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한 뜻

김용옥의 몸철학(921201)

아빠와 함께 2013. 4. 20. 17:13

김용옥의 몸철학과 성경에서의 몸의 개념

1992년 12월 1일  이 근 호 목사, 성경신학의 실제적용 3 (p 293)


 1. 김용옥의 사상

 흩어져 살고 있는 인류는 항상 응집력을 나타낸다. 그것은 전쟁이라는 폭력의 형태든 화친이라는 평화적 형태든 다시 하나로 규합 되려는 속성을 지닌다.

 언어의 혼란에서 오는 장애로 인해 온 천하로 흩어진 인류가 이제 언어의 장애를 극복하고 같은 정신 밑에서 하나의 국가처럼 존재하기를 모든 인류는 은근히 바라고 있는데 그 이유는 인간이 소지한 위대성을 직접 확인하고 싶은 본능 때문이다. 이 본능을 이기지 못하고 구체적 대안을 제시하는 인물이 요 근래 나타났으니 그가 김용옥이다.

 그는 소망하는 게 하나 있다. 모든 인류가 동일 사상 밑에 통일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작업을 하는데 있어 큰 장애물이 있다. 그것은 서양이면 서양, 동양이면 동양, 서로가 갖고 있는 기존의 사상에 철저히 맹신되고 있다는 점이다. 김용옥은 이 양 진영의 소속된 인간들의 무지를 폭로시킬 필요가 있음을 감지했다. 서양은 동양사상으로 치고, 동양은 서양사상으로 치는 것처럼 보이게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서양이나 동양이나 특정한 시각에서 볼 때에는 동일한 맹점을 지니고 있다. 이 특수한 시각이 무엇인가? 그것이 몸철학이다.

 인간이라는 몸을 떠나서 그 어떤 것도 발생될 수 없다는 사상이다. 그런데 그 동안의 서양사상과 동양사상은 이 극히 당연한 진리를 외면하고 허상에 불과한 개념에다 모든 것을 걸어 놓고 거기에서 진리를 찾고자 했다. 서양에서는 하나님이라는 신(神) 개념이었고 동양에서는 자연이라는 신(神) 개념이었다.

 이제, 김용옥은 하나님이라는 개념의 허구와 자연이라는 개념의 허구성을 폭로하므로 서 모든 인류의 헛된 시도를 만천하에 공개하려고 한다.

 이것은 고발이라는 형태로 시도된다. 그리고 그 고발은 기존 사상들로부터 반발을 불러일으킬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김용옥은 그들이 무지에 안주하여 살고 있는 것에 이미 적개심과 역겨움을 갖고 있기에 조금도 두렵지 않다.

 김용옥은 지금 순교자가 되려고 한다. 역사만이 이해할 의로운 죽음을 가지려고 한다. 그는 지금 혁명을 하고 있는 것이다. 참된 혁명은 철저한 [자기희생] 없이는 안 된다고 한다. 이것은 곧 독재를 타도하는 나의 독재마저 타도하는 것으로 자아혁명은 자기가 신봉하는 神마저 타살하지 않고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여기서 말하는 神은 기독교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기독교국가에서 제시한 과학적 세계관까지를 말한다. 종교를 신봉할 때, 거기에 따른 문화도 신봉된다. 이때를 위하여 무수히 확인하고 또 확인한바 있다. 세상이 온통 잘못된 사상으로 뒤덮여 있어 그것의 노예가 되어있다는 것을!

