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강-창 25장 7—11절(아브라함의 죽음)170802-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25장 7-11절입니다. 구약성경 34페이지입니다.
창 25:7-11
“아브라함의 향년이 일백 칠십 오세라 그가 수가 높고 나이 많아 기운이 진하여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매 그 아들 이삭과 이스마엘이 그를 마므레 앞 헷 족속 소할의 아들 에브론의 밭에 있는 막벨라 굴에 장사하였으니 이것은 아브라함이 헷 족속에게서 산 밭이라 아브라함과 그 아내 사라가 거기 장사되니라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하나님이 그 아들 이삭에게 복을 주셨고 이삭은 브엘 라해로이 근처에 거하였더라.”
오늘 이 대목은 아브라함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죽음은 일반인들의 죽음과 다릅니다. 일반인들은 자기죽음으로 끝나지만 아브라함죽음은 하나님의 언약을 품고 죽음으로 가는 겁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죽었다고 보지 마시고 아브라함과 함께 있는 언약의 실체가 죽었다고 보면 돼요.
더불어 죽는 것, 하나님의 약속을 품고 죽는 것과 하나님의 약속이 없는 일반적인 죽음하고는 전혀 다릅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아브라함이 기뻐했다는 내용이 단 한군데도 나오지를 않아요. 물론 기쁜 일이 있었겠지만, 양이 늘어난다든지 하는 것이 기뻤겠지만 노골적으로 기뻐한다는 이야기가 오히려 신약에 보면 나옵니다.
요한복음 8장 56절, 신약에 보면, 예수님께서 아브라함에 대해서 마치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언급을 해요. 2천년격차가 나는데요. 유대인들이 놀라지요. 2천년 후에 태어난 네가 어떻게 그를 잘 아는가? 잘 알지요. 하나님이시니까 잘 아는데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아브라함 때에 예수님이 살아계시는 것처럼, 그 현장에 같이 있는 것으로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나의 때 보기를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 빤히 쳐다보니까 아브라함이 되게 기뻐하는 거예요. 예수님 오시기 전 2천 년 전에. 그러니까 57절에 “유대인들이 가로되 네가 아직 오십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그렇게 이야기해요.
상당히 과학적이고 합리적이지요. 그래서 유대인들은 미신입니다. 미신이란 자기 자신을 믿는 것을 미신이라 해요. 자기 자신을 믿는 것이 미신이기 때문에 미신의 종류에 여러 가지가 있는데 제일 두드러지는 것이 과학입니다. 과학이 아주 노골적미신이지요. 그 다음에 철학, 모든 인간의 학문들, 정치, 경제, 다 미신입니다. 자기만 믿기 때문에.
이렇게 생각하면 미신 아닌 자가 없지요. 모든 인간은 자신을 믿는데 이것을 구약적으로 보게 되면 이방민족들이 믿는 우상숭배라,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방인들이 신을 믿고 유대인들도 신을 믿는데 같은 신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살아계신 참 하나님이고 그리고 미래를 책임지실 하나님이고, 이방민족의 신은 본인이 만들어낸 거예요. 인간의 존재가 있기에 자기존재를 설명하려고 하다 보니까 “누가 만들었어? 누가 있겠지.” 그래서 생긴 신이 이방인의 신입니다. 이방인들이 신을 안 믿는 것이 아니고 믿는데 그게 미신이라는 말이지요.
미신이냐 아니냐의 결정은 하나님의 약속이 쥐고 있지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아브라함이 기뻐했다는 거지요. 아브라함이 뭘 보고 기뻐했느냐 하면 예수님의 때를 보고 기뻐했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아브라함이 죽는다는 말이지요.
죽기 전에 예수님의 때를 봤다는 것은 아브라함은 지금 자기인생이 자기가 일궈나가는 인생이 아니고 자기와 함께 있는 예수님이 일궈 나가는 인생인데 그 인생에 대해서 죽음이 온다 할지라도 오히려 죽음이 오기 때문에 기쁨은 사그라지는 것이 아니고 더욱 더 기쁨의 내용이 분명해지는 거예요.
