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

"~하라"체는 "회개용"이다(이준)060801

아빠와 함께 2013. 3. 3. 11:42

"-하라"체는 '회개용'이다. 
이준   2006-08-01 19:31:48, 조회 : 249, 추천 : 2

'윤리와 행위(어떤 이의 표현대로 하자면)'를 논함에 있어서 '윤리와 행위'와 관련된 말씀들의 역할 의미를 함께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성도들의 '삶(행위의 총체적인 표현으로서)'을 논하려면, 반드시 그러한 성도들의 '삶'에 관여하는 온갖 성경 구절들의 역할이 도대체 무엇인가 라는 점을 배제하고서는 논의 자체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성도의 삶(행위들)에 요청된다고 여겨지는 사랑, 긍휼, 선함...등의 온갖 덕목들, 즉 마땅히 성도가 하나의 독립적인 인격체로서 자신의 삶을 통해 주체적으로 지향하고 추구하고  성취하고자 노력해야할 윤리, 도덕적 가치의 열매들이 점진적인 성화 과정으로서 맺혀져야 한다는 당위성이 과연 타당한 것인가라는 점, 아울러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온갖 권면 또는 명령문 형태의 말씀들이 이러한 사고방식의 당위성을 견지한다는 의식부터가 과연 타당한 것인 지 논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나는 전자보다는 후자, 즉 성도의 삶이 선한 목적, 순수한 열정을 가지고 열심히, 열심히 달음질해서 ‘거룩한’ - 순전히 자의적이고 상대적이지만 어쨌든, 윤리, 도덕적 측면에서 볼 때 상당 수준에 도달한 경지라 할 수 있는 - 성화를 이루라는 차원에서 신약 성경의 수많은 "-하라"체가 동원된 것인가라는 점에 국한시켜 부족한 이 글을 써내려 갔다.)

(현상적으로 드러나는 모든 것들에는 힘(흐름)이 작용하기 마련이다. 그 흐름 속에는 나름대로의 가치관 내지는 방향성이 깔려 있다. 윤리와 행함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윤리와 행함이라는 말 보다는 "윤리적, 도덕적 목적성 내지는 윤리적, 도덕적 가치관을 내포하기 마련인 온갖 행함들"이라 표현하는 것이 보다 엄밀하다고 본다. 어쨌든...)

이러한 논의의 중심에는 성도의 실제적 삶, 그리고 그와 관련된 신약성경 - 일단 신약성경, 그 중에서도 특히 서신서에 비중을 두면서 - 의 "-하라"체로 표현된 말씀들의 존재가 자리잡고 있다.

성경의 수많은 말씀들 - 바로 위에서 언급했듯이, 신약성경, 특히 서신서에서 신약 성도들을 향해 요청된 수많은 말씀들 - 의 용도가, 과연 성도라는 인간이 마치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 속에서 이미 받은 구원을 발판으로 삼아 온갖 거룩한 행실을 실천해감으로써 비록 상대적이지만 상당한 수준의 윤리, 도덕적 경지에의 도달이라는 의미로서의 '성화'의 과정을 목적으로 한 것인지, 아니면 성도라는 인간이 여전히 근본적인 죄성의 영향 하에 놓여 있기에 그러한 성도의 실존을 향해 늘 그리스도의 은혜 아래 머물러 있으라, 또는 그리스도의 은혜 아래 머물러 있음을 늘 인식시키기 위한 - 나는 이 글에서 이것을 ‘회개’라 부른다 - 방편으로 주어진 것인 지를 가늠해볼 필요가 있다(그동안 질문답변란에 올라온 논의들을 종합해 보면, 이 양자 구도로 대별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원리만으로도 필요충분한 것이라면 왜 굳이 그 수많은 “-하라”, “-하지 마라”...는 말씀들을 신약성경에 언급하신 걸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 말씀들이 ‘회개용’이라는 표현으로 요약될 수 있다는 점이다. 우선, 다음 인용글부터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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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이 목사님의 갈2:20절의 주석과 믿음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란 말에 대해 질문합니다. 
이근호   2004-05-04 22:22:12, 조회 : 183, 추천 : 30

성도가 내보이는 '사랑의 반응'이란 반드시 자신의 죄에 대한  예수님의  긍휼하심에 대한 고백 뿐입니다.  자신의 '사랑 행하기 능력'은 절대적인 성경 말씀에 비쳐볼 때 모두 거짓되고 위선적인 것들입니다. 예를 들면, '성경이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함이다'라는 말씀을 대하면서 인간은 필히 다음과 같은 반응을 갖게 됩니다.
"나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기에 이 말씀에 의해 교육받으면 내가  보다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어!"라는 생각을 말입니다.
바로 이런 사고방식이 우상적인 사고방식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긍휼하심을 찾을 근거가 상실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성령받은 자라면 이 말씀을 보고 이렇게 생각하게 됩니다.
"나는 그 동안 이 성경을 통해 의로 교육받아 보다 훌륭한 사람인 줄로 알았지만 실은 그것이 아니라 그 실천력은 전혀 나에게 나올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이 성경 말씀은 모두 성령님의 불쌍히 여김으로 우리에게 적용시키는 것이다. 그렇게해서 모든 공로는 오직 예수님의 몫이다"라고 말입니다.
이처럼 모든 성경 귀절은 회개용입니다
"주께서 원하시는 것은 상한 심령이다"(시편 5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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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위의 답변에 대해서도 만족하지 못했던 당시의 모 질문자는 답변자에게 모든 성경 귀절이 '회개용'임을 명증해주는 성경 주해를 해보라고 들이대었었다.)

