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강의

자연 상태 171113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7. 11. 15. 16:05
2017-11-15 13:26:49조회 : 9         
20171113a 부산강의 : [시편]5(2편)-자연 상태이름 : 한윤범 (IP:14.39.134.25)

20171113a 부산강의 : [시편]5(2편)-자연 상태

(강의:이근호 목사)

 

 

시편 2편 5절부터 보면, “그 때에 분을 발하며 진노하사 저희를 놀래어 이르시기를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4절부터 6절까지 보게 되면 왕 세우는 계기가 하나님께서 비웃으시고, 분노하시고, 진노하시는 결과로 시온에 왕을 세운 것으로 돼있습니다. 그러면 시온에 나타나신 왕은 사람들이 요청한 것이 아니죠. 하나님의 의지에 의해서 왕이 세워졌다면 여기서 시온 산에 오신 왕에 대한 믿음, 사랑은 애초에 인간에겐 없지요. 인간 쪽에서 제시된 게 아니거든요.

 

만약에 아프리카 어느 주민들이 생전에 카스텔라를 구경한 적도 없고, 카스텔라란 용어도 들어본 적도 없고, 맛 본 적도 없는 사람이 선교사에게 카스텔라 먹고 싶다는 말이 성립될까요? 안 되지요. 제가 하는 말은, 하나님이 내신 메시아를 믿는다는 것이 인간에겐 있을 수 없단 말이죠. 하나님 쪽에선 메시아만 보내고 인간은 믿고 하는 그런 관계는 애초부터 성립 안 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메시아를 보내고 예루살렘 시온에 왕을 보내는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일방적 조치지 인간이 요청한 게 아닙니다. 요청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 인간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자연 상태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자연 상태란 방금 이야기했듯이 메시아,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전혀 없는 상태,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 그게 자연 상태에요.

 

자연 상태는 자연스러워요. 이렇게 이야기하는 의미가 뭐냐 하면, 믿는다는 것이 이상해요. 왜냐하면 사람들이 자연 상태에서 믿는다는 것은 본인이 사전에 알고 있는 것을 믿는다고 이야기해요. 한국에서 카스텔라를 많이 먹어본 사람이면 이미 맛을 보고 카스텔라가 뭔지 아는 사람에게만 그걸 믿는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믿는다는 것은 내가 알고 있는, 이것을 어려운 말로 “나의 범주”지요. 나의 삶의 범주에서 이미 익숙해진 것은 다시 그리워하고 찾을 때 믿는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부부가 결혼했는데 남편을 엉뚱한 짓을 한다. 그럴 때 아내가 하는 말이, “여보, 나는 당신을 믿어.” 할 때는 이미 부부라는 걸 전제로 믿는다는 게 돼요. 이 세상에서 통용되는 믿는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는 내용의 범주가 확장되는 겁니다.

 

정리해봅시다. 믿음이란 내가 알고 있는 범주의 확장, 또는 확대가 되겠지요. 그러면 교회에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만나서도 아니에요. 알아서도 아니고. 지금 내가 살아가는 데 죽어서는 어떻게 될까, 그런 생각을 하거든요. 그 이유는, 내가 여기 있기 때문에 다른 말로 여기 존재한다. 여기 있지만 죽어서도 어느 나라에 또 있고 싶다는 나의 있음을 전제로 해서 거기서 나의 범주가 확장된 겁니다.

 

확장된 것에 필요한 것을 상상력이라 합니다. 상상력은 칸트가 실천이성비판에서 굉장히 강조한 거예요. 인간은 창의성이 있는데 그 창의성은 어디서 나오는가? 상상력에서 나온다. 그래서 아이들 교육시킬 때 학교에서 시키는 대로만 하지 말고 네 창의성을 발휘하라고 하지요. 창의성이란 네 상상력을 극대화시켜봐라, 키워봐라. 남과 똑같이 하면 남을 앞설 수 없잖아요. 상상력이 발휘될 때 앞설 수 있는 겁니다. 공부를 잘한다는 것은 그만큼 상상력이 뛰어난 거죠. 칸트는 말하기를 그 상상력이 인류의 문명을 발전시켰다고 보는 겁니다. 현재 인공지능, 산업의 기술발달이 어디서 나왔겠어요? 다 상상력에서 나왔습니다.

 

일단 일반 공장에서, 회사에서 훈련시키는 게 있어요. 품질관리지요. 품질관리란 현장에서 일하면서 어떻게 하면 단가를 내릴 수 있을까, 어떻게 능률을 높일까, 어떻게 공정을 줄여서 절약할 수 있는가? 그런 것에 성과를 내면 인센티브를 지급하겠습니다, 하는 거예요. 만약에 롯데마트에 아줌마가 입사했는데 하는 일이 불합리하다 하면 건의하는 거예요. 이렇게 하지 말고 장소를 이렇게 배치하게 되면 훨씬 더 편리합니다. 그게 품질관리에요. 회사에 엄청난 이익을 가져다주지요.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시하니까. 그게 상상력이란 말이죠. 그게 인류의 발전을 시켜온 겁니다. 미사일, 달나라까지.

 

따라서 인간에게 하나님이 그렇게 아쉽지 않아요. 인간에 필요한 것은 뭐냐 하면, 보다 나의 범주가 하늘까지 닿는 것, 이게 바벨탑 심보지요. 우리 이름이 하늘까지 닿는 거예요. 하나님을 이 땅에 오라고 할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의 상상 속에 그런 건 없어요. 인간의 상상력에 신이 인간을 찾아오는 건 없어요. 인간의 상상력은 한계는 거기 계셔요. 우리가 알아서 가겠습니다. 갈 때 어떻게 간다고 합니까? 물론 집사님은 욕 얻어먹었다고 하지만 착하게 살았다는 거죠. 착함은 우리 안에 내장돼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악해서는 지옥 가고 선하면 천국 간다. 그런 논리입니다.

 

패션디자인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면 다 알거에요. 미술계통도 마찬가지고. 색감을 볼 때 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개 색깔에서 보라에 가깝고, 빨강에 가까운 색 스펙트럼을 설정하지요. 그래서 이쪽이 선이고 이쪽이 악이라면 나는 어디쯤 가고 있을까, 스펙트럼을 생각하는 겁니다. 이게 선악구조를 갖고 있는 인간의 공통점이에요. 당신은 선에 가깝다. 나는 악에 가깝다. 악에 가깝다면 사업하다 잘 안 돼서 사기 쳐서 물건을 팔아먹었는데 미안하다. 그럴 때 어떻게 하느냐 하면, 교회에 헌금해서 선으로 잡아당겨야 되는 거예요.

 

이쯤 되면 강의를 새로 시작해야 되겠지요. 음성 듣고 동영상 보는 사람들은 싫지 않을 거예요. 왜냐하면 기초부터 어렵기 때문에.

 

시편 2편 4절에서 6절에 보면, 시온 산에 왕을 세우는데 그 취지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저희들을 비웃으시고 진노하사 분을 발해서 시온 산에 왕을 세우는 거예요. 이것은 인간이 요청한 게 아니에요. 하나님을 화를 내서 시온 산에 왕을 세우는 거예요. 그게 중보자인데 그리스도거든요.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자기가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한단 말이죠. 그게 본인이 알고 있는 것이라면 믿을 수 있는데 시온 산에 왕을 세우는 것은 인간을 생각도 못한 거고 하나님의 일방적인 추진에 의해서 시온 산에 왕을 세운 거예요.

 

따라서 분명히 이야기하지만 중보자, 메시아를 믿는다는 것은 인간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아프리카 밀림 속의 원주민이 생전에 카스텔라 본 적도 없고, 만난 적도 없고, 맛 본 적도 없는데 선교사 만나자마자 카스텔라 달라고 할 일은 없지 않겠느냐? 본 적도 없기 때문에. 따라서 하나님 쪽에서 인간의 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준 메시아를 믿는다? 그런 거짓말이 어디 있어요. 뭘 알아야 믿지 생판 낯설기 짝이 없는데 어떻게 믿습니까?

 

그래서 인간 세계에서 통용하는 믿음이란 자기의 상상력과 연결돼있는 것만 믿어요. 예를 들어서 내가 이 땅에서 힘들게 살았다. 죽어선 좋은 데 가야지. 좋은 데 가려면 나를 위해주고 나를 천국에 보내주는 그런 메시아를 믿고 싶다. 자기가 구상할 수 있고 연결성 있는 것만 믿어요. 하나님께서 주시는 메시아를 인간은 못 믿고 인간 내부에서 만들어진 구세주나 메시아나 이름이 예수든 부처든 관계없어요. 인간이 만들어낸 자기를 유리하게 긍정적으로 생각한 그것과 관련된 메시아를 믿게 돼있지요.

 

그러니까 전부 다 그런 메시아는 엉터리지요. 엉터리인 근거를 대라면 시편 2편 4절에서 6절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진짜 메시아는 인간세계의 그러한 흐름에 대해서 분위기에 대해서 분노하고 진노하고 화를 내고 있다는 증거로 시온 산에 왕을 세워요. 좋은 관계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화가 낸 입장에서 보낸 분이 시온 산의 왕인데 인간은 자기 자신을 좋게 보는 입장에서 하나님의 분노의 추진에 대해서 믿을 수 없지요.

