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613a 부산강의 : [시편]1(1,2편)-경계선 (강의:이근호 목사)
시편 1편, 오늘부터 시편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시편은 성경이죠. 시편을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말하는 시와 같이 보시면 안 됩니다. 사람은 문학적 창의성으로 얼마든지 시를 지을 수 있습니다. 성경에 시가 들어올 때는 성령께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이 말은 인간들이 경건하고 은혜롭다 하더라도 성경 속에 들어오고 나가고는 인간의 소관이 아니고 하나님 소관입니다.
그 이유가 시편에 나와 있는 모든 말씀은 직접 하나님이 인간에게 은혜 주시려고 하신 말씀이 아니고 중보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겨냥하고 있거든요. 주님이 친히 준비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어떠한 글을 선지자를 통하여, 여기는 다윗이 되겠는데, 시편을 주신다는 것은 이 자리에 ①인간은 도저히 끼어들 수 없습니다.
그런데 방금 제가 한 이야기가 성경 속에 끼어들 수 없다는 것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에요. 그것부터 시작해서 더 깊이 들어가면 어떤 내용이 있어야 되느냐? 시편에 나오는 모든 말씀을 ②아무도 지킬 수 없다는 것, 그 점을 또 분명히 해요. 시편 1편을 보면,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어떤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을 질적으로 규정하는 거예요. 너는 의인, 너는 죄인이라고 할 때 규정되는 내용은 주님이 따로 주신다는 거예요. 하늘에서 또는 시내 산 위에요. 지상에서 본인 양심이 비추어 바르게 산다고 해서 의인이, 선인이 되는 게 아니에요. 그리고 다른 이웃과 비교할 때 월등하게 반듯하게 산다고 의인되는 게 아니에요. 달리 있어요. 조건을 따로 준다고요.
예를 들어서 만두집이 두 군데 있는데 한 집은 만두 속에 뭘 넣었는지 오묘한 맛이 나는 맛 집으로 소문나 줄을 서는 반면에 다른 집은 마트에서 냉동만두 사서 쪄내는 거예요. 겉모습으로 결정되는 게 아니잖아요. 도대체 만두에 무슨 짓을 한 거야? 겉모습은 만두 모양인데 속이 다르잖아요. 뭘 집어넣었느냐는 거죠.
시편을 시작하면서 이것부터 우린 알아야 돼요.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성도에 집어넣는 것은 인간이 지키고 싶어도 못 지키는 거예요. 이게 바로 시편에서 말하는 의인입니다. 다시 이야기해볼게요. 시편, 시들을 모아놓은 내용은 인간의 시가 여기에 들어갈 수 없는 이유가, 장차오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새로 개입될 메시아와 연관해서 시편 내용이 있습니다.
따라서 시편 내용이 장차올 메시아 직접 연결되는 것이지 지금 하나님 계시고 인간 있는데 하나님 보기에 우리를 경건하게 만들고 또는 우리가 바르게 하나님께 영광 돌리려고 주신 내용이 아니에요. 경건하게 쓴다고 시편 같은 그러한 가치가 있는 게 아니란 말이죠. 성령께서 시편 되게 하신 것은 성령은 우리가 아니라 주님과 연결시키기 위해서 한 겁니다.
아이가 오후에 집에 있는데 등기소에서 편지가 왔어요. 초등학생이 내용을 모르죠. 그런데 뜯어봤습니다. 계약서가 어떻고 등기가 어떻고 한단 말이죠. 모르잖아요. 이건 얘가 볼 책이 아니라니까요. “아버지, 여기 편지 왔어요.” 이것이나 해야 되잖아요. 그렇다면 그 편지가 초등학생이라 글자를 안다고 해서 그 의미에 도달되는 건 아니란 말입니다.
지금 유대인들은 시편을 어릴 때부터 다 가르쳐요. 또박또박 읽는 정도가 아니라 시편 같은 경우에는 외운답니다. 그것도 유대교에 철저한 신자 가정에서 그렇지만. 그게 15퍼센트 정도 된답니다. 나머지 85퍼센트 날라리들은 여호와를 안 믿어요. 하지만 여호와를 믿는 이스라엘은 믿어요. 그래서 전쟁 나면 목숨 걸고 지키는 거예요. 여호와를 지키기 위함이 아니라 여호와를 믿는 나라가 있어야 본인들이 사니까. 여호와는 자기 명분이 아니더라도 유대교는 자기 명분이 되는 거예요.
