 못해요 반항하면 소리 없이 죽어버려요 죽는 게 왜 싫은지 알아요? 내 있음이 사라지니까 싫은 거예요

 

그러나 이 세상이 좋다는 것은 어떤 경우가 좋으냐 하면 내가 가기 싫어하는 것은 무조건 bad, no good 이야 안 좋고 내가 가는 곳은 아무리 나쁜 곳이라고 욕을 해도 내가 가는 곳은 뭐가 오느냐 하면 good이 되는 겁니다. 세상을 알고 싶다. 이제 알려주마 이게 세상이다. 우리가 어떤 tv에 아름다운 유럽 풍경이 보기에 좋지만 막상 여행가방 싸서 거기에 가게 되면 별로 안 좋은 이유가 바로 내가 거기에 가담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이 데리고 가서 찡찡 울지, 라면 끓이려고 하지, 솥이 작다고 하지 지금 tv볼 때는 그렇게 아름다운 것을 막상 내가 거기에 포함시키니까 그 다음부터 no goo입니다.

 

내가 내 존재를 보고 우리는 환호와 박수와 찬양을 보내는데 그게 내 성전이기 때문에 그래요 내 성전을 내가 깰 이유가 없고 깨고 싶지도 않아요 그런데 그 성전을 무참하게 깨줄 때 그냥 깨주면 싫어요 누가 깨줘요? 진짜 구원, 진짜 선, 진리와 길인 주님이 와서 깨줄 때는 그것을 우리는 사랑이라고 받아들이자는 겁니다.

 

처분을 주께서 알아서 우리의 몸을 처분하는 거예요 없애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활용하는 겁니다. 누구 좋으라고? 나 좋으라고가 아니라 누구 몸 좋으라고 우리를 이 땅에서 활용하는 겁니다. 우리는 그때부터 기분좋게 이야기해요 나는 no good! 나는 죄인 중에 괴수! 나는 good 아니야 나는 두 번 다시 good 안해 그것을 아주 기쁘게 증거 하는 것, ‘그럼 너 죽는데?’ ‘나 죽어도 좋아 다시 살 수 있어이게 바로 주님의 몸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죽을 우리 몸과 죽었다가 살아나는 그 몸에 대비를 사용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이런 소식을 전하는 겁니다. 우리가 왜 돈도 안 되고 직장에 도움도 안 되는 이 이야기를 봐야 되느냐 하면 바로 우리가 미쳐 분석하지 못한 내가 굿이 아닌 것은 오히려 슬픈게 아니라 기쁘게 받아드려야 돼요 여기 우리 집사님 보고 집사님 참 좋은 주부지요?’ 하면 우리가 예수님의 복음을 모르면 그럼요 옆집에 주부보다 제가 훌륭합니다.’ 이렇게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알고부터는 나는 노굿 주부, 나는 좋지 않은 죄 많은 주부입니다.’ 이것을 아주 기쁘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주부를 때려 치우지 그렇게 싫은데 왜 합니까? 하면 주께서 처분을 주부하라고 나한테 맡겼습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계속해서 노굿 주부입니다.

 

나쁜 주부, 좋은 주부 되는 것이 사명이 아니고 그것은 산 위에 바리새인 되는 것이고 계속해서 나는 이런 면에서 나는 주부하면서 내 중심으로 살고 있구나 하는 것을 깨닫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만 진짜 좋은 분이라는 겁니다. 그것을 증거하는 용도로 우리를 활용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 마지막 이야기를 우리한테 하는 거예요

 

마지막 이야기를 다른 식으로 한번 설명해 볼께요 여러분 잘 아는 겁니다. 끝이라는 것을 주께서 미리 주셨습니다. 끝을 주셨다는 것은 끝이라는 것은 우리가 시간 다 가봐야 아는 것이 아니고 이미 예수님께서 세상 끝을 만들어 버렸어요 십자가에 죽고 난 뒤에 부활 하실 때 세상은 어둠속에 있다는 것이 이미 들통났습니다. 그 끝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안에 와버립니다. 와 버리면 우리는 그릇이 되고 우리안에 뭐가 있느냐 하면 끝이 여기에 담기게 되는 겁니다.

