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911b 부산강의 : [시편]3(2편)-경계선상의 존재 (강의:이근호 목사)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던 이슈가 뭐냐 하면, 왜 성령 받은 사도들이 시편 2편을 거론하느냐는 겁니다. 십자가 믿으세요. 이러면 간단할 문제를 왜 시편 2편을 거론하느냐? 거기에 열왕이 나와요. 당신들이 살고 있는 이 세계 자체, 우리는 자기 구원만 챙기면 되는 걸로 아는데 이게 본드가 붙어서 가기는 어딜 가느냐고 발목을 잡는 거예요. 성령을 받아서 성도가 되는 순간 갑자기 친한 친구가 떠나고, 그 집안 식구들이 미쳤느냐 하고 결별하고, 연애하던 사랑하는 사이도 그러려면 헤어지자고 나오고.
그렇다면 성령이 오는 게 내 뜻이 아니라면 그들과 분리가 일어나는 것도 내가 인위적으로 단도리 할 사항이 아니란 말이죠. 나는 불교 안 믿고 예수 믿겠다고 자신이 선택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나중에 성령이 와서 믿게 했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내 일이 아니고 주의 일이라면, 우리는 거기서 내 신앙생활을 포기해야 돼요. 내가 예수 믿는 걸 포기해야 돼요.
집에 물이 들어와서 일본 같은 경우에 쓰나미가 왔을 때 단단하던 집이 떠밀려 가버립니다. 바닷물에 실려 갑니다. 성령이 와버리면 우리는 뿌리 채 다 뽑힌 상태에요. 성령 인도하는 데로 떠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 상태가 무슨 상태지? 그럴 때 성령이 설명해줘요. 범사에 감사하라, 항상 기뻐하라. 내가 이런 상태라고 설명을 해준다고요.
뿌리를 내가 박아서 내 노동에 의해서 정착할 거라고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정신 바짝 차려서 살겠다고 할 때 이 말씀 지켜야지, 순종해야지, 복 받을 거야. 모든 게 계산에 의해서 하는데 그 계산이 너무나 공리주의란 말이죠. 나한테 이익이 되니까 믿고, 어떤 환란이 오게 되면, 예수도 안 믿는데 이런 복이 옵니까? 돈 더 내란 말이구나. 십일조 더 낼게요. 이런 식으로 하는데 성령은 산사태처럼 확 쓸려가요. 환란과 곤고나 핍박이 위협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는다. 핵심부분을 드러내기 위해서 원하지도 않는 환란, 핍박이 온단 말이죠.
그럴 때 우리는 환란을 겪었습니다. 이러면 안 돼요. 그러면 또 자기가 믿음이 얼마나 좋은지 자기자랑밖에 안 되니까 내게서 내가 손을 떼란 거구나. 그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은 열불 내는 거예요. 그들은 자연에다 어떤 작업을 했어요. 요새 말로 디자인이에요. 창의성을 발휘하는 겁니다.
옛날에는 자연에 순종하고 복종하고 종교적으로 뇌물 바치고 모든 민족이 종교적이고 자기가 죽고 난 뒤에 걱정되어 조상을 숭배해요. 어차피 만날 조상, 선배 만날 때 섭섭하게 하면 안 되니까 뇌물로 조상숭배하면 그리던 형제들 다시 만나서, 요단강 건너서 만나리라는 찬송가 가사처럼. 미리 대비하는 종교적인 방법인데 이제는 종교적으로 자연의 변덕스러움에 너무 시달렸으니까 드디어 과학이 그리스부터 시작했는데 사실은 페르시아부터 시작한 거예요.
그리스부터 철학이 나오면서 자연을 객체로 봐요. 나의 상대로 보고 나는 주체가 돼요. 세상이란 것은 내가 조립하는 데로 내가 디자인하는 데로 세상은 나에게 필요한 것만 뽑아내면 된다는 사실. 그래서 문화란, 또는 문명이란 조작이다. 덜어내고 걸러내고 필요한 것만 따로 뽑아서 이익 되는 것만 따로 해서 그게 문화고 문명이고 과학이에요.
그렇게 하면 더 이상 과학이 발달하면 분리될 이유가 없지요. 굉장히 휴머니즘이에요. 이념 간에 존엄성을 극대화시키는 겁니다. 북한이 핵 개발하니까 러시아와 중국이 대화로 풀자고 하지요. 그게 뭐냐 하면
인류의 보편적 가치는 소통에 있고 통합에 있고 대화에 있다는 거예요. 잘 들으셔야 돼요. 전쟁은 한시적이고 전쟁 뒤에 평화가 온다는 거예요. 그러면 평화가 목적이고 전쟁은 임시적 조치지요.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하지 않고 평화는 인간에겐 없는 거예요. 늘 악인과 선인, 그러니까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간의 전쟁이 본내용을 차지합니다. 성경은 그렇게 봐요. 끊임없는 싸움이에요.
