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윤진

나의 다른 이름-조승희.송모씨.김승연 070502 박윤진

아빠와 함께 2018. 2. 20. 16:57
2007-05-02 11:42:49조회 : 5526         
나의 다른 이름-조승희, 송모씨, 김승연이름 : 박윤진 (IP:210.182.130.141)

요즘 나의 다른 이름들을 부르는 소리로 세상이 시끄럽다. 사실 나도 내게 이런 이름이 있는지 젼혀 몰랐다. 그런데 그 이름이 세상속으로 튀어올라오게 된 사건들을 자세히 살펴보니 그 이름들 역시 내게 아주 익숙한 이름의 산물인 뿐, 전혀 새로운 이름은 아니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아담이다.


조승희. 그는 33명을 총으로 쏴서 죽였다. 살해동기가 찾는데 많은 사람들이 열중했다. 여자친구와의 불화, 우울증, 외톨이적 성격 등이 원인이라고 한다. 그렇게 원인을 분석한 후, 그 원인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혹은 받아들이고 내재화하는 방식으로 사람들은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원인분석을 하는 근본적인 목적은 조승희라는 인물과 지금 조승희를 평가하는 사람들을 차별화하기 위함이다. 조승희와 내가 다른 사람임이 분명해진다. 조승희와 다른 나는 살인마도 외톨이도 우울증 환자도 아니다. 이 사회를 위해 열심히 살고 있는 건강하고 상식적인 인물로 확인되는 순간이다.


그러나 형제를 미워하는 것 조차 '살인'에 해당된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는 모든 인간의 이름이 조승희가 된다. 33명이 아니라, 330명도 넘는 사람들을 쉽게 미워하고 이용했던 나 아닌가! 십자가에서 울려퍼지고 있는 참 진리의 목소리에는 귀 막은 체, 인간들은 살인자의 대명사인 조승희를 설정하고 자신을 그와 구별하는데만 열중하고 있다. 사실 그 구별작업 자체가 살인행위인 것도 모르는 체 말이다.


송모씨. 그는 제주도의 한 여자 초등학생을 납치해서 성폭행 한 후 살해했다. 그는 20여 차례의 전과가 있고 지금은 고물을 수집하면서 근근히 살았다. 이번에도 인간들의 해결방법은 송모씨와 나를 구별하고 분리해서 나를 안전하게 구성한 후 그는 잔인하게 사회에서 격리시키는 것 뿐이다. 송모씨라는 자가 내 안에도 버젓이 살아있다는 것을 도저히 인정하지 않는다. 송모씨는 그저 돌연변이일 뿐이다. 그래서 잘라내면 된다.


그러나 마음으로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기만 하여도 간음죄라고 하신 십자가 지신 주님의 눈으로 볼 때, 모든 인간의 이름은 바로 그 송모씨일 뿐이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아무리 아니라고 목이 터져라 외쳐도 그와 나는 분리되지 않는다. 아담으로 아주 꽁꽁 묶여있다. 송모씨와 나를 분리할려고 하는 사고방식 자체가 인간의 목을 조여드는 수갑이다.


김승연. 그는 한화그룹이라는 재벌의 총수이다. 자신의 아들이 술집 종업원들에게 폭행당한 것에 격분하여 직접 자신이 나서서 보복 폭행을 했다고 한다. 납치, 특수폭행, 권총, 회칼 등이 등장하는 영화와 같은 사건이다. 자본이 곧 권력이라는 것을 아주 잘 증명한 사건이다.


원수된 자들에게 자신의 아들을 아낌없이 내어주신 참 하나님과는 정반대이다. 내 아들이 눈을 맞았으면, 때린 놈 눈을 통째로 빼버리고 싶은 것이 인간 맞지 않은가? 물론 나도 '아닙니다. 사람 잘못 보셨습니다.'라고 대답하고 싶은 마음 굴뚝같다. 그런데 맞다. 김승연. 그 이름이 내 이름 맞다. 나의 DNA 속에도 돈있고 힘있다면 그러고도 남을 본성이 아주 똑같이 입력되어 있다.


