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목 조목 비평할 내용이 하나도 없습니다. 성경을 디립다 파고 또 파도 모르도록 되어 있는게 있습니다. 예수님이 흘린 피가 성경의 완성이며 그 완성된 것을 그대로 적용하는 분도 예수님이라는 겁니다.
이 글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을 홀로 다 성취한다는 그 이야기는 듣기 싫은 사람에 의해서 작성된 글입니다. 어떻게 하면 자기 실력으로 구세주가 진짜 구세주인지를 증명하겠다는 야심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러니까 출발부터 성경 잘 해석하는 자기 야심으로 시작했으니 글 전체가 다 그런 마음으로 출렁거립니다.
성경을 해석할 권한 자체가 인간에게 없습니다. 성경을 잘 이해해서 제대로 된 메시아 상을 잡아 내겠다는 사고방식이 예수죽였습니다. 예수를(십자가, 복음, 성경)증거 한다는 것은, 내 속에 숨겨져 있는 미쳐 나도 몰랐던 어떤 면이 예수를 죽이기 까지 하는 죄악됨인지를 예수님의 영인 성령에 의해서 눈치챈 결과물로서만 나오는 겁니다.
위의 글에서는 도무지 그런 취지라고는 찾아 볼수가 없습니다.
사도바울의 복음증거는 언제나 "나는 날마다 죽노라" "나는 죄인중의 괴수라"는 고백을 바탕에 깔고서 나왔습니다. 내 해석이 맞고 내 말이 맞으니까 나를 따르라는 식으로 건방지게 안했습니다. 내가전하는 복음외에 다른 복음은 없다고 했습니다. 그 정도로 사도는 인간이 할수 있는 모든 성경해석을 다 정죄하는 입장에서 복음을 전했다는 말입니다.
그런 정신상태가 빠진(사람이 자기실력으로는 도저히 흉내못내고 예수님이 직접 개입해야만 되는) 인간에게서 나올소리는 하나 뿐입니다.
"십자가 피보다 그 피에 대해서 연구하는 내가 잘났다"는 자기 증거입니다.
이 글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을 홀로 다 성취한다는 그 이야기는 듣기 싫은 사람에 의해서 작성된 글입니다. 어떻게 하면 자기 실력으로 구세주가 진짜 구세주인지를 증명하겠다는 야심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러니까 출발부터 성경 잘 해석하는 자기 야심으로 시작했으니 글 전체가 다 그런 마음으로 출렁거립니다.
성경을 해석할 권한 자체가 인간에게 없습니다. 성경을 잘 이해해서 제대로 된 메시아 상을 잡아 내겠다는 사고방식이 예수죽였습니다. 예수를(십자가, 복음, 성경)증거 한다는 것은, 내 속에 숨겨져 있는 미쳐 나도 몰랐던 어떤 면이 예수를 죽이기 까지 하는 죄악됨인지를 예수님의 영인 성령에 의해서 눈치챈 결과물로서만 나오는 겁니다.
위의 글에서는 도무지 그런 취지라고는 찾아 볼수가 없습니다.
사도바울의 복음증거는 언제나 "나는 날마다 죽노라" "나는 죄인중의 괴수라"는 고백을 바탕에 깔고서 나왔습니다. 내 해석이 맞고 내 말이 맞으니까 나를 따르라는 식으로 건방지게 안했습니다. 내가전하는 복음외에 다른 복음은 없다고 했습니다. 그 정도로 사도는 인간이 할수 있는 모든 성경해석을 다 정죄하는 입장에서 복음을 전했다는 말입니다.
그런 정신상태가 빠진(사람이 자기실력으로는 도저히 흉내못내고 예수님이 직접 개입해야만 되는) 인간에게서 나올소리는 하나 뿐입니다.
"십자가 피보다 그 피에 대해서 연구하는 내가 잘났다"는 자기 증거입니다.
성경전체가 다 예수님을 증거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해석입니다(요한복음 5:39). 사람을 구원하는데 필요한 합리적인 논증거리를 찾는 용도로 쓰이는 것을 예수님이 허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구약의 모든 증거자들이 다 그런 정신으로 충만했습니다. 그렇게 될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께서 그들을 사용했기 때문이라고 되어 있습니다(벧전 1:10,11).
