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강의

시편4-존재에서 사건으로 171016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7. 10. 20. 16:18

 

 
 
 한윤범  (IP:14.♡.134.25) 17-10-20 10:06 
20171016a 부산강의 : [시편]4(2편)-존재에서 사건으로 
(강의:이근호 목사) 


시편 2편 3절 해봅시다.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도다”라고 돼있죠. 시편 2편 3절에서 하나님께서 작업을 하신다고 알려주잖아요. 우리란 인간들입니다. 인간의 열방들을 말하는데 그 맨 것을 끊고 결박을 끊어버린다. 끊는다는 말은 끊어야 될 관계가 이미 수립돼있어요. 관계있는 것을 그냥 주시하고 바라보는 게 아니고 그걸 끊고자 노력한다는 겁니다. 누가? 이 세상의 열방들이. 그러니까 이 세상 열방들의 움직임에 어떤 목적이 있다는 거죠. 그냥 밥 먹고 살기 위함이 아니고 뭔가 목적이 있다는 겁니다. 뭔가 시도한다는 겁니다. 시도하는 당사자도 몰라요. 우리가 평상시에 하고 있는 모든 일이 무엇을 목적으로 움직이는지 당사자도 몰라요. 

아주 쉬운 거예요. 이 질문을 하면 그 골치 아픈 것이 해결됩니다. 내가 여기 있습니다. 있는 이걸 취소할 수 있습니까? 취소 못하잖아요. 어쨌든 있잖아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말씀주신 것을 우리가 성경 안 본다고 해서 취소가 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내가 여기 있는 것을 “나 이제부터 밥 안 먹어.” 이렇게 취소 못하듯이 나는 죽을래, 비장한 마음 아니면 그런 마음 안 생기잖아요. 나 여기 있음을 취소 못하고 뭔가 움직이죠. 움직인다, 의지한다, 생각한다, 행동한다, 다 포함됩니다. 뭔가 꿈틀거린다.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이 시편 안 본다고 덮는다고 이게 취소가 되느냐 말이죠. 

성경이란 옛날 사람들의 지어낸 아이디어, 신화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우리는 참고할 뿐이지 어리석게 성경에 매일 필요 없다.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이야기한다고 하지만 사실 우리는 안 그렇습니까? 우리도 세상 사람의 일부 아닙니까? 성경이 급한 게 아니에요. 내 존재가 우선이고 성경은 나중이라니까요. 

for me, 어제도 이야기했지만 나를 위해서가 우선이지 하나님 우선 아니에요. 그런데 성경이 성경으로 끝나면 우리 생각도 일리가 있어요. 옛날 책이니까. 옛날 책에 성경만 있습니까? 불경도 있잖아요. 그렇고 그런 책이다. 옛날 성현들이 세상에 대해 이해하기 위해서 나름대로 의견을 제시했고 그걸 편집한 책이다. 현대 신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그냥 의견들을 편집한 거야. 참고로 해. 거기에 매이지 마. 중요한 것은 네 자신이야. 네 생존이 중요해.” 그 말에 일리가 있는데 문제는 성경대로 때가 되매 성경을 모두 이루어서 십자가에 죽고 사흘 만에 부활했다는 그 사건 때문에 말썽이 된 거예요. 

유대인들의 성경에 복종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복종은 그들이 성경이 좋아서가 아니고 자기 이스라엘, 더 나아가서 자기 생존이 더 급한 거예요. 성경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이 분명히 우리 민족을 살려준다고 했잖아요. 메시아 온다고 했잖아요. 이 말은, “우리는 살아야 되겠습니다.” 그 말이에요. 오늘날 교회와 똑같아요. “주여, 우리를 도와준다고 했잖아요. 천국 보내준다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천국 가는 내가 더 중요한 겁니다. 하나님 약속대로 실시해야지요, 이렇게 된단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요청과 말도 안 되는 요구와 상관없이 십자가에 따로 보내신 분이 있었고 그분만 부활시키는 겁니다. 그리고 그게 말씀대로 되었다는 거예요. 

내가 나를 취소할 수 없듯이 하나님도 우리가 무시하는 성경말씀을 본인이 취소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취소할 수 없는 대상이 두 개 나왔습니다. 나냐, 성경이냐? 주님은 우리가 우릴 포기 못하는 걸 알아요. 그럼 어떻게 하느냐 하면, 성경말씀도 하나님이 포기 안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니까. 성경말씀 속에 포기 못하는 우리를 집어넣습니다. 

집어넣으면 뭐가 발생되느냐 하면, 우리가 평소에 나를 위해서 움직이고 나의 생존을 위해서 산다는 그것을 뭐라고 방향 지우느냐 하면, 누군가에 대해서 공격형 작업이라고 규정해버려요. 말씀으로. 우리는 누굴 공격할 생각 없어요. 그냥 소박하게 내 가정 밥 먹고 사는 건데 그걸 공격형이라고 성격을 규정한다니까요. 

방금 제가 이야기한 걸 안 들었다고 무시하면, 남는 것은 다 상대적입니다. 그건 니 생각이고. 절대적이란 이 세상에서 내가 용납 안 해요. 왜냐하면 저쪽이 절대적이라면 나는 시다바리가 돼요. 이건 본성상 용납이 안 됩니다. 우리는 내가 절대자가 돼야 돼요. 남들은 나의 이용대상이 돼야 족합니다. 이걸 나쁜 짓이라고 하지 마세요. 타고난 본성이기 때문에 고칠 문제가 아닙니다. 교회 50년 다녀도 안 고쳐져요. 내가 절대적이에요. 

그런데 주님께서 고맙게도 그 절대성을 그대로 버리지 않고 예수님 절대성과 다툼 관계로 집어넣습니다. 나, 절대성을 전체로 보면 모든 것이 상대적이란 것과 같은 말이에요. 나 절대적, 너 절대적 둘 다 존중해주고 서로 소통하자. 이게 인문학의 주제 아닙니까. 서로서로 의견을 존중하고 그 주장을 인정하면 흑인이든 백인이든 동성애자든 이성애자든 관계없이 평화로운 게 남는 거니까. 평화롭게 한다는 것은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을 지장 없이 행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니까 최고지요. 

내가 지금 그림 그리고 있는데 전쟁 일어나 보세요. 그림 그리다말고 도망가야 되잖아요. 이게 싫은 거예요. 전쟁이 원인에 대해서 따지고 싶지도 않고 나의 절대적 행위가 방해받는 이게 싫은 거예요. 왜 부모 품을 자식이 싫어합니까? 부모 사랑해서? 아니지요. 내 하는 일이 있는데 알아서 돈 벌어서 알아서 치료하지 왜 자꾸 전화 연락하느냐 하죠. 

상대적으로 인정해줄 테니까 내 것을 건드리지 마라. 내가 당신을 상대적으로 존중해줄 테니까. 그런 방식으로 교회 가서 예수 믿습니다. 그게 다른 사람들에겐 통하는데 예수님에게도 통하느냐는 문제에요. 이런 식으로 전개하면 성경이 만만한 구절이 하나도 없습니다.  

대표적인 것을 하나 든다면 마태복음 2장에 나와요. 별이 왔는데 그 별을 분명히 예수님에게 향하게 합니다. 그러면 별이 베들레헴으로 돌아가야 돼요. 그게 앞뒤 논리에 맞아요. 별은 예수님 쪽으로 유도하라고 하나님께서 띄웠고 바벨론 점성학자들은 별 보고 따라왔으면 중간을 안 거치고 바로 가야 돼요. 그런데 갑자기 별이 정차한 거예요. 갑자기 예루살렘으로 빠진 거예요. 우리가 그 점을 놓치면 성경해석을 근원적으로 접근을 못합니다. 만약에 예루살렘으로 간 것을 무시하고 성경해석하면 이렇게 됩니다. 

동방박사 좋겠다. 하나님께서 별까지 띄워서 구원해주니. 그들은 예수님 만나서 드릴 것 드리면서 구원받았다. 우리도 우리 마음속에 샛별이 떠서 다이렉트로 주님 만나게 되면 구원받잖아. 그 해석이 구원론 중심이에요. 그렇게 되면 나는 죄인이라는 게 빠져있어요. 내가 이 세상과 한 통속인 것이 빠져버리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십자가로 구원받는 게 아니고 낚시론이 유력하지요. 낚시론은 자기 택한 백성을 낚싯대로 다이렉트로 건지는 거예요. 골치 아플 것 없다. “나, 너 구원한다.” 가자. 양이 백 마리 있잖아요. 99마리 데리고 가면 돼요. 잃어버린 한 마리 양 신경 쓰지 말고. 

구원론으로 보게 되면 성경해석이 원래 의도했던 주님의 뜻은 날아가고 교인들 위주로, 사람들 기뻐하는 위주로 설교가 됩니다. 그래야 교회가 부흥이 되니까요. 어차피 교회는 서비스단체니까 구원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할 테니까 정보비를 내라는 거예요. 그래서 운영되는 게 교회잖아요. 그리고 계속 애프터서비스를 해줄 테니까 돈만 내라는 겁니다. 