얼른 들으면 상당히 모순되는 이야기거든요.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 난 모르겠지만 하나님이란 유용성은 자기한테 필요하다는 뜻이에요. 그 유용성. 하나님이 있음으로써 심적인 안정성은 유리한데 하나님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보조적인 위치에 있는 거예요. 이건 하나님을 위해서 내가 있는 게 아니고 나를 위해서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포기할 생각은 없다는 거예요. 어떤 신이든 내가 중요하지 하나님이 나보다 더 중요하진 않다는 겁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런 점에선 굉장히 솔직한데요. 그들은 논리적이거든요. 만약에 나보다 하나님이 더 중요하다면 내가 사는 것은 의미가 없는 거예요. 그게 싫은 거예요. 내가 나한테 투자하고 내 인생을 내게 맞추어서 하루하루 짜 맞추어 착실하게 살아가는 이것을 하나님이란 어르신이 등장하면 논리적으로 따져도 소용없는 거예요. 내가 나한테는 공들여서 살아요. 하지만 나 외의 문제에는 사람들은 그냥 건성으로 살아요. 이건 누가 안 가르쳐줘도 본성이거든요.
다급한 문제, 시급한 문제 다 나와 결부된 문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보시기에 시급하고 다급하다? 그건 내 문제 아니에요. 그러면 하나님, 네가 하란 말이죠. 나한테 시키지 말고. 하나님 문제가 내게 시급한 문제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이런 태도를 본인이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그래서 여호와 믿는다는 유대교에 깊이 관여하고 싶지 않아요. 85퍼센트의 유대인들은. 하지만 어려울 때 내가 힘들 때에 잽싸게 달려가서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어떤 안전망은 필요하단 말이죠.
그럴 때는 여호와 하나님일 수는 있는데 여호와 하나님을 공유해서 믿는다는 연대성, 그 공동체의 힘이 대단한 힘이에요. 윤복희가 노래했잖아요. 누가 날 위로해주지? ‘여러분’ 아닙니까. 사람은 여러분 안에 소속돼있다는 그것 때문에 힘들 때마다 위로받을 수 있다는 그런 배경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자기 마음을 안정되게 하는지 모릅니다.
결혼 초에 독립해서 살지요. 하지만 진짜 아무것도 없는 집안과 결혼해서 사는 것과 있는 집안, 되는 집안, 뭐든지 든든한 집안, 말께나 통하는 집안, 그리고 변호사와 판사가 그득한 집안, 그런 집안이라면 나가 살더라도 법적인 분쟁거리가 있을 때 어떻습니까? 시삼촌 찾아가고 든든하죠. “조카, 뭐 어려운 일 있으면 나한테 이야기해. 내가 부장 검사인데 그것 하나 못해줄까.” 말만 들어도 얼마나 든든합니까. 그게 바로 유대인들이 말하는 유대교의 입장입니다.
제가 남의 종교를 길게 하느냐 하지만 길게 하는 게 아니고 기독교라고 걸쳐놓는 게 유리하단 말입니다. 유대인들이 솔직하다 했지요. 하나님 안 좋아해요. 하지만 걸쳐놓는 게 든든하잖아요. 그런데 그게 유대인들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이냔 말이죠. 오늘날 소위 교회 기독교인들은 안 그러냐 말이죠.
교회 다니면서 난 예수 때문에 살지, 그것 아니면 살지 않아, 이렇게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사람 거의 찾아보기 힘들어요. 예수님은 본인 일 하시고 나는 내 일 하겠다는 거예요. 아쉬울 때 찾아가겠다는 거예요. 주님 보고 싶어서 눈물 나고 그런 것 없습니다. 주님 사랑 안 해요. 내가 사랑하고 싶은 사람도 못해 줘서 탈인데 언제 남의 일까지 챙깁니까? 정신이 그런 데까지 안 팔립니다.
