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능력
2013년 3월 31일 본문 말씀: 하박국 3:8-12
(합 3:8, 개역) 『여호와여 주께서 말을 타시며 구원의 병거를 모시오니 하수를 분히 여기심이니이까 강을 노여워하심이니이까 바다를 대하여 성내심이니이까』
(합 3:9, 개역) 『주께서 활을 꺼내시고 살을 바로 발하셨나이다 (셀라) 주께서 하수들로 땅을 쪼개셨나이다』
(합 3:10, 개역) 『산들이 주를 보고 흔들리며 창수가 넘치고 바다가 소리를 지르며 손을 높이 들었나이다』
(합 3:11, 개역) 『주의 날으는 살의 빛과 주의 번쩍이는 창의 광채로 인하여 해와 달이 그 처소에 멈추었나이다』
(합 3:12, 개역) 『주께서 노를 발하사 땅에 돌리셨으며 분을 내사 열국을 밟으셨나이다』
사람이 살아있는 것과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과 경쟁 관계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늘 실감합니다. 특히 인생이란 고통과 힘듦의 연속입니다. 이 힘듦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이 살아있음이 추상이 아니라 관념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살아있음을 늘 확인시켜 줍니다.
이가 아프다든지 몸이 피곤할 때, 사람은 자아가 살아있는 것보다 자신의 신체가 살아있다는 것이 훨씬 더 실감나는 ‘살아있음’을 알게 됩니다. 정신적으로 아무리 생생하게 살아있어도 육체가 아프면 차라리 ‘살아있음’을 취소 내지는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불현듯 일어납니다. 하지만 사람은 죽고 싶다고 죽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육체가 시키는대로 해야 합니다.
이처럼 인간의 살아있음은 인간 개체의 살아있음을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온 대자연과 더불어 이 시대에 함께 살아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눈 뜨고 살아있으니, 그리고 그 눈 뜬 자신의 시선에 대자연이 춤추고 있는 것이 보이니 자신도 함께 살아있음을 인정하게 됩니다. 하지만 아무리 눈을 부릅떠도 하나님이 살아있다는 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살아있다는 것이 너무 생생하니 하나님이 살아있음이 실감나지 않는 겁니다. 그런데 자신이 원하는대로 사태가 돌아가지 않을 때, 인간은 자신의 자율권의 한계를 느끼게 됩니다. “혹시 나보다 더 생생하게 살아있는 분을 있을게 아니겠어?”라는 의구심을 갖게 됩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살아있음은 이스라엘 역사와 더불어 살아있는 겁니다. 이스라엘 역사와 주고받는 가운데 기존의 자기 능력을 기대지 않는 자의 출현을 통해서 하나님의 살아계셔서 일하시는 원칙 같은 것들이 부각이 됩니다. 두 가지 예를 들면 첫 번째는 창세기 19장에 나오는 소돔과 고모라 멸망 사건입니다.
천사 두 분이 롯의 가정을 방문했습니다. 롯은 천사임을 알고 손님들을 잘 대접했는데 그 동리에 낯선 사람의 출몰에 대해서 호기심은 갖은 불한당들이 손님들을 내놓아라 고 한 밤중에 행패를 부립니다. 여기서 롯은 놀라운 제안을 합니다. 아직 남자도 모르는 숫처녀 두 딸을 불한당에 내어주고 자신은 두 손님을 보호하겠다고 나옵니다.
가치의 경중을 따지면서 저울대를 상상해보세요. 한쪽에 천사 두 명을 놓았다고 치고 우리가 천사가 전하는 소식을 위하여 무엇을 희생하겠습니까? 롯에게는 딸 둘을 내어놓았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롯의 이러한 태도는 자신의 살아있음보다는 하나님의 살아 있음을 더 가치있게 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살아있다고 여기면 온갖 고상한 신앙과 경건을 다 자신에게 투입합니다. 그렇게 해서 그 어떤 경우라도 신앙으로 만반의 준비 태세를 취할 것 같지만 하나님의 살아계심은 이런 인간들의 방비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사수하는 방식을 능가하는 시련과 유혹이 주어게 만들어버립니다.
