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711b 부산강의 : [시편]2(1편)-율법의 등받이 (강의:이근호 목사)
법이 주어진 것은 생명 자체가 법 안에 있기 때문에 그렇거든요. 법이 생명이 이렇다는 걸 보여준단 말이죠. 보여주게 되면 인간들은 오해해서 현재 있는 내가 생명인 줄 알고 넙죽 받지요. “이것 주셨으니까 지켜서 천국 가야지. 영생의 나라 가야지.” 그런데 그것이 갑자기 가로채서 주님한테 가져갑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법의 완성은, 내가 법을 다 지켜서 결과적으로 영생의 나라에서 헤엄치는 사람 되지만 이 땅에서 주님이 법을 지킨 마지막 모습은 저주받은 모습이지요. 신기하죠. 법은 지켰는데 그 완성은 뭐라고요? 십자가 죽음이라니.
법대로 주어진 어린양이 생글생글 웃으면서 “주인님, 저와 손잡고 있으면 죽음의 사자가 올 거예요. 그러면 ‘어? 양이 함께 있네. 그냥 넘어가야지’ 이렇게 넘어갑니다.” 어린양이 그런 식으로 이야기했던가요? 아니죠. 양을 죽여서 문지방, 문설주에 칠을 해야 넘어가죠. 그건 우리는 살기 위해서 하나님 찾는 것과 너무나 대비가 되고 대조가 되고 차이 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법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주님한테 하나님한테 문제 있는 것이 아니고 법에 문제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 자신에게 근원적으로 문제 있는 겁니다. 그래서 복음은 부활이 아니고 십자가입니다. 만약에 부활을 복음으로 이야기하면 우리가 원했던 겁니다. 십자가가 복음이 되면 우리가 절대로 원하지 않고 반대하고 기피했던 거예요. 배척한 겁니다. 왜냐하면 십자가 사건 자체가 바로 그런 사건이기 때문에.
십자가 사건이 예수님이 혼자 이룬 사건이 아니고 제자들도 빠지고 가룟 유다는 적극 가담했고 바라바란 강도 대신 예수님을 죽이라고 했지요. 그러면 십자가 사건을 구성하는 모든 변수라든지 모든 구성요소는 한 결 같이 이구동성으로 “나는 저 사람이 우리한테 필요치 않다.”는 거예요. 요즘 교회로 말하면 교인들이 요구하기를 우리는 부활의 새 생명을 원하지 십자가는 원하지 않는다. 그것과 똑같은 거예요. 부활의 새 생명, 천국은 원하다. 하지만 십자가는 저리 가라.
그게 오늘날 교회에서 적그리스도적인 행태가 교회란 이름으로 계속 반복되고 있어요. 오는 손님들이 그러니까. 십자가 그리워서 왔어요. 그런 교인 없어요. 십자가 또 듣고 싶어서 왔어요. 그런 교인들 있어요. 있다고 해야 돼. 있어요. 하지만 많진 않아요. 오늘도 십자가 앞에 또 죽기 위해서 왔습니다. 그런 있는데 우리교회는 많아요. 여기도 있을 거고. 바깥엔 거의 없어요.
“교회 왔으니까 이번 주에 계약하는데 행운이 찾아오기를 원합니다. 그것 노리고 오는 겁니다.” 왜냐하면 본인이 그렇게 하고 싶은 게 아니고 그 사람 속에 악마적인 충동이 나는 무조건 손해 보면 안 되고 앞으론 더 잘돼야 된다는 게 감출 수 없는 충동입니다. 욕망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두 번째 시간은 첫째 시간보다 많이 어려워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다 이룬 거예요. 이 용어를 쓰는 것을 여러분이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보편성이라는 것. 예수님이 죽으신 곳이 이 땅에서 죽으셨잖아요. 땅의 성질, 땅의 본질,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이 미처 모르는 땅이 있어야 될 이유, 이것은 예수님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반대하고 예수님을 공격하는 권세가 자리 잡고 있는 곳이 바로 땅이라는 거예요.
이런 이야기가 인간들에게 안 먹히는 겁니다. 왜? 인간은 보는 것이 전부고 보는 것의 극대화가 과학이라는 겁니다. 물론 양자물리학은 보이지 않는 것까지 추리해서 수학적으로 확률로 계산해서 끄집어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수학적인 모든 것이 우주적인 근거가 있어야 돼요. 빅뱅이라든지 무슨 근거가 있어야 된단 말이죠.