 

그래서 예수님에 대해서 아무도 믿지 못했다는 증거를 갖고 주께서는 도로 하늘로 돌아갔습니다. 아무도 믿지 않았다는 증거가 예수님의 못 자국과 창 자국이었습니다. 그리고 돌아가실 때 열두 제자 다 떠나고 말았지요. 맞지 않았던 거예요. 인간들이 원한, 유대인들이 기대했던 메시아와 실제로 하나님이 주신 메시아와 맞지 않았습니다. 만약에 유대인들이 진짜 하나님 뜻과 합치된다면 대환영을 했을 거예요. “기다렸습니다. 오실 분이 당신이군요.” 그러면 십자가 사건이 일어날 리가 없어요.

 

그래서 제가 아까 강의할 때 그렇다면 인간에게 메시아가 없는 상태를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자연 상태. 인간은 자연 상태에 놓여있습니다. 그 사람의 믿음이 진짜 믿음인지 알려면 교회 와서 열심 내는 것으론 분간 안 되고 자연 상태로 되돌아가야 돼요. 자연 상태란 되게 아플 때 얘가 갑자기 아프다든지, 남편이 말썽을 부릴 때, 자기 몸이 아플 때처럼 만사 귀찮을 때 그게 딱 자기다워요. 예수고 뭐고 다 귀찮아. 교회 가는 것은 물론이고. 자기 몸도 감당이 안 돼요. 그 자연 상태가 가장 자기 자신답습니다.

 

그 자연 상태에 돌입하게 되면 몸이 아파도 하나님 안 믿고 몸이 건강해도 놀러가기 바쁘지 하나님 챙기는데 바쁜 게 아니거든요. 컨디션 좋겠다, 돈 있겠다, 친구 만나주겠다. 뭐 때문에 교회 나와서 이해도 안 되는 잔소리를 들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래도 믿음이 아니고 저래도 믿음이 아니란 걸 말씀 드리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메시아는 인간세계에서 굉장히 외롭습니다. 외로운 데 메시아가 오셔서 자기가 메시아라고 이야기해버렸어요. 그러니까 못으로 박고 창으로 찔러버렸어요.

 

찔린 창 자국을 도마에게 보여줄 때 문득 떠오른 노래가 있어요. 백지영 씨가 불렀던 <총 맞은 것처럼> 노래가사에 보면 이런 말이 있어요. 이게 얼마나 세상의 진리를 잘 이야기했는지. 본인은 가사 쓰고 그것도 모르겠지만 제가 보기에. “구멍 난 가슴에 우리 추억이 흘러 넘쳐” 푹 찔렀는데 구멍 난 가슴에 추억이 계속 흘러나오는 거예요. 진실은 창으로 찌른 구멍이 없으면 진리는 막히게 돼있어요. 찌르기 때문에 그 구멍 난 가슴에서 흘러나오는 겁니다.

 

지금 인문학강좌가 문제는 뭐냐 하면, 찌르질 않는다는 거예요. 듣기는 듣지만 진실을 쌓고 덧붙이고 추가시키는 것이지 구멍을 내지는 않아요. 지혜를 모으자, 이거잖아요. 지혜를 모아서 소통하자는 것이지 서로 갖고 있는 선한 것과 정의로운 것과 나름대로 많이 공부한 지혜를 계속 모으면 종합하면 거기서 새로운 창의성과 아이디어가 나와서 인류를 더욱 더 나은 쪽으로 발전시킬 것이라고 희망을 걸고 하는 것이 인문학강좌에요. <알쓸신잡>이란 프로그램을 보게 되면,

 

인문학 중에서도 감을 잡은 사람이 있어요. 이건 말이 안 된다는 것, 지식 자랑밖에 안 된다. 분명히 문제 있다고 감 잡은 사람이 라캉, 지젝이에요. 확실하진 않지만 인간이 자연을 만든 신을 살해하는 쪽으로 움직이지 않는가? 니체는 신을 죽었다고 했지만 라캉은 죽이는 과정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누가 신을 죽였느냔 말이죠. 왜 이 세상은 신이 없는 세상이고 신이 없는 대신 우상적인 신만 장난감 병정 같은 신들만 각자 자기 맞는 걸 내놓고 교회 세우고 성당, 천주교 다니고 왜 이런 식이냔 말이죠. 아무 해결책이 없는, 근원적인 것을 터치 못하는.

 

근원적인 것을 터치하려고 바닥을 파내면 안 돼요. 찔러야 돼요. 왜? 십자가가 그러니까. 주님은 나를 죽여 버리란 겁니다. 그게 네 자연스러움에 맞는다는 겁니다. 자연스러움은 내추럴 한 게 아니에요. 하나님의 분노 요소가 들어있으니까 가장 자연스러운 게 하나님을 찌르는 겁니다.

 

어제 낮 설교에 마지막에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이 천지를 만드신 분을 보고 싶으냐고. 메뚜기, 해바라기, 산, 강, 하늘에 달, 별, 달을 만드신 분을 정말 보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귀싸대기 맞고 있어요. 그 당시 제사장 병정들한테. 마태복음 27장에 나오는 말씀이에요. 귀싸대기 맞아요. 휘청거릴 정도로 맞았어요. 그분이 우리까지 포함해서 천지를 만드신 분이에요.

 

예수님이 그러한 세상인 것을 들춰내기 위해서 그렇게 오신 겁니다. 마치 왕자가 거지로 변장한 것처럼. 하늘의 영광됨을 포기하시고 거지꼴로 오신 거예요. 자기가 만든 세상에 자기 백성에게 왔음에 요한복음 1장에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고 아무도 영접하는 자가 없었어요. 영접하는 자가 있기는 있었는데 오직 영접하는 자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늘의 권세를 주셨으니, 이것은 사람의 힘으로도 안 되고 사람의 의지로도 안 되고, 뜻으로도 안 되고, 교회라는 종교분위기로도 안 되고. 오직 하나님께로 난 자만.

 

그게 요한복음 6장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도 나한테 올 수가 없고. 가까이 가면 오는 것 아닙니까? 아니라는 거예요. 그 당시 오병이어 할 때 많은 사람이 예수님과 가까이 했습니다. 같이 식사하고. 그런데 자기 딴엔 가까이 했는데 주님은 가까이 한 게 아니라고 했어요. 왜냐하면 반드시 그 과정이 설정돼야 되는데 아버지께서 내게 보내준 자만 예수님께서 쑥 들어올 수 있어요. 주님 품 안에 쑥 들어오는 거예요.

 

집사님, 손자 키울 때 어떻습니까? 할머니 안 좋아할 때는 사무적으로 하다가 좋아하게 되면 그 감정을 숨기지 않고 품 안으로 쑥 들어오지요. 누구든지 주한테 쑥 들어오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고린도전서 16장 22절. 이게 인간에게 천국 가는 것이 불가능한 이유입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아요. 가정이 우환이 있다? 아무 문제도 안 돼요. 몸이 아프다. 문제 되지 않습니다. 쑥 들어오는 것을 방해할 수 있는 어떤 요소도 없습니다.

 

쑥 들어올 수밖에 없는 이유는, 예수님이 나의 상상력 바깥에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 상상력으로 이어지고 이어지는 연장선에 있는 게 아니고 내 상상력 바깥에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마치 어린아이가 완전히 자길 포기하고 부모 품에 안기는 것처럼 그냥 당긴다는 것으로 보면 돼요. 능력에 당겨서 일방적으로 쑥 들어가는 겁니다.

 

그렇게 될 때 아까 이야기했지만 자연 상태에서 메시아라든지 천국을 생각하는 것은 범주의 확장이라고 언급했지요. 범주의 확대입니다. 인간은 신마저 정복하기 위해서 인간이란 범위를 넘어서요. 나에서, 가족에서, 사회에서, 국가에서 나중엔 어디까지 상상하느냐 하면, 지구를 벗어나서 우주까지, 우주 넘어서서 신의 세계까지 인간의 상상력이 안 미치는 곳이 없습니다. 우주까지 넘어서서 신을 예술이라 하고, 우주까지 미치는 것을 천문학, 현대물리학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예술은 과학을 훨씬 더 능가하지요. 물리학만 해도 인간의 언어를 초월합니다. 인간의 언어는 사회과학선에서 멈추지만 물리학은 언어를 숫자로 바꿔야 돼요. 슈뢰딩거 방정식을 말로 못하잖아요. 설명할 순 있어요. 설명하면 책 한 권이에요.

 

E=mc² 이건 물질이 에너지로 변하는 그 원리에요. 일반물리학을 공부 안 한 사람은 이건 숫자 2고, m, c 이게 뭐 어떻다고? 광속이고 뭐고 집어넣어도 왜 이 둘이 붙어야 되는지 설명하려면 몇 년 걸리는 거예요. 그래서 물리학자들은 자기들끼리 통하는 방언이에요. 숫자라는 게. 아인슈타인 영화 보면 칠판에 온통, 수학과 공부하는 것을 다른 과 학생들이 보면 수학인데 숫자보다 문자가 더 많아요. 숫자가 나오는 게 수학인데 문자가 숫자를 대신합니다. 집합론 해서 이상한 문자들 끄집어내고. 이게 자기들끼리 하는 방언인데 이게 범주의 확장입니다. 이렇게 범주가 확장되게 되면 새로운 창의성을 개발해서 문명의 이기들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술은 기존에 있던 단어로 일반 사람들이 못 알아먹게 만들어요. 남성용 변기를 전람회에 전시해놓고 “샘”이란 이름을 붙여서 유명한 작품이 됐잖아요. 설명해보라 하면 간단한 거예요. 예술 작품은 작가의 물건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장소가 결정한다는 이런 소리하는 거예요. 그게 화장실에 있는지, 변기 파는 가게에 있는지, 전람회에 전시돼있는지에 따라 다르다는 거예요. 그 뒤에 그걸 보고 많이 흉내 냈잖아요. 그건 작품 아니에요. 왜? 한 번으로 마감됐어요. 그 방법은 그 사람으로 끝났어요. 그 다음에 해봐야 안 쳐줍니다.