서신서 등지에서 발견되는 바, 왜 성도의 삶에 대한 이러저러한 "-하라"체가 '회개용'인가 라는 점을 논의하기 위하여, 나는 야고보서에서 언급된 '율법'과 '자유의 율법'의 대비에 국한시켜서 이 주제를 다루어보고자 하였다.

우선, 야보고서에 사용된 '율법'이라는 그리스어 단어는 'νομοs(nomos)'로서 동일하다. 약 2:9-11 등에서는 구약시대로부터 전수되어져 온 모세의 율법과 그 율법의 보편적인 정죄 기능과 관련된 몇 가지 사항에 대해 언급한다. 반면, 약 1:25과 2:12 등에서는 '율법' 이라는 단어 앞에 몇 가지 수식어를 붙여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율법의 기능(정죄가 아닌 회개케 하는, 회개로 이끄는 기능 - 아래에서 상술될 것이다)에 대하여 진술하고 있다. 이른 바,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 '자유의 율법'이 그것이다.
소위 보수주의 신학자라는 자들 중에 몇몇은 그러한 표현을 두고서 ‘복음’을 의미한다고 쉽사리 단정지어버리면서 구약으로부터 전수되어진 모세의 율법, 즉 인간의 행함에 온갖 규제를 가하는 규정들이 복음 안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에 대한 그다지 상세한 진술은 다루지 않고 있다(Matthew Henry complete Commentary, 호크마 주석).
'νομοs(nomos)'를 구약으로부터 전수된 모세의 '율법' 내지는 모세의 율법과 유사하게 인간 온갖 행함을 지적하고 규제하는 기능을 지닌 법 체계로서의 의미와는 달리, 일종의 보편성을 띠는 체계로서의 법(내지는 ‘원리’, ‘지침’) 개념으로 이해한 자들은, 원문에도 없는 '그리스도의'라는 단어를 첨가하여 '그리스도의 법'으로 번역해놓았다(현대인의 성경). 즉, 같은 'νομοs(nomos)'라는 단어라 하더라도 '율법'은 어디까지나 '(구약으로부터 전수된 모세의) 율법'이고, '자유의 율법(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은 어디까지나 '그리스도의 법(= 복음)'일 따름이어서, '율법'이라는 말 자체가 지닌 바, 인간 행함을 규정하고 규제하는 체계로서의 의미는 희석되고만 듯이 보인다. 즉, 같은 낱말임에도 불구하고, 11절에서는 ‘(모세로부터의) 율법’으로, 12절에서는 복음(이라는 ‘원리’, 또는 복음의 ‘원리’)로 번역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게 과연 타당한가? 설령 'νομοs(nomos)'에 ‘법’ 말고도 ‘원리’라는 의미가 있다 하더라도, 야고보서의 문맥상 이 단어가 사용된 용례가 그러한 의미를 용납하지 않는다고 본다.

다시 말하지만, 이러한 구별은 해당 구절들을 중심으로 한 근거리 문맥으로든, 야고보서 전반에 걸친 원거리 문맥 내지는 야고보서 전체의 구성 측면에서 접근하든 결코 용납될 수 없는 것이라 본다. 야고보서에서 ‘율법(νομοs, nomos)’라는 단어가 동원된 구절치고 인간의 행위를 지적하고, 규제하는 차원에서 언급되지 않은 곳이 있던가. 그러하기에, 야고보서에서 ‘율법’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에는 시대를 초월하여 복음 안에서든, 복음 밖에서든 간에 어디까지나 인간의 행함을 지적하고, 규제하고, 겨냥하기 위한 목적을 띤 ‘법 규정’의 의미로 사용된 것이지, 모세의 율법이라는 기존의 법 ‘체계’ vs 그리스도의 법, 곧 복음의 ‘원리’라는 대비를 통해 어떤 특정한 ‘범주’나 ‘원리’라는 개념으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고 본다.

약 1:25에서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언급하였고, 이와 관련하여 보다 구체적으로 야고보님은 혀를 재갈 먹여야 함(26절), 고아와 과부를 돌아봄(27절), 자신을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음(27절) 등을 상정하고 있다. 이러한 사안들은 1장 후반부에서만 언급된 게 아니라, 그 이후 문맥을 통해 야고보서 전체에 걸쳐 계속 ‘확장’되고 있다.
고아와 과부를 돌아봄과 관련해서는 2장 전체에 걸쳐 가난한 형제들에 대한 태도에 관하여 진술함으로써 다루고 있고, 혀를 재갈 먹여야 함에 대해서는 3장 대부분(1-12절)에 걸쳐 다루고 있고, 자신을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아야 함에 대해서는 4장 전체에 걸쳐 다루고 있다(예컨대, 어느 개역한글판성경 보급본에는 4:1 바로 위에 "세상과 벗하지 말라"는 파란 색의 소제목이 붙어 있어 이 점을 명증한다). 5장에 가서도 부자들에 대한 경고를 통하여 고아와 과부를 돌아봄과 아울러 세속적 가치관에 물들지 말아야 함을 다시금 강조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한편, 이 글을 써 내려가는 과정에서 중심 주제에 가려 주변으로 밀려 나는 듯한 느낌을 주는 바, 약 1장과 3:13-18에 언급된 ‘위로부터난 지혜’ 또한 바로 이러한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 앞에서의 삶으로 인도하는 지혜라는 의미에서 이해해야 하므로, 결국 야보고서의 상당 부분이 할애하여 다루고 있는 명제는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이라는 핵심적 표현에 모아져 있다 할 것이다.