예루살렘에 들렸다고 이야기한다면 결과적으로 적이 발생되잖아요. 예루살렘에 안 갔으면 사람들이 원하는 고요한 세상, 내 생존에 아무 탈이 없는 아름다운 세상이에요. 사람들이 원하는 평화, 그걸 주님께서 들쑤실 하등에 이유가 없다니까요. 해운대 바닷가 거닐면서 이어폰으로 가을 노래 들으면서. 얼마나 낭만적이에요. 돈만 되면 조선호텔 25만 원짜리 방에 투숙해서 폼 나게 살면 되는데, 무슨 얘기하는지^^ 

문제는 너는 고요를 원하지만 성경말씀에 의하면 전쟁 상태에 있다는 겁니다. 이 전쟁이 무슨 전쟁인 줄도 모르고 끼어들면 안 되잖아요. 전쟁은 존재에서 사건으로 이동하는데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래서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요. 

어제 주일 오후에 언급했는데 설교시간이라 어렵게 못해요. 내가 6년 전에 배를 탄 적이 있는 물에 빠졌다. 주어, ‘나’가 중요하니까 몇 년 전이란 말은 중요하지 않아요. “나는 배를 탔는데 물에 빠졌다.” (내가 배를 탔는데 물에 빠진 사건)은 6년 전 일이었다. 괄호 친 걸 제가 명사구라 했어요. 명사구는 단어 하나하나가 개별자 역할을 못합니다. 한 덩어리로 움직여요. 덩어리로 움직여서 명사, 대명사 역할을 하죠. 그렇다면 이걸 묶는다는 말은 개인구성요소는, 존재가 사건으로 바뀝니다. 개인이 반발하지요. 

또 예를 들겠습니다. 나는 6년 전에 사람을 죽였다. 이렇게 되면 마귀에 시달리게 됩니다. 왜냐하면 네가 주체가 돼서 사람을 죽였잖아요. 물론 완전범죄로 들키진 않았어요. 지금은 공소시효가 끝나길 기다리며 도망치고 있지요. 그게 인과응보입니다. 내 속에 인과응보란 원칙이 있어요. 나는 인과응보가 없었으면 좋겠어. 그런데 내가 내 마음대로 되는 곳이 아님을, 도대체 나쁜 짓했으니까 양심에 가책이 된다는 이 심정을 우리가 요청했습니까? 아이큐 20이라면 그럴지 몰라요. 그런데 우리는 놀랍게도 아이큐가 20이 아니에요. 170, 160. 인플레이션을 너무 했구나. 너무 똑똑해. 노무현이 아이큐가 40만 되도 안 죽었어요. 

인과응보 때문에 불교가 생겼잖아요. 욕심 때문에 지옥 가니까 욕심을 버리자. 불교가 그 작업이잖아요. 다른 게 아니에요. 내속에 내 요청 없이 들어온 괴물을 쫓아내면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안 나가잖아요. 안 나가면 내가 망가지면 되지. 이게 불교거든요. 천주교의 참선 비슷하지요. 괴로우니까 도피하자는 겁니다. 피할 곳이 어디 있다고? 베들레헴으로 피할까요, 성지순례 할까요? 피할 곳 없어요. 내가 인과응보의 운반체인데 어디로 피합니까. 히말라야 가고, 티벳 가면 인과응보 없습니까? 누가 집어넣었느냐는 거지요. 성경 봐도 모르지만 성경 보기 전엔 모르지요. 

존재 안에 발동하고 있는 겁니다. “내가 6년 전에 사람을 죽였다.” 이거 못 견딥니다. 결국 체포되진 않았지만 피해자 가족들에게 유서 쓰고 죽을 가능성도 있어요. 한 30퍼센트 있어요. 이걸 어떻게 하느냐? 괄호를 치면, 하나님이 일으킨 6년 전 사건에 내가 말려들었다. 참 뻔뻔스럽기 짝이 없어요. 갑자기 자기 책임이 아니고 하나님 책임으로 돌리는 거예요. 뻔뻔하지요. 낯짝 두껍지요. 문제는 둘 중에 어느 것이 진실이냐는 겁니다. 두껍다, 뻔뻔하다가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을 하실 때 존재 중심이냐, 사건 중심이냐? 이 말입니다. 

스데반 집사가 죽을 때 저들이 하는 짓을 모르니 용서해달라고 했지요. 이 말이 뭔 뜻이냐 하면, 그들은 개인적으로 분노에 의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고 돌을 던졌는데 스데반 집사는 그들을 한 묶음, 명사구로, 하나의 사건으로 보는 거예요.

주께서 일으킨 성령의 사건, 반복되는 십자가 사건에 너나 나나 다 같이 말려들었다는 겁니다.
너는 가해자로 나는 피해자 역할로 말려들었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졌다고 모든 사람을 지옥 보내지는 않아요.
다만 말려들었음을, 존재에서 사건으로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천국 가는 겁니다. “주께서 하셨잖아요.” 


뻔뻔스런 중에 최고의 뻔뻔스런 사람 중에 한 사람이 사도 바울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 많이 죽게 만들었어요. 스데반 집사를 포함해서. 자기가 중계자로 나서서 많은 사람을 체포했고 죽게 했습니다. 실제로 자기를 포행자라 했어요. 살인자고. 그런 짓을 했으면 낯짝을 안 보여야지. 적어도 양심이 있다면. 이건 대놓고 복음을 전해요. 뭘 잘했다고? 뭘 잘했다고 그렇게 대놓고 합니까. 

반대로 생각해보세요. 12년 동안 혈루병 앓던 여인이 있어요. 예수님께서 그 여인이 예수님 옷깃을 만지니까 성경구절이 다르니까 제가 정리합니다. 어디 개 같은 여자가 하느냐 하니까 여자가 하는 말이, “옳소이다.” 해버렸어요. 

존재로 이야기한다면, “왜 나만 12년 동안 시달립니까? 하나님 책임이잖아요. 낫게 해주세요.” “어디 개 같은 여인이, 나는 유대인을 위해 왔지 이방인을 위해 온 게 아니다.” “옳소이다. 저 개 같은 여잔데 부스러기라도 먹을 수 있지 않습니까?” 그 여인은 자기한테 병이 든 것도 자기 잘못이 아니고 하나의 사건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사건 책임자를 만났으니까 뭔가 해결책이 있을 거란 거죠. 주께서 일으킨 십자가 사건의 결론은 부활이죠. 

소경 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자들은 부모의 죄 때문에 소경됐다, 저주받았다고 할 때 주님은 그 해석을 거부했습니다. 주님의 해석은 표준적 해석입니다. 표준적 해석이니까 제가 아까 강의한 것처럼 절대적이죠. 그런데 우리는 내가 절대적이기 때문에 예수님 의견마저 참조로 할 뿐이지 심지어 예수님 말씀은 절대적이라고 입에 발린 얍삽한 말을 해줌으로써 자신이 얼마나 절대적인 존재인지 위상을 높이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거예요. 세상에 예수님 해석마저 내가 알아 차렸으니까 나한테 얼마나 절대적이 많은지 그것 끌어 모으는 즐거움에 빠져 사는 거예요. 너한텐 그런 것 없지. 상대적이지만 너보다는 위에 있다는 자랑도 할 수 있고. 

그러나 예수님의 표준적 해석, 절대적 해석은 반드시 뭘 유발하느냐 하면, “너는 내 적이었어.” 그걸 동반해서 결과를 낳습니다. 우리는 좋은 게 좋다는 게 아니라 너는 내 눈에 좋은 사람 아니야. 너밖에 모르는 못 된 짓 계속 해. 네가 알아서 고쳐서 나오지 말란 말이죠. 내가 알아서 해버리면 사건이 아니고 존재가 돼버리니 문제란 말이죠. 

주님의 표준적 해석은 뭐냐 하면, 존재에서 나온 해석을 적으로 간주하고 사건의 해석을 유일하게 알고 있는 사건의 유발자가 해석자에요. 사건을 유발하신 주님만 알고 있는 해석과 우리 존재에서 나온 해석이 부딪쳐서 그 부딪침 속에서 주님이 희생물이 되는 겁니다. 그게 십자가 사건이에요. 그래서 복음은 십자가에요. 넌 뭘 믿고 구원받은 걸 장담하느냐? 십자가입니다. 내가 가해자란 것. 나만 가해자가 아니에요. 가해자 그룹에 속했다는 사실. 가해자 원인도 제시해야 되죠. 원인은 뭐냐? 나는 내 존재 외에는 다른 관심사가 없다는 겁니다. 

강의 처음에 제가 뭐라고 했느냐 하면, 내가 여기 있는 것을 취소하거나 철회할 수 없어요. 내 존재는. 왜냐하면 무조건 내가 있으니까. 나는 내 일에 바빠요. 내 일이 우선적으로 바빠요. 말씀, 성경공부, 이런 건 나중 문제요. 그런데 성경을 펼치니까 내 몸이 취소 안 되는 것처럼 여기 나오는 성경 한 구절, 한 구절도 덮는다고 없는 게 안 된다니까요. 그러니까 성령 받은 사람들에게 날마다 위기가 되는 겁니다. 

성령 안 받은 사람은 안 보면 되고 안 들으면 돼요. 옛날 동화책이라고 누르면 되는데 성령 받은 사람은 경쟁을 해야 돼요. 성경말씀이 현실인지, 내가 여기 존재하는 것이 현실인지 날마다 그 다툼이 일어나야 됩니다. 그런 다툼이 경쟁, 투쟁이고 전쟁이라 했지요. 그 이름을 사건이라 합니다. 사건은 티격태격하는 것이 주 내용입니다. 깔끔하게 돼있는 게 아닙니다. 