이 싸움이 이스라엘을 통해서 멀쩡한 나라가 이스라엘이 등장함으로 있던 평화가 깨지고 없는 전쟁이 시작됩니다. 민수기 22장 볼까요? 기름 부은 자 끄집어내는데 이렇게 시간이 오래 걸려요. 제가 바로 결론을 내릴 수 없어요. 이스라엘이 지나가는데 모압 왕이 나오죠. 발락이죠. 불러낸 제사장 이름은 발람이죠. 그들이 발람에게 제물을 줘요. 7절에 보면, “모압 장로들과 미디안 장로들이 손에 복술의 예물을 가지고 떠나 발람에게 이르러 발락의 말로 그에게 고하매”라고 돼있어요.
왕이 선지자나 제사장에게 돈을 주는 겁니다. 제가 어제 낮 설교에 이 본문을 시간관계상 언급 못했는데 아리안 족의 종교가 힌두교에요. 힌두교에는 신의 나라에 질서가 있고 인간은 농사를 지어야 되기 때문에 제 때에 비가 와야 되고 햇빛이 나와야 농사가 잘 돼요. 그래서 중간에 제사장이 있어요. 가정이 잘 되고 가문 잘 되고 자기 부족이 잘 돼야 되니까 제사장을 세워서 하는데 제사장만 신의 질서를 알아요.
일반 아마추어들은 신에게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가, 제사장만이 자연의 질서를 알고 있는데 그 지은 책을 리그베다라 해요. 리그베다가 힌두교 경전입니다. 힌두교 경전에 있는 말씀과 자연현상이 일대일 대응이 돼요. 제사장이 말하게 되면 자연현상이 변덕이 일어나야 됩니다. 예를 들어서 갠지스 강이 바뀐다면 얼마 안 되어 바뀌어야 돼요. 그 정도 자부심은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신의 질서를 보니까 전쟁 가운데 있어요. 앗수르라 하는 나쁜 신과 인드라라 하는 좋은 신과의 전쟁 관계에 있어요. 여기 좋은 신은 나중에 불교에서 받아들여서 석굴암에 옆에 보좌하는 사람들이 있지요. 그게 힌두교의 선한 신이 보좌하고 있어요. 전쟁하는데 보급품이 필요해요. 여기에 돈과 제물을 지불해야 돼요.
이 종교구조를 보세요. 신을 위해서 자기들이 있는 겁니까? 자기를 위해서 신이 있는 거예요? 자기 자신을 위해서 신이 있는 거죠. 이 종교구조가 불교와 기독교의 모체가 되고 있어요. 교회가 얼마나 엉터리인지 아시겠지요. 다른 종교를 공부 안 하니까 교회가 얼마나 개판인지 교회가 몰라요. 기원은 자신의 구원이에요. 자신의 구원은 성경엔 없어요. 내가 나를 디자인하고 싶어 하는 거예요. 인간들은. 천국 가도.
그런데 이러한 인간의 자기 위주가, 제가 이야기하는 건 그거에요. 처음에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나올 때 애굽과 싸웠잖아요. 분리되고 난 뒤에 민수기 발람 이야기할 때 모압 통과할 때 또 싸우지요. 가는 곳마다 계속 분리가 일어나는 거예요. 분리가 일어나다가 나중에 사무엘상 8장에 가서 드디어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가나안 땅에 도착했잖아요. 제가 이번 수련회에서 분명히 이야기했습니다. 도착하고 인구 숫자 많았잖아요. 그러면 구원받을 것 없네요. 얻을 것 다 얻었으니까.
아브라함 자손이라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 이름 부르면서 결국 다른 일반종교와 똑같이 돼버렸어요. 자기를 위해서 있는 여호와가 돼버렸어요. 자기를 위해서 제사 드리고 그랬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다른 나라와 분리가 아니라 이제는 이스라엘 내부를 분리시키는 겁니다. 어떻게 분리하느냐 하면, 사람과 사람의 힘으로 유지되느냐? 이건 북이스라엘이에요. 그게 아니고 이미 돌아가신 분 덕택으로 사느냐? 이게 바로 다윗의 등불이라는 겁니다. 솔로몬이 우상숭배해도 망하지 않는 이유가, 솔로몬 자체의 애씀이 아니고 이것은 다윗에게 주신 약속을 생각해서 하나님께서 망하지 않게 한 겁니다.