인간이 무엇인지 과학적으로 추궁을 합니다. 추궁해보니까 인간이 호모사피엔스라는 거예요. 인간을 호모사피엔스라고 번역하는 의도가 뭐예요? 진짜 인간, 인간의 뿌리, 인간의 근원부터 하게 되면 현재 인간이 모르는 것은 더욱 더 많이 알 수 있다고 보는 겁니다. 호모사피엔스는 유인원의 한 줄기거든요. 인류의 근원은 스마트폰 시장과 마찬가지에요. 새로운 모델이 나오면 그 모델 중에서 인기 있는 모델만 계속 살아남는다. 이게 진화론적 사고의 논리입니다.
결과적으로 호모사피엔스가 살아남았으니까 본인이 선택하지 않았으니까 자연선택이라 합니다. 자연이란 말에 신을 집어넣고 싶은 마음이 없어요. 하나님의 선택으로 인간이 됐다는 말을 왜 못하느냐 하면, 하나님을 집어넣으면 하나님이 인격자가 되거든요. 인격자 되는 신이 호모사피엔스란 인간을 만들었으니까 그 다음부터 인간의 근원이란 신과 인간의 공통성을 배제하고서는 안 된다는 논리가 생겨버려요.
그러면 과학은 인격성을 배제해야 되는데 인격성을 집어넣으니까 생물학, 현대진화론 자체가 안 되니까 신을 잘라버리자. 신의 자리에 자연을 집어넣은 거예요. 자연선택. 자연은 인격성이 없으니까. 결국 과학은 자연이 먼저 있고 인간이 됐다는 말 아닙니까. 그러면 자연은 어디서 나왔는데? 과학은 그걸 자연스럽게 내려놔요.
있는 데서 있는 게 나왔다. 그럼 그 있는 것은 어디서 나왔는가? 또 있는 데서. 이게 불교 아닙니까. 윤회설이거든요. 들뢰즈의 철학이 이거거든요. 니체철학이 이거에요. 영원영겁이다. 바다에 파도칠 때 물방울이 있지요. 물방울이 물방울로 남아있는 시간은 불과 1초도 안 될 거예요. 포말 있잖아요. 포말은 물에 속하지요.
현대철학이나 과학은 물 자체를 자연으로 본다면 인생이란 포말, 물거품에 지나지 않아요. 잠간 있다가 없어져요. 현대과학이나 철학이 주장하는 것이 그겁니다. 따라서 어느 누구도 니 물방울보다 내 물방울이 더 낫다든지 더 세다든지 그럴 수 없다는 거예요. 이게 현대인들이 그렇게 되고 싶은 갖고 싶은 남들에 대한 대우입니다. 그러니까 대통령이라고 투표할 때 표 두 장 나오고, 거지라고 없고 이런 게 아니고 만인이 평등하게 한 표잖아요.
1789년에 프랑스혁명이 존 로크의 사회계약설에서 나왔는데 미국의 독립혁명도 마찬가지고. 그 모든 것은 오직 개인이 될 경우에만 개인이 챙긴다는 거예요. 그걸 천부인권설, 하늘이 자연이 인간에게 넘겨줬다. 자기 이름으로 사인해야 계약이 되니까. 천부인권설 중에서 모든 인간을 함부로 건들지 마라. 왜? 하늘이 주신 인권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캐나다에서 이슬람 세입자가 있는데 주인이 전화해서 간다고 했어요. 캐나다 사람들은 집안에 신발 신고 들어가거든요. 약속한 시간에 마침 이슬람 사람이 기도하는 시간이었어요. 그러니까 기도하는 시간에 신발 신고 들어간 게 됐어요. 그것이 캐나다 인권위원회에 회부되어 1500만원 벌금 받았어요. 왜 상대방 종교를 무시하느냐고.
네덜란드가 세계 최초로 개신교국가입니다. 동시에 동성애를 합법화시켰어요. 동성애가 남자지만 남자끼리, 여자지만 여자끼리 부부가 됨을 인정해달라는 거예요. 부부가 되면 주어지는 모든 정부의 혜택을 우리도 받을 권리가 있다는 겁니다. 그놈의 권리, 권리, 권리. 이런 걸 원하는 거예요. 이게 나 중심의 보편성이에요.
