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폐기론을 어떻게 정의하시는지...
이상한 2006-07-23 16:15:33, 조회 : 131, 추천 : 2
(지복직관이란 아이디로 들어와서 잠시 글을 쓰다가 도중에 중요한 교회 일로 뒤 늦게나마 답글들을 확인하게 되었는데... 글을 쓸 수 없도록 처리했더군요.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다 보면, 간혹 시행착오라는 것도 있기 마련인데, 이 곳에선 조금만 마음에 안 들면 글쓰기를 방지하는 방식으로 일을 처리하는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일각에선 십자가 마을의 이런 태도에 대해 상당히 유감을 표시하는 분들도 있음을 알아 주시기 바랍니다.답글을 다신 여러 분들의 견해 중 일부는 공감이 되는 옳은 지적도 있었습니다. 물론,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기본적으로 분리적인 자세 보다는 가능한 한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을 찾기 위해서 토론 중이므로 제가 다시 아이디를 변경해서 들어 오게 되었습니다. 공감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많이 있지만 그러한 글들에 대해서 일일이 답글을 달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그 분들 각자의 견해에서도 제가 공감할 수 있는 부분들도 있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그리고, 제 목적은 분리적인 자세를 취해, 비판을 위한 비판을 가하려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근호님의 책을 조금이나마 대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분의 설교문과 동영상도 몇 편 보았습니다. 확실히, 이 목사님은 공로적인 발상을 명확하게 지적하십니다. 저는 여기에 대해 조금도 비난하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설교 가운데서 율법폐기론을 경계하는 듯한 인상의 설교를 접한 적이 없습니다. 제가 틈틈이 시간나는 대로 들어왔고, 근래에도 들어왔지만, 여전히 말입니다. 그럼에도 저는 어떤 면에서는 이근호님의 팬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어떤 면에선 말입니다. 그의 설교에는 확실히, 십자가에 대한 집착이 강하게 느껴지고, 인간의 자기 행위에 대한 부정이 강하게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현대의 번영신학의 영향을 받은 수 많은 목사들, 심지어 개혁신학을 포함해서도 기복적인 목사님들이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설교만은 독특한 느낌마저 들기도 합니다. (저는 개혁신학 안에 있는 일부 목사가 그러하다는 것이지, 개혁신학을 추구하고 그 원리를 충실히 따라가고자 하는 모든 목사를 지칭하는 게 아닙니다.)
어떤 분들은 제게 이 목사님의 설교 어디를 보아도, "율법폐기론적 경향"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묻고 싶습니다. 혹시, 이 마을에 계신 분들 중에 율법폐기론을 경계하라고 하시는 이 목사님의 말씀을 들어 보신 분들이 있는지 말입니다. 대부분은 이 목사님으로부터 인간의 행함에 대해 부정하도록 하는 그러한 설교를 많이 들어 오셨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제가 잘못 알고 있나요? 제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분들이 잘못 알고 있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그래서, 묻고 싶습니다. 율법폐기론을 경계하도록 하는 이근호님의 설교가 있습니까? 지금, 이 질문은 비아냥 거리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진지하게 묻고 있습니다.
저는 여전히, 저 자신을 진리의 구도자로 여깁니다. 저는 개혁신학을 존중하지만 최고의 신학이라거나 표준이라고 여기는 것은 아닙니다. 이제까지 제가 들어 본 신학 중에 그나마 낫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개혁신학도 그 점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즉, 개혁신학이 우리의 신앙과 생활의 유일한 규칙이라거나 그런 비슷한 식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오직 성경을 주장합니다. 개혁신학에서 개혁된 교회는 여전히 개혁되어야 한다는 명제는 아주 오래된 구호입니다. 아시는 분은 이미 아실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개혁신학이 최상의 표준이라고 여겨서 개혁신학을 들먹거리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진리의 구도자로서 또한 제가 알고 있는 개혁신학에 대한 열정을 가진 한 사람으로서 이 방에서 토론하고 있는 것입니다. 개혁신학에 대한 열정이 있다고 해서 제가 개혁신학에 대해 그렇게 잘 알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아주 기초적인 지식만을 가지고 있는 것 뿐입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어린아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저는 이 방에서 비판을 위한 비판이 아니라, 진지함으로 다가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저를 강퇴시키고 싶으시다거나 글쓰기를 방지하도록 조취를 취하고 싶으시다면, 끝내는 이방을 탈퇴하고는 두 번 다시는 들어오지 않을 생각입니다. 다시 한 번 더 말씀 드리거니와 저는 진지함으로 여러분과 토론하기를 원합니다.