그러면 언약이란 일종의 밴드인데 우리말로 묶음이죠. 언약대로 한다는 것은 묶은 것을 푸는 거예요. 콘택600이란 캡슐을 깨면 600개의 알들이 나오겠지요. 언약을 깨면 언약 안의 내용이 나오겠지요. 언약 안의 내용, 혜택 때문에 남쪽 유대나라가 안 망하는 겁니다. 그걸 유대나라가 인정해요. 그러면 그 당시 남쪽 유대나라는 실물적으로 뭘 보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걸 아느냐? 거기에는 성전이 있었던 거예요.
유대나라는 성전이 있지요. 성령 받은 사도들, 시편 2편을 인용한 사도들은 성전을 지워버리고 망자, 이미 죽은 자가 예수님이죠. 예수님을 성전자리에 집어넣는 거예요. 망자는 실물적이 아니에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세상은 그분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겁니다. 눈에 보이는 내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믿으라는 게 아닙니다. 참 이런 걸 설명하는 게 힘들어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믿어서 구원받자는 이야기가 아니고, 지금 눈에 보이지 않는 그분을 증거하라고 눈에 보이는 네가 존재한다는 거예요. 위치를 바꿔야 돼요. 예수님 때문에 내가 있는 거예요. 예수님의 밴드, 그 새 언약을 확인하기 위해서 내가 존재한다는 겁니다. 그분이 예수님이 일곱 교회를 쥐고 있는 거예요. 내가 그분을 쥐고 있는 게 아니고 그분이 오른손에 쥐고 있는 거예요.
전에 우리교회에서 어떤 장로님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어요. “목사님, 주의 오른편이 뭡니까?” 정말 어려운 질문을 했어요. 오른편이란 주께서 일하는 자리를 말합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나와요. 처음에는 주님이 하나님 왼편에 가있었고, 하나님께서 언약이 완성이 되고 난 뒤에서 예수님을 오른편으로 보내고 자신은 왼편에 와버려요. 자리를 바꿔요. 왜냐하면 오른편이 언약을 완성하는 자리거든요. 오른편에서 언약대로 실시된 자리입니다. 이게 출애굽기 15장에 나와요. 주의 오른손이 애굽 군사를 쳐부쉈습니다. 미리암이 홍해 건너고 찬양한 거예요.
시편 2편 2절을 봅시다.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그러니까 오른편에 있던 여호와께서 자기 자리를 인간에게 양도에요. 신은 인간에게서 나옵니다. 놀랍게도.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거든요. 실물적으로 볼 때. 큰일 날 뻔했다. 실물적으로 역사적으로 볼 때 신이 인간에서 나와요.
그러니까 어떤 인간도 믿을 수가 없는 거예요. 심지어 성도는 자기 자신을 대부분 시간을 안 믿어요. 다른 사람과 똑같은 인간인 줄 알고 있어요. 예수 그리스도가 내 인생을 이끌고 가는데 내가 나를 그걸 안 믿어요. 남들처럼 에너지니까 기계니까 돈이 날 살린다고 생각한 겁니다. 이걸 생존의 차원이에요. 하와 이름은 생존이 아닙니다. 생명입니다. 생명을 자꾸 생존으로 이해하는 것이 우리에요.
그런데 신은 어디서 오는가? 못난 우리 속에게 못난 신의 모습으로서 예수님이 나와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 이야기할 때 태연합니다. 우리는 메시아가 하늘에서 온다는 걸 안다. 우리가 당신을 알거든. 당신은 나사렛 사람이고 당신의 아버지가 목수라는 걸 알기 때문에 따라서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라는 거예요. 만약에 그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면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아 모시겠습니까? 어딜 봐서 메시아입니까? 전혀 메시아답지 않아요. 초라한 행색에다 약간 인기는 있다만 그 권력을 못 이기잖아요.
그리고 죽고 난 뒤에는 정들었던 세 명의 마리아가 있어요. 막달라 마리아, 어머니, 야고보 엄마 마리아가 세 명의 어머니가 믿음 때문이 아닙니다. 정 때문에 시체나 독수리한테 안 먹히도록 해야지, 라고 해서 무덤에 갔던 거예요. 세 명의 여인이 놀래 자빠질 뻔했습니다. 누군가 앉아서 “여인아, 뭘 보려 왔느냐?” 동산지기인 줄 알았어요. 왜 산 자를 죽은 자에게서 찾느냐고 했어요.
그 대목이 몰트만이란 유명한 신학자한테는 충격이었던 모양이에요. 자기는 예수님이 죽은 자가 살아났다고 생각했는데 그 대목을 보면서 죽은 자가 살아난 게 아니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났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살아남으로써 모든 인간은 이미 죽은 자로 판정이 돼버렸어요. 진짜 숨어있는 하나님 앞에서 모든 인간은 죽은 자에요. 고린도후서 5장 14절에 예수님으로 죽음으로써 모든 인간이 죽은 것이다.
