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어버리시는 하나님
2013년 4월 14일 본문 말씀: 스바냐 1:1-6
(습 1:1, 개역)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아의 시대에 스바냐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스바냐는 히스기야의 현손이요 아마랴의 증손이요 그다랴의 손자요 구시의 아들이었더라』
(습 1:2, 개역)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지면에서 모든 것을 진멸하리라』
(습 1:3, 개역) 『내가 사람과 짐승을 진멸하고 공중의 새와 바다의 고기와 거치게 하는 것과 악인들을 아울러 진멸할 것이라 내가 사람을 지면에서 멸절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습 1:4, 개역) 『내가 유다와 예루살렘 모든 거민 위에 손을 펴서 바알의 남아 있는 것을 그곳에서 멸절하며 그마림이란 이름과 및 그 제사장들을 아울러 멸절하며』
(습 1:5, 개역) 『무릇 지붕에서 하늘의 일월성신에게 경배하는 자와 경배하며 여호와께 맹세하면서 말감을 가리켜 맹세하는 자와』
(습 1:6, 개역) 『여호와를 배반하고 좇지 아니한 자와 여호와를 찾지도 아니하며 구하지도 아니한 자를 멸절하리라』
‘생활의 발견’이라는 코미디 프로그램 코너에 보면 남녀가 식당에서 만나자마자 “헤어지자”라는 말부터 끄집어냅니다. 생뚱 맞는 말이지요. 돌발적입니다.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는 그 어떤 노력도 더 이상 소용없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 그러합니다. 선지자의 내력을 간단하게 소개해놓고서는 곧장 ‘진멸’하시겠다는 소식을 들려주십니다.
사람 쪽에서 뭔가 하나님과 엮어보려는 모든 시도 자체가 발휘한 기회마저 주지않겠다는 말씀입니다. 인간들이란 그저 진멸의 대상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물론 이 말씀은 유다 백성들에게 던집니다. 그들이 진멸되어야 될 이유는 바로 ‘바알’이라는 신을 섬겼기 때문이랍니다. 그렇다면 바알을 안 섬기면 되지 않을까요? 진멸될 이유가 같이 사라질 것이니까 말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나 그 당시 사람들에게 있어 ‘바알 섬기지 마!’라는 말씀은 사실 실천 불가능한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여호와’라는 이름의 ‘바알신’을 섬기면서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의 바일산을 섬기면서 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바알신을 섬기지 말라’는 선지자의 말을 못 알아 듣는 것은 이미 바알신을 찾을 때부터 자신들의 본성에 부합되기 때문입니다. 마치 오래된 맞춤 환경으로 속에서 자신의 피부처럼 떨쳐버릴 수 있는 양상입니다. 하나님께서 바알을 언급하시는 이유는 그들을 구원하려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구원이란 어디서부터 떠나는 것을 의미하는데 떠나지 전에 먼저 떼낼 것을 떼낼 필요가 먼저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동안 정들었고 서로 입장 맞쳐온 것을 떠날 생각을 안합니다. 마치 조선 말기에 사람들이 기독교라는 새로운 종교를 받아들이면서도 실제로는 본인들 자체는 전혀 달라진 적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포장지만 바뀐겁니다. 꼭 대규모 제과회사 벌리는 횡포같습니다. 안에 들어있는 실내용물은 전혀 달라진 것은 없는데 디자인만 바뀌어서 가격을 올리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도 바뀌면 자신도 바뀌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감히 하지를 못합니다. 그저 환경만 바뀌면 자신들로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자질이 발휘된다고 여깁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명색의 신의 명칭 같은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왜 사람들이 본성적으로 그런 식의 신을 더 선호하느냐 하는 겁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신을 소유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범죄하고 난 뒤에, 완전히 다른 인간상으로 달라졌기 때문에 생긴 현상입니다.
사람들은 신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신으로 행세하기를 원합니다. 신이 아는 것을 자신도 같이 알아서 더 이상 신에게 끌려가는 존재가 되기 싫어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처음 인간은 ‘하나님의 위한 인간’입니다. 반면에 인간이 범죄하고 난 뒤에는 ‘자기를 위한 하나님’만을 하나님으로 간주하게 되었습니다.