어제 주일 낮 설교를 하니까 어떤 분이 장황하다는 말을 했어요. 그 말이 오늘 강의에 이렇게 도움 될지 몰랐어요. 어제 낮 설교에서 핵심 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 없는 사탄이 어디서 나왔느냐에 관한 겁니다. 악마 없어요. 왜냐하면 내 존재가 절대적이기 때문에 내가 파악하지 않으면 무조건 없는 겁니다. 정신병자가 환청 듣고 하는 것 아니잖아요. 악마는 없는 거예요. 내가 있기 때문에 없는 거예요. 

내가 교회에 앉아 있습니다. 목사가 설교합니다. 그러면 내가 도착지점이에요. 내 존재가 은혜 받으면 그게 마지막 지점이란 말이죠. 목사가 설교했는데 장황해요. 마치 하늘에 비행기가 뜨잖아요. 비행기가 예쁘게 뜬단 말이죠. 그러면 비행기가 예쁘다는 말을 듣고 내 집에 착륙해야 됩니까? 예쁜 건 맞는데 나 이렇게 예쁘다고 자기 볼 일 안 보고 제주도 가는 비행기가 갑자기 내 앞에 착륙해야 됩니까? 아니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교회 갈 때 내가 도착지점이 되는 거예요. 모든 말씀의 도착지점. 그런데 비행기는 악마가 등장하는 현장에 간다고요. 비행기는 비행장에 앉아야지요. 그러면 비행기를 보려면 내 자리를 버리고 인천공항으로 가야 돼요. 거기 가니까 내가 못 보던 악마와 진짜 예수님의 모습이 보이는 거예요. 십자가 사건이 되는 겁니다. 

그동안 우리는 하늘에 날아다니던 십자가 사건은 내 존재의 구원을 위해서 여기서 잡아당긴 거예요. 십자가는 내 머리 위로 지나간다니까요. 이 세상은 사람밖에 안 보이거든요. 사실은 진짜 현실로 악마가 인간의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다는 사실을 십자가의 도착지점에서 비로소 밝혀진 사항입니다. 그동안 우리의 관심사와 기도내용은 주여, 나 잘 되게 해달라는 내용이 주님께서 이미 내가 악마를 생각한 적 없고 나만 생각했음을 그래서 내가 골칫거리고 문젯거리라고 십자가에서 다시 되돌아보는 그 현장을 그 전쟁터를 우리로 관람하게 하는 거예요. 

넘어가는 걸 장황하다고 표현하는 겁니다. 더 건져야 되는데 몇 개만 건지고 다 넘어 가버렸어요. 어디로 넘어갔는지 알아야 되지요. 그 예로 내가 그리스도인 것을 알리지 말라. 그다음에 나는 죽는다는 것은 헤어짐을 이야기하니까 예수님이 죽는다고 하니까 베드로가 그럴 수 없다며 우리가 지켜드리겠다고 하자 그 순간 베드로가 사탄으로 변해 있잖아요. 

베드로의 함께 하자는 취지가 주님이 일으킨 사건은 아예 염두에 안 두고 좋은 분 잘 만나서 내 존재가 천국에 수제자로 간다는 그것에 집착한 거예요. 오늘날 교인들과 똑같지요. 본인이 사탄이면서도 점잖은 체하며 교회에 앉아있는 거예요. 언제 사탄으로 돌발할 줄 모르거든요. 예수님이 하신 말이, “사탄아 물러나라.” 그 뒤의 말은 너만 잘못한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의 일이, 베드로가 예수님과 가까이 있으니까 대표로 말한 거예요.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모든 사람의 일은 한 결 같이 사탄의 앞잡이입니다. 참 이 이야기하려고 살았구나. 자기 존재에 대해서 포기를 모릅니다. 아주 지독합니다. 주께 영광 돌려놓고 돌아서서 영광 돌렸으니까 내가 주실 보상은 어떤 겁니까? 이건 말릴 새도 없이 자동적이에요. 

그래서 어제 낮에 그 많은 죄, 그런데 돌아보니까 몽땅 다 하나님 의로 다 바꿔졌지요. 이걸 특수상대성원리라 해요. 미래가 과거를 찾아와서 과거를 다 뒤집어놓는 거예요. 도착지점이 미리 심겨져 있는 현상, 어떻게 그게 가능하냐? 지나가야 도달되는 미래가 온다는 것은 존재적 입장에서 시간론이라면, 사건 입장에서는 영원성이거든요. 모든 게 영원성이고 모든 게 동시성 개념을 갖고 있습니다. 특수상대성 이론에 의하면. 현재, 과거, 미래가 공존하고 함께 있는 겁니다. 

그 증거가 사도 바울의 몸에 새겨져 있어요. 사탄의 가시가 있던 인간의 바닥과 그 몸이 삼층천에 올라갔던 두 개의 과정이 사도 바울의 몸에 다 새겨졌으니까 그 몸은 범우주적 사건을 표시하는 스크린 같은 역할을 한 겁니다. 그것으로 기존 교회가 이단이냐, 아니냐? 판정하라고 뒤에서 예수님이 떠미는 거예요. 사도 바울 몸 자체가 움직이는 계시가 돼버린 거예요. 같은 인간이 아니에요. 

베드로가 이런 이야기했잖아요. 사도 바울 편지를 그냥 막 읽지 말라. 성령이 임하지 않으면 해석 안 되는 글이다. 사도 바울이란 인간이 쓴 편지가. 가을편지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사도 바울 편지는 성령이 아니고서는 해석이 안 된다는 겁니다. 표준적 해석이라는 거예요. 이런 게 어려워요. 성경이 있고 해석이 있잖아요. 성경은 그걸 말하는 게 아니고 성경 자체가 해석이 되는 거예요. 

풀이를 해줘야 해석이 아니고 성경 자체가 해석이에요. 왜냐하면 너희는 내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마라. 이게 해석이에요. 알리지 말아야 돼요. 왜냐하면 아버지와 아들의 계시 받은 자 외에는 천국 안 와야 되거든요. 주님의 뜻은. 천국은 인간에게 모르는 세계가 아니라 없는 세계에요. 사건에서만 나타나지 존재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세계에요. 이걸 해석해주세요? 이 자체가 해석이라니까요. 

마지막 해석의 끝은 뭐냐? 결국은 나의 구원은 불가능한 구원이라는 담백한 고백만 내뱉을 뿐입니다. “집사님은 어떻게 그런 해석을 했습니까?” 왜 나한테 묻습니까? 내가 일으킨 사건도 아닌데. 하는 내 존재밖에 몰라요. 그런데 존재에 충실한 나를 명사구로 십자가 사건화 시킨 주님한테 물어야 됩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당신한테 말한다고 전도되는 게 아니고 전도는 주님이 직접 한다는 거예요. 모든 선교사는 가짜가 돼버립니다. 진짜 선교하려면 멀리까지 갈 필요 없어요. 지금 이 자리에서도 당신들은 몰라, 그것으로 선교가 된 거거든요. 신학으로 다듬어서 삼위일체 이론 만들어서 이것 동의하면 구원시켜 줍니다. 무슨 짓들을 하고 있는 겁니까? 교회가 복음을 방해는 걸 그들은 몰라요. 

제 이야기에 대해서 목사들의 욕하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내 사업에 왜 방해하느냐? 내 교회를 까버리면 안 된다는 거예요. 교회를 까야 뒤에 복음이 보이죠. 그러면 교회 없습니까? 복음 안에 교회 있어요. 그래서 복음이 교회를 생성하는 것이지 교회가 있으면 존재가 되고 사건이 안 돼요. 내 교회 위주로 움직여요. 이것은 부부도, 가정도 마찬가지고. 모든 게 존재에 집착하면 그때부터 복음을 가리는 생활이 돼버려요. 

실컷 복음 전하고 난 뒤에 복음 전한 자기 자신 잘났음을 나타낸단 말이죠. 교회 왜 안 나옵니까? 바빠서 안 나옵니다. 교회 안 나와도 괜찮아요. 얼마든지 구원받습니다. 그런데 주께서 바쁘게 하셨다는 뉘앙스를 주면 돼요. 담백한 고백이에요. 가고 싶어 환장했는데 오늘은 죽어도 가겠다고 했는데 주께서 사건을 일으켜서 기어이 못 가게 해서 못 왔습니다. 실은 그게 아닌데. 이렇게 되면 못 가도 십자가 사건의 증거자입니다. 

그렇다면 온 것, 안 온 것으로 믿음 있다, 없다 결정하면 안 돼요. 주께서 그렇게 하셨으니까. 헌금 낸다, 안 낸다로 확정하면 안 돼요. 존재를 사건에 맡겨서 이제부터 아침에 눈만 뜨면, “주여, 오늘은 무슨 사건을 일으킬 겁니까? 종이 감당하겠나이다.” 어차피 사건의 주체는 주님이니까 존재는 사건의 일부로 편입되어 다뤄지면 돼요. 내 존재에 대해서 인과응보, 책임을 진다는 것은 본인 사건이지 주님 사건이 아닙니다. 본인 사건은 자기 의밖에 안 나와요. 