이 사실을 우리가 성경 보면서도 내가 나를 안 믿어요. 성령 받았으면서도 내가 영적인 존재인 것을 안 믿고 자꾸만 세상 사람들 못 따라가서 환장했어. 그 사람들 못 닮아서 환장한 거예요. 그 사람처럼 잘 못 먹고, 잘 못 살고, 돈 없다고 스스로 자기 자신을 채찍하고 나무라고 자기를 못난 인간으로 만들어버려요.
그 정도로 우리가 믿음 없어요. 자기 자신도 주의 것이란 걸 안 믿고 내 것이라고 우기니까 이게 얼마나 불신앙입니까? 그래 삽시다. 죽을 때까지 불신앙 외에는 보여줄 게 없어요. 그 불신앙 앞에 십자가를 보여주셔서 놀랍게도 십자가 알려주시니 우리가 구원받은 자인 것을 아는 거예요. 내가 늘 예수를 부르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믿음이 없기 때문에 자기 관리하는데 외에는 다른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는 혈안이 돼있습니다. 에너지 채우는데, 기계니까. 돈이나 에너지 외에는 필요하지 않아요. 그것만 있으면 모든 게 해소된다고 굳게 믿습니다. 나도 믿고 저도 굳게 믿는데 주님은 들락날락하면서 그게 바로 죄라고 알려주니까 구원받은 사람이고, 저 사람은 성령이 안 찾아오니까 지옥 가는 거예요.
“왜 안 찾아옵니까?” 묻지 마세요. 이렇게 질문해야 돼요. “왜 찾아오십니까? 저 사람처럼 안 찾아와도 되는데 무슨 연관이 있다고 찾아오십니까? 왜 저에게 십자가를 보이십니까?” 질문을 그렇게 해야 돼요. 사도 바울처럼 “주여, 누구십니까?” 그 순간 내가 어떤 형편에 있는지 감안할 상황이 아니에요. 내가 도둑놈이든 뭐든 고려하지 마세요. 이게 그 순간 믿음입니다. 자기를 잘났는지 못났는지 선악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에요. 자신의 잘남이나 못남이니 기억나지 않아야 돼요.
교회 오랜만에 왔는데 목사님이 석 달 만에 오셨는데 할 때 진짜 믿음 같으면 석 달 만에 온 게 아닙니다. 석 달 만에 보내주셨지요. 따라서 석 달 만에 왔다고 해서 목사 앞에 주눅 들지 마세요. 그동안 주께서 안 보내주신 거예요. 한 순간에 앞의 의미를 한꺼번에 설명해줘요. 목사님은 주께서 허락하시니 목사지 나도 지금 보내주시네요. 잘난 척하지 마세요. 그동안 내가 게을러서 못 온 게 아니고 안 보내주셔서 못 왔다고 지난 일까지 의미를 부여해버리는 거예요.
그런 논조로 이야기하면 나중에 한 번도 교회 안 나오다가 죽기 직전에 성령 받아 예수 믿으면, 그동안 뭐하다 이제 와 믿느냐고 한다면, 그동안 주께서 꾸준하게 세상과 놀도록 추진해주셔서 지금 돌아보면 모든 게 범사에 감사합니다. 그걸 안 믿는 목사라면 뻔뻔스럽기는 낯짝도 두껍지. 평생 교회 와서 헌금도 한 적 없고, 전도 한 번 해본 적도 없고, 죽기 직전에 아슬아슬하게 자신의 분리됨을 의미해버리죠.
분리됨 다음에 경계지요. 성도는 경계선상에 있는 존재. 성도가 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아직도 이 땅에 활동하고 있음을 보이는 재료가 되는 겁니다. 그리스도가 오기 전까지는 발락이라는 왕은 권력자입니다. 모압나라는 발락의 손아귀에 있어요. 심지어 무당까지 발람이라는 샤먼까지 돈 주고 얼마든지 했어요.
모압 왕이 발람에게 돈 주고 저주해달라고 한 것은 모압을 발락의 통치 아래 계속 두기 위함이에요. 통합이 훼손되기 싫은 거예요. 그런데 이스라엘이 가는 곳마다 분리된다고 소문났기 때문에 그 축복을 제거하기 위해서 발람한테 부탁했는데 발람은 발락에 통합된 게 아니고 이스라엘에 통합되어 오는 집단에 축복해버린 거예요. 자기 말이 저주를 해도 축복으로 바뀌도록 신이 자기에게 나중에 여호와죠. 여호와, 이스라엘 신이 그렇게 해버렸다. 그렇게 돼버리면 대척관계, 전쟁관계에 있기 때문에 저쪽은 자동적으로 저주를 받게 돼있어요. 축복과 저주, 분리가 일어난 겁니다.