 

언어가 갖고 있는 의미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의미를 사용할 때 이게 물이라면, 물리학자는 H₂O로 물이라고 보지만 예술가는, 이걸 물이라고 부르는 그 순간에 물이란 단어가 갖고 있던 많은 추억들과 물과 얽힌 어릴 때 기억들을 품고 물이라 한 거예요. 그러니까 그 의미는 본인만 알아요. 순간적이에요.

 

사람들이 흘러가는 일상이 너무나 지루하고 권태롭고 참기 힘들어서 그 순간 흐름을 쪼개서 종교적 해탈의 경지까지 이루고자 하는 것이 예술의 목적입니다. 예술은 기쁨을 주지 않으면 안 돼요. 무조건 기쁨을 줘야 돼요. 기쁨을 주려면 파격이고 탈선이고 일탈이어야 돼요. 흔히 아는 것 하면 안 돼요. 재미없어요. 그래서 요새는 과학과 예술을 접목시켜서 경제적으로 새로운 아이템이 되어 소비층을 공략할 수 있어요.

 

이게 범주의 확장이에요. 계속 범주를 확장해 나갑니다. 그런데 문제는 단절이라 하지만 범주의 확장이 연속성을 가진다는 겁니다. 단절을 포함한 연속성이 돼버리면 결국 단절이 있었더라면 결과적으로 연속성이 돼버려요. 정-반-합, 반이란 부정적인 게 있다 할지라도 결국 합이잖아요. 합에 도달하면 부정적인 것이 날아가 버리는 겁니다. 이게 인간이 갖고 있는 한계에요.

 

예수님이 출생했다. 고귀하신 분, 동방박사가 찾았다. 예수님이 우리 죄 때문에 십자가에 돌아가셨다. 그래 우리 죄가 많아. 그런데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했지요. 십자가 죽음이니까 존재의 반대는 반이죠. 부정. 존재한다. 긍정에서 부정했다, 부활로 합이 됐잖아요. 그래서 우리는 아무리 고난 받고 힘들어도 부활만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나오지요. 그래서 예수님 오셔서 십자 지고 부활하셨다는 것에 대해서 아무 방해 없이 순순하게 믿습니다가 돼버려요.

 

이게 가짜 복음이거든요. 왜냐하면 사도 바울은 부활이 복음이 아니고 이게 복음이 되는 거예요. 핀셋으로 부활을 집어내면 십자가와 출생은 지나간 일이 돼버려서 굴비 잡을 때 제일 윗대가리 쥐게 되면 아래쪽을 별 의미 없잖아요. 그런데 사도 바울은 십자가를 딱 집는다고. 빌립보서 3장에 보면. 십자가를 집으면 출생과 부활이 십자가를 보여주는 이면, 또는 환경이 되는 겁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내가 여기 있다. 있는 건 귀한 거야. 난 죽으면 안 되는데. 사흘 만에 다시 생겨났네. 이게 천국이잖아. 잠시 내가 깜짝 놀랐지만 결국 내가 있으니까 이 복음 받아들여야 되겠다. 제가 잘못됐다고 설명하는 거예요. 시편 2편과 관련해서. 사도 바울은 이걸 최종적으로 올려버리면 결국 출생과 부활도 십자가를 받쳐주는 이면, 환경, 배경이 되는 겁니다.

 

십자가는 철저한 부정이 되죠. 이 부정 속에 내가 태어났다, 내가 살았다, 할 때 나라는 것을 부술 수 있는 세상의 모든 것을 일거에 부정해버립니다. 나는 행복하다, 나는 불행하다, 우리 가정에 우환이 있다, 내 몸이 아프다 할 때 그 모든 것을 성경에서 용납하지 않습니다. 앞에 내가 붙기 때문에. 나는 주님을 믿습니다. 그것 믿음 아니에요. 내가 믿기 때문에.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믿지 않습니다. 성경을 반대로 이야기하죠. 너희는 나를 사랑하지 않아야 된다.

 

요한일서 4장에서 너희가 나를 사랑한 것 아니요, 이걸 확실히 하자. 요한일서를 보면서 나는 주님을 사랑할 수 없고 사랑한 적도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면, 그것은 바로 출생도 아니고 부활도 아니고 십자가 안에 있는 사람, 이미 구원이 된 사람이에요. 뭐든지 성경대로 가야 돼요. 요한일서 4장 10절에,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성도라면 이 내용이 우리 안에 계속 살아있어 줘야 돼요.

 

그러면 십자가에서 내가 붙인 것은 다 탈락이죠. 십자가에서 나를 죽이는 방법은, 내가 자살하면 죽일 수 있을까요? 안 됩니다. 죽이는 방법은, 남이 나를 죽여야 되거든요. 이게 물귀신 작전이라는 겁니다. 혼자 죽으면 되는데 같이 껴안고 죽는 것, 그게 로마서 6장에서 물귀신 작전이 나옵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라. 이것과 비슷한 경우가 진주 촉석루에서 논개가 왜군 장군 붙잡고 뛰잖아요. 그걸 세례라고 합니다. 성령의 세례가 뭐냐 하면, 주님이 논개고, 우리는 왜군 장수에요. 붙들고 뛰어내린 순간 그 도착지점이 천국, 아들의 나라에요. 이게 십자가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코스, 출생, 십자가 이게 개인적인 공정이에요. 개인적인 절차를 그대로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답습시킵니다. 제가 가락강의에서 집에서 남자들이 창문틀 갈아 넣는 예를 들었어요. 문틀아 빠져라, 하면 빠집니까? 문틀을 바짝 들고 홈의 끝을 맞추고 궤도에 밀어 넣으면 원위치로 가는 겁니다.

 

구원이란 예수님의 궤도에요. 내 쪽에서 백날 밀어도 안 맞습니다. 우리를 바짝 들어서 주님의 궤도에 출생부터 십자가 궤도에 딱 맞춰야 돼요. 그 맞추는 걸 이름 바꾸기입니다. 전에는 출생하면서 부모가 내 이름을 불러줬기 때문에 우리는 육입니다. 부모가 이름 붙인 건 다 육이에요. 인간으로서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건 다 육입니다.

 

이름을 붙인다는 말은, 제가 어제 오후 설교에서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만 서로 마주 보는 것은 이름을 붙이는 게 아니고 서로 존중하고, 헤겔에 의하면 상호 인정하는 거예요. 서로 존중하고 서로 대접하는 거예요. 그러나 제가 만약에 목사님한테 이름 바꾸세요. 이름 지어드리겠습니다, 하면 이름 짓는 순간 그 사람은 나에게 종속이 돼요. 이름 짓는 관계와 상호 만나는 관계가 달라요. 인간들은 자기가 인간인 줄 알고 아담이란 이름을 지음 받은 존재란 사실을 잊어버리고 하나님과 같이 만나려고 시도해요.

 

어떤 사람이 말하듯 하나님 안 믿는다고. 하나님이 친구입니까? 내가 아무리 해도 예수님 안 믿는다고. 그렇게 이야기하는 혀가 있어야 돼요. 그 혀 누가 만들었습니까? 이빨과 혀, 구강구조가 형성돼야 말을 하거든요. 그것 누가 만들었어요? 이건 어려운 것 아니에요.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완제품이라 생각하고 이름 짓는 거예요. 중간제품에 이름부터 짓는 경우는 없어요. 다 만들어놓고 이름을 지음으로 말미암아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전부 다 이미 소유권이 하나님께 넘어간 거예요.

 

이 말은 “너한테 잘해줄 게”가 아니라 하나님이 갖고 있는 하나님의 비밀, 하나님이 이 세상을 경영하는 정보를 온전히 다 담아서 자기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서 만든 게 피조세계입니다. 그래서 피조세계는 두 종류로 돼 있잖아요. 하나는 사탄 쪽에 하나는 예수님 쪽에서, 하나는 천국, 하나는 지옥, 하나는 저주, 하나는 축복. 이렇게 둘로 나눈 것은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구원하는 속성도 있고 심판하는 속성이 있어요. 이 속성을 에덴동산에 두 개의 나무로 표현해 심어놨어요. 죽음이라고 돼있어요.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생명나무는 이름 자체가 생명이잖아요. 살고 죽는 것은 하나님 손에 달렸다. 이게 에덴동산에 심은 하나님의 자기 표시에요. 그게 구석에 있는 게 아니고 중앙에 있어요.

