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강의

시편3-경계선상의 존재 170911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7. 9. 13.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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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윤범 (IP:14.♡.134.25)17-09-13 11:32 
20170911a 부산강의 : [시편]3(2편)-경계선상의 존재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시편 2편하겠습니다. 시편 2편을 사도행전에 보면 사도들이 굉장히 인용을 많이 했어요. 왜 시편 2편을 사도행전에서 베드로와 사도 바울이 그렇게 인용을 많이 했느냐? 그것은 시편 2편이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고 부활하신, 모든 걸 완성하신 거죠. 완성하신 내용이 시편 2편에서 집약적으로 요약돼있다고 보고, 그리고 시편은 그 당시 유대사회에선 어릴 때부터 교육으로 달달 외웠다고 보면 됩니다. 그리고 유대교회에서 어떤 집회를 한든지 축제를 벌인다든지 행사를 벌일 때는 특히 시편 1,2편, 시편 전체가 사람들에게 어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이유가 이 시편에서 우주의 중심이 나와요. 그 우주의 중심을 성전이라고 합니다. 성전은 그 당시 지구상에서 유대인 자신의 나라에 독점적으로 성전이 있는 겁니다. 성전 중심으로 세상은 제대로 돌아가고 있다고 봤는데 이게 유대사회에요. 스데반 집사는 이 성전을 뭐로 교체하느냐 하면, 성전은 실물적이에요. 건물이 있지 않습니까? 

이런 게 성령 받은 스데반 집사 같은 분이나 성령 받은 사도들이 하는 말이 굉장히 도발적이에요. 성전이란 실물이 있고 이 실물은 시편에서 다윗이 지어서 분명히 성전이 있으면 그 다음에 눈에 보이는 성전이 있기 때문에 누가 뭐래도 유대사회에 등록하게 되면 나중에 천국 간다는 것은 확실하거든요. 

그런데 스데반 집사 같은 경우엔 성전을 무의미로 돌려요. 이걸 의미 없음으로 돌리고 의미 있는 것을 성전 자리에 집어넣는 데 그것이 실물이 아닙니다. 망자입니다. 망자란 죽은 자죠. 죽은 자를 성전 자리에 집어넣는단 말이죠. 환장할 겁니다. 산 자들에 대해서 서로 의지하고 기대하는 것이 이 세상 사회잖아요. 사회가 구성되려면 눈에 보이는 것들과 협력체제가 돼야 돼요. 협동해야 되는데 성전중심으로 유대사회가 모여서 이 성전은 대대로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예언한 것이 다윗을 통해서 실현된 것이 성전입니다. 

따라서 성전이 있는 이상 분명하게 명확하게 우리 유대교만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유일한 종교라고 자부심을 가질 수 있어요. 어린애든 어른이든지 간에. 그런데 이걸 무의미한 것으로 돌리고 죽은 망자를 집어넣으면 어떡하란 말입니까? 평소에 눈에 보이는 걸 신봉한 자에게 눈에 보이는 것을 부정해버리면 눈에 보이는 것으로 믿음의 내용으로 채웠던 사람들은 졸지에 헛 믿었나, 가짜였어, 헛수고였어, 뭐지? 

그래서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이, 제가 사도들이라 했지만 그 앞에 붙는 게 있어요. ‘성령 받은’ 사도들이라고 분명히 해야 됩니다. 베드로 사도에게 아나니아와 삽비라 헌금을 속이고 반만 낸 사람들 있죠. 베드로가 이런 말했어요. 너는 나를 속인 게 아니라고 이야기해요. 아나니아와 삽비라야, 너는 나를 속인 게 아니고 성령을 속였단 말이죠.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이 중요해요. 성령을 속이는 것은 네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사단이 역사해야 성령을 속인 게 돼요. 사단의 힘을 빌려야 성령을 속인 게 돼요. 사단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그저 인간이 인간을 속인 것밖에 안 돼요. 

이 말은 성령이란 보이지 않는 그것이 보이지 않는 것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안 돼요. 보이지 않는 것 때문에 일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보이지 않는 분이 성령으로 일하는데 과연 그런가, 안 그런가는 성령 안에서 사탄이 짝을 맞추어 등장해줘야 세상은 무의미한 조직이 아니라 의미 있는 체제로 바뀐다는 것이 사도의 성경해석입니다. 이것은 해석이 어려운 정도가 아니고 불가능합니다. 

눈에 보이는 저 사람은 어떻게 하면 내 교인 만들까? 이건 항상 눈에 보이는 그 사람에 작업을 걸어야 돼요. 혹시 아이가 수험생입니까, 경제가 어렵습니까, 몸이 아픕니까? 내가 기도해서 신에게 빌어서 뭔가 당신에게 효과를 드리겠다는 것은 목표점이 실물적입니다. 성령에 관한 게 아니고 인간에게 보다 유익을 주게 되면, 그렇게 유익을 주는 것을 공리주의 철학이라 합니다. 

그 사람에게 이익을 주게 되면 그 사람은 행복을 느낄 것이고 행복을 준 사람과 받은 사람이 결집이 되면 그것이 바로 이 세상에 인간사회가 구성된다는 이론이에요. 가족끼리 단합해야 되지 않느냐, 이런 흔히 하는 상식적인 이야기가 전부 다 공리주의에서 나온 겁니다. 이익 없으면 행동하지 않는다. 더 나아가서 내가 행복을 목표로 하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전부 다 실물적, 눈에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에선 눈에 보이지 것이 아니고 눈에 보이지 않는 성령을 언급하고 그리고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죽게 될 때 사탄이 성령을 훼방하기 때문에 그 결과 실물적으로 죽음이 등장한 거예요. 망자, 죽었던 예수님이 새삼스럽게 죽게 만드는 게 아니고 이미 죽은 자로 확인시키는 작업을 이미 이 땅에서 죽임 당한 예수 그리스도의 할 일이 되는 겁니다. 

이것을 오늘 시편 2편을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이 중점 핵심 해석으로 거론했기 때문에 이걸 염두에 두고 시편 2편을 봐야 돼요. 시편 1편에서 2편으로 나아가는데 분리와 경계와 통합이에요. 분리란 것은 인간에게 그다지 환영받지 못합니다. 자연의 변덕스러움에 대해서 인간이 힘이 규합할 수밖에 다른 수가 없어요. 분리가 처음 나온 게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하와 사이에 분리가 일어납니다. 분리가 일어나면서 나와 너, 주체와 객체로 분리돼버려요. 나와 남, 또는 자아와 타인이 성립됩니다. 

그렇다면 이 자체로 문제가 있다는 거예요. 나와 너로 분리된다면, 분리된 인간 각자에 어떤 칩이 담기게 되는데 할당받은 선악체제가 각자 삶의 기준으로 포함돼버려요. 그게 선과 악을 가름하는 겁니다. 그 가름하는 기준이, 본인이 그렇게 하는데 아까 이야기했듯이 나한테 이익이 되면 선이 되고, 나한테 불리하면 악이 되는 거예요. 

분리란 것을 사람들은 질색이에요. 가족끼리 놀러 가는 것도 단합하기 위해서 가는 거죠. 그런데 창세기 4장부터 벌써 아버지와 엄마가 분리돼요. 성경에서 선악체제로 분리된다고 돼 있잖아요. 그런데 도킨스는 dna의 작용에 의해서 분리된다고 보는 거예요. 개인이. 각자의 dna가 타인의 dna와 경쟁관계에 있어서 힘을 모을 때 인간은 진화된다고 본 겁니다. 

도킨스의 이야기가 [이기적 유전자]란 유명한 책인데 인간은 dna를 전파하는 숙주에 불과하고 인간은 기계란 겁니다. 인간은 기계란 말이 자본주의와 너무 잘 맞는 거예요. 인간은 돈 버는 기계입니다. 인간 세포 하나하나가 다 기계잖아요. 기계에 필요한 것은 에너지에요. 에너지를 계속 주입하게 되면 세포가 살아있다고 볼 때 그 에너지의 마지막 멸망을 쥐고 있는 것은 현대양자물리학입니다. 양자물리학, 원자구조, 원자에서 원자 하나 떼어내는데  1메가일렉트론볼트(MeV)라는 이것이 필요하다는 그 원리에 의해서 방사성동위원소 연대측정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지구는 52억년, 우주는 137억년이 나오는 겁니다. 

각 체제가 짜져요. 모든 것은 에너지에서 양산된 물질의 관계로 통합돼 설명이 되죠. 그런데 현대과학이란 종교에서 뭐가 빠지느냐 하면, 분리될 건더기가 없어요. 에너지와 에너지 사이에 무슨 분리가 있어요. 다 같은 에너지인데. 에너지가 뭉쳐져서 너와 나가 생긴단 말이죠. 그러니까 과학이란 너와 나란 것을 수천 년 동안 인간의 학문이 너와 나라 했다면 그래서 결국은 인종끼리 전쟁밖에 더 있어요? 무기를 발달시킨 서양이 동양을 점령했잖아요. 