그러면 여지없이 와르르 무너지고 맙니다. 사람들은 살아있을 때 그냥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름대로 계획과 노선을 만들어내면서 살아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살아계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노선은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모든 것을 묵살하고 비켜가는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따라서 자신을 죽은 존재로 간주하지 못하는 자들에게 있어 결코 하나님은 참으로 살아계신 분으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자아의 살아있음의 강도가 너무 세기 때문입니다. 롯은 천사의 방문으로 통해 자신마저 하나님의 살아계심의 결과물로 여겼습니다.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뜻을 포기하는 수 밖에 없음을 인정합니다.
두 번째 예는 오늘 본문과 관련있습니다. 여호수아 10:12-14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모리 사람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붙이시던 날에 여호수아가 여호와께 고하되 이스라엘 목전에서 가로되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 그리할지어다 하매
태양이 머물고 달이 그치기를 백성이 그 대적에게 원수를 갚도록 하였느니라 야살의 책에 기록되기를 태양이 중천에 머물러서 거의 종일토록 속히 내려가지 아니하였다 하지 아니하였느냐 여호와께서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신 이 같은 날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셨음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대자연의 모든 것들이 이스라엘을 자신의 결과물로 삼으시려는 하나님의 전략에 투입됩니다. 여호수아는 대범한 기도를 합니다. “태양을 멈추게 하옵소서!” 즉 태양마저 하나님의 일관된 계획에 편입되어 움직이는 것이 사실이지 않습니까 라는 말입니다. ‘신기함’ 사실은 하나님에 대한 모독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신기한 일을 행하시지 않습니다. 단지 우리 인간들이 신기한 일이 일어나기를 학수고대 하지만 평범한 일은 자신이 행할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신기함은 실은 인간의 살아있어 나름대로의 계획을 펼칠 권한이 있다는 자부심의 바탕 위에서나 나올 생각입니다.
하지만 참으로 신기한 일은 일상 깊숙이 박혀있는 사소한 성냄이나 분노, 미움 같은 것들 조차 우리 인간이 이겨내지 못하고 있음을 통해서 밝혀집니다. 즉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한 일은 우리들이 전혀 하나님 말씀을 지켜내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곧 성령의 열매 같은 것들입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성전에서 발휘하는 그 구원의 능력이 대자연을 뒤집어 가면서 실현시키지만 이 모든 것은 인간들이 살아있어 그 살아있는 자기 나름대로 세계관을 고수하고 있다는 것을 감안하지만 신약에서는 이미 모든 인간을 죽은 자로 간주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새언약이 완료되면서 인간은 죽은 자입니다.
따라서 참으로 하나님께서의 일하심은 ‘죽은 데서 살아나신 예수님’하고만 일하시는 방식으로 주어집니다. 비록 해가 멈추고 바다가 중간에 끊어지지 않더라도 사람의 변화는 십자가로 완료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날마다 우리 자신의 살아있음의 행함에 기대하지 않고 은혜를 알면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
9강-합3장8-12(구원의 능력)13033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 하박국 3장 8절부터 12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304페이지입니다.
