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강-창 24장 56—60절(천만인의 어미)170726-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24장 56-60절입니다. 구약성경 30페이지입니다.
창 24:56-60
“그 사람이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만류치 마소서 여호와께서 내게 형통한 길을 주셨으니 나를 보내어 내 주인에게로 돌아가게 하소서 그들이 가로되 우리가 소녀를 불러 그에게 물으리라 하고 리브가를 불러 그에게 이르되 네가 이 사람과 함께 가려느냐 그가 대답하되 가겠나이다 그들이 그 누이 리브가와 그의 유모와 아브라함의 종과 종자들을 보내며 리브가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인의 어미가 될찌어다 네 씨로 그 원수의 성문을 얻게 할찌어다.”
창세기 24장 전체의 내용은 난데없이 생면부지, 전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다만 하란의 고향집에서 자기 며느리감을 얻겠다는 아브라함의 집념으로 인하여 아브라함의 종으로 하여금 낯선 곳에 가서 헤매고 있는 대목을 죽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 눈에 보기에는 이 아브라함의 종이 무턱대고 닥치는대로 사는 것 같지만 창세기 24장 40절에 보면, “주인이 내게 이르되 나의 섬기는 여호와께서 그 사자를 너와 함께 보내어.”라고 되어 있습니다. 천사를 아브라함의 종과 함께 보낸다면 주도권이 누구에게 있느냐? 종과 천사사이에서는 천사에게 주도권이 있고 천사와 여호와 하나님사이에서는 여호와께 있는 거지요.
그렇다면 이 문제, 이삭의 부인을 찾는 이 일은 아브라함의 뜻도 아니고 아브라함의 종의 뜻도 아니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런 식으로 찾아지도록 하신 겁니다. 말이 찾아지는 것이지 사실은 만드는 거지요. 하나님께서 없는데서 만드시는 겁니다. 그리고 그 인간들은 주변인물로 밀려가는 거예요.
내가 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한 것이 아닙니다, 라는 고백을 쏟아놓으면서 주변부로 밀리고 그 중심 되는 여호와 하나님의 하시는 모든 것의 엑기스, 핵심이 담겨서 어떤 여자 하나에게 집중하게 되어있고 초점이 모아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 여자가 누구냐, 60절에 보면, “리브가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인의 어미가 될찌어다 네 씨로 그 원수의 성문을 얻게 할찌어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 초점 맞춘 여인은 누구냐? 리브가가 아닙니다. 또 궤변이 되네요. 리브가가 아니고 리브가말고 리브가. 부두엘이라는 그 남자의 딸 리브가가 아니고, 라반의 누이동생 리브가가 아니고 리브가라고 하나님께서 새롭게 만들어낸 이삭의 아내 될 리브가. 그러니 리브가 본인도 리브가가 아닌 거예요.
새롭게 만들어질 그 핵심, 핵심 분야에서 새롭게 라반이든 리브가의 아버지 브두엘이든, 아브라함의 종이든, 아브라함이든, 할당, 배치를 새롭게 조정당해야 돼요. 새로운 리브가로 말미암아. 기존의 리브가는 브두엘의 딸이에요. 그리고 라반의 누이동생이고.
그런데 하나님이 만든 리브가는 어떤 내용을 품어야 되느냐 하면, 천만인의 어미가 되고 그 자손이 원수의 성문을 열게 되는 기능이 터져 나오는 리브가인데 그 리브가는 없습니다. 인간에게는 없고 그냥 리브가라는 이름을 가진 하나의 소녀가 있는데 그 소녀 안에서 여호와께서 이제 일을 만드실 거예요.
그걸 생성이라 하는 겁니다.
생성이라 하는 것은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이것은 하나님의 계획대로, 하늘의 프로젝트대로 실행이 되면서 비로소 그 기능대로 등장하게 되는, 구성이 되고 또 재구성이 되는 천만인의 어미로서의 새로운 리브가가 탄생되는 겁니다.