이제는 지구를 통합시키는데 어떻게 하느냐 하면, 인간을 기계로 전환시키면 돼요. 백인종이든, 동성애자든, 이민자인지 묻거나 따지지 말고 스스로 자급자족하는 기계에 불과한 거예요. 기계가 필요한 것은 기름 쳐주고 에너지 줘야지요. 그래야 움직이잖아요. 그 에너지가 지구의 범위에서 태양에너지입니다. 지구가 어떻게 생성되었는가? 처음에 태양에너지부터 시작된 거예요. 태양에너지를 수용하는 엽록소가 발달해서 세포분열, 단세포부터 해서 전부 다 태양에서 나온 거예요. 산소가 발생되고. 최초로 산소를 받아들이는 산호초 같은 작은 균들의 바다에서 일어나고. 호주의 산호초에서 최초의 흔적이 보인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사회에서 에너지가 필요하다면 에너지를 운반하는 매개체가 돈이에요. 현재 우리가 너무나 익숙하게 아는 개념들, 단어들이 전부 다 딱딱 들어맞아요. 나는 살고 싶다. 돈 있다. 돈은 어디서 나오는가? 인간이 갖고 있는 세포가 움직이는 것, 열심히 움직이는 걸 노동이라 해요. 노동해서 저쪽에 필요한 에너지를 제공하면 그 값만큼 에너지 뭉치를 받고 비트코인이라도 괜찮아요. 무조건 돈으로 받고 그 돈으로 시장에서 내 에너지를 채우고. 인생의 의미는 그것이 끝이에요. 기계가 기계답게 사는 것. 

그런데 기계답게 살기 때문에 황인종, 백인종, 유색인종 관계없고, 아프리카인, 서양인 관계없고, 이민자냐, 정착민이냐 관계없고 모든 것은 기계니까 모든 기계를 포용하는 마음, 그것이 바로 유엔의 정신입니다. 이걸 인류애지요. 그동안 우리는 이런 식으로 교육받았고 익숙해져 있지 않습니까. 분리가 될 리가 없어요. 그런데 말입니다. 

시편 1편 5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악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벌써 악인과 죄인이 분리 되지요. 6절에 보면,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벌써 분리가 일어난 겁니다. 

분리가 일어난다면 과학시대가 오기 전에 인간의 본색이 드러나기 이전에 그동안 인간들은 나름대로 구축했을 것인데 그걸 에너지의 힘이라 해요. 힘 있는 오야봉이 누구냐 하면, 시편 2편에서 왕이라 해요.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세상의 군왕들의 일어섰어요. 일어서서 강력한 반발과 반항과 저항을 하는데 그 목표점이 뭐냐?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여기서 성경에서 제일 난해한 용어 나왔습니다. 기름부음이 뭐냐? 그 기름이 뭔데 세상의 열왕들이 핏대를 올리며 화가 나서 분노해서 기름 부은 자를 공격하느냐 말이죠. 이게 시편 2편 2절에 나온 이야기잖아요. 그러면 이것이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실측이 돼야 돼요. 그 흔적을 찾아내야 돼요. 적어도 우리가 성경을 본다면. 성경해석 만만치 않지요. 성경해석을 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느 동네에 살고 있는지 겸하여 규정돼야 됩니다. 찾아내야 돼요. 

우리가 부산공부하면서 철학공부를 계속 했잖아요. 그들의 주장 들어보면 납득이 되고 일리 있고 동감하지요. 인간이 뭔지 철저하게 규정해 들어갑니다. 한 3년 동안 [80여명의 신학자들]하면서 종교에서 철학으로 바뀐다고 우린 이야기하잖아요. 그게 아니에요. 종교에서 과학으로 바뀌었어요. 세상의 구심점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구심점을 찾는 이유가 인간이 자연에 너무 속박될 필요 없다. 독립하자. 

탈레스가 말했습니다. 세상은 물로 돼있다는 겁니다. 탈레스가 조사를 했어요. 벌레 하나 어떻게 자라나는지 조사해보니까 물이 없는 곳에 생명이 없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탈레스는 어느 정도냐 하면, 화산이 있으면 화산이 어떤지 화산을 찾아가서 들여다보다가 빠져 죽었습니다. 그 정도 학구열이, 철학자라 하지만 과학자에요. 

오늘날 과학은 이거에요. 숫자, 기호입니다. 방정식이에요. E=mc² 물질의 변화에 빛의 속도를 제곱하면 에너지가 나온다는 거예요. 이게 응축이고 집약하는 겁니다. 이 말은 과학이란 뭐냐 하면, 자연이 무질서하고 인위적이죠. 자연이 변덕스러운데 왜 변덕스러우면 안 되느냐 하면, 우리가 노리는 것이 내가 존재하고 있는 이 자리가 안정적일 때 행복을 느껴요. 왜 그런지 그건 모르겠고. 하여튼 무조건 안정적일 때 행복을 느껴요. 자주 이사 다니지 말고 한 자리에 정착하면 행복을 느끼는데 

내가 안정적이길 원하는데 자연에서 내 구미에 맞추어서 질서를 찾아내는 거예요. 어떤 작업을 해야 되느냐 하면, 내 안정성에 훼방되는 것은 걷어내는 작업이에요. 오늘 강의제목을 초반에 하다면 걷어내는 작업이에요. 나한테 필요한 것과 필요하지 않은 것을 구분해서 필요한 것을 제치는 행위가 인생의 평생 행위입니다. 이미 돌잔치부터 시작되는 거예요. 마이크 놓고, 돈 놓고, 청진기 놓고. 성경책 놓는 사람들은 없습니다만. 실 놓고 하지요. 

마이크 잡으면 특히 딸한테 아나운서 되란 것이고, 청진기는 의사되란 것이고, 책은 교수되란 이야기고, 실 잡으면 오래 산다는 것이고, 돈 잡으면 부자 된다는 것 아닙니까. 그럴 때 애가 쓸데없이 다른 것 잡으려고 하면 엄마가 유도하곤 하죠. 돈 쥐면 박수치고 좋아하죠. 부자 되겠구나. 걷어내는 작업이에요. 

탈레스 이전에는 인간이 변덕스러움을 당할 수 없어서 하나님 앞에 정기적으로 뇌물을 드렸어요. 이걸 어제 낮 설교에서 보급품이라 했어요. 하도 자연이 변덕스러우니까 감당이 안 되죠. 오늘같이 비오면 1년 농사 다 날릴 수 있거든요. 그래서 신을 좀 달랠 필요가 있어요. 신을 달래기 위해서는 뇌물을 줘야 되고 또 신을 달래는 이유가 살아있을 때 복을 받아야 되지만 더 큰 문제는 죽어서 귀신 되어 만날 것 아닙니까? 그때 잘 돼야 되잖아요. 그래서 죽어서 간 조상들이 집결하고 있는 인간이 모인 장소가 하늘나라에 따로 있답니다. 그 장소가 유지되기 위해서 필요한 보급품, 필요한 여러 가지 자재들을 보내야 됩니다. 그게 제물을 바치는 겁니다. 

그런데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사람들이 등장해서 소크라테스도 그런 이야기했어요. 도대체 언제까지 바쳐야 되느냐? 인간이 자존심이 있지. 신, 지가 뭔데? 한 번 붙자. 이게 그리스로마 신화입니다. 처음에는 신한테 져요. 나중에는 신과 인간의 대결이 안 되니까 신이 인간을 탐내게 만들어요. 인간의 머리가 비상하죠. 신이 인간을 탐내게 되면 신과 인간 사이에 반신반인이 나오겠지요. 이 일을 샤먼들이 해요. 알타미라 동굴에 일만 오천 년 전 그림에 그런 게 있답니다. 들소그림. 사냥 잘하기 위해서 짐승 탈 쓰고 나온 그런 벽화들이 있어요. 라스코 동굴벽화도 그런 거고. 

사람과 신이 혼인하게 되면 인간보단 월등한 영웅이 되겠지요. 영웅 선호사상이에요. 영웅이 되면서 인간이 단체로 나설 게 아니고 대표자로 파견하는 겁니다. 신 앞에. 영웅이 나서서 신의 변덕스러움, 신의 재앙을 해소케 하면 되지 않느냐고 합의를 보게 만듭니다. 샤먼입니다. 영웅이고. 그게 창세기 6장에 보면 나오죠. 하나님의 아들과 사람의 딸들이 혼인해서. 