1. 성경위에서 만들어진 교파는 맨 먼저 유태교가 있고, 그 다음이 구교이며, 개신교가 그 뒤를 잇습니다. 유태교는 자신들이 본래 가지고 있는 구약 성경으로 유태교를 유지하고 있고, 기독교는 그리스도와 신약 성경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두 종교는 각각 다른 두 개의 구원론을 뼈대로 가지고 있다고 알려져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두 종교 모두에 이 뼈대가 없습니다. 결국 성경 위에 형성되어 있는 모든 종교에 이 뼈대가 없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유태교에는 그들의 성서에 예고된 '메시아'가 없고, 그리스도교에는 그리스도가 메시아라는 성경적 논증이 없습니다.
-----> (저의 비판)
이 글은 전체적으로 종교적 틀인 교리의 완성을 이성적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습니다.
즉, 1. 기독교는 종교이다.
2. 그러므로 기독교라는 종교는 기존 종교학이나 신학에서 이야기 하고 있는 논리적 틀을 완비하고 있어야 한다.
3. 논리적 틀의 완비를 판단하는 기준은 이성이다.
4. 성경은 이러한 이성의 객체로서, 종교가 요구하는 신론, 인간론, 마귀론, 죄론, 구원론, 종말론 등의 체계 구성에 타당한 자료를 제공해야 한다.
라는 전제하에 글을 적어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모든 인간을 불순종에 가두어 두었다고 하고 있습니다. (롬 11:32,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그러므로 인간의 이성 또한 불순종하게 되어 있습니다. 불순종할 수 밖에 없는 이성을 도구삼아 아무리 성경을 해부하고 논리적으로 분석해 봐도 불순종이라는 죄만 나올 뿐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공부하는 자는 "내가 바로 예수 잡아죽인 장본인 맞구나!" 만을 토해내고 또 토해낼 뿐입니다. 즉, 왜 십자가 사건이 발생할 수 밖에 없는가를 실감하면서 죄를 알고 죄의 종으로 존재할 수 밖에 없는 죄인의 괴수인 나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광경을 히브리서는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 :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불순종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이성으로 종교학이라는 또다른 이성이 정립해 놓은 논리의 틀을 완비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 아니라, 말씀이 운동력 있어 나의 온 몸을 갈갈이 찢으시면서까지 말씀하고 싶으신 것이 무엇인지 경청해야 할 것입니다. 성령께서 소리치고 계신 증언은 십자가 지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대제사장이 우리를 매일같이 자신의 죽음에 포함시키시면서 산 제사를 드리고 계시다는 것입니다.(히 4:14-16)
2. 그나마 유태교는 모세율법이라는 구원의 법, 즉 '구원론의 기초'인 구원의 '방법론'은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에는 '구원' 에 대한 '주장'은 있을지언정 그 방법론도 없고 그리스도가 메시아라는 성경적 논증도 없습니다.
기독교에 종교 성립의 기본 조건인 '구원론'이 없을 것이라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만 사실은 '실재'하지 않습니다.
-----> 글쓴이가 특히 구원론에 관심을 보이고 구원론의 기초를 방법론이라고 전개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모든 종교의 목적이 바로 ‘인간 구원’이라는 것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구원할 수 없는 종교는 종교가 아니며, 진리가 아니어서 우리에게 무용한 쓰레기와 같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글쓴이가 모세율법을 읽던지, 사복음서를 읽던지, 서신서를 읽던지 오로지 ‘어떻게 내가 구원받을 수 있나?’만을 관철시켜야 하는 조급증으로 인하여 나를 구원해 줄 메시야와 그가 메시야라는 성경적 논증이 필요한 것입니다. 내 구원이 얼마나 확실히 담보되었는지 자신이 선택한 최선의 방법인 논증으로 철저히 검증해보면서 건너가겠다는 것입니다.
3. 간단하게 말씀드려 어떤 철학자가 "신학 대학엘 가서 공부를 해봤는데 거기에는 구원의 길이 없더라." 라고 주장한 것이 '학문적 논리'의 견지에서는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 철학자는 구체적으로 기독교에 구원론이 없음을 논증하지는 못했습니다. 만약 논증을 했다면 지금쯤 기독교는 사멸되었을 것입니다.
----> 철학자라는 죄인이 죄인들이 집대성한 체계인 신학을 공부해서 구원될 수 있을까요?
<요한복음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 외에 다른 구원의 길은 없습니다.