제게 답글을 달아 주신 분들께 먼저는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저의 무지를 깨우쳐 주시려는 것이겠지요. 여러분들의 글 가운데서도 제가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제가 공감하기 어려운 부분, 즉 여전히 의문이 남는 부분도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문제를 더 이상 거론하고 싶지 않습니다. 일단은 이 방에서 제가 알고 있는 개혁신학과 어떤 면에서 차이가 나는지를 생각해 보았을 때, 크게 세 가지를 말씀 드렸습니다. 개혁신학과의 차이점이 앞으로의 토론 중에서 아마도 더 많이 드러날지도 모르겠고, 아니면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부분이 더 많이 드러날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가능하다면,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부분이 더 많이 드러나길 바랍니다. 가능하다면 말입니다.
먼저, 제가 발견한 세 가지 차이점들 가운데서 어떤 분이 이근호님의 설교 가운데서 율법폐기론적 경향을 발견할 수 없다고 하셔서, 저는 정말 그러한가하는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정녕 그러하다면, 제가 이근호님의 설교를 잘못 들은 탓일 것입니다. 저의 경청하는 실력의 한계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묻습니다. 이근호님의 설교 가운데서 이미 공로주의를 경계하는 설교는 저 자신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데, 율법폐기론을 경계하는 설교 중, 추천할 만한 것이 있나요? 그리고, 또 한 가지 질문을 드리자면, 이곳에선 율법폐기론을 어떻게 정의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제 질문을 정리하자면, 크게 두 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1.이곳에선 율법폐기론을 어떻게 정의합니까?
(이 질문은 정녕, 이근호님께서 설교자로서 율법폐기론을 경계하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는 전제가 됩니다.
모르는 것을 경계하긴 어려운 것 또는 불가능?한 법이기 때문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 만큼은
이근호님의 설명을 직접 듣고 싶네요.그리고, 저의 앞선 글들은 이근호님이 율법폐기론자라고
정죄하려는 의도로 쓴 것이 아니라, 율법폐기론을 경계하지 않는다면 율법폐기론적 성향으로
빠져드는 것이 아닌가 하고 질문 드린 것임을 분명히 밝혀 둡니다.)
2.이근호님의 설교나 설교문을 듣거나 읽어 보신 분들 중에서 율법폐기론을 경계하는 설교나
또는 이와 유사한 설교들을 들어 보신 적이 있으시다면, 추천해 주십시오.
저도 한 번 들어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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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율법폐기론을 어떻게 정의하시는지...
이근호 2006-07-23 18:51:01, 조회 : 149, 추천 : 2
율법이 폐기되었다는 것을 제가 말하지 않는다면 저는 그리스도와 끊어진 자입니다.
그리고 율빕이 폐기되었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설교한다면 그 또한 그리스도와 끊어진 자입니다.
제가 설교하는 것은 그리스도 십자가 앞에서 개혁주의 신학 자체도 그리스도와 상관없다는 점을 말하고자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홀로 하신 그 일에 대해서 인간의 부차적인 그 어떤 철학이나 신학도 보탤 필요없을 정도로 완벽하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완성은 사람들을 천국보내는데만 완벽한 사실일 뿐만아니라 사람들을 지옥보내는데도 완벽한 증거가 될 뿐입니다.
하지만 개혁주의신학은 사람들을 천국에 보내는 것도 지옥에 보내는 것에도 결코 능력이 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개혁주의신학 틀에서 말하는 소위 ''율법폐기론도' 복음을 증거하는 요건으로 삽일될 자격이 없고, 구원될 능력도 될 수가 없습니다.
누가 말하기를 "저는 율법이 폐기되었음을 믿고 구원받고자 합니다"라고 고백한다면
저는 말하기를 "그것은 복음이 아닙니다"라고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누가 말하기를 "저는 십자가 앞에서 율법이 폐기 되었음을 알고 있습니다"라고 고백한다면
저를 말하기를 "복음을 제대로 아시는 분이군요"라고 말합니다.