 

야구에 마지막에 나오는 투수 가지고 뭐라 하느냐 하면 구원투수라고 하지요 우리나라에서 제일 잘하는 구원투수가 오승환이라는 구원투수가 있습니다. 시속 150넘는 직구를 던지는데 그 사람의 별명이 뭐냐? 끝판 대장입니다. 이 선수가 공 던지려고 나오면 노래가 나와요 무슨 노래냐? ‘학교종이 땡땡땡게임 끝났다 이 말입니다. 해 보나 마나 끝났다 말입니다. 끝 판단 대장, 판을 끝내는 우두머리 대장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끝판대장 마지막 구원투수, 메시야 아닙니까? 메시야 투수를 우리 속에 이미 장착, 탑재된 거예요

 

우리가 사는 것은 끝에서 현재로 거꾸로 파견 근무하는 겁니다. 21세기의 외과 의사가 흥선대원군 시대의 파견근무하는 그 드라마 이름이 뭡니까? 닥터진입니다. 그런데 그 드라마 보면 아슬아슬해요 왜냐 하면 우리 같으면 죽어도 21세기에서 갔으면 넉넉하게 임금 나와! 이래야 될텐데 벌벌 떨고 있어요. 끝판 대장이 아니에요.

 

우리의 생명은 이미 하늘에 갇혀 있지요 하늘에 있다는 말은 마귀가 손을 댄다? 못댄다? 마귀가 캐가 작아 손에 안 닿잖아요. 우리 생명이 있는 금고에 스위스의 비밀 금고도 못 미쳐요 스위스 비밀금고보다 더 센거예요 거기 끝판대장이 우리에게 성령을 줌으로서 우리를 근무 시키는데 어디에 근무 하느냐? 현재에 근무하라고 현재 우리가 있는 직장 여기에 근무하라고 파견 근무 시켜 버려요 파견 근무를 시켜 버리면 그때부터는 우리의 사명이 끝을 미리 안다는 그 사명이 우리의 모든 행동에서 펄펄 냄새가 나요 그렇게 냄새가 나는 것을 사도 바울은 뭐라 했느냐 하면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곳에 자유가 있다고 했습니다. 가질 수 있는 자유가 아니라 안 가져도 되는 자유, 내 목숨을 지켜야 되는 자유가 아니라 내 목숨을 버려도 괜찮은 자유, 처분을 사랑하시는 주님이 나를 임의로 처분하기 때문에 이게 사랑이기 때문에 나는 거기에 대해서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면 돼요 이렇게 하던 저렇게 하든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 사도바울이 자유를 얻는다 했습니다.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있는 겁니다. 이것은 율법에서 벗어난 자유에요 만약에 우리가 미래의 소년 코난이 아니고 현재에서 미래로 간다면 우리는 이것을 해야 되나? 안 해야 되나? 이렇게 되지만 미래에서 보면 우리는 이미 죄인이에요. 해도 죄인이고 안 해도 죄인입니다. 주께서는 그 자체를 의라는 구조 안에서 죄 되게 했기 때문에 그 자체가 의가 되는 겁니다. 주님이 의되기 위해서 우리는 죄인이 돼야 되는 거예요 따라서 내가 하는 행동을 나 자체가 처분을 놓으면 돼요 주께서 무슨 일을 시키느냐가 중요하지 내가 이거 해서 얼마나 훌륭한 사람으로 드러나는가는 우리가 생각할 필요도 이유도 없어요. 그것은 우리가 할 일이 아닙니다. 끝판 대장되시는 분이 우리와 함께 있으면 우리의 하는 모든 행동들은 끝에 있는 기준만 우리가 제시하는 거죠.