‘학문적 논리의 견지에서는 사실입니다’라는 말이 십자가위에서 우리의 죄 때문에 피 흘리고 계신 예수님 앞에서도 과연 통하는 말인가요? 학문적 논리라는 것이 사도 바울이 말한 ‘세상의 헛된 철학과 속임수’와 같은 말이라면, 우리는 우리 눈 앞에 밝히 보이는 십자가만 증거해야 하는 것이지 배설물에 집중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4. 기독교는 이미 학문적 논리에 기초를 두고 있는 상태이며 '성경논리'에 입각한 '메시아 구원론' 을 그리스도교의 핵심인 '복음서' 에 제시하면서 형성되었습니다.
----> 배설물에 기초한 것은 배설물과 함께 썩어질 것이 분명합니다. 기독교라는 인간 구원을 위한 종교(아래에서 글쓴이는 인간의 신으로의 신분변화가 목적임을 밝히고 있음.)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은 전혀 상관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글쓴이는 복음서를 이야기 하지만 그것은 배설물의 집합체로서의 교과서일 뿐, 자신을 해부하고 자신의 죄를 들통나도록 하는 능력으로서의 복음서가 아닌 것입니다.
5. 그래서 현재의 '기독교' 상태는 마치 어떤 가설로서의 학설이 존재하다가 정설이 나타나면 자연히 가설들이 사멸되는 것과 같이 논증만으로도 무너질 수 있는 위태한 상황에 처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또 무속 종교로 남을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무속적인 부분은 이미 유태교가 점하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 하나님의 말씀조차 자신의 이성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소재에 불과하기 때문에 가설이니 정설에 의한 논증이니 하는 비유가 가능한 것입니다. 글쓴이는 성경 자체를 장난감 취급하고 있습니다.
6. 성경이라는 66권의 책은 다섯 가지로 분류되어 있습니다.
1, 창세기부터 에스더까지는 역사적의 기록입니다.
2, 다음 욥기부터 아가 까지는 유태와 신, 구교가 공히 '성문서' 로 분류합니다.
3, 이어서 선지 서라는 예언서가 이사야부터 말라기까지 이어져 있고
4. 그 다음이 '4복음서' 이며
5, 나머지는 사도들의 편지글이며 마지막에 계시록이 있습니다.
-----> 성경의 분류는 학자마다 다릅니다.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른 것이지죠. 죄인이 다양한 만큼 죄인의 욕구도 다양하고, 그 다양한 욕구가 나름대로의 관점을 양산합니다. 그렇게 수없이 양산된 관점에 따라 성경의 분류는 달라집니다. 자신의 장난감이기에 얼마든지 분해와 조립이 가능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 책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해석의 기준이 엄연히 살아있는 책입니다. 계시입니다. 계시는 보여주셔야 보인다는 의미입니다. 내가 아무리 보려고 노력해도 허락하지 않으시면 결코 보이지 않습니다. ‘귀 있는 자는 들을찌어다’라는 말씀은 이런 의미입니다.
7. 유태인들은 3번 까지를 가지고 있으면서 나름의 교리를 말하며 기독교는 복음서와 서신을 추가하여 교리를 만들어 가지고 있습니다. 현재는 꼬리에 해당하는 계시록으로 무수한 사이비 종교도 낳아져 있는 상태입니다.
-----> 유태인이라는 아이는 장난감 3번까지 가지고 놀고있고, 기독교라는 아이는 복음서와 서신서라는 장난감까지 추가해서 가지고 있는데, 계시록이라는 장난감은 수많은 아이들이 즐겨가지고 노는 장난감이라는 이야기와 같은 내용입니다.
8. 이러한 상태에서 현재 유태교는 '예수'를 일개 사이비 랍비라고 주장을 합니다. 그 근거는 다음 세 가지로 요약이 됩니다. 탈무드는 이것을 문제 삼아 그리스도교를 '구멍 난 배'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신학의 구멍 1,
복음서의 차이와 상반에 대한 필연성 증명의 부재.
복음서는 4권의 책으로 구성이 되어 있고 그 중에 3권을 일컬어 '공관복음' 이라고 합니다.
예수의 가르침은 '공관복음' 이라는 세책에 '비유'로 함축되어 있습니다. 이 기록들은 예수의 가르침을 세 사람이 자기의 시각에서 각각 기록한 것입니다. 문제는 이 세책들이 사소한 기록 뿐만 아니라 핵심이 되는 '가르침'의 내용에 있어서 까지도 각각 상반되거나 큰 차이를 안고 있다는 점입니다.