하박국 3:8-12
“여호와여 주께서 말을 타시며 구원의 병거를 모시오니 하수를 분히 여기심이니이까 강을 노여워하심이니이까 바다를 대하여 성내심이니이까 주께서 활을 꺼내시고 살을 바로 발하셨나이다 (셀라) 주께서 하수들로 땅을 쪼개셨나이다 산들이 주를 보고 흔들리며 창수가 넘치고 바다가 소리를 지르며 손을 높이 들었나이다 주의 날으는 살의 빛과 주의 번쩍이는 창의 광채로 인하여 해와 달이 그 처소에 멈추었나이다 주께서 노를 발하사 땅에 둘리셨으며 분을 내사 열국을 밟으셨나이다”
성경을 이렇게 보게 되면 나타난 그 첫 번째 특징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이 살아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 자신이 살아있다는 걸 너무 생생하게 느끼기 때문에 항상 우리는 우리 살아있는 것이 일차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에 주님 살아있다는 것은 뒷전으로 밀리게 되는 겁니다. 우리가 살아있으면 우리 행동의 주안점, 내가 이렇게 행동하면 이런 결과가 주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내가 만약에 평신도고, 어느 교회에 간다면 성경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면 제일 먼저 찾는 요건이 뭐냐 하면 기도 응답이 잘 되는 교회가 어딜까? 그러면 기도 응답이란 기도는 내가 하는 거잖아요. 내가 했는데 즉각, 즉각 효과 나는 그렇게 소문난, 돌하르방 비슷하게 돌 할머니 같은 게 있는데 뭔가 3가지 빌면 한 가지는 이루어지는 곳, 그런데 신약 성경이 무슨 필요합니까? 조직 신학이 뭐 필요하고 목사도 필요 없죠. 중도 필요 없어요.
내가 빌어서 하나님 복을 내가 따내겠다는데 누가 개입합니까? 아무도 개입할 필요가 없는 자기의 자유를 충분히 누리면서 아쉬울 때는 기도하면 즉각, 즉각 응답되는 곳. 이것은 한 마디로 내가 살아 있다는 겁니다. 내가 살아있다 보니까 예수님의 부활? 살아났다? 살아났는데 왜 내 눈에 안 보이지? 이렇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이야기가 나왔을 때 제자들도 믿지를 않았습니다. 왜, 본인들이 모든 행동을 결정해 나가기 때문에 자기 계획이 있기 때문에 주님의 부활했다는 것이 내 계획을 내가 하고 있는데 거기 주님께서 개입할 필요가 없다고 보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딱 부활하고 난 뒤에 하는 이야기 보니까 내가 가는 그 노선하고 다른 노선으로 따로 일을 하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살아 있다. 내가 주인공이다. 라고 여기면서 부지런히 했던 이것은 멸망 받는 쪽이었고 거기 반해서 주님께서 일을 만들어 나가시고 이끌어나가시는 길만이 그게 바로 천국으로 통하는 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거예요.
베드로한테는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니가 원치 않는 길로 간다.“ 상당히 어려운 말입니다. 내가 원치 않는 길로 간다는 그 말은 ‘주님이여 이것은 내 길이 아니고 주의 원치 않는 길입니다.’라고 단정 짓는 그 순간 그 길도 주께서는 피해 가버려요. 내가 원치 않는 길인데 주님이 원하기 때문에 이 길이 맞을 것이라고 딱 드는 순간 그것은 벌써 어느새 내가 원하는 길로서 자리 잡아요. 그럼 주님께서 또 그것을 방향을 또 틀어버립니다. 끝까지 원치 않는 길로 갑니다.
왜 그렇게 하시는가, 두 번 다시 주님은 우리 인간한테는 안 속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계속해서 주님만 살아있어서 주님 계획만 고집하기 때문에 우리 계획은 묵살되는 겁니다. 이걸 오늘 설교 제목에서 주님의 전쟁이라고 이렇게 했는데 오늘 본문 설명하기 이전에 먼저 창세기 19장에 나오는 이야기부터 먼저 해드리고 오늘 본문을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 관련 있는 겁니다.
창세기 19장 이야기는 뭐냐,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 이야깁니다. 천사가 왔습니다. 아침에 설교하면서 요셉에게 천사가 왔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속으로 굉장히 죄송스러운 마음을 가졌어요. 왜냐 하면 천사가 오지도 않는 사람한테 천사 이야기를 하니까 미안해서 그렇습니다. 천사가 왔더니만 요셉은 인생 조져놔 버렸습니다. 그때부터 뒤죽박죽이 돼 버렸어요. 진짜 천사 미워, 자기중심 날라 가 버리고.