이 전에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지요. 죽음 속에서 새생명이 탄생되는 것이 아니고 죽음자체가 탄생된다고. 죽음자체가 탄생이 되면서 죽음을 탄생시킨 이 세상에는 새롭게 등장한 죽음에 입각해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런 이야기했습니다.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런 이야기를 했거든요. 어떤 인간도 그 이야기를 할 수 없어요.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신을 찾게 되어 있습니다. 악마의 심성을 품고 있는 이상 인간은 신을 찾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그 신이 본인의 화신이기 때문에 그래요. 불교도 신이 있고, 무신론자도 신이 있고, 유대나라 그 당시에는 여호와라는 신이 유명했지요.
모든 것은 신에 의해서 다 만들어졌다, 그렇게 했습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규정할 때 초월적인 것, 절대적인 것을 경유해서 거기서 나와 연관성을 지어서 자기 의미를 확정짓고 싶어하는 겁니다. 내가 만든 신을 걸쳐놓고 그 신이 내려다보기에 나는 이런 인간이라고 연결고리를 갖는 거예요.
그 신은 나에게 의미가 되도록 내가 만든 신입니다. 그 신의 모든 모습은 내가 되고 싶은 욕망의 화신들이에요. 그런데 그러한 신이 있기에 절대로 인간은 어떤 경우라도 자진해서 신과의 관계를 끊지 않습니다.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먹은 이유는 딱 하나밖에 없어요. 자기한테 생각한 그 신과 맞지를 않으니까. 딱 견줘보고 아니다 싶으면 빼는 겁니다.
3년 동안 따라다니면서 그는 계속 확인했습니다. 행여나 메시아 맞나, 행여나 맞나. 아무리 요모조모 따져도 메시아 아니에요. 기존의 자기체제, 여호와체제와 맞는 구석이 없어요. 부속이 안 맞아 들어가는 거예요. 그렇다고 해서 여호와를 버리고 예수를 선택할 수는 없습니다. 왜? 인간은 절대로 하나님을 포기 못하기 때문에.
가룟유다가 그렇다는 말은 나머지 열 한 제자가 다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 어느 누구도 여호와 하나님을 포기 못합니다. 그것은 인간들의 합당한 여호와로 이미 변질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이 어려운 것은 “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인의 어미가 될찌어다 네 씨로 그 원수의 성문을 얻게 할찌어다.”라고 했는데 이 본문을 풀려면 “목사님, 여기서 원수란 누구를 이야기하는 겁니까?” 이점을 풀어야 되는데 그 원수라 하는 것은 이미 인간세계를 장악하고 있는 배후의 신이 원수에요.
따라서 그 원수의 속성을 가진 모든 인간들, 하나도 예외 없이 모든 인간은 이미 하나님의 원수노릇 하고 있는 중입니다. 활발하게. 그것을 다섯 자로 ‘총체적난국’이라 합니다. 쉽게 말씀드려 이렇습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는 가운데서 의인을 끄집어내서 구원하는 겁니다.
그래서 구원이라는 것은 어떤 작용을 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가까이 오면 올수록 정말 구원될 자 없네, 이것이 점점 더 확연해져야 되지요. 몇 몇 있네, 이렇게 되면 안 됩니다. 정말 없는 거예요. 요한복음1장에 보면, 빛이 오매 어두움은 더욱더 어두움으로 발작을 일으키게 되어 있습니다.
빛이 온다고 밝아지는 것이 아니에요. 이것은 놀라운 사실입니다. 우리가 보통 회중전등 비추면 그 비추이는 만큼 밝아지는데 주님의 빛은 어떤 기능을 하느냐? 우리로 하여금 바퀴벌레 같은 수준이라는 것을 드러내게 하는 거예요. 천국에 뭐가 아쉬워서 바퀴벌레 구원할일 있습니까? 없잖아요.
