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내주신 질의 내용
<수련회를 통해 알게 된 것>
1. "존재 => 사건" 으로의 전환은 죽을때까지 움직이고 존재하는 저에게 축복같은 말씀 같아요^^ 해답되시는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2. 언약의 박스 : 여자의 후손만이 언약인줄 알았습니다. 박스안에 뱀의 후손까지 세트로 있다는 것=> 언약을 더 잘 이해하게 되었어요..
아니 창조주의 각본이 더 잘 이해되었다고 할까요....
<궁금한 것>
1. 십자가의 사건이 언약의 완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언약의 박스안에 있는 뱀의 후손은 어디까지 존재하는 것일까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후에도 뱀의 후손은 존재합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셔서 심판하시면 천국과 지옥이 존재하지요. 심판이후에도 뱀의 후손은 존재한다고 봐야 할까요?
뒤집어서 생각하면 뱀의 후손에게 이루워지는 사건도 시간의 역습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뱀의 후손도 하나님의 언약안에 있으니까요...
2종세트를 너무 생각했는지.. 아니면 제 몸이 뱀의 후손을 너무나 잘 기억해서 인지.. 제 생각이 과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왠지 끝이 알고 싶네요.
2. 목사님 말씀을 듣다 보면 개념 (ooo은 00 이다) 같은 설명이 있습니다. 복음도 매일 새로운데 개념까지 입력하다 보면 제 용량의 한계를 느낍니다.
이번 수련회에 사용하신 "시간의 역전" "출몰"은 처음에 영 이상하더니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개념을 설교에 넣으시는 것은 다음 중 어디에 해당하는 것일까요?
1) 듣는이의 이해를 돕고자 사용한다.
2) 설교자가 복음을 설명하기 쉽게 사용한다.
3) 복음이라는 단어는 식상하기에 언어적 자극(뇌의 자극)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4) ??
2번 질문을 하게 된 이유 : 1) 복음 자체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것이 있을까? 라는 생각
2) 왜 다른 언어로 복음이 설명되어져야 할까? 라는 생각
3) 새로운 개념을 만들고 복음으로 맞추기까지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일까? 라는 생각
......
목사님 저는 어쩌다 목사님 설교를 들을때 가슴속이 시원함을 느낍니다. 그리고 편해지구요... 이 또한 죄라는 생각이 듭니다.
두가지 질문은 목사님 설교를 이해하고자 함이니 답변 부탁드립니다.
여기에 대한 저(이근호)의 답변
복음에 관심을 가진 일이 일어나는 것조차 이 악한 애굽 세상에서 홍해사건이 일어난 것처럼 저에게는 돌발적으로 여겨질 정도로 신기합니다.
먼저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복음은 그 문장 자체만으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그 배후에 낯선 영역의 실제 활동성을 발현시키는 계기가 됩니다. 그래서 복음에 터치하는 것은 그것이 동기가 줄줄이 그 배후에 있는 각종 연결구조들이 실제상황으로 노출됩니다.
인간 세계에서의 논리 구조는 인간의 ‘나의 존재의 정당함’으로 최종 귀속됩니다. 하지만 복음 세계에의 논리 구조는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창조하고, 모든 것은 운용하고, 모든 것을 심판할 유일무이한 자격자’라는 쪽으로 최종 귀속됩니다. 예수님의 자기 전개는 필히 예수님의 자기 귀환으로 이어집니다.
따라서 이 거대한 강줄기 밖에서 한가롭게 물장구치면 장난치다가도 물에 빠지만 ‘예수님은 주시다’라는 급류에 휘말리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구원사건입니다. 자기 자신의 영역은 파쇄되고 해체되어버리지요. 여기에는 ‘나는 00이다’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나는 주님에 의해서 00으로 규정된다’가 됩니다.
이제 2번 질의부터 먼저 답변해드리겠습니다.