나는 '율법'이라는 말의 '율법'과 '자유의 율법(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이라는 표현의 '율법'이 서로 다른 것이라 보지 않는다. 용어상으로도 같은 단어일 뿐만 아니라, 그 용어가 지닌 기능적 의미- 정죄의 기능과 회개의 기능이라는 내막은 서로 다르지만 - 도 유사하기 때문이다(언뜻 표면적으로는 '정죄'의 기능과 '회개'의 기능이 인간의 삶을 지적하고 규제한다는 역할적 측면에서 유사해 보일 수도 있으나, 양자의 본질적 차이는 마치 자살로 마감된 가룟 유다의 내면의 동요와 회심으로 이어진 베드로의 내면적 갈등의 차이만큼이나 엄연히 서로 다른 것이다).

2:11의 ‘율법’은 구약으로부터 전수되어 온 모세의 율법을 가리킨다. 12절의 '자유의 율법'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관련하여 바로 이 모세의 율법을 거론한 것이다. 같은 율법을 놓고서 이 두 구절 간의 차이는 무엇인가? 다름 아닌,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정죄의 기능과 회개의 기능, 이 둘의 차이이다.
‘율법’은 정죄하는 역할을 담당하지만(11절), ‘자유의 율법’은 ‘정죄 기능’이 없다는 점이다. 말 그대로 자유의 율법이기에. 이 점과 아울러 야고보서에 율법이라는 용어가 동원된 구절들을 모두 살펴봐도, 자유의 율법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을 정죄하여 심판에 떠넘기는 기능을 발휘한다는 언급이 없다.
‘율법’은 하나라도 지키지 않았을 경우, 보편적으로 정죄와 심판의 기능을 발휘하지만(2:9-11 등), ‘자유의 율법’은 ‘정죄에서 심판으로 이어지는’ 기능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는 결코 정죄함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정죄함이 없다면, 더이상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율법이 굳이 왜 필요한가라는 점이다.
이러한 의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율법의 요구가 작용하지 않는단 말인가?'라는 질문과 같은 의미이다. 이에 대한 답변은 '그렇지 않다'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도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현세에서 율법의 요구가 작용하고 있다. 다만, 그리스도의 희생 공로가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킴으로써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율법의 정죄를 막아내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율법’이 신불신을 막론하고 실천, 행함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을 때마다 ‘정죄, 심판’의 기능으로 다가서지만, ‘자유의 율법’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더이상 율법이 ‘정죄, 심판’의 기능으로 작용하지 못한다는 의미임을 알 수 있다. 즉, 율법이 신불신을 막론하고, 시대를 초월하여 모든 인간들을 대상으로 원래 고유의 역할 - 인간의 행함을 지적하고 규제하고 겨냥하여 심판에 넘기려는 기능 - 을 상실하지 않고 늘 그 역할을 수행하지만, 그리스도의 공로 때문에 성도에게 감히 율법의 정죄 기능이 범집하지(넘보지) 못하는 것이다. 이로 인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율법의 정죄 기능이 오히려 정죄가 아닌 회개의 기능으로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즉, 성도도 인간이기에 자신을 끊임 없이 정죄하려는 율법의 정죄 기능 앞에서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고, 그래서 근본적으로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써 구원하실 수밖에 없었구나 라는 점을 늘 느낌으로써 십자가의 공로에 다시금 감격하고 감사하게 되는 일이 지속되게 된다. 결국, 성도에게 남는 것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의 공로, 이것 밖에는 없게 되는 셈이다. (이것이 성도의 삶이지, 성도가 무슨 인격적 주체랍시고 능력 받아 윤리, 도덕적 선함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면서 성화 과정의 열매를 맺고 어쩌고...이것은 성경에서 한참 이탈한 소리다.) 이 과정에서 같은 율법을 놓고서 그 율법의 정죄 기능이 성도에게만큼은 회개의 기능으로 작용함을 알 수 있다.

13절의 경우, '율법'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긍휼’을 제대로 실천, 행하지 못하는 자들 - 신불신을 막론하고 - 위에 긍휼 없는 심판이 임해야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만큼은 그리스도의 희생 공로만을 보시는)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시는 은혜로 인해 심판을 받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성격을 띤 자유의 율법은 그 핵심인 ‘긍휼’ - 그리스도의 공로, 즉 십자가에서 나오는 - 이 행함 있는 참 믿음의 준거가 되어야 함을 본 장 후반부에 가서 몇 가지 사례 - 교회 안에서 형제에게 구제해야 함의 필요성, 아브라함의 행함, 라합의 행함 - 를 통해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내막을 도외시한 채, 과거 한국 교회는 야고보서 2장만을 두고서  믿음이냐, 행함이냐, 행함 있는 산 믿음이냐...라는 무익한 논쟁에 한동안 깊이 잠겨 있지 않았던가.)
참고로, (구약의) 율법 (조항들)을 동원했음에도 그것을 지키지 못했을 때 정죄의 차원이 아니라 '자유함' 안에서 적용되는 사례는 갈라디아서 등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갈 5:13-14).

은혜가 은혜 되게 하려면(은혜가 성도들 위에 처음부터 끝까지 말 그대로 은혜로서 그 위상을 띠려면) 성도로 하여금 지속적으로 성도의 입지가 근본적으로 어떠한 것인 지, 다시 말해 성도 속의 죄의 법의 구속력과 영향력이 어떤 것인 지, 또 달리 표현하자면, 거듭났다고 자부할 수도 있는 성도 자신이 주체적으로 맺어갈 수 있는 삶(행위의 총체적 표현)의 한계가 어떤 것인 지 끊임없이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인식시켜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한 인식 장치로서 작용하는 것이 바로 ‘자유의 율법’ 또는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인 것이다. 인간을 정죄하던 구약으로부터의 율법은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로 하여금 은혜가 무엇인 지 깨닫게 하는데 대한 방편으로 동원되고 있는 것이다. 유태 종교 사회 속에서 조성된 의식의 폭을 벗어나, 보편적인 이방인 세계를 대상으로 전파되는 복음은 율법이라는 구약으로부터의 기존의 규범을 근간으로 다양한 이방인들 사회에서 공유되어 오던 갖가지 윤리, 도덕적인 규범들과 연계되어 성도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의 삶이 지니고 있는 윤리, 도덕적 한계를 느낌과 동시에 구속의 은혜가 늘 십자가 아래 있음을 인식하게 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된 것이다. 신약성경의 온갖 "-하라"체가 바로 이러한 자유의 율법의 세부 조항들이다.