 그는 우성 자신과 먼저 싸웠다. 그것을 위하여 진리의 최극단까지 가야만했다. 그곳이 하버드대학 박사과정이다. 과연 내가 생각하고 있는 바가 나의 독단에서 나오는 실수가 아닐는지, 아니면 다른 진리를 참작하지 못해서 나오는 성급하고 경솔한 주장이 아닐는지를 확인하기 위하여 세계 최대의 장서를 보유하고 있는 거기에서 타인의 주장에 귀를 기울려야하는 세월을 보내야 했다. 이것은 곧 자신의 한계를 본인 스스로가 철저히 인식하고 있다는 겸손에서 나오는 양보의 기간이었다. 그러나 진리를 쥔 상태에서는 더 이상 자신의 희열차원에서 머물 수는 없었다. 진리를 이미 감 잡은 차원에서 다른 책들을 보니 모든 주장들의 허점투성이고 불실하기 그지없다. 좀 괜찮고 정력을 쏟았다는 걸작들도 결정적인 대목에서 갈피를 못 잡고 있는 것이 단숨에 눈에 들어온다. 더 이상 무엇을 주저할 수 있는가! 너무나도 아닌데. 모든 것이!

 나 김용옥이 잘났다는 게 아니라, 어떻게 해서 세상 전체가 돌 같은 나 하나 보다도 못하는가 안타깝기 그지없다. 정말 내가 교만하다면 이 진리를 하늘에도 사랑하기에 나 김용옥이 철저하게 붕괴되고 욕 얻어먹는 것이 거름이 되어 다수라도 그들의 무지에서 해방되었으면 하는 것이 김용옥의 진정한 속셈이다. 그는 국내에 들어와서 많이도 부딪쳤다. 옳은 말이고 옳은 주장에도 불구하고 실효성 없는 주장처럼 매도되었다. 김용옥은 그런 소용돌이 속에서 세상을 읽었다. 도토리 깍지 보다 더 단단한 껍질들로 학계와 정치계가 무장되어 있는데 그 껍질은 바로 이기주의였다. 이기주의는 시기와 질투를 낳고 진리를 매장시켜 버린다. 그리고 정교수라는 자신의 입지에도 서서히 그런 껍질들이 뒤덮으려고 했을 때, 김용옥은 발악한다. 그 발악이 바로 양심선언이다. 자기와의 싸움에서 지지 않기 위해 자기가 자신을 매장하는 처사이다.

 평소에도 입버릇처럼 외쳤던, 진리전파자와 실천자간의 근접시도가 결국에는 양심선언이라는 극단적 행위로 절정을 도달한다. 하나의 이벤트요 해프닝이다. 그리고 드라마요 행위예술이다. 몸철학의 하이라이트는 자기 붕괴라는 불꽃놀이로 대미를 장식한다.

 그 이후의 그의 할 일은, 늘 그 때 그 몸철학의 절정 속에 머무르면서 그것으로 세상을 고발해 나가는 작업에 몰두하는 것이다.

 나는 양심선언을 했으니깐 떳떳하게 할 말이 있다는 것이다. 이미 죽음 이후의 몸이니 무슨 해악도 더 이상 자기에게는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만 것이다. 김용옥은 큰 대가를 치르고 자유를 되찾았다. 그것도 한 단계 급등한 자유이다. 말만하는 뒤꽁무니 숨기기 바쁜 이중인격적인 학자들이 내세우는 자유가 아니다. 자신도 과거 정교수 시절 때는 그런 벽박이 자유였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평면으로 존재하던 자유체(自由體)가 입체로 세상을 활보하게 되었다.

 그는 백두산에 기어 올라간다. 거기서 개벽을 맞을 채비를 한다. 김용옥의 몸에서 명암은 두 쪼가리로 극명하게 분할된다. 개벽을 맞이하는 앞에는 현란한 햇살조각들이 틘다. 그러나 반면 세상을 행해 있는 뒤쪽에는 먹물 같은 짙은 어두움이 그대로이다. 그는 백두산에 올라 개벽이 다가오는 능력을 감당 못해 좋아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 으악! 하고 백두산을 깨뜨려버린다. 개벽의 氣가 사방팔방 흩어지기 시작한다. 그 氣로 말미암아 하늘도 살아나고 땅도 살아난다. 아! 모든 게 개벽천지이다. 새천지이다. 우주의 순환이 氣의 도움으로 개벽시대를 가져왔다. 하나님에게 억눌렸던 인간들이 제 몸을 찾았다. 氣의 도움으로 찾았다. 이제부터는 누구로부터도 지배받지 말고 氣 속에서 氣를 누리면서 살자꾸나!