귀하께서 여전히 알지 못하는 있는 것은 소위 개혁주의자들이 말하는 율법의 제 3용도가 논리적으로 문제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만약에 율법의 제 3용도가 있다면
제 1용도와 제 2용도에 대해서 변증법적 관계로 수립된 것으로 실제로 예수님께서 언급한 적이 없는 율법 해석입니다.
율법에는 처음부터 '용도'라는 것이 말을 사용할 수 없는 개념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 등장되었고 (갈 3:17)
예수님께서 활용하시는 율법 사용에 대해서
우리 죄인인 입장에서 감히 '용도'라는 표현으로 정립하면서 우리가 개입할 여건을 조성하는 것은 원래 인간이 죄인됨을 인정하지 않는 처사에서 비롯된 발상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그 어떤 죄인도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이룰 수 없는 처지입니다.
만약에 그 어떤 인간도 (심지어 성령받고 난 이후의 인간이라도) 율법을 이룬다면
그 사람에게는 더 이상 십자가 복음이 필요치 않는 사람이요 (율법을 이룬 시점부터)
만약에 그 어떤 사람도 자신이 율법을 이룰 수 있다고 우긴다면 (예를 들면, 십일조나 주일성수를 통해서)그 사람은
십자가 복음을 박살내기 위해 용도도 이 땅에 등장해서 쓰임받는 적그리스도 편에 속한 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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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이상한 2006-07-23 21:50:40, 조회 : 126, 추천 : 2
율법이 폐기되었다는 것을 제가 말하지 않는다면 저는 그리스도와 끊어진 자입니다.
-> 여기까지만 보면, 분명히 개혁신학에서 말하는 "율법폐기론"에 해당합니다. 개혁신학에선 율법주의와 더불어 율법폐기론을 경계하는 것으로 압니다. 그러나, 목사님께서 율법폐기론에 대해 모르실리 없으며 이어지는 말씀이 있기에 무언가 깊은 뜻이 계셔서 그렇게 하는 것으로 알겠습니다.
그리고 율빕이 폐기되었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설교한다면 그 또한 그리스도와 끊어진 자입니다.
-> 율법이 폐기되었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설교한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저로선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제 생각으론, 심지어 율법폐기론자라 할지라도 그렇게는 하지 않을 거라고 예상되기 때문입니다. 도리어, 자력구원자들처럼 율법의 행함을 공로로하여 구원얻으려는 시도는 많이 있습니다. 로마교의 신인협력설이나, 알미니안도 그 한 케이스에 해당합니다.그런데, 율법이 폐기되었음을 증거하기 위해 설교하는 케이스가 있습니까? 예를 들어 설명하시는 것이 가능하시다면 수고를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시는 것이 불편하시다면 굳이 수고를 끼쳐 드리고 싶은 마음은 없네요.
여기까지에서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생깁니다. 목사님께서 하신 말씀, 즉 "율법이 폐기되었다는 것을 제가 말하지 않는다면 저는 그리스도와 끊어진 자입니다" 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예수님께선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다고 했는데, 목사님의 말씀과 일치되는 것인지요? 일치된다면, 어떤 의미에서 일치된다고 볼 수 있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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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설교하는 것은 그리스도 십자가 앞에서 개혁주의 신학 자체도 그리스도와 상관없다는 점을 말하고자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홀로 하신 그 일에 대해서 인간의 부차적인 그 어떤 철학이나 신학도 보탤 필요없을 정도로 완벽하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완성은 사람들을 천국보내는데만 완벽한 사실일 뿐만아니라 사람들을 지옥보내는데도 완벽한 증거가 될 뿐입니다.
하지만 개혁주의신학은 사람들을 천국에 보내는 것도 지옥에 보내는 것에도 결코 능력이 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개혁주의신학 틀에서 말하는 소위 ''율법폐기론도' 복음을 증거하는 요건으로 삽일될 자격이 없고, 구원될 능력도 될 수가 없습니다.