한 번 볼까요? 창세기 6장 2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아름다움을 본다는 말이 미혹된 거예요. 아예 새로운 계보, 영웅의 계보를 만들어요. 일반 평민들은 영웅의 계보에 잘해주면, 그게 왕이고 추장이죠. 그 영웅들은 뇌물을 받았으니까 그들은 채무자가 되는 겁니다. 받아먹은 게 있으면 양심이 있으면 내놔야 되지 않겠습니까. 십일조를 받았으면 어지간한 사업이나 가정형편은 봐줘야 되는 것이 하나님 도리를 다하는 것으로 보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과학 이야기하지 않고 마치 종교 이야기하는 것처럼 느껴지지요. 중요한 것은 이제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과학은 인간을 기계로 봤지요. 기계는 에너지를 필요로 하지요. 에너지는 남성, 여성 없습니다. 그냥 에너지에요. 모든 철, 화합물질 등 백 몇 가지의 원소들을 전부 통합할 때 에너지 하나로 되는 거예요. 이게 과학이에요. 양자물리학이 모든 걸 다 쥐고 있으니까. 생물학은 거기서 파생된 것이고. 

성경은 그걸 빼놓지 않아요. 성경은 모든 걸 포함하거든요. 그걸 흙이라 합니다. 흙으로 환원되는 겁니다. 현미경으로 원자, 분자 찾을 필요는 없어요. 그냥 표면적으로 보면 되니까. 언어란 타인과 소통하기 위해서 있기 때문에 네가 쓰는 함축된 상징을 교환하면 되기 때문에 흙이란 말속에 다 포함되는 겁니다. 

그런데 창세기 3장에서 모든 인간은 흙이 되잖아요. 이건 눈으로 보이죠. 이걸 아까 실물 또는 실물적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자기 아내 이름이 생명이라 돼있어요. 그렇게 되면 이걸 통합하면 인간은 뭐가 되느냐 하면, 과학적으론 에너지로, 끝. 이게 진리라고 하고 싶은데 성경은 흙+인간=생명이라 해서 인간으로 보는 거예요. 하와가 이름이 생명이란 뜻이에요. 아담은 흙이고. 둘이 부부가 되어서 자식을 낳게 되면 이 자식은 흙으로만 아니고 흙과 생명의 혼합체가 나옵니다. 이걸 영적 존재라 합니다. 정신적 존재에요. 

인간이 계속 태어날 때마다 흙이 자식이 아니고 어떤 정신적 존재를 생산하죠. 생명이란, 흙이란 이름을 누가 붙여준 거예요? 하나님이 붙여줬죠. 자기가 흙이라 하지 않았지요. 난 허무하니까 흙이라 할까? 아담이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둘이 의논한 것도 없어요. 인간은 배제적이고 하나님이 이름을 붙여줬지요. 

이렇게 인간을 번식하는 이유가, 바로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다툼, 이건 전쟁입니다. 좋은 관계 아니에요. 물어뜯고 때리는 관계에요. 이런 관계라는 정보, 체제, 내용, 인간의 역사가 흐르는 실제로 담긴 내용에 질료가 되지요. 이건 형상이 되겠고. 인간은 받침대가 되고 배경이 되고 재료가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계획을 담는 재료가 되는데 이 재료가 의미에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다툼이 의미가 되는 겁니다. 이 말은 인간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의미가 없어요. 우리는 같은 사람인데 왜 싸우지? 그 싸우는 가운데서 의미가 나와요. 싸우면서 왜 싸우는지도 몰라요. 무조건 싸우고 싶어요. 

그런데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의미는 시편을 주신 이스라엘 민족만 특별히 담아내게 돼있어요. 이스라엘 역사는 화물열차로 보면 되고 거기에 석탄이 담겨있으면 하나님의 의미가 담겨있고 마지막 종착역까지 달리는 것은 기관차 역할 하는 이스라엘 역사가 하는 겁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역사는 나중에 토사구팽 당하죠. 실컷 전달하고 자체 폭발해버립니다. 꼭 예수 그리스도를 닮았어요. 예수님께서 실컷 좋은 일해 놓고 마지막 십자가에서 저주받거든요. 그러면 예수님이 하는 일의 의미가 뭐다? 인간들의 알지 못하면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를 알리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거예요. 

이러한 싸움이니까 이 싸움은 분리를 이야기합니다. 인간은 서로 싸워야 흙으로 돌아가요. 왜 싸우는지도 모르고 왜 사는지도 모르고 그냥 흙으로 돌아가요. 에너지 뭉치로 태어났다가 에너지로 돌아가는 거예요. 이런 이야기는 인간들이 잘하고 있잖아요. 에너지 덩어리 나온다. 딸이다, 아들이다. 중간에 여자하기 싫은 사람은 남자하고, 남자하기 싫은 사람은 여자하고. 에너지 조작에 의해서 되니까. 앞으로 인공지능이 발달하게 되면 빅 데이터 들어오게 되면 자기가 하고 싶은 모델로 바꿔버려요. 

분리, 경계에서 통합이 되는 겁니다. 분리는 시편 1편에서 했다 했지요. 악인과 선인, 선인과 악인 분명이 구분됩니다. 그런데 분리 기준이 뭐라고 했습니까?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지 않는 사람은 복 된 사람이 아니에요. 저주받는 사람이에요. 율법으로 말미암아 분리가 일어나면서 나중에 통합이 돼요. 율법이 스스로 경계를 만들고 경계를 넘어서면 통합이 된단 말이죠. 이것은 기존의 교회에서 주장하는 것은 전부 사기고 완전히 칠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인간이 죄인인데 어떻게 의인되고 구원받는다고 주장하잖아요. 이것은 하나님 뜻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진척되는지 보여주는 것이 복음이란 말이죠. 인간을 빼요. 인간은 재료에 불과하니까. 그런데 사람들이 평소에 자신이 분리체제에서 마귀의 후손이거든요. 아담의 후손 아닙니까. 아담은 흙이잖아요. 

그럼 여자는? 여자는 이미 남자에 복속되어 제2의 남자에요. 여자는 남자를 사모하고 남자를 추구하게 돼있습니다. 남자 앞에서 여자는 결핍을 느끼고 거세를 느낀다는 거예요. 미흡한 존재로서 여자가 태어난 거예요. 순서가 아담부터 먼저 만들어놓고 여자니까 여자는 독자적인 의미체제를 못 갖춰요. 남자가 있음에 여자가 있단 말이죠. 남자 없는데 독자적인 여자는 없어요. 남자를 위해서 있어요. 

이게 고린도전서 11장에서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순서 바꾸지 말란 겁니다.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그 사슬, 그 사다리를 혼잡케 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이게 에너지밖에 없는 우리에게 계속해서 의미를 제공하는 겁니다. 구약에선 이스라엘을 통해서 의미를 주는 거예요. 

지금 제가 계속 이야기하는 것이 아까 문제를 던졌습니다. 어째서 세상에 있는 왕들이 나서서 분노하면서 여호와와 그 기름 부은 자를 공격하느냐? 그 실정을 우리가 찾아봐야 되잖아요. 그래야 성경해석이 될 것 아닙니까. 성경에 이런 내용이 있더라, 끝. 이러면 안 돼요. 분명히 모든 세상의 왕, 트럼프, 김정은, 문재인이든지 왜 모든 지도자들이 일치단결해서 왜 여호와와 기름 부은 자를 공격하느냐고 시편 2편에 나오게 되면, 

성도가 아닌 사람들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우리가 언제 그 기독교가 뭐라고, 우리가 천주교를 공격했어, 기독교를 공격했어? 천주교, 기독교 전도해. 문재인 대통령 안 말려. 우리는 장려한다고 분노하지 않아. 종교가 있어야 나라가 잘 되니까. 종교 없애는 것이 국가의 임무는 아니니까. 힘을 합쳐서 분노 하지 않아. 북한은 그렇지만 중국도 공산주의지만 장려까지는 안 하지만 못 마땅하지만 기독교를 방치하듯이 허용하잖아요. 얼마 전에 중국과 바티칸과 공식 외교채널을 열었어요. 이 말은 바티칸의 추기경이나 주교가 중국에 상주한다는 말이에요. 우리는 이렇게 종교를 인정한다는 거예요. 종교를 인정한다는데 왜 분노해? 그럼 실정과 안 맞지요. 

그건 우리 자신이 잘못 됐기 때문에 우리가 보는 세상도 잘못된 거예요. 잘못됐기 때문에 성경에 나오는 이것은 실제로 그렇지 않다고 거부하는 경향이 있어요. 심지어 교회 다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사도행전에 보면, 베드로가 하는 말이, 이 본문으로 성령과 예수 그리스도 복음 전파하는데 핵심요소로 집어넣어요. 다윗이 죽었다는 사실과 그리고 세상의 열왕이 어떻게 분노하는지 하는 것으로. 