그런데 창세기 19장에 천사가 왔을 때 롯은 천사가 안 왔으면 소돔과 고모라 성에서 죽치고 안 왔을 겁니다. 아마 부동산 중개업 하든지 이렇게 했을 거예요. 소개비 받아 가면서 이렇게 살 수도 있을 것이고, 또 악기 다루면서 살 수도 있을 것이고. 그런데 천사가 왔다 이 말이죠. 천사가 오니까 롯은 자기 의견보다도 천사의 의견을 더 우선시 했습니다. 이게 아주 굉장히 신기한 일 이예요. 그런데 그 사람이 천사라는 걸 본인은 알지만 다른 사람은 모르죠.
천사가 와서 그 집을 방문하니까 주변에 있는 깡패들이 롯의 집을 포위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롯이 저 사람은 천사인 줄 모르고 본인은 아니까 천사를 보호하기 위해서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희생을 다 합니다. 그 희생이 뭐냐 하면 7절에 보면 “이르되 청하노니 내 형제들아 이런 악을 행치 말라 내게 남자를 가까이 아니한 두 딸이 있노라” ‘그러니까 너희들이 내 두 딸을 겁탈해도 좋은데 제발 우리 집에 찾아 온 천사는 손대지 말아다오.‘라고 한 거예요.
천사를 보는 가치가 어느 정도로 가치가 있느냐 하면 저울대에서 여기(우) 천사를 놓고 그 앞에다 뭘 놓느냐가 중요하거든요. 천사가 더 중요한데 어느 정도로 중요하냐 하면 남자를 모르는 두 딸을 여기(좌)다 놓고 성 겁탈 당하고 성폭행 당해도 나는 이 천사만큼은 놓을 수가 없다는 것이 롯의 이야깁니다.
참, 내가 이 대목 보면서 참 하나님이 무섭다는 것을 실감하게 돼요. 제가 광주에서 그런 강의했는지 기억이 잘 안 납니다만 이런 기억이 나요. 다니엘 3친구가 불에 들어갔습니다. 우리는 구경했습니다. 그 다음에 우리를 불러서 ‘자, 봤지? 3친구 들어가도 예수님이 함께 하니까 불에서 나온 것 봤지? 그 다음에 너 나와. 그동안 잘 구경하고 앞자리에서 박수치고 있던 너 나와.’ 이렇게 불러 낼 때 이게 중요하거든요. 앞 사람이 세 명인데 불 속에 들어갔을 때 살아서 멀쩡하게 나왔거든요. 그 다음은 내 차례다 말이죠. 우리는 박수만 쳤는데, ‘좋다. 다니엘 세 친구 믿음 좋다. 난 당신을 존경합니다.’ 이렇게 까불고 있는데 주님께서 ‘오, 그래 너 나와.’ 친구 군에 간 이야기는 재밌지만 지가 군에 가면 이건 미치는 겁니다. 남의 아들 군에 가면 ‘뭐 그리 슬프나?’ 하는데 자기 아들이 군에 가면 눈물이 팍 쏟아진다 하죠.
