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강의

부산강의-율법의 등받이(시편2) 170711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7. 7. 20. 09:14
 한윤범  (IP:14.♡.134.10) 17-07-14 10:02 
20170711a 부산강의 : [시편]2(1편)-율법의 등받이 
(강의:이근호 목사) 


리가 몇 년 동안 철학과 복음 이야기를 하다가 지난달부터 시편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철학은 어렵고 성경은 쉽다고 생각하는 데 저는 반대에요. 시편을 보면 성경은 인간의 철학과는 비교 안 될 정도로 굉장히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철학은 있는 데서부터 있는 대로 가거든요. 있는 데서 있는 걸 설명하거든요. 철학은 아무리 해도 거짓말될 가능성은 없어요. 설명할 대상이 있기 때문에. 그런데 성경은 설명할 대상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눈에 안 보이잖아요. 훨씬 더 어렵잖아요. 

그러면 사람들은 어떻게 가장하고 기만하느냐 하면, 없는 예수를 여기 있다고 가장하고 기만하고 그 다음에 성경을 봅니다. 기만은 기만으로 끝나요. 실제로 예수님이 살아계셔서 체험하는 사람과 있다고 신자라고 가장하고 신앙인 척해서 성경 보는 사람은 결국 너무 어려워서 나중에서 철학이 차라리 쉽다고 느껴질 정도로 자신이 뭘 하고 있는지 자괴감에 빠질 거예요. 내가 듣고 싶어 하지 않는 걸 아주 괴로운 일입니다. 

여기 있는 나, 여기 존재하는 내가 얼마나 향상되고 개선되는지 그 소리 듣고 싶어 하는데 말씀은 여러분 속에 안 보이는 주님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때문에 자기가 있다고 여기는 사람에게는 눈에 보이지 않는 없는 존재에요. 정리해봅시다. 성경은 없는 분에 대해서 이야기하거든요. 그런데 철학은 있음에서 있음으로 나오잖아요. 그러면 현재 우리는 뭘 부정하고 부정해도 여기 있다는 걸 부정 못하잖아요. 그만큼 우리를 스스로 보기에 철학적이에요. 

여기서 만약에 제가 이 자리에 있지 않고 여기에 펀드매니저 와서 투자할 좋은 펀드 소개할 테니까 여러분에게만 특별히 알려줍니다. 내가 아는 사람 있는데 이번에 이 동네 땅 값 오릅니다. 넣어두시면 열 배 오릅니다, 라고 했을 때 듣기 싫다고 뛰쳐나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아주 특이한 사람이에요. 나는 펀드매니저한테 주의 십자가 복음을 듣기 원했는데 그 소리 안 나온다고 나가버리면 다른 사람들이 의아해할 거란 말이죠. 

마찬가지로 복음을 이야기할 때 철학 이야기하면 듣기 싫어 나간 사람은 별로 못 봤어요. 그건 평소에 우리들이 정신병자기 때문에 그래요. 정신병자는 다른 말로 하면 비정상이에요. 태어날 때부터 정상이 아니에요. 예수님 보시기에 비정상이에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작업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지 비정상인 것을 정상으로 만들어서 자기의 나라, 천국에 데려가고자 말씀을 줬기 때문에 그 과정을 우리가 그대로 반복하고 답습해야 돼요. 출발을 비정상으로 하는 거예요. 나는 있다. 이게 비정상이에요. 이것부터 문제 삼는 거예요. 나는 여기 있습니다. 주님은 그게 나와 무슨 상관있는데 그 이야기를 왜 하는데? 하나님에겐 아들이 있는 게 중요하지 내가 여기 있는 건 안 중요하거든요. 

사람은 내가 여기 있음부터 시작해서 여기 있는 나를 죽어서 좋은 나라 가게 해주세요, 라고 그렇게 강권하고 요구하는 권리가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겁니다. 교회 나왔으니까 천국 넣어주세요, 라고 한다면, 네가 무슨 권리로, 무슨 자격으로 갈래? 거긴 내 나라야. 네가 가고 싶다고 해서 갈 수 있는 나라도 아니고 가기 싫다고 해서 못 가는 나라도 아니고. 천국은 예수의 나라거든요. 예수님의 나라는 자기 원하는 자만 데려가는 나라에요. 따라서 앞에 무슨 말을 해야 되느냐 하면, 네가 원하는 것을 내가 묵살하겠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너는 묵살당해도 마땅한 존재라는 것을 알려주는 이야기를 내가 지금부터 할게, 라는 이야기입니다. 그게 성경에서 나오는 겁니다. 

소위 복음 아는 교회를 봅시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뜻으로 여기 왔습니다. 제가 설교해서 천국을 보낼 건데 기존교회는 복음이 없기 때문에 못 갑니다. 그러나 나는 복음을 전하기 때문에 내 말 듣고 믿으면 구원받습니다. 얼른 보면 복음이 있는 교회 같지요. 뭐가 빠졌습니까? 과연 내가 그런 덕을 볼 자격이 있는지가 빠져 있지요. 그건 노인 상대로 사기 치는 것과 똑같아요. 여러분 건강을 위해서 귀한 상품 갖고 왔으니 가실 때 화장지 한 통, 계란 한 판 가져가시고 물건 사세요. 이것과 차이점이 뭐예요? 

처음부터 "과연 우리가 구원받을 자격이 있는가" 부터 나와야 된단 말이죠.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내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기대조차도 그게 죄가 된다? 하는 생각을 갖고 있어야 돼요. 내가 죽어서 천당 가야 한다는 이런 포부, 순박해 보이고 순수해 보이는 우리 입장에선 그런데 그게 순수가 아니라 나를 망치는 화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 구원에 대한 욕망의 출처가 수상해요. 주님한테서 나온 게 아닙니다. 

내가 존재하는 것부터 출발하면 이런 실패는 늘 나오는데 우리가 약간 위로가 되는 것은, 이런 실패는 우리만 하는 게 아니고 시편을 받았던 그 당시 이스라엘 자체가 집단적 실패자들이에요. 우리가 기분 좋은 것은 주께서 이스라엘을 실패자로 간주하고 시편을 전했다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와 똑같은 입장이에요. 우리는 어떤 실패자냐 하면, 시편 알아서 복음 끄집어내서 구원받아야지. 이러한 실패를 날마다 되풀이 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 점에서 이스라엘과 다를 바 없어요. 똑같아요. 

지금 있음에서 있음으로 나가는 것이 문제라면 하나님께서 있음을 없음으로 바꾸는 작업을 하는 겁니다. 있으니까 말이 많아. 대표적으로 욥기에 나오잖아요. 욥기의 초반부는 욥이 말이 많다는 것이고, 끝부분에선 욥이 입을 다물었다는 차이가 있어요. 욥이 자기가 있으니까 이걸 덩치라고 하는데 덩치가 있으니까 어떻게 감당을 해야 되잖아요. 배고플 때 밥 먹어야 되고, 사업해야 되고, 싸울 땐 싸우고, 좋은 건 좋다. 덩치가 가만있는 게 아니고 자꾸 뭔가 요구를 하는 거예요. 

요구, 욕구, 욕망이 있고 충동이 일어나요. 욕망은 자꾸 성공하면서 불만족을 자처하는 겁니다. 그러면 욕망을 욕망으로 자아내는 게 충동이에요. 이걸 충동질이라 해서 욕망을 만들어내요. 우리 내부에서 충동질이 있다면 나는 껍질에 불과해요. 아무 힘도 못 쓰고. 저는 이걸 각질층이라 봅니다. 각질층은 굳은살을 깎아내잖아요. 그런데 또 생기잖아요. 깎아내면 또 생기고. 깎아내도 또 생기는 것은 바로 충동에서 생기는 거예요. 

충동, 욕망, 욕구의 특징은 인간의 이성으로 감당이 안 된다는 겁니다. 대표적인 것이 결혼생활이 오랜 된 사람은 이래요. 결혼 초반에는 손만 잡아도 짜릿하고 가슴 조마조마하고 그렇잖아요. 그런데 결혼생활 30년 하면 무던하죠. 아내가 어떤 모습을 해도 감흥이 일어나지 않는 거예요. 그걸 제가 지난 낮 설교에서 가구는 말을 건네지 않는다. 도정환의 시에 나오는 거예요. 그냥 바라보기만 할 뿐이죠. 바라보고 어디에 써먹을까, 이것만 생각하죠. 쓸모없으면 버렸으면 좋겠다는 정도로. 아무리해도 감흥이 없는 거예요. 

그런데 내가 여자에 대해서 아무 감흥이 없다고 오해하면 안 돼요. 그래서 둘이 오랜만에 억지를 부려서 해운대 갔습니다. 거기에 얼마나 젊은 사람들이 많습니까. 거기서 어떤 느낌이 온다면 결국은 내 안의 충동과 욕망이 나이 많아서 죽은 게 아니고 살아있는데 그걸 자극할 수 있는 환경이 제한돼있었던 거예요. 억울하다고 따지지 마세요. 