천국에 죄인 모자라서 건지는 것이 아니잖아요. 주님이 전등으로 죽 비춰보니까 전부다 이미 각자 신을 다 갖고 있어요. 그 신이 보편적으로 주님 보시기에 악마지요. 그들의 의견이 합세했는데 그 합세한 의견의 결론은 뭐냐? 예수 죽여라. 그것을 지난 시간에 ‘보편성’이라 했어요.
인간개인들이 모이면 자동적으로 보편성이 형성되는데 그 보편성에 입각해서 각자 자기의 의미를 분배받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의견이 일치되는지. 그리스도가 필요 없다는 점에서는 의견일치를 본 거예요. 그들은 신의 이름으로 신의 은총과 축복을 기대하기도 하고 누리고 있다고 감사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 어떤 인간도 자진해서 손들고, “저 하나님께 버림 받을게요.” 손들고 나오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가짜입니다. 총제적 난국이에요. 정신을 차릴 수 있는 기회조차 없습니다. 쉽게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두 눈으로 뭘 보고 있잖아요. 두 눈으로 뭘 보고 있는데 그 보는 안구는 우리가 보지를 못해요.
자기 얼굴도 만질 수도 있고 손도 볼 수가 있는데 내가 본다는 그 안구만큼은 볼 수가 없어요. 볼 수가 없다는 말은 보고 있는 그것이 허위냐, 아니면 진실이냐를 판단할 수 있는 최종적인 근거는 전혀 없는 거예요. 그냥 우기기에요. 억지를 부리는 겁니다. 내가 믿는 신은 신이다. 끝! 다른 소리 하지 말라는 거예요.
어느 누구도, “내 눈이 썩어빠져서 세상이 헛것인데 그것을 진실로 보고 있으니 제발 하나님의 손가락 두 개로 내 눈을 확 빼서, 나는 본다고 하니 소경이라는 고백을 할 수 있게 해주옵소서.” 이렇게 자진해서 나설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눈이 문제에요. 이게 뭐 박혀 있으니까 문제에요.
선악과 따먹어서 이미 죽었잖아요. 죽었는데 움직이니까 이게 사단이 난 거예요. 움직이니까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리고 늙어 죽은 사람보고 “안 됐다.” 이렇게 자기 생각은 못하고 죽은 사람 생각하고 있단 말이지요. 연결되어 있는데. 지금 죽음에 접근하고 있잖아요.
이걸 남의 이야기로 보고 있어요. 자기는 살아 있다고 우기는 겁니다. 살아 있으니까 안 죽으려고 설치지요. 그 어리석음을 마귀가 충분하게 활용합니다. “너 그러면 죽는다. 그러면 네 가족 못살아. 너 목회 그렇게 해서는 실패해.”
저는 부부들이 부부싸움 하는 이유를 딱 한가지로 봅니다. “우리 이러다 죽는데?” 부부싸움 다른 것 뭐 있어요? 그거잖아요. 부부싸움 하면서 이런 대화 나눈 적이 있어요? “우리가 왜 더 살아야 되지?” 그런 대화를 나눈 적은 없습니다. 이것은 이유를 물어서는 안돼요.
총체적난국을 눈치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어디서 알 수 있느냐? 이미 하나님에게 뚝 하고 관계란 관계는 다 끊어졌다는 것은 예수님이 오셔서 이야기를 해줘야, 애초부터 이쪽에서 건너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니구나, 그걸 우리가 짐작을 해야 돼요.
문제는 기독교라는 종교가 문제가 되어가지고 내비게이트, 혹은 사영리를 보게 되면 하늘과 땅 사이에 십자가를 걸쳐놨어요. 젊은 애들이 저 십자가 다리 타넘고 건너가면 되겠네, 이렇게 생각하거든요. 우리가 건너갈 수 없는데 하나님은 사랑이라서 십자가를 걸쳐놔서 그걸 타고 가면 갈 수 있다.