사도행전 볼까요. 사도행전 2장 35절에 보면, “네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시편 110편에 나오는 말씀이죠. 그 다음에 4장 26절을 읽어보세요.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이걸 누가 설교하느냐 하면, 베드로와 요한이 하지요. 성경 볼 때 왜 베드로와 요한이 오늘 우리가 공부하는 시편 2편에서 뭘 찾아내서 이런 식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시편 2편으로 설명하느냐 말이죠. 시편 2편이 빠지면 십자가 설명이 안 된단 이야기잖아요. 우리는 시편 2편 빠져도 잘도 설명한다면 우리한테 문제 있는 거예요. 시편 2편과 연계하지 않고 십자가를 설명했다면 뭔가 빠뜨린 게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빠뜨린 부분이 시편은 분리와 경계와 통합에 나서는데 이 세상의 열왕들은 자기들끼리 싸우잖아요. 십자가 앞에서는, 기름 부은 자 앞에서는 분리하지 않고 합심하여 통합이 돼있단 말이죠. 일치된 마음이 되어서 여호와와 기름 부은 자를 공격한단 말입니다. 그러면 분리란 말은 눈에 보이는 실물적인 인간들끼리 분리할 게 아니고 하늘에서 오신 분과 그 외, 예수 그리스도와 그 외로 분리하는 것이 바로 복음을 설명하는 가장 기초가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교회 와서 “목사님, 제가 뭘 하면 천당 갑니까?” 너무 단순한 집약된 질문을 할 수 있어요. 누구나 그런 질문하죠. 하지만 그 답변은 개인이 어떻게 구원받느냐가 아니고 우주가 어떻게 돌아가느냐는 문제에요. 그러면 아까 그 질문은 무효가 되고 취소가 돼야 돼요. 왜냐하면 나라는 것은 열왕 속에 속해요. 예수님께 분노하는 기름 부은 자를 대적하는 입장에 일부로 편입돼있습니다. 한 통속입니다. 한 통속에 되어 어떻게 하면 구원받느냐고 하면 개인구원밖에 안 되는데 개인구원 자체가 사탄이 주는 사탕이죠. 미끼지요. 미혹거리죠. 당신은 이러면 구원받습니다. 성경에는 그런 구원 없어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성경 전체 내용은 인간은 빠집니다. 인간은 재료기 때문에 빠져요. 본내용이 아니에요. 본내용은

말씀이 이 땅에서 와서 어떤 일을 하다가 가버렸다.
그리고 다시 오셔서 말씀으로 세상을 멸망시키고 말씀 중심의 새로운 나라가 있는데 그게 하나님의 나라다.

그 이야기죠. 인간은 개인적인 사정은 빠진다니까. 인간의 중심은 공리주의라 했지요. 인간이 각자 할당받은 선악체제는 나한테 이익이 되면 선이고, 나한테 손해되면 악이고. 이미 할당받은 선악체제가 결국은 여자의 후손을 대적하는 악마의 후손의 무기가 되는 겁니다. 

선악체제를 약간 더 설명하면, 선과 악에 대해서 우리가 정신적으로 구축돼있어요. 인간의 모든 행동은 악을 제거하고 자기를 선한 사람으로 일치시키려고 애를 씁니다. 이렇게 자기 몸부림치게 만드는 이것이 악마의 굴레, 악마의 통치에 속하는 겁니다. 갇혀있어서 못 빠져나와요. 선한 선생님이여, 선하면 구원됩니까? 선하면 구원된다고 여기서 가르치고 있어요. 그리고 거기에 대해서 우리는 전부 다 동의하고 있습니다. 왜? 그 선악체제 자식들이기 때문에. 스스로 악한 자가 되어 지옥 가려는 사람 없잖아요. 고생 많이 했으니까 죽어서도 호강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노동하고 보상 얻고자하는 것은 인간의 기본이니까. 

악이 있는 곳이 지옥이죠. 선한 곳이 천국이고. 주님은 어딜 공략하느냐 하면, 여기에 와요. 나 지옥 갈게. 지옥은 저주받는 곳이에요. 나, 너희들이 믿는 신에게 저주받을 게. 이렇게 오니까 아무도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 없습니다. 열두 제자들 도망 가버리고 가룟 유다는 팔아먹고, 난리도 아니에요. 다 가버린 거예요. 

히브리서 2장 15절에 보면, 인간이 죽기가 무서워서 악마한테 매여 산다고 돼있어요. 나는 죽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성경의 관심사는 율법이 어떻게 완성하느냐, 말씀이 어떻게 완성하느냐에 있는데 인간들은 나한테 관심 있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마저 ‘너’가 돼요. 뇌물 줘서 네가 갖고 있는 혜택을 내가 누리게 되면 공리주의죠. 나한테 이익이 되면 선을 쌓게 되면 나는 영원한 천국에 가게 된다. 그런 생각을 매일같이 하면서 지옥으로 가고 있는 겁니다. 커다란 바퀴가 지옥으로 굴러가고 있는 겁니다. 

이게 과학에서 설명하지 못하는 인간은 정신적 존재요, 영적 존재입니다. 과학이 두려움을 이겨냅니까? 과학이 두려움을 온전히 걷어냅니까? 아니지요. 과학의 문제점은 벌써 과학 하는 주체가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의 행동은 항상 걷어낸다 했지요. 자기한테 필요한 것만 남기고 나머진 걷어내지요. 

그래서 욥기에서 욥에게 하는 말이, 황무지에 비 오는 이유를 아느냐고 하니까 대답을 못하지요. 왜? 황무지는 걷어내잖아요. 내 텃밭이 아니니까. 내가 치워버린 것에 주님께서 그 이유를 아느냐고 하니까 모르지요. 우리가 사는 게 너무 일방적이었지요. 왜 저에게 고난을 주십니까, 하는 것도 일방적 투정에 불과한 겁니다. 이걸 징징댄다고 하는데 틈만 나면 징징대요. 저한테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저를 힘들게 하십니까? 죽으렵니다. 죽어라, 죽어라. 처음부터 죽어있었어. 뭐 새삼스런 문제라고. 너 하나 죽는다고 뭐 달라지겠어. 

검은콩에서 국수를 뽑으면 색깔이 어떻게 되겠어요? 검겠지요. 오징어먹물로 빵 만들면 시커멓겠지요. 그래서 다윗은 말합니다. 내가 처음부터 시커먼스다. 시커먼스에서 자식 낳으니까 시커멓게 된 거예요. 어떻게 구스인이 피부색깔을 바꾸겠느냐, 표범이 어떻게 반점을 없애겠습니까? 완전히 리처드 도킨스 이야기에요. dna를 어떻게 바꾸겠느냐는 말입니다. 

따라서 네 죄는 네가 손을 떼라는 거예요. 우리 죄 지음에 대해서. 선악밖에 모르잖아요. 그러면 그대로 살란 말이죠. 여기서 벗어나야 되는데. 그 발상 자체가 악마적이에요. 그냥 그릇이에요. 뭘 담든지 담은 것만 증거하면 되지 내가 구태여 종교생활, 신앙생활 할 이유가 없어요. 이스라엘이 신앙생활해서 망했어요. 

시편은 사도행전에 나오는 성령 받은 사도들은 세상은 인간이 발악해도 소용없고 말씀이 알아서 다 처리했다, 끝. 그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 말씀을 받은 이스라엘은 악인 나오니까 악인 안 되고 의인 나오니까 의인 되려고 말씀을 묵상하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거예요. 그게 구원받겠다는 게 화근이라. 날마다 말씀으로 살면서도 지가 요령껏 살려고 착각하는 것. 


10분 쉽시다.

 한윤범 (IP:14.♡.134.25)17-09-13 11:33 

20170911b 부산강의 : [시편]3(2편)-경계선상의 존재 
(강의:이근호 목사)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던 이슈가 뭐냐 하면, 왜 성령 받은 사도들이 시편 2편을 거론하느냐는 겁니다. 십자가 믿으세요. 이러면 간단할 문제를 왜 시편 2편을 거론하느냐? 거기에 열왕이 나와요. 당신들이 살고 있는 이 세계 자체, 우리는 자기 구원만 챙기면 되는 걸로 아는데 이게 본드가 붙어서 가기는 어딜 가느냐고 발목을 잡는 거예요. 성령을 받아서 성도가 되는 순간 갑자기 친한 친구가 떠나고, 그 집안 식구들이 미쳤느냐 하고 결별하고, 연애하던 사랑하는 사이도 그러려면 헤어지자고 나오고. 

그렇다면 성령이 오는 게 내 뜻이 아니라면 그들과 분리가 일어나는 것도 내가 인위적으로 단도리 할 사항이 아니란 말이죠. 나는 불교 안 믿고 예수 믿겠다고 자신이 선택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나중에 성령이 와서 믿게 했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내 일이 아니고 주의 일이라면, 우리는 거기서 내 신앙생활을 포기해야 돼요. 내가 예수 믿는 걸 포기해야 돼요. 

집에 물이 들어와서 일본 같은 경우에 쓰나미가 왔을 때 단단하던 집이 떠밀려 가버립니다. 바닷물에 실려 갑니다. 성령이 와버리면 우리는 뿌리 채 다 뽑힌 상태에요. 성령 인도하는 데로 떠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 상태가 무슨 상태지? 그럴 때 성령이 설명해줘요. 범사에 감사하라, 항상 기뻐하라. 내가 이런 상태라고 설명을 해준다고요. 