따라서 인간의 이성보다 요구, 욕망이 세요. 욕구는 동물적으로 보면 돼요. 배고플 때 밥 먹고, 잠 오면 자고. 욕망과 욕구 사이에 협상해서 내가 요구하는 것은 이렇게 하지만 이것이라도 만족해야지, 라고 타협하는 것이 요구가 되는 겁니다. 용돈 십만 원 원하지만 당신이 없다하니 오만 원만 달라 할게. 이게 요구가 되는 거죠. 이성적인 것이 가미가 되면 요구가 되는 겁니다. 

그러나 백날 해봐야 충동이 참지 못하죠. 이걸 한 자로 이야기할 수 있어요. ‘욱’하는 거예요. 남자들 술 먹을 때는 욱이 나와요. 그래서 술 먹는 사람과 결혼 안 하는 게 좋아요. 언제 욱이 나올지 몰라요. 억눌렀다 한꺼번에 욱이 나오니까 이성적이 아니에요. 술을 먹는다는 것은 충동이란 엔진에다 휘발유를 꽉꽉 채우는 그런 짓이 돼요. 언제 필요할 때 술김에 했다는 핑계로 욱이 나와 줘야 마음에 차있는 마그마가 배설이 되면서 혼자서 해소되는 기쁨을 주는 겁니다. 

욕망은 성공이 실패한데서 불만족이지만 충동은 실패를 통해서 만족하는 겁니다. 실패를 한두 번 해보면 실패 안 하면 이상해. 제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만약에 집에 있는데 누가 예상치 못하게 참외를 한 바가지 줬다. 이건 좀 이상해. 찝찝해. 주께서 참외 값 이상으로 다른 걸 빼앗아 가려고 은혜로 주셨는가. 

요즘 아내한테 얻어맞는 남편들이 많답니다. 처음엔 장난삼아 때렸는데 나중엔 안 맞으면 집안에 여자가 없는 것 같아. 외로워서 못 살아. 누가 때려주는 사람이 있어야 돼요. 폭력 말고 평소에 말로 때려주는 아내가 갑자가 죽으면 그 남자 우울증 걸립니다. 잔소리 없이는 움직이지 않거든요. 아내도 남편한테 잔소리해야 자기 존재감이 생깁니다. 

이 포도를 먹으라고 준 거예요. 먹으려는 순간에 아내가 봅니다. 전에 보니까 당신 포도를 막 먹는데 잘 보고 먹어라. 한 소리해야 돼요. 지금 먹는 걸 소재로 해서 옛날 잊었던 소설까지 다시 끄집어내는 거예요. 기분 나빠서 에이(속으로 해야 돼요), 하네. 먹는 순간 당신은 포도 먹을 때 달리 먹어야 돼. 또 잔소리를 해요. 그래서 신발 신고 나가려고 하니까 또 신발 신는 것을 잔소리해요. 항상 잔소리할 대상들이 쏟아내야 된다니까요. 그들 부부가 사는 방식이에요. 

그런 남편이 죽었다든지 이혼해서 다른 남자를 만나더라도 매치하기 힘들어요. 솔직하게 수입이 얼만지 묻고 싶지만 속으론 전 남편처럼 내 잔소리를 다 들을 용의가 있습니까? 차마 그 소리를 못하잖아요. 그래서 재혼한다는 것이 힘든 거예요. 자기 이성적인 것 말고 감추어진 것까지 용납할 수 있는 대상자, 이건 오랜 세월동안 숙달되고 숙성되어서 만든 작품이 남편/아내란 말이죠. 그걸 흔히 이젠 얼추 잘 맞는다. 이게 전부 다 있음이란 말이죠. 

숙성된 인간의 자기밖에 모르는 충동을 누가 만드느냐? 주님께서 만듭니다. 주님께서 아담으로 하여금 아담의 자식을 계속 쏟아내게 만드는 겁니다. 왜 그렇게 하시는가? 그게 이유가 있어요. 오늘 시편에 보게 되면, 복 있는 자는 주야로 율법을 묵상하는 자죠. 질문이 이렇게 됩니다. 법은 무엇을 노리느냐? 법은 무엇 때문에 이 땅에 왔느냐? 하나님이 그냥 조용히 계시면 되는데 왜 시내 산에서 모세를 통해서 법이라는 것을, 십계명, 제사법을 주셔야만 했느냐? 언제 달라고 했습니까? 인간들이 회의해서 요구한 적 없어요. 

일방적으로 하나님이 주셨단 말이죠. 하나님이 주실 때는 목적 없이 주신 적이 없거든요. 주실 때 생존을 위해서 살아가는 자들을 밑에 깔아놓고 주게 됩니다. 생존이 우선이죠. 생존의 실체가 있어요. 생존은 산다는 거죠. 누가 사는데? 내가 살죠. 내가 살기 위해서 몸부림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게 얼마나 정신병자고, 비정상적이고, 어리석나 하면, 이미 인간은 선악과에 의해서 죽게 돼있어요. 

여기서 어려운데 죽음이란 심장이 정지되는 거잖아요. 하나님은 죽음을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죽음은 네가 자리하고 있는 위치가 에덴동산이냐, 아니면 에덴동산 바깥이냐 그걸 물어서 네가 죽어 있느냐, 살아있느냐고 물어요. 신기하죠. 숨을 쉬고 레슬링하고 격투기하고 야구하고 해운대 놀러가고 우리 둘이 예수는 안 믿지만 90평생 해로하면서 크루즈 여행 다니고 했는데 그 자리가 법이 우선이 안 되는 내가 우선이 되는 자리를 그냥 답습하고 있는 겁니다. 

미국 갔다. 복음 얻으려 미국 가지 않잖아요. 미국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지 구경하러 가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여행갈 때 콩고, 나이지리아 안 가고 캐나다, 미국, 뉴질랜드 가잖아요. 콩고, 나이지리아는 지옥이거든요. 지옥 구경할 것 뭐 있습니까. 사람들이 배울 게 없으면 여행 안 갑니다. 서유럽 여행갑니까? 아프리카 더운데 안 가고. 수단 가지요. 소말리아 반군들 어떻게 사는지 구경하지요. 이라크 북쪽 IS에 가서 총기 사용 어떻게 하는 관광은 왜 안 됩니까? 

사람들은 자기가 점점 개선되려하거든요. 성장하고 발전하고. 배울 게 없으면 돈 많이 주고 그런데 안 갑니다. 이 세상에서 아직까지 배울 게 남아있는 데가 어디 있느냐? 케냐, 페루 아니에요. 서유럽이에요. 가진 자가 어떻게 멋있게 사느냐? 핀란드. 그런 데 가서 가구 사오고. 미국 캐나다, 뉴질랜드, 호주 그런 데 가잖아요. 

문제는 핀란드나 살기 좋은 나라에 가면 뭐라고 합니까? 여기는 낙원 같다. 여기에 내가 끼어들면 좋겠다. 문제는 거기에 끼어들려면 세금을 많이 내야 돼요. 다시 말해서 한국에 사는 생존의 방식과 핀란드, 노르웨이의 생존의 방식이 달라요. 낙원 같기 위해선 세금은 50% 이상 70%씩 내야 된단 말이죠. 미국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게 있어요. 의료보험이 비싸서 차비 계산해도 한국에 오는 게 싸요. 그것 때문에 미국 교포들도 한국에 와요. 임플란트하려고. 

낙원이란 인간의 망상입니다. 내가 여기 있는 생존의 방식을 그대로 고수하면서도 잘 사는 것, 계속 살아 있음을 영원토록 이어갈 수 있는 것을 사람들은 유토피아, 낙원으로 본다고.  그러니까 주님 가신 길 갈래, 낙원 갈래, 하면 낙원이라 하거든요. 주님 가신 길, 십자가의 길 그 뒤에 부활의 나라 있잖아요. 빌립보 3장에서 사도 바울이 나는 부활에 참여하기 위해서 십자가로 가는 거예요. 

그런데 사도 바울처럼 되려고 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어요. 한구교회가 이야기하고 목사가 이야기하는 그 나라에 가도 싶지 사도 바울이 이야기하는 천국은 가기 싫어요. 왜냐하면 사도 바울의 이야기에는 조건이 있어요. 살아있는 나를 죽은 자로 확인하는 조건 하에 그 나라에 갈 수 있습니다. 주님의 안목에 내가 죽은 자가 돼야 돼요. 죽은 자가 되려면 모든 재산을 교회에 바치고 기도원에 가서 사느냐? 아니요. 내 식으로 나를 죽은 자로 만들지 못하는 겁니다. 

이게 슬픈 소식이 아니고 돈 좋아하는 우리 입장에서는 기쁜 소식이에요. 돈을 교회 갖다 바쳐도 절대로 산 자가 죽은 자가 되지 못합니다. 그런데 돈 없이 값없이 죽은 자가 될 수 있어요. 값없이 돈 없이 하니까 갑자기 이사야에 나오는 말씀인데 영생과 관련돼 있잖아요. 영생에 가기 이전에 중간 과정이 있어요. 값없이 돈 없이 죽은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 자리를 주님께서 네가 뭘 해도 죄인 된 자리로 바꿔주시면 죄 값은 사망이기 때문에 우리는 죄를 짓고 있는 가운데 이 자리가 죽음의 자리가 되는 겁니다. 