이 말이 어렵다는 이유가, 보편성이란 원래 내가 없어져야 되잖아요. 말로는 자연선택이죠. 그러면 기독교인인 집주인이 이슬람교인 세입자가 기도하던 말든 신발 신고 들어가서 “무슨 짓이야. 오늘 계약하기로 돼있는데.” 이렇게 해도 그 사람 자유 아닙니까. 그러면 누구 인권 옹호해야 돼요? 남의 집에 신발 신고 들어가는 인권도 옹호해야 되잖아요. 왜 이슬람 인권만 옹호하고 기독교 인권은 인정 못해요? 내 집에서 시끄럽게 하지 마라. 기도하지 마라. 이 인권도 보호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인간은 자연선택이란 말을 하지만 사실은 그 안에 신이 있어요. 신이 누구냐 하면 인간의 협의체가 신이 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보편성이고 이게 신이에요. 다시 말해서 우리들이 납득이 되는 신, 아담의 후속으로 태어나서 납득되는 신은 무슨 신입니까? 아담의 속성대로 그걸 그대로 포장한 신, 우리가 하고 싶은 그 무엇도 누구도 질책하지 말고 권위로 간섭하지 말고 되어가는 대로 옹호해주는 신, 누구에요? 이 땅을 이미 장악하고 있는 신, 악마 아닙니까? 이 세상은 지옥이에요. 악마의 세계입니다. 그걸 예수님이 오시기 때문에 알아요.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이런 게 참 어려운데. 이슬람은 알라 신을 믿어요. 기독교인들은 원래 예수 믿어야 되는 하나님 믿어요. 하나님이나 알라나 번역하면 똑같거든요. 힌두교 신은 신을 믿어요. 이 세상에 신을 안 믿는 사람은 본인이 신이잖아요. 신이란 절대자입니다. 절대자를 없다고 하는 게 무신론자 아닙니까. 절대자가 없다고 하면, 절대자 있는지 없는지 그 판단을 누가 했어요? 절대자보다 더 센 자가 판단을 해야 되잖아요. 절대자가 누굽니까? 본인이 절대자인 거예요. 신이 없는 자가 없어요.
이렇게 되니까 민주주의에서는 각자 믿는 신을 터치하지 말자고 된 거예요. 민주주의 이전에는 왕이 믿는 종교에 일방적으로 예속됐지만 이제는 그런 예속에서 벗어나서 각자 믿는 종교로 하자고 된 겁니다. 문제는 기독교에요. 기독교는 하나님 믿는 종교가 아니고 하나님이 앞장세운 종교거든요. 하나님이 아들을 앞장세웠다고. 신은 저 하늘에 있지만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어요. 예수님. 세례요한이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은 여호와를 말하는 게 아니고 자기 곁에 육신이 되신 하나님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 예수님이 이 땅에서 십자가에 죽었잖아요. 그러면 십자가에 죽은 예수를 우리가 소유할 수 있습니까? 소유가 안 되지요.
다시 말해서 우리가 진짜 예수를 믿게 되면 우리는 이 땅에서 무신론자가 되는 겁니다. 왜? 전부 다 유신론이기 때문에. 성도는 하나님 없는 동네에 있어야 그게 성도에요. 하나님 있는 동네는 성도가 아니고 악마의 자식들이에요. 뱀의 새끼들입니다. 그걸 이야기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겁니다. 예수님 죽인 자들이 여호와를 믿었잖아요. 여호와가 없는 곳에 사는 자들이 성도에요.
사울이란 사람은 여호와 믿었어요. 나중에 예수님 찾아오니까 사울이 바울 됐지요. 그 바울이 뭐라고 합니까? 내가 그리스도가 가르쳐주지 않았으면 이 복음을 몰랐다는 겁니다. 이 말은 자기가 있는 자리가 십자가 안에 있다는 겁니다. 십자가가 몇 평입니까? 좁아 미어터지겠다. 우리 공간 입장에서는 나라는 것이 중심이기 때문에 나 외에 몇 명 타면 안 올라가요. 어떤 면적을 가져요. 우리가 몸을 지탱하기 위해서 일정의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의 몸은 이 세상을 아까 보편성이라 했잖아요. 죄악의 보편성, 저주의 보편성으로 만들어버립니다. 그럼 이 안에 시간도 공간도 저주 요소로서 포함돼있어요. 그러면 주님 어디 계십니까? 하늘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는 게 아니라 너희 안에 있느니라. 그리고 하늘나라는 성령 안에서 의와 희락과 평강이라. 성령 안이 몇 평입니까? 한 평에 얼마 나갑니까?
우린 무심코 질문하잖아요. 그 질문이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나의 신체를 휘감고 있는 우리가 이 땅에서 생존하기 위해서 배웠던 모든 요소들의 변수로서 둘둘 감겨 나오는 단어와 개념들이 나와요. 그런 언어들이 나온다니까. 그 언어에 나의 옛 생각, 옛 사람 요소가 실려서 나오는 거예요. 성경에 많은 단어가 나오잖아요. 원어든, 히브리어든 마찬가지에요. 시냇가 심은 나무가 과실을 맺는다. 그 과실 알지. 그걸 아는 이스라엘이 멸망했다니까. 과실나무를 심으면 과일이 열린다. 농사짓는 사람이나 안 짓는 사람이나 다 아는 이야기에요. 알고서 그들은 멸망했다니까.