주님께서는 ‘너 나와. 너 나와. 나와 함께 하지 않으면 너 구원받을 수 없어.’ 이렇게 나온다 말이죠. 구경한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고 직접 주님과 접촉이 돼야 구원받거든요. 저 사람 선배는 구원받았고 그 다음 차례 나갈 때 그래서 제가 질문을 던진 거예요. ‘자, 불 속에 들어가겠습니까? 안 들어가겠습니까?’ 정답은 둘 중에 하나입니다. 라고 했거든요. 아! 진짜 어려운 문제예요. 상식적으로 겁나서 안 들어갈 것이라 생각하죠. 들어갑니다. 이게 인간의 오기입니다. 믿음이 아니고 오기에요. 그래서라고 자기를 장한 존재로 비추고 싶은 게 있어요. ‘에이 씨, 사람이 한번 죽지, 두 번 죽나.’ 이건 믿음이 아니고 그냥 오기의 산물 이예요. 자기 행함의 산물입니다. 이건 전혀 믿음 아닙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불 속에 들어가라는 그런 난제, 진짜 그런 극도의 어려운 문제를 하는 것이 아니고, ‘니가 싫어하는 사람 니 약 올릴 때 성내지 마라.‘라고 할 때 우리는 그걸 지킬 수 있습니까? 차라리 불 속에 들어가라 하면 용감한 티나 나죠. 그때 누가 약 올리는데 화가 난다. 이건 짜증납니다. 견딜 수 없어요. 이건 이길 위인이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과감하게 해낼 수 있는 멋있어 보이는 거 있잖아요. ‘돌에 맞아 죽어라.’ 이건 되는데 사소한 것에 대해서 우리는 거기서 넘어질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달아요. 그러니까 큰 덩어리 믿음 좋으려고 하지 말고 기도해서 암 낫는 거 자랑 하지 말고, 니가 ‘범사에 감사하라.’ 이거 안 되거든 그건 불 속에 백 번 들어갔다 나와도 소용없는 거예요.
소돔과 고모라에서 이 대목을 제가 보면서 만약에 천사가 우리 집에 왔는데 시집가지 않은 딸이 있다. 그런데 딸을 대신 내주고 천사를 보호한다. 이것은 인간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자식이 얼마나 중한데 자식 때문에 사는데, 자식 버리면 그럼 천사 때문에 삽니까? 우리가 언제 천사 때문에 살았습니까? 아니거든요. 그런데 이 롯은 천사를 보호하고 딸을 내놨습니다.
그럴 때 그 깡패들이, 딸 말고 너희 집에 온 손님 둘, 천사는 모르죠. 손님 둘 내놔라 할 때 우리 같으면 얼마나 가슴을 쓸어내렸겠습니까? ‘아휴, 다행이다. 나는 그냥 한번 해본 소린데 실제로 그러면 얼마나 조마조마 했겠어요?,’ 우리 같으면 딸 내놓지 않습니다. 마누라 내놓지. 믿음 좋다는 상은 다 받고 처리는 아주 간단하게 폐기물에 5만원 딱지 붙이잖아요. 밖에 내놓으면 되고. 지는 믿음 좋다 하고 일거양득 얼마나 좋겠어요? 그리고 지는 또 장가가면 되는데, 일거삼득이 되는데.
남자 모르는 딸을 대신 내놨지만 사람들이 그 남자를 달라고 할 때 그 다음에 어떻게 됐느냐, 천사가 그 불한당의 눈을 어둡게 해서 그 깡패들이 봉사가 돼서 더듬거리다 피해버렸다는 사례가 나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뭐만 기다리면 되느냐 하면 막상 하늘에서 불만 떨어지기만 기다리는데 막상 불 떨어지기 이전에 떨어지더라도 남은 자 되기 위한 사전 정지 작업에 대해서는 우리가 너무나 모르고 있는 거예요.
그 다음에 오늘 본문 봅시다. 오늘 본문에 있어서 하나님이 살아있다는 것을 내가 아주 쉽게 말씀드릴게요. 하나님이 살아있다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 한계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하나님이 살아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 눈에 들어오게 돼 있어요. 내가 할 도리를 다하고 불 속에 들어갈 때 불 속에 들어가 버리면 거기 하나님 안 계셔요. ‘주여 못 들어가겠습니다.’ 할 때 비로소 우리는 믿음이 생기는 거예요.
우리가 아는 상식을 완전히 반전입니다. 주께서 ‘이거 하겠나?‘ ’하겠습니다.‘ 이건 믿음이 아니에요. 오기입니다. ’이거 할래? 안 할래?‘ ’죽어도 때려죽여도 못합니다. 차라리 제가 찢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아무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라도 저는 못합니다.‘라고 자백할 때 주님이 싱긋이 웃습니다. 합격이야! 합격이야!