부부가 되면 좋은 점이 뭐냐 하면, 부부가 되기 전엔 격식을 갖춰야 된다는 겁니다. 부부가 되면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그걸 완료라고 해요. 이미 관계가 완료가 됐거든요. 그래서 내가 과연 주님 보시기에 죽은 자리에 와 있는지 어떻게 아느냐 하면 시제, 시간관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죽님 보시기에 죄인으로 죽은 자가 돼버리면 내가 느끼는 과거-현재-미래는 흐르더라도 그건 완전히 무시되고 주님의 확정된 시간이 주어집니다. 가락 모임에서 했는데 이게 순수과거이에요. 

보통 과거는 지나가면 과거가 기억이 될 뿐이에요. 기억하는 당사자가 현재에 속하기에 과거를 기억하는 거예요. 기억은 다른 말로 추억이죠. 옛날 여고생시절을 추억한다는 것은 지금은 여고생이 아니란 뜻이잖아요. 어디까지나 흘러가버린 과거잖아요. 과거가 그립지만 없는 겁니다. 없기 때문에 자꾸 추억하고 기억하는 겁니다. 그래서 현재란 하나님이 주신 인간이 받는 형벌 같은 겁니다. 형벌을 자처하는 게 사랑이에요. 사랑하지 않았으면 이런 눈물을 흘리지 않았을 것을. 

최초의 라면이 무슨 라면인지 알아요? 아재 개그인데. 바다가 육지라면^^ 그 가사를 보세요. 저는 예수님 말씀이 생각나요. 네가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다면 산을 옮겨 바다에 빠뜨리리라. 아마 애인이 일본으로 간 모양이라. 


<바다가 육지라면>(조미미) 

얼마나 멀고먼지 
그리운 서울은 
파도가 길을 막아 
가고파도 못갑니다 
바다가 육지라면 
바다가 육지라면 
배 떠난 부두에서 
울고 있지 않을 것을 
아아 바다가 육지라면 
눈물은 없었을 것을 


그리워한다는 것은 놓쳐버린 대상을 바라보는 형벌 같은 거예요. 그런데 이 그리움이 우리를 살게 만드는 욕망이에요. 자꾸 없는 것을 그리워해요. 그리움 자체도 형벌하고 나도 벌 받고 있고. 주님께서 주시는 순수과거란 쉽게 말해서 등받이 같은 거예요. 등받이는 내 등 뒤에 있지요. 

십자가란 순수과거, 이건 나의 현재가 될 수 없는 거예요. 나는 십자가를 기억한다. 불신자입니다. 나는 십자가를 추억한다. 그건 지옥 갈 사람이에요. 현재 십자가에요. 그래서 갈라디아서 3장 1절에 십자가가 눈앞에 보인다. 똑같은 내용이 마태복음 3장에 나옵니다. 세례요한이 하는 말이에요.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지금 여기 와있다 이 말이에요. 가까이 왔다는 것은, 축구할 때 공 간다는 뜻이거든요. 내가 패스할 테니 공 받으란 거거든요. 

결국 복음은 시간 안에 있어요. 내가 아는 시간에는 복음이 없어요. 순수과거, 이미 확정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잖아요. 옛날 구약사람들은 십자가 내다보면서 그들은 구원받았고, 그들이 죽고 난 뒤에는 하늘나라에 같이 있었습니다. 엘리야와 모세가 변화산에서 예수님과 이야기한 것 여러분 아시잖아요. 

정말 오늘 강의에서 이 점이 어려워요. 은 나의 과거가 아니라 지금 나와 함께서 있어서 법이 요구하는 대로 우리를 지금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법이 뭘 요구하는지 아직 이야기하지 않아요. 미리 정답을 말하면, 법이 요구하는 것은 영생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이 땅에 살면서 뭘 잃어버렸습니까? 이건 너무 쉬운데. 선악과 따먹었잖아요. 그런데 뭘 못 따먹었어요? 이제 정답을 아시겠죠. 아담과 하와가 생명을 못 따먹었어요. 

그러면 생명을 못 따먹은 이유가 뭐냐 하면, 원래 낙원에 에덴동산에 있었으면 따먹을 수 있었을 거예요. 주님께서 생명을 못 따먹게 한 조치가 그곳에 못 있게 만들었어요. 추방되어서 이 땅에 온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이 땅에서 사는 게 정상이 아니에요. 땅에는 비정상인 인간들만 태어난 거예요. 태어날 때부터 비정상이고 전부 다 정신병자들이에요. 정신병자란 제 정신이 아니란 말이죠. 인간이 제 정신이 아니란 말은 다른 정신이 장악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게 악마의 정신. 악마의 정신은 목적이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어쨌든 살아야 되지 않겠느냐? 사는 게 우리 존재의 목적이란 겁니다. 살아야 될 이유가 뭐냐? 살기 위해서. -끝- 

머리 허연 여자가 외무부장관 됐잖아요. 그분이 하기 싫다했습니까? 하고 싶다했거든요. 왜 하고 싶었을까요? 겉으로 이야기한 걸 봅시다. 내가 외부에서 얻었던 지식과 지혜로 마지막으로 국가의 번영과 발전을 위해서 국민을 위해서 봉사하겠습니다. 그 여성은 뭐가 문제냐 하면, 자기보다 더 국가를 위해서 봉사하고 외교적으로 실력이 있는 자가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그러니까 자기뿐이라고 내세워야 돼요. 당신을 외무부장관 시키겠습니다. 가만있어 봐요. 나보다 더 뛰어난 사람 있는지 조사해봐야 합니다. 조사 얼마나 걸리는데? 한 40년 걸립니다. 그러면 안 되잖아요. 

기본적으로 안에 들어있는 게 뭐냐 하면, 나는 나를 빛내기 위해서 살아갑니다. 왜 빛내야 되는가? 내가 여기 존재하기 때문에 그래요.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할 때 이유는 딱 하나에요. 내가 여기 존재한다는 자체가 충족적인 이유에요. 교회에서 교인들이 목사 나가세요. 못 나간다. 왜? 나니까. 내가 나가기 싫다는 거예요. 해운대에서 어떤 부자가 만 원짜리, 오만 원짜리 태우더라. 원래 한국에서 화폐를 태우면 법에 어긋나는데 태우더라. 자기 돈 태우는 거나 선탠해서 태우는 거나 똑같은 거예요. 내 돈 내가 하는데 네가 보태준 것 있어? 다른 말로 하면 내가 여기 있으니까 그냥 움직여보는 거예요. 

세상 진리는 없지요. 진리라 하는 건 다 핑계고 그 안에는 내가 여기 있다는 거예요. 그 나라는 게 각질이죠. 그 안에 또 들어있는 게 있죠. 뭐가 있느냐 하면 충동인데 그 충동이 인간을 괴물로 만드는 겁니다. 그런데 나만 괴물이 아니고 에브리바디 괴물이거든요. 다 괴물이란 것은 한 사람의 괴물에서 나왔다는 뜻이에요. 아담과 하와. 

왜 괴물이냐? 따먹어야 될 걸 못 따먹어서 그래요. 영생의 나무를 못 따먹었지요. 그래서 하는 행세가 못 따먹은 티를 감추고 영생의 나무처럼 흉내를 낼 수밖에 없어요. 돈으로 안 되는 게 어디 있어? 축복? 돈이 복이에요. 복 있는 사람은 날마다 돈을 버는 사람. 이래야 자기가 쓰는 시편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고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이걸 바꾸고 싶어. 돈 있는 사람은 지 쓰고 싶은 대로 쓰는. 

마음은 충동은 복 있는 사람은 지 하고 싶은 대로 한다 해놓고, 억지로 읽으려 하니까 찡그려가면서 읽고 오늘도 시편 공부했으니까 진짜 내가 원하는 걸 주셔야 된다고 떼쓰고. 자기 한에 맺혀서. 내가 시편 공부했으니까 내 한은 풀어줘야 되지 않습니까. 왜? 나 여기 있으니까. 우리는 모든 진리를 내가 여기 있음부터 출발해서 진리라고 규정하는 거예요. 내가 원하는 걸 진리라 하는 겁니다. 

버스 타고 오다보니까 여자 사장과 직원들이 몇 명이 사무실에 물건을 옮기는 광경을 봤어요. 저 사장님은 사업을 하는 이유가 뭘까? 복음을 위해서? 절대로 그런 생각 안 들어요. 살기 위해서. 그러면 살아가는 주체가 누구냐? 본인이죠. 본인이 살만한 사람인지 죽어 마땅한 사람인지 그 사람이 사업하기 전에 그걸 다 정하고 난 뒤에 했을까요? 그런 걸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했지요. 

사람이 어떤 일을 하는 것은 할 짓이 없어서 그 일을 하는 거예요. 농사짓는 사람은 그것 아니면 할 짓이 없어서 하는 거예요. 사업하는 사람도 마찬가지고. 국가를 위해서 공무원 준비하는 사람들 거의 없어요. 역시 60세까지 근무하고 연금 받고 사는 것은 공무원이 최고더라. 자기를 위해서 공무원 하는 거예요. 국가와 국민에서 봉사한다는 말을 날려야 자기 사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에 그런 멘트를 장착할 뿐입니다. 전부 다 미친 사람이에요. 