그래서 나중에 발락이 어떻게 했느냐? 돈 더 주고 발람을 불러요. 그러면 저 이스라엘을 저주받게 할 방법이 없는가? 있습니다. 어떻게? 이스라엘 내부에 내분이 일어나도록 만들어버리는 거예요. 그게 우상숭배 하도록 몇몇 사람을 참여시킵니다. 이스라엘 자체 내의 원리원칙에 의하여 스스로 자신의 오류를 도려내는 장치가 자동적으로 작동되기 때문에 우상숭배 한 사람을 죽이고, 민수기 25장에 보면, 염병으로 죽은 자가 이만 사천 명이었어요.
이만 사천 명 거덜 났어요. 하나님이 이스라엘 하나님이 아니죠. 하나님은 하나님의 하나님이죠. 자기 백성이라도 언약에 어긋나니까 잘라내잖아요. 마태복음 10장에 이런 말 있어요. 네 손을 잘라버려라. 네 발을 잘라버려라. 죄 짓는 걸 잘라내고 저주요소가 달라붙지 않도록 하라. 저주요소가 달라붙으면 그것 때문에 전체가 지옥 간다. 따라서 네가 지옥 가지 않도록 너한테 오염을 제공한 부분을 잘라내서 장애자가 되더라도 나머진 건질 수 있잖아, 라는 이야기를 주님이 하셨어요.
그 이야기를 자기 몸을 통합체로 보고 있는 인간에게 가능할까요? 가능하지 않지요. 네 몸을 네 통합체로 생각하고 네 스스로 자기를 지키겠다는 그 원리로는 도저히 지킬 수 없는 말씀을 준 거예요. 그럼 그 말씀을 지키려면 자기 자신을 지키는 원리를 뭐로 바꿔야 됩니까? 주의 언약을 위해서 우리가 재료가 되는 식으로 바뀌면 되겠지요. 주님께서 언약 완성,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해서 필요하다면 잘라내라고 드리면 되겠지요. 제 아이디어 어때요? 그러면 되지요.
얘가 천국 가는데 방해된다면 얘를 세월호에 빠져죽도록 하면 되거든. 그런데 자진해서 하는 사람들 없잖아요. 안산에 있는 고등학생 부모 중에서 그런 사람 없잖아요. 혹시 천국 가야 될 사람 같으면, 세월호가 일주일 전에도 운행했어요. 그때 멀쩡하게 갔다 왔어요. 일주일 후에는 몇 백 명이 죽었지요. 노란리본 달고 하잖아요. 이게 인간적으로 통합하자는 것 아닙니까.
누가 죽였어요? 하나님이 죽였잖아요. 왜 죽여요? 왜 죽이냐는 말 자체가 성립 안 된다니까요. 내 것 내가 죽인다는 데 네가 왜? 왜 죽이시냐고 나오면 그 질문 자체가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산다는데 왜 끼어드느냐는 말이란 말이죠. 노란리본 달고 할 때 나라가 하나로 통합됐지요. 그럼 결국 누가 누굴 공격한 거예요? 열왕들이 대한민국 국민들이 여호와와 그 기름 부은 자를 공격한 거예요. 세월호가. 내 얘를 왜 죽이느냐 말이죠. 왜 그때 풍랑일게 하고, 그 배에 철근 200톤을 왜 실었느냐 말이죠. 너무 실어서 복원력을 잃어서 침몰했잖아요. 왜 하필 유병언 회사 청해진해운과 계약하게 했느냐 말이죠. 다 하나님 책임이라고요. 철근 싣는 업자와 계약 맺을 때 차바퀴 펑크 나 보세요. 그런 계약 안 맺을 것 아니냔 말이죠. 뒤돌아보면.
이제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이 시편 2편을 언급한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빼놓고는 모조리 다 죽은 자고 그 죽은 자 배후에는 악마가 있다. 그래서 주님은 악마와 싸운 거죠. 인간은 들러리에요. 아무것도 몰라요. 그저 시킨 대로 한 것뿐이에요. 그 악마와 인간 사이에 세상 지도자와 샤먼들이 있고 아까 발락이란 왕이 있는 거예요. 왕은 정치적인 지도자가 되는 겁니다. 영적 존재니까.