성경을 '완전한 계시' 라고 말하는 정통기독교는 이 차이와 상반의 '필연성'을 지금까지 증명하지 못했고, 유태교는 이점을 문제 삼아 그리스도가 '메시아' 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이비 종파들은 이 문제를 무마하기 위해서 "성경은 완전한 계시가 아니다." 라고 말하며 몰몬교나 통일교 같이 또 다른 경전을 가져다 붙이고 자신들만의 구원 논리를 만들어 교세를 확장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사실, 다원주의나 초교파주의 같은 이념은 이러한 논리적 문제가 양산한 변종들인 것입니다.
-----> 주기도문을 예로 들겠습니다. 마태복음 6장과 누가복음 11장에 기록된 주기도문의 내용이 다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주기도문을 세 번, 네 번 했을 리는 없을 것 아닙니까?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한 번 했을 것입니다. 그 한 번 한 것을 Q라 합시다.
그 Q에 대한 반응으로 마태가 있고 누가가 있습니다. 마태의 반응을 A, 누가의 반응을 B라고 합시다.
현재 어떤 사람이 주기도문을 공부한다는 것은 A와 B를 종합하고 다른 문건들까지 참고해서 오리지날 Q를 가상으로 설정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들은 자신의 업적(X, 주기도문을 완벽하게 이해하기)을 드러내기 위해서 A와 B를 이용하고 자신의 X를 Q라고 우기고 싶을 뿐이지, A, B 혹은 Q 에게 순종할 마음은 전혀 없는 것입니다. 자신의 X를 위해서 단순히 참고 또는 수정의 대상으로 성경을 이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모든 인간의 해석 속에는 자신의 죄가 듬뿍 담겨있는 것이고, 성경은 이렇게 인간이 자신의 죄를 마음껏 발휘할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이근호 목사님 강의내용 수정 인용)
9. 구멍 2,
유태교제사장인 '레위' 에 대하여 기독교의 '만인제사장제' 성립의 논증 부재.
유태교도 기독교도 모두 변경할 수 없는 성경의 논리가 있는데 그것이 이 '제사장 제도' 입니다. 제사장 직의 이월 문제를 기독교는 성경적으로 논증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성경적 논리로는 하나님이 세운 '종교의 지도자'가 성경을 바탕으로 한 종교 집단의 리더가 되는 것이 원칙입니다. 성경적으로 합당한 논증이 없는 상태에서 '지도자' 라는 직위를 가지는 것은 '성경적' 으로 '불법'입니다. 유태인에게는 모세의 율법이 있고 '레위' 라는 제사 직분을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았다는 '증거'가 성경 내용에 있습니다. 하지만 이에 반해 '기독교'는 '만인 제사장제' 라는 이론을 주장하지만 이것은 성경적 근거를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모세율법에 보면 이 제사장 직의 '이월' 에는 '규례'가 있습니다.
'선민'이라는 기득권을 가진 유태인의 관점에서 예수가 정말 메시아라면 기독교는 모세율법의 '이월규례'에 따른 '만인 제사장제'를 주장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구약에 이은 신약적 구원론이 논리적 타당성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 타당성이 확보되어 있으면 유태교가 인정을 하든 말든 일단 '종교'로서의 기본 요건은 갖추고 있는 것이 됩니다. 하지만 신약이라는 성경 안에는 그리스도가 모세율법의 뒤를 이어 제사장으로 삼아졌다는 것을 논증할 자료가 없습니다.
-----> 하나님께서 레위지파에게 제사장을 맡기신 이유는 레위지파가 제사장이라는 직분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존재인 것을 드러냄으로써 그 어떤 인간도 하나님의 제사장, 즉 멜기세덱의 반차에 끼어들어 올 수 없음을 확인하기 위함입니다.