뿌리를 내가 박아서 내 노동에 의해서 정착할 거라고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정신 바짝 차려서 살겠다고 할 때 이 말씀 지켜야지, 순종해야지, 복 받을 거야. 모든 게 계산에 의해서 하는데 그 계산이 너무나 공리주의란 말이죠. 나한테 이익이 되니까 믿고, 어떤 환란이 오게 되면, 예수도 안 믿는데 이런 복이 옵니까? 돈 더 내란 말이구나. 십일조 더 낼게요. 이런 식으로 하는데 성령은 산사태처럼 확 쓸려가요. 환란과 곤고나 핍박이 위협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는다. 핵심부분을 드러내기 위해서 원하지도 않는 환란, 핍박이 온단 말이죠. 

그럴 때 우리는 환란을 겪었습니다. 이러면 안 돼요. 그러면 또 자기가 믿음이 얼마나 좋은지 자기자랑밖에 안 되니까 내게서 내가 손을 떼란 거구나. 그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은 열불 내는 거예요. 그들은 자연에다 어떤 작업을 했어요. 요새 말로 디자인이에요. 창의성을 발휘하는 겁니다. 

옛날에는 자연에 순종하고 복종하고 종교적으로 뇌물 바치고 모든 민족이 종교적이고 자기가 죽고 난 뒤에 걱정되어 조상을 숭배해요. 어차피 만날 조상, 선배 만날 때 섭섭하게 하면 안 되니까 뇌물로 조상숭배하면 그리던 형제들 다시 만나서, 요단강 건너서 만나리라는 찬송가 가사처럼. 미리 대비하는 종교적인 방법인데 이제는 종교적으로 자연의 변덕스러움에 너무 시달렸으니까 드디어 과학이 그리스부터 시작했는데 사실은 페르시아부터 시작한 거예요. 

그리스부터 철학이 나오면서 자연을 객체로 봐요. 나의 상대로 보고 나는 주체가 돼요. 세상이란 것은 내가 조립하는 데로 내가 디자인하는 데로 세상은 나에게 필요한 것만 뽑아내면 된다는 사실. 그래서 문화란, 또는 문명이란 조작이다. 덜어내고 걸러내고 필요한 것만 따로 뽑아서 이익 되는 것만 따로 해서 그게 문화고 문명이고 과학이에요. 

그렇게 하면 더 이상 과학이 발달하면 분리될 이유가 없지요. 굉장히 휴머니즘이에요. 이념 간에 존엄성을 극대화시키는 겁니다. 북한이 핵 개발하니까 러시아와 중국이 대화로 풀자고 하지요. 그게 뭐냐 하면

인류의 보편적 가치는 소통에 있고 통합에 있고 대화에 있다는 거예요.
잘 들으셔야 돼요. 전쟁은 한시적이고 전쟁 뒤에 평화가 온다는 거예요.
그러면 평화가 목적이고 전쟁은 임시적 조치지요.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하지 않고 평화는 인간에겐 없는 거예요.
늘 악인과 선인, 그러니까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간의 전쟁이 본내용을 차지합니다.
성경은 그렇게 봐요. 끊임없는 싸움이에요. 


이 싸움이 이스라엘을 통해서 멀쩡한 나라가 이스라엘이 등장함으로 있던 평화가 깨지고 없는 전쟁이 시작됩니다. 민수기 22장 볼까요? 기름 부은 자 끄집어내는데 이렇게 시간이 오래 걸려요. 제가 바로 결론을 내릴 수 없어요. 이스라엘이 지나가는데 모압 왕이 나오죠. 발락이죠. 불러낸 제사장 이름은 발람이죠. 그들이 발람에게 제물을 줘요. 7절에 보면, “모압 장로들과 미디안 장로들이 손에 복술의 예물을 가지고 떠나 발람에게 이르러 발락의 말로 그에게 고하매”라고 돼있어요. 

왕이 선지자나 제사장에게 돈을 주는 겁니다. 제가 어제 낮 설교에 이 본문을 시간관계상 언급 못했는데 아리안 족의 종교가 힌두교에요. 힌두교에는 신의 나라에 질서가 있고 인간은 농사를 지어야 되기 때문에 제 때에 비가 와야 되고 햇빛이 나와야 농사가 잘 돼요. 그래서 중간에 제사장이 있어요. 가정이 잘 되고 가문 잘 되고 자기 부족이 잘 돼야 되니까 제사장을 세워서 하는데 제사장만 신의 질서를 알아요. 

일반 아마추어들은 신에게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가, 제사장만이 자연의 질서를 알고 있는데 그 지은 책을 리그베다라 해요. 리그베다가 힌두교 경전입니다. 힌두교 경전에 있는 말씀과 자연현상이 일대일 대응이 돼요. 제사장이 말하게 되면 자연현상이 변덕이 일어나야 됩니다. 예를 들어서 갠지스 강이 바뀐다면 얼마 안 되어 바뀌어야 돼요. 그 정도 자부심은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신의 질서를 보니까 전쟁 가운데 있어요. 앗수르라 하는 나쁜 신과 인드라라 하는 좋은 신과의 전쟁 관계에 있어요. 여기 좋은 신은 나중에 불교에서 받아들여서 석굴암에 옆에 보좌하는 사람들이 있지요. 그게 힌두교의 선한 신이 보좌하고 있어요. 전쟁하는데 보급품이 필요해요. 여기에 돈과 제물을 지불해야 돼요. 

이 종교구조를 보세요. 신을 위해서 자기들이 있는 겁니까? 자기를 위해서 신이 있는 거예요? 자기 자신을 위해서 신이 있는 거죠. 이 종교구조가 불교와 기독교의 모체가 되고 있어요. 교회가 얼마나 엉터리인지 아시겠지요. 다른 종교를 공부 안 하니까 교회가 얼마나 개판인지 교회가 몰라요. 기원은 자신의 구원이에요. 자신의 구원은 성경엔 없어요. 내가 나를 디자인하고 싶어 하는 거예요. 인간들은. 천국 가도. 

그런데 이러한 인간의 자기 위주가, 제가 이야기하는 건 그거에요. 처음에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나올 때 애굽과 싸웠잖아요. 분리되고 난 뒤에 민수기 발람 이야기할 때 모압 통과할 때 또 싸우지요. 가는 곳마다 계속 분리가 일어나는 거예요. 분리가 일어나다가 나중에 사무엘상 8장에 가서 드디어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가나안 땅에 도착했잖아요. 제가 이번 수련회에서 분명히 이야기했습니다. 도착하고 인구 숫자 많았잖아요. 그러면 구원받을 것 없네요. 얻을 것 다 얻었으니까. 

아브라함 자손이라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 이름 부르면서 결국 다른 일반종교와 똑같이 돼버렸어요. 자기를 위해서 있는 여호와가 돼버렸어요. 자기를 위해서 제사 드리고 그랬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다른 나라와 분리가 아니라 이제는 이스라엘 내부를 분리시키는 겁니다. 어떻게 분리하느냐 하면, 사람과 사람의 힘으로 유지되느냐? 이건 북이스라엘이에요. 그게 아니고 이미 돌아가신 분 덕택으로 사느냐? 이게 바로 다윗의 등불이라는 겁니다. 솔로몬이 우상숭배해도 망하지 않는 이유가, 솔로몬 자체의 애씀이 아니고 이것은 다윗에게 주신 약속을 생각해서 하나님께서 망하지 않게 한 겁니다. 

그러면 언약이란 일종의 밴드인데 우리말로 묶음이죠. 언약대로 한다는 것은 묶은 것을 푸는 거예요. 콘택600이란 캡슐을 깨면 600개의 알들이 나오겠지요. 언약을 깨면 언약 안의 내용이 나오겠지요. 언약 안의 내용, 혜택 때문에 남쪽 유대나라가 안 망하는 겁니다. 그걸 유대나라가 인정해요. 그러면 그 당시 남쪽 유대나라는 실물적으로 뭘 보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걸 아느냐? 거기에는 성전이 있었던 거예요. 

유대나라는 성전이 있지요. 성령 받은 사도들, 시편 2편을 인용한 사도들은 성전을 지워버리고 망자, 이미 죽은 자가 예수님이죠. 예수님을 성전자리에 집어넣는 거예요. 망자는 실물적이 아니에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세상은 그분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겁니다. 눈에 보이는 내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믿으라는 게 아닙니다. 참 이런 걸 설명하는 게 힘들어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믿어서 구원받자는 이야기가 아니고, 지금 눈에 보이지 않는 그분을 증거하라고 눈에 보이는 네가 존재한다는 거예요. 위치를 바꿔야 돼요. 예수님 때문에 내가 있는 거예요. 예수님의 밴드, 그 새 언약을 확인하기 위해서 내가 존재한다는 겁니다. 그분이 예수님이 일곱 교회를 쥐고 있는 거예요. 내가 그분을 쥐고 있는 게 아니고 그분이 오른손에 쥐고 있는 거예요. 