예수님께서 죽었습니다. 아까 실물적으로 이 땅에서는 신이 인간에서 나와요. 신을 백날 찾아봐도 신 아니에요. 그건 악마가 만든 거예요. 신은 없어요. 인간이 천국 간다고 할 때 그 자체로 잘못된 거예요. 왜냐하면 천국은 없습니다. 인간이 만든 천국은 다 가짜기 때문에 천국 자체가 없어요. 없는데 예수님이란 인간이 만들었어요. 그리고 자기가 만든 천국에 나를 믿는 자는 들어간다는 거예요.
모든 게 분리라니까요. 양과 염소, 가라지와 알곡,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 이 이야기를 누가 했습니까? 인간 예수님 입에서 나왔잖아요. 하늘에서 음성으로 이야기했습니까? 같은 인간이라니까요. 같은 인간이니까 인간이 인간을 신이라고 믿겠습니까? 못 믿지요. 믿을 수가 없어요. 제가 이 말하는 것은 오늘날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지금 내가 믿을 수 없는 걸 믿고 있다는 자각을 해야 된다는 말이에요. 어지간하면 믿을 수 있다는 그런 생각 자체가 잘못된 거예요.
참말이여 (구자억) 아따 참말이여 믿을 수 없겄는디 하나님이 인간이 되서 이 땅에 오셨다고 진짜 참말이여 믿을 수 없겄는디 하나님이 날 대신해서 대신 죽어 주셨다고 이리저리 사방팔방 둘러봐도 어디가 이쁜 구석 있어서 하나님이 친히 찾아 오셔서 그 목숨을 내 준단 말이여 근디 참말이여 성경에 써 있는디 하나님이 인간이 되서 이 땅에 오셨다고 진짜 참말이여 성경에 써 있는디 하나님이 날 대신해서 대신 죽어 주셨다고~~~
그 말 맞아요. 믿을 수 없었는데. 예수 믿는 것은 가짜니까 필요 없어요. 예수를 믿는다 하지 말고 믿을 수 없게 하신 분이 당신입니다. 내 힘으로 믿을 분이 아닙니다. 이런 고백을 예수님 앞에 털어놔야 돼요. 왜 그러냐 하면 세상은 내가 출발점이거든요. 내가 알아서 믿는 것도 하고 선택하는 것도 내가 알아서 하고. 기독교 믿을까, 불교 믿을까? 기독교 믿어야지. 선택도 내가 한 거예요. 모든 것이 나로부터 출발했는데 세상에 그게 전부고 자기가 디자인하고, 디자인 한 그것이 세계관이거든요. 나의 현실관이란 말이죠. 내 중심, 나의 조작, 걷어냄, 덜어냄.
그런데 그분이 그걸 완전히 뒤집어서 그런 것과 상관없이 주께서 이미 나를 주의 사람으로 확정해놓을 때 우리는 믿을 수 없었다는 고백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그것을 요한일서 2장 27절에서 기름 부었다 해요. 이제 마지막 시간에 기름 부음에 대해서 설명하겠어요. 기름 부었다는 것은 분리입니다. 창세기 4장에서 아벨은 기름 부위와 몸통 부위를 분리시켰어요. 그래서 기름 부었다는 말은 분리된 거예요. 몸체와 떨어져나갔을 때 떨어져나가야 경계자 역할을 해요.
옛날 명화나 성경 삽화에 이런 게 있어요. 어떤 마을에서 저녁 짓는다고 연기가 피어오르고 뒷모습만 보이는데 지팡이 짚고 마을을 산 위에서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것 있지요. 목판화, 시커먼 그림. 후드 티 같은 것 입고 드디어 선지자는 마을에 등장했다는 것 있지요. 마을과 선지자가 분리돼있는 겁니다.
세례요한이 광야에서 외쳤지요. 복장 보세요. 기존에 에너지를 취득하는 복장이 아니에요. 농사짓는 복장이 아닙니다. 완전히 도태된, 축출당한, 배제당한 복장이에요. 추방당한 복장이에요. 이것은 협조에 의해서 사는 게 아니에요. 자급자족의 모습입니다. 이 산을 껴안고 광야를 껴안고 석청과 메뚜기를 먹는다. 그걸 세례 요한이 메뚜기를 먹은 이유는 영양가가 많아서 라고 하는데 영양가의 문제가 아니에요. 나는 그냥 왔다가 사라지는 떠나는 나그네 같이 너희들과 상대할 필요 없지만 주께서 상대하라 하면 상대하는데 나 이 동네 사람 아니야. 갈 거야. 항상 붙잡지 마. 나 갈 거야. 그런 자세에요. 세례 요한이 오실 엘리야니까. 분리를 의미해요.
기름 부었다는 것은 아벨의 제사에서 나왔고 기름 부음을 독특하게 특이하게 도드라지게 드러내기 위해서 기름과 기름 외에, 그리스도와 모든 인간을 철저하게 분리시킬 때 그 ‘기름 외’가 이미 연합으로 군왕, 추장, 영웅으로 통합돼있어요.