왜 제가 이렇게 초반에 길게 하느냐 하면 시편이 직접 예수님과 연관된다고 했지요. 시편에 가장 진지한 사람은 예수님밖에 없어요. 그 외는 아니에요. 그걸 의도해서 시편 주신 겁니다. 어느 누구도 율법 준다고 해도 날마다 묵상하는 사람 없어요. 그래서 날마다 묵상하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시편을.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시편을 예수님을 향하여 왔다면 우리는 좋으나마나 한 것 아닙니까? 하는데 하지만 예수님과 관련된 시편을 우리한테 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에 대해서 시답지 않게 대하는지를 폭로가 된다는 점에서 중요한 거예요. 말씀을 듣지 않고 복음을 듣지 않으면 자기가 사는 것이 남들처럼 사니까 평균 쯤 되는 줄 알고 있어요. 사람들 보기에 평균으로 묻어가면 하나님 보시기에도 그렇게 봐줄 줄 착각하고 있어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인간의 분위기에 옹야옹야 그렇게 인정 많은 엄마 아니에요. 냉혹합니다. 비정해요. 주님은.
성경 주고 성경대로 재판하십니다. 판검사 사법고시 준비하는 사람들, 로스쿨에 있는 학생들이 뭘 배웁니까? 헌법 배우잖아요. 그것은 헌법이 있다는 이야기거든요. 한국에 법률이 있으니까 법을 공부하는 거잖아요. 그러면 성도가 성경을 공부하는 것은 뭡니까? 천상천하유아독존, 이 세상에 나밖에 없으면 성경은 그냥 만화책이에요. 옛날 신화이야기에요. 그 당시 시대상, 역사문집, 그것뿐이에요. 그런데 성경을 본다는 것은 지금 하나님이 계시다는 겁니다. 마치 사법고시 준비하는 사람이 법이 현실적인 것처럼 그것보다 더 확실하게 하나님의 존재가 우리에게 현실적이라는 거예요.
그렇다면 하나님의 율법을 모르는 것은 현실에 대해서 맹인으로 살아가는 어리석게 살아간다는 것을 스스로 자인하는 사람에게만 성경을 진지하게 볼 수 있는 마음가짐이 되는 겁니다. 봐도 그만 안 봐도 그만, 들어도 그만 안 들어도 그만, 교회 나와도 그만 안 나와도 그만, 이게 아니고 나 살아있는 것보다 더 오래 살아있는 거예요.
의미란 영원과 관련지어야 된다. 이 세상에 사는 의미란 영원함과 관련돼야지요. 영원함과 관련되지 않는 의미란 그때그때의 구멍 메우기밖에 안 돼요. 정의를 위해서 변호사 됐다는 사람이 한둘이 아닙니다. 이 사회정의를 위해서 가난한 사람들을 변호하면서 법이 법대로 실현되는 사회를 위해서 나는 불의에 굴하지 않고 검사든 판사든 재벌과 결탁하지 않고 오직 민주주의,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사법인이 되겠다고 선언한다고요.
그런데 승진이 늦다. 갑자기 검사가 전세는커녕 월세를 전전하는데 다른 동료는 어떤 수단을 부렸는데 승진 되고 몇 억짜리 집으로 이사한다. 그럴 때 마음이 흔들린다면 승진이 누락되고 자꾸 지방으로 가고 바른 소리하니까 조직에서 따돌림 받을 때 사건도 안 맡기고 할 때 그 사람의 사회정의는 용두사미가 될 가능성이 많겠지요. 바르게 한다하다가 오래 안 가지요. 그러면 바르게 한다는 것이 의미 있습니까? 의미 없어요. 왜? 영원함과 관련 없어서 안 되는 거예요. 나 하나 외친다고 사회가 정의롭게 되나. 꿈쩍도 안 하는데 내가 뭘 어떻게.