 김용옥의 기존세계의 고발은, 그동안 자연세계로부터 자신의 몸이 이유 없는 학대를 받아왔다고 간주하면서 출발된다. 그는 한창 포부에 부풀어있을 때 병자였다. 그는 여기서 복수심이 발동한다. 활달하게 천연무구하게 뛰어다니는 어린이의 모습 속에서 자기의 이상(理想)을 되찾는다. 그래 저 모습이 원래 나의 모습이었어. 나의 몸도 저 아기의 몸과 다를 바 없었던 거야. 그런데 이게 뭐야 나는 왜 환자가 되어야 되나? 누가 나를 이 꼴로 유도했나? 아니야, 모든 원인은 내게 있어! 내가 세상학문이라는 귀신에 씌었던 거야. 세상이 뭣도 모르고 이야기를 하는 것에 나도 맹목적으로 추종했던 것이 잘못이야. 간단하고 단순한 세상원리를 바로 눈앞에 두고 무슨 진리를 찾겠다고 남들이 가르쳐준 대로 하늘나라 하나님에게 까지 물으려고 신학교에 입학했던고! 진리는 상식이야, 진리는 단순한 거야! 이것을 증명하고야 말리라! 모든 세상의 철학책을 다 뒤져서라도 이 진리의 진리 됨을 납득 시키고야 말리라! 그리고 세상 사람들은 아직도 허깨비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고 있음을 폭로시키고야 말리라. 왜 세상 사람들은 이 사실에 눈이 어두웠을까?

 무엇이든지 비판의식으로, 적의 약점을 찾아 정확하게 목표물에 공격하기 위해 공부를 하면 이해가 초인적으로 수월하게 이루어진다. 김용옥은 이것을 자신의 두뇌발달에 근거하지 않는다. 천재성 운운을 그는 용기로 풀이한다. 용기 있는 자가 천재이다. 용기, 즉 용감이란 색다른 색채를 소유하고 있다는 자부심에 의해서 발생되는 의식이다. 김용옥은 처음부터 색달랐다. 그는 자기를 학대한 세상에 대하여 적개심을 갖고 있다. 이 적개심은 시비 거는 의지로 이어지며 순교자적 기질로 연마되어갔다.

 그는 모든 현상들을 몸을 중심으로 해서 벌어지는 氣라는 보편적이면서도 변화 가능한 활력소의 활동으로 풀이한다. 막상 氣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답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氣기란 언어의 범주 밖에서 활동하기 때문이다. 다만 氣가 들어오면 그 몸을 자유롭게 되는 특징이다. 이것을 그는 자율(무위)이라고 하고 반대로 세상을 압박하고 과거에 자신의 몸을 압박한 그 문명을 작위(作爲) (타율) 문명이라고 한다.

 그러면 어째서 오늘날 동안 세상사는 몸을 제한하고 氣를 속박하는 문명이 되었는가? 그것은 모두다 몸과는 무관한 몸 밖의 초월인격 내지는 초월관념의 노예가 되었기 때문이란다. 특히 기독교교리가 그러하다고 말하고 있다. 물론 동양철학도 예외가 아니다. 인간의 몸을 무시하고 그것을 학대하고 노예로 삼는 문명은 왕을 중심으로 한 왕정국가의 등장으로 그 증거가 확실하다. 왕정국가가 동양이나 서양 예외 없이 기나긴 세월동안 창궐했다는 것은 철저하게 氣를 속박했다는 근거가 된다.