문명이란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이미 조작이라고. 디자인하는 거예요. 어떻게 디자인? 자연에 굴복하는 게 아니고 자연 가운데서 필요한 것만 따로 뽑아서 개인적인 질서를 잡아요. 질서를 자기 사는 땅에 박아 넣는 거예요. 이게 문명이고 문화입니다. 자연에서 하늘에서 숟가락 떨어집니까? 아니잖아요. 자연에서 자전거가 떨어지던가요? 어떤 노래에 하늘에서 남자가 떨어진다는 노래가 있어요. 할렐루야~~~ 해운대에 가면 여자가 바다에서 오는 것 같아요. 그것 때문에 해운대 많이 가지만. 특이한 복장을 한 여자들 있기 때문에 남자들이 가잖아요.
하늘에서 온 게 없기 때문에 그중에 필요한 것만 자기가 디자인하고 땅에 금을 채굴하고 은을 채굴해서 필요한 대로 기계문명이라 해서 오늘날 통합된 의지를 확보한 것이 바로 도시입니다. 농촌부터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도시부터 먼저 만들었어요. 창세기 4장에도 나와 있고 고고학 정보도 그렇게 나와 있어요. 도시에서 나왔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도시를 주관하는 왕이 영웅이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았다는 말이에요. 영웅 중심으로 소문 듣고 모이게 돼있어요. 옛날 영웅은 사냥을 잘하는 사람입니다. 당대의 영웅이라. 사냥에 뛰어났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농경시대가 수렵시대보다 더 잘 산다고 하는데 더 잘 살지는 않아요. 농경시대는 영웅이 있고 영웅이 당대 영웅으로 끝나는 게 아닙니다. 영웅이 되면 거기서 이름을 뽑아내요. 이건 신화론에 다 나오는 이야기에요. 영웅에서 이름을 뽑아내면 그 이름 중심으로 영웅과 똑같은 혜택을 하늘에서 주기를 이름을 모심으로써 덕을 얻겠다는 겁니다.
김일성이라면 김정은이 김정일 아버지를 배척했습니까? 계속해서 김일성 생일은 살아있어요. 4월 15일. 이 날에 제 딸 생일이에요. 김일성은 이름으로 계속 살아있어야 돼요. 그게 아버지 이름이에요. 이게 조상숭배에요. 조상숭배를 실물화시킨 집단이 북한입니다. 북한은 정치집단 아니에요. 종교집단입니다. 김일성 동상이 신념이 되어 결집을 다지는 겁니다.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그것뿐입니다. 아버지의 유지입니다. 무조건.
세습적으로 김일성이란 왕, 그 아들이 왕이 되고, 그 손자가 왕이 되는 거죠. 그럴 때 사우디아라비아처럼 누가 진짜 아들이냐? 첩의 아들이냐, 진짜 아들인지 싸움이 일어나겠지요. 권력싸움 일어나면 정실부인이 아닌 것은 계속해서 피비린내 나는 내부싸움이 일어나겠지요. 이게 야곱과 에서도 마찬가지에요. 맏이도 아닌 게 맏이 노릇하는 그게 얼마나 반칙이에요. 왜 그렇게 해야 되느냐 하면,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야 돼요.
왕은 민족이 우선이고 민족혈통을 유지하기 위해서 왕이란 영웅이 도입되는 겁니다. 왕은 초법적인 법에서 벗어나야 돼요. 왜냐하면 법에서 벗어나야 누굴 처벌할 권한을 줄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20세기 초반에 칼 슈미트란 법 철학자가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독재자가 있어야 나라가 돼요. 대통령, 뭘 잘났나? 이러면 나라꼴이 안 돼요. 법에 저촉이 안 되는 초법적인 존재가 있어야 순환이 된다니까요. 순환이 안 되면, 헌법재판관이 그렇게 보는 것은 사적인 견해입니다. 이번에 박근혜 탄핵 재판할 때 박근혜 측 변호사들이 하는 말이, 그것은 재판관 사견 아니냐고 공격한 거예요.
그런데 만약에 초법적인 왕이 있다면, 짐이 곧 법이죠. 17세기 프랑스 절대주의 국가가 그렇게 생겼잖아요. 나중에 1789년에 법에 목이 날아갔지만. 프랑스 독립혁명, 평등, 자유, 박애 정신이라 해서 왕을 날려버렸어요. 왕을 쳤다는 말은 그 다음부터 나라가 개판 됐다는 말이에요.