 

그러면 피조물은 살고 죽는 걸 통해서 주님만 표현하는 거예요. 그 원형이 하나님이지만 그냥 하나님이 아니고 죽었다가 다시 사심으로써 모든 세계를 만드신 만유의 주가 그런 목표와 의미가 담겨있다는 겁니다. 세상의 모든 만물은 하나님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분에 의해서 말미암아 만들어진 거예요. 만들어졌기 때문에 죽음이 있는 거예요. 왜 나를 아프게 합니까, 죽이십니까, 그런 소리하면 안 돼요. 자기 이름이 어디서 왔는지 알아야 돼요. 내 이름은 엄마가 지어줬는데요? 엄마, 아빠는 어디서 왔어요? 그게 육의 코스에요.

 

내가 알고 있는 자연 상태에서 상상할 수 있는 범주의 확장 안에서만 자기 존재를 증명하는 확장이라면 그건 육입니다. 이미 관계가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이상 그리고 에덴동산으로 갈 수 없도록 차단시켰으면 인간이 생각하는 상상력의 범주 확장은 결국 그 안에서 영원히 갇혀 있으란 말이에요. 인간은 인간 내부에 영원히 갇히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자연 상태를 다시 설명해드리겠어요. 그래서 인문학강좌를 보는 건 좋지만 그게 인간에게 생명이 될 수 없는 이유가, 죽음 세계에서 유통되고 순환되는 겁니다. 그들이 제일 싫어하는 게 뭐냐 하면, 심판, 죽음. 이런 것은 빠지고 그들이 했던 범주의 확장 순서를 밟아요. 여러분 우리는 태어났지만 일단 가족이 있어야 행복합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가 건전해야 행복합니다. 사회는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국가도 사회고, 직장도 사회고, 일반 모임도 사회니까 우리는 서로 이 땅에서 살기 좋은 나라, 살기 좋은 사회, 직장을 세웁시다. 범주를 여기까지 멈추고 마는 겁니다.

 

그런데 만약에 철없는 뇌 과학자가 범주의 묵계를 위반해서 인간의 죽음의 원리가 어떻고 하면, 그건 편집되는 거예요. 방송에 못 나가는 겁니다. 종교 문제 나오면 방송에 못 나가는 거예요. 이것까지. 결국 놀자는 이야기에요. 힘 있을 때 놀자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어제 낮 설교 끝에 예수님을 죽인 것은 문화다. 문화는 다 인간을 위해서 하는 거고 이게 놀이거든요. 호이징가란 사람이 주장했듯이 인간은 놀이하는 존재에요.

 

인간의 모든 행동은 어떻게 하면 놀 수 있는가? 노는 것의 특징은 무정형, 무질서, 무논리에요. 디오니소스라 하죠. 디오니소스는 축제를 벌이는 겁니다. 포도주 진탕 마시고. 디오니소스와 반대되는 것이 아폴론, 질서정연한 거예요. 사람 미칩니다. 기계도 아니고. 아폴론 세계에서 살다가 놀자! 일본으로 제주도로 해방되고 다시 악착같이 돈 벌고. 또 놀자. 그런데 직장이 없으면 계속 놀고 술이나 마시고.

 

이게 인간의 자연 상태,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의 바닥. 돈을 왜 버느냐 하면 원 없이 쓰기 위해서, 원 없이 놀기 위해서. 이게 자연 상태에요. 그럼 어떤 교회에 다니겠어요? 잘 노는 교회에 교인이 많아요. 잘 노는 교회기 때문에 숫자가 많을수록 더 노는데 서로가 서로에게 용납했기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전혀 느끼지 않아요. 다 노는데, 뭐. 그래서 교회는 놀이시설을 많이 만들고 노인 70대 이상 노는 장소, 50대 노는 장소, 30대 노는 장소, 20대는 드럼과 기타만 사주면 되고. 이왕 노는 것 신도 같이 놀 것이라고 상상력을 발휘해서 같이 어울려서 노는 겁니다. 노는데 비용이 필요하니까 십일조를 실적처럼 내야 돼요. 그것이 인간의 범주였습니다.

 

이 자연 상태를 시편에선 그냥 산이에요. 다른 말로 하면 이 땅. 이 산에 메시아가 온다, 이 땅에 메시아가 온다고 보면 돼요. 땅이니까 산, 들, 호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시편 2편 6절에 보면 무슨 산이라 했습니까? 특정 지점을 지정합니다. 시온 산이라고. 시온 산은 격전지거든요. 인간의 범주와 하나님의 범주가 정면으로 충돌하는 장소. 인간이 범주를 확장하고 하나님도 범주를 확장하다가 정면충돌해서 인간과 신의 전쟁의 속성과 성격을 최종적으로 보여준 거예요. 최종적이니까 그전에 이미 수시로 전쟁이 있었단 말이죠. 그 전쟁사가 사사기, 그전에는 여호수아입니다. 시온 산이 예루살렘에 있거든요.

 

시온 산까지 계속 이어지는데 이 전쟁의 특징이 뭐냐? 붙이시매 전쟁입니다. 참 이상하죠. 이게 민수기, 신명기에 예언 돼있어요. 계속 네게 붙여줄 것이다. 이걸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너는 가만있어. 놀래지도 말고 겁내지 말고 벌벌 떨지도 말고 가만있어. 내가 붙여줄 거다. 그 말은 뭐냐 하면, 이스라엘은 국가이름이죠. 이름을 붙였다는 말은 이름을 붙임을 받은 쪽은 이름에 담긴 속성과 기능을 담아내야 될 대상이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인간이니까 아까 공식에 의하면 이스라엘은 육으로 돼있지요. 여기에 자연스런 자기의 범주가 있을 거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붙였으니까 하나님의 범주가 이스라엘 내부에 함께 있겠지요. 하나님이 이름 붙여줄 때는 사람의 범주를 동의함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펼치기 위해서 이스라엘로 했단 말이죠.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 개개인이 육으로 돼 있잖아요. 죄인이기 때문에 일반사람과 다를 바가 없어요.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이스라엘 사람들 보기에 모든 산은 그냥 일반적인 산이에요. 거기서 뛰놀고 들판 있고 농사짓고 끝. 이겁니다.

 

요새 같으면 아침에 일어나서 직장 가고 저녁 먹고 티브이 보고 <황금빛 내 인생> 보고. 그 다음 날 또 직장 가고 그런 거예요. 자연 상태니까 내가 여기 있다. 가정 행복 우선, 그 다음에 가정 행복을 위해서 국가가 안정돼야 되고. 이게 우리 범주의 전부라니까. 여기에 무슨 믿음이 있어요. 돈만 벌고 놀면 되지요.

 

그런데 주님께서 지적해버린 겁니다. 네가 성전이다. 네가 시온 산이다. 일방적으로. “주님, 저한테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왜 그런 거예요?” 내가 너로 하여금 이스라엘로 되게 하기 때문에. 이름 지어준 당사자가 본격적으로 자기 일을 하겠다는 거예요. 지금까지는 자연 상태에서 불신자나 똑같이 살았지만 이제는 손 걷어붙이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세계를 너를 통해서 보이겠다고 나서신 겁니다.

 

사사기나 여호수아에서 보면 여호와 전쟁의 특징이 철기로 된 무기가 없어요. 그 당시 블레셋, 지금은 팔레스타인이죠. 농기구 하나 구입해도 철기문화 발달된 블레셋 민족에 가서 다듬어야 됩니다. 블레셋 민족은 지중해 해양민족으로 떠돌아다니다가 정착했고. 그쪽은 해적들인데 지중해 돌아다니면서 각종 선진 문화를 받아들여서 철기문화가 형성됐어요. 고고학적으로 그렇게 돼요.

 

그렇다면 전쟁을 하나마나에요. 이건 게임이 안 돼요. 아프리카 흑인들과 미군과 싸우면 되겠어요? 람보 따발총과 새총이 무슨 게임이 되겠습니까. 그런데 전쟁을 붙이는 거예요. 적들과 상대하기 전에 하나님과 네 자신과의 싸움을 적들을 동원시켜서 이스라엘 내부 전쟁으로 전환시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일부러 적들을 동원시켜서 온전한 하나님의 속성을 담을 수 있는 이스라엘다운 이스라엘 되기 위한 하나님의 일에 나서는 거예요.

 

그 전쟁을 무슨 전쟁이라 했습니까? 일부러 원치 않더라도 다가오게 만들고 붙여주는 겁니다. 아까 집사님도 아는 권사님한테 맞아 죽을 뻔했다고 했는데 그게 붙이시는 전쟁이에요. 만약에 그렇게 마귀에 속한 사람을 안 붙이면 우리는 자기 믿음이 괜찮은 줄 알고 정리도 안 돼 있으면서도 마치 제대로 잘 믿는 것처럼 합니다. 인간은 육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믿음이 정리가 안 돼요.

 

그래서 제가 유도등이라 했잖아요. 밤에 활주로에 등을 설치해서 비행기 착륙을 유도하는 것처럼 주께서 양쪽 다 압박을 가해요. 이쪽도 마귀고 저쪽도 마귀에요. 마귀와 마귀 사이에서 길이 없는데 좁은 길이 나오도록 영생 길이 나오도록 조치하는 겁니다. 우리는 그게 귀찮아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아요. 다른 남자와 결혼했으면 좋겠어. 돈 되고 오래 살고 인물 되고 키 크고 성격 좋고. 빨리 나열했잖아요. 제일 먼저 나온 게 돈 되고 키 크고 인상 좋고 성격 좋은 의사, 건강하고. 바람 안 피우고. 우선은 돈 돼야 되고. 돈을 못 써서 환장한 그런 품위 있는 여자 되고 싶은.