멀쩡한 내가 하나님께서 준비한 그 예수님을 멀쩡한 채로 그냥 뚜벅뚜벅……, 주님이 몸이니 약간 울렁울렁 약간의 스릴, 계곡의 지옥을 보면 아찔한 쾌감도 누리면서 주님의 발 치부터 머리까지 밝아가면서 천국에 가면 거기에 도달한 인간은 도중에 달라진 것이 뭐가 있습니까?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어요. “주여, 내 죄를 십자가의 피로 용서하옵소서.” 이러고 있거든요. 그러면 주님이 물으십니다. “네가 죄가 뭔데?” 아무리 생각해도 죄 지은 생각이 안 나거든요. 장난친 것, 그것은 내 죄가 아닌데. 죄 지은 것이 생각이 안 난다는 말이지요.
그리고 옛날에 죄지은 것은 이미 회개해서 다 처리했는데 죄가 남아 있어야지 죄를 회개하든 말든 하지 죄가 없는데요 뭐. 악마가 만든 그 복음, 악마가 만든 기독교가 그렇게 교묘합니다. 우리 쪽에서 갈 수 있는 어떠한 방식을 주님은 주신 적이 없어요. 그러면 주님의 방법은 뭐냐? 이 존재하지도 않는 리브가, 기존의 소녀가 있지만 그건 리브가가 아니에요.
진짜 리브가는 그 소녀를 통해서 주의 작업이 개시될 겁니다. 주어진 작업을 통해서 새롭게 등장한 리브가가 되면 그 새로운 리브가가 등장하는 과정을 통해서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이, 모든 판들이 재구성이 되는 겁니다. 앞으로 등장할 하나님의 새로운 계시의 취지와 본질에 맞도록 새롭게 구조조정이 되고 주택단지가 새롭게 재조성 되는 겁니다.
“원수가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알아서 손보겠습니다, 하지 말라. 너는 하나님 편에 섰다고 생각하느냐? 그렇게 생각하는 너를 내가 충분하게 원수 만들어 줄게. 기다려라.” 원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나 자신이 원수라는 것. 그렇게 되어야 로마서 5장에 원수 된 자를 하나님께서 의롭게 했다는 말이 성립이 되거든요.
우리가 원수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은 육으로 난 것이 타고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바치려고 했는데 사실은 식겁했지요. 이삭은 실제로 죽을 뻔 하다가 양 때문에 살아난 뒤에 하나님께서 주신 계시가 있습니다. 창세기 22장 17절에 보면,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고 되어 있어요.
이 말은 그냥 편하게 보시면 이렇습니다. 대적의 문을 열지 아니하면 ‘앞으로 내가 행복해야 돼. 나는 잘 살아야 돼. 내 자식은 하늘의 별같이 많아야 돼.’라는 것이 악마의 생각이고 악마의 발상이 되는 겁니다. ‘내 자손이 별처럼 많다.’라고, 내가 여기 있고 내 자손은 숫자가 많아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아이디어는 하나님의 원수라는 테두리에 갇혀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되게 해석한 결과물이 그거예요.
대적의 문을 열고 와서 “꼼짝 마. 전부 엎드려뻗쳐.” 이렇게 되어야 그 때 우리는 하나님의 대적의 문을 연 지점을 바라보게 되지요. 그 지점을 바라보게 되면 내 자식은 많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언약대로 믿습니다, 하는 그 모든 것이 악마의 생각이라 하는 것, 그 문을 바라보게 되면, ‘내가 헛생각, 헛망상 속에 빠졌구나. 나 잘난 쪽으로, 나 좋은 쪽으로 해석했구나.’ 그렇게 되는 겁니다.
지난주일 오후설교 마치고 어떤 분과 이야기를 했어요. 에발산 그 내용으로 대화를 했어요. “목사님 설교 내용이 본문하고 잘 안 맞아 떨어지는 점이 있지 않습니까?”라고 좋은 감을 가지고 의견을 물었어요. 그 때 제가 언뜻 생각한 것이 있습니다. 서양철학에서 해석학이라는 것이 있어요.