또 이런 식으로 핑계댈 수 있어요. 나 하나 외친다고 안 되더라. 일단 조직을 만들어볼까. 하지만 그 사람은 그걸 알아야 돼요. 사회정의를 한다고 조직을 만들게 되면 사회정의가 우선이 아니고 자기가 만든 조직에 자기 자존심이 걸려서 그게 우선이에요. 조직 잘 되기 위한 온갖 부정과 불의가 쏟아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영원과 결부돼야 의미 있다는 말은, 시편 율법을 주신 이유는, 결국 인간들은 의미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예요. 뭔가 없다, 뭐는 아니야, 너는 엉터리야, 라는 말은 우리를 통해서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애초부터 그 말을 우리한테 할 이유도 없지 않습니까? 넌 안 돼. 자꾸 윽박지르지 말고 가만있으면 되지 않겠느냐 그런데 하나님께선 그렇게 하지 않아요. 인간 내부에 의미도 없으면서 자꾸 의미를 만들어내는 어떤 괴물이 있어요. 그것을 주님께서 놓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시편을 시작하면서 먼저 우리가 생각할 것은 이겁니다. 나는 신자가 아니다. 이 고백을 내놓으면서 본격적으로 구원의 길, 신앙생활의 길, 신자의 길을 주께서는 인도하십니다. 내가 신자가 돼버리면 자신이 신자인 것을 움켜쥐려고 해요. 그러면 자기 자신에 대해서 완전히 밑바닥까지 말씀이 와서 다 들춰내는 것을 누가 방해하느냐 하면, 내가 그렇게 해요. 나는 신자인데 나를 개무시하는구나. 암세포를 완전히 핵심부분까지 도려내야 되는데 어설프게 도려내면 또 번지잖아요. 깔끔하게 뿌리 채 뽑아내야 돼요. 그래서 신자 아닌 거기에 신자 되게 하는 겁니다.
방금 이 말에 대해서 오늘 강의에서 적절하게 예를 든 게 있어요. 만두 비유 있잖아요. 두 집이 있는데 한쪽은 맛있고 다른 쪽은 맛이 없더라. 겉모습은 똑같은데 속이 다르지요. 그 속이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된 속을 이스라엘이란 껍데기에 심어주는 거예요. 결국 이것은 교체 작업=신앙생활입니다. 주께서 후벼낼 때 후벼내는 수단은 말씀이에요. 후벼낼 때 딸려오는 것은 고름 같은 것, 저건 가져오면 안 되는데, 나의 의미, 의미는 영원과 관련될 때 의미가 있는데 우리는 영원과 끊어져 있으면서도 자기 고유의 의미라고 쥐고 있겠지요. 그건 일종에 고름 같은 거예요. 그런 건 나한테 있으면 안 돼요. 그러면 천국에 못 가요. 그러면 말씀이 전부 도려내는 작업이 있겠지요. 그게 바로 신앙생활이라고. 신앙생활은 나는 신자 아니라는 고백이 날마다 나올 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거예요.
만약에 나는 신자라고 교회 오면 이건 의미가 있습니까? 의미가 없지요. 그렇다면 나는 신자라고 우기면서 교회 나올 때 만약에 복음 아는 목사가 묻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해서 신자입니까?” 그러면 자기가 느낀 걸 재료로 해서 이야기할 것 아닙니까. 바쁜데도 교회 나왔습니다. 바쁜데 교회 나올 정도로 정성이 대단하다든지, 오년 전에 암에 걸렸는데 기도해서 나은 것, 십년 전에 십일조 했더니만 30배나 채워진 것, 중보기도 하니까 안 믿는 집안 식구 전부 교회 간 것, 새벽기도 하고 난 뒤에 교회가 부흥한 것, 하여튼 자기가 자기한테 의미 있을만한 건 다 갖다 붙이지요. 머리가 빠졌는데 기도하니까 갑자기 머리카락 났다든지, 아들이 갑자기 성령 받아 새사람 됐다는 이런 것 있잖아요.
하여튼 내가 원인이 되어서 괜찮은 열매 맺었다는 걸 다 끌어 모으는 거예요. 여러분이 그런 것 생각하나거든 버리지 마세요. 왜? 그런 걸 갖고 말씀 앞에 설 때 나는 신자가 아니구나. 왜냐하면 그런 것은 영원한 하늘나라와 관련이 없어요. 영원까지 이어지지 않아요. 만약에 내가 방언을 한다. 적어도 영원까지 이어질 방언이라면 툭 치면 나와야 돼요.