다시 이어가겠습니다. 별이 왜 예루살렘에 갔느냐? 동방박사가 십자가 고난에 동참하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동방박사가 별 따라 왔을 때 자기 구원만 달랑 챙기면 그만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고 예루살렘을 거침으로 말미암아 동방박사는 예루살렘을 본부로 두고 있는 열왕의 공격 표적이 되는 겁니다. 그로 인하여 동방박사가 처음에 별 따라 갔을 때 고요한 가운데 선물 줄 것 주고 무사히 오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그 현장에 가보니까 모든 존재의 층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울렁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스런 정보를 안고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요. 

고요했던 역사의 지평이 고요한 게 아니고 인간들이 만들어낸 대로 가만있는 게 아니고 묵시적으로 울렁거리고 있는 거예요. 멀미날 정도에요. 모든 게 울렁거리고 있었던 겁니다.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별이 건드린 거예요. 사자가 잠자고 있으니까 파리들이 앉지요. 그런데 벌이 코털을 건드리니까 갑자기 움직이지요. 움직이니까 놀라지요. 주께서 놀래라는 겁니다. 동방박사야 놀래라. 예루살렘뿐만 아니라 이 세상 전부가 적그리스도, 이미 예수에게 대적하는 악마가 일으킨 사건의 일부로서 편입돼있다는 겁니다. 

여기서 정리해봅시다. 시작은 내가 존재한다. 끝. 나 오늘 존재해. 저녁에 뭐 해야 되고, 스케줄 많아요. 성경을 펼치니까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나옵니다. 창세기 3장 15절. 남의 이야기입니다. 신화를 아주 멋지게 썼네. 자기 몸이 있는 게 시작점이지 이게 시작점이 아닌 줄 알았죠. 특히 뱀의 후손은 사탄이란 말이죠. 사탄이니까 비과학적 시대에 세상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 인간들은 신화적 개념을 동원했다. 이건 인문학적 교양이잖아요. 뻔히 다 아는 이야기잖아요. 

그런데 말로 갇혀있던 사탄이 실재인 줄 상상도 못했지요. 그 실재가 왜 드러나지 않았느냐 하면, 내 존재가 실재라고 여기기 때문에 가짜 실재 때문에 진짜 실재가 나타나지 않은 겁니다. 존재는 과거-현재-미래를 따라 결정 되지만 실제는 묵시적이라서 시간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따라서 존재와 더불어 시간이 날아가면 미래에 온다는 실재가 벌써 과거에 우리를 악마와 예수님 사건에 부분으로 편입시켜버렸어요. 이게 지금까지 강의의 정리입니다. 

시편 2편 2절을 봅시다.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다윗이 이야기한 예언이죠. 예언이 그때만 적용될까요? 온 시대에 다 적용되지요. 여기 구체적 인물이 등장한 합니다. 기름 받은 자. 그 다음에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한다. 기름 받은 자와 싸우죠. 그러면 사건이 아니고 절대 존재의 시점에서 찾아 나서겠지요. 정보를 알아야 구원받으니까. 그걸 찾았던 사람들이 많지요. 그들이 바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이에요. 그들은 시편 2편을 어릴 때부터 다 외웁니다. 교육과정에 포함돼요. 

그들 이스라엘의 미래는 메시아, 기름 받은 자가 와서 적들을 치는데 그들의 납득이 되는 메시아가 올 것이고 납득되는 메시아는 현재 자기를 압박하는 메시아를 대망하고 기다리고 있는 아브라함 자손을 하나님 편에 분류시키고 우리를 압박하는 그 적들이 그 적이라는 거예요. 여기서. 메시아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공동체 편을 들어서 칠 것이니까 로마에서 해방시키는 분이 메시아다. 그분만 찾으면 된다. 그분의 활동에 의해서 정치적으로 로마를 공격하고 힘으로 꺾어버리는 메시아가 오면 된다. 열심당원이 그렇고 쿰란공동체, 그 다음에 사두개인들, 바리새인들, 이들이 공히 생각하는 것은 로마 압제에서 벗어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을 때 오병이어 할 때 왜 많은 군중들이 예수님을 따라왔을까요? 귀신 쫓아낼 때 갈릴리에서 일을 벌였는데 예루살렘까지 소문날 정도로. 수많은 군중들이 예루살렘 입성할 때 기대했던 메시아 왔다고 잔뜩 희망에 부풀었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로마 힘에 이겼습니까? 졌지요. 로마군병한테 뺨 맞고 놀림 당하고 맥없이 약하게 체포당했어요. 그리고 유대인들이 행여나 이 사람을 조금이라도 의미를 둘까 싶어서 모두가 싫어하는 살인강도와 같은 부류로 취급해서 세 개의 십자가를 세워서 그중에 제일 나쁜 사람으로 중간에 세워놓고 그 다음에 손을 털어버렸습니다. 다시 조용해진 겁니다. 

요란스럽게 메시아 왔다고 까불었던 열두 제자와 사랑했던 마리아까지, 자기 엄마까지 나중에 조용하게 만들었어요. 아무 일 없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이 모든 존재는 일시적인 에피소드에 불과했지 실재는 아니었다는 것을 유대인들은 정치적으로 증명한 거예요. 오늘날 많은 신학자들도 그것까지입니다. 성령을 안 받았거든요. 예수님의 희생을 본받자. 이웃사랑하자. 그것만 뽑아내는 겁니다. 그것 봐. 예수님께서 얼마나 사랑했으면 자기 목숨을 줬잖아. 우리도 그걸 본받아서 교회에서 서로 이웃끼리 사랑합시다. 그걸로 끝나는 거예요. 

주님에게 교훈을 뽑아서 그 교훈을 내 것 삼아서 나도 예수님처럼 모방하면(천주교에서 많이 해요) 우리는 그리스도의 형상이 피어날 것이요, 그러면 또다시 유대인처럼 언젠가 오실 하늘나라에 우리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 들어간다는 겁니다. 이건 실재가 아니에요. 자기 개인 존재중심입니다. 그것에 대해서 모든 사람이 동의하고 있어요. 평소에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석가모니처럼 보리수 옆에서 굶자. 이건 싫어요. 석가모니 정신처럼 우리도 대자대비, 원수 만들지 말고 누구나 다 대자대비하자. 그게 불교의 석가모니 이해잖아요. 석가모니는 되게 경솔한 사람이에요. 석가모니 본받아서 머리 깎은 중들도 전부 다 경솔해요. 소크라테스는 잘 모른다 했잖아요. 인간은 모른다는 거예요. 소크라테스가 왜 죽었느냐 하면, 신에게 제물을 드렸는데 네가 신을 알아? 제물 준다고 뇌물 바친다고 신이 좋아할 것 같아? 우리는 뭐든지 몰라. 이것 때문에 소크라테스가 무신론자로 취급받아 죽었습니다. 독약 마시고 죽었거든요. 

그런데 부처는 경솔했어요. 안다는 겁니다. 신이고 뭐고 다 인간의 마음이 만든 거예요. 얼마나 경솔합니까? 석가모니 따른 인간들 다 경솔해요. 모르면 모른다고 해야지, 왜 아는 척합니까? 머리 깎아 보세요. 나중에 머리 기는 게 귀찮아서 깎아요. 신학자들의 특징이 경솔하다는 겁니다. 성령 안 받아 모르면 그냥 신학교 취직해서 밥 먹고 살면 돼요. 신학은 이런 거라고 하면 되지 주님에 대해선 입을 다물어야 돼요. 그래서 신학교수들 가운데 솔직한 사람들은 복음을 모른다 해요. 학생들은 화가 나는 거죠. 진리도 모르면서 교수질하고 있으니까 신학교에서 배울 것 없다고 나오는 겁니다. 

목사들은 왜 큰소리치느냐? 목사들은 모른다고 할 필요 없어요. 교회가 날로 커지니까. 빵에 이스트 넣으면 빵이 부풀지요. 교회가 커진다는 것은 일반교인들이나 누구한테나 설득력 있는 거예요. 하나님이 안 도와줬으면 커졌겠느냐, 이 말입니다. 그러다 큰 교회가 분리되잖아요. 그건 사탄의 짓이에요. 말하기 좋아요. 복음 전하는데 교인 몇인가? 몇 명 안 된다. 그게 무슨 진리인가. 진리를 양으로 계산하는 거예요. 진리인데 교인이 세 명이다. 그건 교회가 아니에요. 진리라면 주께서 크게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일반교인들이. 마태복음에 두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다. 그런 건 귀에 안 들어와요. 

그러니까 목사들의 화가 나는 거예요. 진리 전했는데 주의 종으로 인정 안 해주니까 남들한테 설득력 있으려면 수단과 방법 가리지 않고 교회 키우면 되지요. 교회 키우면 그제야 “교회 넓다. 세상에 그랜드피아노 좀 봐. 파이프오르간까지 있네. 나, 이 교회 다닐래.” 안심 놓고 교회 다니는 겁니다. 그래서 화를 내는 거예요. 그게 존재인데 그 존재마저 무시합시다. 그것이 십자가 사건을 구성하는 사건 속에 명사구로 포함돼있습니다. 


10분 쉽시다.
 