대외적으로 원하는 것과 돈을 벌려면 남이 요구하는 걸 해줘야 되잖아요. 남들이 요구하는 것과 내가 원하는 것과 안 맞으니까 인간이 찢어지는 거예요. 찢어지면서 계속해서 내 욕구와 욕망과 충동이 작동이 되는데 충동이 아까 실패하면서 만족이 있어야 되는데 충동과 욕망이 오는데 너무 피곤하게 되면 자살로 이어집니다. 살려고 그렇게 애썼는데 이제는 끄집어낼 거짓말이 바닥이 났을 때는 죽는 게 최고 편해요. 그래서 자살하는 거예요. 더는 거짓말 못하겠다. 더는 인 척하지 못하겠다. 가식과 기만의 솜씨가 바닥났어. 그래서 죽는 겁니다. 

법은 요구하는 게 있습니다. 생명이 없는 선악과를 따먹지 못한 자에게 법이 온 거예요. 가만있는데 법이 온 거예요. 그런데 법에 마중 나온 인간들은 딱 걸렸어요. 이 법에 살면 지금 내가 사는 방식 그대로 더 오랫동안 번창하고 아무 하자 없이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여기고 그 법을 덥석 잡은 겁니다. 그들이 누구냐? 이스라엘 사람들. 그들은 다 망했습니다. 

십계명을 주고 법을 준 이유가 애굽에 살던 속성이 그들은 지리적으로 애굽이란 땅에서 광야로 나왔을 뿐이지 그들의 존재의 위치는 여전히 애굽 사람이에요. 애굽 사람에게 율법이 왔으니까 살려고 지키는 율법이 도리어 그들을 더욱 더 죽게 만들었지요. 

정리해봅시다. 하나님께서 법을 주셨다. 인간들은 기본적으로 나는 살아야 한다. 이유가 뭐냐? 살아있기 때문에. 절대 안 죽었어요. 법이 하늘로 주어집니다. 저것 지키면 내가 희망하는 그 낙원, 살더라도 행복하게 살 수 희망은 저 법에 달려있다. 법을 지키자. 십계명 지키자. 만약에 십계명 안 지키면 저주 받아서 사는 데 더 힘들어지고 나한테 손해가 되고 이득이 오지 않고. 만약에 법을 지키면 이득이 되면서, 이득이 된다는 것은 남이 아니라 내가 살고 싶으니까 나한테 이득이 된다고 잡는 겁니다. 

그런데 이 법이 누구한테 주어지느냐 하면 중간에 예수님한테 주어집니다. 출애굽기에선 어린양한테 주어집니다. 중간에 가로채기 한 겁니다. 법이 인간에게 주어졌을 때 법은 인간에 본래 담겨있는 괴물적이고 악마적인 품성을 법이 노출시킨 겁니다. 법의 핵심은 십계명이 아니에요. 법의 핵심은 제사법이에요. 제사법은 죽음을 다뤄야 할 법이에요. 죽음을 다루니까 그 죽음은 귀한 죽음이겠지요. 그 귀한 죽음에 어린양이 들어갑니다. 양, 소가 들어가지요. 

그렇다면 애굽에 있을 때 그 법을 준 게 아니고 애굽에서 어린양을 통해서 나왔잖아요. 어린양 잡으면 죽음의 사자가 그냥 넘어간다는 아이디어를 그 당시 히브리인들이 지어낸 겁니까?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이 준 거지요. 사람들이 참 기본이 안 된 게 뭐냐 하면, 하나님 쪽에서 뭔가 내려오게 되면 그 결과가 하나님 쪽으로 회수된다는 당연한 논리를 생각하지 못해요. 하나님 쪽에서 나한테 귀결되도록 마감되도록 줬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나는 중간과정으로 거쳐서 주께서 간다는 생각을 못하는 거예요. 주로부터 와서 주로 말미암아 주께로 간다는 생각을 못하고 자기 좋으라고 줬다는 거예요. 그것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을 때 주님의 취지를 몰라서 그래요. 주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왜 쫓아냅니까? 낙원에 있는 두 나무는 너 먹으라고 준 나무가 아니란 말이죠. 생명나무도, 선악과나무도 먹으라고 준 나무가 아니에요. 

동산 중앙은 우주의 중심이에요. 우주의 중심에 있는 두 나무 선악과와 생명나무는 따먹으면 안 돼요.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생명나무가 따먹을 수 없는 나무인 것이 들통 났지요. 선악과 따먹었으니까 생명나무 허용할게. 이게 아니에요. 선악과와 생명나무는 서로 내부적으로 연결돼있어요. 선악과 따먹기 전에는 그걸 몰랐지요. 알 수가 없는 거예요. 인간은 바보라니까요. 

인간은 처음부터 바보가 된 이유가, 자기중심이 아니었음을 모르기 때문에 바보가 된 거예요. 내 중심으로 살면 사는 게 아니고 죽는 짓이란 사실을 아직도 모르고 있는 게 바보에요. 강정화든 문재인도 마찬가지고. 박근혜도 마찬가지고. 최순실도 마찬가지고. 세상에 유명하다는 자들은 죽은 자들이 유명해요. 정작 자기가 죽은 자라고 아는 사람은 인기가 없어서 별 유명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예수란 사람이 역사책에 안 나와요. 나중에 후대에 나오지 그 당시에 그렇게 유명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에게는 순수과거가 아니고 그냥 현재가 되면 사라질 과거에요. 없어질 과거에요. 주님이 의도한 거예요. 그걸 사라지는 매개자라 합니다. 왔다가 빠져버리는 겁니다. 여기서 이분이 하나님의 아들이거든요. 

제가 질문할게요.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바치라 해서 바쳤지요. 그러면 아브라함 있고 아들 있고 장작 준비하고 칼, 불 준비했을 거예요. 이삭의 입장에서는 제물이 빠져있지요. 그런데 아브라함 입장에서는 다 마련돼 있어요. 빠진 게 없어요. 그러니까 아브라함과 이삭 사이에 대화가 소통이 안 된다는 말은 각자 자기중심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아버지 입장에서 이삭은 죽어야 될 자로 보지만 이삭 본인의 입장에서는 절대로 죽을 이유가 없는 거예요. 

그것이 아브라함언약 안에 신앙 안에 이질적인 두 요소가 함께 들어가 있는 겁니다. 똑같은 아브라함 제사를 드리면서도 동행하면서도 주님이 우리를 보는 것과 내가 주님을 보는 것과 주님이 원하는 이미지가 아니고 내가 살려는 이미지로 주님 이미지를 억지를 붙이니까 우리는 예수를 믿는 게 아니고 예수란 이미지를 경유해서 나 자신의 믿음을 믿는 게 된다니까요. 교회에서 복음을 전하면 뭐합니까? 복음 믿는 나를 믿는데. 

제가 던지는 질문은 이겁니다. 거기에 아브라함의 제사에서 사라지는 매개자가 누굽니까? 그건 아브라함도 몰랐고 이삭도 몰랐고. 바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사전에 알려주지 않은 정보가 있었어요. 타이밍 맞추어 수풀에 양이 잡힌다는 그 내용은 없어요. 이걸 가지고 주님이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바꿀 때는 사라지는 매개자가 다녀가야 돼요. 

히브리인들이 애굽을 나오려면 그냥 나오면 안 돼요.
사라지는 매개자가 다녀가야 돼요. 그게 어린양이에요.
그 어린양을 제사법을 통해서 광야에서 계속해서 상기시키고 반복하는 겁니다.
매일같이 제사를 드리는 겁니다. 귀한 죽음이에요.
왜 귀한 죽음이냐? 거기는 실체가 없기 때문에.
그냥 낯선 죽음만 남기도 떠나버리면
우리는 매일같이 죽음에서 주님 보시기에 죽은 자에서 산 자로 매일같이 교체가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 시간은 흐르지 않아요. 순수과거기 때문에.
이미 우리는 완료된 정지된 시간 속에서 반복적인 모습으로 죽을 때까지 죄만 짓는 사람들이에요.
기쁘게 죄만 지을 수 있는 이유가, 이미 그 죄에 대한 값은 우리 앞에 마주하고 있고 같이 있기 때문에.
주님이 다 용서했다는 십자가, 순수과거로써 온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죄인이라는 순수과거로 같이 짝을 이루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한윤범  (IP:14.♡.134.10) 17-07-14 10:03 
20170711b 부산강의 : [시편]2(1편)-율법의 등받이 
(강의:이근호 목사) 


법이 주어진 것은 생명 자체가 법 안에 있기 때문에 그렇거든요. 법이 생명이 이렇다는 걸 보여준단 말이죠. 보여주게 되면 인간들은 오해해서 현재 있는 내가 생명인 줄 알고 넙죽 받지요. “이것 주셨으니까 지켜서 천국 가야지. 영생의 나라 가야지.” 그런데 그것이 갑자기 가로채서 주님한테 가져갑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법의 완성은, 내가 법을 다 지켜서 결과적으로 영생의 나라에서 헤엄치는 사람 되지만 이 땅에서 주님이 법을 지킨 마지막 모습은 저주받은 모습이지요. 신기하죠. 법은 지켰는데 그 완성은 뭐라고요? 십자가 죽음이라니. 