누가 말하기를 "저는 율법이 폐기되었음을 믿고 구원받고자 합니다"라고 고백한다면
저는 말하기를 "그것은 복음이 아닙니다"라고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 제가 알기론, 개혁주의 신학에서도 신학적 지식을 소유하는 것으로 구원에 이른다고 고백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것을 개혁주의 신학에선 이렇게 말합니다. 즉, "지적동의"가 아니라, "인격적 동의"라는 용어를 통해서 표현합니다. 예수 믿고 구원 얻는 유일한 조건은 그리스도의 의를 통해서 구원되는 것이며, 이신칭의라고 하는 것은 "믿음"이라는 방편(혹은 통로)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된다는 것이지, 믿음이 조건이 되어서 구원얻는다고도 하지 않습니다. 즉, 성도가 구원되는 데는 "이중적인 전가"가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개혁주의 신학에선 신학적 지식을 소유함으로 구원얻는다고 말한 적이 전혀 없고, 지적동의만으로 구원 얻는다고 한 적도 없는데, 위의 지적은 지나친 것이 아닌지요? 어느 목사나 전도사나 선교사나 어느 사역자도 "저는 율법이 폐기되었음을 믿고 구원받고자 합니다"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위의 지적은 누구를 겨냥한 것인지요? 저는 개혁주의 신학이 진리라고 여기진 않지만, 위의 지적은 개혁주의 신학이 들어야 할 마땅한 지적은 아닌 것 같아 말씀 드립니다. 누가 저렇게 고백을 하는 것인지요? 율법이 폐기되었음을 믿고 구원받고자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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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누가 말하기를 "저는 십자가 앞에서 율법이 폐기 되었음을 알고 있습니다"라고 고백한다면
저를 말하기를 "복음을 제대로 아시는 분이군요"라고 말합니다.
귀하께서 여전히 알지 못하는 있는 것은 소위 개혁주의자들이 말하는 율법의 제 3용도가 논리적으로 문제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만약에 율법의 제 3용도가 있다면
제 1용도와 제 2용도에 대해서 변증법적 관계로 수립된 것으로 실제로 예수님께서 언급한 적이 없는 율법 해석입니다.
율법에는 처음부터 '용도'라는 것이 말을 사용할 수 없는 개념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 등장되었고 (갈 3:17) 예수님께서 활용하시는 율법 사용에 대해서
우리 죄인인 입장에서 감히 '용도'라는 표현으로 정립하면서 우리가 개입할 여건을 조성하는 것은 원래 인간이 죄인됨을 인정하지 않는 처사에서 비롯된 발상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그 어떤 죄인도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이룰 수 없는 처지입니다.
만약에 그 어떤 인간도 (심지어 성령받고 난 이후의 인간이라도) 율법을 이룬다면
그 사람에게는 더 이상 십자가 복음이 필요치 않는 사람이요 (율법을 이룬 시점부터)
만약에 그 어떤 사람도 자신이 율법을 이룰 수 있다고 우긴다면 (예를 들면, 십일조나 주일성수를 통해서)그 사람은
십자가 복음을 박살내기 위해 용도도 이 땅에 등장해서 쓰임받는 적그리스도 편에 속한 종입니다.
-> 용도라는 말을 차용했다는 것이 그렇게 문제가 되는 것인지 저로선, 의문입니다. 신학자들이 철학자들로부터 개념을 빌려쓴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신학과 철학은 유사성이 있을지라도 차이점도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것은 신학이 계시를 아는 것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칭의) 구원 그 이후 인간이 개입되면 안 된다고, 특별히 중생한 인간 (여기선 성령받고 난 이후의 인간이라고 표현해 놓으셨지만.)이라도 (성화)구원의 과정에서 개입할 수 없다는 것은 개혁신학과는 확실히 다른 점입니다.
(혹, 저의 표현으로 인해 구원이 칭의구원 따로 있고, 성화구원 따로 있고, 영화구원 따로 있고, 이런 식으론 이해하지 마시기를 당부 드립니다. 단지, 표현상에 있어서 그러한 것일 뿐, "오직 하나의 구원"만이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알고 있는 개혁신학의 개념과 이근호님의 개념에 차이가 있기에 이 부분을 나누어 설명할 뿐입니다.)