 서양사는 기독교정신이 주류를 이루어 있는데 사실은 유럽에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부터 있었던 플라톤주의와 담합이 잘된 소치에 불과하다. 헬라철학의 핵심은 [존재]에 있다. [존재]란 [변화]와 [운동]을 한시적인 것으로 취급해 버린다. 모든 변화는 [궁극적 존재]가 [시간]과 [공간] 속에 자신의 흔적을 약간 보여준 것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이런 사고의 틀 속에 사는 인간들의 희망과 바램은 바로 [그 궁극적 존재]로부터 호의를 얻어내는 것이다. 바로 이런 행운과 축복을 기다리는 염원을 충족하기 위해 등장되는 자기 있는데 이들이 바로 왕이다. 왕은 제사장이다. 왕은 무당이다. 왕은 [궁극적 존재]의 아들이며 현시이다. 백성들은 왕을 보이는 신(神)으로 간주한다. 국가란 영토의 경계로서 설립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땅의 무당의 영향력에 의해서 마음이 하나로 응집됨으로 설립된다. 그 왕께 복속되고자 하는 자는 모두 그의 백성이다. 여기서 국가의 직제가 형성되는데 왕의 마음에 합한 사람에게는 상(償)을 주는데 그것이 작위이다. 이 직제에 의해서 왕은 자기 나라가 더욱더 부강 되기를 바란다. 여기에 국가와 왕의 욕망이 발동하는데 욕망이란 몸의 본능이다ㅣ 이 몸의 본능이 국가의 본능이 되어 부국강병의 활력소가 된다. 인류사는 매력과 폭력과 재력이라는 힘에 의해서 유지되어 왔다. 이 힘들을 효과적으로 발휘하기 위해 두 가지 정책이 시행되는데 하나는 땅을 경작하는 농민의 양산이다. 인간의 노동력만큼 좋은 에너지원은 없다. 최고다! 그런데 자국민은 한정되어 있다. 그래서 외국에 있는 백성들을 자국의 노예로 이용하려 한다. 여기서 전쟁이 일어난다. 전쟁에 승리하려면 군인이 많아야 한다. 그런데 군인이란 따로 늘 상주해 있는 게 아니라 평소에는 농민이 되는 백성들이다. 여기서 부국과 강병 정책에 모순이 일어난다.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이민정책이 도입되는데 이민정책이란 한정된 토지와 그 토지에 사는 인구와 적정선에서 조절하려는 시책이다. 즉 군사적으로 처리하지 않고도 개간을 시행하여 부국을 이룬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완전히 농사에만 전념하는 백성들이 등장되고(병력면제혜택) 반면에 병역에만 전념하는 계층이 작위에 의해서 새로 등장된다.

 그런데 이러한 강제적 공권력이 인간의 매력에 대해서는 배치되는 원리이다. 인간의 몸은 자발적이기를 원하고 있다. 인간은 그냥 살기 위해서 사는 것이다. 무슨 이상(理想)이 있어 그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사는 게 아니다. 살아있기에 그냥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민주국가이다. 민주국가란 민주국가에서 생성되는 게 아니라 왕정을 뒤엎음으로 달성된다. 왕의 목을 침으로서 민주국가는 시작이 되는 것이다. 이 민주국가 의식은 서방에서 말하는 민주시민의식을 말하는 게 아니다.

 서양의 민주의식은 신의 자리를 확실하게 남겨두고 그 신의 뜻을 향한 목적론적 도식을 청산하지 않은 민주의식이다. 이 민주의식은 물론 수학적 법칙에 의해서 항상 탐구될 수 있는 합리적 질서의 틀을 기반하고 있다. 물리적이고 기계적인 구상에 의해서 인간사회도 이성적으로 형성시키는 것이다. 그러니 근대시민사회의 정신인 개인주의는 기계적 우주관에 의하면 한 구성요소로서 존재한다. 그러나 몸철학(기철학)은 이것을 거부한다. 존재하는 몸을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하나가 독립된 또 하나의 우주이라서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과 관계를 준다. 바로 이런 시각에서 볼 때 서양철학은 모두 한 통속이다.