법대로 주어진 어린양이 생글생글 웃으면서 “주인님, 저와 손잡고 있으면 죽음의 사자가 올 거예요. 그러면 ‘어? 양이 함께 있네. 그냥 넘어가야지’ 이렇게 넘어갑니다.” 어린양이 그런 식으로 이야기했던가요? 아니죠. 양을 죽여서 문지방, 문설주에 칠을 해야 넘어가죠. 그건 우리는 살기 위해서 하나님 찾는 것과 너무나 대비가 되고 대조가 되고 차이 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법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주님한테 하나님한테 문제 있는 것이 아니고 법에 문제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 자신에게 근원적으로 문제 있는 겁니다. 그래서 복음은 부활이 아니고 십자가입니다. 만약에 부활을 복음으로 이야기하면 우리가 원했던 겁니다. 십자가가 복음이 되면 우리가 절대로 원하지 않고 반대하고 기피했던 거예요. 배척한 겁니다. 왜냐하면 십자가 사건 자체가 바로 그런 사건이기 때문에. 

십자가 사건이 예수님이 혼자 이룬 사건이 아니고 제자들도 빠지고 가룟 유다는 적극 가담했고 바라바란 강도 대신 예수님을 죽이라고 했지요. 그러면 십자가 사건을 구성하는 모든 변수라든지 모든 구성요소는 한 결 같이 이구동성으로 “나는 저 사람이 우리한테 필요치 않다.”는 거예요. 요즘 교회로 말하면 교인들이 요구하기를 우리는 부활의 새 생명을 원하지 십자가는 원하지 않는다. 그것과 똑같은 거예요. 부활의 새 생명, 천국은 원하다. 하지만 십자가는 저리 가라. 

그게 오늘날 교회에서 적그리스도적인 행태가 교회란 이름으로 계속 반복되고 있어요. 오는 손님들이 그러니까. 십자가 그리워서 왔어요. 그런 교인 없어요. 십자가 또 듣고 싶어서 왔어요. 그런 교인들 있어요. 있다고 해야 돼. 있어요. 하지만 많진 않아요. 오늘도 십자가 앞에 또 죽기 위해서 왔습니다. 그런 있는데 우리교회는 많아요. 여기도 있을 거고. 바깥엔 거의 없어요. 

“교회 왔으니까 이번 주에 계약하는데 행운이 찾아오기를 원합니다. 그것 노리고 오는 겁니다.” 왜냐하면 본인이 그렇게 하고 싶은 게 아니고 그 사람 속에 악마적인 충동이 나는 무조건 손해 보면 안 되고 앞으론 더 잘돼야 된다는 게 감출 수 없는 충동입니다. 욕망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두 번째 시간은 첫째 시간보다 많이 어려워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다 이룬 거예요. 이 용어를 쓰는 것을 여러분이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보편성이라는 것. 예수님이 죽으신 곳이 이 땅에서 죽으셨잖아요. 땅의 성질, 땅의 본질,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이 미처 모르는 땅이 있어야 될 이유, 이것은 예수님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반대하고 예수님을 공격하는 권세가 자리 잡고 있는 곳이 바로 땅이라는 거예요. 

이런 이야기가 인간들에게 안 먹히는 겁니다. 왜? 인간은 보는 것이 전부고 보는 것의 극대화가 과학이라는 겁니다. 물론 양자물리학은 보이지 않는 것까지 추리해서 수학적으로 확률로 계산해서 끄집어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수학적인 모든 것이 우주적인 근거가 있어야 돼요. 빅뱅이라든지 무슨 근거가 있어야 된단 말이죠. 

인간이 무엇인지 과학적으로 추궁을 합니다. 추궁해보니까 인간이 호모사피엔스라는 거예요. 인간을 호모사피엔스라고 번역하는 의도가 뭐예요? 진짜 인간, 인간의 뿌리, 인간의 근원부터 하게 되면 현재 인간이 모르는 것은 더욱 더 많이 알 수 있다고 보는 겁니다. 호모사피엔스는 유인원의 한 줄기거든요. 인류의 근원은 스마트폰 시장과 마찬가지에요. 새로운 모델이 나오면 그 모델 중에서 인기 있는 모델만 계속 살아남는다. 이게 진화론적 사고의 논리입니다. 

결과적으로 호모사피엔스가 살아남았으니까 본인이 선택하지 않았으니까 자연선택이라 합니다. 자연이란 말에 신을 집어넣고 싶은 마음이 없어요. 하나님의 선택으로 인간이 됐다는 말을 왜 못하느냐 하면, 하나님을 집어넣으면 하나님이 인격자가 되거든요. 인격자 되는 신이 호모사피엔스란 인간을 만들었으니까 그 다음부터 인간의 근원이란 신과 인간의 공통성을 배제하고서는 안 된다는 논리가 생겨버려요. 

그러면 과학은 인격성을 배제해야 되는데 인격성을 집어넣으니까 생물학, 현대진화론 자체가 안 되니까 신을 잘라버리자. 신의 자리에 자연을 집어넣은 거예요. 자연선택. 자연은 인격성이 없으니까. 결국 과학은 자연이 먼저 있고 인간이 됐다는 말 아닙니까. 그러면 자연은 어디서 나왔는데? 과학은 그걸 자연스럽게 내려놔요. 

있는 데서 있는 게 나왔다. 그럼 그 있는 것은 어디서 나왔는가? 또 있는 데서. 이게 불교 아닙니까. 윤회설이거든요. 들뢰즈의 철학이 이거거든요. 니체철학이 이거에요. 영원영겁이다. 바다에 파도칠 때 물방울이 있지요. 물방울이 물방울로 남아있는 시간은 불과 1초도 안 될 거예요. 포말 있잖아요. 포말은 물에 속하지요. 

현대철학이나 과학은 물 자체를 자연으로 본다면 인생이란 포말, 물거품에 지나지 않아요. 잠간 있다가 없어져요. 현대과학이나 철학이 주장하는 것이 그겁니다. 따라서 어느 누구도 니 물방울보다 내 물방울이 더 낫다든지 더 세다든지 그럴 수 없다는 거예요. 이게 현대인들이 그렇게 되고 싶은 갖고 싶은 남들에 대한 대우입니다. 그러니까 대통령이라고 투표할 때 표 두 장 나오고, 거지라고 없고 이런 게 아니고 만인이 평등하게 한 표잖아요. 

1789년에 프랑스혁명이 존 로크의 사회계약설에서 나왔는데 미국의 독립혁명도 마찬가지고. 그 모든 것은 오직 개인이 될 경우에만 개인이 챙긴다는 거예요. 그걸 천부인권설, 하늘이 자연이 인간에게 넘겨줬다. 자기 이름으로 사인해야 계약이 되니까. 천부인권설 중에서 모든 인간을 함부로 건들지 마라. 왜? 하늘이 주신 인권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캐나다에서 이슬람 세입자가 있는데 주인이 전화해서 간다고 했어요. 캐나다 사람들은 집안에 신발 신고 들어가거든요. 약속한 시간에 마침 이슬람 사람이 기도하는 시간이었어요. 그러니까 기도하는 시간에 신발 신고 들어간 게 됐어요. 그것이 캐나다 인권위원회에 회부되어 1500만원 벌금 받았어요. 왜 상대방 종교를 무시하느냐고. 

네덜란드가 세계 최초로 개신교국가입니다. 동시에 동성애를 합법화시켰어요. 동성애가 남자지만 남자끼리, 여자지만 여자끼리 부부가 됨을 인정해달라는 거예요. 부부가 되면 주어지는 모든 정부의 혜택을 우리도 받을 권리가 있다는 겁니다. 그놈의 권리, 권리, 권리. 이런 걸 원하는 거예요. 이게 나 중심의 보편성이에요. 

이 말이 어렵다는 이유가, 보편성이란 원래 내가 없어져야 되잖아요. 말로는 자연선택이죠. 그러면 기독교인인 집주인이 이슬람교인 세입자가 기도하던 말든 신발 신고 들어가서 “무슨 짓이야. 오늘 계약하기로 돼있는데.” 이렇게 해도 그 사람 자유 아닙니까. 그러면 누구 인권 옹호해야 돼요? 남의 집에 신발 신고 들어가는 인권도 옹호해야 되잖아요. 왜 이슬람 인권만 옹호하고 기독교 인권은 인정 못해요? 내 집에서 시끄럽게 하지 마라. 기도하지 마라. 이 인권도 보호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인간은 자연선택이란 말을 하지만 사실은 그 안에 신이 있어요. 신이 누구냐 하면 인간의 협의체가 신이 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보편성이고 이게 신이에요. 다시 말해서 우리들이 납득이 되는 신, 아담의 후속으로 태어나서 납득되는 신은 무슨 신입니까? 아담의 속성대로 그걸 그대로 포장한 신, 우리가 하고 싶은 그 무엇도 누구도 질책하지 말고 권위로 간섭하지 말고 되어가는 대로 옹호해주는 신, 누구에요? 이 땅을 이미 장악하고 있는 신, 악마 아닙니까? 이 세상은 지옥이에요. 악마의 세계입니다. 그걸 예수님이 오시기 때문에 알아요.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이런 게 참 어려운데. 이슬람은 알라 신을 믿어요. 기독교인들은 원래 예수 믿어야 되는 하나님 믿어요. 하나님이나 알라나 번역하면 똑같거든요. 힌두교 신은 신을 믿어요. 이 세상에 신을 안 믿는 사람은 본인이 신이잖아요. 신이란 절대자입니다. 절대자를 없다고 하는 게 무신론자 아닙니까. 절대자가 없다고 하면, 절대자 있는지 없는지 그 판단을 누가 했어요? 절대자보다 더 센 자가 판단을 해야 되잖아요. 절대자가 누굽니까? 본인이 절대자인 거예요. 신이 없는 자가 없어요. 