이 부분에서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용도"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이 그렇게 잘못인가 하는 것과 성화의 과정에서 인간이 사용된다는 것(이렇게 말하는 것이 가능하다면)이 정죄되어야 한다면, 그 정죄가 정죄되고 있는 인간을 인도하신 성령님께 돌아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과 함께, 중생의 열매는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즉, 성령님께로 말미암는 신앙고백적 행위가 정죄된다면, 그 정죄가 성령님께도 통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이 난제를 어떻게 풀어가시는가 하는 것과 삶 속에서 드러나는 중생의 열매는 없는가 하는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1."십자가 앞에서 율법이 폐기되었다"는 목사님의 지적과 성경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케 하러 오셨다"는 것은 어떻게 일치된다고 볼 수 있습니까?
2.율법이 폐기되었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설교하는 경우는 어떤 예를 들 수 있습니까? 로마교나 알미니안들은 율법의 행위를 공로로 내세우기도 합니다. 그러나, 율법이 폐기되었음을 증거하기 위해 설교한다는 것은 들어본 적이 업습니다. 율법폐기론자일지라도 율법이 폐기되었음을 증거하기 위해 설교할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만일, 그런 율법폐기론자가 있다면, 그들은 무어라고 불립니까? 어떤 교단을 형성했고, 신학사에선 어떻게 등장됩니까? 목사님께선 철학 뿐 아니라, 교회사 부분에도 능통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3.지적 동의만으로 구원얻는다고 개혁신학이 주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누구 보다 잘 아실듯한 목사님께서 "율법이 폐기되었음을 믿고 구원얻는다"고 지적하신 것은 누구를 겨냥한 것인지요? 혹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요? (저는 2번의 질문과는 달리) 이 부분이 중요하다고 여깁니다. 그것은 개혁신학을 정당하게 판단했는지 혹은 그릇되게 비판했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에 대한 평가도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대다수의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는 신학은 더욱 중요시 평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즉, 개혁신학의 지식을 습득함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게 아니라, 최소한 그 평가가 올바른 평가가 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4.성령님께서 인도하시는 성도에게서 나온 신앙고백적 행위가 인간의 행위라는 이유로 정죄되어야 한다면, 그것은 그 사람을 인도하신 성령님께도 그 책임을 묻게 되는 것은 아닌지요? 이 문제를 이근호님께선 어떻게 풀어나가고 계십니까? 또한 중생의 열매는 성도의 삶에서 어떻게 표현되어지는 것입니까? 자기를 부인하는 삶이 행위로 표현될 수는 없습니까? 단지, 내면적인 마음의 고백과 입술의 고백만입니까? 혹, 될 수 있는 것이라면, 그러한 행위가 "적극적인 혹은 능동적인" 성도의 반응은 될 수 없습니까? 적극적인 또는 능동적인 성도의 반응이 나오는 게 가능한가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묻는 것은 소극적인 성도의 반응과는 달리, 적극적인 성도의 반응에는 근대의 자기주체 의식이 살아있다고 지적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주장하시는 적극적인 혹은 능동적인 성도의 반응도 근대의 자기주체 의식의 산물로 보아야 하는 것입니까?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시는지 매우 궁금합니다. 이것은 비난을 하려는 게 아니고, 이미 십자가 마을을 거쳐간 사람들이 이 문제를 거론하는 것을 지켜봐 온 까닭이고 제가 지켜 본 그 대답이 매우 "애매"하고 "모호"하였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근호님의 설교를 좋아합니다. 그 이유는 그 설교에선 적어도 인간의 공로가 튀어나오지는 않을 것이 분명하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도의 모든 행위가 비판될 경우, 적극성을 띈 성도의 반응이 가능할까? 이것 역시도 근대의 자기 주체 의식의 산물로 보아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즉, 자기 주체 의식에서 나오는 모든 인식론이 부정되어야 하며, 그것이 성령에게서 나온다고 하더라도 부정된다는 것, 그것이 제가 묻고 있는 질문의 요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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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이근호 2006-07-24 08:12:39, 조회 : 139, 추천 : 4
근본적으로 귀하의 문제점은 십자가 앞에서 자신이 부정당하지 않기를 원한다는데 있습니다.