기도해서 뭔가 응답받았다면 내가 하는 기도는 다 응답받아야 돼요. 진짜 중보기도가 능력 있다는 걸 증명하려면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안 되는 걸 골라서 기도해줘야 돼요. 가능성 있는지 계산하면 안 돼요. 예를 들어서 오늘 집에 가면 누가 벤츠차를 줘야 되는데. 이런 건 말도 안 되지요. 이런 걸 기도해야 된다니까요.
믿음 있다 할 때 주님이 뭘 상품으로 걸었습니까? 네가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다면, 산을 옮길만해요. 주님께서 미리 경품을 걸었어요. 믿음이 있다고 티내는 사람은 도전해보란 거지요. 믿음 그것도 큰 믿음이 아니고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다면 여기에 도전해봐라. 산을 옮겨봐라. 기도 응답을 우리가 정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정한단 말이죠.
제가 물어볼게요.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대단합니까, 예수 십자가 믿는 믿음이 대단합니까? 십자가 믿음이 대단해요. 아까 유대교 이야기했지요. 85퍼센트는 건성이라고. 15퍼센트를 이야기하면 군대도 안 가. 나라에서 생활비 줘요. 그 사람의 하루일과가 성경만 연구하고 안식일엔 바빠요. 괭가리 치면서 안식일에 가게 문 닫으라고 지시하고. 민방위훈련에 완장 찬 사람과 똑같아요. 그것 하라고 나라에서 보조받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85퍼센트에겐 눈엣가시 같아. 꼭 선생님 편에 선 아주 성질 나쁜 반장 같은 느낌. 그런데 국가에선 그 사람들 때문에 대부분이 유대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으로 해서 미국에서 엄청난 보조가 들어와요.
미국에서 유대인이 잘 되는 이유가 있어요. 마지막 때에 이스라엘과 이방인이 하나가 되면 예수님이 재림하기 때문에. 안 믿지만 걸쳐놓으면 좋은 것 있잖아요. 그러니까 미국에 있는 많은 부자들이 이스라엘에 보조하고 원자폭탄까지 제공하고. 이스라엘이 승리해야 주께서 감람산에 재림하기 때문에. 아랍, 이방민족들 요한계시록대로 아마겟돈 전쟁해서 몰살시켜버리고 이스라엘이 우뚝 설 때 주께서 재림하고. 생각만 해도 신나지 않습니까? 알라 신 믿는 이슬람 사람들 원자폭탄에 죽는다면 미국의 근본주의자들이 얼마나 속이 시원하겠어요.
21세기 역사가 성경대로 될 때 자기가 걸치고 있는 기독교를 제대로 믿었다는 반증이 되니까 얼마나 심리적으로 안정이 되겠습니까. 그런데 성령이 역사에 비춰서 믿어지는 거예요, 아니면 그것 없이 믿어지는 거예요? 그것 없이 믿어져야 되거든요. 그런데 믿음은 없지, 성경대로 하면 마지막에 지옥 갈 수 있지, 그러니까 지옥 가는 건 싫고 성경에 나오는 천국은 가고 싶고 믿음은 없고.
그러면 남는 건 뭡니까? 계속 이스라엘 주변을 살피면서 확인 작업에 들어가는 거죠. 잘 됐다. 시리아, 카타르 봉쇄되고, 수니파, 수아파 어디 있는지 찾아보자. 찾아보기는 지 마음대로 해석하면 그만이지, 뭐. 아랍, 이스마엘 후손 제국들이 요한계시록 어디에 나오더라? 안 나오거든요. 그들은 나온다고 우기면서 슬슬 삼년 반 전 환란기에 들어갔구나. 휴거할 때 됐다. 흰옷 준비하자. 공중에 떠가면서 나머지 대 환란에 있는 사람들 보면 얼마나 시원하겠습니까. 교회 안 다닐 때부터 알아 봤어, 하면서.