 

당신이 강도인데 어떻게 구원받아?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구원받아그 이야기만 나오면 되는 거예요 일을 엉망으로 했는데 당신 이래 가지고 살려고 하느냐? 안 살면 돼지 뭐 왜? 주의 피로서 이미 용서 받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미 우리는 죄인으로 용서 받은 상태를 그대로 현재까지 가져와서 현재에서 미래로 가는 인생관이 아니고 미래에 완성된 인생관을 가지고 현재 우리에게 마음껏 자유로서 보이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그리고 그 보이는 상황은 우리가 만든 상황이 아니고 우리 몸은 수동적이라서 내가 능동적으로 뭘 할까 말까 하는 것은 아무 짝에도 소용없습니다. 될 일이 없어요. 세상에 우리 뜻대로 아무 것도 안 됩니다. 내 몸 뜻대로 안돼요

 

살전 4: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살전 4:17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죽은 자가 쓰인 자입니까? 이것도 서열이 있는 겁니까? 그럼 죽은 자는 지금 어디에 가 있다는 말입니까? 이게 신앙으로 정립이 안돼요 정립 안되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어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언어가 주님의 끝을 담을 수 있는 언어가 없어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지금 죽은 자가 어디가 있습니까? 죽은 자가 어디가 있느냐? 성경에 보면 낙원에 가 있다 합니다. 낙원에 가 있다는 말은 지금 대기소인지 아니면 영원히 안식해야 될 그 장소에 있는지? 그렇다면 변화산의 엘리야와 모세는 대기소에 있는지? 천국이 어디에 있습니까? 장소라는 것은 나타날 때 비로소 장소가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장소를 우리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잡을 수가 없어요. 주께서 나타나면 장소가 되는 겁니다. 우리가 이 장소에 오세요 라고 약속해도 소용없어요. 지금 변화산 가도 주님 안 계십니다. 안 계신데 계실수도 있어요. ? 나타나기만 하면 계실 수도 있어요.

 

장소 문제는 우리 몸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몸에서 출발하거든요 니가 구름타고 본대로 온다고 해서 그 장소에 간다고 구름타고 오는 게 아닙니다. 주께서는 아프리카 밀림속에 있더라도 주께서 나타나심을 볼 수 있습니다. 주께서 나타나심이 주님 몸에서 나오는 새로운 장소 개념으로 오기 때문에 그 장소의 개념은 우리의 장소의 개념을 능가하기 때문에 우리가 어느 장소에 있더라도 주님 을 못 보는 그런 일은 없다 이 말이죠. 구름이 가려서 못 보겠다 이런 일은 없다 이 말입니다. 그거만 없는게 아니고 우리가 죽어서 죽은 사람은 어디에 집합 하느냐 그 장소 문제도 우리의 언어로 담을 수 없습니다.

 