"그래도 나에게 주님으로부터도 부정당하지 않고 인정받을 만한 무엇이 있을 수 있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귀하는 그것을 '개혁주의 신학'이라고 임시적으로 붙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 복음은 이렇습니다"라고 말하는 저를 향해 "내가 잘못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지적해 보세요"라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쉬운 예를 들면, 제가 "저기 달이 떴네요"라고 말하니
귀하께서는 "달을 보고 있는 지금의 내 옷차림이 무슨 잘못이라는 것이 없지요"라고 저에게 동의를 구하는 식입니다.
개혁주의 신학 자체를 긍정하는 것 자체가 십자가의 원수가 된다는 사실을 귀하는 모르고 있습니다.
'개혁주의 신학이 구원이 능력이 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이런 취지입니다.
그런데 귀하께서는 변명하기를 '개혁주의 신학도 지식이 아니라 인격적인 신앙을 언급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저는 다음과 같이 반박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인간들이 인격적이라고 표현하는 그 표현조차 십자가 앞으로 부정당해야 될 죄의 산물이다"고 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라고 귀하께서 물으신다면 저는 다음과 같이 답변합니다. "성경은 인간들이 자신을 긍정하는 그 어떤 인간상이라든지 하나님상이든지 삼위일체도 일체 부정하는 식으로 말씀이 스스로의 위력을 발휘한다" 고 말입니다.
즉 언약은 인간의 존재 근거까지 공격하면서 성취된 겁니다.
성경에서 새로 정립된 하나님상과 인간상은 그냥 인격적으로 다가오는 정도가 아니라 십자가의 공격성을 띠로 다가오기에 그러합니다.
따라서 개혁주의 신학에서 말하는 '율법폐기론'이라는 것을 성경이 옹호해줄 하등의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율법폐기'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고해서 '율법폐기론'이라는 개념을 수립하고
성경에서 '율법 완전'이라는 말이 나온다고해서 '율법완성론'을 만드는 것이 바로 개혁주의 신학의 헛점입니다.
쉬운 예를 들면, 아버지가 빨간 양말을 신으신 것이 분명하지만 빨간 양말 신었다고 다 아버지가 아닌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빨간 양말 착용'외에는 달리 아버지라고 확인할 접촉점을 갖고 있지 않기에 그것이라도 붙들고 싶은 것입니다.
개혁주의 신학이 문제점은 바로 이런 사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즉 여하튼 간에 '접촉점'을 자꾸만 수립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십자가을 통해서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인간의 기본적인 자기 존재성 욕구에서 비롯된 열매입니다.
예를 들면, 율법의 폐기라든지, 율법의 완성이 모두 순전히 예수님 혼자 만의 몫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인간의 일로서 전환하기 위해 '율법의 폐기론'을 두려워한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옆집 아주머니께서 멀쩡한 냉장고를 마구 내다버리고 새 냉장고를 자꾸만 사니 다른 집들이 화를 내는 겁니다.
"왜 멀쩡하고 쓸만한 냉장고를 함부로 버리느냐"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냉장고 주인되시는 아주머니가 말하기를 "내 냉장고 내가 버리는데 당신들이 왜 관심두느냐"라고 합니다.
율법의 주인되시는 분이 마구(?) 율법을 버리고 또 율법을 일방적으로 완성해 버리니
율법의 관여한 자격도 안되는 소위 죄인들인 인간들이 말하기를
"지금 율법을 버리신 것은 율법을 완성하기 위해서 버리신 것 맞지요. 그지요?"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주님보시기에 인간들이 그런데 관심 두는 것 자체가 수상하기 이를 데 없는 겁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다" (요 6:29)
즉 인간의 행함이 낄 수 없는 것이 믿음의 관계라면 율법을 폐기를 하던 율법을 완성을 하던 어차피 인간이 관여할 수 없는 겁니다.
개혁주의 신학에서 아무리 '은혜' '사랑' '언약' '율법' '교회'를 거론해도
모두가 십자가를 진정한 뜻을 외면한데서 비롯된 너무나도 인간 존재 위주의 신학에 불과합니다.