나는 부동산 값 올라서 기쁘다 하는 것은 자기영역에 관한 거예요. 그런데 2천년후에 예수님의 때를 보고 기뻐했다는 것은 그 때는 이미 자기가 죽은 다음이잖아요. 죽은 다음인데 자기가 죽고 난 뒤의 일에 대해서 자기가 죽기 전에 빙그레 웃는다는 말은, 죽음이라는 그까짓 거는 아무것도 아니고 그것은 하나의 절차에 불과하다는 믿음을 갖고 있는 겁니다.
특이한 믿음이에요. 여러분이 혹시 방에서 놀다가 나가려고 손잡이를 돌리는데 손잡이가 딱딱하게 고정되어서 돌아가지 않을 때 폐쇄된 느낌이 들지요. 그 말은 뭐냐? 문이 잠긴 것도 모르고 마치 문이 열린 것처럼 친구들과 한바탕 놀았다 칩시다. 파티가 다 끝났는데 손잡이를 돌려도 문이 열리지 않고 고정되어 있어요.
그러면 기껏 갇힌 동네에서 파티를 열었던 겁니다. 인간의 죽음이라는 것은, 죽음 그 다음에 무슨 세계가 있을지는, 우선 인간들이 생각하기는 죽어봐야 안다는 거예요. 그 죽음의 손잡이가 고정되어 있어서 죽어봐야 아는데 이게 열리지를 않는 거예요. 결국 이 말은, 열리지 않는 방안에서 폐쇄된 채 평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죽음 안에서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판 거예요. 가장 중요한 문제는 그 죽음의 문을 열고 그 다음에 어떤 세계가 있는지 그 실체를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인데 사람들은 그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자기 행복하고, 애 어떻게 키우고, 그게 중차대한 문제고 더 나아가서 그런 문제 가지고 자신의 인생의 기쁨을 거기서 뽑아내려고 한다는 말이지요.
이것은 아브라함이 기뻐한 것과 다른 기쁨이에요. 백날 기뻐해 봤자 마지막에 웃어야 되는데 마지막에 문이 잠겼는데요. 사실은 이런 이야기를 하면 남들이 저에게 “그것은 모든 사람이 그런데 어떠냐?” 할 때 모든 사람이 다 그러면 제가 할 말이 없겠는데 아브라함은 안 그랬다는 말이지요. 아브라함, 이삭, 야곱, 노아는 안 그랬다는 말이지요.
중요한 것은 그들이 우리한테 성경책을 통해서 소개하고 있잖아요. 그런데 왜 자꾸 성경을, 복음을 외면하고 회피 합니까? 무슨 즐거움, 기쁨이 따로 있다고. 그것을 가지고 기본도 안 되었다고 하지요. 기본조차가 안 되어 있어요. 파티장이 폐쇄되었는데 그것도 모르고 실컷 놀고 나중에 밤늦게 가려고 하는데 잠겼다.
“문 열어주세요.” 누구한테 이야기할 거예요. 알 수 없는 공포가 밀려오지요. 죽을 때만 무서운 것이 아니에요. 죽기 전부터 원인 없는 공포가 계속 우리에게 밀려오는 겁니다. 예를 들면 문은 잠겼는데 그 문 밑에서 물이 스며 들어와서 파티 할 때 뭔가 바닥이 시원한 느낌이 들고 축축한 느낌이 든다.
그것은 벌써 문 밑에서 문 바깥에 있는 심판의 물줄기가 조금씩 우리 인생에 소리 소문도 없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계속해서 불길한 징조를 우리 밑에 까는 겁니다. 요한복음 3장에 보면 예수님은 벌써 이렇게 이야기해요.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면 저주가 그와 함께 있다.
화생방훈련이라는 것이 뭐냐? 폐쇄 공간 만들어놓고 거기다가 가스 살포해서 가스가 얼마나 독한지를 맛보게 하고 그 다음에 방독면 써서 방독면이 얼마나 좋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그런 훈련을 하거든요. 방독면이 없어요. 가스훈련의 핵심은 뭐냐? 방독면이 너의 몸, 너를 지켜주고 너보다 더 소중하다는 거예요.
네가 아무리 살려주세요, 하고 군가를 부르고 뭘 해도 방독면보다 못하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한 공간이 되듯이 이 세상에 인간을 유포하고 살포해 놓은 것은 인간의 죽음문제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없다는 것을 평생토록 살면서 온몸으로 느끼라는 겁니다. 죽음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없어요.