 한윤범  (IP:14.♡.134.25) 17-10-20 10:07 
20171016b 부산강의 : [시편]4(2편)-존재에서 사건으로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강의는 어려워요. “그 맨 것을 끊고” 했으니까 어떻게 끊고, 안 끊기느냐는 그 문제를 찾아내야 돼요. 그냥 집에 갈 수는 없는 겁니다. 방법은 뭐냐 하면, 처음부터 새로 시작하는 거예요. 사람의 본래 자리를 찾아가라는 겁니다. 주님의 사건이 우리한테 오게 되면 내가 현재 아는 것부터 더 추가해서 의미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새로 다시! 처음의 자리는 우리가 없는 자리고 죽음의 자리입니다. 없는 자리, 죽음의 자리로 분류했는데 사실은 같은 자리로 보면 됩니다. 예수님부터 시범했지요.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으로부터 물세례를 받았잖아요. 죄인들만 들어가야 될 예수님이 합류함으로써 예수님이 세례의 시작을 한 거예요. 예수님 시작의 마무리가 십자가인데 이걸 불세례라고 합니다. 내가 받을 불세례가 남아있다. 성경에 이런 게 있어요. 누가복음에 나와요. 그러면 물세례부터 불세례까지 가는 겁니다. 물세례 받을 때는 아직까지 육체가 있음이고 생생하게 존재가 살아있어요. 이건 세례의 시작에 불과하고 마지막은 육체의 죽음입니다. 소멸되고 사라지죠. 골로새서 2장에도 이런 말씀 나와요. 예수님은 할례의 완성을 했는데 십자가의 죽으심이 할례의 완성으로서 세례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런 대목은 함축돼있기 때문에 참 힘들어요. 

우리는 존재밖에 모르니까 참 예수님 고생 많이 했다고 예수님 본인 이야기로 끝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성령 세례가 와요. 성령이 우리한테 온다고 돼 있잖아요. 사실은 성령이 오는 게 아니고 우리가 주님에게 끌려가는 게 성령 세례입니다. SF영화에서 외계인이 큰 비행접시 타고 왔을 때 구경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자석에 끌리듯이 끌리니까 그 사람은 우리 사는 땅에 비행접시가 왔다가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고 외계인 입장에서는 너희는 실험대상이라고 강한 힘으로 비행접시 안으로 집어넣은 거예요. 외계인 입장에서는 비행접시가 기원이고 이 땅은 식민지에요. 

옛날엔 천동설이라 해서 지구 중심이라 하거든요. 질문 : 천동설이 맞습니까, 지동설이 맞습니까? 하늘이 움직입니까, 지구가 움직입니까? 둘 다 틀렸어요. 성경 갈라디아서를 보세요. 예수님이 중심이에요. 그런데 지구가 중심이냐, 우주가 중심이냐 하는 것은 존재론이기 때문에 그래요. 존재론에서 사건론 또는 실재론으로 바뀌어야 되는데 사건, 실재론이 되려면 존재론이 존재의 죽음을 거쳐야 됩니다. 그런데 죽음은 그냥 죽으면 자살한 것밖에 안 돼요. 심판을 받아야 돼요. 심판은 심판 받을 자가 있어야 되고 심판하실 분이 있죠. 그 심판하시는 분이 온 우주의 중심입니다. 모든 만물은 모든 권세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중심입니다. 

욥기에 보면 욥이 여러 가지 오해를 많이 하는데 욥이 한 오해가 오늘날 우리에게 큰 교훈을 줍니다. 아프니까 청춘이라 하지만 아프니까 달려들었어요. 욥이. 욥의 친구들은 안 아프니까 잔소리가 많은 거예요. 참아야 하느니라. 그런데 욥은 아파요. 주일 낮에 설교했지만 사도 바울에게 육신의 가시가 있지요. 사도 바울은 아프지요. 자아가 생생하게 혹독하게 인식 되는 거예요. 그런데 삼층천 경험 속에서 내가 아픈지 어떤지 내가 어디 있는지도 몰라요. 바닥과 천국의 두 가지 계시가 불가능성으로 다 주어진 겁니다. 

사건 만들기는 우리에게 가능한 게 아니에요. 가능한 것은 내 존재를 더욱 더 확고히 붙잡는 것만 가능해요. 존재에서 사건으로, 존재에서 실재로 가는 것은 우리 소망 아닙니다. 아버지와 예수님 소원 아니면 구원받을 수 없어요. 아버지가 내가 보내주지 않으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음을 그 내용 자체를 전도해요. 아무도 못 온다. 불가능성을 전도한다니까요. 가능하다를 전도하는 게 아니고 끝까지 불가능성을 전도해요. 그래서 만약에 구원받았거든 땡 잡은 줄 알란 말이죠. 

복권 1등 당첨 되니까 어느 동네에서 샀느냐? 말도 안 되는 소리. 어느 판매소에서 샀든 아무 관계없어요. 그냥 된 거예요. 그냥 구원된 거예요. 이걸 긍휼이라 합니다. 그냥 불쌍히 여겨서 된 거예요. 내가 불쌍히 여겨서 구원된 게 아니고 긍휼함을 드러내기 위해서 긍휼 사건을 위해서 우리가 거기에 뽑힌 거예요. 긍휼로 구원받았다고 자랑하라고 구원된 게 아니고 긍휼이 사건을 유발했다. 긍휼을 돋보이려고 긍휼에 말려들었다는 고백하라고 긍휼로 구원받은 거예요. 말로 하면 복잡한데 느낌 아니까. 진짜 구원받으면 별 할 말이 없어요. 그냥 싱긋이 웃지요. 얼마나 착했으면 구원받았겠어요? 그러면 우린 빙그레 웃지요. “착한 소리하고 있네. 아직도 저 사람은 인과응보 속에, 마귀 속에 빨려들었네.” 

지난 수요일에 그런 설교했습니다. 싸움이 라인 싸움이라 했지요. 선악과 넘어오지 말라는 주님의 라인이냐, 아니면 이왕 따먹은 것 선과 악 사이에 라인으로 선하면 되잖아요. 착하게 살면 되잖아요. 구원해주세요. 마귀는 선하면 구원받는다는 라인을 밀고 있고, 주님은 아예 선과 악을 몰랐어야 한다는 라인을 밀고 있으니까 이미 안 선악을 무슨 수로 취소합니까? 내 몸은 이미 마귀의 조종으로 자기 정당함을 시도하는 데 모든 몸을 헌신하고 있는데요. 

전에 설교에서 살인 예를 들었잖아요. 욕은 해도 안 죽였다. 그 다음엔 죽였는데 살살 죽였다. 계속해서 주저주저하면서 나름대로 선과 악의 라인을 자체적으로 생산해내는 거예요. 이것까진 아직 망가지진 않았다고 변명거리를 계속 유발시키는 겁니다. 그래야 내 존재의 마지막 정당성만은 발판으로 유지해야 되잖아요. 그게 어디까지 갈지 몰라요. 끝까지 가요. 캐도캐도 계속 변명거리가 나옵니다. 

여중생을 왜 죽였느냐? 턱에 종양 올라서 성질나서 아파서 그걸로 세상적으로 고급차 타고 그런 식으로 풀었습니다. 당신은 턱에 종양 안 올라오니까 내 기분 모르죠. 거기에 대해서 세상은 뭐라고 합니까? 그래도 사람을 죽이면 되나, 이 정도로 나오겠지요. 그러니까 판사들이 진리를 모르는 거예요. “네가 사람을 왜 죽였어?” 다시 존재로 묻지요. 

그러나

주님은, “사울아 사람을 왜 죽였어, 왜 잡아갔어?” 이렇게 안 묻지요.
사건으로 해요.
내가 너에게 예수 믿는 사람을 체포하도록 사건을 유발했고,
너는 뭣도 모르고 개뿔도 아무것도 모르고 이게 정당한 줄로 알고
그래야 영광 돌리는 줄 알고 부지런히 그 일을 한 거예요.
뒤돌아보니까 내가 죄인 중에 괴수라는 그 죄인의 자리라는 사건,
실제 내용을 구성하기 위해서
나는 주님의 긍휼로 인하여 그 사건에 말려든 거죠.
그래서 구원받은 겁니다. 


사건에 말려들면 사건의 주체가 있을 건데 그 사건의 유일한 존재는, 사건을 구성할 때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죠. 이 사건을 구성하는데 원래의 약속, 최초의 약속을 구성하는데 있어서 존재는 달랑 둘만 필요해요. 두 사람의 싸움이니까. 예수님 라인이냐, 악마의 라인이냐? 이쪽은 좁은 길로 찾는 사람이 없고, 이쪽은 많은 사람이 찾고 멸망의 길로 가고. 

존재에서 나왔기 때문에 인간들은 나 여기 있다는 것밖에 모르지만 자신은 이미 하나님에 의하면 악마의 편에 서라는 악마가 시키는 사건화 된 존재로 살아온 겁니다. 지금 어떻게 끊는지 아직까지 안 하고 있어요. 그전에 제가 사전 작업을 하고 있는 거예요. 우선 존재에서 우리가 어느 사건에 속했는지 정리해보잔 말이죠. 유일한 최초의 약속이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사이에 투쟁과 전쟁이 있는 거예요. 뱀의 후손은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물지요. 이 말은, 악마가 고요히 가만있는 존재가 아니고 뭔가 문다는 겁니다. 무는 속성을 타고났어요. 