아브라함 자손들의 지옥 가요. 마태복음 8장에서 예수님께서 백부장에 하는 말이, 나라의 본 자손들은 다 쫓겨날 것이고 오히려 백부장이 그 자리에 가는 거예요. 영화관에서 지 자리 아닌데 앉아 있다가 쫓겨나면 우습거든요. 기차에서 7호차 인데 8호차에 앉아 있으면 나가야 되잖아요.
아무리 한국교회에서 예수 믿고 천국 간다고 이야기해도 본인이 뭔가 달라진 요소가 있어야 되거든요. 본인이 전에는 내가 알던 그 하나만 알고 있다가 거기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성령을 통해서 새로운 토대, 새로운 환경, 내가 아는 시공간 말고 다른 시공간이 둘러 싸여 있다는 새로움이 주어지지 않으면 백날 앉아있어도 자리 비켜 줘야 됩니다. 그때야 부끄러워 이를 갊이 있으리라. 복음도 모르면서 왜 천국 가요?
베드로가 예수님한테 삼년 동안 많이 배웠다고 어줍지 않게 따라간다 하니까 너, 어디 가는데? 주님 따라간다. 못 온다. 베드로라도 못 가요. 갈 수가 없습니다. 그만큼 베드로가 알았던 예수란 이미지는 엉터리 이미지고 그 당시 유대사회에서 통용되는 개념과 언어로 전달된 운반된 이미지로 완전 무장돼있어요. 예수라 하지만 그 예수는 제자들의 아는 예수가 아닙니다. 하늘에서 누가 높으냐? 그 정도 이야기가 성사 될 것 같으면 그건 하늘나라 잘못 안 거예요.
엘리야와 모세는 알아요. 이미 죽었기 때문에. 그래서 엘리야와 모세는 예수님 만나고 언제 돌아가시느냐고 그 이야기했죠. 베드로, 야곱, 요한은 뭐라고 하는 거야, 무슨 소리하는 거야? 예수님 붙들고 죽는 이야기를 왜 하느냐 이 말이죠. 예수님과 제자들을 복음서에서 보게 되면 제일 납득이 되지 않는 것이 뭐냐 하면, 내가 죽어야 된다는 그 말을 제자들이 기피하고 있어요. 우리한테 자꾸 죽는다는 이야기하지 마세요.
칠순잔치에 가족들 다 모아놓고 아버지가 한 마디 한다고 한 말이, “오늘밤에 나 죽을 거야.” 평소에 효도도 안 하던 게 아버지 그러시면 안 됩니다. 며느리는, “아버지 안 계시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요.” 돈 달란 말이지. “아버님 때문에 우리 손자들이 도움 받고 사는데. 아버님 돌아가시면 안 돼요. 오래 사셔야 돼요.” 그러면 둘째 아들은 넙죽 절하면서 요새 유행하는 무슨 탕 바치면서 “아버지, 제가 여기 인삼 준비했습니다.” 아버지가 하는 말이, “내가 죽어야 너희가 산다.” “아버님, 그런 말씀하지 마세요.” 이것과 똑같은 거예요. 소통이 안 돼.
예수님이 죽어야 된다는 말은, 현재 네가 사는 동네나 내 앞에 열두 제자들 동네나 네가 이 동네를 알아? 네가 살고자 버티고 또 버티는 속성을 알아? 예수 아니면 모르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살고 싶어서 사는 게 아니고 성도는 주님께서 살게 하셔서 사는 거예요. 가만있는데 던져놓은 땅 값이 열 배 올라서 또 이십 년 더 살아야 돼요. 던져놓은 주식이 갑자기 백배 올라서 빌딩 하나 더 사야 되고.
왜 사느냐? 죄 더 지라고. 96세까지 자살하지 말고 더 살라고 내가 오라고 할 때 오라고. 돈에 치어 죽든지 아니면 빚에 시달려 죽든지. 어쨌든 간에 살만큼 살란 말이죠. 자식들이 링거 뽑으면 지가 알아서 꼽고 살든지. 있는 돈 안 주고 요양사 서너 명해서 더 살든지. 어쨌든 간에 내가 부를 때까지 살란 말입니다.
그래야 이 죄 때문에 주께서 순수과거, 내가 살고자 하는 나의 어설픈 미래상, 그건 살아봐야 맨 죽은 자리거든요. 우리는 죽음이 반복이거든요. 죽음의 반복이라도 그걸 살았다고 할 때 인생의 보람일 정도로 죄가 작동하고 있는 거예요. 너 죽으면 하나님도 없어. 하나님보다 네가 최고야. 우리는 이걸 절실하게 느껴야 되는 겁니다.