죽을 것이 너무도 뻔한 곳으로 아들을 보낸다? 나에게는 그런 사랑이 없다. 오히려 그런 사랑을 무시하고 외면함으로써 내 안에 사랑이 없음을 들키지만 않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인간들은 윤리라는 방패를 절대 놓지 않는다. 그 속에 숨어서 마음껏 살인하고 보복하며 강간하고 버려버리고 싶기 때문이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은 세상의 실체가 평화, 사랑, 박애, 자유가 아니라, 살인, 전쟁, 보복, 강박관념 그 자체인 것을 인간들에게 알려준다. 그러나 인간들은 실상 너무도 익숙하지만 표면적으로는 낯설고 모른 척 연극을 해야 한다. 그래야 안전하기 때문이다.


조승희, 송모씨, 김승연, 박윤진....모두 아담으로 묶어 놓고 보시는 십자가지신 예수의 눈으로 세상을 파악한다면, 그렇게 호들갑 떨 사건도 아닌데, 이미 우리 안에서 날마다 쉬지 않고 일어나고 있는 일상일 뿐인데, 모르는 척 쉬쉬하고 있는 죄인.... 나, 죄인 맞다. 그래서 우울증이 찾아오고 치매가 찾아오고 성적 강박증이 찾아오고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찾아오면 도리없이 윤리라는 가면을 벗고 죽이고 강간하고 복수하는 죄의 종 맞다. 죄가 끌면 끌릴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책임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책임이라는 말 자체가 성립도 되지 않는 죄에 묶인 존재라는 말이다. 우리는 철저하게 죄로 문신새겨진 자들이다. 조승희, 송모씨, 김승연이라는 때를 벗기고 싶어도 그들과 우리는 한 패거리일 뿐이다. 아담이라는 거대한 몸덩어리를 구성하고 있는 세포들이다.


그런데, 예수의 피가 뿌려졌다. 이제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한다. 어찌된 영문인지 도대체 모르겠다. 내 안에 여전히 조승희, 송모씨, 김승연 보다 더한 죄성이 꿈틀꿈틀 기회가 닿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정죄함이 결코 없단다.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다. 내 안을 아무리 살펴봐도 죄 밖에 없는데......죄인의 괴수라는 사도바울의 고백이 바로 나를 두고 한 말씀 정확하게 맞는데.....


이제 성령이 광야로 광야로 몰아 세우신다. 십자가 피만 증거하는 증인으로 아직도 가면 뒤에 숨어있는 세상을 향해 피할 수 없는 증거인 십자가의 불화살을 마구 쏟고 계신다. 감사하게도 그 불화살이 나의 주검까지 파고들었다. 이것이 현실이다. 악명 높은 어떤 누군가와 분리되어야만 한다는 의무감 속에서 그가 바로 나라는 현실과 직면할 때 마다, 그 불화살의 감사한 뜨거움이 새롭다.

 이근호 (IP:220.♡.122.170)07-05-02 17:53 
“귀하께서는 자학증세가 심하시군요. 성령이 충만한 가운데 피어나는 기독교의 사랑과 기쁨을 이런 식으로 매도하면 스스로 짓밟으면 안되시지요. 

한 면만 너무 파고 들어가면 이런 자괴증세로 빠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도 말씀하시기를,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고 하지 않습니까! 

가재미 눈처럼 한 쪽면만 지나치게 파고들면 다른 쪽의 귀한 복음의 진리를 송두리째 빼앗기는 부정적 안목이 자라날 수가 있고, 더나아가서 이런 부정적 안목으로 인해 하나님이 주신 마음의 평안을 애써 무시할 수가 있습니다. 

제가 십자가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대단원의 도달점은 하나님과 인간이 ‘화목’입니다. 마치 탕자와 아버지가 화목하듯이 말입니다. 십자가는 그 화목으로 가는 여정 중의 하나입니다. 그 십자가에만 털썩 주저앉으면 안됩니다. 

더 나가시기 바랍니다. 많은 성도들이 처음 신앙을 가질 때는 귀하처럼 자신의 죄에 대해서 가차없이 정죄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제가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거기에만 머물면 온 우주에 가득 찬 하나님의 최종 사랑의 아름다움을 증거하는데 지장이 될 뿐입니다. 