즉, 멜기세덱의 반차를 이을 유일한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가 레위지파가 아닌 유다지파에서 나온 이유는 이런 맥락에서 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인간의 예상과 기득권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피하시는 방식으로 작용하시는데 제사장의 역할 또한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구약의 제사장은 제물과 분리되어 제물을 하나님께 바치는 역할을 하는 것 같이 보여지지만, 실상 제사장은 그 제물과 동일하게 취급받게 되어 있습니다. 즉, 구약의 제사장과 제물을 중심으로 한 제사법은 온전한 십자가 제사를 드릴 수 있는 유일한 제물이자 제사장인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 그림자들이 계속 어그러지고 부패하여짐에 따라 복의 근원인 하나님의 대제사장의 도래를 학수고대하게 되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 위에서 그 언약을 남김없이 다 이루신 것입니다.
만인제사장설은 주장한 루터는 예수 그리스도가 그 언약을 남김없이 다 이루셨음을 토대로 하여 특정 개인에게 말씀을 선포하거나 성만찬을 주도할 수 있는 권리가 없음을 드러내기 위해 주장된 것입니다. 모든 인간이 제사장이라는 주장을 뒤집어보면 예수 그리스도외에 그 어떤 인간도 제사장이 될 수 없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구약의 그 어떤 율법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만 해석되는 것이며, 만인제사장설을 성경이 주장하거나 이를 입증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앞서 말씀드린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책이기 때문입니다.
10.구멍3과 그 이하의 글에 대한 비판
-----> 구멍 3 역시 구멍 2에 대한 비판이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하의 내용은 글쓴이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를 통해 드러내기 원하셨던 ‘공의’라는 것의 실체를 잠언과 욥기에서 찾을 수 있다는 논리를 전개한 것입니다.
글쓴이는 나름대로의 혹은 인간적인 공의를 상상하고 있으며 그 공의에 맞는 신관을 조작한 나머지 예수 그리스도조차 그것에 순종해야 할 것인양 적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이것이 공의 아닙니까?’라고 반문하고 있는 글쓴이조차 십자가 살해사건에 가담한 가해자임을 공개하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살해당하는 신’이라는 구조가 인간의 머리속에서는 나올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이해할 수 범위 내에서 성경과 예수를 편집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6장 24절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이 글에서 자기를 부인하는 모습은 전혀 찾아 볼 수 없습니다. 펄펄 살아서 십자가 지신 예수까지 이성의 장난감으로 삼으려는 끊임없는 자기긍정만 드러납니다.
성령받은 사도바울은 자기 자신을 죄인의 괴수로 인정했습니다.
글쓴이는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합니다. 최소한 죄인의 괴수는 아닐 것 같네요.^^
그리고 이 두 종교는 각각 다른 두 개의 구원론을 뼈대로 가지고 있다고 알려져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두 종교 모두에 이 뼈대가 없습니다. 결국 성경 위에 형성되어 있는 모든 종교에 이 뼈대가 없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유태교에는 그들의 성서에 예고된 '메시아'가 없고, 그리스도교에는 그리스도가 메시아라는 성경적 논증이 없습니다.
-----> (저의 비판)
이 글은 전체적으로 종교적 틀인 교리의 완성을 이성적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습니다.
즉, 1. 기독교는 종교이다.
2. 그러므로 기독교라는 종교는 기존 종교학이나 신학에서 이야기 하고 있는 논리적 틀을 완비하고 있어야 한다.
3. 논리적 틀의 완비를 판단하는 기준은 이성이다.
4. 성경은 이러한 이성의 객체로서, 종교가 요구하는 신론, 인간론, 마귀론, 죄론, 구원론, 종말론 등의 체계 구성에 타당한 자료를 제공해야 한다.
라는 전제하에 글을 적어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모든 인간을 불순종에 가두어 두었다고 하고 있습니다. (롬 11:32,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그러므로 인간의 이성 또한 불순종하게 되어 있습니다. 불순종할 수 밖에 없는 이성을 도구삼아 아무리 성경을 해부하고 논리적으로 분석해 봐도 불순종이라는 죄만 나올 뿐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공부하는 자는 "내가 바로 예수 잡아죽인 장본인 맞구나!" 만을 토해내고 또 토해낼 뿐입니다. 즉, 왜 십자가 사건이 발생할 수 밖에 없는가를 실감하면서 죄를 알고 죄의 종으로 존재할 수 밖에 없는 죄인의 괴수인 나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광경을 히브리서는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 :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불순종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이성으로 종교학이라는 또다른 이성이 정립해 놓은 논리의 틀을 완비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 아니라, 말씀이 운동력 있어 나의 온 몸을 갈갈이 찢으시면서까지 말씀하고 싶으신 것이 무엇인지 경청해야 할 것입니다. 성령께서 소리치고 계신 증언은 십자가 지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대제사장이 우리를 매일같이 자신의 죽음에 포함시키시면서 산 제사를 드리고 계시다는 것입니다.(히 4:14-16)
2. 그나마 유태교는 모세율법이라는 구원의 법, 즉 '구원론의 기초'인 구원의 '방법론'은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에는 '구원' 에 대한 '주장'은 있을지언정 그 방법론도 없고 그리스도가 메시아라는 성경적 논증도 없습니다.