갓난아이도 자기 것을 뺏으면 물어요. 무는 습성이 있어요. 보복심리? 복수해야 속이 시원한 것. 세상에 대해서 보복 못하니까 그걸 완화시키고 그걸 대신하기 위해서 롯데와 nc의 준플레이오프가 벌어진 거예요. 풀 때 거기 가서 치맥 시켜놓고 풀란 말이죠. 내 복수를 대신해주니까. 롯데가 9:0으로 졌으니까 부산 사람들은 어디 가서 복수해야 될지 모르겠어. 

모든 것은 너 죽어라, 나 살자. 이거거든요. 인간은 혼자 고요히 사는 존재가 아니고 누가 죽어줘야 돼. 누가 이혼해줘야 돼. 그것 때문에 <연예가중계> 보는 거예요. 누가 좀 망해야 돼. 그래야 스트레스가 풀려요. 여름에 해수욕장 가고 싶은데 돈이 없어서 못 갔는데 내가 가려고 했던 일요일에 하필 태풍이 와서 해수욕장 폐지되고 몇 사람 물에 빠져 죽고 할 때 왜 그렇게 속이 시원한지. 잘됐다. 내 욕하는 교회 망해버려라. 속이 다 시원하죠. 

부부가 결혼하는 이유가, 혼자 있는 게 훨씬 행복해요. 왜냐하면 복수의 대상이 뚜렷하기 때문에. 모호하게 복수하다가 이젠 구체적으로 잔소리할 수 있거든요. 나한테 대들다가 이빨 아파서 치과에나 가라. 속으로. 그런 배우자라도 없으면 어느 놈 걸려봐라. 계속 자기한테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백수하면서 화풀이 대상으로 분노를 쏟아내는 쓰레받기로 좀 있어줘라. 그것 없으면 못 살아요. 그러니까 둘이 화목하게 잘 살잖아요. 자기의 배설물을 받아줄 수 있는 대상이 없으면 사람이 외로워서 얼마나 힘들겠어요. 인간은 자기 존재밖에 모르니까. 

일단은 존재라곤 없고 우리가 존재라고 우기는 것은 개인적인 우김이고 사실은 약속에 의해서 둘로 갈라졌다고 보세요. 그리고 예수님은 아무도 없어요. 아까 미리 이야기했지만 존재에서 사건으로 가려면 죽어야 돼요. 존재가 죽게 되면 소멸되기 때문에 내 구원이 사라져버립니다. 내가 계속 살아있어야 내 구원도 속성으로서, 우유적 속성(偶有的屬性, 아리스토텔레스)이라 하는데, 나라는 실체는 속성이 있어야 되거든요. 소유가 없으면 존재가 형성 안 됩니다. 나는 누구냐? 성질이 급하다. 성질 급함이 내 속성으로 들어가야 나는 남과 다른 성질 급함이 있고, 나는 대학생이다. 대학생일 때 구체화 돼요. 그걸 정체성이라 하는데, 있어야 되거든요. 

그런데 내 존재가 없어지면 내 속성도 날아가 버려요. 나는 결혼한 적 있다, 없다가 소용없어요. 왜냐하면 그때는 천사와 같이 되기 때문에. 하늘나라에서는 내 존재가 사라지면 하늘나라에 있는 자아는 누구냐? 새로운 존재를 부여받게 돼요. 그 존재의 증거로 주어지는 것이 새 몸이 주어집니다. 자아는 몸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추상명사로 주어져요. 몸 때문에 자아가 생기거든요. 그래서 사도 바울에게 육체에 가시가 있는 겁니다. 

사도 바울은 그걸 은혜로 본 거죠. 은혜란 것을 나중에 알게 되죠. 처음엔 은혜가 아닌 줄 알았는데 네 은혜가 족하다. 그래야만 된 거예요. 가시가 빠지는 게 은혜가 아니고 계속 박혀 있어야 되는 게 은혜니까. 사도 바울 정말 고생 많이 있지요. 어떤 사람은 예수 믿기 전에 죄를 많이 져서 그렇게 가시가 박혔다고 설교하는 사람이 꾀 많이 있어요. 인과응보에서 못 벗어나서, 이건 교회가 아니고 절입니다. 인과응보로 교인들한테 계속 돈을 뽑아내야 되니까. 사실은 여러분도 그래야 설교가 납득이 되는 것 아닙니까? 우리 본성상. 

여기서 끝나면 안 돼요. 싸우고 있으니까 예수님을 개무시하는 거예요. 지금 이게 전부에요. 악마는 안 보이니까 배후로 빠지고 인간들끼리 평화롭게 사는 걸 목표로 합니다. 그런데 악마가 예수님 발꿈치를 무는 그 본성을 여기다 녹여 넣은 거예요. 그러면 성경에서 여자의 후손 사건이라면 그게 실제로 역사 속에 나타나야 되지 않습니까? 그게 바로 노아 홍수입니다. 노아 홍수의 특징이 여덟 식구가 한 운명체라는 거예요. 숫자 8이 아니고 1로 바뀌어요. 그리고 노아 홍수 해석하면서 성경 자체가 해석이 되니까. 우리는 이게 두 구역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공간적으로 방주 안과 방주 바깥, 시간적으로 홍수 전과 홍수 후. 

이걸 지난 수요일에 설교했잖아요.

A타입의 시간은 과거-현재-마래로 가는 기존의 우리 시간이라면,
B타입의 시간은 사건 중심으로 사건 전과 후라 했지요.

그러니까 십자가 전과 십자가 후,
십자가 전에는 각자 존재 중심,
십자가 후에는 저주라는 사건을 보여주는 에서, 사랑받기로 작정된 사랑을 보여주는 야곱,
사건화 된 야곱과 사건화 된 에서. 축복과 저주는 사건을 통해서 비로소 갈라지게 돼있다.

이게 지난 수요일에 말씀드린 거예요. 


개인이 아니고 사건화 된 사건을 위한 존재들이 되는 겁니다. 나 잘났다는 게 아니라 너는 무슨 사건을 보여줄 건데? 이걸 이야기해줘야 돼요. 인간에게 그게 왜 안 되느냐 하면, 본인 존재 중심에서 사건을 주니까 자기를 위한 사건들만 쓰레기처럼 모은단 말이죠. 그러니까 노아 홍수는 그게 아니야. 노아 당시에도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오늘날과 똑같지요. 어떤 사람은 장가가는데 그 순간 어떤 사람은 농사짓고, 어떤 사람은 장사하고 있고. 상대성입니다. 모든 것에 각자 직업에 대해서 존중해주면 되죠. 이건 언약사건 이전의 풍경이에요. 

“당신은 농사짓습니까? 농사 잘 되지요? 저는 양 키웁니다.” 이러면 아무 문제없어요. 이 세상이 평화롭기 그지없어요. 뉴스 보면 나오는 모든 광경, 북한 핵개발하고 미국은 화내고 있고. 여기는 박근혜 재판한다고 난리 나고. 그냥 그렇고 그런 아무것도 아닌데 갑자기 인자가 임하면 이와 같으니라.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어떤 사람은 결혼식하고 있고 어떤 사람은 바닷가에서 놀고 있고 있는데 갑자기 어떤 사건을 유발하니까 그 모든 것이 정적, 고요해져요. 마치 영화필름이 돌아가다가 <시네마천국>에서 끊어지잖아요. 갑자기 그 순간에 화면에 비가 막 내리면서 동작 그만, 얼음땡이죠. 스톱됐어요. 사건화 된 겁니다. 

이걸 요한계시록 할 때 동결상태, 요한계시록 전체가 동결상태고 동결상태는 묵시적이 아닙니다. 묵시를 동결로 표현하는 겁니다. 그것은 영원한 현재가 돼요. 각자가 할당받은 배치, 자기의 공간만 나타나요. 이것이 노아 홍수 이후에 나타납니다. 방주 안에서도 밥 먹고 잠자지요. 의미 없어요. 주께선 이 경계선만 필요해요. 사건을 표시하는 방주 ‘안과 밖’만 필요합니다. 이걸로 마지막 때까지 그냥 갈 거예요. 노아 홍수 자체가 해석이에요. 우리는 이 이야기 듣고 밖에 나가면 다시 먹고 마시고, 그런 세계밖에 몰라요. 그러다 말씀 듣고 성령이 임하면 다시 이걸로 굳히기에 들어가요. 

혹시 [남아있는 나날](가즈오 이시구로)이라는 책제목을 들어보신 적 있습니까? 노벨문학상 받았거든요. 31페이지에 이런 대목 있어요. 저택이 있는데 주인이 미국 간다고 일주일 비워요. 1954년이 배경인데 주인이 마음 좋아서 자기 차로 놀러 다니라고 했어요. 그 집사가 처음으로 차타고 밖으로 나옵니다. 차를 타고 언덕 모퉁이를 도는 순간 나는 비로소 내가 떠나온 세계가 다른 경계가 쳐졌다. 그래서 내가 적어놨어요. 여행은 경계를 떠나기. 내가 사는 울타리를 떠나는 거예요. 내가 속한 세계와 속하지 않은 세계. 

그 언덕을 돌기 전에는, 작가가 묘사를 잘했는데, 다 익숙한 풍경이었는데 그 언덕을 돌면서 심리적 묘사를 이렇게 했어요. 내가 너무 멀리 가는 게 아닌가. 불안하고 두렵다는 거예요.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서 떨어져나가서 감당 안 되는 세계로 너무 멀리 가면 돌아오는데 실패하는 게 아닌가. 그런 두려움이 들다가 경계선을 넘으니까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실감하면서 영국이 이렇게 아름다울 줄 몰랐다. 그만 풍경에 빠져 감사하는 대목이 나와요. 