해석학이란 언어를 가지고 하는데 언어에는 원어도 포함돼요. 언어를 가지고 이런 논리가 나올 수 있도록 어떻게 맥락을 잘 짜깁기 하는 이것이 해석학인 겁니다. 해석학 자체가 원어를 바탕으로 하고, 그 다음에 문예적인 것, 예술적인 감각과 음률, 시적인 것들, 인간이 알 수 있는 것은 다 집어넣어서 결론을 도출하고 그 결론을 가지고 다시 돌아볼 때에 ‘아, 이 결론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구나. 이것이 확실하다.’ 하는 연결고리를 이루려고 하는 철학적사고체제, 언어를 이해하고 풀이하는 것을 해석학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해석학이 인간의 상상의 산물이에요. 인간의 언어는 원어는 원어대로, 언어는 언어대로 누가 봐도 납득이 되는 이야기를 했을 때 그게 바로 악마의 아이디어, 발상입니다. 복음은 절대로 이 성경에서 인간의 지혜와 이성과 해석학에서 연결되지 않고 삐딱해야 돼요.
만약에 해석학이 진리를 얻어내는 유일한 방식이라면 인간은 절대로 자신의 망가진 안구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자기가 소경된 것을 고백할 길이 없어요. 공부 많이 하면 할수록 점점 깊이 있는 내용이 나올 뿐이지 그것마저 마귀의 짓이라고, 나는 죄인 맞다고 내놓을 수가 없어요.
다시 말해서,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나는 길이 끊어진, 다리가 끊어진 악마이 세계의 일원, 악마의 세계의 구성원이고 요원이 맞습니다, 하는 고백이 나올 수가 없어요. “열 두 지파를 6으로 나눠서 종의 출신들은 에발산쪽에 있고 정실부인출신들은 그리심산쪽에 있다는데 그 중에 두 명이나 레아자손도 이쪽에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한 거지요.
편하게 이야기해서 숫자 맞추기 위해서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 숫자 맞추기가 억지로 보이고 납득이 안 되는 거예요. 그 이야기가 신명기 이야기잖아요. 신명기 이야기를 창세기 12장에서 봅시다. 창세기 12장에 보면 출처는 하나인데 속성이 두 개가 나와요. 이게 해석학적으로 말이 안돼요.
아브라함이 축복의 근원 같으면 축복의 근원이어야지요. 저주의 근원이 되면 안 되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에 보면,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 저주를 내리는 겁니다. 어떻게 서로 대립되는 가치가 한 인간에서 나올 수가 있습니까? 복이면 복, “너는 복 먹고 떨어져.” 아니면 “너는 저주로 떨어져.” 이게 우리네 상식이거든요.
같은 인간에게는 동일한 속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물론 인간에게 선한면도 있고 악한 면도 있지만 많은 비율이 그 모든 가치를 대신해버리는 겁니다. 예를 들어 악이 20퍼센트고 선이 80퍼센트라면 그것을 하나로 결론내리라고 하면 그것은 60퍼센트의 여유분이 있기 때문에 이것은 선한 쪽이에요. 인간적인 상식에 의하면 그래요.
구름 좀 끼었는데 90퍼센트 맑다. 그러면 맑은 날이지요. 대립되는 요소의 두 개를 할 수가 없어요. 빛과 어두움이 함께 있다는 이것은 인간의 생각에서는 있을 수가 없는 겁니다. 다소 착함, 방향이 착한 쪽이라면 그것은 착한 쪽이에요. 다소 악한 게 많다. 그러면 지옥 가는 겁니다. 우리의 선악적인 체제는 그래요.