기독교에 종교 성립의 기본 조건인 '구원론'이 없을 것이라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만 사실은 '실재'하지 않습니다.
-----> 글쓴이가 특히 구원론에 관심을 보이고 구원론의 기초를 방법론이라고 전개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모든 종교의 목적이 바로 ‘인간 구원’이라는 것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구원할 수 없는 종교는 종교가 아니며, 진리가 아니어서 우리에게 무용한 쓰레기와 같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글쓴이가 모세율법을 읽던지, 사복음서를 읽던지, 서신서를 읽던지 오로지 ‘어떻게 내가 구원받을 수 있나?’만을 관철시켜야 하는 조급증으로 인하여 나를 구원해 줄 메시야와 그가 메시야라는 성경적 논증이 필요한 것입니다. 내 구원이 얼마나 확실히 담보되었는지 자신이 선택한 최선의 방법인 논증으로 철저히 검증해보면서 건너가겠다는 것입니다.
3. 간단하게 말씀드려 어떤 철학자가 "신학 대학엘 가서 공부를 해봤는데 거기에는 구원의 길이 없더라." 라고 주장한 것이 '학문적 논리'의 견지에서는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 철학자는 구체적으로 기독교에 구원론이 없음을 논증하지는 못했습니다. 만약 논증을 했다면 지금쯤 기독교는 사멸되었을 것입니다.
----> 철학자라는 죄인이 죄인들이 집대성한 체계인 신학을 공부해서 구원될 수 있을까요?
<요한복음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 외에 다른 구원의 길은 없습니다.
‘학문적 논리의 견지에서는 사실입니다’라는 말이 십자가위에서 우리의 죄 때문에 피 흘리고 계신 예수님 앞에서도 과연 통하는 말인가요? 학문적 논리라는 것이 사도 바울이 말한 ‘세상의 헛된 철학과 속임수’와 같은 말이라면, 우리는 우리 눈 앞에 밝히 보이는 십자가만 증거해야 하는 것이지 배설물에 집중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4. 기독교는 이미 학문적 논리에 기초를 두고 있는 상태이며 '성경논리'에 입각한 '메시아 구원론' 을 그리스도교의 핵심인 '복음서' 에 제시하면서 형성되었습니다.
----> 배설물에 기초한 것은 배설물과 함께 썩어질 것이 분명합니다. 기독교라는 인간 구원을 위한 종교(아래에서 글쓴이는 인간의 신으로의 신분변화가 목적임을 밝히고 있음.)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은 전혀 상관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글쓴이는 복음서를 이야기 하지만 그것은 배설물의 집합체로서의 교과서일 뿐, 자신을 해부하고 자신의 죄를 들통나도록 하는 능력으로서의 복음서가 아닌 것입니다.
5. 그래서 현재의 '기독교' 상태는 마치 어떤 가설로서의 학설이 존재하다가 정설이 나타나면 자연히 가설들이 사멸되는 것과 같이 논증만으로도 무너질 수 있는 위태한 상황에 처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또 무속 종교로 남을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무속적인 부분은 이미 유태교가 점하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 하나님의 말씀조차 자신의 이성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소재에 불과하기 때문에 가설이니 정설에 의한 논증이니 하는 비유가 가능한 것입니다. 글쓴이는 성경 자체를 장난감 취급하고 있습니다.
6. 성경이라는 66권의 책은 다섯 가지로 분류되어 있습니다.
1, 창세기부터 에스더까지는 역사적의 기록입니다.
2, 다음 욥기부터 아가 까지는 유태와 신, 구교가 공히 '성문서' 로 분류합니다.
3, 이어서 선지 서라는 예언서가 이사야부터 말라기까지 이어져 있고
4. 그 다음이 '4복음서' 이며
5, 나머지는 사도들의 편지글이며 마지막에 계시록이 있습니다.