 그들은 [몸] 말고 실제로 뭔가 따로 있다고 여긴다. 최후의 형상, 최후의 존재태나 인격이 있다고 여긴다. 이렇게 되면 깊은 회의주의나 불가지론에 빠진다. 이 허무주의를 이용한 종교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히브리민족의 샤머니즘에 뿌리를 둔 기독교라는 무속종교이다.

 인류의 모든 종교는 귀신에 관한 신뢰이다. 센 무당, 센 신령, 센 귀신들의 나열이다. 그런데 그 귀신이라는 것은 딴게 아니라 사람이 죽어서 된 것이다. 그러니깐 인간이 귀신이며 사람이 신이며 사람의 딴 모습이 신령이다. 인간의 몸은 힘을 지니고 있으며 이 에너지는 곧 신의 바람 (신명) 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다. 인간이란 기체(氣體:기덩어리)로서 하늘의 요소와 땅의 요소가 결합되어 있다. 그 인간을 죽어서 까지 기념하는 것이 종교이다. 모든 종교는 조상숭배가 있다. 이는 하늘의 요소의 영속성을 말한다. 조상숭배는 역사적 인간관계와의 연계를 가능케 하며 세대와 세대 간의 연결을 꾀하는 조치이다. 죽은 死者도 계속해서 한 가족으로 남는다. 이러한 집단 샤머니즘이 가장 잘 발달된 것이 이동하는 유목민족인 팔레스틴의 히브리민족이다. 황량한 땅을 지나면서 그들은 오직 하늘만 숭배하고 기적만 요청했을 것이며 여기서 그들은 집단 무의식이 발생되었다. 이들은 그 후 정착한 뒤 이러한 종교적 경험을 [계약] 이라는 정치적 장치를 동원하여 체계적인 신(神) 일변도의 종교국가를 건설했다. 중세시대의 유럽은 이 계약중심의 종교를 국가의 통치 이데오르기를 이용했으며 여기에 준한 국가윤리와 국가도덕이 제시된다. 그런데 계몽주의 이후 개인시민사회가 되자 이 윤리와 도덕도 [보이지 않는 손] 이라는 수요와 공급의 시장경제에 기반을 둔 계약적 시민법으로 정착되니 소위 돈에 의해서 계급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계급이란 계층과는 달리 적대적 모순관계를 의식한 집합개념이다. 이것은 신분의 차등을 나타내는 것으로 인간의 존엄성은 뒤로 물러가고 불평등 사회가 근대적 의미에서 새로이 등장된 것이다. 각기 자기 계급의 이익을 위한 공권력과 도덕과 윤리가 나타난다.

 여기서 김용옥이 즐겨 욕설을 이용하는 의도가 드러난다. 그가 사용하는 욕은 주로 하늘과 땅의 교합을 나타내는 성적인 것에 관한 것인데 사실상 이것이 기철학에 입장에서 진실이며 솔직한 것임에 불구하고 윤리도덕을 그 자체를 인간의 목적으로 본 존재론적 관념론에 의해서 억압당해 왔다. 그 억압은 인간의 몸 그 자체의 氣를 억압하는 조치이다. 선과 악이 모두다 몸의 호의도(好意度)에 의해서 결정되어야 됨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정신에서 배태된 서구문명에서 부정적(否定的)이고 소극적으로 표현되어서 그 압박을 가중시켰다. 적극적인 선과 미가 죽어버린 것이다. 몸이 좋아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선(善)이 되지 못하고 악으로 처리된다. 몸이 싫어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선으로 추앙받는다. 기혹(欺惑)하고 인간을 지배한 서구문명과 서구 문명화된 동양문화에 대해서 김용옥은 욕설로서 몸철학의 근원을 전도하고 있는 것이다. 욕 속에 몸철학의 진수가 들어있다. 욕 속에 하늘과 땅과 인간의 관계가 들어 있다. 욕설은 기철학의 문화이다. 욕설은 자연에 대하여 낙관과 화해를 요청하는 몸짓이다. 욕설은 분명 비극이다. 그러나 그 비극은 존재라는 굴레를 벗어버리고 다시금 자연에 개입되는 몸 부활의 전제이다. 서구문명이 고집스럽게 존재를 주장했기에 자연과 엄청난 투쟁과 갈등을 야기시켜 왔다. 그러나 이제는 자연의 생명과 융합할 때가 되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변천은 기철학의 순환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인간해방 (봄)과 풍성한 로맨스 (여름)와 수난과 죽음 (가을)과 주인공 되는 인간은 없고 황량한 비이상화된 존재상을 보여주는 (겨울) 4계는 죽음과 부활이라는 생명의 본래의 순환체계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바로 이 자연과 일치되는 것이 바른 몸의 윤리도 도덕이다. 시련이 와도 극복하고 어두움이 덮여도 개벽이라는 부활의 세계를 내다보는 철학, 이것이 김용옥이 말하고 있는 기철학의 실체이다.


