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심판의 목격자(창8;1-5) 160615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6. 6. 17. 07:21
2016-06-15 20:38:38조회 : 41         
   심판의 목격자 160615 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심판의 목격자(창세기 8:1-5)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nEN1ID9ZGaw, Hit:5

 이근호 16-06-15 21:17 
심판의 목격자 

2016년 6월 15일                           본문 말씀: 창세기 8:1-5

(8:1)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육축을 권념하사 바람으로 땅 위에 불게 하시매 물이 감하였고

(8:2) 깊음의 샘과 하늘의 창이 막히고 하늘에서 비가 그치매

(8:3) 물이 땅에서 물러가고 점점 물러가서 일백오십일 후에 감하고

(8:4) 칠월 곧 그 달 십칠일에 방주가 아라랏 산에 머물렀으며

(8:5) 물이 점점 감하여 시월 곧 그 달 일일에 산들의 봉우리가 보였더라

노아의 방주는 오도 가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아라랏 산에 걸려있습니다. stop된 상황입니다. 하나님께서 진심과 본심은 여전하고 꾸준히 자연을 통해서 나타내십니다. 자연세계는 곧 창조세계요 피조세계입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창조 의지와 취지로 인하여 나타난 겁니다. 흔히 말하기를 “하나님께서는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창조를 설명하는 것은 아무 것도 말하는게 없는 바가 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서 생겨난 피조물이 본격적으로 자체적인 가치와 독립성을 주장해도 왜 이런 주장이 창조원리에 어긋나는 지를 판정해 줄 근거를 제시해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창조된 피조물이 독자적인 가치를 주장하지 못할 이유로서 제시되어야 하는 것이 창조원리입니다.

그 창조원리는 창세기 1:26에 잘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즉 ‘하나님의 형상’에 의한 다스림이 성사되도록 하는 것이 바로 창조원리입니다.

그런데 죄짓고 난 뒤에 인간들은 ‘사람에 의한 다스림’으로 오해하게 됩니다. 마치 하나님으로부터 하청 받은 업자처럼 구는 겁니다. 합당한 다스림이기 위해서는 합당한 ‘하나님이 형상’이 전제조건입니다. 골로새서 1:15-16에 보면, 하나님이 형상이란 곧 예수님을 말합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그렇다면 피조세계를 통해서 하나님의 창조원리는 결코 멈출 리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마찬가지로 작용하십니다. ‘하나님의 형상에 의한 다스림’의 원리에 입각해서 하나님의 움직임이 있습니다. 노아가 들어있는 방주는 아라랏 산에 걸려 멈춰져있습니다. 하지만 방주 외부에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일이 멈추지 않습니다. 점차 물이 줄어듭니다. 산봉우리가 여기저기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 작업이 과연 노아를 구언코자 함일까요? 아닙니다. 노아(가정)만이 홀로 구원받았다는 말은 ‘개인구원’을 위한 취지의 작업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만약 노아가정을 그토록 사랑하신다면 심판 이후에 노아가 외롭지 않도록 적어도 51% 정도로 하나님께서 남겨놓고 49% 정도는 수장시켜서 일관된 ‘사랑의 연속성’에 나타내셨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노아만 살려주신다는 말은 실은 인간을 몽땅 다 죽어 마땅함을 대변해주시는  행위이십니다. 아무도 살 수 없음을 강조하는 방식이 바로 ‘은혜로 달랑 한 가족만 살려내시는’ 방안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노아 홍수를 가지고 ‘노아의 개인적 구원’으로 이해하거나 해석해서는 아니됩니다.

방주 외곽에 물심판으로 둘러쳐져 있다는 말은 이 외부조건이 이제 방주 내부 요건으로 전환되는 겁니다. 즉 노아는 ‘홀로 살아남았다’가 아니라 ‘심판의 목격자와 역할자’ 노릇을 위해 ‘하나님의 심판형’ 인물로 방주에서 도로 나와야 하는 겁니다. 방주는 바로 ‘심판형 인물’을 생산하는 자리가 됩니다.

이는 곧 흔히 인간들이 ‘자신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과 상관하는 것이 오류인가를 단적으로 말해주는 사태입니다. 인간들은 자신을 1로 보고, 하나님을 1를 봐서 1:1의 상대를 통해서 개별적 구원을 기대하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창조원리나 취지는 이를 배격하십니다. 진정한 창조 완성의 관계는 하나님과 하나님 사이의 1:1로 이루어집니다.