전에 우리교회에서 어떤 장로님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어요. “목사님, 주의 오른편이 뭡니까?” 정말 어려운 질문을 했어요. 오른편이란 주께서 일하는 자리를 말합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나와요. 처음에는 주님이 하나님 왼편에 가있었고, 하나님께서 언약이 완성이 되고 난 뒤에서 예수님을 오른편으로 보내고 자신은 왼편에 와버려요. 자리를 바꿔요. 왜냐하면 오른편이 언약을 완성하는 자리거든요. 오른편에서 언약대로 실시된 자리입니다. 이게 출애굽기 15장에 나와요. 주의 오른손이 애굽 군사를 쳐부쉈습니다. 미리암이 홍해 건너고 찬양한 거예요. 

시편 2편 2절을 봅시다.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그러니까 오른편에 있던 여호와께서 자기 자리를 인간에게 양도에요. 신은 인간에게서 나옵니다. 놀랍게도.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거든요. 실물적으로 볼 때. 큰일 날 뻔했다. 실물적으로 역사적으로 볼 때 신이 인간에서 나와요. 

그러니까 어떤 인간도 믿을 수가 없는 거예요. 심지어 성도는 자기 자신을 대부분 시간을 안 믿어요. 다른 사람과 똑같은 인간인 줄 알고 있어요. 예수 그리스도가 내 인생을 이끌고 가는데 내가 나를 그걸 안 믿어요. 남들처럼 에너지니까 기계니까 돈이 날 살린다고 생각한 겁니다. 이걸 생존의 차원이에요. 하와 이름은 생존이 아닙니다. 생명입니다. 생명을 자꾸 생존으로 이해하는 것이 우리에요. 

그런데 신은 어디서 오는가? 못난 우리 속에게 못난 신의 모습으로서 예수님이 나와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 이야기할 때 태연합니다. 우리는 메시아가 하늘에서 온다는 걸 안다. 우리가 당신을 알거든. 당신은 나사렛 사람이고 당신의 아버지가 목수라는 걸 알기 때문에 따라서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라는 거예요. 만약에 그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면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아 모시겠습니까? 어딜 봐서 메시아입니까? 전혀 메시아답지 않아요. 초라한 행색에다 약간 인기는 있다만 그 권력을 못 이기잖아요. 

그리고 죽고 난 뒤에는 정들었던 세 명의 마리아가 있어요. 막달라 마리아, 어머니, 야고보 엄마 마리아가 세 명의 어머니가 믿음 때문이 아닙니다. 정 때문에 시체나 독수리한테 안 먹히도록 해야지, 라고 해서 무덤에 갔던 거예요. 세 명의 여인이 놀래 자빠질 뻔했습니다. 누군가 앉아서 “여인아, 뭘 보려 왔느냐?” 동산지기인 줄 알았어요. 왜 산 자를 죽은 자에게서 찾느냐고 했어요. 

그 대목이 몰트만이란 유명한 신학자한테는 충격이었던 모양이에요. 자기는 예수님이 죽은 자가 살아났다고 생각했는데 그 대목을 보면서 죽은 자가 살아난 게 아니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났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살아남으로써 모든 인간은 이미 죽은 자로 판정이 돼버렸어요. 진짜 숨어있는 하나님 앞에서 모든 인간은 죽은 자에요. 고린도후서 5장 14절에 예수님으로 죽음으로써 모든 인간이 죽은 것이다. 

이 사실을 우리가 성경 보면서도 내가 나를 안 믿어요. 성령 받았으면서도 내가 영적인 존재인 것을 안 믿고 자꾸만 세상 사람들 못 따라가서 환장했어. 그 사람들 못 닮아서 환장한 거예요. 그 사람처럼 잘 못 먹고, 잘 못 살고, 돈 없다고 스스로 자기 자신을 채찍하고 나무라고 자기를 못난 인간으로 만들어버려요. 

그 정도로 우리가 믿음 없어요. 자기 자신도 주의 것이란 걸 안 믿고 내 것이라고 우기니까 이게 얼마나 불신앙입니까? 그래 삽시다. 죽을 때까지 불신앙 외에는 보여줄 게 없어요. 그 불신앙 앞에 십자가를 보여주셔서 놀랍게도 십자가 알려주시니 우리가 구원받은 자인 것을 아는 거예요. 내가 늘 예수를 부르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믿음이 없기 때문에 자기 관리하는데 외에는 다른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는 혈안이 돼있습니다. 에너지 채우는데, 기계니까. 돈이나 에너지 외에는 필요하지 않아요. 그것만 있으면 모든 게 해소된다고 굳게 믿습니다. 나도 믿고 저도 굳게 믿는데 주님은 들락날락하면서 그게 바로 죄라고 알려주니까 구원받은 사람이고, 저 사람은 성령이 안 찾아오니까 지옥 가는 거예요. 

“왜 안 찾아옵니까?” 묻지 마세요. 이렇게 질문해야 돼요. “왜 찾아오십니까? 저 사람처럼 안 찾아와도 되는데 무슨 연관이 있다고 찾아오십니까? 왜 저에게 십자가를 보이십니까?” 질문을 그렇게 해야 돼요. 사도 바울처럼 “주여, 누구십니까?” 그 순간 내가 어떤 형편에 있는지 감안할 상황이 아니에요. 내가 도둑놈이든 뭐든 고려하지 마세요. 이게 그 순간 믿음입니다. 자기를 잘났는지 못났는지 선악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에요. 자신의 잘남이나 못남이니 기억나지 않아야 돼요. 

교회 오랜만에 왔는데 목사님이 석 달 만에 오셨는데 할 때 진짜 믿음 같으면 석 달 만에 온 게 아닙니다. 석 달 만에 보내주셨지요. 따라서 석 달 만에 왔다고 해서 목사 앞에 주눅 들지 마세요. 그동안 주께서 안 보내주신 거예요. 한 순간에 앞의 의미를 한꺼번에 설명해줘요. 목사님은 주께서 허락하시니 목사지 나도 지금 보내주시네요. 잘난 척하지 마세요. 그동안 내가 게을러서 못 온 게 아니고 안 보내주셔서 못 왔다고 지난 일까지 의미를 부여해버리는 거예요. 

그런 논조로 이야기하면 나중에 한 번도 교회 안 나오다가 죽기 직전에 성령 받아 예수 믿으면, 그동안 뭐하다 이제 와 믿느냐고 한다면, 그동안 주께서 꾸준하게 세상과 놀도록 추진해주셔서 지금 돌아보면 모든 게 범사에 감사합니다. 그걸 안 믿는 목사라면 뻔뻔스럽기는 낯짝도 두껍지. 평생 교회 와서 헌금도 한 적 없고, 전도 한 번 해본 적도 없고, 죽기 직전에 아슬아슬하게 자신의 분리됨을 의미해버리죠. 

분리됨 다음에 경계지요. 성도는 경계선상에 있는 존재. 성도가 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아직도 이 땅에 활동하고 있음을 보이는 재료가 되는 겁니다. 그리스도가 오기 전까지는 발락이라는 왕은 권력자입니다. 모압나라는 발락의 손아귀에 있어요. 심지어 무당까지 발람이라는 샤먼까지 돈 주고 얼마든지 했어요. 

모압 왕이 발람에게 돈 주고 저주해달라고 한 것은 모압을 발락의 통치 아래 계속 두기 위함이에요. 통합이 훼손되기 싫은 거예요. 그런데 이스라엘이 가는 곳마다 분리된다고 소문났기 때문에 그 축복을 제거하기 위해서 발람한테 부탁했는데 발람은 발락에 통합된 게 아니고 이스라엘에 통합되어 오는 집단에 축복해버린 거예요. 자기 말이 저주를 해도 축복으로 바뀌도록 신이 자기에게 나중에 여호와죠. 여호와, 이스라엘 신이 그렇게 해버렸다. 그렇게 돼버리면 대척관계, 전쟁관계에 있기 때문에 저쪽은 자동적으로 저주를 받게 돼있어요. 축복과 저주, 분리가 일어난 겁니다. 

그래서 나중에 발락이 어떻게 했느냐? 돈 더 주고 발람을 불러요. 그러면 저 이스라엘을 저주받게 할 방법이 없는가? 있습니다. 어떻게? 이스라엘 내부에 내분이 일어나도록 만들어버리는 거예요. 그게 우상숭배 하도록 몇몇 사람을 참여시킵니다. 이스라엘 자체 내의 원리원칙에 의하여 스스로 자신의 오류를 도려내는 장치가 자동적으로 작동되기 때문에 우상숭배 한 사람을 죽이고, 민수기 25장에 보면, 염병으로 죽은 자가 이만 사천 명이었어요. 