 

재벌 회장에 붙어서 예쁜 입으로 그렇게 못된 말하면 안 되지요, 하면서 충청도 사투리 쓰면서 옆에 붙어서 알랑방귀 뀌면서 <품위 있는 여자>에 나오잖아요. 꽃뱀이에요. 그렇게 해서 내 위주로 살고 싶은데 주님께선 옆에 똑같은, 우리가 자연 상태에 있기 때문에 자연 상태는 내 범주 확장이죠. 나의 범주 확장은 바벨탑 속성인데 내가 신처럼 절대자가 되는 거예요. 내가 최고 되는 거고 내가 보기에 만족스런 상태가 되는 게 자연 상태에요.

 

그런데 주님께선 옆에 이스라엘과 똑같이 닮은 자연 상태의 이민족을 붙여주는 거예요. 처음에는 그들은 전쟁할 때 자연 상태밖에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의 개입을 거부하기 때문에 주의 뜻이 찾아오는 것을 본인이 싫어하기 때문에 자기 손으로 해결하려 합니다. 사사기 같은 경우에 실컷 당하지요. 마지막에 뭐라 합니까? 하다하다 빼앗길 것 다 빼앗기고, 쉽게 말해서 “하나님이여, 왜 저를 힘들게 합니까?” 한 마디로 말해서 하나님이면 하나님이지 왜 저를 힘들게 못 살게 구십니까? 그걸 성경에선 너무 단순하게 표현했어요. “부르짖음”이라 해요. 부르짖음의 해결책이 붙여주는 전쟁이에요. 이런 단어, 부르짖음, 붙여주는 전쟁 자체가 자연 상태 인간에게 굉장히 낯설고 이상해요. 우리한테는 일상생활에 전혀 필요 없는 단어가 나온단 말이죠.

 

부르짖음이란 출애굽의 원리는 소멸하지 않았다. 반복한다, 답습한다. 예수님 십자가에 죽었잖아요. 부활했잖아요. 그것이 예수님으로 끝난 게 아니고 성도에게 답습하는 거예요. 그러나 우리는 그게 싫어요. 나는 남들처럼 내 인생 살고 싶어요. 주님의 이름이 나를 주도하는 것이 싫어요. 나는 내가 가꾸는 내 이름, 내 인생, 내 자존심, 내 체면과 품격과 품위가 따로 있어요. 이걸 지키고 싶어요. 이걸 지킬 때 내 이름이 빛나니까. 내 영광이 빛나니까. 우리 가정이 빛나고. 내 자식 잘 키웠다. 나 이렇게 오래 산다.

 

어제 주일 낮에 그런 이야기했지만 제발 그런 것 좀 자랑하지 말라고. 분명히 십자가만 자랑하라고 했건만 오래 사는 것 자랑하고 잘 키운 자식 자랑하고. 십자가만 자랑하라고 사도 바울은 이야기했는데 같은 성령 받았으면 고백이 왜 다른지 모르겠어요. 그게 아직까지 부르짖을 상황이 아니고 아직 견딜만하고 견디고 있는 거예요. 자신이 할 도리 다하고 처방을 내려 보는 거예요. 달래도 보고, 돈도 줘보고, 내쫓아도 보고, 온갖 것 다해보는 거예요. 아직까지 안 답답해. 내 힘으로 가정이란 범주를 지키다가 그러다가 출애굽기에 오면 출애굽기의 상태로 돌아갑니다.

 

이것만 할게요. 출애굽기 원리에 의하면 어린양 아니면 이스라엘 백성은 다 죽을 사람들이었어요. 이미 죽었던 인간을 살려내는 그것도 모르고 옛날부터 살아왔다고 생각한 겁니다.

 

 

10분 쉽시다.


20171113b 부산강의 : [시편]5(2편)-자연 상태

(강의:이근호 목사)

 

 

이스라엘 자체가, 시온 산이 보통 산이에요. 그런데 시온 산을 지정했다는 말은, 시온 산과 관련된 너희 이스라엘 백성이 다른 만족과는 다른 특수한 민족인 것을 알아라. 특수하다는 말은, 그들의 원하는 존재의 확장에 의하면 무조건 나한테 잘해주고, 무조건 나를 위해주고, 건강해야 되고, 오래 살고, 복 받고 이렇게 특수하게 다루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이 실천에 옮길 때 어떻게 특수한지 보여주는 겁니다.

 

그 말씀이 완성되는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에요. 말씀을 완성시킨 분이 이 땅에 와서 특수하게 살았잖아요. 특수한 마지막 꼴을 보세요. 어떻게 끝났습니까? 그냥 아파 죽은 게 아니에요. 맞아 죽었어요. 심지어 아버지한테 저주받아 죽었지요. 사람에게 버림받고 아버지한테 버림받고, 양쪽 다 버림받았는데 그것으로 말씀을 이루는 거예요.

 

시편 1편에,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오직 율법을 묵상한다 했지요. 그 율법이 말이 아니고 이스라엘 역사화로 실제로 전쟁을 통해서 이 땅에서 율법의 완성이 뭔지 남기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시편 1편에서. 오늘은 시편 2편이잖아요.

 

말씀이 고요히 눈 내리듯이 자고나면 하얗게 눈이 쌓이듯이 쌓이는 게 아니고 시편 2편에 보면, 열 왕이 어찌하여 분노하면, 벌써 반대세력이 있지요. 이 세상은 그러한 율법이, 하나님의 언약이 오기 전까지는 착한 이웃사촌들이에요. 아플 때 도와주고 돈 없으면 빌려주고, 대출해주고. 4프로로. 은행이 서로 상부상조하는 것 아닙니까. 인간들이 필요한 건 이 세상에 다 있어요. 병원 있지요, 법원 있지요, 아이들 놀이터 있지요, 학교 있지요. 그게 하나님 좋으라고 있는 겁니까? 군대 있지요. 군대 있고 군목 있고, 병원 있고 원목 있고, 학교 있고 교목 있고. 그것 전부 다 하나님 좋으라고 있는 게 아니에요.

 

회사가 왜 있습니까? 인간에게 필요하니까 있는 거예요. 의료보험제도, 국가. 나라 없어서 난민 꼴 나면 나라가 얼마나 귀한지 알아야 되지 않습니까? <군함도>란 영화에서 조선 사람들이 왜 그렇게 학대받습니까? 이유는 단 한 가지, 나라가 잃었기 때문에 그래요. 나라 없으면 그렇게 설움 받는 거예요. 어디 가도 한국영사관이 없으면 얼마나 설움 받겠어요. 맞아도 다 빼앗겨도 호소할 데 없잖아요. 역시 나라에 충성해야 돼. 외국 나가서 태극기 보고 눈물 철철 흘리고 동해물과 백두산이, 하다가 또 한국에 와선 헤헤거리고.

 

이 세상 모든 것이 인간들에 필요해서 하는 겁니다. 이것은 범주 확장의 일부에요. 전혀 특이할 것 없고 특별할 것 없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도 이스라엘의 범주 확장으로 보고 싶은데 중첩돼있어요. 이스라엘과 동행하시는 분이 이스라엘 이름을 지은 이름값을 하겠다는 겁니다. 이 땅의 신들과 싸우는 하나님. 그러면 하나님은 어디 있느냐? 하나님은 없어요. 하나님 안 믿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거예요. 있어야 믿지, 없는 데요.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특이한 현상입니다. 자연스러운 게 아니에요. 만약에 예수님을 내가 하는 것 있고 내 몸도 있고 여러 가지 아는데 그 중에서 기독교를 알게 되어서 우리 가정이 예수 믿는 가정이라서 예수까지 알게 되었다면, 이건 자기 범주의 확장입니다. 진짜 예수님이 들어오게 되면 지금 머리 터져 죽어도 괜찮다고 나와요. 감사해요. 고마워요. 이렇게 돼요. 왜냐하면 주인이 바뀌었으니까. 식당에서 밥 하나 추가하는 식으로 예수 하나 추가해서 나도 살아있고 예수도 살아있고. 이런 복음은 없습니다.

 

십자가는 물귀신 작전이라니까요. 함께 죽지 아니하면 함께 사는 게 없어요. 주님이 들어왔다는 것은 죽이는 거예요. 어제 낮 설교에서 했잖아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들어오신 것은 우리를 목 졸라 죽이는 거라고. 이래도 안 죽어. 목 졸라 죽이는 거예요. “죽여주옵소서.” 이러면 될 텐데 왜 이러십니까? 하필이면 많은 사람 가운데 저한테 아픈 병이 왜 있습니까? 감기 몸살이 웬 일입니까?

 

감사 안 나오면 성령의 일 아니에요. 그런데 이빨 아픈데 감사 나오느냐? 안 나오죠. 그래서 이론적으로 아파도 감사하겠다. 이러면 하나님 상대로 장난질치는 거고요. 하나님이 속아 넘어갑니까? 일종에 하나의 오기고 오기는 더 심오한 반항입니다. 이렇게 감사헌금까지 했는데 원상회복 안 해주면 진짜 당신 나빠, 하는 식으로 반항의 수법이 상당히 소극적이지만 더 못 된 반항이, 일 잘못 되면 감사 헌금하는 이런 못 된 버릇, 이것 없애세요.