즉 인간은 자신이 예상하는 대상과 일치를 시도하므로서 진정 자신이 어떤 존재인 지를 굳히려고 합니다. 이 상상 작업으로 인하여 일치성을 갖추려고 하지만 현실은 이 일치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상대방도 변하고 또한 자기 자신의 취향을 매일같이 변하게 됩니다. 마치 옛날 젊을 때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를 만나서 그 때 그 당시의 젊은 자아상과 일치되고 싶어하지만 현실에서는 막상 오래간만에 그 가수를 만나면 그동안 ‘너무 늙었다’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도 또한 같이 늙어가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이렇게 되니 사람들은 젊었을 때에 가졌던 그 가수의 소지품을 애지중지 수시로 끄집어 보므로서 자신의 주체성을 유지하려고 합니다. 이 손수건이 바로 그 가수와 생각나게 하는 상징물이 됩니다. 이는 그 가수를 위함이 아니라 자신의 영속성을 스스로 상상해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도 예외가 아닙니다. 신을 소지하고 그 신과 일치성을 가지려고 하니 참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헤어질 수 밖에 없는데 이것이 진정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려는 구원입니다. 구원이란 환경만 달라진다고 성사되는 것이 아닙니다. 본인들이 그 하나님으로부터 늘 시달리고 헤어져야 하고 갈라서야 한다는 압박을 당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지속적으로 그 사람과의 일치성이나 소유되는 결과가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전서 2: 21에 보면,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성도가 십자가 지신 하나님을 소지하고나 소유할 수가 없습니다.
소유하겠다는 것은 그렇게 해서 자기 정체성을 하나님과의 일치성에 찾으려고 시도한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선악과 따먹은 자는 영원히 생명나무과 결별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원칙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생명나무와 결별되어 있으니 그 빈 곳에 메우기 위해서 자신에 마음에 맞는 식으로 신의 뜻을 각색해서 집어넣고서는 곧장 일치성을 가지려 합니다.
자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이런 인간의 의도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 결별합니까? 그 예가 이삭의 두 아들인 에서와 야곱에서는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슨 뜻이 계셔서 한 부모 밑에서 쌍둥이로 두 아이를 얻게 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의 운명은 완전히 상반됩니다.
아버지의 축복을 몽땅 다 받아내는 자는 결국 야곱이었는데 이 야곱은 거짓말하면서 따냅니다. 거기에 비해서 아버지 말에 고분고분 순종한 맏아들 에서는 결국에는 그 맏아들에게 밀려나게 됩니다. 동생 야곱의 거짓말의 희생자로서 말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누가 봐도 동생 야곱이 악하고 형 에서는 착하다는 것으로 보이게 마련입니다.
이 평기에 그 어떤 하자가 있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버지에게 거짓말을 한 야곱을 사랑하십니다. 이로서 하나님께서는 ‘거짓말’이라는 낯선 방식으로 사용하므로서 인간이 선입견을 뚫고 인간의 신 섬기는 방식과 결별하는 식으로 구원하심이 드러난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손에 붙잡히지 않는 분임을 우리가 각오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
1강-습1장1-6(쓸어버림)130414-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 스바냐 1장 1절에서 6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1306페이지입니다.
스바냐 1:1-6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아의 시대에 스바냐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스바냐는 히스기야의 현손이요 아마랴의 증손이요 그다랴의 손자요 구시의 아들이었더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지면에서 모든 것을 진멸하리라 내가 사람과 짐승을 진멸하고 공중의 새와 바다의 고기와 거치게 하는 것과 악인들을 아울러 진멸할 것이라 내가 사람을 지면에서 멸절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유다와 예루살렘 모든 거민 위에 손을 펴서 바알의 남아 있는 것을 그곳에서 멸절하며 그마림이란 이름과 및 그 제사장들을 아울러 멸절하며 무릇 지붕에서 하늘의 일월성신에게 경배하는 자와 경배하며 여호와께 맹세하면서 말감을 가리켜 맹세하는 자와 여호와를 배반하고 좇지 아니한 자와 여호와를 찾지도 아니하며 구하지도 아니한 자를 멸절하리라”
이 스바냐가 어디 있는지 여러분 몰랐죠? 우리가 순서대로 하니까… 스바냐가 여기에 박혀 있는 겁니다. 이렇게 이사하고 난 뒤에 내가 물건을 어디에 놔뒀더라, 찾다 보면 물건을 못 찾고 포기한 게 있잖아요. 다~ 세월가면서 찾아보면 이렇게 찾아집니다.