물론 따지고 보면, 조승희나 각종 사회악을 저지르고 있는 작자들의 속성이 우리들에게 전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귀하께서 지적하신대로 아담의 한 품성을 부여받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령이 역사하는 성품을 왜 억지로 부정하려고 하십니까? 성령님은 바로 우리 스스로 안 되는 하나님의 형상 회복을 그분의 도움으로 온전한 분량까지 성숙시키려고 하시는 분이십니다. 

귀하의 내부에는 그런 성령님의 역사까지 애써 부정하시려고 합니다. 꼭 그래야만 합니까? 그렇지 아니하면 화목의 십자가 복음이 증거되지 않는 겁니까? 그래서 귀하께서 얻고자 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사회악을 이런 식으로 본질적인 면에서 유야무야 할 수는 없습니다. 건전한 사회 윤리 정착에 참여해야 될 기독교인이 되레 이런 사회악이 ‘어쩔 수 없는 일이다’라고 미화한다든지, 흐지부지 넘어갈 일이 아니라고 봅니다. 로마서 13장에 보세요. 거기에 보면 정당하게 하나님에 의해서 세상 악을 척결하기 위해 하나님께 쓰임 받는 ‘하나님의 사자’가 나옵니다. 그들의 단호함에 대해서 그 어떤 논리로도 훼방놓을 수 없습니다.  

사회악에 확산에 대해서 ‘어쩔 수 없는 아담의 생리’ 라고 자탄하면서 방치할 여지가 있는 발언은 삼가야 될 줄로 압니다. 기독교인들이 다같이 강한 적개심을 가지고 배격의지를 드러내야 합니다.  

귀하의 글의 취지는 충분히 이해하지만 그렇다할지라도 이런 감상적인 태도는 옳지 않다고 보입니다. 주의를 요합니다!”라는 식으로 반론이 접수되면 어떻게 대응하시렵니까?
 이미아 (IP:211.♡.174.47)07-05-03 10:33 
이 세상을 살아 가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일들이 
예상치도 못한 가운데  일어나고 있는가를 잠시 생각해 봅니다. 
나에게 직접적으로 일어난 일이 아니라고 해서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일들이 왜 일어날 수 밖에 없는 것인가를 생각케 합니다. 
분명히 우리들은 이 세상이라는 현장이 저주 받은 현장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일이 생기고 안 생기고 하는 그 차원을 넘어서서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에 
이미 주님이 걸어 가신 코스가 우리에게 숨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잊게 되었을 때 나의 다른 이름이 아닌 너만의 이름이 되고 
너를 향한 욕설이 퍼부어지며 너만이 죽일 놈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 가야 한다는 것------ 
내 뜻도 아니요, 부모님의 뜻도 아니요. 사랑하는 사람의 뜻도 아니요, 
선생님의 뜻도 아니요, 친지들의 뜻도 아니요,사회의 뜻도 아닙니다. 
오직 주님의 뜻입니다. 
할 말이 없습니다. 
내 안에 다른 이름이 숨겨져 있음이 다른 사람의 일로 나타난다 할지라도 
어제는 칼을 드는 미움이 시퍼렇게 세워진 칼날처럼 드러났어도 
오늘은 너무도 조용한 일상------ 
그러나 
인간은 저주라는 현실로 돌아와 비극적인 실존에 여전히 거할 수 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다른 이름이 아닌 이미 나의 이름이었습니다.