2. 성경에서 말하는 몸

(1) 김용옥의 주장과 일치점

 성경에서의 몸은 하나님의 형상이다. 하나님의 형상이 담겨있는 몸이 아니라 몸 자체가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다 (창세기 9: 6).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면 그런 몸이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이여기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사역은 자기의 형상이 되는 인간의 몸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이는 그 몸과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하겠다는 뜻이다.

 이렇게 몸을 중심으로 해서 하나님께서 사역하시는 이유가 창조라는 행위 속에 모든 우주의 틀이 잡혀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떤 책임이나 죄책을 물을 때도 창조사역에 기준해서 따질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몸은 존재 그 자체로서 어떤 의미가 있는 게 아니라 기능으로 가치가 있다. 그 기능은 바로 구원의 유일 무일한 통로가 되는 계약 (혹은 언약)을 표현하는 도구가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선택한 몸들은 (이스라엘) 하나님의 언약정신을 두면으로 보여주는데 하나는 축복의 내용과 또 다른 하나는 저주의 내용을 담아 나타내어준다 (신명기 28장 / 여호수아 8:30-35 / 로마서 9:20-23). 그러니 언약적 기능으로서의 몸이 성경에서 말하는 몸의 위상이다.

 윤리나 도덕이라는 것이 성경에서는 성립되지 않는 이유가, 언약 자체가 인간의 행함이나 의지나 노력이나 수고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김용옥의 주장처럼 지금 몸이 무엇을 좋아하느냐(사랑하느냐) 싫어하느냐에 따라 언약의 적용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신명기 6: 5). 몸의 자발성과 관계없는 그 어떤 형식도 이스라엘에서는 단호히 배격된다 (이사야 1:10-17 /  아모스 6:21-24 / 시편 40: 6- 8).

 또 성경은 몸이 철학적이거나 과학적 분석의 대상이 되지 않음을 나타낸다. 죄를 지었기에 몸이 흙으로 돌아갈 뿐이다. 이것을 죽음이라고 한다. 육이 혼과 해체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사람이 죽고 난 뒤에 자아는 어디에 있는가 라는 철학적 물음에 성경은 그런 인간의 버언약적 호기심에는 답변할 책임을 갖고 있지 않다. 성경은 단호히 말하기를 죽은 자에게는 관심 없다. 하나님은 현 살아있는 자와 언약에 준하여 일하실 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22:32).

 성경에서 말하는 부활이란 육체와 영혼의 결합이 아니라 흙에 속한 형상이 하늘에 속한 형성으로 영광스럽게 변하는 것이다. 이것의 첫 열매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다.