결국은 마지막에 하나의 의미, 하나의 가치만 남는다고 생각하는 우리가 이 성경을 볼 때 그 마음 그대로 보는 거예요. “목사님, 야곱은 구원받았습니까? 에서는 지옥 갔습니까?” 이러고 있다는 말이지요. 에서가 보여줄 두가지속성, 야곱이 보여줄 두 가지 속성, 이렇게 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최종적으로 자기가 천당 갈거냐, 지옥 갈거냐, 거기에 관심사를 두고 해석을 하다 보니, 내가 이렇게 내 구원에 신경 쓰는데 에서도 얼마나 신경을 썼겠는가, 해서 “에서는 구원받았습니까?” 혹은 “하갈은 구원받았어요? 지옥 갔어요?” 혹은 “가인은 지옥 갔습니까, 천국 갔습니까?” 이렇게 묻는 거예요. 그 존재 자체가 최종적으로 어디에 갔느냐는 그게 궁금한 겁니다.
그러니까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리브가는 그 리브가가 아닌 거예요. 하나에서 두 개가 나올 수 있어야 그게 리브가가 되는 겁니다. 사실은 리브가는 껍질에 불과하고 속에는 뭐가 들어 있느냐? 우리와 같지 않으신 분, 이 세상에서 악마에 속하지 않은 분이 성경을 이미 최종적으로 해석을 해주셔야 돼요.
그러면 모든 성경은 나의 구원을 위함이 아니고, 나의 해석학을 도와주기 위함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증거하는 거예요. 그 십자가가 뭐냐 하면, “주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미 우리는 버림받은 상태에 놓여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버림받은 상태에 놓여 있으니까 버림받은 상태를 총괄해서 한 마디로 이야기하면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거예요.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의 일원입니다. 그 구성원이에요. 그래서 우리의 할 일은 간단합니다. 이미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의 원수됨을 나타내면 되는 거예요.
신자든 불신자든, 어떤 행동을 하든, 신자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원수됨의 행동을 나타내고 불신자도 나타내는데 문제는 뭐냐? 그러면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점이 없지 않습니까? 인간적인 차이점이 없어요. 문제는 리브가가 더블이라는 거예요. 이중리브가예요. 이것은 아브람 속에서 아브라함이 나오는 것이 더블된 거예요. 중첩된 겁니다.
이삭이 중첩되었어요. 야곱은 야곱과 이스라엘이 중첩되었어요. 사람은 하나인데 이름이 두 개로 중첩되어 있습니다. 골로새서 3장에 보면, 이미 너는 죽은 자요 너의 생명은 하늘에 있다. 죽음과 하나님의 생명이 중첩되어 있습니다. 그 중첩될 수 있는 요건이 뭐냐 하면, 보편자속에 이미 들어온 특수한 개별자가 있어요.
그 개별자를 뜯어보면 진짜 알짜배기 보편이 거기에 들어 있습니다. 모든 세상 만물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은 새롭게 분출되는 거지요. 장마 지면 맨홀로 물이 빠져야 되는데 거기서 물이 계속해서 솟구쳐 올라오잖아요. 리브가에서 새로운 계시가, 새로운 질서체제가 나옵니다.
천만인의 어미가 되는데 그는 천만인의 자식을 낳기 위해서 네가 원수의 성문을 여는 조건, 이제는 원수에게 예속되지 않는 새로운 피조물 천만인이 계속 나올 수 있는 하나의 특수한 역사적 지점으로서 리브가가 이 땅에서 존재하게 될 거예요. 예수그리스도의 대행자죠. 예수 그리스도의 미리 앞당겨서 온 사람이 리브가가 되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계시가 거기에 휘감겨 있기 때문에. 토네이도 현상을 아시잖아요. 희한하지요. 멀쩡한데 혼자 미친 듯이 뺑뺑 돌고 있어요. 혼자 꽈배기 틀어서 하늘까지 닿았잖아요. 보편적인 미국의 남부평야에 토네이도라는 특수한 개별자가 돌고 있습니다. 그게 오늘 본문의 리브가예요.