인간들은 이 1:1 관계에서 빠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움직임 하에는 인간들이 아무리 분주하게 움직여도 ‘stop’된 상태가 됩니다. 즉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바가 됩니다. 이는 곧 인간 행위의 무의미를 말합니다. 출애굽기 14:14에 보면,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같은 속도로 움직인다고 여기는 관계에서는 진정 자신이 누구냐를 알 길이 없이 상대적입니다. 그러나 어느 한쪽이 멈쳐져 있고 다른 쪽이 움직이게 되면 그 성과는 몽땅 움직인 쪽에서 가져가는 법입니다. 하나님의 ‘세상 다스림’은 오직 심판을 통해서 진행됩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죄 있는 쪽에 합류하셔서 숨겨진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셨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들은 자꾸만 자기 행위에 의미를 두고 싶어하지만 심판에 의해서 전적으로 포위되고 점령당한 처지에서는 그 행위가 아무런 가치를 나타내지 않습니다. 이는 곧 인간 자신의 의사의 배제를 뜻하는 겁니다. 인간은 끼어들 자격이 없는 겁니다. 다만 노아가 이 심판에 참여한 것은 노아의 자리에 겹쳐서 합류하신 그 하나님의 행함을 증거하기 위함입니다.

마치 요나가 바다에 들어가서 물고기 뱃속에 들어간 것을 ‘살았다’고 말해서는 아니되는 것과 같습니다. 요나는 선지자로 이스라엘은 대표해서 ‘순수 죽음’을 경험하고 그 사실을 증거하기 위한 체험에 돌입되어 있는 겁니다. 그 ‘순수 죽음’ 속에서 요나나 혹은 노아나 “나는 살았네”라는 말을 할 수가 없는 겁니다.

도리어 “나는 늘 죽고, 예수님께서는 내 안에서 늘 사신다”라는 고백을 쏟아내어야 할 존재로 바뀌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세상 다스림은 예수님이 아버지께로부터 받게 되는 ‘심판 안에서’의 다스림입니다. 그래야 오직 아버지의 뜻만이 실현되기 때문입니다. 방주 안에 있는 노아가 물이 조금 빠졌다고 해서 “휴, 이제 살았네”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도리어 심판에서의 면제나 구원은 순전히 하나님의 일방적인 조치에 달렸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노아의 개인적인 행동은 자기 구원에서 배제되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노아가 무슨 행위를 하든지 간에 그 행위들은 방주 안까지 침투하신 하나님의 심판의 형식의 변화에 기인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즉 “내가 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가 됩니다. 이런 모습이 바로 예수님의 증인의 모습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성도의 매순간이 스톱이 된 귀한 축복의 자리인 것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6-06-16 13:00 
43강-창 8장 1-5절(심판의 목격자)160615-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8장 1-5절입니다. 구약성경 9페이지입니다.



창 8:1-5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육축을 권념하사 바람으로 땅위에 불게 하시매 물이 감하였고 깊음의 샘과 하늘의 창이 막히고 하늘에서 비가 그치매 물이 땅에서 물러가고 점점 물러가서 일백 오십일 후에 감하고 칠월 곧 그 달 십칠일에 방주가 아라랏산에 머물렀으며 물이 점점 감하여 시월 곧 그달 일일에 산들의 봉우리가 보였더라.”



이 모든 일을 벌이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하실 때 성도라면 그 취지와 의미를 몰라서는 안 되겠지요. 하나님께서 왜 노아와 함께 있으면서 일을 이렇게 벌이시는가? 노아를 빼놓고 벌이셔도 되는데 왜 노아를 살려내서 일을 벌이시는가? 그 점을 생각해 봐야 됩니다. 처음 창조 때 노아도 없었고 아브라함도 없었습니다. 사람 자체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일을 하셔서 천지를 창조했습니다.



그렇다면 노아마저 물속에 잠겨서 죽게 만들고 창세기 1장처럼 아무것도 없는 데로 돌아가서 세상을 다시 만들 수도 있잖아요. ‘아, 세상에 죄가 많구나. 다 없애겠다.’ 다 없애놓고 새로운 아담을 만들어낼 수도 있는 문제거든요. 그런데 왜 노아는 의인이라 하시면서 노아만 빼놓고 다른 사람을 다 죽이느냐는 겁니다. 51퍼센트는 살려주고 나머지 49퍼센트를 다 죽이든지 하지 왜 노아만 빼놓고 나머지를 다 죽이시는가?



이것은 창세기 1장에서 천지를 차음에 창조하실 때에 무의미하게 창조한 것이 아니고 무에서 유, 없는데서 있음을 만들어놓고 그 있음에 분명히 무에서 나왔는데 무에서 나오면서 창조되어야 할 안에 있는 내용물, 취지가 있음 안에 하나의 알갱이로 들어가 있어요. 없는데서 있게 만들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을 없애서 다시 무로 돌아가지는 않는다. 왜? 주께서 없는데서 만들어내는데 그 안에 그 있음을 있음으로 운용하고 그것을 돌아가게 만드는 핵심부분이 있는 겁니다. 그 핵심부분을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키워나가시는 거예요. 그걸 계속해서 예수그리스도까지 이끌고 나가시는 겁니다.