이 말은 죽음문제가 해결되었거든 아브라함처럼 어떤 일이 있더라도 싱글벙글 할 수 있는 여유를 가져야 된다는 겁니다. 죽음 문제 말고 다른 문제가 설교시간에 나오면 안돼요. 교회를 키웁시다, 하는 것은 말도 안돼요. 설교자체가 말이 안 됩니다.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마태복음 16장에서 예수님이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지금 목숨을 잃는 시스템이 가동되고 있다는 거예요. 2017년의 이 대한민국이. 북한에서 죽으나 남한에서 죽으나 같은 죽음이에요. 그러면 이스라엘은 죽음에서 면제될 수 있고 웃을 수 있는 어떤 기회 같은 것이 주어졌는가? 이스라엘 같은 경우에는 주어졌어요.
출애굽기 31장 14절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너희는 안식일을 지킬찌니 이는 너희에게 성일이 됨이라 무릇 그 날을 더럽히는 자는 죽일찌며.”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면서 이스라엘에게 아주 특이한 죽음을 줍니다. 보통 죽음이란 태어나서 늙어 죽는 것이 보통 죽음이잖아요. 그런 늙어죽는 죽음 말고 뭔가 뒤에 하나님의 중요한 법과 계획과 연결된 죽음이 실과 바늘처럼 이스라엘에 꽂힙니다.
그 앞부분, 바늘부분은 안식일이에요. 안식일을 어긴 사람은 특수한 죽음을 죽게 되는 겁니다. 안식일을 어기면 특수한 죽음을 죽는다는 그 말은 만약 안식일에 순종하게 되면 특수한 생명에 소속됨을 확인해줄 거예요. 죽어도 다시 사는 생명.
안식에 대해서 조금만 더 설명한다면 이렇습니다. 출애굽기 20장에 보면 십계명 이야기할 때 그중 네 번째 계명이 안식일인데 그 안식일에 보면 이런 대목이 있어요. 10절에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여기까지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인데 그 다음에 “네 육축이나” 짐승까지 안식일날 안식을 누립니다. 짐승까지 안식을 누린다는 이 말, 이 설명을 좀 더 심도 있게 보려면 창세기 6장 7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이 잘못을 하니까, 인간이 육적으로 노니까 노아홍수 때 다 쓸어버린다는 계획을 했거든요.
그 때 잘못한 인간만 죽이는 것이 아니고 펠리컨, 무당벌레, 낙타, 코스모스, 원숭이, 귀여운 코알라, 딱정벌레, 이거 다 열거하다 보면 오늘 설교 다 끝나요. 같이 다 죽이는 거예요.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딱정벌레가 무슨 죄 지었습니까? 아니지요. 왜 인간이 잘못했는데 딱정벌레가 죽고 낙타나 기린이 왜 죽느냐 하면, 더불어 있기 때문에 그래요. 무엇과? 인간과 짐승이 더불어 있는 거예요. 만약에 그 인간을 하나님의 특수한 생명으로 살려낼 경우에는 인간은 이왕 버린 몸이기에 이제는 인간 말고 다른 것으로 인하여 도리어 인간이 살게 되는 계획을 준비하셨는데 그게 뭐냐?
노아홍수 이후에 하나님께서 방주와 더불어, 함께 살았던 사람들을 제쳐놓고 함께 동승했던 짐승과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를 드렸더니, 새를 잡고 짐승을 잡았더니 이번에는 사람이 살아요. 더불어, 함께 있다는 그 이유 때문에. 이게 바로 출애굽기에서 말하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입니다. 어린양! 어린양! 바로 출애굽의 유월절 어린양입니다.
양이 인간을 대신해서 죽었더니만 사람이 살아나는 그 엮여진 관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 양을 잡아야 될 이유, 곡식을 드린다든지, 팥이나 콩을 드리지 않고 왜 짐승을 드리는가? 그 짐승은 피를 흘려야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피는 곧 생명이기 때문에. 따라서 피를 흘리는 제사를 드림으로 말미암아 생명은 나중에 피의 모습으로 등장해서 낯선 피, 일반적인 피가 아니고, 아무나의 피가 아니라 낯선 분이 오셔서 흘리는 낯선 피가 처음부터 폐쇄된 공간에서 죄 때문에 죽어야 될 그 자를 특수한 생명의 세계로 더불어 이끌게 된다는 이야기를 성경은 전체로 알려주고 있습니다.
