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윤진

[스크랩] 아프칸 사태를 보는 복음적인 눈(박윤진님의 글)

아빠와 함께 2017. 9. 2. 10:51
 

 

인간이 어떤 사건을 평가할 때, 가장 중요하게 작용하는 것은 '사건과 자신과의 거리'입니다. 나를 중심점으로 하여 그 사건이 얼마나 멀리 있는가를 거의 본능적으로 계산하여 해당 사건을 이해하고 그에 따라 반응을 나타내게 되어 있습니다.


현대 민주주의 사회는 국민주권을 표방하고 있습니다. 국민주권이라는 정치적 환상은 자아를 국가까지 확대시키고 국가는 사건과의 거리를 측량하는데 있어서 자아와 비슷한 수준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특히 단일민족국가임을 강조해 왔던 우리나라의 경우, 국가와 민족, 그리고 자아를 일치시키는 주장은 아무런 비판없이 수용되어 왔습니다.


이런 이유로 이번 아프칸 피랍사건을 바라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반응은 위에서 말씀드린 자신(국가)와의 거리에 따라 각기 다른 해석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피랍자 가족들의 반응, 한국인 기독교인의 반응, 한국인이지만 비기독교인의 반응, 비한국인이면서 기독교인의 반응, 비한국인이면서 비기독교인의 반응이 다 다릅니다. 한국인 피랍 당시 살해되었던 독일인에 대한 귀하의 반응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탈레반을 추종하는 사람들의 반응은 위에서 나열한 경우의 반응과 거의 정반대일 것이라는 추측은 전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 또한 자신(국가, 소속집단)과의 거리를 계산해서 이번 사건을 해석하고 반응하고 있을 것입니다. 석방조건이 포로 석방에서 돈으로, 다시 포로석방으로 변경하고 있는 이유도 내부 구성들의 이해타산이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의 사건해석 기준 중 또 다른 하나는 자신과의 거리를 측정해서 자신과 가까운 쪽을 "의인"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반대 쪽을 "악인"이라고 구별하는 선악이분법입니다. 위에서 열거했던 분류(한국인, 비한국인, 기독교인, 비기독교인)와 탈레반 역시 이러한 기준으로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고 있으며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평가결과에 따라 의의 양과 악의 양이 결정되어 버립니다.


결국 아프칸 피랍 사건의 본질은 의와 악의 질적 차이가 원인이 아니라, 서로 자신들이 추구하고 있는 "이익"이 다름에서 오는 양적 차이가 그 원인인 것입니다. 피랍된 한국인의 이익(소유)과 탈레반의 이익(소유)이 충돌한 것일 뿐입니다. 양쪽 모두 죄인으로서 모습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으므로 죄와 의의 관점에서 보면 충돌은 전혀 없습니다. 나와의 거리만 제거하면 아프칸 피랍보다 더 부당하고 용서할 수 없는 소위 악한 일이 전세계에서 1초에도 수백번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것이 일상입니다. 단지 국가라는 팽창된 나와 기독교라는 동일한 범주에 소속되어 있음으로 인한 환상이 이번 사건의 본질을 자꾸 선악체계로 끌고 가는 것입니다.


역사상 의와 악의 충돌은 단 한번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인간 중에 의인은 없기 때문에 인간 상호간의 충돌은 이익의 충돌일 뿐, 선악의 충돌은 아닙니다. 이번 피랍 사건을 의인과 악인의 구조로 몰고 가는 힘이 바로 유일한 의인이신 예수님을 십자가로 끌고간 죄의 정체입니다. 나로 부터 시작하여 나를 선하고 의롭게 규정한 후, 나와 다른, 나와 이익이 다른 모든 존재를 악하다고 밀어부치는 자기중심적 죄성은 하나님의 아들까지 거침없이 십자가로 밀어부쳤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미 그것조차 예수께서 알고 계셨다는 것이며, 그 방법에 순응하여 의로움이 과연 어떤 것이지, 의로움에서 잉태된 생명이 바로 죄의 삯인 죽음 가운데에서 어떻게 피어나게 되는지를 낱낱이 자신의 육체를 통해서 보여주셨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일방적인 주님의 피사랑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된 성도는 자신이 여전히 자기중심적으로 세상을 해석하고 있음을 알게 되며, 그래서 자기부인을 하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은 성도의 행위에 따라 그 달성여부가 결정되는 유동적 상태가 아니라, 말씀 자체로써 육체를 부정하신 주님 안에 이미 성취된 모습으로 성도에게 선물처럼 주어졌음을 깨닫게 됩니다.


의인 안에 담겨있는 죄인으로서 더 이상 그 죄가 성도에게 어떠한 영향을 줄 수 없음을 날마다 확인하며 죽음에 넘겨지는 삶이 바로 순교의 삶이며 부활의 삶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악의 정체를 죄인들 속에서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만 발견하게 됩니다. 즉, 이슬람, 천주교, 선교단 피랍, 아동학대, 성매매, 살인, 강도 등 죄인의 일상에서는 언약의 주체가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자아, 나의 본질, 즉 언약이 등장할 수 밖에 없는 당위성만이 발견되는 것입니다. 예컨대, 큰 화산폭발로 인하여 돌덩이들이 날리고 화산재가 뿌려질 때, 돌덩이가 화산재를 부러워 한다거나, 정죄한다거나, 지금 이 폭발이 화산재 때문에 일어났다고 여기거나, 화산재를 구원하기 위해 애쓰거나 걱정한다거나, 같은 돌덩이끼리 모여 큰 돌무더기가 되도록 열심을 낸다거나, 화산재 속으로 들어가서 봉사하고 자신을 희생한다거나 하는 모든 일체의 양태들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와 같습니다.


진정한 의와 악의 충돌로 인하여 피흘리고 계신 주님의 눈으로 이번 사건을 바라본다면, 그저 늘상 있어왔던 죄의 양상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 사건을 나름대로 해석하고 반응하고 있는 전 인류를 한 주머니에 몰아넣고 계심만이 분명해 집니다. 그 주머니의 이름은 아담입니다. 마음으로 하나님과 원수된 자들끼리 손해보지 않고 좀더 많이 가지기 위해 치열하게 다투는 모습을 보면서 주님의 공로가 아니라면 이 주머니 속에서 결코 나올 수 있는 자가 하나도 없음을 절감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왠 은혜입니까?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출처 : 화평교회
글쓴이 : 오용익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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