천지를 창조할 때 없는데서 만들었다. 그 이야기만 하게 되면 전혀 창조에 대해서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않는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없는데서 있는 것을 만들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귀하다. 그렇게 되면 그 자체가 무의미한 것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 없이도 살 만하네. 없는데서 이제 이미 있게 되었으니까.’ 마치 부모가 자식을 낳았다 하니까 “부모님 고맙습니다. 5월 8일에 카네이션 달아드리겠습니다.” 해놓고는 나중에 자기 맘대로 살잖아요.



왜냐하면, 부모가 나를 낳았다. 그래서 나는 중요하다. 끝! 그렇게 되는 거예요. 부모가 나를 낳을 때 나라는 존재 안에 부모의 취지와 의미가 어떤 것이 담겨 있을까를 사람들은 생각 못해요. 나는 나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부모는 부모고 나는 나다. 따라서 나는 내 인생만 살면 된다. 사실 부모님이 자식을 낳으면서 어떤 의미를 남겼습니까, 라고 저에게 묻는다면, 없어요. 없습니다. 부모도 자식 낳을 때 그냥 뭔지도 모르고 낳았기 때문에. 그 취지에 대해서 알려드리겠습니다. 이걸 알려드려야, 하나님께서 노아마저 없애지 않고 왜 달랑 노아만 남겨두는가? 또 달리 생각해서 노아가 외롭지 않도록 노아 이웃이라든지 노아외의 여러 다른 사람들을 창조했으면 노아가 다시 새로운 세계를 꾸려나가는데 용기를 낼 것인데 달랑 노아만 살린 거예요.



노아 빼놓고는 없다는 말은 노아는 나를 살리기 위해서 심판이 있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되는 겁니다. ‘아,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물 심판을 했구나.’ 이렇게 생각하신다면 노아는 하나님의 뜻을 전혀 모르는 거지요. 하나를 남겼다는 것은 전부를 잃어도 그 하나 안에 그 잃어버린 전부가 나올 수 있는 알갱이 같은 핵심부분이 농축되어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만 있어도 천국은 충분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름도 천국을 아들의 나라라고 하잖아요.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한 의도가 나옵니다. 1장 26절에 보면,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다음에 나온 말이 “다스리게 하자.” 이 ‘다스리게 하자’라는 것이 등장합니다.



여기 사람이 나오는데 어떤 사람이냐 하면, 조건이 있어요.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사람에 의해서 천지만물이 다스림을 받는 그것이 천지창조를 한 목적이고 이유입니다. 중간에 인간을 빼버리면 이렇게 됩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물이 다스림을 받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마지막 완성된 것이 골로새서 1장에 나오는데 예수님을 가지고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에 의해서 모든 것이 통치되는 것, 이것이 에베소서 1장 10절에,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한다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지배받는 것, 다른 말로 하면 충만한 것, 이것을 교회라고 이야기하지요. 세상 중에 교회가 있는 것이 아니고 세상이 곧 교회가 되도록, 하나님이 그런 취지로 이 세상을 만드신 겁니다. 교회되지 않는 세상은 주께서는 만들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교회 간다는 말이 좀 이상하지요. 교회되어야 되지 교회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교회로 살아가는 것이지 교회 만들자, 하든지 교회답게 하자는 것은 없어요. 그냥 교회로 살아가는 거예요. 이래도 저래도 잘났으나 못났으나 교회로 살아가는 겁니다. 어떤 경우에만? 예수님에 의한 다스림만 된다면 그것은 교회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다스린다고 되는데 뭐가 보여야 다스리지요. 뭘 시켜야 다스림을 받지요.



우리가 보통 다스림을 받는다 하는 것은 나보다 더 어르신네가 내 앞에서 있어서 이거 해라, 저거 해라, 지시하시고 예, 예, 하고 굽신굽신 따라하게 되면 그것을 다른 사람이 볼 때 다스림을 받는다, 통치 받는다, 할 수 있거든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세상을 다스릴 때 어떻게 다스리는가, 어떤 식으로 다스리게 되느냐, 그 중요한 문제가 등장합니다. 다스릴 수 있는 대상자가 없기 때문에 그래요. 벌판에 “내가 하나님이다. 나한테 굴복하라.” 이렇게 되면 넙죽 엎드릴 수 있는데 오늘 본문의 경우에는 그런 식으로 하나님이 다스리는 것이 아니거든요.