 

감사는 그냥 감사가 안 나오고 속의 본색이 나오고 난 뒤에 하나님 왜 이러십니까, 원망과 원통과 부르짖음이 나오고 난 뒤에 그때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감사로 바뀔 때 감사 되는 능력마저도 나의 종교적인 기술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제가 전에 강의에서 공식 하나 제시했거든요. 육에서 영으로 돌아왔다, 끝. 이게 아니고 수시로 영이 육으로 건너가요. 육에서 영, 영에서 육. 성도의 생활이란 이런 겁니다. 계속 육과 영을 반복하면서 내가 어떻다, 내가 구원받았다, 난 믿음 없다, 믿음 있다, 나는 믿음 없다고 한 참 너무 냉정하다. 이런 게 아니고 그 속에서 뽑아내는 게 있다고요. 왔다 갔다 하면 역시 나 같은 인간 피로서만 구원하는군요. 피에 대한 고마움과 감사가 나오게 하는 겁니다.

 

사탄은 이걸 제일 싫어해요. 잘난 네가 있는데 네 행함으로 영광으로 돌리지 않고 예수님한테 수입하느냐? 너는 줏대도 없고 너는 자존심도 없느냐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마귀에 속한 사람들은 성전에서 많은 사람 있지만 주께서 일부러 지우개로 지워버려요. 달랑 두 사람만 남깁니다. 하나는 바리새인, 한쪽은 죄 많은 세리, 나머지는 다 지워버려요. 중요한 포인트 두 개만 남깁니다. 어차피 세상은 둘로 갈라지니까.

 

이쪽에 지옥 가는 대표자가 바리새인이에요. 십일조 하지요, 금식하지요. 금식은 자기를 부인하겠다는 종교적인 자기 낮춤을 의미하는 겁니다. 구제한다는 것은 예레미야나 이사야에 보면 너희들이 이웃사랑을 안 해서 망했으니까 과거의 실패를 교훈 삼아서 우리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서 미움 받지 않고 사랑받는 나라 되겠다는 취지가 바로 구제에요. 인간들이 할 수 있는 존재의 범주 내에서는 인간이 다 합니다. 십일조도 역시 구제의 범주에 들어가고, 금식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고. 그리고 나는 저 세리와 같지 아니하고 나는 바람도 안 피웠고 경건하게 살았다는 겁니다.

 

왜 주님께서 성전에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그 사람을 부각시키는 겁니까? 저게 마귀라는 거예요. 주님은 죄인을 부르러 왔는데 마귀가 구원받지 못하도록 인간들로 하여금 독려해서 종교란 이름으로 인간을 그런 식으로 만들어놓은 거예요. 수시 불합격했습니다. 그런데 이쪽 세리는? 감히 고개도 못 들고 죄인이라 할 때 수시합격이에요. 수시는 실기만 봅니다. 이론은 안 봐요. 삼위일체 아느냐, 조직신학 몇 년 했는지 안 물어요. 실기가 뭐냐 하면, 죄인임에도 그동안 살려주셨잖아요, 라고 모든 원천과 원인을 주님 몫으로 돌리는 겁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 은혜라고.

 

시편 1편에서 복 있는 사람으로 시작해서 율법을 주야로 묵상한다고 했거든요. 율법의 끝이 뭐냐? 시편 1편 5절에 보면,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라” 이 대목이 설명하는 데 어려워요. 왜냐하면 사람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그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율법이 나중에 주어졌다고 생각하는데 시편 1편에서 뒤바꿔버립니다. 율법이 먼저 있고 율법의 내용을 설명하고 그 내용을 구체화하기 위해서 두 종류의 사람을 나중에 창조하죠. 의인과 악인.

 

의인은 율법의 운반책이에요. 율법을 묵상하니까 안에 율법 들어있는 사람이고, 악인은 율법이 없는 사람이에요. 율법이 없으면서도 율법의 저촉을 받아야 될 사람이에요. 율법이 없는 사람을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 쭉정이 같다. 이게 마태복음 13장에서 쭉정이는 불에 태우고 알곡은 하늘창고에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골리앗 크레인 아시잖아요. 울산도 있고 거제도에도 있는데 엄청나게 크잖아요. 여기에 컨테이너 같은 무거운 물건을 옮길 때 이게 율법이라면 율법에 접촉이 되는 자들이 인간이에요. 율법의 체제를 채우기 위해서 인간이 있는 겁니다. 에덴동산에서 인간이란 보조 역할이에요. 인간이 중앙에 있는 게 아닙니다. 생명나무와 선악과나무의 취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인간이 있고 생명나무와 선악과나무가 결합된 것이 예수 그리스도에요. 그래서 모든 세상 만물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만들어진 겁니다. 보이는 것들과 심지어 보이지 않는 것들까지라도. 보이지 않는 것은 인간의 범주에 포착이 안 돼요. 그래서 인간은 바보지요. 보이지 않는 것을 다룰 줄 몰라요.

 

물리학이 뭡니까? 물리학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겠다고 전자현미경으로 들여다보잖아요. 하지만 그것까지예요. 전자현미경으로 안 보이는 건 어떻게 하겠어요. 그래서 과학이 진리가 아닙니다. 창조과학회가 뭐냐 하면, 하나님이 창조한 것은 물리학, 생물학을 통해서 증명하겠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창조과학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욕 먹이는 거예요. 그렇게 알아 버리면 믿음이 아니고 지식이 돼버려요. 주 예수를 지식으로 알면 구원을 받으리라. 이런 것 없거든요. 믿는다는 말은, 나의 믿음이 죄라는 것을 아는 게 믿음이에요.

 

여러분, 동전으로 긁는 복권 있지요. 복권에 긁으세요, 라고 돼있고 덮쳐 있잖아요. 그러면 동전으로 긁어본다고요. 긁어본다는 것은 하나가 아니고 이중으로 중첩돼 있잖아요. 밖의 것을 긁어내야 본색이 나오잖아요. 그러니까 주님의 말씀은 너의 믿음을 긁어내란 말이죠. 나의 믿음을 긁어내면 우리는 불신자가 되죠. 불신자가 세리에요. 이 사람이 수시 합격했습니다. 그런데 맞은편에 있는 바리새인은 하나님을 믿으니까 십일조 하고 금식하고 했잖아요. 그 사람들 불신자라 하면 화냅니다. 그 사람들은 신자로 행세하지요. 아버지 신앙입니까? 본인 신앙이죠. 나의 신앙이 있다는 말은, 나의 신앙은 위선이에요. 믿지 않음으로 구원받아요. 이것이 어려운 말 아닙니다. 굉장히 쉬운 말입니다.

 

우리교회에 어떤 집사님이 계신데 꼭 아내를 부를 때 여보라 하지 않고 이름을 불러요. 그걸 듣고 제게 어떤 아이디어가 떠오르느냐 하면, 우리 돌아가신 아버지 성함이 이태정이에요. 제가 아버지라 부르면 되는데 이태정 아버지라고 부를 때마다 그렇게 이야기하면 아버지가 좋아하겠어요? 화내겠지요. 제가 믿습니다, 하면 주님이 화내는 거예요. 내 믿음을 긁어내야 그게 진짜 믿음 아닙니까? 얼마나 믿었으면 따로 내 믿음을 언급할 필요가 없을 정도가 돼야 되지 않습니까?

 

철학적으로 내 믿음을 거론한다는 말은, 내 인생은 내가 관리하겠다는 겁니다. 내가 발생되면 여기서 반드시 ‘너’가 발생돼요. 하나님을 너라고 부르겠다는 거예요. 이승기 노래에 있지요. 누나라고 부르다가 이제는 너라고 부르겠다고 나오잖아요. 하나님을 너라고 부르겠다는 것은 나를 포기 못하겠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자아에요. 자아는 없습니다. 인간에게는 주체만 있지 자아는 없어요. 자아가 있으면 타자가 있겠지요. 인간은 자기 자신을 확정하는 데 너라고 부르면서 자기 자신을 확정짓게 돼있어요.

 

이게 물리학에서 운동을 측정할 때 같이 운동하는 쪽이 있어야 변화가 있어야 시간도 정해지고 공간도 정해져요. 아무것도 없는 데서는 시간과 공간이 정해지지 않습니다. 뭔가 있어야 변화가 있어야 시간이 흘러감을 알지 가만있는데 무슨 시간이 흘러갑니까? 삼풍백화점 무너졌을 때 무려 3일 동안 있었는데 구출해주니까, 한 10시간 지났어요? 10시간 지난 게 아니고 3일 동안 있었어. 생체리듬이 3일인데 본인은 10시간으로 느껴서 그런 것 같아요.

 

그래서 인간은 자기 위주기 때문에 자기 잘남, 자기를 뽐내기 위해서 꼭 옆에 누가 붙어 있어야 돼요. 나는 이제 죽어도 예수 안 믿겠다. 산에 가서 혼자 하지 왜 자기 아내 보고 이야기합니까? 날 알아줘. 내가 이런 심정인 것을 알아달라는 거거든요. 내가 누구한테 말을 건넨다는 것은 인간은 혼자로는 감당이 안 된다는 말이거든요.