 박윤진 (IP:210.♡.130.142)07-05-03 11:30 
귀하의 생각의 근본에는 "나 여기 잘 살고 있음"이라는 기초석이 놓여져 있습니다. 나 여기 잘 살고 있음을 첫 걸음으로 해서 만나게 되는 성령, 십자가, 복음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존재가치를 더욱 더 고양하는데 이용되고 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은 나 혹은 당신의 이름에는 도무지 아무런 관심도 없습니다. 단지 여자의 후손에게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여자의 후손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여자의 후손과 동일한 인물이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도구로서의 뱀의 후손만이 동원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전쟁에서의 승리만을 약속하고 계시므로, 처음 사람인 아담과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범주외에 조승희, 송모씨, 김승연, 박윤진, 그리고 당신의 이름이라는 폴더는 아예 만드시지도 않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라는 폴더(주머니)외에 다른 폴더는 없습니다. 그리고 뱀의 후손이라는 폴더(주머니)는 여자의 후손을 여자의 후손답게 드러내는데 사용되는 것에 불과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언약을 무시하고 자신에게 집중하는 태도가 바로 귀하가 견지하고 계신 "(하나님의 언약의 내용은 어찌되었건 내가 알 바 아니고) 나 여기 잘 살고 있음"이라는 생존본능이며 이것을 합리화, 정당화 해 나아가는 종교 악세사리인 것입니다. 반면, 하나님의 언약을 온전히 이루어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바로 그 생존본능의 원뿌리에 도끼처럼 놓여져 있는 것입니다. 내 안에 살고 있는 것이 내가 아니라는 고백, 내가 자랑할 것이라고는 오직 십자가외에는 없다는 고백, 나는 질그릇에 불과하고 그 안에 보석이 담겨있다는 고백, 모든 것이 주님께로 나와 주님으로 말미암고 주님께로 돌아간다는 고백 등 성경의 모든 기록은 이렇듯 예수 그리스도라는 도끼에 의해 자신의 생존본능을 송두리째 분리당한 사람들의 입 속에 성령께서 넣어주신 대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담 속에서 내 자리, 내 이름의 영역을 윤리와 종교라는 분필로 열심히 그리고 있는 귀하와 같은 죄인들의 특징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되새김질'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끝없이 나를 위해 씹고 씹고 또 씹는 것이지요. 나를 위한 되새김질..... 성경은 이것을 두 자로 정의합니다. "우상"이라고요.... 

이제 귀하의 주장을 하나하나 살펴봄으로써 왜 귀하의 의견이 귀하를 위한 되새김질의 축제인지, 얼마나 언약에 관심이 없는 지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귀하의 의견) 
“귀하께서는 자학증세가 심하시군요. 성령이 충만한 가운데 피어나는 기독교의 사랑과 기쁨을 이런 식으로 매도하면 스스로 짓밟으면 안되시지요. 한 면만 너무 파고 들어가면 이런 자괴증세로 빠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도 말씀하시기를,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고 하지 않습니까! 

------> 자학증세, 자괴증세라는 것의 기본적인 전제조건은 "건강한 자아"입니다. 그 건강한 자아의 의도적 파괴 행동을 자학 혹은 자괴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령의 충만은 건강한 자아의 확립에 있지 않습니다. 성령의 충만은 차고 넘쳐서 오히려 내 생명까지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여기게 합니다. 성령이 육신의 생명에 대한 애착을 밀어부치는 것이지요.(고후 5:8) 

좌로나 우로나 치우지지 말라에서 중요한 것은 중심이겠지요? 도대체 무엇을 중심으로 좌와 우가 결정됩니까? 어린양의 보좌아닙니까? 약속의 온전한 성취아닙니까? 그것은 귀하의 건강한 자아상 확립과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귀하의 의견) 
가재미 눈처럼 한 쪽면만 지나치게 파고들면 다른 쪽의 귀한 복음의 진리를 송두리째 빼앗기는 부정적 안목이 자라날 수가 있고, 더나아가서 이런 부정적 안목으로 인해 하나님이 주신 마음의 평안을 애써 무시할 수가 있습니다. 

-------> 십자가라는 어린 양의 보좌만이 중심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므로 귀하의 견해처럼 십자가가 죽이는 면과 살리는 면으로 해부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죽이는 면과 살리는 면으로 애써 분리하는 것은 "나 여기 잘 살고 있음"이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내가 살려고 하기 때문에 '십자가가 처음에는 나를 죽이지만 결국 나는 부활하여 화려하게 살아 남게될거야!'라는 야심을 십자가에 투영하는 것입니다. 오직 나를 위해서 말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십자가일 뿐입니다. 예수 안을 예수 안이지, 아담의 훈련장이 될 수 없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의 평안은 어떤 인간에게 허락하신 개별적 현상이 아니라, 아담은 알 수도 없는 평안입니다. 혐오스럽고 피하고 싶은 평안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주는 평안은 세상이 알 수도 없는 평안입니다. 세상이 알 수도 평안을 귀하를 중심으로 판단해 버린 긍정 혹은 부정적 안목으로 무시할 수 있다면 이미 그것은 예수가 주신 평안이 아니라, 귀하가 간절히 바라고 바라는 애굽의 꿈일 뿐입니다. 