언어로 담을 수 없는 장소 문제를 무엇으로 이해하느냐 하면 사건으로 이해합니다. 이것을 사건으로 이해 한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죽은 자들이 어디 있느냐 하지 말고 지금 죽은 자들이 주와 함께 있거든요 그러면 누구와 함께 있다는 것이 우리한테는 어느 장소냐고 묻는 게 어떤 사건 안에 품고 있습니까? 어떤 사건 안에 품고 있습니까?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어떤 사건에 품고 있냐 하면 예수님의 부활과 재림 그 가운데 사건 안에 있습니다. 이렇게 답변하는 거예요 질문을 이렇게 했어요. ‘목사님, 먼저 죽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지금 어느 장소에 있습니까?’라고 제가 어느 장소라는 언어를 사용했잖아요 그 장소라는 언어를 우리가 납득을 한다고 생각을 하는데 납득이 되면 안되는 거예요 왜냐 하면 우리 몸에서 나오는 모든 문자는 이 내 몸이 납득이 되는 언어에요 나한테 납득이 되는 언어를 주께서는 그 언어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주님만 납득이 되고 우리는 납득이 안 되고 우리가 이해되는 것은 주께서는 그 납득된 것이 사건화 될 때에만 비로소 납득이 되도록 하는 방법이 주님이 하는 방법이에요. 이 같은 말씀도 같은 백번을 읽어도 어느 순간 읽었던 그 말씀이 딱 꽂히는 순간이 와요 그때는 사건입니다. 제가 아남전자에 다닐 때 그전에 십자가 이야기 많이 했습니다.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 십자가 피로 의롭게 되었다 그렇게 많이 이야기했는데 부활절 목사님 설교하는 가운데 우리는 경건치 않은 자이고 죄인된 자인데 예수의 피로 다 이루었습니다. 의롭게 되었다고 그 사람은 승리한 거예요 성경 본문을 그냥 읽었어요. 그 본문이 세상에 수년 동안 교회에 충성 봉사했던 몸을 한꺼번에 다 날려 버렸어요. 그렇다 십자가 피라잖아 피, 피로서 의인되었잖아요 그동안 의인 되려고 뭐 한 거예요? 그동안 완전히 속았어요 처음에 목사가 나를 속인줄 알았어요 목사가 속인게 아니고 내가 내 몸이 잘난 몸으로 만들기 위해서 내가 스스로 이런 소리에 속고 싶어 했던 거예요

 

그게 내 몸, 육에서 나온 거예요 내 육이 잘되면 뭐든지 하겠다는 내 몸이 그렇게 하소연을 해서 그런 것만 골라서 선택해서 그것을 실천에 옮기려고 애썼어요. 그전에 성경에 분명히 있었어요. 로마서 5장에 있었어요. 내가 오기 전에 있었다 말입니다. 그런 성경도 수십 번 읽었어요. 읽으면 무슨 소용 있습니까? 사건이 벌어져야지요 어떤 사건? 내가 내 몸을 관리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내 몸을 관리한다는 그것이 분명해 지는 사건이 와야 성령이 와야 그래서 우리는 자유를 얻는 거예요

 

결국 자유는 남한테서의 자유가 아니고 내가 내 몸을 다뤄야 한다는 데서 벗어나는 자유입니다. 내가 내 몸을 다루었던 거기에서 벗어나는 거예요 주께서 지금도 내 몸을 다루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소급해서 보니까 옛날에 내가 다루었던 그 시절도 이미 주께서 다루어 왔었습니다. 나중에 와서 보니까 그전부터 그전까지는 성령 받기 전에는 내 몸을 내가 다루고 했는데 나중에 받고 보니까 옛날부터 태어날 때부터 창세전부터 이미 십자가 피를 알라고 나한테 구원사건주려고 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본인 사건을 증거하려고 그동안 이끌어 온 거예요 그동안 차분하게 기획하고 준비해 온 겁니다.

 