혼자 탈출했을 때 그 가뿐한 느낌, 미리암이 언제 찬양했습니까? 바로 홍해에 애굽 군대의 창과 갑옷과 마차의 잔해가 떠오를 때 아마 제 생각엔 이대로 세상 끝났으면 좋았을 거예요. 더 진척하지 말고. 감히 히브리인들을 따라왔던 수많은 군대가 바닷물에 완전히 잠겨서 하나도 남김없이 다 죽일 때 하나님 믿는 보람이 절로 날 것이고 찬양하지 말래도 찬양할 거예요. 이건 찬송가 불려서 찬양이 아니고 유행가 불러도 그게 찬양 될 거예요. 송대관의 네 박자 불러도 찬양 될 거예요. 너무 기분 좋아서.
그런 경우가 사사기, 여호수아에 나오거든요. 해가지지 않았습니다. 사무엘상에서 우박 떨어졌습니다. 사사기에선 미디안 군대가 적인지 아군인지 분간도 못하고 서로 싸워서 완전히 전멸했어요. 엘리야 시대엔 문둥병 거지 세 명이 나와 보니까 포위했던 아람 군대 다 죽었어요. 이사야에선 앗수르 군대 십팔만 오천 명이 다 죽었어요.
왜 그렇게 신나는 일이 오늘날 21세기에는 안 일어납니까? 구약 때는 있고 신약 때는 해가 멈추는 일이 왜 안 일어나요? 동방박사가 별 따라 오는 일이 왜 안 일어납니까? 그들은 자기 잘 되기 위해서 그런 획기적인 일을 기다렸지만 신약 때는 십자가를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를 구분시키는 겁니다.
십자가를 어떻게 믿을 수 있어요. 산 옮기면 십자가 믿는 믿음이에요? 그 믿음 아니에요. 물 위를 걸으면 그 믿음이에요? 그 믿음은 예수님 배반한 믿음이에요. 베드로가. 그 잘난 베드로가 십자가 이야기할 때 그러면 난 못 믿겠습니다, 할 때 그게 마귀 들린 거예요. 그렇게 많은 기적과 교회를 부흥시켜서 결국은 그들은 십자가 앞에서 가짜임이 들통 나는 겁니다. 여러분, 아로나민 골드 먹은 날과 먹지 않은 날이 차이가 나요. 십자가 믿는 것과 안 믿는 것이 차이가 날 수밖에 없어요.
시편 자체는 안에 내용은 없어요. 이걸 경계라 합니다. 경계는 안과 밖을 규정하는 그 기능으로 끝나는 거예요. 이게 엠피쓰리 케이스거든요. 얇지요. 케이스가 있다는 말은 케이스 안에는 엠피쓰리가 들어있고 바깥엔 없다는 것을 케이스로 설명할 수 있지요. 그냥 엠피쓰리 보여주면 되는데 왜 케이스가 있느냐? 사람들은 케이스 안에 엠피쓰리가 안 보이니까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알아? 가능성이 반반이죠. 안에 아무것도 없을 수도 있고 있을 수도 있는 거고. 그래서 반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니까요. 그래서 케이스가 있음으로써 엠피쓰리 보고 이게 뭐지? 엠피쓰리. 이런 식의 믿음은 안 받아주는 거예요.
율법을 줌으로써 사람들은 율법 안에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할 겁니다. 그런데 율법 안에는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아요. 말씀은 경계적 기능만 할 뿐이에요. 굉장히 중요한데요. 여러분 거울 앞에 섰을 때 거울에 서기 전에 내가 예상하지 않은 것이 거울에 나온다면 그건 귀신입니다. 그런데 거울 앞에 설 때 반드시 자기 예상한 대로 하지요. 거울 앞에 누가 보입니까? 내가 보이지요. 그러니까 평소에 거울 앞에 서나 안 서나 인간은 자기만 믿고 사는 거예요.
그런데 말씀 앞에 섰을 때도 마찬가지에요. 말씀 앞에서 뭘 끄집어내느냐? 내가 율법 안에 들어있는 것 끄집어내서 내가 지켜서 죽어서 좋은 나라, 천국 가겠다고 나온다면 그건 믿음이 아니라니까요. 나를 믿어요. 말씀을 믿든지 불경을 믿든지 뭘 하든지 나를 믿는 거라니까요. 새로운 게 없어요. 그냥 다짐이에요. 역시 믿을 건 나밖에 없구나. 그렇게 다짐을 할 뿐이에요. 사람들이 교회 나올 때 다짐을 할 뿐이에요. 전혀 믿음은 없고. 교회 등록하길 잘했어, 헌금했으니까 이번 주에 좋은 일 있겠지, 이런 것.