자꾸 교회 와서 목사 시키니까 자꾸 해내는 게 그게 문제예요. 그게 믿음이 아니고 그건 불신 이예요. ‘하세요.’ ‘못합니다.‘ ’오후에 기도 한 번 하세요.‘ ’못합니다.‘ 이게 믿음이라니까. 못하니까 못하는 거예요. 생중계 되니까, 그래서 섭외가 안 돼, 전도사가 월급주고 전담을 하든지. ’못합니다.‘를 바래기는 우리교회에서만 ’기도 못합니다.‘를 하지 말고 평소에 직장생활 하면서도 ’못합니다.‘라는 마음을 가지고 아침에 출근하면 얼마나 좋겠냐 말이죠. 오늘도 한 건수도 못 올린다. 교사 같으면 애 하나도 감동주지 못한다. 오늘도 농사도 내가 만날 해봐야 비료 줘봐야 크지도 못한다. 항상 나는 못한다. 쑥 캐러가야 쑥 하나도 못 캔다. 항상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못하는 것밖에 할 수 있습니다. 이게 맡기는 거예요.
맡길 때 살아있는 나는 정지 상태에 들어갑니다. 살아있는 내가 정지 상태에 들어가면, 그 다음에 뭐가 보이는가, 구약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해 내실 때 그 기적적인 일이 과거사가 아니라 지금 나에게 똑같은 기적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감지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그 광야에서 주님께서 만나를 줬거든요. 전에 제가 이야기했잖아요. 캥거루 이야기했잖아요. 영국의 제임스 쿡이라는 사람이 1770년 호주에 가니까 뭐가 들판에 뛰고 있다 말이죠. 그래서 원주민 보고 ‘저걸 뭐라고 하죠?’ 물으니까 원주민이 ‘캥거루’ 했다고요. 이 캥거루 뜻이 뭐냐, ‘나도 모른다.‘ 그런 뜻이거든요. ’나는 모른다.‘ 하니까 그게 이름 돼 버렸어요. 그래서 지금도 호주 들판에 보면 ’나는 모른다.‘ 동물이 계속 뛰놀고 있어요.
광야에서 주님께서 양식을 주니까 사람들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게 뭐지?’ 이러니까 만나가 돼 버렸어요. 그러니까 만날 먹으면서 이거는 내 노동의 대가가 아닌데 ‘이건 뭐지?’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아침 식사 기도나 매일 만나는 사람을 통해서 ‘이건 뭐지?’ 하면서 ‘하나님이 주셨구나.‘ 하는 것을 매일 느끼게 만든다면 그것은 만나 위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라는 겁니다.
이것을 하박국 3장에서는 이것이 어디에서 오느냐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보좌에서 나왔다. 하나님의 성전에서 나왔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지난 시간에 했지만. 2장 20절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여기 계신다는 말은 철학적 용어로 존재라 하거든요. “계시니”라고 해놓고 3장에 보면 행동이 나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계시기만 한 것이 아니고 실제로 하나님이 모든 행동을 일으키는데 그 일으키는 그것을 사다리로 타고 올라가면 계신 이가 나온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일하는 것을 정지시키면 내가 일 안했음에도 불구하고 만나, 이것이 무엇인지, 저것이 무엇인지, 이건 웬 떡이지? 웬 은혜지? 자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보일 때 그런 것을 통해서 어디로 가느냐. 아! 주님이 계셨고 그 계신 곳에서 흘러나온 액션, 하나님의 살아있음이 오늘날 나로 하여금 나 되게 만들었나 하는 생각을 깨닫는 겁니다.