그러면 노아가 다스리면 되잖아요, 하는데 노아가 다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다스려야 돼요. 그렇다면 노아가 세상을 다스리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형상과 노아의 관계가 정립돼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형상대로 세상을 다스린다는데 그 다스리는 것과 노아만 달랑 남았다는 것과 어떻게 연결되는가, 그 점을 알아야 돼요. 그 점을 알리는데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피조물 자체를 활용하시고 소개하십니다.



그게 하나님의 계시가 되는데 오늘 본문 7장 8장을 보게 되면 심판이 곧 계시입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와 함께 방주에 있다, 이렇게 했거든요. 그 다음에 바람을 불게 하시고 그 다음에 4절에 보면, “칠월 곧 그 달 십칠일에 방주가 아라랏산에 머물렀으며.” 이렇게 되어 있어요. 지금 여러분이 오늘 본문을 보면서 뭘 느껴야 되느냐 하면, 방주가 아라랏산에 걸린 거예요. 이것은 방주가 스톱이 된 것을 말합니다.



그 다음에 물이 점점 물러가면서 감해진다는 그 움직임은 방주안의 노아의 움직임이 아니고 방주 바깥, 방주 외부에서 하나님의 움직임만 있고 방주는 아라랏산에 걸려서 오도 가도 못하도록 스톱이 되어 있어요. 이게 다스림이에요. 다스림이 뭐냐? 우리가 스톱이 되는 겁니다. 누구 앞에서? 하나님의 외곽적인 움직임 앞에서. 출애굽기 14장 4절에 보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해냅니다.



어디로 가는가 하면, 홍해바닷가에 딱 세우지요. 이스라엘진영에 대혼란이 일어납니다. 그들은 정신적으로 굉장히 힘들어합니다. 그래서 모세에게 대들고 따지지요. 모세가 하나님의 계시 받은 내용은 이렇습니다. 스톱이었습니다. “가만히 있으라. 너희들이 가만히 있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하신 일이 보이지 않을 것이다. 너희들이 가만히 있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일이 보일 것이다.”



인간이 스톱이 된다는 말이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발로 차버리는 거예요. 아니면 군홧발로 끽 소리 못하도록, 숨이 막히도록 그냥 눌러버리든지. “이게 어디서 까불어? 촐랑대지 마.” 이거거든요. 지금 인간들은 이런 오해를 해요.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만들었다. 이제부터 우리 인간을 상대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세상은 하나님 계시고 인간이 여기 있고, 일대일로 관계해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성취시키자.’ 이렇게 나옵니다.



인간보기에는 하나님 한 분, 인간인 자기들 합해서 하나, 일대일로 보이지만 하나님의 창조 속에서는 1+1이 2가 아니고 1+1이 3이 되는 방법을 사용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상대자가 따로 있어요. 인간 말고 하나님이 하나님과 상대해서 이 세상을 다스립니다. 그런데 인간은 오해해서 하나님이 친히 인간을 만들었으니까 하나님이 우리하고 상대하는 줄 알고 있어요. 그리고 인간들은 오해하기를 하나님이 한분이라고 하니까 한 분인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한 분이라고 할 때 한 분에 겹쳐져 있어요. 한 분 인줄 알았더니 둘로 겹쳐 있는 거예요. 두 분이 겹쳐서 구분되는 겁니다. 구분되면서 겹쳐져서 나온 분이 군홧발로 노아를 짓밟았어요. “가만히 있어!” 하나님 일의 완성은 하나님이 나서야 완성이 되지 인간은 거기에 끼어들 자격이나 권리가 없습니다. 이게 복음입니다. 로마서 1장 2절에 나오는 복음이 이겁니다.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이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냐 하면, 몽땅 다 인간을 짓밟아놓고 하나님이 독생자를 보내서 독생자와 아버지의 관계 속에서 모든 창조에 잠긴 취지와 의미를 완성시켰다는 말입니다. 집에서 나오려고 하는데 문자가 왔어요. 어떤 분이 저에게 질문을 했어요. “목사님의 설교 시간에 우리나라에게 제일 유명한 목사님이 지옥 갔다고 하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라고 했어요. 교회 와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약간 화가 나는 거예요.



목사치고 지옥 안가는 사람이 있어요? 왜 제가 이런 말을 하느냐 하면, 사람은 자기가 하는 일의 의미가 쌓이고 누적이 된다는 말이지요. 내가 하는 일이 족족 죄가 된다고 하면 주님에 의해서, 성령에 의해서 밟힌 사람이 되는데 남들은 농사짓고, 남들은 교사하고, 남들은 사업하지만 나는 주의 목자로서 주의 일을 하니까 이것이 의미 있지 않는가, 라고 하는 순간 이것은 창조의 취지와 완전히 배격되는 마귀 적 발상입니다.