하나님 믿고, 예수 믿어도 역시 그건 순차가 밀리고 그리고 나와 관련된 내 자식과 가족, 내가 평생을 공들여서 고생하고 눈물 질질 짜며 이뤘던 그것이 예수보다 더 중요하고 하나님보다 더 중요한 거예요. 찬송가 부를 때 부끄러운 줄 알아야 돼요. 주 예수보다도 귀한 것은 없네~ 4절 끝까지 부르시기 바랍니다. 예수의 기만자가 또 이 찬송을 부릅니다.
그런데 나뿐만 아니고 다들 마찬가지니까. 그렇게 죄인을 부르러 오신 거예요. 죽을 때 부르는 게 아니고 이미 불렀어요. 이미 죄인으로 불렀기 때문에 이중적인 구조를 아는 사람은 성령 받은 사람이고, 이 사람은 영원히 영생 얻은 사람이고, 아니 영생 안에서 사는 사람이고 이게 없는 사람은 백날 복음 찾아 다녀도 지옥으로 갈 사람이에요.
지금까지 한 걸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율법을 묵상한다는 말은, 율법은 나름대로 목적이 있었다. 그 목적은 인간들은 자기 살기 위해서 법을 받았지만 인간이 놓친 게 있었는데 내가 사는 이 세상과 환경은 에덴동산은 아니었다. 그럼 에덴동산 아닌데 우리 조상들은 살게 되었는가? 쫓겨나서 살았다. 쫓겨난 것에 억울해하지 말고 어떤 취지에서 어떤 원리와 법칙에 의해서 쫓겨나야 하는가?
법이란 하나님이 살아있다는 천국과 인간이 사는 지상 사이에 얄팍한 경계선상에서 드러나지요. 이걸 사라지는 매개자, 왔다가 사라져버린, 그러면 율법도 접촉됐다가 사라져버려요. 이게 갈라디아서 3장에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고 난 뒤에 계속해서 믿음의 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430년 후에 율법이 주어져요. 율법이 주어진 것은 이 땅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느냐 하면,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받지 못하고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거예요.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 믿음이 뭐냐? 행함이 규정되지 않으면 믿음도 규정되지 않아요. 행함이 규정되려면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행하느냐? 행함은 율법과 연관돼있다는 것을 알려줘야 돼요. 율법과 연관되어 사람은 평소에 하는 것이 자기 안에 있는 양심 속의 법 요소, 법의식, 법에 대한 개념 없이는 행동하지 않겠다는 사실을 율법이 옴으로써 구체화돼요. 모든 행함은 율법과 관련돼있구나. 그런데 율법에 관련된 행함으로는 지옥 간다. 저주받는 거예요. 그래서 율법으로는 죄밖에 없으니까 믿음으로 의롭다는 것이 율법 이전에 세워진 하나님의 원칙이 맞기는 맞는구나, 라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이 지옥 같은 데서는 행함으로 빠져나올 수 없어요.
그러면 율법의 행함을 내부적으로 촉구하는 세력이 있는데 그 세력을 적그리스도. 십자가를 반대하는 거예요. 마귀가 십자가를 반대하는 것은 십자가 안에 뭐가 들어있다는 알기 때문에 그래요. 십자가 안에 뭐가 들어있습니까?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게 들어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게 로마서 1장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으니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그 믿음이 내 믿음을 믿는 게 아니고 그 믿음의 내용은 예수님의 행함이 채워요. 예수님의 행함은 어떤 행함이냐? 예수님이 물 위 걸은 것? 아니요. 그것 믿어도 소용없습니다. 산상설교? 아무리 해도 소용없습니다.
로마서 4장에서 예수님을 통해서 최종적으로 보여준 것은 그분이 죽었다가 다시 살은 거예요. 죄로 인하여 죽었다가 의로 인하여 살은 거예요. 로마서 5장에 들어가면 그게 세분화돼요. 내가 죄인을 위해서 죽었다가 의인을 위해서 살아난 거예요. 죄인을 위해서 죽었다가 죄인을 위해서 살아난 게 아닙니다. 의인을 위해서 살아난 거예요. 나를 살리기 위해서 구원하기 위해서 살아난 게 아니고 나를 조정해서 의의 결과물로 바꾸어서 의가 묻어있으니까 그 의를 바라보면서 나를 집어서 살려낸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의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행한 일은 죄가 되지만 그것이 십자가 안에서는 모든 행한 것이 의가 되게 한 요소로서 일어나야 될 죄를 하기 위해서 우리는 95살까지 살아야 돼요. 95살까지 살아야 된다고 해놓고 오늘밤에 죽는다면 무슨 저주받나 싶을 거예요. 계속 죄 짓는 이유가 죄가 의로 바뀌는 그 중간 매개자가 계속 찾아왔다 사라지고 다시 말해서 십자가만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는 죄에서 의로 바꿔져야 될 겁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자랑할 게 있다면 오직 하나밖에 없다. 부활? 승천? 재림? 아니에요. 십자가만 자랑한다. 왜? 순수과거기 때문에.