이만 사천 명 거덜 났어요. 하나님이 이스라엘 하나님이 아니죠. 하나님은 하나님의 하나님이죠. 자기 백성이라도 언약에 어긋나니까 잘라내잖아요. 마태복음 10장에 이런 말 있어요. 네 손을 잘라버려라. 네 발을 잘라버려라. 죄 짓는 걸 잘라내고 저주요소가 달라붙지 않도록 하라. 저주요소가 달라붙으면 그것 때문에 전체가 지옥 간다. 따라서 네가 지옥 가지 않도록 너한테 오염을 제공한 부분을 잘라내서 장애자가 되더라도 나머진 건질 수 있잖아, 라는 이야기를 주님이 하셨어요. 

그 이야기를 자기 몸을 통합체로 보고 있는 인간에게 가능할까요? 가능하지 않지요. 네 몸을 네 통합체로 생각하고 네 스스로 자기를 지키겠다는 그 원리로는 도저히 지킬 수 없는 말씀을 준 거예요. 그럼 그 말씀을 지키려면 자기 자신을 지키는 원리를 뭐로 바꿔야 됩니까? 주의 언약을 위해서 우리가 재료가 되는 식으로 바뀌면 되겠지요. 주님께서 언약 완성,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해서 필요하다면 잘라내라고 드리면 되겠지요. 제 아이디어 어때요? 그러면 되지요. 

얘가 천국 가는데 방해된다면 얘를 세월호에 빠져죽도록 하면 되거든. 그런데 자진해서 하는 사람들 없잖아요. 안산에 있는 고등학생 부모 중에서 그런 사람 없잖아요. 혹시 천국 가야 될 사람 같으면, 세월호가 일주일 전에도 운행했어요. 그때 멀쩡하게 갔다 왔어요. 일주일 후에는 몇 백 명이 죽었지요. 노란리본 달고 하잖아요. 이게 인간적으로 통합하자는 것 아닙니까. 

누가 죽였어요? 하나님이 죽였잖아요. 왜 죽여요? 왜 죽이냐는 말 자체가 성립 안 된다니까요. 내 것 내가 죽인다는 데 네가 왜? 왜 죽이시냐고 나오면 그 질문 자체가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산다는데 왜 끼어드느냐는 말이란 말이죠. 노란리본 달고 할 때 나라가 하나로 통합됐지요. 그럼 결국 누가 누굴 공격한 거예요? 열왕들이 대한민국 국민들이 여호와와 그 기름 부은 자를 공격한 거예요. 세월호가. 내 얘를 왜 죽이느냐 말이죠. 왜 그때 풍랑일게 하고, 그 배에 철근 200톤을 왜 실었느냐 말이죠. 너무 실어서 복원력을 잃어서 침몰했잖아요. 왜 하필 유병언 회사 청해진해운과 계약하게 했느냐 말이죠. 다 하나님 책임이라고요. 철근 싣는 업자와 계약 맺을 때 차바퀴 펑크 나 보세요. 그런 계약 안 맺을 것 아니냔 말이죠. 뒤돌아보면. 

이제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이 시편 2편을 언급한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빼놓고는 모조리 다 죽은 자고 그 죽은 자 배후에는 악마가 있다. 그래서 주님은 악마와 싸운 거죠. 인간은 들러리에요. 아무것도 몰라요. 그저 시킨 대로 한 것뿐이에요. 그 악마와 인간 사이에 세상 지도자와 샤먼들이 있고 아까 발락이란 왕이 있는 거예요. 왕은 정치적인 지도자가 되는 겁니다. 영적 존재니까. 

예수님께서 죽었습니다. 아까 실물적으로 이 땅에서는 신이 인간에서 나와요. 신을 백날 찾아봐도 신 아니에요. 그건 악마가 만든 거예요. 신은 없어요. 인간이 천국 간다고 할 때 그 자체로 잘못된 거예요. 왜냐하면 천국은 없습니다. 인간이 만든 천국은 다 가짜기 때문에 천국 자체가 없어요. 없는데 예수님이란 인간이 만들었어요. 그리고 자기가 만든 천국에 나를 믿는 자는 들어간다는 거예요. 

모든 게 분리라니까요. 양과 염소, 가라지와 알곡,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 이 이야기를 누가 했습니까? 인간 예수님 입에서 나왔잖아요. 하늘에서 음성으로 이야기했습니까? 같은 인간이라니까요. 같은 인간이니까 인간이 인간을 신이라고 믿겠습니까? 못 믿지요. 믿을 수가 없어요. 제가 이 말하는 것은 오늘날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지금 내가 믿을 수 없는 걸 믿고 있다는 자각을 해야 된다는 말이에요. 어지간하면 믿을 수 있다는 그런 생각 자체가 잘못된 거예요. 


참말이여 (구자억) 
  
아따 참말이여 믿을 수 없겄는디 
하나님이 인간이 되서 이 땅에 오셨다고 
진짜 참말이여 믿을 수 없겄는디 
하나님이 날 대신해서 대신 죽어 주셨다고 
이리저리 사방팔방 둘러봐도 어디가 이쁜 구석 있어서 
하나님이 친히 찾아 오셔서 그 목숨을 내 준단 말이여 
근디 참말이여 성경에 써 있는디 
하나님이 인간이 되서 이 땅에 오셨다고 
진짜 참말이여 성경에 써 있는디 하나님이 날 대신해서 
대신 죽어 주셨다고~~~ 


그 말 맞아요. 믿을 수 없었는데. 예수 믿는 것은 가짜니까 필요 없어요. 예수를 믿는다 하지 말고 믿을 수 없게 하신 분이 당신입니다. 내 힘으로 믿을 분이 아닙니다. 이런 고백을 예수님 앞에 털어놔야 돼요. 왜 그러냐 하면 세상은 내가 출발점이거든요. 내가 알아서 믿는 것도 하고 선택하는 것도 내가 알아서 하고. 기독교 믿을까, 불교 믿을까? 기독교 믿어야지. 선택도 내가 한 거예요. 모든 것이 나로부터 출발했는데 세상에 그게 전부고 자기가 디자인하고, 디자인 한 그것이 세계관이거든요. 나의 현실관이란 말이죠. 내 중심, 나의 조작, 걷어냄, 덜어냄. 

그런데 그분이 그걸 완전히 뒤집어서 그런 것과 상관없이 주께서 이미 나를 주의 사람으로 확정해놓을 때 우리는 믿을 수 없었다는 고백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그것을 요한일서 2장 27절에서 기름 부었다 해요. 이제 마지막 시간에 기름 부음에 대해서 설명하겠어요. 기름 부었다는 것은 분리입니다. 창세기 4장에서 아벨은 기름 부위와 몸통 부위를 분리시켰어요. 그래서 기름 부었다는 말은 분리된 거예요. 몸체와 떨어져나갔을 때 떨어져나가야 경계자 역할을 해요. 

옛날 명화나 성경 삽화에 이런 게 있어요. 어떤 마을에서 저녁 짓는다고 연기가 피어오르고 뒷모습만 보이는데 지팡이 짚고 마을을 산 위에서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것 있지요. 목판화, 시커먼 그림. 후드 티 같은 것 입고 드디어 선지자는 마을에 등장했다는 것 있지요. 마을과 선지자가 분리돼있는 겁니다. 

세례요한이 광야에서 외쳤지요. 복장 보세요. 기존에 에너지를 취득하는 복장이 아니에요. 농사짓는 복장이 아닙니다. 완전히 도태된, 축출당한, 배제당한 복장이에요. 추방당한 복장이에요. 이것은 협조에 의해서 사는 게 아니에요. 자급자족의 모습입니다. 이 산을 껴안고 광야를 껴안고 석청과 메뚜기를 먹는다. 그걸 세례 요한이 메뚜기를 먹은 이유는 영양가가 많아서 라고 하는데 영양가의 문제가 아니에요. 나는 그냥 왔다가 사라지는 떠나는 나그네 같이 너희들과 상대할 필요 없지만 주께서 상대하라 하면 상대하는데 나 이 동네 사람 아니야. 갈 거야. 항상 붙잡지 마. 나 갈 거야. 그런 자세에요. 세례 요한이 오실 엘리야니까. 분리를 의미해요. 

기름 부었다는 것은 아벨의 제사에서 나왔고 기름 부음을 독특하게 특이하게 도드라지게 드러내기 위해서 기름과 기름 외에, 그리스도와 모든 인간을 철저하게 분리시킬 때 그 ‘기름 외’가 이미 연합으로 군왕, 추장, 영웅으로 통합돼있어요. 