그런데 목사가 하는 일, 자기가 하는 목회, 설교, 강의하는 이 모든 것이 죄짓는 일이라는 것을 누가 짐작하겠어요? 평생 나는 죄짓는 것 밖에는 한 게 없다고 고백하는 목사, 아, 정말, 그런 목사 있으면 착하지요. 예뻐요. “한국교회가 그렇게 존경하는 그 목사도 지옥 갔습니까?” 아니 그 목사고 저 목사고 간에 목사가 천국 간다는 이것은 정말 드문 경우지요. 수천수만을 예배당에 모았는데 그게 전부다 헛짓이라는 것을, 어떤 목사가 그걸 하면서 그것이 헛짓이라는 것을 인정하겠어요? 성령 아니고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목사가 목회하는 것은 목회하면서 네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라고 목회를 시킨 겁니다. 노아가 당대의 의인이지요. 동행했지요. 구원받습니까? 천만의 말씀. 노아가 구원받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피 때문에 구원받는 거예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개인구원이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에 관한 문제지 노아 구원하려고 물 심판 되는 것이 아니에요. 만약에 지금 전쟁이 일어났다. 인민군이 쳐들어오고 핵폭탄이 터져서 다 죽었다.



차라리 죽으면 속이 편해요. 그런데 다 죽고 나만 홀로 남았다. 그것은 죽기보다 더 괴로운 일입니다. 왜? 사랑하는 사람들, 내가 그리운 사람들이 다 없어졌으니까. 일가친척이 다 없어졌으니까. 이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거예요? 만약에 그 사람에게 성령이 임한다면 이걸 깨닫게 돼요. ‘아하, 성도의 신분이란 부끄러울 것이 없구나.’ 이 세상에 성도의 신분보다 더 귀한 것이 없어요.



성도의 신분은 피로 값 주고 산 신분입니다. 어떤 분이 저에게 상담하기를, 애가 학교를 안 간다고 해서 골치 아프고 괴롭다는 겁니다. 자기는 몸은 아프고. 그래서 괴롭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엄살 피우지 말라고 했어요. 성도의 신분은 욥처럼 자식 열 명 다 죽고 재산이 다 날라 가도 성도라는 신분하고는 바꾸면 안돼요. 성도의 신분이 하찮게 느껴지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 눈에 ‘나도 이만하면 사람답지?’라는 남들의 시선과 평가를 굉장히 귀하게 생각하다 보니 상대적으로 성도됨의 신분이 하찮게 여겨질 수밖에 없는 거예요.



암 걸렸는데 기적적으로 살았다. 암 걸렸다 기적적으로 살아나봤자 그것은 썩어질 내 몸밖에 안돼요.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에요. 암에 걸려서 못살고 죽었다 할지라도 지금 성도의 신분은 귀한 겁니다. 다시 말씀 이어갑니다. 지금 노아 구원의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의 다스림의 문제고, 다스림의 문제는 창조의 취지와 원리에 관한 문제에요. 하나님께서 노아에 대해서 스톱시키는 거예요. 왜 아라랏산에 방주가 걸렸으니까. 아라랏산이라는 최고봉의 산에 걸렸으니까 이것은 오도 가도 못해요.



오도 가도 못하니 노아가 거기서 굶어죽든 말든 노아로서는 무능력자가 된 겁니다. 내가 무능력자로 까발려지는 것을 감사히 여겨야 됩니다. 왜? 무능력자로 까발려지는 이 자리가 하나님의 창조의 취지가 생산되는 귀한 자리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께서 축복을 한 자리라서, 그래서 우리는 무능력자로 티가 난 것에 대해서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자, 스톱이 되었습니다. 스톱이 되고 난 뒤의 노아의 입장은 이제 오도 가도 못하지요.



그러면 바깥은 뭐냐? 심판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진행되고 있는데 하나님의 다스림은 어떻게 됩니까? 심판 가운데서 하나님의 다스림의 윤곽이 드러나고 그 실체가 비춰지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에 꽉 둘러싸여 있는데 그것을 하나님께서 알아서 조정합니다. 점점 더 물이 감해져요. 3절에, “물이 땅에서 물러가고 점점 물러가서 일백 오십일 후에 감하고”라고 되어 있어요. 그 다음 5절에, “물이 점점 감하여 시월 곧 그달 일일에 산들의 봉우리가 보였더라.”라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몰고 오는 거지요. 하나님께서 몰고 온다면 그 움직임에 대해서 노아는 이제 더 이상 관여 못합니다. 그렇다면 방주 바깥에 있는 그 물이 없어지게 되면 우리는 오해하기를 ‘아, 방주가 물에 떠 있다가 물이 없어지니까 휴, 살았다. 이제 그 방주가 그대로 이어질 것이다.’라고 생각할 거예요. 그것은 구원론으로 따지기 때문에 그렇게 성경을 오해합니다. 성경은 구원론으로 하게 되면 마귀의 해석이에요.