안식일을 줘놓고 안식일 그 이후에는 짐승마저 안식을 누린다는 이것은 “사람아 비켜라.” 전에는 사람이 살기 위해서 안식일을 지켰다면 안식일 자체가 사람에게 생명을 주는 그러한 계획이 주님 앞에 마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안식일이라는 것이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이스라엘에게서 나왔고 이스라엘의 이름은 야곱이었습니다.
그리고 야곱은 어디서 나왔느냐? 이삭에게서 나왔고 이삭은 어디서 나오는가? 아브라함에서 나오는 거예요. 그 점을 생각해 봐야 됩니다. 오늘 본문을 보겠습니다. 창세기 오늘 본문 25장 9, 10절에 보게 되면, “막벨라 굴에 장사하였으니 이것은 아브라함이 헷 족속에게서 산 밭이라.” 이렇게 되어 있지요.
이 막벨라굴이라는 것은 어디쯤 있는가 하면 헤브론이라는 곳에 있어요. 헤브론은 예루살렘, 베들레헴 그 밑에 있어요. 거기서 헷족속, 히타이트족속에게서 밭을 사서, 그 다음이 중요한데 “아브라함과 그 아내 사라가 거기 장사 되니라.” 보통 세상 사람들도 이야기해요. 태어날 때는 나이순으로 태어나더라도 죽는 순서는 없다고 이야기하거든요.
그러면 태어날 때 선배라도 죽는 입장에서는 선배라고 해서 다 일찍 죽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아브라함보다 나이가 열 살이나 적은 사라가 먼저 죽어요. 그리고 사라 죽은데다 아브라함이 엎어지듯이, 덮듯이 그 위에 얹히듯이 죽게 됩니다. 여기에 아브라함만 얹히는 것이 아니에요.
이삭과 그 부인 리브가도 거기에 얹힙니다. 그리고 또 누가 거기에 얹히는가 하면, 창세기 50장 13절에 보면 요셉이 거기에 자기 아버지를 얹어버립니다. “그를 가나안 땅으로 메어다가 마므레 앞 막벨라 밭 굴에 장사하였으니 이는 아브라함이 헷 족속 에브론에게 밭과 함께 사서 소유 매장지를 삼은 곳이더라.”
그러면 밑에 있는 연약한 사라위에 남편 무게 얹고, 거기에 더 보태고 또 보태서 아예 찌부러질 거예요. 자, 여기서 참 어려운 이야기를 해봅시다. 죽음이라는 것은 아까 폐쇄되었다, 그렇게 했습니다. 폐쇄 되었는데 아브라함은 싱긋 웃은 거예요. 한평생 살면서 죽음을 통과할 수 있다는 그 자신감, 그것은 어디서 왔겠어요?
하나님께서 약속을 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제 중요합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예수님 얼굴을 본적이 있느냐는 그 말이지요. 참. 아브라함이 예수님의 얼굴을 봤다면 창세기에 나옵니다. 예수님은 키가 얼마고, 이런 식으로 나왔을 거예요. 아브라함은 예수님을 본 적이 없어요.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지요.
아브라함이 예수님을 본 적도 없으면서 예수님의 때를 봤다는 이것이 어느 정도 어려운 이야기냐? 오늘날 예수님을 봤습니까? 언제 봤어요? 안 봤지요. 예수님께서,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는데 문제는 본 것으로 믿는 것과 보지 않고 믿는 것과 같은 분을 믿고 있다는 근거가 있어야 돼요.
본 것으로 믿는 것은 “나는 저 사람을 봤다.”가 되지만 보지도 않고 믿으면 본 사람이 생각하는 그 인상, 실체하고 자기가 안 본체 상상하는 그 실체하고 그림을 그려보라고 한다면 같은 것이 나올 확률이 제로입니다. 여기서 어렵다는 것이 있어요. 수련회참석한 사람은 약간 덜 어렵고 참석 안한 사람은 더 어려울 것이고요.