‘나’라는 부분이 품고 있던 정의(定義)로는 ‘주님나라’라는 전체를 설명할 길이 없기에 전체를 함유하는 용어나 개념으로 바뀌면서 그 과정 자체를 구원사건화 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주님에게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기존의 나의 세계에 끌어당기는 것이 되기에 우상숭배 행위로 전락됩니다. 즉 “아, 나는 그저 조그마한 부분일 뿐이고 그것마저 수시로 사라져가고 옅어져 가야 마땅하구나”를 늘 느끼고 자백되어져야 합니다. 그래야 나의 구원을 내가 쥐지 않는 겁니다. 물에 빠진 자가 자신의 신발끈을 잡고 도로 물에서 나올 수는 없는 법입니다.
과정 자체가 구원사건화라는 말은, 미리 그 목적지를 알아버렸다는 착각은 수시로 깨어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바로 ‘수시로 깨어짐’ 자체가 ‘주님과의 동행’입니다. 날마다 자신을 부인하는 거지요.
따라서 저의 답변은, 누구를 잘 가르치기 위함이 아니라 진리 세계의 변화를 가리키기 위한 저의 고백형식입니다. “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3-5) 함께 그 변화시키는 세계에 합류하자는 초청입니다.
1번 답변은 이러합니다.
‘심판 이후에도’라는 표현을 통해서 설명드리겠습니다. ‘심판 이후’란 곧 ‘심판 이전’이라는 인식을 출발점으로 갖습니다. 그런데 이 ‘심판 이전’이라는 인식에는 두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첫째는 아직 주님의 심판(곧, 십자가 능력 안)을 경험하지 못한 자가, 주님의 심판을 경험하지 못했기에 자신은 멀쩡하고 자신의 세계관을 계속 고수함이 옳다고 여기는 가운데 ‘심판 이후’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가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이미 심판을 받은 자로서’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그 영향력 때문에 나의 생각은 날마다 십자가 반복 현상으로 늘 ‘육신적’이라는 평가를 받으면서 와해되고 부정됨을 경험하는 이에는 ‘심판 이후’란 더 이상 시간적 상황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영적으로 대결되는 구조적 생각하게 됩니다. 곧 ‘시간의 중첩 상황’이지요.
인간의 시간의식의 한계 때문에, 이전과 이후로 이해되지만 실은 ‘심판 이전의 세력’과 ‘심판 이후의 세력’이 지금 이 순간에도 투쟁을 벌이고 그 현장으로 동원된 자리가 곧 자신의 육신임을 알고 있는 겁니다. (천국에서는 늘 현재를 유지하면서 자리잡고 있으니까요)
따라서 ‘심판주는 예수님이시다’는 정의도 계속 현재상황이 되는 차원에서 뱀의 후손은 지옥에서 영원토록 심판받는 상황이 유지되어야 합니다. 즉 ‘악마와 추종자들이 지옥에서 심판받는다’가 아니라 ‘그들이 심판받는 상황을 지옥이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공의와 엄위가 영웡토록 증명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롬 11:22)
하나님의 속성을 증명하기 위해서 천국과 지옥은 있어야 합니다. 주님이 영원함과 동반해서 지옥도 영원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이 주님으로서 온 우주에 계속 증명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새언약의 완성은 고정적으로 영원합니다. 역사의 역할은 새언약에서 멈춥니다. 제 할 일을 다했기 때문입니다.
분명 아직 재림이 남아있고 최종적인 천국과 지옥 상태가 시간상 남아 있지만 성도는 다음과 같은 하나님 말씀을 이해하게 됩니다.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 24) 혹은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 2:5-6) 혹은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30)
성도가 개인적으로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기에 비로소 십자가 안에서 아직도 진행되는 역사의 전모가 비로소 알게 됩니다. 지금 이 인류의 역사는 이미 종말(끝)을 종말답게 보여주는 미묘한 떨림의 현상인 것을! 악어라는 안정된 몸통 표면에서 나타나는 가죽껍질의 미묘한 떨림정도로 보시면 됩니다. (교회의 등장은, 곧 성도의 출몰은 종말이 참으로 종말답게 진동하기에 그 과정에서 나타난 현상 중의 하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