생각해보세요. 지금 여러분의 경계는 어디죠? 경계는 어딘지 몰라요. 한 번도 안 넘어왔으니까. 왜 그러냐 하면, 현재가 되면 현재까지 구축된 나의 사고방식, 세계관, 생활관, 그리고 진리관, 거기까지 멈추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선 사건 위주기 때문에 계속해서 어떤 변화를 주고 가게 하시죠. 

우리가 아직까지 체험하지 못한 게 있어요. 남아있는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그렇게 애지중지하며 관리했던 내가 하나님의 사건에 의해서 나에게서 손을 놔야 되는 그 차원까진 이르지 못한 거예요. 아직 세상에 대한 미련과 애착이 강렬합니다. 특히 자식에 대해서. 나 아니면 저 애 못 산다. 내가 돌봐야 되지. 얽히고설킨 백성들이 많아요. 여기서는 눈 못 감는다. 억울해서 못 감는다. 돈 이천만 원 빌려줬는데 그것도 못 받아 죽는다는 건 말이 안 돼. 

그러니까 희망이란 내가 아는 범주 내에서 만들어진 희망이에요. 거짓 희망이에요. 종교가 그래서 위험한 거예요. 종교에서 말하는 천국, 희망이고 소망은 기껏 내 존재를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는 조건 하에 나에게 푹 빠지게 만드는 희망들을 교회에서 제시합니다. 거기에 기본은 내가 사는 거예요. 나는 여기 살다가 천국 가서 또 산다. 그걸 미끼로 해서 계속해서 교회 사업을 하는 겁니다. 십자가는 안 되지요. 

십자가는 내가 그냥 죽는 게 아니죠. 심판 받아 죽고 저주받아 죽고 내가 죄로 죽는 그 지점을 마저 체험하면 안 되지요. 왜냐하면 내가 죄 지어서 저주받는다면 아직도 집에 불나는 체험이 남아있을 수 있잖아요. 내가 너희 집 불질러버린다. 할 말 없지? 이게 남아있으면 안 되잖아요. 

욥기에서 중요한 것이 그 지점입니다. 욥을 앞장세워서 주님께서 갈 데까지 가보는 거예요. 가보니까 욥의 친구가 문제가 아니고 욥 본인이 문제였어요. 자기가 존재 중심이니까 사건 중심이 아니니까 내가 아는 게 곧 하나님 아는 것과 일치된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러니까 욥 마지막에 하나님이 나타나서 자기 경계선 바깥 이야기를 하잖아요. 네가 염소새끼 날 때 네가 봤느냐? 북두칠성 만들 때 너 있었느냐? 질문 같지도 않은 질문, 물을 걸 물어야지. 하나님이 지가 만들어 놓고 왜 나한테 묻느냐 말이죠. 황무지에 비 내리는 이유를 아느냐? 그걸 어떻게 알아요. 모르잖아. 너는 네 자신을 모른다는 거예요. 

그리고 자신에 대해서 알아야 돼요, 몰라야 돼요? 몰라야 돼요. 그게 오늘 강의의 정답입니다. 우리 자신을 알아버리면 일곱 귀신 달려듭니다. 더 많이 알아야지 그 정도 알아서는 천국 못 가. 신학교까지 가야 돼. 신학교 가니까 좀 알던가요? 더 알아야 돼가 아닙니다. 몰라도 되는 거예요. 몰라도 된다는 것은 알게 된 나를 안 믿겠다는 뜻이에요. 나의 믿음은 더욱 더 많이 알게 된 나를 붙들겠다는 게 아니라 내가 있을 자리는 주께서 나를 포기한 그 자리가 내가 가야 될 바닥부터 시작할 그 자리에요. 

왜 이런 어려움을 주시냐고 원망했던 자리는 아직도 먼 자리에요. 진즉 그 자리에 가게 되면 주던 말든, 암에 걸리든 말든 그게 나와 무슨 관계있는데 주의 뜻인데, 라는 자리가 우리가 체험될 자리에요.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그 다음에 이게 아버지 일이잖아요.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예수님께서 그런 발언을 쏟아내고 성경에 나왔던 것은 같은 동기생으로 요단 강 물에 들어갔잖아요. 물에 빠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과 완전히 공간적으로 안과 밖처럼 구분됩니다. 

중심은 어디라 했습니까? 지구가 중심입니까, 우주가 중심입니까, 누가 중심입니까? 예수님이죠. 예수님이 가신 곳마다 새로운 의미가 발생돼요. 의미가 발생되면서 예수 편이냐, 아니냐로 구획돼요. 경계선이 쳐진다고. 예수님이 여행합니다. 제자들이 멋도 모르고 따라 왔어요. 지가 아는 세계인 줄 알고. 천국 가면 누가 높습니까? 이런 질문하고 있다고. 

마태복음 17장에 보면, 예수님이 변화산을 보여줬지요. 베드로가 지 행색 그대로 이야기합니다. 여기가 좋사오니. 그 여기가 바로 지가 살던 여기에요. 펜션 세 채 지어드리겠다는 겁니다. 자기가 사는 땅이 땅인 줄 알아요. 땅은 존재고, 사건화 되게 되면 예수님이 살던 곳이 땅이 아니고 예수님이 땅이에요. 여기서 전쟁이 있어야 돼요. 전쟁에서 예수님에 의해서 새롭게 의와 죄가 규정되는 겁니다. 살인죄가 죄가 아니에요. 예수 모르는 것이 죄입니다. 살인했다고 죄가 아니고. 살인했다고 지옥 가는 게 아니고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게 저주받아요.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받을지어다.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 얼마나 철저했습니까? 주께서는 세리와 창기를 천국 보내지요. 한 편 살인강도 오늘밤에 낙원에 있다 했지요.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어떻게 했습니까? 구원했잖아요. 저주받아 피 흘리는 여인을 구원했지요. 그리고 오직 잃어버린 이스라엘에 왔다고 해놓고 백부장에서 이스라엘 중에 이만한 믿음을 본 적이 없다고 했지요. 왜 왔다 갔다 해요. 이방인에게 가지도 않고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에게 갔다 해놓고 왜 이방인 백부장을 구원합니까?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이란 개념 자체를 누가 정해요? 중심되신 예수님이 새로 정해요. 아버지와 아들이 아는 것만 이 땅에 중심으로 펼칩니다. 새로운 개념으로

그러면 문제는 예수님에게 어떻게 나아가느냐? 나아가는 게 아니고 사건이 외계인처럼 와서 우리를 잡아당기죠. 그 능력은 십자가에서만 나옵니다. 다 이루었다. 다 이루었다는 이 말을 수로보니게 여인은 “옳소이다.”라고 이야기했어요.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1장에서 모든 것이 예수님 안에서 예가 되고 아니요는 전혀 없다고 했어요. 지도 동족의 위협과 태장을 맞고, 굶기도 하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참 잘하셨습니다. 주님 하시는 일이 어떻게 그렇게 실수가 없고 하자가 없는지 자기 택한 백성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다 살리는 그 소식을 저한테 듣게 하십니까? 감사합니다. 지는 사람 얼마나 많이 죽였습니까? 인과응보에서는 맞아 죽어도 싸요. 

그런데 새로운 표준해석이 표준정신이 올 줄이야. 너 구원받았다는 게 아니라 주님 사건 속에 합류된 거예요. 오늘 강의를 들어보니까 내 구원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경계선, 안과 밖이 중요하죠. 노아 홍수 다시 이야기합시다. 

노아 가족 여덟 명이 있습니다. 노아 홍수의 관심사는 뭐냐 하면, 그 당시에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던 사람들 다 어디 있습니까? 지금 물 밑에 죽어 있지요. 그러면 노아 홍수 이전에 은혜를 알고 있었던 노아 입장에서, 지금 훙수 안 일어났습니다. 바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사람들 생생하게 살아있어요. 그때 사람들이 바쁘게 살 때 노아가 부럽겠습니까? “아이고, 죽을 놈. 많이 장가가고 시집가고 많이 사고팔아라. 아이고, 불쌍한 놈. 조금 있으면 홍수 올 텐데.” 
  
그걸 성경에선 그러나 노아는 은혜를 입었더라. 은혜를 입었다는 말은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사건화 된 인식으로 세상으로 예수님 안과 밖으로 볼 수 있는 안목이 생긴 것이 바로 하나님의 선물, 은사입니다. 은혜 받았다고 하루 네 끼 먹고 좋은 데 살고 하는 것 아니지요. 똑같아요. 똑같음에도 불구하고 안목이, “그래 잘 먹고 잘 살아라. 많이 해라. 너 잘났다.” 

해운대 팔십 몇 층이죠. 높이가 엄청나잖아요. 만약에 우리가 노아라면 높다. 그런데 물은 더 높을 걸. 다 빠질 거니까. 이건희 회장이 어떻고 하지만. 그래서 성경은 예수 안에서 보면 모든 인간은 죽은 자라 해요. 죽어서 비슷비슷하다는 말이 아니고 죽고, 생명을 재규정한 거예요.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죽어도 살겠고, 예수 모르는 사람은 살아도 죽은 자에요. 이게 재규정된다니까요. 경계선을 통해서. 새로운 표준해석이 주어진다고. 