구원론이 아닙니다. 바깥에 있는 심판을 좌지우지하는 하나님의 작용이 방주내부의 무엇과 연관시키느냐 하면, 바깥에 있는 심판이 방주 내부에 심판 성 있는 요건이 돼요. 드디어 방주 문을 열고 나오려면 어떤 요건이 갖추어져야 되느냐 하면, 바깥에 있는 심판의 내용이 안에 장착된 상태에서 방주 바깥으로 나와 줘야 되는 겁니다. 물 심판이 한 때 있었던 그렇고 그런 이벤트가 아니거든요. ‘옛날에 물 심판이 있었어. 끝!’ 이런 것은 없어요.



영원토록 물 심판 자체가 이제는 방주안의 방주다움의 요건이 되고 그것이 그대로 문 열고 나오면서 ‘심판했음’이라는 내용덩어리가 방주 밖으로 나와 줘야 돼요. 왜냐하면 심판이 계시이기 때문에. 그러면 노아는 뭐가 되느냐? 노아는 지금 살아 있습니다. 살아 있지만 스톱이 된 채로 살아 있어요. 바깥에는 물 심판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심판을 일방적으로 다뤄요. 방주는 그냥 가만히 있고 바깥에서 물을 감한다든지 하는 것은 전부 하나님이 몫입니다.



노아자체는 뭘 느끼는가? 노아는 유일한 목격자가 돼요. 어떤 목격자인가 하면, 하나님의 계시를 후대에 전달해야 될 목격자가 되는 겁니다. 목격자가 되려면 나는 스톱했다, 나는 내가 나를 현재 상황으로 이끌어내는데 나는 아무것도 한 게 없음이 분명해져야 돼요. 우리가 천국 간다는 것, 예수 믿으면 천국 간다. 참 쉽지요. 로마서 10장에 나오니까. 13절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렇게 되어 있으니까 까짓 거 주의 이름 부르지요. 예수 이름을 지저스로 부르든지 하여튼 부르지요. 흐릿하게 불렀다가는 나중에 말 날까 싶어서 똑똑한 소리로 예, 수, 부르겠지요. 그런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 안에서 뭘 느끼는가 하면, 예수 안에서 물 심판 안에 있는 노아의 심정을 받아내야 되고 그것이 구원받는 요건이 돼요. 심판이 방주 바깥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심판이 방주 안까지 들어와야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방주가 물이 새서 참 좋겠다. 방주가 물이 새서 엉망진창이네.’ 그렇게 생각하는데 물 심판으로 세상이 완전히 물에 잠겼잖아요. 방주는 물에 떠 있지만 잠긴 것이나 마찬가지잖아요. 그런데 물을 조금씩 빼준다는 말이지요. 빼주면 방주 안에 있는 사람은 ‘휴, 살았네.’ 하면 안 되고요. 여전히 우리의 머리 위까지 물이 찼다고 생각하는 상태에서 이제부터는 내 구원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나님의 자기 일을 벌이기 위해서 우리를 채용했다는 생각을 갖고 있어야 돼요.



날 구원하려고 예수님이 오신 것이 아닙니다. 의당 심판받아야 되는데 주님께서 이 창조의 취지를 드러내기 위해서 구원을 하는 과정에서 물이 살짝 코 밑까지 내려가서 겨우 숨을 쉬었다고 그렇게 되어야 됩니다. 우리는 의당 지옥에 가야 되는데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주 되게 하시는 그 작업을 하다 보니까, 주님에 의해서 요만큼 숨을 쉬다보니까 ‘휴, 주님 아니면 우리는 큰일 날 뻔 했습니다.’ 이런 인간되라고 주께서 우리를 참여시켜 준 거예요.



방주 바깥에만 물이 있고 방주 안에는 물이 스며들지 않는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방주 바깥에 있는 물이 그냥 물이 아니고 심판의 물이라면 이제는 그 심판이 방주 안까지 영향을 미치면서 드디어 방주에서 빠져나온 사람은 옛날 노아가 아니에요. 옛날 노아가 아니고 엑기스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형상대로 만든 자로 하여금 이 세상을 다스린다고 할 때 그 형상알갱이에 해당되는 그 사람을 심판 속에서 생산해서 방주 안에서 끄집어내는 작업을 하시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이야기했잖아요.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그 말이지요. 그리스도가 산다, 라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 예수님 핍박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 잡아 죽인 사람을 주님이 찾아왔다는 말이지요. 이렇게 정리하면 어려울 것은 전혀 없어요. 어려울 것은 전혀 없고 ‘그 목사도 지옥 갔다면 놀랍다.’ 그럴 필요도 없어요.