이렇게 되니까 민주주의에서는 각자 믿는 신을 터치하지 말자고 된 거예요. 민주주의 이전에는 왕이 믿는 종교에 일방적으로 예속됐지만 이제는 그런 예속에서 벗어나서 각자 믿는 종교로 하자고 된 겁니다. 문제는 기독교에요. 기독교는 하나님 믿는 종교가 아니고 하나님이 앞장세운 종교거든요. 하나님이 아들을 앞장세웠다고. 신은 저 하늘에 있지만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어요. 예수님. 세례요한이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은 여호와를 말하는 게 아니고 자기 곁에 육신이 되신 하나님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 예수님이 이 땅에서 십자가에 죽었잖아요. 그러면 십자가에 죽은 예수를 우리가 소유할 수 있습니까? 소유가 안 되지요. 

다시 말해서 우리가 진짜 예수를 믿게 되면 우리는 이 땅에서 무신론자가 되는 겁니다. 왜? 전부 다 유신론이기 때문에. 성도는 하나님 없는 동네에 있어야 그게 성도에요. 하나님 있는 동네는 성도가 아니고 악마의 자식들이에요. 뱀의 새끼들입니다. 그걸 이야기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겁니다. 예수님 죽인 자들이 여호와를 믿었잖아요. 여호와가 없는 곳에 사는 자들이 성도에요. 

사울이란 사람은 여호와 믿었어요. 나중에 예수님 찾아오니까 사울이 바울 됐지요. 그 바울이 뭐라고 합니까? 내가 그리스도가 가르쳐주지 않았으면 이 복음을 몰랐다는 겁니다. 이 말은 자기가 있는 자리가 십자가 안에 있다는 겁니다. 십자가가 몇 평입니까? 좁아 미어터지겠다. 우리 공간 입장에서는 나라는 것이 중심이기 때문에 나 외에 몇 명 타면 안 올라가요. 어떤 면적을 가져요. 우리가 몸을 지탱하기 위해서 일정의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의 몸은 이 세상을 아까 보편성이라 했잖아요. 죄악의 보편성, 저주의 보편성으로 만들어버립니다. 그럼 이 안에 시간도 공간도 저주 요소로서 포함돼있어요. 그러면 주님 어디 계십니까? 하늘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는 게 아니라 너희 안에 있느니라. 그리고 하늘나라는 성령 안에서 의와 희락과 평강이라. 성령 안이 몇 평입니까? 한 평에 얼마 나갑니까? 

우린 무심코 질문하잖아요. 그 질문이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나의 신체를 휘감고 있는 우리가 이 땅에서 생존하기 위해서 배웠던 모든 요소들의 변수로서 둘둘 감겨 나오는 단어와 개념들이 나와요. 그런 언어들이 나온다니까. 그 언어에 나의 옛 생각, 옛 사람 요소가 실려서 나오는 거예요. 성경에 많은 단어가 나오잖아요. 원어든, 히브리어든 마찬가지에요. 시냇가 심은 나무가 과실을 맺는다. 그 과실 알지. 그걸 아는 이스라엘이 멸망했다니까. 과실나무를 심으면 과일이 열린다. 농사짓는 사람이나 안 짓는 사람이나 다 아는 이야기에요. 알고서 그들은 멸망했다니까. 

아브라함 자손들의 지옥 가요. 마태복음 8장에서 예수님께서 백부장에 하는 말이, 나라의 본 자손들은 다 쫓겨날 것이고 오히려 백부장이 그 자리에 가는 거예요. 영화관에서 지 자리 아닌데 앉아 있다가 쫓겨나면 우습거든요. 기차에서 7호차 인데 8호차에 앉아 있으면 나가야 되잖아요. 

아무리 한국교회에서 예수 믿고 천국 간다고 이야기해도 본인이 뭔가 달라진 요소가 있어야 되거든요. 본인이 전에는 내가 알던 그 하나만 알고 있다가 거기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성령을 통해서 새로운 토대, 새로운 환경, 내가 아는 시공간 말고 다른 시공간이 둘러 싸여 있다는 새로움이 주어지지 않으면 백날 앉아있어도 자리 비켜 줘야 됩니다. 그때야 부끄러워 이를 갊이 있으리라. 복음도 모르면서 왜 천국 가요? 

베드로가 예수님한테 삼년 동안 많이 배웠다고 어줍지 않게 따라간다 하니까 너, 어디 가는데? 주님 따라간다. 못 온다. 베드로라도 못 가요. 갈 수가 없습니다. 그만큼 베드로가 알았던 예수란 이미지는 엉터리 이미지고 그 당시 유대사회에서 통용되는 개념과 언어로 전달된 운반된 이미지로 완전 무장돼있어요. 예수라 하지만 그 예수는 제자들의 아는 예수가 아닙니다. 하늘에서 누가 높으냐? 그 정도 이야기가 성사 될 것 같으면 그건 하늘나라 잘못 안 거예요. 

엘리야와 모세는 알아요. 이미 죽었기 때문에. 그래서 엘리야와 모세는 예수님 만나고 언제 돌아가시느냐고 그 이야기했죠. 베드로, 야곱, 요한은 뭐라고 하는 거야, 무슨 소리하는 거야? 예수님 붙들고 죽는 이야기를 왜 하느냐 이 말이죠. 예수님과 제자들을 복음서에서 보게 되면 제일 납득이 되지 않는 것이 뭐냐 하면, 내가 죽어야 된다는 그 말을 제자들이 기피하고 있어요. 우리한테 자꾸 죽는다는 이야기하지 마세요. 

칠순잔치에 가족들 다 모아놓고 아버지가 한 마디 한다고 한 말이, “오늘밤에 나 죽을 거야.” 평소에 효도도 안 하던 게 아버지 그러시면 안 됩니다. 며느리는, “아버지 안 계시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요.” 돈 달란 말이지. “아버님 때문에 우리 손자들이 도움 받고 사는데. 아버님 돌아가시면 안 돼요. 오래 사셔야 돼요.” 그러면 둘째 아들은 넙죽 절하면서 요새 유행하는 무슨 탕 바치면서 “아버지, 제가 여기 인삼 준비했습니다.” 아버지가 하는 말이, “내가 죽어야 너희가 산다.” “아버님, 그런 말씀하지 마세요.” 이것과 똑같은 거예요. 소통이 안 돼. 

예수님이 죽어야 된다는 말은, 현재 네가 사는 동네나 내 앞에 열두 제자들 동네나 네가 이 동네를 알아? 네가 살고자 버티고 또 버티는 속성을 알아? 예수 아니면 모르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살고 싶어서 사는 게 아니고 성도는 주님께서 살게 하셔서 사는 거예요. 가만있는데 던져놓은 땅 값이 열 배 올라서 또 이십 년 더 살아야 돼요. 던져놓은 주식이 갑자기 백배 올라서 빌딩 하나 더 사야 되고. 

왜 사느냐? 죄 더 지라고. 96세까지 자살하지 말고 더 살라고 내가 오라고 할 때 오라고. 돈에 치어 죽든지 아니면 빚에 시달려 죽든지. 어쨌든 간에 살만큼 살란 말이죠. 자식들이 링거 뽑으면 지가 알아서 꼽고 살든지. 있는 돈 안 주고 요양사 서너 명해서 더 살든지. 어쨌든 간에 내가 부를 때까지 살란 말입니다. 

그래야 이 죄 때문에 주께서 순수과거, 내가 살고자 하는 나의 어설픈 미래상, 그건 살아봐야 맨 죽은 자리거든요. 우리는 죽음이 반복이거든요. 죽음의 반복이라도 그걸 살았다고 할 때 인생의 보람일 정도로 죄가 작동하고 있는 거예요. 너 죽으면 하나님도 없어. 하나님보다 네가 최고야. 우리는 이걸 절실하게 느껴야 되는 겁니다. 

하나님 믿고, 예수 믿어도 역시 그건 순차가 밀리고 그리고 나와 관련된 내 자식과 가족, 내가 평생을 공들여서 고생하고 눈물 질질 짜며 이뤘던 그것이 예수보다 더 중요하고 하나님보다 더 중요한 거예요. 찬송가 부를 때 부끄러운 줄 알아야 돼요. 주 예수보다도 귀한 것은 없네~ 4절 끝까지 부르시기 바랍니다. 예수의 기만자가 또 이 찬송을 부릅니다. 