이 스바냐의 내용을 딱 들어서게 되면 무엇이 생각나느냐 하면 TV 개그콘서트 코너에 이런 게 있어요. 생활의 발견이라는 코너에 보면 서로 사랑하는 남녀가 식당에서 만나요. 만나서 잘 있느냐, 이 식당이 어떤 식당이다. 하다가 곧장 하는 이야기가 뭐냐 하면 ‘우리 헤어지자.’ 이렇게 나와요.
스바냐 1장 1절을 보면 스바냐는 누구의 현손이고 누구의 자손이고 죽 해놓고 2절에 보면 헤어지자. 이건 생뚱 맞는 이야기예요. 내가 쓸어버리리라. 2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지면에서 모든 것을 진멸하리라 내가 사람과 짐승을 진멸하고 공중의 새와 바다의 고기와 거치게 하는 것과 악인들을 아울러 진멸할 것이라” 쓸어버린다는 이야기죠. 사람이 무슨 정신을 차리고 봐야 되는데 정신 차리기 이전에 내가 모든 것을 쓸어버리리라. 진멸하리라. 이렇게 나오니까 갑자기 당한 듯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을 잘 섬겨보려고 스바냐를 펼치면서 ‘스바냐를 통한 하나님의 계시를 이제부터 잘 섬겨야지.’ 이렇게 하고 있는데 “까불지 말고 니는 당해라. 우리 헤어지자.” 이렇게 나오면 이쪽에서의 인간들의 성의나 모든 정성은 일절 무시당합니다. 그게 진짜 하나님 이예요. 괜히 생색내고 하나님 앞에 잘해봐야지, 이러지 마세요. 하나님은 거기 안속아 넘어갑니다. “우리 헤어지자.” 이렇게 나오는 겁니다.
요 헤어지자. 진멸하자. 멸절하리라. 이 말을 이렇게 이해하시면 쉽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애굽을 버리고 그리고 새로운 나라 만들었잖아요. 그럴 때 애굽에 있는 모든 것과는 헤어져야 돼요. 그리고 애굽은 그냥 나오지 않았습니다. 10가지 재앙으로 진멸했습니다. 4번째 재앙부터 하나님께서 차별화를 두셨는데 애굽에 있는 사람들은 독종이 있었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있는 고센 땅에는 독종이 없었더라. 이렇게 차별화하신 겁니다.
뭔가 이렇게 갈라진다는 것은 이쪽을 다루는 방식과 저쪽을 다루는 방식이 서로 다르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구분하면서 너무 그동안 정들었고 너무 몸에 배어서 떼려야 떼어지지 않는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떨어지지 않는 본드 같은 아주 진드기 같은 것도 내가 알아서 갈라서게 하겠다. 헤어지게 하겠다. 떼어버릴 수 있겠다. 그렇게 조치하는 것이 스바냐 내용입니다.
구원이라 하는 것은 니가 차마 아까워서 너무 귀해서 ‘야! 하나님, 이거 떼 내면 정말 나는 사는 보람 없습니다. 하나님 이거까지 벗겨내시면 저는 무슨 재미로 삽니까?’ 하는 도저히 정이 들어서 떼어내지 못하는 것을 떨어지게 만드는 방식으로 우리를 구원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구원하는 게 다 이유가 있어요. 그 이유가 어디 나오느냐 하면 여기 4절에 나옵니다. “내가 유다와 예루살렘 모든 거민 위에 손을 펴서 바알의 남아 있는 것을 그곳에서 멸절하며” 바알이란 말이 성경에 많이 나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넘어갑니다. 그리고 목사들도 그냥 넘어갑니다. 왜? 모르기 때문에. 바알이란 신이 어떤 것인지 몰라요.
왜 바알이란 신에 대해서 그렇게 모를까요? 그것은 바알의 신이 바알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딱 들러붙어 있는 것이 아니고, 여호와 이름으로 붙어있기 때문에 이게 바알이라고 따로 떼어낼 것이 없다고 안심 푹~ 놓고 있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여호와인데 조사해보면 바알이다. 나는 여호와 섬긴다고 생각했는데 조사해보면 바알이 되는 거예요. 조선 후기에 기독교가 들어왔잖아요. 그들은 기독교를 섬긴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나중에 조사해보면 기독교를 섬긴 게 아니고 포장만 바꾼 겁니다. 꼭 대 메이커 제과회사 같아요. 무게 속이고 포장 크게 해놓고 값 올리는 식품회사와 마찬가지처럼, 껍데기만 고쳤다고 해서 알맹이가 바뀌느냐? 안 바뀝니다.