이것을 자기 최면이라 합니다. 교회는 자기 최면의 장소만 제공할 뿐이에요. 조폭들이 놀음은 안 해요. 뭘 합니까? 산 밑에 도박장만 개설하고 10% 떼어먹지요. 교회가 하는 일이 이거에요. 교회는 자기만 믿을 만하고 자기 포부, 자기 이상만 처음부터 그것만 소망하면서 자기 잘되길 소망하면서 온 거기에 대해서 도박장 개설하고 10% 떼먹는 것처럼 그걸 십일조라 하는데 그렇게 장소 개설한 것이 교회입니다.
이왕이면 에어컨 빵빵하고, 얘들 쉼터까지 만들고, 노인네들 색소폰, 꽃꽂이까지 개설하면 어차피 어느 교회든 도박장이니까. 이왕이면 시설 좋고 교인수 많으면 자기 헌금 부담이 적어지잖아요. 큰 교회 가면 천 원만 내도 점심은 이천 원짜리 먹는데. 갈 때마다 천 원 이익 보잖아요. 그러니까 젊은 얘들 필리핀 선교여행 보내주지. 이득 되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에요.
세상에 이런 교회는 없어요. “여러분, 여러분이 죽어 마땅한 줄 아시죠. 죽여 드릴게요. 여러분, 돈 잃으려 도박하지요. 야무지게 돈 잃게 해드리겠습니다.” 이런 도박장 없어요. 노력하면 딸 수 있다고 그런 희망 주잖아요. 어차피 하나님이고 이런 건 다 부수적이고 우리한테 그다지 중요한 계약이 아니고 필수과목도 아니고 그냥 선택과목에 지나지 않아요. 우리한테. 그렇지 진지한 게 아니에요.
그래서 이스라엘에게 시편 준 것은 시점이 언제냐 하면, 이미 전에 줬던 모세율법이 쓰레기로 다 처박히고 그 시대가 율법 없는 종교로 바뀐 시대에 주어져요. 율법은 있는데 율법을 버리고 다른 종교로 바뀌었습니다. 그게 바알과 아세라 종교로 바뀐 거예요. 바알과 아세라 종교가 산당, 높은 산 위에 세워졌어요. 뿐만 아니고 여호와 제사장들도 장사가 잘 되니까 겉에는 여호와인데 안에는 바알과 아세라 종교로 바뀐 거예요.
오늘부터 시편 하는데 시편 안에 담긴 내용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내용이 아니고 그래서는 안 된다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어요. 그래서 시편이 어려워요. 너희는 이렇게 하라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사람들을 너희들이 왜 그렇게 미워했고 구박했느냐는 것이 시편 내용이에요. 따라서 안 믿는 분위기가 필요 없단 말입니까, 필요 있단 말입니까? 필요 있어요. 안 믿는 분위기라 해서 주님께서 실수했구나가 아니에요. 의도적이에요. 문제는 그 당시 다윗 시대에 안 믿는 분위기는 대세가 그것도 믿음으로 쳐주자고 완전히 확연하게 바뀐 상황입니다. 왜냐하면 너나 나나 믿는 자가 없기 때문에. 그냥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거예요. 그냥 이 조시로 가자는 겁니다. 별 것 있나 옛날부터 관행적으로 그래 왔다는 거예요.
조직사회에서 아주 생기발랄하고 뭔가 해보려고 의욕이 넘치는 신입사원들이 제일 부딪치는 것이 뭐냐 하면, 노털들, 부장, 과장들이 했던 관행상 해왔던 것이 초반에 굉장히 충돌을 일으킵니다. 힘들어요. 더러워서 못해 먹겠다는 거예요.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짜 뭣도 모르고, 요새는 1도 모른다고 하는데 교회에 취업한 신출내기 목사가 의욕이 넘치거든요. 설교도 김성수 목사 설교 듣고 한국교회 문제 있다고 하는데 진짜 요새 말로 1도 모르는 거예요. 교회가 어떻게 해야 운영이 된다는 사정을 전혀 모르는 거예요.