따라서 시편 2편에 나오는 이야기가 죽 들어보면, 예수님한테 대들다가 박살나는 그 이야기거든요. 그런데 여기서 예수라 보지 않고 유대인들은 뭐로 보느냐 하면, 바로 여기 나오는 기름  받은 자가 누구냐 하면, 제사장 중심으로 살아가는 이스라엘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로마가 지금 적이 되고 메시아는 우리나라 살리기 위해서 시편 2편대로 오실 메시아를 찾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거기에 진짜 메시아가 왔거든요. 예수님이 오시니까 누가 원수에요? 바로 메시아를 기다리는 그들의 대표적 원수가 됐지요. 그러면 하나님의 약속을 그들은 잘못 생각한 겁니다. 제가 유대인 욕하는 게 아니에요. 모든 인간의 대표가 유대인이라면 어느 인간도 그런 생각을 안 할 인간이 있느냐? 없는 겁니다. 

자, 이제 마지막으로 그렇다면 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기름부음 받은 자로 생각하지 않았는지 생각해야 돼요. 이래야 맨 것을 끊는 게 풀립니다. 그들 눈에 예수님이 존재로 보인 겁니다. 자기가 자기를 존재로 보잖아요. 예수님이 여기 있는 거예요. 예수님 있는 것 맞아요. 예수님은 너희들 눈에 띠도록 존재에 이름을 붙였어요. 인자에요. 세상 사람들은 인자를 어떻게 생각했느냐는 거예요. 그런데 인자 뒤에 안 보이는 게 있어요. 그게 그리스도에요. 그래서 내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한 겁니다. 그리스도에 대해서 아무도 몰라요. 베드로가 아는 척했지요. 

그러니까 세상 존재 중심에서는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메시아가 왔으니까 메시아와 우리와 같은 존재니까 메시아 존재+우리 존재 되면 우리는 새로운 천국을 이룬다 했는데 예수님께서 인자를 통해서 그렇게 허락한 거예요. 네가 생각한 것은 인자 정도로 허락하니까 베드로가 하는 말이 예수님이 죽는다 하니까 그럴 리가 있습니까? 하니까 사탄아 물러가라, 했어요. 사탄이 여기서 등장하는 거예요. 중첩돼있는 인자+그리스도, 인자가 아니고 진짜는 그리스도가 인자의 모습으로 오신 거예요. 사람의 아들로. 

그리고 그리스도의 나타남은 인자와 더불어 죽음이 있어야 돼요. 죽음이 십자가고 십자가가, 아까 [남아있는 나날]처럼 언덕을 도니까 새로운 세계가 보이잖아요. 이게 십자가가 경계를 형성합니다. 십자가는 사건이에요. 사건은 모든 과거-현재-미래가 사건 위주로 돌아가게 돼있지요.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기 위해서 계속 십자가가 나타나게 되겠지요. 그러면 그들은 끊고자 했단 말이죠. 악마가. 헤롯이 동방박사를 공격하잖아요. 그것은 바로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관계 때문에 끊고자 했단 말이죠. 

그러면 끊고자 한 것에 대해서 주님은 끊겨줘요. 그게 인자의 죽음입니다. 끊어져버렸습니다. 인간은 더 이상 구원될 수 없습니다. 아무도 자기 희망으로 구원될 사람은 없어요. 마태복음 11장 27절에 뭐라고 돼있는지 봅시다.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이 이야기를 그 당시 바리새인들이 들었으니 얼마나 건방지다고 느끼겠어요. 우리도 그런 자리에서 성경을 봐야 돼요. 완전히 우리 존재를 무시하지 않는 한 예수님이 하는 말이 건방지기 짝이 없어요.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시건방지기가 도를 넘었어. 아들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지요. 그러면 모든 인간은 이단이죠. 기존교회 문제 있지요. 모든 인간은 태어나면서 이단이에요. 중립지역에 있는 게 아니고. 이단 안 되려면 어느 교회 가야 돼? 이게 안 된다니까.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지금 말하는 투를 보세요. 예수를 알면 구원받는다는 게 아니고 아예 쳐내잖아요.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애초부터 구원대상이 아니라는 거예요. 아무도 구원시켜 달라고 요구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런 권리자가 없다는 거예요. 이게 팩트입니다. 이래서 교인 몇 명이나 모이겠느냐는 그 문제가 아니에요. 이게 사실이에요. 이걸 실제라 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의 모든 문제점은 나는 어떻게 됩니까? 나를 집어넣고 현실을 구성하거든요. 나한테 유리하도록 내게 도움 되는 식으로 현실을 구성하는 버릇이 있어요. 그런데 주님께선 아예 배제하고 현실을 구성하잖아요. 따라서 여기에 대해서 옳소이다, 또는 사도 바울이라면 yes, 예수님 같으면 다 이루었다. 옳다고 나온다면 그 사람은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이죠. 바깥에 있는 사람이, 너는 무슨 수로 그 안에 들어갔는지 묻습니다. 그럼 우리에게서 나올 것은 불가능밖에 없지요. 몰라. 나도 몰라. 나한테 물으면 안 돼. 그건 주님한테 물어야 돼. 

사도행전 3장에서 앉은뱅이를 낫게 하니까 사람들이 베드로와 요한의 경건으로 구원된 줄 알았어요. 베드로와 요한이 손사래 치면서 왜 상관없는 저희한테 어떻게 했느냐고 묻습니까? 아닙니다, 아닙니다. 결국 우리의 전도는 딱 하나밖에 없어요. 내가 한 게 아닙니다. 미쳤거나 진짜 구원받았거나 둘 중에 하나에요. 목사님, 설교 참 잘하시네요. 내가 한 게 아닙니다. 사건에 휘말린 거예요. 

어제 낮 설교에서 구자억이란 목사가 있는데 이런 노래 들어봤지요. “아따 참말이여 믿을 수 없것는디” 나훈아의 <영영>이란 노래를 “믿으라 했는데 믿어보라 했는데” 모든 가사를 복음적으로 개사해서 복음 전하는데 “아따 참말이여 믿을 수 없것는디” 사실은 고쳐야 돼요. “믿을 수 없었는데” 과거완료고 해야 복음적이라. 믿을 수 없었는데 그 다음부터 믿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면 안 돼요. 그 사람 설교 들어보면 복음이 영 아니거든요. 사람을 전도할 그게 강렬해서 전도는 주님이 하신다는 사실을 지가 아직 안 죽었으니까 자기 존재가 실감나니까 자기 존재로 해보겠다는 거예요. 

전도는 주님이 나를 죽이는 그것이 그 죽음 안에서 끊어짐이 없어요. 환란이나 핍박과 곤고나 어떤 것도 그리스도 사랑 안에서 끊어짐이 없는 거예요. 끊어짐이 없는 체험이 뭐냐? 나는 죽어도 괜찮다는 체험이 안 끊어졌다는 티를 내고 있는 겁니다. 나 같은 인간은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 그 말씀이 오는 거예요. 존재의 세계에서 말씀의 세계로 가면 그 사람은 아무리 존재가 끊고 싶어도 악마가 끊고 싶어도 이미 말씀이 이어졌기 때문에 주님과 우리 관계는 그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습니다. 

바깥에서 악마가 창문 넘어서 긁어대면서 정죄해요. 인과응보로 정죄해요. 저주받아라, 이놈아. 십일조 떼먹었잖아요. 교회 두 달 동안 안 나왔잖아. 계속해서 우리 마음속에 네가 알아서 해야 네가 구원받아, 그 원리로 하는데 그 악마의 소리를 대변해주는 자가 교회 목사들이에요. 그들이 너무 고마워. 과도한 오버인지 모르지만 이단들이 너무 감사해요. 계속 그들 입에서 인과응보가 나옵니다. 

“김 집사님 보세요. 십일조 25년 동안 하다 저번에 안 하니까 얘 자전거 사고 났잖아요. 모든 것은 주의 뜻이 아니면 일어나지 않는데 자전거 사고가 일어났다는 말은 경계를 통해서 징계를 통해서 영의 아버지께 돌아오게 하는 겁니다. 회개하세요.” “그렇구나. 주의 은혜로 다시 본 자리로 찾아왔구나.” 죽이 잘 맞지요. 방주 바깥에서는 죽이 너무 잘 맞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휘말리지 않을 수 있다? 그것은 인간의 힘으로 안 되고 성령께서 십자가의 능력이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체험하면서 내가 바로 그곳에서부터 십자가로 벗어났다. 내가 벗어난 자리를 평생토록 우리로 혹독하게 체험케 합니다. 이 자리 있다 집에 가면 벌벌 떨고 두려워하고 그것은 네가 두렵고 무서운 자리에서 벗어난 과거의 자리를 떠나지 않고 마귀를 통해서 우리에게 붙여줌으로써 오직 주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만 감사케 하는 거예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끊고자 했지만 끊어지지 않는 것은 우리의 행함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다 조치하신 덕분인 것을 우리가 잊지 않게 하옵소서. 십자가와 부활이 끊어지지 않는 것처럼 주와 함께 있는 저희들과 영생이 끊어지지 않는 것을 주 앞에 늘 고백하고 전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