그러면 우리는 “네가 뭐 별게 있어?” 뜯어보면 그 안에 주님의 계시가 들어 있습니다. 그 계시를 보니까 이왕 모든 인간들은 하나님의 대적이라는 겁니다. 대적, 하나님의 원수기 때문에 꼴값을 해요. 원수에 합당한 짓거리를 하고 있는 거예요. 심지어 예수 믿는다고 해도, 성령 받았다 해도 조금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꼴값을 떨어! 하나님께 버림받은 그 티를 다 내요.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라고 주께서 대표해서 말씀하셨지만 “그 말씀이 진짜 내 육체로 봐서는 합당합니다.” 주님 앞에 버림받을 수밖에 없는 짓거리만 계속 하는 거예요. 내일을 생각해서 벌벌 떨고 걱정하고, 밤에 잠들면서 걱정하고 아침에 눈 뜨면서 걱정이 시작되고.
무슨 짓이에요? 왜 그러냐 하면, 나 빼놓고 나의 모든 것이 나의 원수로 작용하니까. 이것은 일방적으로 보편자 중에서 본인중심의 토네이도, 소용돌이를 본인중심으로 잡고 있는 거예요. 그게 원수의 진면목이에요. 주님의 십자가를 욕되게 하는 진원지가 내가 두발 딛고 서 있는 이 지점이 주님이 죽으신 그 지점이 되도록 주께서 계시로 그런 식으로 우리를 몰아세웁니다.
“네가 원수의 일원이다.” 그걸 동의한다면 그 사람이 성령 받은 성도입니다. 이것은 자기의 안구를 놀랍게도 발견한 사람이기 때문에. 내 안구는 썩었다. 썩었으니까 세상과 더불어 같이 썩어가고 있다는 것을 자기가 회수해서 인정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오호라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죄의 압박에서, 악마에서 나는 도저히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하는 거예요.
누가 건져낼까, 하는 그 말은 이미 기정사실화된 거예요. 내 행함으로서, 내 실력으로서, 내 종교기능, 기술로서, 기도를 백날하고 헌금을 해도 소용이 없어요. 기도하고 헌금하는 그 짓거리가 총제적 난국으로 되는데 더 보태주는 거예요. 내 인생이 원래 총체적난국인데 우리는 자꾸 기도 많이 해서 다림질을 하려고 합니다.
구겨진 것을 다림질해서 남 보기에 그럴싸한 인생으로 자랑질을 하려고 애를 쓰거든요. 앞에 중요한 무슨 일이 있으면 행동을 조신하게 하고. 그래서 행여나, 기특하구나, 해서 복 줄지 어찌 알겠습니까? 그런 행동을 한다는 것이 기존에 하나님의 원수됨을 내가 포기 못하겠다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렇게 하는데 우리가 얼마나 마귀적인지 “주여, 저 안 버릴거지요?”이렇게 나오더라는 말이지요. 주님의 외침과 우리의 외침이 어찌 그리 다른지요. 어찌 그리 다른 방향으로 가는지. 그저 우리는 나 살 궁리만 하고 있는 거예요. 주님은 자진해서 포기했고 버림받았는데. “미쳤나, 내가 버림받게?” 우리가 이런 식이에요.
리브가, 많이 깨져야 됩니다. 여기 보면 천만인의 어미라고 나오는데 자식 못 낳는 불임여성이에요. 시험관아기 해봐야 돈만 날리지 소용도 없고 대리모도 소용없고 다 소용없어요. 그냥 석녀, 아기 못낳는 여자, 완전히 죽은 여자에요. 여기서 어려운데 뭐냐 하면, 아비멜렉 때도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자식의 태가 닫혔다는 말은 아버지가 죽었다는 그 말입니다.
죽었으니까 죽은 자에게는 자식이 없잖아요. 아비멜렉 가정의 태가 닫혔다는 말은, “네가 너를 보기에 살았다고 주장해? 내가 보기에 너는 죽었어. 봐라. 너 자식이 없잖아. 너는 죽은 거야. 죽은 자에게서 무슨 자식이 나와.” 아비멜렉은 자기가 죽은 자라는 것을 몰랐지요.