언제 이 고리가 끊어지느냐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개혁주의 신학'조차도 인간의 죄에서 나온 발상이다는 것을 자인할, 그 때입니다.
개혁주의 신학'이 인간이 만든 신학 가운데 제일 낫다고 주장하시는것은 여전히 인간에게는 무슨 선이 나올 것이라고 간주한데서 비롯됩니다.
철학을 심도있게 공부해 보시면 인간에게 '소극적' 혹은 '적극적'이라고 구분지을 만한 것이 없음이 드러납니다.
그리고 '명령법'과 '서술법'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자기 부인'과 '자기 긍정'이 결국 같은 마음인 것을!
즉 이 모든 것이 자기 존재의 불멸성을 감추지 못하고 본성적으로 튀어나오는 욕망의 발산들입니다.
구원은 오로지 십자가에서만 나옵니다.
성령님은 인간의 모든 입을 막고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만 전하시는 분이십니다.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을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너희 복종이 온전히 될 때에 모든 복종치 않는 것을 벌하려고 예비하는 중에 있노라"(고후 10:5-6)
그런데 귀하께서 "모든 것을 사로잡아 '개혁주의 신학 이름' 아래로 복종치 하니"에 사활를 걸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들의 보편적인 죄라는 겁니다. 이 죄로 인해 예수님을 버림당했습니다.
그러니까 '개혁주의신학'이 십자가의 원수가 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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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폐기론을 어떻게 정의하시는지... 이상한 2006/07/23 2 132
[re] 글쓰기 차단이유(지복직관-이상한님께)
손무성 (Homepage) 2006-07-23 17:33:29, 조회 : 121, 추천 : 0
안녕하세요. 관리자입니다. 실명전환해서 회원으로 가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쓰기 차단 이유는 십자가마을에 글을 쓰시는 분들 중에 실명으로 회원 가입하지 않고 예명으로 가입하신 분들 중에 글을 남기다 좋지 못한 말투와 글을 남기고 사라지는 경우 때문에 실명전환을 하실 때까지 차단했었습니다.
가입시 실명으로 가입하지 않으면 관리자는 통보없이 회원삭제 하겠다는 경고를 붙여 두었습니다. 아마 보셨을 것입니다.
지복직관이라는 예명을 사용했기 때문에 여러번의 쪽지를 보내신 것을 보셨을 것입니다. 마지막 쪽지에 '지복직관이라는 예명을 실명으로 변경하시면 글쓰기를 하실 수 있도록 해드리겠습니다.' 라고 남긴 것을 보셨을 것입니다. 이번에는 그래도 여러번의 글을 남기신 것을 감안하여 통보를 하였고, 통보하여도 변경이 없어 회원박탈은 하지 않고 글쓰기 차단만 시킨 것입니다. 이를 양해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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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십자가의 원수에 관하여...
이상한 2006-07-24 09:01:45, 조회 : 169, 추천 : 3
여전히 생각해 보아야 할 부분이 많이 있지만 이근호님께서 성실히 답글을 달아 주심에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십자가가 인간의 자기 존재성, 존재의 근거를 공격하며 다가온다는 말씀이 아주 인상 깊이 다가 옵니다. 어떤 분이 말씀하시길, 동양철학 가운데서도 자기를 부인하도록 만들면서 까지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그런 철학은 없다고 하셨는데, 어쩌면 이근호님에게서 제가 받은 "그러한 인상"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어라고 정확하게 집어서 표현하긴 어렵지만, 오로지 십자가만을 드러내고자 하며, 십자가로 귀결되고자 하는 일관성과 그에 대한 성실함. 이론적으론 완전히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이 분명히 드러남에도 함부로 정죄할 수 없는 십자가에 대한 집착. 그것만큼은 이 마을에서 배울 수 있었으면 합니다.