왜냐? 우리는 하나님만 바뀌기를 내가 원하고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 바뀌었다고 내가 바뀌는 것은 우리는 사절합니다. 우리는 그걸 원치 않아요. ‘주여 껍데기만 바꿔도 구원되게 하옵소서.’ 이렇게 나오지, 하나님 때문에 내가 바뀌기를 내가 원하지를 않습니다. 그 이유가 있어요. 내가 바뀌어버리면, 바뀐다는 것은 지금의 이거하고 바뀐 다음에 나하고 다르다는데 바뀐 다음에 나를 우리가 상정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머리로 도저히 상상이 안 돼요.
좀 어렵게 나갑시다. 상상이라 하는 것은 일치성을 두고 있는데, 이 상상이 상상 되도록 이 세상이 용납 하지 않으니까 일치하고 싶은데 일치가 안 되니까 사람들은 상상에 뭐를 집어넣느냐 하면 상상에 상징을 집어넣어요. 상징을 집어넣으면 상징된 그것을 마치 상상한 일치라고 생각하고 그걸 자기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 예를 들어 이야기하면 어제 조용필의 팬클럽이 있었어요. 500명 모였습니다. 비 오는데… 조용필 가수가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여러분, 미쳤습니다. 이렇게 비 오는데 무슨 짓입니까?’ 이렇게 이야기했다고요. 왜 그 아줌마들이, 이제 아줌마가 아니라 할머니라 해야 하는데, 그 조용필 팬들이 비가 오는데 조용필 얼굴 한번 보겠다고, 조용필이 얼굴 한번 보여주면 되는데 뭐 신비주의 전략으로 보이지도 않고 하니까, 그 조용필 얼굴을 봄으로서 자기가 아직도 젊다고 생각하고 싶어 하는 거예요. 젊을 때 나와 지금의 내가 일치된다고 상상하고 싶은 겁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곧 내가 좋아하기 때문에 저쪽에서도 나를 좋아할 것이라고 상상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물어보면 조용필은 너무 바빠, 팬들이 한두 명이 아니에요. 그래서 ‘실례하지만 누구십니까?’ 이렇게 나올 수 있다 이 말이죠. 그럴 때는 조용필이 전에 내놨던 친필 사인이 돼 있는 손수건을 쥠으로서 나는 조용필을 계속해서 사랑한다는 것을, 젊을 때 조용필을 좋아했던 그와 지금의 나와 일치된다고 유지하고 싶은 거예요. 그 손수건을 상징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참 쉽죠?
하나님은 만나면 죽어요. 여러분, 하나님 만나면 죽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만나면 상상이 안 돼요. 너무 무서워서. 하나님과 하나로 되고 싶은데 하나님이 아무런 대답이 없으니까 하나님과 내가 일치됐다는 증거로 등장하는 것이 뭐냐 하면 종교제도입니다. 종교단체에요. 여러분, 그거 몰랐죠? 그동안 속은 겁니다.
신과 내가 하나라는 것을 나 혼자만 일치하고 싶은데 이것이 아무리 봐도 확증이 안 되니까 신과 인간 사이에 어떤 우리가 손으로 만지고 눈으로 볼 수 있는 상징 체제나 법제나 이런 것을 중간에 집어넣는 거예요. 교회입니다. 성당, 교회 이런 것들! 거기에 있는 제도들. 이걸 집어넣어서 신과 내가 하나가 됐다. 다시 말해서 나는 신을 이미 소유했고 내가 신을 소유했기 때문에 신은 나를 소유할 것이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우리 헤어지자.” 이렇게 나옵니다. 진짜 하나님은 인간 소유용이 아닙니다. 왜 사람들이 그동안 바알을 연구해도 바알이 온 몸으로 느껴지지 않는 이유가 이미 바알이란 것이 새삼 들어오기 전에, 자기 안에 여호와 이름의 바알이 죽치고 여기에 장착돼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제가 기도할 때 했죠. 예수님의 피가 우리 안에 있을 때 그 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건진다고. 제가 잠간 예를 들었잖아요. 이태리에 가면 피자를 구울 때 피자 판을 화덕에 집어넣습니다. 집어넣을 때 큰 삽에다 넣고 다 됐으면 뽈록, 뽈록 밀가루가 톡톡 튀고 익었다 싶으면 다시 삽을 넣어서 꺼내보죠. 자기가 만든 것을 집어넣고 그게 잘 익었을 때 끄집어내는 것처럼.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할 때, 우리를 구원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를 죄인으로 간주해서 죄인과 예수님에 대한 공로, 보혈의 공로와 결합되도록 화덕에 집어넣어요. 화덕에 집어넣으면 우리는, 화덕은 뜨겁잖아요. 그래서 세상 살기가 만만치가 않은 겁니다. 힘든 거예요. 경제가 어렵고 지금 화덕 속에 있어요. 칼질 하다가 손 다치고 전부 다 화덕입니다. 후시딘 연고 바르고 며칠 가고 화덕 이예요. 애 까불다 엎어지고 데굴데굴 굴러서 코 상처 나고 화덕입니다. 천국에 계단 있으면 태민이 곤란해요. 또 넘어지고 천국에 가서 또 코피날 수가 있거든요.