회개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은혜가 무엇인지 인식하는 것이요, 동시에 십자가에서 유발되는 사랑과 은혜(긍휼)가 어떤 것인지 교회라는 공동체 속에서 경험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죄 없이 은혜를 알 수 없다. 마찬가지로 악을 배제하고서 선이 성립되지 않듯이. ‘인간’이란 게 어떤 존재인지 - 전적 타락이라는 말이 과연 어느 정도인지 경험적으로, 과정적으로, 총체적으로 - 로  모르고서는 예수님의 죽으심의 의미를 알 수 없다. 죄가 무엇인 지 모르는 존재는 은혜가 무엇인 지도 모르는 존재일 따름이다.

여기에, 결코 흔들릴 수 없는 절대 기준이 있다. ‘십자가의 공로’이다. 그렇다면 주변적인 모든 것들, 즉 ‘자유케 하는 온전한 율법’으로서의 신약 성경의 온갖 “-하라”체의 언급들은 십자가 공로라는 기준에 늘 못미치는 성도들의 삶의 온갖 부분들을 회개로 유도하는 도구들인 셈이다. 어디까지나 ‘회개용’이다. 즉, 늘 십자가 공로만을 붙들게 하는 장치이며, 늘 은혜로만 구원 안에 머문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해주는 방편이다. 이것이야말로 은혜가 은혜로서만 남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회개’의 삶이 별다른 게 아니라, 성도의 삶 그 자체를 가리키며(통념상 회개라는 게 무슨 반성 차원에서 눈물 콧물 쏟아내고 감정적 상처를 경험하고...하는 데만 머무는 게 아니라), 이 ‘회개’의 삶이 바로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임을 알 수 있다. ‘회개의 열매’가 곧 ‘성령의 열매’인 셈이다. 여기에 과연 성도 자신의 주체적, 적극적, 긍정적, 열정적 행함과 노력이 개입될 여지가 어디에 있는가? 성도는 처음부터 끝까지 회개해야 할 존재일 따름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으로 결정되어진 성도의 삶은, 처음부터 끝까지 회개로 점철되어야 할 뿐이라는 말이다. 믿음이라는 말 자체부터가 성도에게서 자생된 것이 아니라, 외부(하나님)에서 온 것이라는 점은, 믿음이 임한 성도라는 그 존재가 기존에 처음부터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없는 사망의 존재였다는 점을 반증하지 않는가.

12절의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음’이란, 13절의 관점에서 보자면 ‘긍휼 행하는 자가 받는 심판’, 즉 '긍휼 있는 심판 받음'이란 의미이다. 그런데, 이 말씀의 의미는 어디까지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의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다. 반면,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는 말씀은, 11절과 같이 구약으로부터 전수되어온 모세의 율법에 따르자면 긍휼 베풀지 않는 자들은 율법을 어겼으므로 긍휼 없는 심판을 받게 된다는 뜻이다. 그런데, 엄밀히 따져서 제대로 긍휼을 베푸는 인간은 없으되 하나도 없기 때문에(!) 긍휼 없는 심판에 걸리지 않을 인간이 하나도 없다. 이렇듯, 율법은 긍휼에 준거하여  심판을 베푼다. 그런데, 율법이 준거하고 있는 이 긍휼은 하나님께서 책정하신 절대적 수준에서의 긍휼을 말한다.
이에 대하여, 긍휼이 심판을 이기고 자랑한다는 말씀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자유의 율법 원리에 입각하면, 근본적으로 예수님의 공로에서 비롯되는 긍휼(은혜)로 인해 심판을 이기게 된다는 뜻이다. 과연 스스로 긍휼을 베풀어서 심판을 피할 자가 인간들 중에서 단 한 명이라도 있단 말인가? 없다. 방금 언급했듯이, 긍휼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수준은 절대적이다. 그러나, 그 어느 인간의 긍휼 행위도 상대적이며,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다. 인간 중에서 하나님의 절대적 요구 수준을 충족시킬만한 그런 긍휼을 베풂으로써 심판을 이기고 자랑할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다(성령 받은 성도라 하더라도 말이다. 성도에게서 나오는 긍휼의 행위는 예수님의 긍휼어린 공로에서 비롯된 것이 성령의 작용에 의해 표출된 것일 따름이다). 만약에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굳이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써 심판을 이길 수 있는 긍휼의 은혜 길을 마련하실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이렇듯, 예수님의 희생 공로의 긍휼이 성도에게 임할 심판을 막아주므로, 성도는 이 긍휼의 테두리 안에서 살아감을 늘 인식하라는 취지이다.
긍휼을 베풂으로써 긍휼 안에 거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라, (주님 공로로부터 나오는) 긍휼 안에 거하게 되었기 때문에 우리 성도 간에 주님의 긍휼이 우발적으로 튀어나온다는 뜻이다. 마치, 주변인들에게 이런저런 한국인 행세를 한다고 해서 한국인 신분을 취득하고, 유지하는 게 아니라, 한국인 신분이 부여되었기에 이런저런 모양으로 타인들과 부대끼는 삶의 여러 상황 속에서 한국인으로서의 행동이 본인이 부러 용을 쓰지 않고서도 자연스레 그때그때 표출되듯이 말이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우리 성도들이 이런 류의 말씀을 대할 때마다 우리 내면에 생성되는 의식은, 우리가 평소 이런저런 모양으로 긍휼을 베풀었으니 참으로 믿음 위에 굳건히 서가게 되어 든든하다...라는 느낌 보다는, 우리가 아무리 긍휼을 베풀려 애써도 주님께서 베푸신 그러한 절대적 수준의 긍휼에 못미치므로 구약시대로부터의 율법의 정죄와 심판의 요구에 따라 긍휼 없는 심판을 받아 지옥갈 수밖에 없는 죄인임에도, 근본적으로 예수님의 긍휼로 인해 우리로 하여금 심판 받지 않게 해주셔서 감사하며, 우리의 미흡한 긍휼로 인해 늘 회개할 수밖에 없는 게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로구나...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까. 나는 이런 측면에서도 종교인의 의식과 중생인 속에 내주하시는 분께서 심어주시는 의식의 차이가 발생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자유의 율법',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에 부속된 온갖 신약 성경의 "-하라"체의 말씀들을 대할 때마다 그 말씀들 앞에서 - 그것이 형제에 대한 긍휼과 관련된 내용이든, 타인에 대한 용서와 관련된 내용이든, 나에게 먼저 잘못을 저지른 이에 대하여 관용해야 함의 내용이든, 장로들에 대한 존경과 관련된 내용이든, 부부 간의 화목에 대한 내용이든,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화평하라는 내용이든...그 무엇이든 간에 - 그런 내용들이 요구하는 절대적인 기준 - 왜냐하면, 그 모든 내용들이 완전하신 하나님께로부터 나왔으므로 - 에 결코 미치지 못한다는 점을 깨달아,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 인간들(성도들)은 은혜만 받아먹고 사는 존재구나, 감히 그 어떤 부분에 있어서도 우리가 나서서 윤리, 도덕 내세울 수 있는 처지가 못되는구나...라는 점을 깨닫는 방향으로 유도하신다고 본다. 이 또한 그 말씀들이 그야말로 ‘회개용’으로 작용하는 증거인 셈이다. 그와 동시에 성령의 열매들은 말 그대로 주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맺어가시며, 우리의 거룩한 열정(?)에서 비롯되는 게 아님을 깨닫게 하시리라 본다. 마치, 여름이란, 인간이 무더위 속에 하나 둘씩 들어가 있음으로 성립되는 게 아니라, 어느새 들이닥친 무더위가 인간 사회 곳곳에 덮치고, 구석구석 스며들어 옴으로써 나타난 것이라는 원리처럼...