-----> 성경의 분류는 학자마다 다릅니다.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른 것이지죠. 죄인이 다양한 만큼 죄인의 욕구도 다양하고, 그 다양한 욕구가 나름대로의 관점을 양산합니다. 그렇게 수없이 양산된 관점에 따라 성경의 분류는 달라집니다. 자신의 장난감이기에 얼마든지 분해와 조립이 가능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 책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해석의 기준이 엄연히 살아있는 책입니다. 계시입니다. 계시는 보여주셔야 보인다는 의미입니다. 내가 아무리 보려고 노력해도 허락하지 않으시면 결코 보이지 않습니다. ‘귀 있는 자는 들을찌어다’라는 말씀은 이런 의미입니다.
7. 유태인들은 3번 까지를 가지고 있으면서 나름의 교리를 말하며 기독교는 복음서와 서신을 추가하여 교리를 만들어 가지고 있습니다. 현재는 꼬리에 해당하는 계시록으로 무수한 사이비 종교도 낳아져 있는 상태입니다.
-----> 유태인이라는 아이는 장난감 3번까지 가지고 놀고있고, 기독교라는 아이는 복음서와 서신서라는 장난감까지 추가해서 가지고 있는데, 계시록이라는 장난감은 수많은 아이들이 즐겨가지고 노는 장난감이라는 이야기와 같은 내용입니다.
8. 이러한 상태에서 현재 유태교는 '예수'를 일개 사이비 랍비라고 주장을 합니다. 그 근거는 다음 세 가지로 요약이 됩니다. 탈무드는 이것을 문제 삼아 그리스도교를 '구멍 난 배'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신학의 구멍 1,
복음서의 차이와 상반에 대한 필연성 증명의 부재.
복음서는 4권의 책으로 구성이 되어 있고 그 중에 3권을 일컬어 '공관복음' 이라고 합니다.
예수의 가르침은 '공관복음' 이라는 세책에 '비유'로 함축되어 있습니다. 이 기록들은 예수의 가르침을 세 사람이 자기의 시각에서 각각 기록한 것입니다. 문제는 이 세책들이 사소한 기록 뿐만 아니라 핵심이 되는 '가르침'의 내용에 있어서 까지도 각각 상반되거나 큰 차이를 안고 있다는 점입니다.
성경을 '완전한 계시' 라고 말하는 정통기독교는 이 차이와 상반의 '필연성'을 지금까지 증명하지 못했고, 유태교는 이점을 문제 삼아 그리스도가 '메시아' 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이비 종파들은 이 문제를 무마하기 위해서 "성경은 완전한 계시가 아니다." 라고 말하며 몰몬교나 통일교 같이 또 다른 경전을 가져다 붙이고 자신들만의 구원 논리를 만들어 교세를 확장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사실, 다원주의나 초교파주의 같은 이념은 이러한 논리적 문제가 양산한 변종들인 것입니다.
-----> 주기도문을 예로 들겠습니다. 마태복음 6장과 누가복음 11장에 기록된 주기도문의 내용이 다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주기도문을 세 번, 네 번 했을 리는 없을 것 아닙니까?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한 번 했을 것입니다. 그 한 번 한 것을 Q라 합시다.
그 Q에 대한 반응으로 마태가 있고 누가가 있습니다. 마태의 반응을 A, 누가의 반응을 B라고 합시다.
현재 어떤 사람이 주기도문을 공부한다는 것은 A와 B를 종합하고 다른 문건들까지 참고해서 오리지날 Q를 가상으로 설정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들은 자신의 업적(X, 주기도문을 완벽하게 이해하기)을 드러내기 위해서 A와 B를 이용하고 자신의 X를 Q라고 우기고 싶을 뿐이지, A, B 혹은 Q 에게 순종할 마음은 전혀 없는 것입니다. 자신의 X를 위해서 단순히 참고 또는 수정의 대상으로 성경을 이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모든 인간의 해석 속에는 자신의 죄가 듬뿍 담겨있는 것이고, 성경은 이렇게 인간이 자신의 죄를 마음껏 발휘할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이근호 목사님 강의내용 수정 인용)
9. 구멍 2,
유태교제사장인 '레위' 에 대하여 기독교의 '만인제사장제' 성립의 논증 부재.