이게 바로 구약에서 산천초목을 동원해서 기적을 베풀었던 그 기적의 실내용 이예요. 우리는 그 기적만 받았다는 것만 부러워하지 말고 그걸 통해서 인간들이 어떻게 달라지는가, 그걸 생각해야 됩니다. 인간의 존재는 유죄입니다. 무죄가 아니고 유죄, 인간은 존재한다는 자체가 유죄에요. 유죄지만 주님께서 용서한다는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이 산천초목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여, 이게 뭡니까? 내가 행하지도 않았는데 웬 은혜입니까?’라고 은혜를 계속 줌으로 말미암아 용서했다는 표시를 그런 식으로 표현해 주시는 겁니다. 누가? 하나님이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그 과거사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9절에 봅시다. “살을 바로 발하셨나이다 주께서 하수들로 땅을 쪼개셨나이다” 홍해 바다 이야기죠. 요단강 이야기고. “산들이 주를 보고 흔들리며 창수가 넘치고 바다가 소리를 지르며” 홍해 바다 이야깁니다. “주의 날으는 살의 빛과 주의 번쩍이는 창의 광채로 인하여 해와 달이 그 처소에 멈추었나이다” 이거는 여러분들이 아시다시피 여호수아 10장 이야깁니다. 12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아모리 사람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붙이시던 날에 여호수아가 여호와께 고하되 이스라엘 목전에서 가로되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 그리할찌어다”
“태양이 머물렀다.”는 대목, 보통 초신 자들이나 처음 아마추어들, 성경 보는 사람들은 이 대목에 있어서 기가 죽습니다. 아무리 내가 기도를 해도 이렇게 여호수아처럼 엄청난 걸 기도 해본 적은 없거든요. ‘하나님이여, 태양을 멈추어 주옵소서.’ 여러분 이런 기도 해본 적이 있습니까? 우리 다 같이 통성기도 합시다. ‘오늘 한 시간 동안 태양이 멈추도록’ 이런 기도 제목을 어느 교회가 내세웁니까?
태양이 멈췄다는 이 말은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하나님이여, 세상이 돌아가는 모든 일은 우리 소관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뜻입니다. ‘하나님의 행동의 결과물이 우리이기를 원합니다.’라는 뜻 이예요. 기도할 때. ‘하나님이여, 태양이 멈추게 해주옵소서.’라는 말을 풀이하면 ‘하나님 때문에 우리가 생기게 하옵소서.’라는 그런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태양은 멈추게 해달라는 기도는 안 해도 되지만 해도 마찬가지지만 그 뒤의 말은 우리가 기도해야 돼요. ‘주의 일하심에 대해서 주께서 원하시는 사람 만들어 주옵소서.’ 이 기도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겁니다.
구약 여호수아 10장에서 태양이 멈췄다. 그런데 사람은 이 대목을 가지고 뭐라 하느냐 하면 ‘여호수아는 태양을 멈추고 왜 내가 기도한 태양은 멈추는 게 아니고 손목시계도 안 멈추더라. 왜 나한테는 차별하느냐. 누구는 태양 멈추고. 우리는 태양도 안 멈추고 달도 안 멈추고 뭐 우리는 남의 자식입니까?’ 이렇게 삐질 수가 있거든요.
그때는 태양이 멈춰야 인간됐고 지금은 태양이 안 멈춰도 인간되는데, 중요한 것은 니가 어떻게 바꿔지냐. ‘모든 게 은혜입니다.’ 알면 인간 바뀌고 천국 가는 것이지, 꼭 옛날처럼 태양 멈추고 달 멈추고 별 따라가다 보면 별이 막 따라 오고 음식점 없다고 하니까 갈 데 없다 하니까 별이 멈추고 저 집에 가라. 꼭 그런 일이 일어나 줘야 우리가 인간됩니까?
이거 하나 아셔야 돼요. 구약에서의 언약은 살아있는 사람하고 언약합니다. 참 중요한 거니까 이거 마지막으로 이야기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구약의 모든 언약은 살아있는 사람하고 하는 거예요. 야곱아! 살아있죠. 아브라함 살아있죠. 살아있는 사람하고 언약을 맺었는데 신약에서는 새 언약인데 마지막 언약입니다. 더 이상 두 번 다시 언약이 없어요.