(시 115:1)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을 인하여 주의 이름에 돌리옵소서』


P.S.신학의 허상...

마치 밥에 대한 성분 분석부터 시작하여 영양학적 측면에서 밥에 대하여 갖춘 식품영향학 전공자의 해박한 지식이 정작 따뜻한 밥 한 그릇보다 못하듯이, 십자가, 언약, 개혁주의...등등 온갖 잡다한 것들에 대한 지식을 비롯하여 거기서 흘러나오는 심오한 내적 성찰이 정작 십자가에서 뚝뚝 떨어지는 예수님의 피 한 방울보다 못하다는 거다.
여기저기 덕지덕지 군더더기 말들이 눈에 확확 들어오는 여태까지의 나의 장황설 그 자체도 생명을 주지 못한다. 오직 예수님의 피...그 피 한 방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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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회개는 주되심에서 비롯된다. 
이준   2006-08-18 20:41:29, 조회 : 116, 추천 : 1

"-하라"체는 회개용이다.
그리고, 성도의 회개는 그리스도의 주되심에서 비롯된다.
그리스도의 주되심에서 비롯되는 회개는 성령에 의한 것이다.
성령께서 성도로 하여금 회개시키시는 까닭은 (그리스도의 몸을 통해)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드러내시기 위함이다.

사도들의 말씀들 가운데 포함된 원리들 중에는,
1)예수님의 구원은 인간의 개인 구원용이 아니다.
2)성도는 개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이다.
등이 포함된다.

성도의 회개는 예수님의 주되심이 띠는 구속과 심판의 언약적 성격에서 자연스레 비롯되는 성도 구원,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라는 개념들과 결부되어 있다.

성도의 회개가 회개를 위한 회개, 즉 개인적 차원에서의 생활 반성의 성격을 띤다면, 그의 회개는 회개가 아니며, 그의 정체성은 이미 성도가 아닐 지도 모른다. 그의 회개(?)는 구도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개인적 정진의 일부일 수 있기에. 자기반성적 성격을 띤 회개는 굳이 신약성경에 나타난 사도들의 말씀으로써가 아니라 '명심보감'을 보면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성도의 회개는 그리스도의 몸을 떠나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성도의 구원, 성도의 정체성은 그리스도의 몸(교회)이라는 공동체 안에서 발견되어지기 때문이다. 애초부터 성도의 삶 자체가 관계적 틀(그리스도와의 언약적 관계) 안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결국, 사도의 말씀과 성도의 회개를 관련지어 생각해 볼 때,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의 성도의 '회개'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주되심과 그 속에 담긴 십자가의 언약성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이러한 성질이 빠져 있다면, 그것은 '성도의 회개'가 아니다.

사도들의 말씀이 성도로 하여금 회개로 이끌어 주신다는 말은, 성도의 회개를 통하여 성령께서 예수님의 주되심이 드러나게 하신다는 말과 같다. 예수님의 주되심이 드러난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몸(교회)로 하여금 머리이신 예수님의 공로만 바라보게 하신다는 말과 같다. 이는 곧 십자가를 가리킨다. 즉,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몸으로 하여금 회개케 하심은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만을 바라보게 하시려는데 있다. 이것이 사도들의 말씀이 지향하는 목적이다. 성령님의 사역하심(성도를 회개케 하시는 것을 포함한)의 목적이다.