그걸 의자의 등받이라 했지요. 순수과거가 나를 자꾸 떠미는 거예요. 95살, 백 살까지. 십자가가 미는 거예요. 떠밀지 마소. 자꾸 밀어내는 거예요. 자꾸 미니까 우리는 십자가에 바쳐서 계속해서 십자가 증거하기 위해서 살아야 되는 겁니다. 사나죽으나 주의 것으로서 사는 거예요. 이게 사도 바울이 갔던 길입니다. 나는 죄인 중의 괴수인데 등받이는 뭐다? 십자가, 십자가 앞에 죄인 되는 거죠.
사도 바울 같은 경험을 가진 사람이 분명히 있을 거니까 그 사람들을 모집하기 위해서 모든 명령과 권면 안에 십자가를 깔아놓고 하는 거예요.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다, 라고 던지면 인간들은 뭐라고 합니까? 그러면 나는 천국 못 갑니다. 도대체 나는 돈을 미워할 자신 없습니다. 그때 그 말이 주어졌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그들의 죄인 되었고 입는 것, 먹는 걸로 족하지 않고 다른 걸 원한다는 사도 바울 말 앞에 죄인 돼버려요. 죄인으로 드러나게 하신 그 말씀이 십자가 복음이 깔려있는 채로 자기 사람 모집에 나선 겁니다. 성도를 찾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 바울이 전도할 때 근거가 뭐냐 하면, 혹시 이 성에 영생 주기로 작정된 자가 있는지 해서 자기가 왔다는 거예요.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게 아니고 영생 주기로 작정한 사람, 믿기로 작정된 사람이 있는가 싶어서 왔기 때문에 내가 날리는 멘트는 복음이고 주님의 복음만 전하지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전하지 않는다. 그게 갈라디아서 편지에 나와요. 갈라디아에 사도 바울이 설교하러 간다면 무슨 내용이 나오겠습니까? 갈라디아서 내용이 나오겠지요. 우리는 좋아요. 우리는 갈라디아서를 보면서 사도 바울을 지금 마주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 배후에는 주님의 보편성이 있고. 그리고 예수님이 여기 말씀으로 계시다.
시편을 보면서, 진짜 어려운 건 하지도 않았어요. 여러분 표정들 보니까 이런 건 다 아는 이야기인데. 다 아는 이야기부터 출발해야 돼요. 더 깊이 있게 들어가려면. 처음에 인간을 만들 때 아담을 먼저 만들었지요. 아담이 사람일까요, 남자일까요? 처음에는 오직 한 사람밖에 없어요. 사람으로 만들어졌어요. 남자로 느껴질 때는 언제냐 하면, 자기 몸에서 여자가 등장하면서 비로소 자기는 남자가 되는 겁니다. 남자와 여자 둘인데 한 몸이니까 누가 봐도 두 몸이 하나로 이어지는 관계가,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는 내용이 여기에 담겨있다고 보시면 돼요.
남녀가 사귀는 것과 부부의 차이점이 뭘까요? 사귀는 것은 언제든지 헤어질 수 있어요. 요새는 부부도 헤어지기 일쑤지만. 그러나 남자와 여자가 되면 헤어지기가 뭐해요. 서로가 제삼의 요소가 연결시키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 되게 했던 느낌이 들어요. 이것 때문에 결혼한 남자/여자는 안심이 되고 둘 다 살찌기 시작하는 겁니다. 완료가 돼서 뭐 걱정할 게 없기 때문에. 아쉬운 걸 서로 상대방이 공급하기 때문에.
인간 속에 이 요소를 이야기하는 이유가, 법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법이란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 제일 깊숙이 들어있는 요소가 법이란 형태로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법으로만 주어지기 이전에 아담이란 인간이란 피조물에 들어있다는 걸 설명해드리는 겁니다. 어려운 논리는 치우고 결과적으로 아담이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남자가 여자를 살립니까, 여자가 남자를 살립니까? 뱀과 싸우는 것은 여자의 후손이라고요. 그럼 남자는 왜 필요하냐? 이 말은, 남자는 착각하기 위해서 필요해요. 남자에서 여자가 나왔기 때문에 여자는 나의 소유물이라는 착각을 해요.