누가 지옥가고 천국가고는 그 자체가 성경에는 없는 이야기입니다. 성경은 누구 천국 보내는 책이 아니고 예수님을 증거 하기 위해서 다뤄지게 되면 그것은 천국행이고, 그렇지 않고 자기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애쓴다면 그것은 지옥행이지요. 자기 자신의 구원을 생각하면 그 사람은 잘난 체나 하면서 지옥에 가는 것이지 천국에서는 그런 사람 안 받아줍니다. 천국 가 봐야 자기 구원받은 것이나 자랑할 텐데 그게 되겠어요? 구원 파니 뭐니, 전부 다 그거잖아요. 개인구원론이잖아요.



노아를 보면서 이러한 해석이 안 되는 거예요. ‘휴, 살았다.’ 그럴 것 같으면 노아는 따로 아라랏산에 먼저 가 있지 왜 노아로 하여금 물속에 집어넣습니까? 개인구원을 접어야 돼요. 왜? 개인구원이 말썽을 일으켰거든요. 창조의 취지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다스리는 것인데 인간은 선악과 따먹고는 선악과 따먹은 채로 자기가 다스리겠다는 거예요. 자기의 나와바리, 자기의 영역을 확보하겠다는 겁니다.



인간 살아가는 것이 자기영역 확보지 다른 것이 뭐가 있어요? 아무것도 없어요. 본문은 이거예요. 노아를 내세우면서 노아방주전과 노아방주후의 노아, ‘이걸 깨달아야 해.’ 그것이 아니고 노아는 스톱이라니까요. 우리 성도의 매일의 삶은 주님에 의해서 매일 스톱되는 삶이에요. S, T, O, P, 그냥 스톱이에요. 90살 먹고 100살을 먹도록 살아도 스톱입니다. 찬란한 내 젊은 날? 젊은 날 찾지 마세요. 그 때도 스톱이고 지금도 스톱이고 내일 되어서 또 스톱이고 모레 되면 또 스톱이 돼요. 희망이고 뭐고 그런 것을 우리가 생각할 자격도 없습니다.



인간은 자기영역 자기상황밖에 생각할 줄 몰라요. 그러나 노아가 경험하는 것은 이미 우리는 죽음이라는 상황 속에 품 잠겨 있다는 그것이 바로 노아가 자기영역, 자기구원을 생각 안하게 되는 이유가 나와도 심판 속에 있는 거예요. 나와도 이미 심판 속에 있다는 말이지요. 어떤 아주머니가 진주에 있는 자기 친척집 결혼식에 가려고 서울에서 버스를 타려고 했어요. 너른 광장에 대절된 버스들이 각자 행선지별로 한꺼번에 주차되어 있잖아요.



물론 한복도 잘 차려입고 나왔지요. 차에 붙여놓은 혼주의 이름이 너무 비슷했어요. 그래서 진주로 가는 버스인줄 알고 탔는데 남의 결혼식에 가게 되었어요. 진주가 아니라 대구로 간 거예요. 대구로 가서 사연을 이야기하니 “아이고, 뭐, 할 수 없지요.” 그래서 남의 결혼식에 부조도 내고, 사진도 찍고, 식사도 같이 하고, 오면서도 좋다고 놀고……. 번지수를 잘못 찾은 거예요.



그 이야기 들으면서, 여러분, 교회 놀이가 재미있어요. 우리교회는 재미도 없지만 큰 교회 가면 교회놀이가 재미있는 이유가 교인들이 날 사랑해주거든요. 인정해주고 존재감을 주니까 재미있어요. 백날 재미있으면 뭐합니까? 남의 잔치 집에서 노는 것인데. 거기에 부조, 십일조 내고 헌금하고, 실컷 노는 거예요. “나 구원받았지, 그렇지? 너도 구원받았어.” 전부 다 개인구원론에 빠져가지고.



노아는 스톱입니다. 그냥 이렇게 산들 저렇게 산들 올 스톱된 거예요. 스톱되었다는 말이 꽁꽁 묶인 것이 아니고 사업도 하고 직장도 다니고 다 해요. 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말이지요. 애가 학교에 가든 말든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내 몸이 아프든 말든. 조종하는 것은 내 바깥에서 조종해요.