존재가 아니고 기능입니다. 사람이 뭔가 존재한다는 것은 언제 아느냐 하면, 어릴 때 자기가 거울보고 알아요. 평소에는 아빠 엄마가 있지 자기가 있는 것을 못 느낍니다. 그런데 거울을 보면서 자기 모습을 보고 혼자 킥킥 웃을 때 이미 거울 속에 있는 그것이 존재로 느껴지는 겁니다. 내가 여기 있음을 어렴풋이 감지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보다 어릴 때는 식구가 엄마 아빠 자기 포함 세 명이라면, 남들에게는 셋이어도 달랑 두 명이에요. 자기는 숫자로 치지도 않습니다. 아빠 없으면 울고 엄마 없으면 울어요. 왜냐하면 아빠 엄마 없는 것이 자기 없어지는 것과 동일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자의식이 생기면서 “엄마가 장보고 올 테니 혼자 잘 놀고 있어.” “응” 하고 자기존재감을 느끼는 겁니다.
이렇게 자기존재감을 느끼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뭐냐? 보는 족족, 듣는 족족 모든 것을 자기존재감을 더욱더 깊숙이 더 느끼는 재료로서 전부 다 집어넣어요. 쉽게 말해서 이왕 있는 것 나를 더 내가 살려보자는 식입니다. 좀 어렵지요. 그러면 그 때부터 뭐가 생기느냐 하면, 세상현실이라는 것은 나의 있음을 견주어서 내가 여기 있다는 의미를 계속 끌어 모으기 위해서 세상을 자기 맘대로 재구성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어렵지요? 1980년도 강원도 깊은 산골에서 어디 가본적도 없이 감자만 캐는 할머니가 계시다면 그 할머니에게 광주사태는 전혀 무의미한 거예요. 왜? 그에게 의미있는 것은 “이번에 감자농사 잘 됐다.” 이것만 의미 있는 겁니다. 대통령이 바뀌는 것도 의미 없어요. 감자농사를 왜 짓느냐 하면, 내가 짓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거예요.
그 할머니에게 진짜 바깥 세상에 대해서 의미가 나오는 경우란 어떤 경우냐 하면, 5일장에 가보니 감자가 풍작이라서 값이 폭락할 때만 의미 있어요. 집사님이 베네주엘라 석유파동에 대해서 어떤 해결책을 내시겠습니까?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어요? 아무상관 없는 거예요.
모든 의미가 일방적인 현실이에요. 일방적인 현실이기 때문에 아무리 누가 예수, 삼위일체, 무슨 이야기를 해도 나를 살려줄 조건하에서만 그분을 나의 존재로 간주해서 내 존재를 위해서 필요한 바구니에 담는 겁니다. 온갖 것들을 담아요. 항상 수련회는 마지막 9번째 강의가 제일 중요합니다.
9번째 강의 안 듣고 가면 강의 전부 다 오해하기 십상이에요. ‘열왕기상 강의 들으면서 신앙생활 잘 하라는 뜻인 줄로 알자.’ 이렇게 나올 거란 말이지요. 그런데 그것은 9번째 강의를 안들은 사람의 태도고 9번째 강의를 들은 사람은 주님을 뜯어먹어야 그게 복음이에요. 자기 속에 있는 마귀가 노출되는 그 순간이 그게 구원되는 순간이에요.
자기 속에 이런 괴물이 노출되는 그 순간이 기뻐해야 될 순간이에요. 자기는 마귀를 모시면서, 존재가 어떠니, 내 나와바리, 내 영역이 이러하니, 너는 얼마나 돈을 가지고 있고 나는 얼마나 벌고……. 안에 마귀가 들어 있으면서도 예수까지 믿었으니까 얼마나 잘난체를 하겠습니까?