그런데 나뿐만 아니고 다들 마찬가지니까. 그렇게 죄인을 부르러 오신 거예요. 죽을 때 부르는 게 아니고 이미 불렀어요. 이미 죄인으로 불렀기 때문에 이중적인 구조를 아는 사람은 성령 받은 사람이고, 이 사람은 영원히 영생 얻은 사람이고, 아니 영생 안에서 사는 사람이고 이게 없는 사람은 백날 복음 찾아 다녀도 지옥으로 갈 사람이에요. 

지금까지 한 걸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율법을 묵상한다는 말은, 율법은 나름대로 목적이 있었다. 그 목적은 인간들은 자기 살기 위해서 법을 받았지만 인간이 놓친 게 있었는데 내가 사는 이 세상과 환경은 에덴동산은 아니었다. 그럼 에덴동산 아닌데 우리 조상들은 살게 되었는가? 쫓겨나서 살았다. 쫓겨난 것에 억울해하지 말고 어떤 취지에서 어떤 원리와 법칙에 의해서 쫓겨나야 하는가? 

법이란 하나님이 살아있다는 천국과 인간이 사는 지상 사이에 얄팍한 경계선상에서 드러나지요. 이걸 사라지는 매개자, 왔다가 사라져버린, 그러면 율법도 접촉됐다가 사라져버려요. 이게 갈라디아서 3장에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고 난 뒤에 계속해서 믿음의 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430년 후에 율법이 주어져요. 율법이 주어진 것은 이 땅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느냐 하면,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받지 못하고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거예요.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 믿음이 뭐냐? 행함이 규정되지 않으면 믿음도 규정되지 않아요. 행함이 규정되려면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행하느냐? 행함은 율법과 연관돼있다는 것을 알려줘야 돼요. 율법과 연관되어 사람은 평소에 하는 것이 자기 안에 있는 양심 속의 법 요소, 법의식, 법에 대한 개념 없이는 행동하지 않겠다는 사실을 율법이 옴으로써 구체화돼요. 모든 행함은 율법과 관련돼있구나. 그런데 율법에 관련된 행함으로는 지옥 간다. 저주받는 거예요. 그래서 율법으로는 죄밖에 없으니까 믿음으로 의롭다는 것이 율법 이전에 세워진 하나님의 원칙이 맞기는 맞는구나, 라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이 지옥 같은 데서는 행함으로 빠져나올 수 없어요. 

그러면 율법의 행함을 내부적으로 촉구하는 세력이 있는데 그 세력을 적그리스도. 십자가를 반대하는 거예요. 마귀가 십자가를 반대하는 것은 십자가 안에 뭐가 들어있다는 알기 때문에 그래요. 십자가 안에 뭐가 들어있습니까?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게 들어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게 로마서 1장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으니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그 믿음이 내 믿음을 믿는 게 아니고 그 믿음의 내용은 예수님의 행함이 채워요. 예수님의 행함은 어떤 행함이냐? 예수님이 물 위 걸은 것? 아니요. 그것 믿어도 소용없습니다. 산상설교? 아무리 해도 소용없습니다. 

로마서 4장에서 예수님을 통해서 최종적으로 보여준 것은 그분이 죽었다가 다시 살은 거예요. 죄로 인하여 죽었다가 의로 인하여 살은 거예요. 로마서 5장에 들어가면 그게 세분화돼요. 내가 죄인을 위해서 죽었다가 의인을 위해서 살아난 거예요. 죄인을 위해서 죽었다가 죄인을 위해서 살아난 게 아닙니다. 의인을 위해서 살아난 거예요. 나를 살리기 위해서 구원하기 위해서 살아난 게 아니고 나를 조정해서 의의 결과물로 바꾸어서 의가 묻어있으니까 그 의를 바라보면서 나를 집어서 살려낸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의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행한 일은 죄가 되지만 그것이 십자가 안에서는 모든 행한 것이 의가 되게 한 요소로서 일어나야 될 죄를 하기 위해서 우리는 95살까지 살아야 돼요. 95살까지 살아야 된다고 해놓고 오늘밤에 죽는다면 무슨 저주받나 싶을 거예요. 계속 죄 짓는 이유가 죄가 의로 바뀌는 그 중간 매개자가 계속 찾아왔다 사라지고 다시 말해서 십자가만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는 죄에서 의로 바꿔져야 될 겁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자랑할 게 있다면 오직 하나밖에 없다. 부활? 승천? 재림? 아니에요. 십자가만 자랑한다. 왜? 순수과거기 때문에. 

그걸 의자의 등받이라 했지요. 순수과거가 나를 자꾸 떠미는 거예요. 95살, 백 살까지. 십자가가 미는 거예요. 떠밀지 마소. 자꾸 밀어내는 거예요. 자꾸 미니까 우리는 십자가에 바쳐서 계속해서 십자가 증거하기 위해서 살아야 되는 겁니다. 사나죽으나 주의 것으로서 사는 거예요. 이게 사도 바울이 갔던 길입니다. 나는 죄인 중의 괴수인데 등받이는 뭐다? 십자가, 십자가 앞에 죄인 되는 거죠. 

사도 바울 같은 경험을 가진 사람이 분명히 있을 거니까 그 사람들을 모집하기 위해서 모든 명령과 권면 안에 십자가를 깔아놓고 하는 거예요.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다, 라고 던지면 인간들은 뭐라고 합니까? 그러면 나는 천국 못 갑니다. 도대체 나는 돈을 미워할 자신 없습니다. 그때 그 말이 주어졌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그들의 죄인 되었고 입는 것, 먹는 걸로 족하지 않고 다른 걸 원한다는 사도 바울 말 앞에 죄인 돼버려요. 죄인으로 드러나게 하신 그 말씀이 십자가 복음이 깔려있는 채로 자기 사람 모집에 나선 겁니다. 성도를 찾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 바울이 전도할 때 근거가 뭐냐 하면, 혹시 이 성에 영생 주기로 작정된 자가 있는지 해서 자기가 왔다는 거예요.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게 아니고 영생 주기로 작정한 사람, 믿기로 작정된 사람이 있는가 싶어서 왔기 때문에 내가 날리는 멘트는 복음이고 주님의 복음만 전하지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전하지 않는다. 그게 갈라디아서 편지에 나와요. 갈라디아에 사도 바울이 설교하러 간다면 무슨 내용이 나오겠습니까? 갈라디아서 내용이 나오겠지요. 우리는 좋아요. 우리는 갈라디아서를 보면서 사도 바울을 지금 마주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 배후에는 주님의 보편성이 있고. 그리고 예수님이 여기 말씀으로 계시다. 

시편을 보면서, 진짜 어려운 건 하지도 않았어요. 여러분 표정들 보니까 이런 건 다 아는 이야기인데. 다 아는 이야기부터 출발해야 돼요. 더 깊이 있게 들어가려면. 처음에 인간을 만들 때 아담을 먼저 만들었지요. 아담이 사람일까요, 남자일까요? 처음에는 오직 한 사람밖에 없어요. 사람으로 만들어졌어요. 남자로 느껴질 때는 언제냐 하면, 자기 몸에서 여자가 등장하면서 비로소 자기는 남자가 되는 겁니다. 남자와 여자 둘인데 한 몸이니까 누가 봐도 두 몸이 하나로 이어지는 관계가,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는 내용이 여기에 담겨있다고 보시면 돼요. 

남녀가 사귀는 것과 부부의 차이점이 뭘까요? 사귀는 것은 언제든지 헤어질 수 있어요. 요새는 부부도 헤어지기 일쑤지만. 그러나 남자와 여자가 되면 헤어지기가 뭐해요. 서로가 제삼의 요소가 연결시키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 되게 했던 느낌이 들어요. 이것 때문에 결혼한 남자/여자는 안심이 되고 둘 다 살찌기 시작하는 겁니다. 완료가 돼서 뭐 걱정할 게 없기 때문에. 아쉬운 걸 서로 상대방이 공급하기 때문에. 

인간 속에 이 요소를 이야기하는 이유가, 법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법이란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 제일 깊숙이 들어있는 요소가 법이란 형태로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법으로만 주어지기 이전에 아담이란 인간이란 피조물에 들어있다는 걸 설명해드리는 겁니다. 어려운 논리는 치우고 결과적으로 아담이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남자가 여자를 살립니까, 여자가 남자를 살립니까? 뱀과 싸우는 것은 여자의 후손이라고요. 그럼 남자는 왜 필요하냐? 이 말은, 남자는 착각하기 위해서 필요해요. 남자에서 여자가 나왔기 때문에 여자는 나의 소유물이라는 착각을 해요. 