그래서 이게 뭐냐 하면 화덕 속에 집어넣고 그렇게 이런 일이, 저런 일이 일어나더라도 니 운명은 이미 끝났다고 보는 겁니다. 제가 오늘 주일학교 설교를 했는데 에서와 야곱에 대해서 설교를 했습니다. 야곱은 거짓말쟁이에요. 아버지를 속인 사람입니다. 여러분, 천국 갔습니다. 그리고 에서는 아버지 말씀대로 순종했습니다. 순종! 그 유명한 순종! 순종했습니다. 자기에게 축복하고 자기를 구원할 아버지께 순종했습니다. 지옥 갔습니다.
그게 무슨 뜻이냐 하면 거짓말시켜서라도 자기 사람은 반드시 건져낸다는 것이 주님의 듯입니다. 그런데 지옥 가면서 천국 간다고 착각하는 사람은 자꾸 자기가 자기를 관리하려고 해요. 내 인생을 상상, 내가 구원 받은 나와 구원 되는 나와 이렇게 일치시키고 그것도 모자라서 종교라는 이름의 상징 체를 거기다 집어넣어서 그것을 본드로 만들어서 내가 이런 교회 다니고 이런 걸 믿으니까 나는 반드시 구원될 거야, 본인이 그렇게 쥐고 있는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우리 헤어지자.” 이렇게 해서 우리가 있는 우리와 헤어지는 게 아니라 우리 속에 있는 바알과 여호와는 헤어져야 될 영적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우리는 바알을 섬기고 있으면서 여호와를 섬긴다고 자꾸 오해를 하니까 우리로 하여금 자극시키는 거예요. 화덕 속에 집어넣어서 지극하게 되면 우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제가 아까 이야기했지만 예수님의 피가 남아있으면 구원받는다. 맞는데 그 피가 우리를 가만두지 않아요. 그 피가! 그냥 곱게 있다가 곱게 나오는 것이 아니고 그 피로 말미암아 우리들을 온갖 웃음거리로 다 만들어요.
우리 속에 있는 예수님의 피가,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그 말씀의 완성체가, 완성 상태가 우리로 하여금 고요히 살다가 고요히 오게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자기 본색을 드러내면서 거짓말도 하게 만들고 때로는 울고불고, 울기고 하고 불기도 하고 온갖, ‘이럴 것 같으면 나 예수 안 믿는다.’ 삐져서 입이 열댓 발 나오게 만들고 온갖 시련들을 다 겪게 해요.
어제 우리 친척 되시는 분하고 이야기 하면서 조카가 이런 이야기해요. ‘삼촌, 만약에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인도하신다. 예정하신다는 것을 다 알면 우리는 그대로 살면 되겠네요.’라는 질문을 해요. 상당히 흔한 질문이면서도 우리교회 교인들은 부끄러워서 차마 못하는 질문을 노골적으로 해요. 그러니까 이미 예정됐고, 뜻대로 이루어지고, 예수님의 피로 말씀대로 된다면 그럼 우리는 할 게 없지 않느냐, 그럼 우린 그냥 살면 되겠네요. 하는 질문을 했습니다.
그럴 때 제가 이렇게 답변을 했거든요. 하나님의 운명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운명을 안다고 여기는 것이 자꾸 뒤틀려가는 그것을 예정했다고 제가 이야기했어요. ‘이것이 하나님의 예정된 뜻이야.’ 라고 철석같이 믿다가 바로 그 뜻과 위배되는 식으로 이끌림을 당하는 그런 방식이 예정된 거예요. 그걸 뭐냐, 강요된 선택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강요된 자유의지.