지금 판이 갈렸잖아요. 건물 부동산 있지요. 자기한테 월급 주지요. 강대상 아름답게 있지요. 이미 자기가 취업하기 이전에 50구역에 구역장들 다 있고. 밑에 하부 시스템이 다 짜여있는 거예요. 지는 중간 관리자로 온 거예요. 부목사로, 과장급으로 온 겁니다. 위에 부장이 있는데 장로들이에요. 장로들은 부교역자를 자기 밑에 부하직원으로밖에 생각 안 해요. 그러면 이 시스템 속에 뛰어든 거예요. 의욕 가지고. 심방 가면서 이야기를 해대는데 주위 사람들 보니까 같잖지도 않아요.
만약에 자기한테 새벽기도나 수요일 설교가 맡겨줬다고 합시다. 거대한 예배당 안에서 그 사람은 강단은 누가 기증했으며 피아노는 누가 기증했으며 꽃꽂이는 누가 봉사했으며 커튼과 휘장은 언제부터 달았으면 건물 지을 때 얼마짜리인데 그런 것은 부교역자는 생각을 안 하는 거예요. 전부 다 돈 덩어리고 헌금해서 한 것을 모르고 지가 바른 소리 할 자격이 되는지 분간도 못하는 거예요.
만약에 같이 부교역자 취업했는데 눈치 빠른 사람은 앞으로 승진 될 거예요. 그럼 수요 설교에서 뭐라고 해야 됩니까? “이 교회 와서 보니 수십 년 동안 피땀으로 새벽기도하고 철야기도 한 덕분에 하나님께서 거대한 성전 주셔서 나로 하여금 여기서 복음을 전파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이 교회에 서게 역사하신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럼 뒤에 앉아 있는 당회장 목사는, “사람 하나 잘 들였네. 저게 뭘 아네.” 그런데 아무것도 모른 놈이 와서 “여러분, 이건 성전이 아닙니다. 성전은 끝났습니다. 신약에는 십일조 없습니다.” 벌써 뒤쪽 장로들부터 수군거리고 분위기 이상해지는 거예요.
바르게 산다. 나 하나 정의롭게 산다. 그러면 주위에 가족들은, “네가 정의롭게 산다는 언어를 내뱉기 전에 그 말을 하기 위해서 나는 수십 년 동안 너를 키웠다. 부모 말을 무시하느냐?” “어머니, 제가 원하는 여자와 결혼하겠습니다.” “결혼이 너만 하는 결혼이냐? 하나밖에 없는 아들, 내가 너 결혼시키기 위해서 그동안 고생한 것 다 무시하느냐?” 이렇게 나온단 말이죠. <아버지가 이상해>란 드라마에 그 이야기가 나와요. “너는 너무 이기적이야. 너밖에 몰라.” “어머니 그게 아니고요. 치워라. 자식 키워도 다 소용없어.” 그럼 그 자식은 어떻게 합니까? 협상과 타협을 하면서 평화를 도모하겠지요.
이 이야기로 첫째 시간 마치겠는데 이 이야기를 왜 합니까? 이 말씀 줘도 지킬 사람 있다, 없다? 없어요. 신자 되고 싶지요. 사회가 신자 되도록 방치하지 않습니다. 말씀 지켰다고 하지요. 다 끄집어내보면 전혀 말씀과 관련 없는 나의 잘남을 집어넣고 도로 끄집어낸 거예요. 열심과 행함을.
바로 시편은 그걸 탓하는 것이 아니고 바로 그것부터 시작해야 된다는 거예요. 성경을 볼 때는 하나님이 너와 거래하는 것이 아니고 따로 있다는 것을 네가 지금 너를 믿어서는 안 되고 따로 준비하신 분을 의지해야 된다는 것을 이미 시편 자체가 시작하니까 시편은 벌써부터 복음이에요.
10분 쉽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