그래서 그게 아니라고 왕이 있어야 된다고 해서 세운 나라가 네덜란드, 벨기에, 그리고 영국, 호주, 캐나다도 마찬가지고. 입헌군주제 아닙니까. 나라가 초법적인 존재가 있어야 돼요. 태국, 일본도 마찬가지고. 행정은 총리가 하고 상징적인 존재가 있어야 된다. 그런 것으로 종교로 만든 것이 천주교입니다. 천주교 교황은 그 자리 보존하라고 있는 거예요. 인물이 개판이든 뭐고 관계없어요. 무조건 그 자리를 위해서 걸쳐놓은 게 교황입니다. 훌륭해서가 아닙니다. 교황이 무슨 짓해도 터치하면 안 돼요. 그러면 전체 조직이 무너져요.
그런 교황을 빼다 박은 것이 오늘날 개신교 당회장제도에요. 목사는 교인이 건드리면 안 돼요. 목사는 하나님이 직접 건드려야지 목사 무슨 짓을 해도 돈을 밝히고 여자 밝히고 해도 장로들이 건드리면 안 돼요. 그러면 교회 꼴이 안 돼요. 오직 기름 부은 자는 누구밖에 없다? 목사만 기름 부었고 그래야 교회질서가 유지된다고요.
민주주의는 반칙이에요. 나라꼴이 안 됩니다. 민주주의를 중우정치라 해요. 어리석은 대중들의 정치에요. 어리석지 않으려면 200~300명 또는 2000~3000명 이 정도 경우엔 돼요. 이렇게 처음으로 생긴 것이 아테네 민주주의제도에요. 민주주의가 숫자 적을 땐 됩니다. 의논이 되니까. 화백제도는 돼요. 몇 명 안 되니까. 왕이 없는 나라가 왕이 있는 나라에 망한 사례가 가야가 신라에 망한 겁니다. 우리는 좋은 게 좋다. 좋은 게 좋은 게 아니에요. 독재자가 없으면 나라꼴이 안 됩니다. 뭐 문재인한테 실망했다고요? 문재인은 제대로 하고 있는 거예요. 좀 더 해야 돼요. 전두환만큼 해야 돼요. 헬리콥터 띄워야 되고 공수부대 해야 돼요.
인간은 의논해서 나라꼴이 되지 않습니다. 이건 회사도 교회도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빠가 가장 노릇 못하면 엄마라도 해야 되고, 엄마가 못하면 형이라도 해야 되지 가정에 중심이 있어야 되지 그렇지 못하면 중구난방이 돼서 가정이 안 돼요.
셋째가 아버지 병들었을 때 병수발 다 했는데 아버지는 옛날 조상 생각해서 행방도 모르는 내 모든 재산을 맏이한테 준다하고 죽어버리면 집안 어떻게 되겠습니까? 엉망 되겠지요. 그런데 왜 옛날 할아버지는 맏이한테 주려고 합니까? 제사를 드려줘야 돼요. 그래야 죽고 난 뒤에 행복하게 영원히 천국 생활할 수 있어요.
이런 종교가 있다니까요. 종교는 설명이 안 돼요. 왜? 자기중심이기 때문에. 개인이 이런 의식으로 집단화한 것이 국가고, 그게 유대나라고 그것에 바로 예수님이 죽었잖아요. 끝났어요. 인간으로 죽었어요. 그런데 기름 부음이 일어납니다. 죽었는데 죽은 자를 성령에 의해서 사흘 만에 살아났지요. 언제 살아나는가? 모든 인간은 똑같다는 것이 확인되고 난 뒤에 살아나신 거예요. 그때까지 이스라엘은 멸망하면 안 돼요. 그 이스라엘이 기어이 메시아를 죽여야만 비로소 예수님 빼놓고 모든 인간이 한 통속이라는 것이 밝혀질 때 모든 언약은 완성되는 겁니다.
언약 완성이 뭡니까? 모든 인간은 자기밖에 모른다는 것이 확정되는 게 언약 완성이에요. 그래서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어떤 모습입니까? 저것 믿으면 구원받겠네,가 아니라 주여, 나는 구원될 자격도 없는 존재였군요.누구 말대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 이렇게 진리의 메시아를 우리가 떠밀었다니, 우리가 싫어했다니. 내 속의 악마가 주님을, 뱀의 성질이 여자의 성질을 떠민 거예요.
지금 우리도 여전하지만 차이점이 뭐냐? 성령께서 십자가 앞장세워서 날마다 우리에게 이 사실을 알려준다는 그게 바로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이게 바로 경계선상에 있는 것이고 이미 그리스도와 통합된 거예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실제로 십자가로 죽고 부활함으로 말미암아 세상이 어떤 동네인 것을 실제로 팩트로 알려주셨기에 이제는 우리가 당당하게 이 복음을 주저하지 말고 전할 수 있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