주께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맘대로 해라. 하지만 그 모든 것은 내가 강요한 것이다.” 일부러 맘대로 하게 함으로 말미암아 자꾸 오해케 해서 ‘우리는 내가 생각한 대로 안 되는군요.’하고 날마다 철석 절망하면서 주저앉을 때 앉는 그것이 바로 그러한 모든 힘을 빼는 그 힘 빠진 그것이 바로 예정된 거예요. 우리는 안다고 ‘아마, 이게 주의 뜻이고 아마 요 길로 가면 될 거야.’ 라고 자신만만한 그것을 스스로 낙담케 하는 고 바탕, 고게 예정된 거예요. 그러니까 그야말로 질~질~ 끌려가는 겁니다. 우리는 거기서 울고불고 하면서.
화덕에 들어갈 때 우리 속에 피를 곱게 유지하는 것이 아니고 피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의 가신, 성경적으로 말해서 주님의 가신 십자가 길을 본받아서 가게 하십니다. 이렇게 베드로전서 2장 21절에 그렇게 나와 있어요. “너희들이 십자가를 믿게 하는 것은 본을 끼쳐서 너희도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심이라.” 요렇게 이야기한 걸 저는 ‘피가 들어갔다가 피가 나옵니다.’ 이렇게 제가 단출하게 말씀드리는 겁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바로 이스라엘과 유다나라가 이제는 주님과 헤어져야 될 시간입니다. 헤어져야 되는데 그들은 바알을 섬겼다는 거죠.
자, 그러면 이제 바알이 뭐냐, 본격적으로 설명을 해야 되겠죠. 바알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생명나무가 끊어진 상태에서 가상해서 만들어 낸 신의 이름이 바알입니다. 생명나무가 끊어진 상태에서 선악과 지식을 아는 상태에서 만들어 낸 신의 이름이 바알이에요. 그래서 바알은 만들어 낸 사람의 소유용입니다. 아까 이야기한 상상, 다른 말로 하면 일치성, 내가 하나님 알고 하나님 저 알죠? 라는 그거, 그렇게 상상하는 것.
그런데 실제로 계신 하나님은 그런 상상, 그런 상징을 깨죠. 깨면 사람은 그 빈자리가 초조해서 그냥 둘 수가 없어요. 그 빈자리가 갈라지면 내 쪽에서 뭐라도 동원시켜서 온갖 것 좋은 것, 고상한 것으로 자리를 메우려고 합니다. 메우면 어느 정도는 안심을 합니다. ‘그래 이제 정상적인 믿음 생활이야.’ 하지만 어떤 사태가 벌어지고 사건이 벌어진다면 지금 내가 신앙생활하려고 했던 이것 가지고 제대로 모든 것을 하나님 말씀을 해명이 안 돼요. 설명할 수가 없어요. 베드로 같으면 ‘내가 예수 믿고 따랐으니까 용서받는다.’ 했는데 도저히 용서 안 되는 일을 벌려 버립니다.
아침에 많은 이야기를 했는데 그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 ‘하나님이여, 제가 죄를 지었습니다. 이런 죄는 너무 하나님을 슬프게 한 죄고 저를 사랑하는 하나님을 너무 욕되게 한 죕니다.’ 하고 엉엉 울잖아요. 그런데 그게 그 사람은 뭘 생각하느냐 하면, 지금 그거 가지고 운다면 다음에 그거보다 더 큰 죄를 지었을 때는 울어도 안 되죠. 왜, 요만한 죄는 울음으로서 스스로 죄에 대해서 충분히 반성했다고 싶은데, 그보다 더 큰 죄를 지었을 때는 어떻게 해요?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칼 가지고 가슴을 조금 도려내야 됩니까? 세 번 그었습니다. ‘나 같은 나쁜 놈은 죽어야 마땅합니다.’하고 세 번 맨 살에다 쫙쫙 그었는데 두 달 뒤에 지은 죄는 요거 열 번 그어야 되겠네요. 그래서 죄 졌다고 울고불고 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오버한다는 생각, 죽으려 해도 소용없을 건데. ‘주여, 다시는, 다시는 이런 죄를 짓지 않겠습니다. 다시는 이런 죄를 짓지 않겠습니다.’