문명이란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이미 조작이라고. 디자인하는 거예요. 어떻게 디자인? 자연에 굴복하는 게 아니고 자연 가운데서 필요한 것만 따로 뽑아서 개인적인 질서를 잡아요. 질서를 자기 사는 땅에 박아 넣는 거예요. 이게 문명이고 문화입니다. 자연에서 하늘에서 숟가락 떨어집니까? 아니잖아요. 자연에서 자전거가 떨어지던가요? 어떤 노래에 하늘에서 남자가 떨어진다는 노래가 있어요. 할렐루야~~~ 해운대에 가면 여자가 바다에서 오는 것 같아요. 그것 때문에 해운대 많이 가지만. 특이한 복장을 한 여자들 있기 때문에 남자들이 가잖아요. 

하늘에서 온 게 없기 때문에 그중에 필요한 것만 자기가 디자인하고 땅에 금을 채굴하고 은을 채굴해서 필요한 대로 기계문명이라 해서 오늘날 통합된 의지를 확보한 것이 바로 도시입니다. 농촌부터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도시부터 먼저 만들었어요. 창세기 4장에도 나와 있고 고고학 정보도 그렇게 나와 있어요. 도시에서 나왔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도시를 주관하는 왕이 영웅이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았다는 말이에요. 영웅 중심으로 소문 듣고 모이게 돼있어요. 옛날 영웅은 사냥을 잘하는 사람입니다. 당대의 영웅이라. 사냥에 뛰어났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농경시대가 수렵시대보다 더 잘 산다고 하는데 더 잘 살지는 않아요. 농경시대는 영웅이 있고 영웅이 당대 영웅으로 끝나는 게 아닙니다. 영웅이 되면 거기서 이름을 뽑아내요. 이건 신화론에 다 나오는 이야기에요. 영웅에서 이름을 뽑아내면 그 이름 중심으로 영웅과 똑같은 혜택을 하늘에서 주기를 이름을 모심으로써 덕을 얻겠다는 겁니다. 

김일성이라면 김정은이 김정일 아버지를 배척했습니까? 계속해서 김일성 생일은 살아있어요. 4월 15일. 이 날에 제 딸 생일이에요. 김일성은 이름으로 계속 살아있어야 돼요. 그게 아버지 이름이에요. 이게 조상숭배에요. 조상숭배를 실물화시킨 집단이 북한입니다. 북한은 정치집단 아니에요. 종교집단입니다. 김일성 동상이 신념이 되어 결집을 다지는 겁니다.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그것뿐입니다. 아버지의 유지입니다. 무조건. 

세습적으로 김일성이란 왕, 그 아들이 왕이 되고, 그 손자가 왕이 되는 거죠. 그럴 때 사우디아라비아처럼 누가 진짜 아들이냐? 첩의 아들이냐, 진짜 아들인지 싸움이 일어나겠지요. 권력싸움 일어나면 정실부인이 아닌 것은 계속해서 피비린내 나는 내부싸움이 일어나겠지요. 이게 야곱과 에서도 마찬가지에요. 맏이도 아닌 게 맏이 노릇하는 그게 얼마나 반칙이에요. 왜 그렇게 해야 되느냐 하면,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야 돼요. 

왕은 민족이 우선이고 민족혈통을 유지하기 위해서 왕이란 영웅이 도입되는 겁니다. 왕은 초법적인 법에서 벗어나야 돼요. 왜냐하면 법에서 벗어나야 누굴 처벌할 권한을 줄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20세기 초반에 칼 슈미트란 법 철학자가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독재자가 있어야 나라가 돼요. 대통령, 뭘 잘났나? 이러면 나라꼴이 안 돼요. 법에 저촉이 안 되는 초법적인 존재가 있어야 순환이 된다니까요. 순환이 안 되면, 헌법재판관이 그렇게 보는 것은 사적인 견해입니다. 이번에 박근혜 탄핵 재판할 때 박근혜 측 변호사들이 하는 말이, 그것은 재판관 사견 아니냐고 공격한 거예요. 

그런데 만약에 초법적인 왕이 있다면, 짐이 곧 법이죠. 17세기 프랑스 절대주의 국가가 그렇게 생겼잖아요. 나중에 1789년에 법에 목이 날아갔지만. 프랑스 독립혁명, 평등, 자유, 박애 정신이라 해서 왕을 날려버렸어요. 왕을 쳤다는 말은 그 다음부터 나라가 개판 됐다는 말이에요. 

그래서 그게 아니라고 왕이 있어야 된다고 해서 세운 나라가 네덜란드, 벨기에, 그리고 영국, 호주, 캐나다도 마찬가지고. 입헌군주제 아닙니까. 나라가 초법적인 존재가 있어야 돼요. 태국, 일본도 마찬가지고. 행정은 총리가 하고 상징적인 존재가 있어야 된다. 그런 것으로 종교로 만든 것이 천주교입니다. 천주교 교황은 그 자리 보존하라고 있는 거예요. 인물이 개판이든 뭐고 관계없어요. 무조건 그 자리를 위해서 걸쳐놓은 게 교황입니다. 훌륭해서가 아닙니다. 교황이 무슨 짓해도 터치하면 안 돼요. 그러면 전체 조직이 무너져요. 

그런 교황을 빼다 박은 것이 오늘날 개신교 당회장제도에요. 목사는 교인이 건드리면 안 돼요. 목사는 하나님이 직접 건드려야지 목사 무슨 짓을 해도 돈을 밝히고 여자 밝히고 해도 장로들이 건드리면 안 돼요. 그러면 교회 꼴이 안 돼요. 오직 기름 부은 자는 누구밖에 없다? 목사만 기름 부었고 그래야 교회질서가 유지된다고요. 

민주주의는 반칙이에요. 나라꼴이 안 됩니다. 민주주의를 중우정치라 해요. 어리석은 대중들의 정치에요. 어리석지 않으려면 200~300명 또는 2000~3000명 이 정도 경우엔 돼요. 이렇게 처음으로 생긴 것이 아테네 민주주의제도에요. 민주주의가 숫자 적을 땐 됩니다. 의논이 되니까. 화백제도는 돼요. 몇 명 안 되니까. 왕이 없는 나라가 왕이 있는 나라에 망한 사례가 가야가 신라에 망한 겁니다. 우리는 좋은 게 좋다. 좋은 게 좋은 게 아니에요. 독재자가 없으면 나라꼴이 안 됩니다. 뭐 문재인한테 실망했다고요? 문재인은 제대로 하고 있는 거예요. 좀 더 해야 돼요. 전두환만큼 해야 돼요. 헬리콥터 띄워야 되고 공수부대 해야 돼요. 

인간은 의논해서 나라꼴이 되지 않습니다. 이건 회사도 교회도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빠가 가장 노릇 못하면 엄마라도 해야 되고, 엄마가 못하면 형이라도 해야 되지 가정에 중심이 있어야 되지 그렇지 못하면 중구난방이 돼서 가정이 안 돼요. 

셋째가 아버지 병들었을 때 병수발 다 했는데 아버지는 옛날 조상 생각해서 행방도 모르는 내 모든 재산을 맏이한테 준다하고 죽어버리면 집안 어떻게 되겠습니까? 엉망 되겠지요. 그런데 왜 옛날 할아버지는 맏이한테 주려고 합니까? 제사를 드려줘야 돼요. 그래야 죽고 난 뒤에 행복하게 영원히 천국 생활할 수 있어요. 

이런 종교가 있다니까요. 종교는 설명이 안 돼요. 왜? 자기중심이기 때문에. 개인이 이런 의식으로 집단화한 것이 국가고, 그게 유대나라고 그것에 바로 예수님이 죽었잖아요. 끝났어요. 인간으로 죽었어요. 그런데 기름 부음이 일어납니다. 죽었는데 죽은 자를 성령에 의해서 사흘 만에 살아났지요. 언제 살아나는가? 모든 인간은 똑같다는 것이 확인되고 난 뒤에 살아나신 거예요. 그때까지 이스라엘은 멸망하면 안 돼요. 그 이스라엘이 기어이 메시아를 죽여야만 비로소 예수님 빼놓고 모든 인간이 한 통속이라는 것이 밝혀질 때 모든 언약은 완성되는 겁니다. 

언약 완성이 뭡니까? 

모든 인간은 자기밖에 모른다는 것이 확정되는 게 언약 완성이에요. 

그래서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어떤 모습입니까? 

저것 믿으면 구원받겠네,가 아니라 

주여, 나는 구원될 자격도 없는 존재였군요.누구 말대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 

이렇게 진리의 메시아를 우리가 떠밀었다니, 우리가 싫어했다니. 

내 속의 악마가 주님을, 뱀의 성질이 여자의 성질을 떠민 거예요. 


지금 우리도 여전하지만 차이점이 뭐냐? 

성령께서 십자가 앞장세워서 날마다 우리에게 이 사실을 알려준다는 그게 바로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이게 바로 경계선상에 있는 것이고 이미 그리스도와 통합된 거예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실제로 십자가로 죽고 부활함으로 말미암아 세상이 어떤 동네인 것을 실제로 팩트로 알려주셨기에 이제는 우리가 당당하게 이 복음을 주저하지 말고 전할 수 있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