----참고 글(일부 인용)--------
사도들이 그리스도의 몸을 향해 외치는 말씀 
손무성  (Homepage)  2006-08-18 19:14:00, 조회 : 6, 추천 : 0

...(생략)...
1) 바울, 요한, 베드로, 야고보...가 말은 모든 내용은 전적으로 회개용이기만 한가? ...(중략)...
그렇지 않다. 이들이 말하고 있는 내용은 십자가의 은혜가 넘치고 있는 이들에게 성령으로 그리스도 몸을 통해 넘쳐나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통해 예수가 그리스도요 주이심을 증거 하게 하려는 것이다.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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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회개는 주되심에서 비롯된다. 
손무성  (Homepage)  2006-08-18 23:43:29, 조회 : 82, 추천 : 1


성도는 십자가라는 블도저에 ‘밀려 오징어포가 된 적이 있었던 자이다. 오징어포가 되었다가 일으켜 세워준 ‘주’에 의해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이들을 가리켜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의 몸이 자랑할 것은 한 가지임을 알게 된다. ‘주께서 다 하셨습니다.’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성도를 가리켜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벧전2:9)

인간은 십자가를 바라 볼때마다 마땅히 블도저에 밀려야 하는 당사자 인 것을 알게 된다. 그런데 긍휼하심으로 일으켜 세움을 받아 ‘그의(주 예수 그리스도)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는 네온사인이 된 것이다.

바울이 성도보고 ‘하라. 하지마라.’ 라는 권면과 위로와 그리스도의 몸을 향해 외치는 말씀들은 모두가 무조건 회개용이라고 몰아붙이면 안 된다는 말이다.

‘주께서 다하셨습니다’를 그리스도의 몸이 형제들과 세상을 향한 ‘네온사인 글씨’로 다양하게 마땅히 나와야 하는 것이다. (바울이나 사도들이 이것을 훈련에 의해 만들어 내라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성령 안에 있기에 들어 있는 것을 내 뱉는 식이다.

아름다운 덕을 제공하신 분이 누구냐? 어떤 분이시냐? 그 분의 마음은 어떠하냐? 이것을 성령이 그리스도 몸에 표출시키며, 넘치게 하신다.

그래서 사도들은 불도저에 밀려 오징어포가 되었다 다시 일으킴을 받은 그리스도의 몸이 마땅히 그 분을 선전하는 간판 역할을 ‘하게하려 하심’ 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너 속에 들어 있으니까... 그런데 그리스도의 선전물들이 스스로 거부하고 나서면 이것은 긍휼 받은 자이냐? 는 말이다.

* 어느 목사님께서 집사님께
-집사님 모이세요.(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히브리서 10:25)라고 했다.
-이것은 회개용인가?

회개용이라고 해야 할 때는 이런 때다.
‘집사님께서 주의 긍휼하심과 상관없이 살아 왔기에 모이는 것 자체를 이 핑계 저 핑계로 일삼으며 긍휼하심을 망각했다는 사실을 지적 받았을 때 ’그리스도의 몸‘이 간판 역할을 못했군요 라며, 자책이 아니라, 생활 반성이 아니라, 회개하게 하시게 될 때, 회개용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모입시다.’ 라는 말을 할 때는 ‘집사님 긍휼 받은 자 아닙니까! 그리스도의 몸이 그리스도를 선전하는 선전물이 되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라는 말이다.

불도저에 깔렸다 일으켜 세워진 그리스도의 몸이라면 ‘모이기를 폐하는 자 같이 하지말라.‘......할 때 ’회개용이니‘ 뭐니 말하기 이전에 듣고 ’오줌 배설하는 자와 같이 배설하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는 모였다고 자기를 자랑하지 말고 이렇게 말하라. ‘예수님께서 다 하셨습니다.’ 라고 말이다.

그리스도의 몸은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이심과 그가 하셨음을 성령을 통해 토해 내놓는 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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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불도저와 오징어 
이준   2006-08-19 09:36:51, 조회 : 95, 추천 : 1

사도들의 말씀을 접할 때마다 깔려버린 오징어는 불도저의 위력을 실감할 것이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불도저에 처절하게 밀려버린 자신의 처지를 바라보기도 할 것이다. 사도 바울도 그렇지 않았던가?

(고전 4:13)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 같이 되었도다』

그러나, 만약 오징어가 여전히 자신의 그러한 처지에 집착한다면, 그는 아직 제대로 밀려버리지 않은 오징어일 것이다. 마치 좋은 물고기는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어버리듯이 세상 끝에도 천사가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낸다고 했는데, 어쩌면 좋은 오징어 중에서 그런 못된 오징어를 내어버릴 지도 모를 일이다.

내 글의 취지는, '오징어가 불도저의 위력 앞에서 납작해져 버린의 모습을 바라보며 늘 자신의 그러한 처지를 의식하는 것은 언제인가? 사도들의 말씀을 대할 때 그러하다'는 데 있다. 왜 그런 것을 느끼는가? 사도들의 말씀 어느 부분을 대해도 온전히 지키지 못하는 오징어로서의 태생적 한계 - '인간 = 십자가 앞에서의 죄인' -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따라서, 제대로 뭉개진 오징어는 더이상 뭉개지기 전의 모습이 아니라, 불도저의 위력이 결정해준 새로운 모습을 받아들이며 살아간다는 것이다. 언제? 사도들의 말씀을 대할 때 말이다.

'"-하라"체는 '회개용'이다'라는 글을 쓰면서 사도들의 말씀이 "권면과 위로 등을 배제한 채 무조건 회개용이라고 몰아붙이는 것 - 어떤 분의 지적을 그대로 옮겨 표현한다면 - "은 아니었다.