예배 시간에 교인들이 예배 보고 있는데 휴대폰에서 삐리~삐리, 노래도 건전한 유행가 있는데 땡 벌 그걸 실어서 울리니까 받으면서 미안해하면서 ‘아휴, 내가 진동을 해놓는데 잊어버렸다.’ 그러면서 마음에 남는 게 뭐냐 ‘다시는 소리 나지 않게 진동으로 해야지.’ 하면 우리교인들 중에 아무도 안 믿습니다. 그 결심. 왜냐 하면 성경 말씀에 “맹세치 말라.” 한 서너 번 그렇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이제 미안하지도 않아. 그래서 휴대폰이 울리고 실수로 진동으로 하는 걸 잊었으면 다른 교인들이 어떻게 해주느냐 하면 같이 소리가 나줘야 난 사람이 덜 미안하도록 해줘야 그게 사랑과 애정이 넘치는 교회입니다. 그런데 그거는 우리가 하는 게 아니라 주께서 그렇게 하셔요. 주께서 그렇게 하심으로서 현재 시점에서 나는 믿으면 끝이다. 라는 생각은 해서는 안 되는 겁니다. 왜냐 하면 믿음은 내가 소유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주여 내가 믿음을 소유했습니다.’ 하면 주께서 하는 말이 “우리 헤어지자.” 이렇게 나옵니다. 자꾸 붙잡았다 싶으면 떨어지고 잡았다 싶으면 도망치고 미꾸라지처럼 빠져나오고. 그게 바로 내가 매일같이 만드는 바알 종교로부터의 구원 방법 이예요. 그 방법 외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왜, 우리는 신과 나를 일치 시키고 예수와 나를 일치 시키려고 매일같이 노력하고 있는 중이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그런 바알 방식의 구원에서 자꾸만 헤어지고 떨어져 줘야 돼요.
그러면 여기에 “모든 것을 쓸어버리고” 할 때 이 쓸어버리는 취지가 나옵니다. 그 쓸어버린다는 것은 뭐냐 하면 니가 상상하고 니가 상징하고 니가 잡았다 할 수 있는 하나님은 없다.
이유가 뭐냐, 처음에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 때는 하나님을 위한 아담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부터 아담을 위한 하나님을 아담이 만들어 내요. 처음에 하나님을 위한 아담일 때를 그것을 하나님의 형상이라 하는 거예요. 이제는 그 하나님의 형상, 우리는 잊어버렸습니다. 우리는 모릅니다.
여기에 4절에 보면 멸절하는 그마림이라 하는 것은 바알의 제사장을 두고 이야기하고 “그 제사장들을 아울러 멸절하며 무릇 지붕에서 하늘의 일월성신에게 경배하는 자와 경배하며 여호와께 맹세하면서 말감을 가리켜 맹세하는 자와” 전부 다 멸절하는데 특징이 있어요. 이건 부산 강의 첫 번째 “종교에서 철학으로” 강의에서 했습니다. 모든 신은 빈손으로 나오지 않아요. 모든 종교가 반드시 제물을 바쳐서 신과 본드로 결합하려고 하는 겁니다. 내 마음을 바치듯이 뭔가 바치는 것. 바친다는 것은 내가 제공해서 내가 제공한 식초 본드에다 주께서 들어붙게 하는 거예요.
그러나 히브리서에 보면 우리가 바치는 것은 전부 다 “헤어지자.”입니다. 그럼 뭐냐, 하나님 쪽에서 아들을 우리에게 제물로 냈기 때문에 더 이상 너희 쪽에서 나한테 바칠 것은 일체 남아있지 않다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 쪽에서 우리를 들러붙게 했기 때문에 우리는 ‘주께서 우리를 들러붙게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위한 나지, 내 구원을 위해서 예수님은 아닙니다.‘ 라고 고백하게 만드는 것. 그것만이 유일한 바알 종교가 아닌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구원 작업에 우리가 말려들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벌리는 구원 작업에서는 주님께서 도망치고 헤어졌습니다. 날마다 이 싸움, 나를 위한 하나님이냐, 아니면 하나님을 위한 나냐, 이 싸움에서 주께서 멈추지 마시고 하나님을 위한, 주를 위한 우리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첨부파일 : 1강-습1장1-6(쓸어버림)130414-이 근호 목사.hwp (48.0K), Down: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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