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2015-04-17 05:37:17
안녕하세요, 목사님.
사역을 하면서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숙제가 한두가지 남아있는데 그것을 설교자의 관점 아래서 질문드리고 싶습니다.
1. 교회 사역을 하면서 그리고 이 시대의 성도들을 보면서,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성도가 거의 없다는 현실 앞에서
성령을 받은 자가 그들과 어떻게 어울릴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어떤 시각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대해야 하는 걸까요?(학생부가 아니라 장년들에 대해서요!)
2. '이미 죄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완벽하게 다루어지고 있으니 그 죄에 노출되고 그 죄가 나타나게 하라'는 식의 선포가 이루어지면 성도들은 그러한 죄를 자신 안에서 직접적으로 온전히 깨닫고 알아갈 기회를 상실하게 되는 것이 아닌지 궁금합니다.
3. 마지막으로 설교의 내용전달에 있어서 어떤 설교가 좋은 열매를 맺게 할 수 있는 거라 생각 하시는지요?
그리고 목사님이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그리스도의 피의 개념에 대해서 짧게 말씀을 더해주시면 참 감사하겠습니다.
답변;
이근호
15-04-17 07:27
1. 2.
먼 타국에서 생활하시기에 얼마나 외롭습니까.
더 더구나 정신적으로 동질성 보다는 이질성을 보이는 단체 속에서 이방인처럼 여겨지는 것이 더 괴로울 것입니다.
그러나 뭔가 기대한다는 것이 마귀의 시험에 유발시키는 첫 걸음이기도 합니다.
‘기대한다는 것’ 곧 ‘나는 남들로부터 인정받고 사랑받는 것 가운데 살고 싶다’는 원초적 욕망의 발현입니다.
미래 상황에 대해서 일방적인 자신의 희망사항을 따로 상정하고는 과연 성취 여부를 관찰하는 가운데
그렇게 해서 정립된 원칙을 ‘신의 계시’로 확신을 갖는 식으로 하루하루를 조마조마하는 가운데 지새는 겁니다.
이런 왜곡성 중의 하나가 ‘주님을 위해 고난 받으면 내가 원하는 것을 주님이 들어주시므로서
주님은 살아계심이 내가 믿어야 될 내용의 일부로서 자리잡을 수 있다’는 희망 같은 것입니다.
이것은 ‘신의 뜻’을 우회한 ‘자기 계시 쓰기’에 불과합니다.
이것은 주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가르치는 일입니다.
즉 일단 자신이 자신을 믿고 그 믿음에 무조건 하나님께서 동조해야 하는 식으로 압력을 가하는 태도입니다.
현실 상황에 모두 예수님의 희생에서 유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것은 자신의 신앙의 위대함을 증명한 성공사례로 간주하려고 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전도사님에게 최적절한 상황을 신경 쓰셔 조성해주셨는데
전도사님은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투정내는 식입니다.
복음이란 전달자의 학식이나 모범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복음 전달자 내부에 들어있는 죄가 얼마나 ‘복음’이라는 개념으로 위장된 채 쓰여지는가를 노출시키면서 주님은 복음을 전파하십니다.
그것은 상대에 대한 구원작업 이전에 복음 전달자 본인에 대한 주님의 목회요 전도가 동시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미쁘시니라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후 1:18-20)
이는 성도로 하여금 세상 기대에 대한 절망을 몸소 체험시키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즉 “내가 여기 존재 한다는 그 자체가 곧 죄이구나”를 절감하는 방식입니다.
성도가 절망하면 할수록 주님 차원에서 신앙의 전략은 더욱더 성공적이 확인되십니다.
왜냐하면 소급적인 성도의 자화자찬이 끼어들 여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공로는 오직 주님께만!
따라서 투정조차 실수가 아니라 당연입니다. 필수입니다.
따라서 더 깊은 투정으로 교인들 앞에 나타나셔서 귀하가 얼마나 말도 안되는 것을 희망하고 있고 믿음에 흔들리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인위적으로 유발한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주님으로부터 강제로 유발시킨 일임을 고백하여
타인들로 하여금 ‘신앙생활은 오직 주님의 몫임’을 증거하여 그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세요.
만약에 투정이 사라지고 주님께 감사가 되게 되면
그것은 타인들이 주님께 돌릴 영광을 도중에 본인이 가로채서 “나를 본받으세요”라고 자기 증거하는 중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 같이 되었도다”(고전 4:13)
좀 더 이기주의적으로 상황을 설명하자면, 전도사님 주변 분들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자기들이 맡은 역할을 제대로 잘 수행중입니다.
전혀 신앙적으로 보이지 않는 역할을 말입니다!
목회는 주님 몫이고, 나의 신앙도 주님 몫입니다. 본인의 주체성은 그런 주님 사역의 귀한 결실물일 뿐입니다.
3. 성경 해석 속에서 필히 해석자의 ‘해석 자랑’이 포함되게 되어 있습니다.
즉 “이 정도면 해석의 바닥까지 긁었다”는 자부심과 자긍심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 말씀은 성도의 해석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직접 이 우주에서 벌써 힘을 발휘하는 일을 하시고 계십니다.
그래서 나에게 적용했던 것을 타인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교육’이 아니라 ‘증거’가 되는 겁니다.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요일 2:27)
마치 화투장의 그림은 화투치는 사람이 손을 대기 전에 이미 앞면에 그림이 그려져 있습니다.
단지 인간은 그 화투장을 들추어 새삼 그 그림을 확인할 위치에 있을 뿐입니다.
그래놓고 사람들은 자부하기를 “내가 해석했다” 혹은 “내가 공부해서 알아내었다” 혹은 “이성적으로 따지니 이헣게 해석이 되네”라고 합니다.
문제는 사람이 들추어내는 화투장이 매일같이 계속 쌓여있고 기존의 해석을 무효로 돌린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 4:12-13)
마치 주님 홀로 공사해놓은 콘크리트 타설에서 인간들은 자기 발자국을 자꾸 남기는 식으로 오해하면서
그 콘크리트의 ‘자기가 이루어놓은 나의 인생’이라고 우기는 겁니다. My way(내 방식)라고 말입니다.
그러니 해석 안에 자기 자랑과 공로성이 안 들어갈 수가 없는 식지요. 모든 인간의 태생이 그러하니까요.
그래서 이렇게 생각하세요. 성경 해석에 온갖 힘을 다 쏟으시고 그 결과에 만족하세요.
단 주님은 그 해석, 그 설교, 그 이해를 가지고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십자가 지신 그 능력으로 구원하시는 겁니다.
따라서 진정한 성도는 나름대로 자기 성과를 내면서도
“왜 이 대단한 나의 성과를 받으시지 않고 주님의 성과만 받으실까?”하고 그면서 그 격차와 차이를 느끼는 자입니다.
이 격차가 가장 좋은 열매입니다.
4. 십자가의 피란, 죄를 의도적으로 하나님쪽으로 유발시켰다는 증거가 됩니다.
즉 인간이 죄를 지어서 십자가 피로 용서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피 흘리심이 먼저 준비되었기에 악마와 인간은 한통속이 되어 죄를 지어야만 하고
그렇게 해서 예수님의 심판주로의 결정권은 창세 전부터 합당한 조치임을 드러내기 위한 사건이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엡 1:7-10)
따라서 궁극적인 죄는 주님이 발췌할 몫이며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라는 겁니다.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롬 5:9-10)
-우리교회 질문/답변란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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