그 글을 쓸 때의 취지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부분 인용---------------------------------------------------------------
"-하라"체는 '회개용'이다. 
이준   2006-08-01 19:31:48, 조회 : 171, 추천 : 2

성경의 수많은 말씀들 - 바로 위에서 언급했듯이, 신약성경, 특히 서신서에서 신약 성도들을 향해 요청된 수많은 말씀들 - 의 용도가, 과연 성도라는 인간이 마치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 속에서 이미 받은 구원을 발판으로 삼아 온갖 거룩한 행실을 실천해감으로써 비록 상대적이지만 상당한 수준의 윤리, 도덕적 경지에의 도달이라는 의미로서의 '성화'의 과정을 목적으로 한 것인지, 아니면 성도라는 인간이 여전히 근본적인 죄성의 영향 하에 놓여 있기에 그러한 성도의 실존을 향해 늘 그리스도의 은혜 아래 머물러 있으라, 또는 그리스도의 은혜 아래 머물러 있음을 늘 인식시키기 위한 - 나는 이 글에서 이것을 ‘회개’라 부른다 - 방편으로 주어진 것인 지를 가늠해볼 필요가 있다(그동안 질문답변란에 올라온 논의들을 종합해 보면, 이 양자 구도로 대별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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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위의 글을 쓴 취지는, '네온싸인'으로서 덕을 비추는 것이든, 오물을 자연스레 배설하는 것이든, 그외 어떤 다양한 모습이든  간에 인간 스스로가 신앙의 주체가 되어 성화라는 거룩한 목표를 향해 열심히, 열심히 달음질함으로써 성취되는 대상이 아니라는 데 있다. 그러기에 '회개'의 개념부터가 다르다(회개가 자기 반성적 성격이 아니라는 나의 언급도 이러한 취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불도저에 깔린 오징어의 회개는 결과적으로 불도저의 위력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어진다.
만약 불도저의 위력에 관심이 있는 게 아니라 "이것봐, 나는 말이야, 불도저에 깔렸던 오징어인데, 정말 불도저 지나간 뒤에 줄무늬 한번 기차게 끄여졌지. 어때, 전보다 나는 더 멋진 오징어처럼 보이지, 그치?"라고 생각하는 오징어가 있다면, 그 오징어는 참으로 불도저와는 상관없는 오징어일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위의 글을 통하여 내가 겨냥한 바는 '사도들의 말씀 = 권면과 위로 등을 배제한 채 무조건 회개용'이 아니라, '사도의 말씀 = 회개용(윤리, 도덕적 경지 도달로 이어지는 자신의 성화 능력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로만 회귀시키는 능력)'에 있었음을 밝혀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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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불도저와 오징어 
손무성  (Homepage)  2006-08-19 10:17:09, 조회 : 86, 추천 : 1

아래 내용 '회개용'이라 할 때 "사도의 말씀= 회개용 정도만"이라 보는 것이 오해라는 것이다.
인용--------------
다시 말하지만, 위의 글을 통하여 내가 겨냥한 바는 '사도들의 말씀 = 권면과 위로 등을 배제한 채 무조건 회개용'이 아니라,  '사도의 말씀 = 회개용(윤리, 도덕적 경지 도달로 이어지는 자신의 성화 능력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로만 회귀시키는 능력)'에 있었음을 밝혀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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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들의 말씀들은 성화도 아니고, 윤리도 아니요, 회개용만도 아니다. (위에서 인용된 '사도의 말씀=회개용...)

모이기를 폐하는 자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그날이 가까와 옴을 볼 수록 그리하라... 사랑하라...서로 남들을 나보다 낫게 여기며...등이 도덕이나 윤리나 훈련에 의한 성화도 아니라는 말이다. 뿐만 아리라 회개용 정도가 아니라는 말이다.

사도들의 말씀은 성령께서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 이심을 드러내게하는 아름다운 덕을 선전(벧전2:9)하게하는 그리스도의 몸의 몸짓이라 것이다. 이를 위해 부르심을 입은 바를 모르고 자기가 했다하며 자기 의를 내세우거나, 내가 하겠다고 덤벼들어 해내보겠다고 하여 그 불가능하다는 것 그 사실을 알려주실 때 회개가게 된다. 그를 때에 회개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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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강조'에 대한 오해 
이준   2006-08-19 13:01:16, 조회 : 105, 추천 : 1

사도들의 말씀들은 성화도 아니고, 윤리도 아니요,
->성화나 윤리 문제는 제 글 입장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사도의 말씀들을 성화나 윤리의 문제를 염두에 두고 쓰게 된 이유는 그러한 성격을 띠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상한 씨의 글(질문답변란 참조)를 대하면서 의혹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질문자 본인(이상한씨)은 궁금해서 질문하는 듯하지만, 그런 류의 글을 훑어보면 여전히 사람은 인간이 지니는 자기 존재에 대한 의미 부여, 행함이 띠는 윤리적, 도덕적 가능성을 스스로 거부하기 힘들구나라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회개용만도 아니다. (위에서 인용된 '사도의 말씀=회개용...)
모이기를 폐하는 자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그날이 가까와 옴을 볼 수록 그리하라... 사랑하라...서로 남들을 나보다 낫게 여기며...등이 도덕이나 윤리나 훈련에 의한 성화도 아니라는 말이다.
->손목사님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여기지 않는 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여기는 자칭 교회들과 교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컨대, 그들중 상당수는 모이기를 폐하지 말라는 말씀 한 가지를 두고서도 이곳과는 다르게 생각합니다. 새벽기도 나오는 것도 '믿음 있음', '성화의 훈련'이라고 생각합니다. 태풍이 휘몰아 치거나, 추석 명절 등이 끼어 있어 사람들이 예배에 적게 나올 시기에도 그래도 구원받아 보겠다고 예배 보러 나온 자들에게 담임 목사들은 "믿음 좋다"는 식의 칭찬을 아끼지 않습니다. 중직자들(?)을 위시한 상당수 교회의 신도들은 친목도 도모할 겸 교회의 모든 공적 예배나 기타 크고 작은 기관별 모임, 수련회 모임 등에 빠짐 없이 참석하는 것이 믿음 있음을 드러내는 일부 증거로 삼는 분위기입니다.
제 글의 일부 표현이 모이기를 폐하지 말자는 권면과 관련하여 해당이 없다고 지적하시지만, 제 글은 그들의 모습들을 겨냥한 것이기도 함을 밝혀두는 바입니다(제가 평소에 이곳에 간간이 글을 올리는 이유 중에 한 가지도 바로 그들 앞에 진정한 복음이 뭔지 아는가라고 말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더이상 구체적인 사례들은 여기서 거론하지 않습니다.