그리고 여자가 할 일은 남자가 원하는 대로 소유물 되게 되는 거예요. 이 땅에서 여자는 없어요. 마이너스 남자라 하는데 남자의 일부로서 여자뿐이에요. 여장부란 말 자체가 남자다운 거예요. 여자는 여자 자체로 모델이 없어요. 남자가 모델이에요. 여자가 나도 저 남자처럼 하고 싶은 데로 했으면 좋겠다고 남자의 모습이 원래 자기 모습인 양 생각하도록 남자가 행동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했고. 남자가 먼저 있고 여자를 만들었으니까 여자는 남자의 배필자로 있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이게 착각이라 했지요. 남자의 착각은 세상 모든 것은 남자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이 착각에 여자가 약해서 말려준 거예요. 그러니까 남자는 돛대 같지요. 지가 모든 걸 다 갖고 있고 모든 걸 다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인간을 구원할 때 어떻게 하느냐? 이미 보편화된 남자 중심이에요. 남성 보편화를 군데군데 금이 가고 균열되고 깨져야 됩니다. 남자는 껍질이니까. 죄 짓고 난 뒤에 뱀이 요소가 들어오면서 인간이란 허수아비가 돼버렸어요. 가인이 동생을 죽이고 싶어 한 게 아닙니다. 어느 날 멍하니 있는데 죄가, 악마가 들어와서 “동생 보니까 화나지? 너는 죽일 수밖에 없어요. 암 죽여야 하고말고.” 죽였어요. 모든 인간은 정신병자입니다. 지가 원하는 대로 살아가지 않아요. 악마의 소리를 듣고 따라서 움직이는 겁니다. 악마의 소리는 행함이라 했지요. 행함은 저주받을 조항, 법과 관련돼있어요. 법이 많잖아요. 많은 행동을 할 때 뭘 지키라 하면 사람들은 지키는 거예요.
쉽게 하는 겁니다. 48∻6=8이죠. 나머지가 없지요. 49∻6=8, 나머지 1 나오죠. 인간을 법을 이해할 때 나머지 없는 걸 법을 지킨 것으로 봐요. 그런데 하나님의 법은 반드시 나머지가 있어요. 나머지가 말썽을 일으켜요. 예를 들어서 간음하지 말라는 법을 지키는 방법은 유대인들은 바람 안 피우면 간음을 안 한 거예요. 그들은 나머지가 없어요. 주님께서 간음죄를 마음까지 집어넣어서 마음속에 음란 품으면 간음죄가 되어 남아있는 간음죄가 되는 겁니다.
남자가 여자를 볼 때마다 음욕이 일어나지요. 남자나 여자나 마찬가지지만 사람으로 하여금 간음죄를 이미 짓고 있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주께서 법을 마주치게 만드는 겁니다. 그럼 인간은 바람 안 피웠다고 하겠지요. 바람 안 피우고 지옥 갑니다. 바람 피워서 천당 가란 말이 아니에요. 바람은 분명히 안 피웠는데 영문도 몰라요. 바람 안 피우고 어릴 때부터 십계명을 다 지켰는데 부자 청년처럼 주님께선 나머질 준다고요. 모든 걸 팔아 가난한 자에 주라. 그건 십계명에 안 들어있는 계명이에요. 난 못 지킨다고 나온 거예요. 주님과 헤어져 지옥 간 거예요.
여러분이 그런 교회를 안 다니지만 어떤 목사가 말씀대로 사세요. 말씀은 폼으로 있는 게 아니라 지키라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이 가난하고 여러분이 일이 안 되는 것은 말씀을 안 지켜서 여러분을 징계하기 위해서 말씀을 준 겁니다. 그러니까 말씀을 지키면 징계가 풀리고 복 받습니다, 라고 이야기하는 교회 가거든 그 목사한테 이야기하세요. 너는 그대로 지키느냐고 물어보세요. 이름을 대한예수교 지옥 가는 교회입니다.
바리새인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행위를 재현하고 있어요. 그런데 그런 교회 교인들이 많아요. 교인들 각자 마음속에 나머지 없이 딱 떨어지는 법 지켜서 그걸 의로 근거로 해서 내가 앞으로 잘되기 위해서 복 받기 위해서 한 거예요. 그리고 그런 교회에서 심방 갈 때 잘도 인용하는 것은 복 있는 자는 악인의 꾀를 쫓지 않는 이 대목입니다. 왜?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쫓아 과실을 맺으니까.
심방 끝나고 난 뒤에 과실의 의미는 각자 본인들이 얼마나 생각하는지. 아들 낳는 과실, 빌딩 값 올라가는 과실, 온갖 과실을 지가 일방적으로 만들어놔요. 그래놓고 하는 말이 나는 말씀대로 믿는다. 목사님 말씀하신 시편 1편을 믿어요. 말씀대로 주야로 묵상하는 자다. 묵상하는 것을 큐티로 봐요. 큐티하게 되면 과실을 맺는다는데 누가 안 하겠습니까? 행함으로 복 받는데 누가 안 하겠어요. 큐티는 안 빠지고 열심히 하지요. 바로 그런 동네에서 우리가 살고 있었습니다.