그러면 왜 심판을 내 안에 들어오게 하는가? 심판하시는 예수님, 심판주가 스스로 심판받기 위해서 방주로 들어오신 거예요. 노아가 곧 예수예요. 그 당시로 하면. 예수님이 우리 자리에 들어와서, 우리는 예수님 하나, 그리고 우리 하나, 그래서 일대일로 봤는데 그런 일대일이 아니고 아버지 한분 하나, 그리고 내 자리를 차지하고 심판하시면서 내 자리를 점령하신 예수님 하나, 그 성부와 성자의 일대일로 말미암아 세상 모든 것은 이루어집니다.



성경 일점일획도 누가 다 이룹니까? 예수님이 다 이룬 거예요. 우리는 제 삼자로 빠져야 되는 겁니다. 이게 복음이에요. 나하고는 상대도 안한다는 사실을 기쁘게 받아들여야 돼요. 이 사실을 슬프게 받지 말고 기쁘게 받아야 됩니다. “끽소리 하지 마.” 군홧발로 꽉 눌러야 돼요. “아, 내가 이런 실수를 안했으면 인생 폈을 것인데.”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어차피 심판받을 인생인데 이 인생은 어떻고 저 인생은 어떻습니까? 다 심판받을 인생인데요.



방주 자체가 죽음에 포위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방주 안에 있는 것도 사실은 살았다 하지만 죽은 거예요. 그것을 나중에 요나에서 보여줍니다. 요나는 고기 안에서 살았다, 가 아닙니다. 고기 안에서 남들이 경험하지 못한 죽음의 극한을 경험하는 겁니다. 그것도 산채로. 왜? 목격자 되라고. 하나님의 심판의 목격자. 그것 때문에 노아만 하나님과 동행해서 은혜를 입은 겁니다.



이 목격자가 이 시대로 하면 바로 예수님의 증인되는 거예요. 예수님의 증인입니다. 우리는 죽은 채로 주께서 살아 있기에, 죽은 나를 주께서 살아계셔서 움직이게 한 그것이 설거지 하고, 직장 나가고, 그런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증거 할 것은 “이렇게 하시면 구원됩니다.”가 아니라 “주께서 이미 구원을 현실화시켜서 이루었습니다. 주 안에서 실재 화되고 완료가 되었습니다.” 라고 증거 하는 겁니다.



상대성원리라는 것이 있습니다. 갈릴레오가 그것을 이야기했는데요. 그 당시 사람들은 갈릴레오의 상대성이론을 굉장히 반대했어요. 우리가 폴짝 뛸 때 지구가 돈다면 우리는 다른 장소에 내려오게 된다고 이야기했어요. 갈릴레오는 말하기를 “배 밑에서 물이 아래로 떨어질 때는 배가 아무리 앞으로 나아가도 물은 수직으로 계속 같은 장소에 떨어진다.” 같은 속도로 움직일 때는 그 안에서는 내가 얼마나 움직였는지를 알 수 없고 상대성, 나의 바깥에서 상대성으로 비교해서 나를 파악한다는 겁니다. 이게 갈릴레이 갈릴레오의 상대성원리에요.



이것은 뭘 의미하는가 하면, 우리 자신은 우리 자신을 몰라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일을 일으키면, 물 심판이든지 불 심판이든지 주께서 개입을 해주셔야 돼요. 그 개입하는 순간 우리는 스톱이에요. 오늘 설교의 핵심은 스톱이에요. 우리가 뭘 해도, 바쁘게 농사짓고 무슨 짓을 해도 몽땅 “가만히 있으라.”에 해당되는 겁니다. 스톱된 상태에요. 그것으로 날 구원하고 날 살리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믿씁니다, 믿씁니다, 쌍시옷 써가면서 해 봐야 구원 못 받아요. 내 바깥에 있는 어떤 분의 작용으로, 그분에게 다루어질 때 이미 우리는 그분 안에서, 예수 안에서 구원되는 채로 움직이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그 움직임은 나의 움직임이 아니고 주님이 움직입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4장에서 사도바울이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죽어도 좋다는 겁니다. 어딜 가도 주께서 움직일 것이다. 왜? 나는 스톱되었으니까. 주께서는 움직이시니까. 막 사시기 바랍니다.



막 사시는 그 모든 것이 주님에게서 나온 일인 것을 받아들인다면 어떻게 살아도 예수님의 증인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노아가 경악했습니다. 놀랐습니다. 어쩔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모든 사람은 죽었지만 노아만이 목격자요 증인 된 것을, 하나님과 함께 있는 증인으로 방주에서 나와서 새 하늘과 새 땅, 새 세상을 이루었던 노아처럼 우리도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면서 주의 증인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