뿐만 아리라 회개용 정도가 아니라는 말이다.
->이 말씀으로 보아, 제 글이 사도의 말씀을 회개용 정도로 국한시켰다고 생각하시는 모양인데,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저는 제 글을 통하여 그렇게 한 적이 없습니다.
'사도의 말씀 = 회개용(윤리, 도덕적 경지 도달로 이어지는 자신의 성화 능력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로만 회귀시키는 능력)'이라는 표현을 보시면, 인간이 자신을 신앙의 주체인양 삼아서 성화를 추구하는 것에 반대하는 입장에 서서 그리스도의 공로로 이끌어 가기 위한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강조적인 표현이지, 단정적인 표현이 아닙니다. 그 뒤에 '(윤리, 도덕적 경지 도달로 이어지는 자신의 성화 능력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로만 회귀시키는 능력)'라는 부연 설명을 붙인 것도 '사도의 말씀들 = 회개용'이라는 단정적인(?) 표현이 '사도들의 말씀들은 어디까지나 회개용일 뿐이다'라는 식의 오해를 불러일으킬까 싶어서였습니다.

다시 말합니다. 이것은 사도들의 말씀들이 지닌 기능들 가운데 회개로 이끄는 기능을 강조한 것이지, 사도들의 말씀들은 어디까지나 회개용이 전부라는 식의 단정적인 표현이 아님을 밝혀 둡니다. 왜 굳이 (  )안에 부연설명을 넣었는가, 그리고 저의 글이 이상한 씨의 글을 염두에 두고 쓴 글이라는 점 등을 감안할 때 '이 사람은 사도들의 말씀이 어디까지나 회개용일 뿐이라고 보는구나'라는 식의 지적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사도들의 말씀은 성령께서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 이심을 드러내게하는 아름다운 덕을 선전(벧전2:9)하게하는 그리스도의 몸의 몸짓이라 것이다. 이를 위해 부르심을 입은 바를 모르고 자기가 했다하며 자기 의를 내세우거나, 내가 하겠다고 덤벼들어 해내보겠다고 하여 그 불가능하다는 것 그 사실을 알려주실 때 회개가게 된다. 그를 때에 회개용이다.
->위와 같은 언급이 제가 진술한 바, " '사도의 말씀 = 회개용(윤리, 도덕적 경지 도달로 이어지는 자신의 성화 능력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로만 회귀시키는 능력)'에 있었음을 밝혀 둔다"라는 점과 어떤 차이점이 있는 지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참고로, 성도가 회개하는 것도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덕이 선전하게 되는 모습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어느 것 하나 그리스도의 덕이 드러나고 영광이 드러나는 ‘그리스도의 몸짓’이 아니라 할 수 없지요.

굳이 제 글에 대하여 언급하신 바, '사도들의 말씀 = 권면과 위로 등을 배제한 채 무조건 회개용'이라는 말에 대하여  제 글에 대한 저의 표현,  즉 '사도의 말씀 = 회개용(윤리, 도덕적 경지 도달로 이어지는 자신의 성화 능력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로만 회귀시키는 능력)'으로 구분한 이유는,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일단 '회개'에 대한 목사님의 글의 취지에 전적으로 동의하면서, 제 나름대로는 사도의 말씀이 어디까지나 무조건 회개용만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사도의 말씀이 회개의 용도로도 사용된다는 점'을 부각시킨 것이랍니다. 이것은 일종의 '강조'이지, '단정적인' 표현이 아닙니다. 물론 읽으시는 분들의 느낌과는 달리, 정작 글을 쓴 제 개인으로서는 이러한 취지가 저의 글 전체에 잘 드러나고 있다고 봅니다만.

제 개인적으로 볼 때, 직접적인 표현으로든, 글 전체의 취지로든 "사도의 말씀들 = 어디까지나 회개용일 뿐이다"라는 식의 단정적인 글을 쓴 적이 없음을 밝힙니다.

말씀하신 내용 중에 "이를 위해 부르심을 입은 바를 모르고 자기가 했다하며 자기 의를 내세우거나, 내가 하겠다고 덤벼들어 해내보겠다고 하여 그 불가능하다는 것 그 사실을 알려주실 때 회개가게 된다. 그를 때에 회개용이다."라는 말씀이 사도들의 말씀들이 지니는 여러 기능들 가운데 하나인 회개케 하는 기능, 즉 (바로 제가 언급한 바) "...그리스도의 공로로만 회귀시키는 능력"과 무엇이 다른지요?

다시 말하지만, 저의 글은 질문답변게시판에 7/30자로 올라와 있는 이상한 씨의 글 "인간의 존재성을 정죄하는 언약"을 겨냥하여 쓴 것이랍니다. 그의 글과 저의 글을 대조해 가면서 다시금 음미해 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