아브라함을 통해서 태가 닫힘으로서 아브라함가정이 찾아옴으로서 알려준 사실이 뭐냐? 나라는 이 안구자체가 썩었구나, 하는 겁니다. 내가 지금 멋도 모르고 까불고 있었던 거예요. 당신 아내 안 건드렸다고? 안 건드렸으면 구원받습니까? 윤리도덕적인 문제가 아니에요. 윤리도덕이 의도한 것이 뭔데요?
잘만 하면 구원되겠다는 거잖아요. 그게 악마의 마지막 발악이에요. 주님주시는 빛으로 비춰봐야 되는데 자기가 만든 그것가지고 자기를 비춰보니까 자기가 예쁘게 나오지요. 우리는 우리 스스로 내가 하나님의 원수됨을 알지 못합니다. 열 두 제자도 마찬가지였고요.
그런데 성령께서 찾아오십니다. 성령께서 찾아오니까 과거에 자기가 예수님과 더불어 했던 모든 것이 기억나면서 주께서 택하신 자이기 때문에 버리지 않는데 이것은 구원에 관한 문제가 아니고 예수님이 어떤 분이냐를 이야기하기 위해서, 다시 말해서 내가 개별자가 아니라 예수님이 이 보편을 다 악마의 세계로 정체를 드러내는 특수한, 보편 안에 꽁꽁 응축시킨 개별자로서 이 땅에 하나님 자체가,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오신 분이구나, 라는 것을 회고하듯이 성령을 통해서 제자들이 이야기합니다.
성령 받은 우리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하게 되지요. 그럴 때 제자들의 특징은 뭐냐? “나는 소용없었다. 내 행함은 소용없었다.” 이게 사도바울의 복음이에요. “내 행함은 소용없었다. 율법의 행함? 너희는 왜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율법의 행함으로 마치는가?”라고 지적하는 이유가 “주님 증거 해야 될 건데 왜 너의 구원으로 빠졌느냐?” 그 이야기거든요.
이미 우리는 단절된 것인데 성령께서 연결시켜 주니까 연결되어서 우리는 구원된 사람이에요. 그 연결이 뭐냐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입니다. 예수의 피고 언약입니다. 주님의 희생이지요. 리브가가 분명히 구원 받은 사람일거에요. 하지만 리브가를 구원한 것은 리브가가 없는데서 생긴 그 야곱이라는 자식이 리브가와 그 아빠를 죽은 자에서 부활시킬 겁니다.
이삭이 아브라함을 부활시키듯이, 이삭을 대신한 수풀 속에 갇힌 어린양, 여호와이레, 그 안에 내용이 응축되어서, 창세기 22장에 보면 원수의 성문을 네 자식이, 아브라함아, 네 씨가 원수의 성문을 열 것이다. 열 때 비로소 천만인은 성문을 열었던 그 분의 소유지 기존의 내 소유가 아닌 거예요.
성문이 열려서 그 앞에 그리스도가 오게 되면 우리는 죄 속에 있더라도 이미 택하신 자로서 언약맨, 언약의 사람으로서 사전에 미리 앞당겨서 파견근무를 위해 이 땅에 심겨진 거예요. 리브가, 중첩되어 있습니다. 더블 되어 있어요. 앞으로 리브가의 여정은 성경 보면서 주목해야 됩니다.
리브가로 하여금 리브가 되게 하는, 다시 말해서 아기 못 낳는 여자를 어떻게 아기 낳게 하시는지? 이걸 통해서 볼 때 오늘 본문 24장 40절에 “주인이 내게 이르되 나의 섬기는 여호와께서 그 사자를 너와 함께 보내어.” 그 말은, 그 천사는 아브라함을 위함이 아니고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가 보내신 그 천사가 아브라함의 종으로 하여금 리브가를 기적적으로 연결시켜 준겁니다.
이러한 네트워크가 오늘날 우리 자신들에게 형성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승리 아니면 누가 가르치겠습니까? 그저 눈만 뜨면 자기위주, 자기인생위주, 그러나 그것이 이미 버림받은 하나님의 원수인 모습인 것을 새삼스럽게 늘 돌아보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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