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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박국10강-구원의 기쁨(이근호)130407

아빠와 함께 2013. 4. 7. 16:54

구원의 기쁨(합 3: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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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3-04-07 15:33 
구원의 기쁨

2013년 4월 7일                          본문 말씀: 하박국 3:16-19


(합 3:16, 개역)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내 뼈에 썩이는 것이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합 3:17, 개역)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합 3:18, 개역)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합 3:19, 개역)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영장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

구약과 신약의 차이점은, 구약에서는 인간의 한계와 무능력을 까발려서 자신의 행함으로는 도저히 스스로 구원될 없는 입장인 것을 알려주고, 미래에서 일어난 그 어떤 일로 통해서 자신의 구원이 성취됨을 말하는 식으로 알려줍니다. 하지만 신약에서는 ‘이미’ 구원이 이루어진 사실에 근거해서 그 이루어짐 속에 포함된 인사들을 찾아다녀서 건져내십니다.

이렇게 되면 구약과는 달리 신약에서는 자신이 한계라고 느꼈던 그 한계마저 너머서는 한계를 직면하게 됩니다. 쉽게 말해서 “그래, 내가 이 정도로 당하면 나는 두 손 두 발 다 들고 하나님께서 항복하고 자신을 포기하고 그냥 맡겨야지”라고 짐작했던 그 예상마저 실제 구원에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되는 겁니다.

갖은 고난과 역경과 어려움이 결코 그 인간을 구원해내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도리어 인간은 예상하는 역경과 어려움을 기회로 해서 자기 구원을 시도해버립니다. 이렇게 되면 자신이 자기 구원의 사전 작업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것이 됩니다. 마치 바리새인들이 고난 주간이 처절하게 자신이 학대하는 모습을 보이므로서 그것이 하나님의 동정을 유발할 수있는 요인이 된다고 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십니다. 이것은 곧 인간하여금 마음껏 자기 선택에 나서게 만듭니다. 그렇게 해서 그 모든 선택은 실은, ‘실패할 수 없는 존재임’을 확인케 하기 위해 제공되고 강요된 선택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이런 인간들의 ‘피동적 선택’은 참된 선택자의 선택행위를 보여주는 환경이 됩니다.

즉 인간은 모든 것을 행할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자유행위를 하면서 기대한 그 기대치는 하나님의 선택의 취지와는 전혀 상관없는 기대치임이 폭로되는 현장을 조성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창세기 20장에 아비멜렉 추장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거기서 남방으로 이사하여 가데스와 술 사이 그랄에 우거하며

그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라 하였으므로 그랄 왕 아비멜렉이 보내어 사라를 취하였더니 그 밤에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 현몽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취한 이 여인을 인하여 네가 죽으리니 그가 남의 아내임이니라 아비멜렉이 그 여인을 가까이 아니한 고로 그가 대답하되 주여 주께서 의로운 백성도 멸하시나이까

그가 나더러 이는 내 누이라고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 여인도 그는 내 오라비라 하였사오니 나는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이렇게 하였나이다 하나님이 꿈에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온전한 마음으로 이렇게 한 줄을 나도 알았으므로 너를 막아 내게 범죄하지 않게 하였나니 여인에게 가까이 못하게 함이 이 까닭이니라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 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 보내지 않으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정녕 죽을 줄 알지니라”(1절-7절)

이 대목에서 참으로 기이하게 느껴지는 의문점이 한 둘이 아닙니다. 벌이란 필히 죄 책임소재가 분명한 이후에 주어지는 것이 상식적일 것입니다. 그런데 결과로 봐서 “네가 속한 자가 정녕 다 죽을 줄 알지니라”는 말씀에 입각해서 보면 이미 아비멜렉은 죽을 죄를 저지른 것이 됩니다.

그런데 이 상황을 누가봐도 아비멜렉은 실제적으로 아브라함의 아내를 취지한 것이 아니라 취할 뻔 했고, 그것도 본인의 탐욕성으로 행한 것이 아니라 전혀 사라에게 남편이 있다는 점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나오는 정당하기 짝이 없는 선택 행위였습니다. 따라서 죄 책임 소재와 책벌 사이가 직접 연결이 안됩니다.

직접 연결이 아니될 때는 연결지점이 따로 있다는 말입니다. 바로 그 존재가 아브라함입니다. 아비멜렉에서 주어진 징벌은 아브라함의 존재를 경유하면서 그 의미가 드러납니다. 즉 아브라함에게는 죄에 따른 벌 마저로 취소할 수 있는 능력을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비멜렉은 저질른 죄가 없다 할지라도 아브르함의 위상을 드러내기 위해서라도 아브라함 아내를 취하는 것이 얼마나 큰 죄요 죽을 죄인가를 드러내는 작업에 그는 말려든 겁니다. 실제로 아비멜렉에 속한 모든 여인들의 태가 일시적으로 닫혀서 자손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이는 인간의 죄라는 것이 인간의 선택행위를 통해서 비로소 발생되는 것이 아니라 ‘죄 발생’을 염두에 두고 인간의 모든 선택행위는 허락받게 되었다는 점을 말해주는 겁니다. 이것이 구약에서의 구원관입니다. 구원의 구원관은 인간의 한계성을 드러내면서 그럼에도 구원받는 것은 미리의 다른 인물의 대속 작업에 의해서 가능하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박국 선지자는 무화과 나무, 포도나무 감람나무, 외양간를 거론하는 것은 그런데서 소출이 없을 경우에만 자신이 구원의 하나님을 기뻐하겠다는 말이 아니라 이미 장차 오실 하나님 구원의 위세가 그동안 하박국 자기 환경이라고 할 수 있는 그런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기쁨을 능가하기에 생활적인 기쁨에 신경 쓸 수 없다는 말입니다.

마치 혼자서 도를 닦는 수행자 옆으로 거대한 크레인이 천천히 위세 떨면서 지나가게 되면 그동안 자신이 수행해서 얻은 모든 정돈된 감정들이 빛을 잃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선택 행위를 하면서 예상한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구원방식 실시에서 보여지는 구원의 원칙들에 합류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즉 “내가 이 정도로 양보하면 하나님께서는 나의 희생을 가상히 여겨 구원받도록 도와주시겠지”라는 생각은 하나님에게 통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자신의 행위와 구원의 엮는 것은 구원받는 자가 관여할 문제가 아니라 따로 연결되는 인물이 있습니다. 신약에 와서는 이미 구원된 자들을 찾아다니는 식으로 하나님께서 건져내십니다.

그렇게 될 때, 성도는 새로운 차원의 자유를 만끽하게 됩니다. 자신의 노력과 희생과 열심과 전혀 무관하게 구원된다는 점을 통해서 성도는 자신의 선택행위의 결과부터라도 자유롭게 됩니다. 마치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책망 받고 난 뒤, 그 점을 반성한다고 해서 그 반성된 행위를 근거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듯이 말입니다.

사람이 큰 희생 치렀다고 그만큼 믿음 좋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차라리 거기에 대한 관심이 없는 것이 진정 구원의 즐거움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우리 자신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