(2) 김용옥의 주장과 차이점

 김용옥의 몸철학은 몸을 살리는 철학인 반면에 성경에서의 몸은 몸중심으로 하나님이 활동하시기는 하지만 몸을 부정하고 몸을 죽이는 것이다. 왜 인간의 몸이 죽어야 하는가 하며는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선택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전쟁의 군인이 되어서 지상에 남아있는 몸의 혈통의 고리를 끊어버리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란 지상의 인간들을 부정하는 개념이다. 하나님이 세우시는 왕은 지상의 어떠한 왕도 인정하지 않겠다는 처사이다. 그래서 온전히 하나님 쪽에서 제공한 왕을 중심으로 그야말로 [하나님 나라]를 이루겠다는 것이다.

 김용옥은 철학가이기 때문에 (인간에서부터 출발하는 사고방식) [하나님의 나라]를 인간들이 꿈꾸는 이상적 나라로 봤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포부와 희망사항이 전혀 들어있지 않다. 인간은 오히려 저주를 받아야 될 입장에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인간의 현존하는 몸을 부정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처하신 행위가 바로 [선택] 이다. [선택] 이란 그 어느 누구도 거룩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히브리민족을 선택하여 왜 인간들의 몸이 죽어 마땅한가를 보여주려 한 것이다. 그러니 김용옥의 말대로 몸이란 존재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기능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김용옥은 그 기능이 몸에 우호적인 氣에서 나왔다고 보는 반면에 성경은 몸에게 죄책을 묻기 위해 하나님에게서 나왔다. 인간들의 제사장, 인간들의 선지자, 인간들의 왕, 이 모두가 부정 당한다. 오직 하나님이 친히 왕이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3. 철학자 김용옥 주장의 의의

 교회는 그의 주장을 귀담아 두어야 한다. 그동안 신학계는 인간들을 구원시키기 위해 성경이 요구하지 않는 수작들을 부려왔다. 유신론적 철학에 기초한 심리적 탐구나 온전한 윤리철학, 고상한 종말철학과 역사철학, 정신분석학적 임상방법과 과학적 창조론, 심지어 사업경영방법까지 동원하여 기존 교권과 교세를 강화하려 했다.

 김용옥은 그것이 가짜라는 것을 근원적으로 폭로해 버린 것이다. 인간의 지혜로 한 인간을 구원시킨다는 발상이 얼마나 허망하다는 것을 그가 밝혀버린 것이다.

 철학이란 인간에서 출발하여 신(절대, 보편, 근원)에 도달하려는 시도이다. 그런데 신학이라는 이름의 철학변종이 등장해서 마치 철학과 다른 것처럼 행세해 온 것이 이미 2천년이었다.

 동서 철학을 섭렵한 김용옥의 눈에 그것이 얼마나 유치해 보이겠는가! 성경에 나타난 개념들을 마치 인간의 행위와 심리적 성향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처럼 교만을 교회들이 부려왔던 것이다.

 이제부터는 교회가, 인간적인 격려나 설득력으로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고 복음을 전할 수 있다는 헛된 발상은 버려야 한다. 아마 인간적인 방법은 교회라는 종교사업의 번창에는 각별한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시도의 배후에 또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의 종들이 마음에 상처를 입고 예수님처럼 교계에서, 세상에서 소외될 것인가도 두고두고 생각해 봐야 한다.

 작위(作爲)보다 무위(無爲)로도 살아 갈 수 있는 용기, 이 용기를 참된 믿음 속에서 참된 신앙생활 하라고 김용옥은 현 교계에 요청하고 있다.

 고린도전서 2: 1- 5 에 이런 말씀이 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끝으로 김용옥 씨에게 당부하고 싶은 것은, 그대가 공격한 기독교는 참된 기독교가 아니라 철학의 바탕위에 설정된 사이비한 교회에 불과하며 그대는 생각하기를 올바른 무기였기에 그들이 쓰러졌으니깐 내가 이해하는 현 기독교가 제대로 본 기독교라는 오해를 없기 바란다.

 거듭나지 못한 자는 아무리 성경을 해석을 하려고 해도 철저하게 성경과 단절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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