올림픽 할 때 그냥 올림픽 하자 해서 이렇게 하지 않잖아요. 다 준비 하잖아요 올림픽 성화할 때 달리고 하잖아요. 이미 창세전부터 준비된 거예요. 이것이 디모데전서 1장에 보면 나오잖아요 창세전에 나같은 죄인을 이미 창세전에 구원받기로 주께서 했다고 당신도 믿습니까? 하고 사도 바울은 우리한테 성경보라고 내 미는 거예요 우리가 백번도 더 봤어요. ‘아 사도 바울은 좋겠다하고 이렇게 끝나버리는 거예요 이게 무슨 소리 에요? 사도 바울 저 혼자 구원받으면 되겠어요? ‘사도 바울은 좋겠다!’ 무슨 이야기에요? 왜 본인 사건이 안 되느냐 이 말입니다. 형제간의 사랑이라 하는 것은 몸과 몸의 부딪침이 아닙니다. 주님의 같은 사건이 있습니까? 할 때는 형제간의 사랑이라 말 할 수 있고 내가 내 처분을 할 때는 사랑이 뚝 끊어져버려요 내가 이만큼 해 줬는데 당신이 나한테 해 준게 뭐있나? 만날 부부싸움이 그게 아닙니까? 내가 이 만큼 해 줬는데 당신은 나를 이용했구나 이런 식으로 하지요 이것은 자기 몸의 사건이지 주님의 몸의 사건이 아닙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데 당신도 나한테 장단 맞춰줘야지 이렇게 되면 안 되지요 일방적으로 무리가 보이잖아요 예수님의 사건은 너, 나라는 자체의 경계선을 인정하지 않고 단일 집합체로 봅니다. 모두다 똑같은 죄인이고 죄인을 증거해야 될 사명이 지녔다는 것으로 끝나는 겁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 것이지 너가 나를 사랑한게 아닙니다. 그게 한 테두리 안에서 주님 그리스도의 몸만 보이면 그것은 자동적으로 사랑이 되는 겁니다. 우리 집의 자녀들이 이 사랑의 사건을 받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참 누구 집안은 그렇게 효자라서 좋겠습니다만 커서도 그럴까? ‘아빠, 엄마 난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했어요 그때 너무 얼마나 감사한지이런 자식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요 남은 휴대폰 사주고 남은 뭐해주고 해 주는데 아빠, 엄마 그것도 해 준거라고?’ 혹시 꿍 하고 억압되어 폭발 직전이 아닌지? 아니면 정말 하나님께서 아버지 엄마 같은 분 보내 주셨어요라고 사건을 주님을 경유해서 보고 있지 않은지?

 

어디서 함부로 사랑을 이야기합니까? 사랑이라 하는 것은 그냥 주님한테 처분을 맡기는 거예요 저 사람이 그렇게 나왔다 하지 말고 주님이 그렇게 하게 하신거예요 네 몸은 먹는 것 입는 것으로 그것만 해도 고마운줄 알아라 하고 그 이야기하는 거예요 배는 이제 불려놨고 딴거 챙기자 그렇게 나오지 말라 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굶어 죽으란 말이 아니고 하지 말라가 아니라 어떤 일을 하도록 하는데 그 일은 역시 우리의 몸은 내가 내 몸이 입는 것 먹는 것으로 족하지 않고 다른 세상적인 것을 탐을 내는 그런 몸을 지녔구나 하는 것을 다시 발견해서 이 몸 빨리 죽이고 다시 살려주옵소서 하는 그런 소망을 주님의 사건, 내 사건 버리고 주의 사건이 내 사건보다 더 소중함을 증거하는 용도로서 우리고 그렇게 사용하는 겁니다. 누가? 이 성경 말씀을 그것을 그렇게 유도 하고 인도해 가고 있는 겁니다.

 

살전 4:18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

 

이 이야기 들어 보니까 그럴 듯 하지요 주의 사건이 함께 있다, 이미 주께서 죽으시고 부활한 사건 재림 이전의 사건 속에 놓여있는 거예요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뭐하라 했습니까? 위로하라 위로할 것이 뭡니까? 돈 가지고 위로할까요? 뭐 가지고 위로할까요? ‘주께서 다시 오십니다.’ 그것으로 위로 받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사랑하는 주의 형제 사이입니다. ‘또 종교 이야기야? 그거 뭐 돈 되는 거야?' 이렇게 하면 그것은 위로가 아니고 서로 화를 돕는 거지요 괜히 거룩한 것을 진주를 개한테 주지 말고 한번 던져 봐서 안 그러면 물릴 수가 있어요. 만약에 주께서 오신다고 위로 하신다면 이것은 인물, , 학력, 재산, 가문, 나이 아무 필요 없이 그것은 거듭난 새로운 새 생명의 행렬입니다.

 

기도 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가족끼리 있는 것으로 족하지 말고 예수믿는 가족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주님 소식과 주님 이야기가 내 이야기보다 소중하고 귀하고 축복인 것을 저희들이 수용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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