(귀하의 의견) 
제가 십자가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대단원의 도달점은 하나님과 인간이 ‘화목’입니다. 마치 탕자와 아버지가 화목하듯이 말입니다. 십자가는 그 화목으로 가는 여정 중의 하나입니다. 그 십자가에만 털썩 주저앉으면 안됩니다. 
더 나가시기 바랍니다. 많은 성도들이 처음 신앙을 가질 때는 귀하처럼 자신의 죄에 대해서 가차없이 정죄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제가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거기에만 머물면 온 우주에 가득 찬 하나님의 최종 사랑의 아름다움을 증거하는데 지장이 될 뿐입니다. 

-------> 귀하는 십자가를 부정하거나 긍정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처음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아담이라는 폴더 속에 있는 흙들은 하나님 입장에서는 아예 처음부터 죽어있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아귀처럼 달려들어 십자가를 분석하고 인정하고 눈물을 쏟고 화려한 금으로 장식한다고 해도 그저 "무덤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귀하께서 단정하신 십자가의 대단원의 도달점, 즉 하나님과 인간의 화목이 과연 어떤 것인가는 자명합니다. 무덤 속에 장판을 깔고 도배를 하고 싶은 화목입니다. 무덤을 깨는 것을 결코 화목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처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무덤 속에 있는 인간과 화목할 수 있겠습니까? 귀하는 무덤 속에 있는 구더기와 화목하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과 동등된 입장을 차지하고 싶은 차원에서의 화목이 바로 선악과를 따먹은 결과의 산물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화목은 오직 언약의 성취 차원에서의 화목입니다. 말씀이 은혜의 자리에 있는 상태가 안식이요 화목이지, 인간의 복지와 건강을 위하여 사용가치 있는 말씀이라는 것은 화목이 아닙니다.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반목이요 도전입니다. 죄 그 자체입니다. 

피조물과 화목하기 위해 안달이 난 창조주를 기대하지 마십시오. 창조주로부터 머리털 하나 빠져나올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다스림받고 있는 상태를 귀하는 화목하다고 생각하실 수는 없는지요? 

십자가는 단순한 통과의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화목을 어떻게 이루셨는가에 대한 분명하고도 처절한 기록입니다. 죄인을 완벽하게 다스리고 계신 하나님의 증거입니다. 대신 죽어야 하는 하나님, 매 맞고 인간의 침에 더럽혀지는 하나님, 마침내 성밖으로 끌어가 죽어야 하는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고픈 인간 속에 있는 주인은 바로 죄입니다. 그것을 평생토록 확인시키시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이 과연 왜 일어났는가, 과연 그 분이 누군신가에만 집중토록하시는 것이 바로 성령의 역할입니다. 

십자가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그것은 귀하의 목거리 장식에 불과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처음이요 나중입니다. 어떤 단계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내 안에 성령께서 조명하시는 죄가 더 크고 넓고 자세하게 들통날수록 그것을 전부 덮고 계신 예수의 피와 살이 감사하고 고마울 뿐입니다. 

성화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십자가 다음 단계로의 꿈을 펼치고 계신 귀하는 여전히 "나 여기 잘 살고 있음"만을 고수하고 싶지, "너 여전히 죽었음"을 선포하고 계신 주님의 음성에는 귀를 막고 있는 것입니다. 


(귀하의 의견) 
물론 따지고 보면, 조승희나 각종 사회악을 저지르고 있는 작자들의 속성이 우리들에게 전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귀하께서 지적하신대로 아담의 한 품성을 부여받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령이 역사하는 성품을 왜 억지로 부정하려고 하십니까? 성령님은 바로 우리 스스로 안 되는 하나님의 형상 회복을 그분의 도움으로 온전한 분량까지 성숙시키려고 하시는 분이십니다. 

------> 사회악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사회악'이라면서 자신과 악을 분리하고 있는 내가 이미 악한 존재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이러한 악을 치유하여 완전된 인간을 만들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역사는 뱀의 후손은 여자의 후손을 공격하는 방식으로 드러남을 역사하십니다. 반대로 여자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함으로써 그 존재가치를 나타내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기 위해 성령이 도와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공격하고 덮치고 삼키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드러나고 나는 죄인인 것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 안에 있는 나는 여전히 그 분의 살과 피를 양식으로 삼을 수 밖에 없는 처지입니다. 그 분 밖으로 나와 마음껏 하나님의 형상의 성품을 발산할 수 있는 자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이라는 주머니에 담겨있는 죄인의 괴수가 바로 성도인 것입니다. 