 

그러면 남의 가치를 존중해야 되는데 그건 싫어. 처음부터 자기 위주에요. 남을 이용하면서 역시 나는 나다워. 그걸 하겠다고 붙어있는 겁니다. 이 버릇이 예수, 하나님, 부처 어떤 걸 남의 자리에 집어넣어도 여전히 자기뿐이에요. 그러니까 불신자의 특징이 뭐냐 하면, “주여, 믿음을 주시옵소서.” 그것으로 뭐 하려고? 지 자랑하려고? 천국 문 두드리면서 예수님 사랑했습니다. 그 짓하려고?

 

믿지 않는 자신감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예수를 안 믿는 예수 믿는 걸 포기하는 넉넉한 자신감이 있어야 돼요. “내가 당신을 알기 전에 먼저 나를 알고 있잖아요, 주님.” 그런 게 있어야 돼요. 웃시야 왕과 친척과 같은 사이, 웃시야 왕과 말이라도 조언이라도 할 수 있는 선지자가 이사야입니다. 웃시야 때 영토가 솔로몬, 다윗 때 영토만큼이나 컸어요. 그런데 웃시야가 죽던 해에 이사야가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갑니다. 지금까지 이사야는 하나님의 선지자로 자기 일을 차분히 했다고 생각했지요. 자기가 망할 자란 생각은 못한 거예요. 전부 다 자기보다 못한 자니까. 전부 다 자기보다 지식이 모자라고 하나님에 대해서 모르고 지는 맨날 가르치는 입장이었단 말이죠. 지는 잘난 줄 알았어요. 멋있는 줄 알았어요.

 

웃시야 죽던 해야 성전에 들어갔습니다. 그 성전에 천사들이 있어요. 천사는 지금 한창 하나님과 가까이 하고 있습니다. 가리면서 찬양하면서. 날개로. 그런데 그 천사와 비교해서 이사야 자신은 너무 초라하기 짝이 없고 그렇게 성전을 드나들었지만 너무 초라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화로다 망하게 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나는 화로다 망하게 되었다. 나는 주어고, 화로다 망하게 되었다는 걸 술어라고 한다면, 내가 망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이사야는 그렇게 하지 않고 망할 자 속에 일부라고 본 거예요. 뒤에 나옵니다.

 

그러면 나란 존재는 왜 생겼느냐 하면, 하나님은 성전 안에 있어요. 자기는 성전을 왔다 갔다 했지만 성전이 자기를 위한 대상물에 불과하지 여전히 성전 가도 내가 돛대고 집에 가도 자기

그러던 이사야가 된 통으로 내가 주인공이 아니고 주님이 주인공이고 주인공 입장에서 화로다 망하게 된 백성들 중에 하나인 관계에 있단 말이죠.

 

이게 시편 2편 4절에서 6절까지 말씀이에요. 하나님이 시온 산에 왕을 보내는 것은 성전 안에 있는 여호와가 이 땅에 구체화로 오시는 겁니다. 그럴 때 왜 오셨는가? 하나님이 분노하고 진노한 증거로 예수님을 보낸 거예요. 심판하려고 보낸 거예요. 하나님이 이처럼 이 세상에 대해서 화내고 있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신 거예요.

 

세례요한을 앞서 보냈지요. 세례요한의 입에서 나오는 멘트, 모든 문장들을 보세요. 그게 좋게 하자는 이야기입니까, 화내는 이야기입니까? 화내고 심지어 욕설까지 했잖아요. 이 독사의 자식들아.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분리시킨 사람들이 누굽니까? 진짜 막 가는 인간들에게 그랬습니까? 세례요한의 인식이 뭐예요? 이 세상에서 막 가는 더러운 인간들, 성폭행이나 하고 도둑질하고 살인하는 그런 인간들에게 독사의 새끼들이라 한 게 아니에요. 그런 사람들을 관리하는 착한 사람들, 경건한 사람들, 거룩한 사람들, 하나님과 누구보다도 가까이, 가까이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에게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들이 구원받으려고 나한테 오냐?” 지금 조롱하고 있습니다.

 

그걸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할 때 인간들의 아는 그 하늘나라가 아니에요. 요엘서에서 말하는 마지막 캄캄한 날이고 심판의 날입니다. 사도 요한은 그것까진 몰랐지만 예수님 쪽에선 알아요. 이 세상은 이미 지옥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성도가 할 것은 지옥의 증거만 찾으면 돼요. 집사님은 좋은 증거 챙겼습니다. 우리는 사람 좋으면 복음 이야기해도 좋은 사람 되는 줄 알고 있잖아요. 복음을 안 전해야 좋은 사람 돼요.

 

제가 지난, 지난 낮 설교에 들릴라와 삼손 이야기 예를 들었습니다.들릴라란 여인이 삼손을 좋아했고 서로 동거했잖아요. 삼손의 모든 게 좋았을 거예요. 힘세지, 남자 힘세면 최고 아닙니까. 비아그라 먹을 필요 없잖아요. 다 좋은 데 그 삼손에게 하나님의 언약, 약속이 있다는 걸 빼놓고 나머지 다 믿은 거예요. 흔히 그걸 사랑이라 하잖아요.

 

그러나 삼손은 사랑하는 여자의 말도 안 듣고 본인도 마음대로 조정할 수 없는 삼손을 삼손 되게 했던 나실인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이 삼손의 인생을 몰고 갈 때 결국 둘이 헤어질 수밖에 없는 겁니다. 갈라서는 거죠. 너는 너 갈 길, 나는 내 갈 길. 한쪽은 지옥에 살면서 지옥 바닥 그대로 있고, 한쪽은 지옥에서 추방되어서 가는 곳이 어딥니까? 천국이잖아요. 천국은 알아서 선택해서 가는 곳이 아니고 이 땅에서 추방되어야 갈 수 있는 곳이에요. 꼭 예수님 코스와 똑같아요. 밀쳐서 가야 천국이죠. 내가 자진해서 알아서 가게 되면 내 믿음으로 가기 때문에 위선입니다.

 

좀 기다려 보세요. 밀어낼 때 옵니다. 감사해야 돼요. 버지니아 머리 피 난다 하니까 이건 아마 주께서 밀어내신다고 생각하시고, 인간은 위로 받을 자격이 안 돼요. 위로한다고 하지 말고 팩트, 있는 사실을 이야기해야 돼요. 지옥에서 제대하라고 하신 모양이다. 이것 보면 이 목사 비정하다고 ……. 그래도 할 수 없지만.

 

밀어줘야 돼요. 밀어줄 때 그냥은 안 되고 신자에서 불신자로 바뀌어야 돼요. 그래서 주님 앞에서 주여 나는 믿음도 없는 세리입니다. 죄인이라고 할 때 그런 고백 자체가 합격했기 때문에 인간에게서 나올 수 없는, 인간이 어떻게 자길 부인합니까? 나올 수 없는 자기 부인이 능력이 되어서 우리한테 발산이 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주의 증인이에요.

 

열두 제자가 주님한테 얼마나 많이 배웠습니까? 참 많이 배웠거든요. 결국 갈라섰어요. 다시 올 때는 십자가 앞장 세워서 왔습니다.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도마가 예수님 알 때 손가락을 창 자국에 집어넣고 알았어요. 아까 했잖아요. 구멍 난 가슴에 내가 모르는 추억이 흘러 넘쳐요. 인간으로 죄인으로 만들었던 선악과의 추억이 우리는 다 잊고 있었는데 예수님의 구멍 난 창 자국을 통해서 출애굽을 잊지 않았고, 선악과 잊지 않았고 그걸 그대로 지상에 구체화, 역사화시키는 겁니다.

 

여기서 문장을 적어보겠습니다. 왕으로 오신다는 것은 백성 없다. 왕으로 오시는데 백성이 없어요. 왕만 달랑 와요. 왕이라는 지위, 왜 왕으로 오시는가? 이 세상 왕의 지위 특징이 있어요. 귀환이 불가능한 개념입니다. 왕에 대해서 제가 보기엔 이게 가장 적절한 개념이에요. 그냥 말로 최고 자리, 절대적 자리라 해서 너무 식상해. 왕이란 교환 불가능한 위치에요.

 

법철학에서 언급합니다. 왕의 신체는 세포로 구성된 게 아닙니다. 모든 백성의 초월적인 상상력으로 구성된 게 왕의 신체기 때문에 왕이 손을 대는 것과 일반인이 대는 것과 같이 보면 안 돼요. 그렇게 되면 인간들의 국가관이 와르르 무너집니다. 왕에게 손댄다고 왕이 다치고 그런 건 아니지만 백성들의 이상이 그 순간 다 허물어져요. 아무리 왕의 부인이라도 볼펜 찾는다고 왕의 신체를 더듬으면 안 돼요. 물론 지금은 대통령이 왕은 아니라서 이해는 되지만 그래도 대통령을 교환 불가능한 위치라고 생각하고 투표한 사람한테는 김정숙 여사에 대해서 아주 짜증나는 거예요.