저의 한계로 이근호님이 말씀하시는 모든 뜻을 잘 알 수는 없으나, 처절할 정도로 십자가에 집착하는 그 마음. 그것만큼은 배울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제게 개혁주의 신학에 대한 열정이 남아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지... 정녕, 제 자신이 이근호님이 지적하신 것처럼, 저도 모르는 새에 십자가의 원수로 자처하며 살았던 것인지. 그렇다면, 이 마을에선 복음은 무엇이며, 어떻게 하여야 십자가의 원수에서 돌이켜 십자가의 증거자로 살아갈 수 있다고 보는지... 아직도 저 자신을 "진리(=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구도자"라고 여기는 저로선 의문이 남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로 인해 이근호님에게서 많은 시간을 빼앗는 것이 저 자신에게 부담이 되기도 합니다. 이번 글은 읽고 그냥 이 마을에서 느낀 한 사람의 소감이라고 보시면 좋겠습니다. 혹, 저의 질문에 답하시고 싶으신 마음이 계시면 누구든지 답을 주셔도 좋겠습니다.)
그러면, 다음에 질문을 던질 때까지 수고해 주십시오.(좀 더 이근호님의 설교를 들으면, 그 땐 알 수 있을까요?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어쩌면, 큰 바위 얼굴에서 나오는 소년의 성장과정과는 다르다고 생각이 들기도 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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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복음과 십자가의 원수에 관하여...
이근호 2006-07-24 09:57:25, 조회 : 186, 추천 : 6
개혁주의 뿐만아니라 인간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은 시간과 공간의 영속성 위에 실려가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나의 신체는 승객이요 시간은 열차인 셈입니다.
나의 교단 , 나의 교회, 나의 신학, 나의 신앙, 나의 가정, 나의 국가, 나의 종교 이 모든 것을
영원으로 데려다 준다고 믿고 싶은 그 시간의 열차 위에 몸을 내맡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은 엉뚱한 이야기를 합니다.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요 1:15)
시간이라는 긴 장대 열차를 믿을 게 못된다는 겁니다.
사도 바울은 더 도발적인 사실을 전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 2:6) 시간의 종결을 의미하고 시간 완료의 상태가 이미 투입되어 있음을 말합니다.
베드로도 못지 않고 이해못한 말을 쏟아냅니다.
"주께는 하루가 천년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벧후 3:8) 흔히들 천년이 하루 같다는 말은 동양에 사는 사람들은 충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세월이 후딱 지나간다는 의식이 생길 수 있다는 말이지요.
하지만 '하루가 천년 같다'라는 말은 도저히 납득되지 못할 것입니다.
즉 시간 계산이 구원과 상관이 없다는 말입니다. 시간이 아니라 중요한 것은 사건이라는 말입니다.
사건이 결정적이지 시간이 결정적 사항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늘 밤에 죽더라도 이미 낙원에 포함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이 구원상태에 놓인 성도의 입장이라는 겁니다.
'그리스도 안'이라는 독특한 상황에서는 성도는 늘 죽어있는 대우를 받습니다. 여기서 '죽음'이라는 개념이 일반적 개념과 틀려집니다.
숨 끊어지는 것이 '죽음'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와 행함이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상태를 말합니다.
여기에 바로 '십자가 복음'이 개입합니다.
누가 감히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을 전적으로 부정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단 말입니까?
그것은 십자가만이 그럴 권리가 있다는 겁니다.
그 누구도 십자가에 업적에 합세한 적이 없고, 그 누구도 예수님과 같이 "다 이루어었다"고 만세를 부를 수 없다면
" 십자가에 못 박힌 자는 내가(사도 바울) 아닙니다."(고전 1:13)
오직 공로는 예수님께로만 가야 하고 또 모든 말씀이 그 쪽으로만 쏠리도록 지금 우주는 돌아가고 있습니다.
시간도 깨어지고 공간도 깨어질 대상입니다.
그렇다면 십자가 안에 놓인 자는 미리 깨어질 입장에 있는 사람이요 또한 이 사실을 세상을 향해 증거해야 될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성도는 계속해서 한 발자욱도 십자가 밖에 나온 적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에 대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그동안 자기 몸뚱아리를 실은 나르는 시간과 공간에 그 어떤 가치나 의미를 두지 않는 것이 복음을 증거하는 자는 마음가짐입니다.
시간과 공간에 의미를 두지 않는다는 것은
나의 교회, 나의 교단, 나의 가정, 나의 국가 그리고 나만이 따로 저축해 둔 의로움에도 그 의미를 두지 않고 벗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자기 의로움'을 버리는 것이 바로 십자가를 바로 아는 자는 삶의 열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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