“너 예수 안 믿지? 나 예수 믿어. 나는 너보다 나아.” 똑같습니다. 모든 인간은 한통속이에요.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십자가사건을, 사건을 유발해서 우리를 거기에 집어넣은 것이지 우리를 구원하려고 예수님이 오신 것이 아니에요. 우리라는 그 괴물을 가지고 주님께서 우리한테 얻어맞으면서 새롭게새롭게 그 순간순간 십자가사건이 늘 터지면서 이미 이 세상은 마감되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어떻게 구원받느냐는 의미 없어요. 막벨라 굴에 온 아브라함의 노선이 다 들어간다는 말은, 평소에 아브라함에게 주어졌던 하나님의 약속이 막벨라굴을 통해서 이제 실효성을 보았고 완성을 보았다는 겁니다. 그 아브라함의 이삭이 기적적인 아들이잖아요. 이삭에게서 야곱은 더 기적적이지요.
없는데서 살리는 것도 기적이고 죽은데서 살리는 것도 기적이지만 이것은 내가 기대하지 않은, 내가 싫어하는 자식이 복을 받는다는 말은 졸지에 뭐냐? 내게서 나오는 것은 저주의 바닥에서 나오는 사고방식이었다는 것이, 내가 밀어주는 자식이 아니라 다른 자식이 내 복을 전수받음으로서 완전히 들통 난 거예요. 소급을 통해서 들통 난 겁니다.
‘아, 나는 지옥 갈 사람이었구나.’ 이것은 야곱에게 있어서 요셉도 마찬가지가 되는 거예요. 아까 이야기 다시 해봅시다. 아브라함이 예수님을 어떻게 봤단 말입니까? 키가 얼마, 몸무게가 얼마, 인상착의를 그림으로 그려보라 하지요? 예수를 봤다는데. 아브라함은 예수님을 본적이 없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아브라함이 자기를 봤다는 거예요. 그러면 이것은 존재 대 존재의 관계가 아닙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인생 속에 장차오실 예수님의 기능이 이미 그 안에 삽입되어 있는 거예요. 그 기능을 세 개로 요약하게 되면, 없는 아내가 임신을 하고, 임신한 그 자식이 기존의 육의 자식에게 핍박을 받고, 세 번째는, 모리아 산에서 죽었던 아들이 다시 사는 거예요. 이 세 가지 사건이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완성이 된다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존재로 보면서도 믿지를 못합니다. 예수님의 존재를 보면서도 믿지를 못하다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고 난 뒤에 성령이 왔을 때 비로소 그들은 예수님을 존재로 생각하지 않고 눈으로 봐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내가 눈으로 확인하고 관찰해서 저 사람은 내 구세주라는 것을 아는 것이 아니고
자기 안에 존재를 찢어버리고 존재 안에 낯선 기능, 아브라함이 느꼈던, 없는데서 있게 하고, 핍박받고, 죽은 데서 살아나는 그 기능이 지속적으로 열 두 제자들 속에 작용할 때 열 두 제자는 열두 사도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증인 되는 겁니다.
껍데기, 남자냐 여자냐 하는 것은 별 의미 없어요. 안에 어떤 기능이 있는가, 에요. 그 기능을 통해서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은 공통적으로 느낀 것이 있어요. 우리는 진즉에 죽어 마땅하다는 겁니다. 나라는 존재 자체가 죽기 위해서 태어난 존재이기에 죽어 마땅하다는 거예요.
그런데 내 안에 죽어 마땅한 인간을 활용해서 오실 예수님의 기능이 담겨 있기에 우리는 그 기능을 완성하는 차원에서 일반적인 죽음과 다른 특수한 죽음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세상 사람에게 보여주는 겁니다. 늙어죽는 것이 아니고 언약대로 죽는 겁니다. 그러면 그 죽음은 뭐냐? 아까 출애굽에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고 어린양제사하는 것이 안식일입니다.
안식일은 제사하는 날입니다. 보편적 제사, 하나의 제사 안에, 하나의 안식일 안에 그 안식일 법의 기능이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깔려 있을 때 그것은 더불어, 함께 안식일을 지킨 셈이 되지요. 그리고 그 안식일의 주인공은 누구냐?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이스라엘나라는 안식일만 지키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서 예비적인 기간이 하나, 둘, 셋, 넷……, 6일 동안 있어요.