 

만약에 어떤 교회에서 목사를 신처럼 받드는데 어떤 까불이 집사가 목사님 좋다고 하면 다른 여자 집사들이 머리카락 잡아당겨요. 우리의 신을 네가 왜 건드리는데? 교환 불가능한데. 건드린다는 말은 내 몸과 네 몸을 바꿔치기 할 수 있다는 거잖아요. 그러면 상상력의 극단, 믿음의 내용이 다 깨져버려요. 나보다 더 나은 뭔가 있어야 교회 가는 재미가 있어요. 그런데 그걸 함부로 대하면 저렇게 시시하다면 내가 뭔데 믿지?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 논리를 이어봅시다. 주님이 내 정성, 내 십일조를 받는다? 그러면 믿지 맙시다. 왜 내 행위를 받습니까? 세리처럼 죄인을 부르러 왔다면 일체 나의 것을 안 받는다는 것을 염두에 둬야지요. 그럼 헌금도 안 받으면 교회를 어떻게 운영하는가? 그건 죄 짓는 행위로 운영을 해요. 헌금이 뭐냐? 죄 짓는 거거든요. 죄 좀 지어줘야 교회 운영이 된다고요. 제가 새순교회 강의에서 했잖아요. 피아노 고장 나면 피아노 기증하는 죄를 지라고. 어제 오후에도 그걸 인용했습니다만.

 

우리는 뭘 해도 죄를 내놓는 그 모습에 대해서 정말 감사해야 돼요. 내가 죄 짓는 것을 웃으면서 지을 수 있도록 해주신 것에 감사해야 돼요. 웃으면서 불신앙 행동하는 것을 고마워해야 돼요. 우리는 얼마나 태고 난 위선자입니까? 믿습니다, 이러다가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을 편하게 웃으면서 믿음 하나도 없어요. 요즘 점차 제 주변에 늘어나고 있어요. 좋은 증거에요. “목사님, 저 믿음 없습니다.” 그 이야기가 인간의 힘이 아니다. 제가 너무 오버해서 좋게 해석하는지 모르겠지만 진짜 믿음 없어서 믿음 없다고 했는데 이상하게 포장질하는지 모르겠지만.

 

간단하게 말해서 이 땅은 지옥입니다. 지옥 가는 게 아니에요. 그냥 살다보면 지옥 가요. 뭐가 이상하냐 하면, 같이 지옥 가야 되는데 그것도 박자 맞추어서. 마귀가 치는 북소리에 맞추어서 지옥 가야 돼요. 마귀의 소리에 세 종류가 있습니다. 돌이 떡 되는 것과 인기 있는 것과 세상에 모든 걸 가진 최고의 자리에 있는, 이게 인생의 보람이잖아요.

 

만약에 집안에 남편이 돈도 너무 많아. 골프 쳐도 해도 돈을 다 못 써. 크루즈 여행해도 다 못 써. 또 좋은 친구가 그렇게 많은지 그리고 가족들 존경해. 그러면 술 퍼먹겠습니까? 아니거든. 이게 뭐냐 하면, 평소에 악마에 길들여지니까 악마 속성과 같은 속성이라 그게 없으면 허전한 거예요. 거기서 다고, 다고, 달라는 겁니다. 악마가 평생 동안 제시한 그것 없어서 미치겠다는 거예요. 일종에 마약 쯤 되는데 마약해서 마약중독자가 아니고 이 세상 모든 인간들이 악마가 준 사료에 길들여진 사료중독자들입니다. 우리도 포함해서.

 

교회 와서 인상 찌푸리고 있을 때 분명히 이번에 고3인데 떨어졌어. 그런데 교회 와서 뭔가 활짝 폈어요. 말도 안 걸었는데 지가 알아서 말 걸고 인사해. 분명히 이건 상대방이 좋아서가 아니라 그동안 기대했던 바가 충족되어 그런 현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대했던 바가 자신이 죄인이라서가 아니라 자기 잘났다고 기대했는데 아다리 딱 맞아 떨어지기 때문에 그렇게 좋아하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 왔을 때 무엇으로 감사하고 충족해야 되느냐 하면, 내가 죄인이긴 한데 왜 죄인인 줄 모르겠다고 왔다가 목사 설교를 통해서 정말 죄인 맞음을 알았을 때 얼굴 활짝 피면서 은혜 받았다는 말이 절로 나와야 돼요. 올 때부터 문제 있다고 가지고 나와야 돼요. 문제 있어도 괜찮아요. 왜? 십자가 피로 이미 구원받았기 때문에. 육과 영, 육과 영, 왔다 갔다 하면서 그 과정 속에서 주께서 십자가만 뽑아내는 겁니다.

 

설탕 넣고 돌리면서 밑에 페달 밟을 때 설탕한테는 아무 이익 없는데 없는 솜사탕 생기잖아요. 주께서는 십자가란 솜사탕 얻기 위해서 계속해서 우리를 육과 영, 육과 영 부리고 마귀 보내고 힘들게 하고 깜짝 놀라게 전화 오게 하고 모든 게 솜사탕 하나 만들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게 뭐냐? 네가 의인이기 때문에 율법의 완성자가 너라는 작품이라는 것을 주께서 스스로 우릴 앞장 세워서 예수님이 자랑하고 싶어서 하는 거예요. 어차피 구원은 해야 되는데 지금 안 데려가는 이유가, 온 지옥을 다 돌아다니는 거예요. 미국에 보냈다, 한국 보냈다, 다시 미국 갔다. 봐, 이렇게 살잖아. 죄인이라는 걸 나팔 불면서 살잖아. 왜 믿음 없음을 우리는 편하게 그걸 자랑 못합니까? 죄인 부르러 왔다면 죄인 되면 되지요. 우리 역할이 죄인 역할이라면 서슴없이 손들고 나서란 말이죠.

 

그래서 제가 자기 행동에 책임지지 말라는 거예요. 책임자가 있는데 왜 내가 책임져야 됩니까? “하여튼 인간 뻔뻔스러워. 인간의 기본 양심도 없어. 어떻게 그런 짓해놓고 책임도 안 져?” “그래 성경 말씀에 위배자가 나야. 양심에 화인 받았어. 됐냐? 여기다 주홍글씨로 A 크게 쓸까? 집에 가서 문신을 할까?”

 

너새니얼 호손이 지은 [주홍 글자] 소설을 보면서 얼마나 답답했는지 청교도 분위기에서 간음한 게 들키면 그 동네에서 저주받은 여자가 된다는 거예요. 붉게 A(Adultery)라는 주홍 글자로 간음자라 하는 겁니다. 이게 청교도 소설이거든요. 그걸 뒤집으면 복음 돼요. 알아서 새기면 돼요. 그게 주님이고 성도들이고 사도들이에요. 마귀가 갈지 못합니다. 마귀가 더 이상 심령을 긁을 데가 없어서 동전으로 다 긁어서 십자가만 자랑하니까 십자가 나오는 바닥까지 다 보여주니까 갈굴 게 없어요.

 

그래서 간음한 여인 잡아놓고 하는 말이 뭐냐? 여기서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는 거예요. 마리아 자기 향수를 다 깼거든요. 욕 되게 얻어먹었어요. 비싼 향수를 예수님 앞에 한꺼번에 날렸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이, 이 향수병을 깨는 행위가 내가 다시 올 때까지 영원토록 사람들에게 회자 되리라. 자랑거리가 될 것이다. 자기를 깨니까 위선 깨면 자기 죄인 됨을 자연 상태의 죄인 됨을 아담의 상태가 그대로 나오지요. 그게 뭐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긁어버려라. 그러면 네 짐이 훨씬 가벼워지리라.

 

끝으로 어제 낮에 이야기했지만 주님께서 자연 상태는 벌거벗은 상태입니다. 그리고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역시 벌거벗은 상태에요. 선악과 따먹기 전에는 벌거벗은 상태지만 수치를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똑같은 아무 달라진 게 없는데도 수치를 느꼈거든요. 이게 바로 죄에요. 자기가 머리 깨진 상태가 자기 자신을 수치스럽게 여기는 것, 이게 바로 숨겨진 사탄의 죄였습니다. 나는 남한테 보이기에 안 수치스럽게 살고 싶은 자기 죄는 생각 안 하고 잘나고 싶은 그 충동이 있었던 거예요.

 

주님께서 가죽옷을 입혔습니다. 가죽옷으로 가렸다는 말은, 가린 것 밑에서 뭘 해도 죄가 되어서 십자가 피가 돋보이는 거예요. 이게 율법의 완성이고 이걸 사랑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 것이 아니고 내가 너한테 사랑이라는 가죽옷을 입혔잖아. 그렇다면 네가 자랑할 것은 나 구원받았다, 앞에 나를 집어넣지 말고 주님께서 못난 놈 사랑해줬다는 십자가만 자랑하라. 이게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 나는 십자가 외에는 자랑치 않겠노라고 이야기한 거예요. 이게 팩트입니다. 이게 사실이에요. 이게 역사고.

 

다음 시간에 할 것은 주께서 이것 남기기 위해서 다른 것 다 부셔버립니다. 시온 산에 있는 메시아의 사랑 남기기 위해서 율법적 작용을 계속 이어가면서 율법은 모든 것을 심판하는 작용이 다음 내용에 나옵니다. 질그릇처럼 깬다고 나올 거예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흔히 세상에서 말하는 안 좋은 소식, 불행한 소식, 아픈 소식을 이제는 수치라 여기지 않게 하여 주시고 차라리 그것이 하나님 복음의 일부라고 여길 수 있는 저희들 마음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