성도의 온전한 분량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만이 남은 상태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이 천하에서 내가 구원받을 자격없는 죄인 중의 죄인 맞구나가 인정되는 상태입니다. 


(귀하의 의견) 
귀하의 내부에는 그런 성령님의 역사까지 애써 부정하시려고 합니다. 꼭 그래야만 합니까? 그렇지 아니하면 화목의 십자가 복음이 증거되지 않는 겁니까? 그래서 귀하께서 얻고자 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 제가 부정해서 부정된다면 아예 처음부터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 자작극이지요. '나 여기 잘 살고 있음"을 고수한 화목은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화목이 아니라 공격이요 전쟁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전쟁을 증명하는 증거가 바로 십자가이며 이것은 인간에게는 어리석게 보이고 미련하게 보이는 것이라 도저히 스스로 취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주장하고 싶은 이유는 인간은 구원받을 자격이 애초부터 없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가를 빙자해서 자신의 구원 욕망을 발산하고 있는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며, 그렇게 욕망을 발산하고 있는 자가 다름아닌 내 자신인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창조주는 창조주로 남고, 죄인은 죄인을 남아야 은혜라는 것이 성립됩니다. 죄인이 이제 은혜 먹고 스스로 성장하여 의인된다면 그 자생력 덕분이라고 할 것이 뻔합니다. 자신의 노력과 깨달음과 도전으로, 즉 자신의 행위로 추가되고 높아지는 것을 인간은 은혜로 여기지 않고 삯으로 여길 뿐입니다. 내가 은혜 받을 만 했고 그 응분의 대가를 받았다라고 말이죠. 


(귀하의 의견) 
사회악을 이런 식으로 본질적인 면에서 유야무야 할 수는 없습니다. 건전한 사회 윤리 정착에 참여해야 될 기독교인이 되레 이런 사회악이 ‘어쩔 수 없는 일이다’라고 미화한다든지, 흐지부지 넘어갈 일이 아니라고 봅니다. 로마서 13장에 보세요. 거기에 보면 정당하게 하나님에 의해서 세상 악을 척결하기 위해 하나님께 쓰임 받는 ‘하나님의 사자’가 나옵니다. 그들의 단호함에 대해서 그 어떤 논리로도 훼방놓을 수 없습니다. 

사회악에 확산에 대해서 ‘어쩔 수 없는 아담의 생리’ 라고 자탄하면서 방치할 여지가 있는 발언은 삼가야 될 줄로 압니다. 기독교인들이 다같이 강한 적개심을 가지고 배격의지를 드러내야 합니다. 

------> 내가 이미 사회 악 자체요, 내 안에 그 어떤 뉴스거리보다 더한 일들이 차고 넘치는데 무엇을 미화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그저 의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안 구석 구석을 MRA로 찍어 그 사진을 보여주시니 '아 내 안에 이런 암도 있구나!' 놀라고 있을 뿐입니다. 
빛이신 예수께서 어둠인 나를 삼키고 계시니까. '내 안에 이런 어둠도 있었구나!'가 확인되어 놀라고 있는 사람에게 스스로 의사가 되거나 빛이 되라고 강요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귀하께서 말씀하신 롬 13장의 내용이 저에게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하나님의 사자들의 역할은 내가 이웃을 사랑하기는 커녕 악을 행할 수 밖에 없는 인간임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의 완성인 사랑이란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외에는 없구나. 그 십자가 사랑이 나를 가려주지 않으시면 나는 저들을 두려워할 수 밖에 없는 죄인 맞구나. 권세자들의 눈에 선한 자가 되기 위해 나를 치장하지 말자. 빛이신 예수 안에서 그 어떤 변장과 가면이 소용있겠는가...십자가가 갑옷이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은 내가 화살의 표적됨이 당연하다는 말씀이구나. 주님께서 그 모든 공격을 대신 감당하셨으니, 어찌 이를 내 몫으로 여기겠는가! 오직 자랑할 것은 십자가 밖에 없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