6일 동안 안식일을 예비하다가 제 7일에 안식일을 지킵니다. 이 원칙은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의 천지창조, 세상을 발칵 새롭게 창조하는 그 법칙을 안식법으로서 그렇게 진행시켰고, 그 안식일법은 죽음 안에서 없는데서 백성을 새로 만들고 죽은 백성을 살리는 요소가 아브라함부터 이미 주어진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구약의 아브라함 때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마시고요. 이미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서……, 없는데서 있다는 말이 뭐냐 하면, 예수님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잖아요. 별 때문에 태어난 아기 아닙니까? 그러면 외부의 외계인에요. 이삭처럼 없는데서 태어났거든요. 고난 얼마나 많이 받고 모욕과 비방을 얼마나 많이 받았습니까?
마귀가 사람 알아 본 거예요. 괜히 예수님을 가지고 해코지한 게 아니고, 심지어 제일 첫 제자라는 베드로까지 입에서 나오는 말이 “죽으시면 안 됩니다.” 하는 결정적인 단서를 남겨요.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중요한 것이 죽음 이후에 예비 되었다는 그 사실을 마귀는 쉬쉬 하는 겁니다. 이 안에서 나름대로 중요한 것이 있을 뿐이지 문 여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본 거예요.
그러나 주님은 문 열고 있는 세계가 미리 기능적으로, 기능적으로 이미 영생의 재료가, 영생의 힌트와 영생의 증거물이 이미 이 땅에 왔다는 거예요. 그 증거물이 뭐냐? 없는데서 있고 죽었던 분이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남으로서 이것보다 더 중요한 증거물이 어디 있느냐, 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이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보다, 십자가기능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는 거예요. 그리고 우리는 그 십자가의 기능 앞에 우리의 존재는 깨지고 십자가 기능으로 재편성되어야 돼요. 그렇게 되면 우리가 보는 현실은 모든 것이 십자가복음을 위해서 북한도 있고, 이태리도 있고, 필리핀도 있고, 세상 돌아가는 모든 것이 오직 십자가를 증거 하기 위해서 주께서 십자가기능을 보여주고 있는데, 십자가 옆의 한 강도는 그것을 알아도 나머지 한 강도는 그것을 몰랐어요.
그 강도는 사람 대 사람으로, 예수님을 눈에 보이는 대로 판단한 겁니다. 나 여기 존재한다. 예수님 저기 존재하네. 그 강도가 하는 말이, “진짜 당신이 구세주라면 나의 존재를 지금 풀어줘 봐라. 그러면 믿을게.” 여전히 그 존재가 무엇을 위한 존재인지 모르고 자기존재에 대해서 계속 고집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서도 알 수 없는 공포와 두려움으로 벌벌 떨고 있고. 그런데 아브라함은 기뻐했거든요. 죽기 전에. 싱긋이 웃은 거예요. 자기 인생에서 임신 못하는 아내가 임신을 했다? 싱긋이 웃지요. 하갈이 와서 핍박한다 하니까 “네 뜻대로 해라.” 그래서 하갈을 쫓아냈잖아요. 한번 또 웃었고.
그 다음에 모리아산에 갔을 때는 웃기가 곤란하지요. 아들을 죽여야 되니까. 그런데 수풀에 양 한 마리 잡혀 있을 때는 또 싱긋이 웃지요. ‘야, 내가 새롭게 조성되고 조립되는구나. 누군가 내 인생을 예수님과 함께 있도록 맞춤인생으로 맞춰나가는구나.’ 하는 것을 아는 겁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죽어가면서도 그리스도를 보면서 기뻐했습니다.
“주님이여, 어서 저 문을 열어주옵소서.” 임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가 아니라 반대로 “임이여, 어서 강을 건너게 하옵소서.” 이 말은 안식일의 완성을 넘어서서 그 편안한 안식에 동참하게 하옵소서. 사도바울의 소원은 뭐냐? 일찍 죽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말은 사도바울의 편지를 듣는 모든 사람이 “너희들도 나처럼 그렇지? 같은 성령 받았으니까 우리는 생각이 같지? 그렇지?”라고 편지를 통해서 우리에게 되묻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낯선 죽음에 주목케 하여주옵소서. 흔한 죽음이 아니고 특이한 죽음이 이미 이 땅에 등장했고 심지어 내 존재 안에서 십자가의 되살리는 기능이 작렬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너무나 기쁘고 늘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