그리고 여자가 할 일은 남자가 원하는 대로 소유물 되게 되는 거예요. 이 땅에서 여자는 없어요. 마이너스 남자라 하는데 남자의 일부로서 여자뿐이에요. 여장부란 말 자체가 남자다운 거예요. 여자는 여자 자체로 모델이 없어요. 남자가 모델이에요. 여자가 나도 저 남자처럼 하고 싶은 데로 했으면 좋겠다고 남자의 모습이 원래 자기 모습인 양 생각하도록 남자가 행동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했고. 남자가 먼저 있고 여자를 만들었으니까 여자는 남자의 배필자로 있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이게 착각이라 했지요. 남자의 착각은 세상 모든 것은 남자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이 착각에 여자가 약해서 말려준 거예요. 그러니까 남자는 돛대 같지요. 지가 모든 걸 다 갖고 있고 모든 걸 다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인간을 구원할 때 어떻게 하느냐? 이미 보편화된 남자 중심이에요. 남성 보편화를 군데군데 금이 가고 균열되고 깨져야 됩니다. 남자는 껍질이니까. 죄 짓고 난 뒤에 뱀이 요소가 들어오면서 인간이란 허수아비가 돼버렸어요. 가인이 동생을 죽이고 싶어 한 게 아닙니다. 어느 날 멍하니 있는데 죄가, 악마가 들어와서 “동생 보니까 화나지? 너는 죽일 수밖에 없어요. 암 죽여야 하고말고.” 죽였어요. 모든 인간은 정신병자입니다. 지가 원하는 대로 살아가지 않아요. 악마의 소리를 듣고 따라서 움직이는 겁니다. 악마의 소리는 행함이라 했지요. 행함은 저주받을 조항, 법과 관련돼있어요. 법이 많잖아요. 많은 행동을 할 때 뭘 지키라 하면 사람들은 지키는 거예요. 

쉽게 하는 겁니다. 48∻6=8이죠. 나머지가 없지요. 49∻6=8, 나머지 1 나오죠. 인간을 법을 이해할 때 나머지 없는 걸 법을 지킨 것으로 봐요. 그런데 하나님의 법은 반드시 나머지가 있어요. 나머지가 말썽을 일으켜요. 예를 들어서 간음하지 말라는 법을 지키는 방법은 유대인들은 바람 안 피우면 간음을 안 한 거예요. 그들은 나머지가 없어요. 주님께서 간음죄를 마음까지 집어넣어서 마음속에 음란 품으면 간음죄가 되어 남아있는 간음죄가 되는 겁니다

남자가 여자를 볼 때마다 음욕이 일어나지요. 남자나 여자나 마찬가지지만 사람으로 하여금 간음죄를 이미 짓고 있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주께서 법을 마주치게 만드는 겁니다. 그럼 인간은 바람 안 피웠다고 하겠지요. 바람 안 피우고 지옥 갑니다. 바람 피워서 천당 가란 말이 아니에요. 바람은 분명히 안 피웠는데 영문도 몰라요. 바람 안 피우고 어릴 때부터 십계명을 다 지켰는데 부자 청년처럼 주님께선 나머질 준다고요. 모든 걸 팔아 가난한 자에 주라. 그건 십계명에 안 들어있는 계명이에요. 난 못 지킨다고 나온 거예요. 주님과 헤어져 지옥 간 거예요. 

여러분이 그런 교회를 안 다니지만 어떤 목사가 말씀대로 사세요. 말씀은 폼으로 있는 게 아니라 지키라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이 가난하고 여러분이 일이 안 되는 것은 말씀을 안 지켜서 여러분을 징계하기 위해서 말씀을 준 겁니다. 그러니까 말씀을 지키면 징계가 풀리고 복 받습니다, 라고 이야기하는 교회 가거든 그 목사한테 이야기하세요. 너는 그대로 지키느냐고 물어보세요. 이름을 대한예수교 지옥 가는 교회입니다. 

바리새인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행위를 재현하고 있어요. 그런데 그런 교회 교인들이 많아요. 교인들 각자 마음속에 나머지 없이 딱 떨어지는 법 지켜서 그걸 의로 근거로 해서 내가 앞으로 잘되기 위해서 복 받기 위해서 한 거예요. 그리고 그런 교회에서 심방 갈 때 잘도 인용하는 것은 복 있는 자는 악인의 꾀를 쫓지 않는 이 대목입니다. 왜?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쫓아 과실을 맺으니까. 

심방 끝나고 난 뒤에 과실의 의미는 각자 본인들이 얼마나 생각하는지. 아들 낳는 과실, 빌딩 값 올라가는 과실, 온갖 과실을 지가 일방적으로 만들어놔요. 그래놓고 하는 말이 나는 말씀대로 믿는다. 목사님 말씀하신 시편 1편을 믿어요. 말씀대로 주야로 묵상하는 자다. 묵상하는 것을 큐티로 봐요. 큐티하게 되면 과실을 맺는다는데 누가 안 하겠습니까? 행함으로 복 받는데 누가 안 하겠어요. 큐티는 안 빠지고 열심히 하지요. 바로 그런 동네에서 우리가 살고 있었습니다. 

죄 지으라고 주신 말씀으로 우리는 의인 되어 복 받기 위해서 내가 잘 되기 위해서 이 말씀을 반대로 해석한 거예요. 해석을 거꾸로 해야 돼요. 이 땅에서 누가 말씀을 제일 못 지켜서 저주받았는가? 그 입장에서 해석해야 돼요. 이런 인간이라 작살났구나. 그 자리에 우리가 합류하면 돼요. 그게 말씀 주신 목적입니다. 내가 가장 말씀 못 지킨 자리에요. 

남자 중심이니까 여자가 복속돼있으니까 여자가 그러고 싶어 하니까 남자가 여자를 지배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여자 쪽에서 균열을 일으켰습니다. 여자가 남자가 하는 행세를 다 알아버려요. 여자의 특징은 남자를 다 안다는 것이고, 남자는 무식함은 여자에 대해서 모르고 있다는 거예요. 남자가 여자를 볼 때 다 모르는 이유가, 새로운 게 자꾸 나와요. 새로운 면이 나와요. 

남자에서 여자 나왔잖아요. 주님께서 방향을 반대로 해서 구원의 과정을 만든 겁니다. 여자의 후손에서 남자를 보니까 남자는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뱀한테 잡혀있는 거예요. 그런데 뱀한테 잡혀있는 남자 안에 여자가 잡혀있는 거예요. 힘이 없으니까. 그래서 여자는 남자를 이용하고 남자는 여자는 내 손에 있다고 착각하고. 누가 바봅니까? 착각하는 쪽이에요, 이용하는 쪽이에요? 여자가 똑똑한 거예요. 그래서 유명 아이돌 남자한테 아가씨가 몸 줘놓고 성폭행 당했다는 것이 거기에 있습니다. 남자는 꽃뱀인 줄 뻔히 알면서도 받아들여요. 남자는 등신이니까. 지 욕정을 지 마음대로 못해요. 

왜 여자의 후손을 통해서 하느냐 하면, 여자는 자기 자신이 망가졌다는 걸 알아요. 그런데 남자는 기고만장해요. 남자들이 술 먹고 하는 이야기가, “걱정하지 마. 내가 있잖아. 너 하나 밥 못 먹여줄까.” 이런 소리 하거든요. 여자가 수입이 더 많음에도 큰소리치는 이유가 거기 있어요. 물론 이런 이야기를 특정 남자/여자로 하면 안 돼요. 왜냐하면 남성형 여자, 여성형 남자가 있기 때문에 특정할 수 없지만 하나님 관점에서 볼 때 남자를 먼저 만들고 여자를 만들었다는 것은 나중 만들어진 소위 남자에게 지배받는 성경에 보면 여자로 남자를 사모하게 만들죠. 사모하게 만든 연약한 여자가 남자를 살리고 뱀까지 이기는 작용이 여성을 통해서 일어나는 겁니다. 

마리아가 그렇고, 한나가 그렇고. 일은 남자가 다 해놨다고 거들먹거렸는데 실제로는 숨어있는 이름도 없는 여자가 그렇게 해요. 사사기에 나오지요. 여자 사사 드보라, 드보라 전쟁할 때도 여자가 나오지요. 형사 가젯트 같아. 모자에 팽이만 돌리면 뭐합니까? 개 끌고 있는 소녀가 일은 다하는데 지가 형사라고 대우받고. 바로 그러한 약한 여자의 모습으로 예수님은 이 땅에 왔습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신앙생활 잘한다고 남자 같은 성격으로 영광을 받지만 모든 것은 숨어있는 것이 하지요. 

시편에서 과실을 맺는 것은 사라지는 매개자, 주께서 이미 과실을 맺게 했어요.
그런데 본인이 과실이면서도
옛날 죄 된 행실이 있어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이 남들처럼 못 살아서 환장한 옛사람이 계속 나오는 거예요.
우리 죄가. 이미 우리 자신이 성령의 열매인데 십자가 꽂혔으면 완전히 다 이뤘는데
우리는 추가적으로 남들처럼 살았으면 좋겠다는 그러한 못된 성질,
우리는 그 말씀을 보면서 이 말씀의 완성은 주께서 이루시고 그 완성에 우리를 집어넣었다는 것을 아는 이 사람이
오늘 본문에서 복 있는 사람이에요.
그것이 바로 산상설교에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복되다는 것과 연관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율법에 대해서 생각해보았습니다. 참 죽은 세상에 살면서도 마치 우리가 산 사람처럼 더 살아야 된다고 우겼던 이 잘못, 이 헛짓 때문에 또다시 주께서 십자가 못 박혀 죽어야 된다는 사실을 우리가 상기하고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