유태교도 기독교도 모두 변경할 수 없는 성경의 논리가 있는데 그것이 이 '제사장 제도' 입니다. 제사장 직의 이월 문제를 기독교는 성경적으로 논증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성경적 논리로는 하나님이 세운 '종교의 지도자'가 성경을 바탕으로 한 종교 집단의 리더가 되는 것이 원칙입니다. 성경적으로 합당한 논증이 없는 상태에서 '지도자' 라는 직위를 가지는 것은 '성경적' 으로 '불법'입니다. 유태인에게는 모세의 율법이 있고 '레위' 라는 제사 직분을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았다는 '증거'가 성경 내용에 있습니다. 하지만 이에 반해 '기독교'는 '만인 제사장제' 라는 이론을 주장하지만 이것은 성경적 근거를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모세율법에 보면 이 제사장 직의 '이월' 에는 '규례'가 있습니다.
'선민'이라는 기득권을 가진 유태인의 관점에서 예수가 정말 메시아라면 기독교는 모세율법의 '이월규례'에 따른 '만인 제사장제'를 주장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구약에 이은 신약적 구원론이 논리적 타당성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 타당성이 확보되어 있으면 유태교가 인정을 하든 말든 일단 '종교'로서의 기본 요건은 갖추고 있는 것이 됩니다. 하지만 신약이라는 성경 안에는 그리스도가 모세율법의 뒤를 이어 제사장으로 삼아졌다는 것을 논증할 자료가 없습니다.
-----> 하나님께서 레위지파에게 제사장을 맡기신 이유는 레위지파가 제사장이라는 직분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존재인 것을 드러냄으로써 그 어떤 인간도 하나님의 제사장, 즉 멜기세덱의 반차에 끼어들어 올 수 없음을 확인하기 위함입니다.
즉, 멜기세덱의 반차를 이을 유일한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가 레위지파가 아닌 유다지파에서 나온 이유는 이런 맥락에서 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인간의 예상과 기득권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피하시는 방식으로 작용하시는데 제사장의 역할 또한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구약의 제사장은 제물과 분리되어 제물을 하나님께 바치는 역할을 하는 것 같이 보여지지만, 실상 제사장은 그 제물과 동일하게 취급받게 되어 있습니다. 즉, 구약의 제사장과 제물을 중심으로 한 제사법은 온전한 십자가 제사를 드릴 수 있는 유일한 제물이자 제사장인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 그림자들이 계속 어그러지고 부패하여짐에 따라 복의 근원인 하나님의 대제사장의 도래를 학수고대하게 되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 위에서 그 언약을 남김없이 다 이루신 것입니다.
만인제사장설은 주장한 루터는 예수 그리스도가 그 언약을 남김없이 다 이루셨음을 토대로 하여 특정 개인에게 말씀을 선포하거나 성만찬을 주도할 수 있는 권리가 없음을 드러내기 위해 주장된 것입니다. 모든 인간이 제사장이라는 주장을 뒤집어보면 예수 그리스도외에 그 어떤 인간도 제사장이 될 수 없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구약의 그 어떤 율법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만 해석되는 것이며, 만인제사장설을 성경이 주장하거나 이를 입증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앞서 말씀드린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책이기 때문입니다.
10.구멍3과 그 이하의 글에 대한 비판
-----> 구멍 3 역시 구멍 2에 대한 비판이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하의 내용은 글쓴이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를 통해 드러내기 원하셨던 ‘공의’라는 것의 실체를 잠언과 욥기에서 찾을 수 있다는 논리를 전개한 것입니다.
글쓴이는 나름대로의 혹은 인간적인 공의를 상상하고 있으며 그 공의에 맞는 신관을 조작한 나머지 예수 그리스도조차 그것에 순종해야 할 것인양 적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이것이 공의 아닙니까?’라고 반문하고 있는 글쓴이조차 십자가 살해사건에 가담한 가해자임을 공개하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살해당하는 신’이라는 구조가 인간의 머리속에서는 나올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이해할 수 범위 내에서 성경과 예수를 편집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6장 24절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이 글에서 자기를 부인하는 모습은 전혀 찾아 볼 수 없습니다. 펄펄 살아서 십자가 지신 예수까지 이성의 장난감으로 삼으려는 끊임없는 자기긍정만 드러납니다.
성령받은 사도바울은 자기 자신을 죄인의 괴수로 인정했습니다.
글쓴이는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합니다. 최소한 죄인의 괴수는 아닐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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