죄 지으라고 주신 말씀으로 우리는 의인 되어 복 받기 위해서 내가 잘 되기 위해서 이 말씀을 반대로 해석한 거예요. 해석을 거꾸로 해야 돼요. 이 땅에서 누가 말씀을 제일 못 지켜서 저주받았는가? 그 입장에서 해석해야 돼요. 이런 인간이라 작살났구나. 그 자리에 우리가 합류하면 돼요. 그게 말씀 주신 목적입니다. 내가 가장 말씀 못 지킨 자리에요.
남자 중심이니까 여자가 복속돼있으니까 여자가 그러고 싶어 하니까 남자가 여자를 지배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여자 쪽에서 균열을 일으켰습니다. 여자가 남자가 하는 행세를 다 알아버려요. 여자의 특징은 남자를 다 안다는 것이고, 남자는 무식함은 여자에 대해서 모르고 있다는 거예요. 남자가 여자를 볼 때 다 모르는 이유가, 새로운 게 자꾸 나와요. 새로운 면이 나와요.
남자에서 여자 나왔잖아요. 주님께서 방향을 반대로 해서 구원의 과정을 만든 겁니다. 여자의 후손에서 남자를 보니까 남자는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뱀한테 잡혀있는 거예요. 그런데 뱀한테 잡혀있는 남자 안에 여자가 잡혀있는 거예요. 힘이 없으니까. 그래서 여자는 남자를 이용하고 남자는 여자는 내 손에 있다고 착각하고. 누가 바봅니까? 착각하는 쪽이에요, 이용하는 쪽이에요? 여자가 똑똑한 거예요. 그래서 유명 아이돌 남자한테 아가씨가 몸 줘놓고 성폭행 당했다는 것이 거기에 있습니다. 남자는 꽃뱀인 줄 뻔히 알면서도 받아들여요. 남자는 등신이니까. 지 욕정을 지 마음대로 못해요.
왜 여자의 후손을 통해서 하느냐 하면, 여자는 자기 자신이 망가졌다는 걸 알아요. 그런데 남자는 기고만장해요. 남자들이 술 먹고 하는 이야기가, “걱정하지 마. 내가 있잖아. 너 하나 밥 못 먹여줄까.” 이런 소리 하거든요. 여자가 수입이 더 많음에도 큰소리치는 이유가 거기 있어요. 물론 이런 이야기를 특정 남자/여자로 하면 안 돼요. 왜냐하면 남성형 여자, 여성형 남자가 있기 때문에 특정할 수 없지만 하나님 관점에서 볼 때 남자를 먼저 만들고 여자를 만들었다는 것은 나중 만들어진 소위 남자에게 지배받는 성경에 보면 여자로 남자를 사모하게 만들죠. 사모하게 만든 연약한 여자가 남자를 살리고 뱀까지 이기는 작용이 여성을 통해서 일어나는 겁니다.
마리아가 그렇고, 한나가 그렇고. 일은 남자가 다 해놨다고 거들먹거렸는데 실제로는 숨어있는 이름도 없는 여자가 그렇게 해요. 사사기에 나오지요. 여자 사사 드보라, 드보라 전쟁할 때도 여자가 나오지요. 형사 가젯트 같아. 모자에 팽이만 돌리면 뭐합니까? 개 끌고 있는 소녀가 일은 다하는데 지가 형사라고 대우받고. 바로 그러한 약한 여자의 모습으로 예수님은 이 땅에 왔습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신앙생활 잘한다고 남자 같은 성격으로 영광을 받지만 모든 것은 숨어있는 것이 하지요.
시편에서 과실을 맺는 것은 사라지는 매개자, 주께서 이미 과실을 맺게 했어요. 그런데 본인이 과실이면서도 옛날 죄 된 행실이 있어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이 남들처럼 못 살아서 환장한 옛사람이 계속 나오는 거예요. 우리 죄가. 이미 우리 자신이 성령의 열매인데 십자가 꽂혔으면 완전히 다 이뤘는데 우리는 추가적으로 남들처럼 살았으면 좋겠다는 그러한 못된 성질, 우리는 그 말씀을 보면서 이 말씀의 완성은 주께서 이루시고 그 완성에 우리를 집어넣었다는 것을 아는 이 사람이 오늘 본문에서 복 있는 사람이에요. 그것이 바로 산상설교에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복되다는 것과 연관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율법에 대해서 생각해보았습니다. 참 죽은 세상에 살면서도 마치 우리가 산 사람처럼 더 살아야 된다고 우겼던 이 잘못, 이 헛짓 때문에 또다시 주께서 십자가 못 박혀 죽어야 된다는 사실을 우리가 상기하고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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