마지막 언약은 뭐냐, 우리를 죽여 놓고 언약을 맺어요. 그러니까 우리는 죽었으니까 우리하고는 언약이 안 되는 거예요. 왜, 죽었으니까.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분이 누구냐, 바로 그분이 예수님 아닙니까? 예수님하고 아버지하고 언약을 맺어서 그 혜택과 효과를 이미 죽어버린 우리하고 그냥 우리는 공짜로 혜택을 입히는 것, 이게 신약 성경 해석의 전부입니다. 모든 해석은 이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다.“ 뭔 뜻이냐 하면 ‘가만있어. 죽어있어. 까불지 말고 죽어있어.’ 해놓고 왜 돈보다도 주님이 좋은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를 그 말씀으로 우리를 잠재워놓는 거예요. 배추 소금 넣어서 숨죽여놓는다는 말이 있죠? 우리에게 말씀을 소금으로 여겨서 숨죽여 놓으면 벌거벗은 채로 우리가 모든 것이 ‘야! 나는 참 나밖에 모르네. 이기주의네.’ 깨닫게 해놓고 그걸 죽여 놓고 그 다음에 주께서 옛날에는 태양이 멈췄지만 지금은 십자가 피가 있잖아요. 십자가 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게 되면 죽은 우리가 이미 죽었다가 살아난 그 부활의 능력으로 우리를 살리십니다. 로마서 8장 11절의 말씀 이예요. 죽은 우리를 주님에 의해서 얻은 성과에 의해서 죽은 우리를 거기다 집어넣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살아 있다는 것을 주님께서 배추 숨죽이듯이 항상 소금을 쳐서 우리를 죽이게 만들죠. 어떻게? 바로 롯에게 천사가 왔을 때 남자를 모르는 자기 두 딸을 내놓듯이 이건 놀라운 기적이거든요.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를 아는 순간 그 다음부터는 내가 소중하다고 여긴 세상 것들이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 그것보다 오히려 나는 주님이 더 소중한데.‘라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어제 토요일 6시에 신천지 계통의 기자 두 사람을 만났어요. 제가 4월 26일 날 신천지 본부에 가서 생중계로 요한계시록에 대해서 생중계 하는데 참석할 수 있습니까? 오케이~. 이만희씨도 오는데 할아버지라고 부를 테니까 알아서 하자. 거기 기자들하고 이야기했어요. ‘천국을 돈 주고 갈 수 있습니까?’ 라고 했어요. 왜냐 하면 모든 것이 돈과 연관됐거든요. 천국을 돈 주고 갈 수 있느냐, 돈보다 더 중요한 분으로, 피로 간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돈이 있든 없던 뭐가 만나고 뭐가 캥거루고 뭐가 웬 은혠지 아는 것은 누구나 귀한 돈보다도 나에게는 문득 ‘예수의 피가 날 살리지, 돈이 날 살리는 게 아니다.’를 깨닫는 그 순간 그것이 오늘 본문의 하나님의 놀라운 산천초목이 움직이는 결과물이 우리에게 덮쳐진 현상입니다.
하박국에서는 구약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를 통해서 산천초목이 하나님의 보좌를 보여주는 식으로 한다면 신약에 오게 되면 이제는 뭐냐 예수님의 피의 능력이 우리에게 새록새록 깨닫게 하는 쪽으로 세상의 모든 변화가 짜여질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원리를 알게 하여 주옵소서. 죽어있으면서도 살아있다고 우기기 때문에 자꾸 예수님이 안 보이고 내가 노동한 대가만 기대하게 됩니다. 실망하고 또 실망하는 가운데 실망케 하시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그 은혜가 내가 노동한 것보다 더 소중하다는 걸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