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각 정리

2014년 7월 13일 오전 10:22 (오용익 목사님)

아빠와 함께 2014. 7. 13. 10:46

대구 우리교회에서 설교하고 나서               오용익 2007년3월25

 

단에서 내려오니 내가 무엇을 떠들었는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속에서 곡하는 소리만 들렸다. 처음에는 내가 우는 소리만 들리더니 조금 후에는 주님이 우는 소리가 들린다.
비참했다.
주님을 증거한것이 아니라 주님을 가리운 것같아서.
성경 귀절 행간 행간에 발려진 피의 말씀속에서 주님의 사랑을 죽 죽 펼친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을 꾸기 꾸기 꾸겨서 말씀을 혼잡케한것이 덕지 덕지 나온것 같어서.
그래서 속으로 계속 울기만 했다.
내 울음에는 일종의 항변도 잔뜩 묻어 있다. 나름대로 한다고 했는데 왜 좀 밀어주지 않느냐 하는.
그 항번속에는 이미 복음마저 내것으로 만들어서 장악하겠다는 일종의 마귀의 심보가 들어 있다.
주님의 울음소리를 들으면서 복음을 전하는 자(성도라면 누구나)의 복이 무엇이며 저주가 무엇인지 생각했다.

 

부득불 복음을 전하는 그 일이 그 자체로 즐거움이 되고 그것자체로 복이 되며 그것이 아니면 그자체로 비참임을.
그러니까 꼼짝없이 복음에 붙들리고 붙들린 그 복음에 의해서 복과 저주가 갈리우는 사람 된 그것이 바로 축복인것을.

 

그러고 보니 복받은 기쁨이 물밀듯 밀려온다.
지리산 휴게소에서 김을수 집사님이 오뎅사줘서 먹었다.
자기는 기도하면서 무지 떨었다고 한다.

기도순서를 내가 넣은줄 알고 나를 약간 미워했다고 하길래
내가 아니라 누구였을 것이라고 했다.
상관없다.
참 좋은 경험을 했다.
목사가 말씀만 생각하면 된다는 것을, 그밖의 다른 것이 사소한 것임을 깨닫는 것보다 더 좋을수는 없다.
장로님은 길을 잃어서 북대구로 갔다가 다시 오시느라 뒤에 처졌다.
광주에서 만나 저녁먹고 헤어지기로 해 놓았다.
우리교회 오늘 점심메뉴는 소고기넣고 끓인 국이 나왔는데 설교걱정때문에 제대로 먹지도 못한것이 아쉽다.
그래도 괜찮다. 더 맛있는 오전 설교를 들을수 있어서 그것만으로도 좋았다.

 

이근호 
07-03-25 19:53
이렇게 설교하셨습니다.

"내 살과 피를 먹지 않으면 생명이 없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결국 이 세상에는 있는 그 자체로서 생명이 아니고 죽음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여인이 너무 기뻐 날뛰는 것처럼 적어도 예수님의 생명을 받은 자는 그러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 생명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을 통해서 주어지는데, 그 복이란 없는데서 있게 하고 죽은데서 살리는 복입니다.

그 복이 주어지면 기존의 모든 '있음'은 여지없이 생명이 아닌 것으로 드러나서 주님으로부터 깨어져야 합니다.

이것이 '복의 전달구조'라고 목사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사실을 모르고 교회 나오면서 한이 맺혀 나오는데, '한'이란 결국 자신의 '있음'을 더욱 '크게 있게' 해달라는데서 비롯되는 것으로서 그 못다 이룬 '있음' 사이의 간격이 한으로 나온다고 하셨습니다.
이 '있음'의 정신은 출애굽 당시에 이스라엘에게도 있기에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 '땅'과 '씨'에서 아무 것도 얻을게 없게 하셨습니다.

결국 참된 이스라엘과 성도는 '어린 양'의 피 안에 있을 때만 생명이지 '어린 양의 피'를 벗어나면 결코 생명이 없음을 목사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참된 생명은 보지 못하고, 거짓된 한 풀이를 매달리는 한국 교회는

여전히 약속의 자식이 아닌 이스마엘의 사고방식에 그대로 머물러 있다고 목사님은 증거하셨습니다.

목사하지 말고 차리리 "예수님 만났다"고 소리치는 그 마친년 같은 사마리아 여인만 같아셔면.. 하고 목사님은 자신의 애통하는 심정을 토로했습니다.

설교 현장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은 다 함께 공유했습니다. 생명이란 예수님의 피로만 전달된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있음'을 무용지물로 만들면서 주어진다는 이 현실성을 참 현실로 받아들였습니다. 수고했습니다. 그리고 감격했습니다.

이준 
07-03-25 20:36
단에서 내려오니 내가 무엇을 떠들었는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기억 안 나시는 것이 당연하실 것입니다. 목사님께서 '떠드신' 게 아니라 주님께서만 말씀하셨으니까요.

주님을 증거한것이 아니라 주님을 가리운 것같아서.
->목사님께서 주님을 증거하신 게 아니라 아마 주님께서 목사님을 가리우셨을 겁니다.
이 순간도 제 머리 속에는 존경하는 한 젊은 목사님께서 애절하게 외치시던 '십자가'와 '피'라는 단어들이 반복적으로 공명되고 있습니다(물론 설교 내용도 대부분 기억하고 있습니다). 잘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만 하심이 주님의 뜻입니다. 주신 은혜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말씀을 받아 먹고 사는 자가 감히 평안을 전합니다.

P.S.공교롭게도 저 또한 오늘 먹은 점심메뉴로 나온 '소고기 넣고 끓인 국'은 들어가야 할 것은 다 들어 간 것 같은데 맛이 없었습니다. 영혼 속으로 들어가지 말아야 할 바이러스성 뼛조각이 섞였으니 언제나 그 맛이 개운할 리가 없지요. '복음' 가까이서 '복음'만 듣고 사시는 분들의 행복감을 멀리서나마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모든 분들께 평안을...

구자근 
07-03-26 01:06
기도하자마자, 그 자리에서 그렇게 빨리 기도응답 받은 건 처음입니다(솔직히는 마지막이고 싶습니다).

"오늘도 욕망하는 우리의 존재를 확실하게 죽여주시고~ 예수님 홀로 영광받으옵소서"
라는 김집사님의 대표기도중에,
지지난주의 정집사님의 기도 "우리의 희망이 무너지게 하시고~"가 오버랩되면서
통합적으로 '아멘!'이 나온 후 곧바로 우리모두는
돼지 목따는 현장에 투입되었습니다.

전하는 자나 받는 자나 우리모두는 함께 처참한 아픔을 경험했습니다.

안죽고 싶어서 발버둥을 쳐도 소용없었습니다.
질질 끌려가서 결국에는 어떻게 죽어가는지 모두가 보아야만 했습니다.
왜냐하면 형제의 죽음 속에서 내 죽음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죽임당하는 형제의 고통이 마구마구 밀려왔습니다.
산처럼 밀려왔습니다. 내가 죽어야 마땅한 자리였습니다.
죄없으신 예수님의 '대신 죽음'이 크게크게 다가왔습니다.

예수 안에 있으면 결코 정죄함이 없게 만드시는 그 크신 용서의 능력은
정신없이 펼쳐져가는 목사의 설교로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목따이는 현장에 함께 투입된 처참함 속에서
진정 소중하고도 소중한 형제의 사랑을 반짝! 받습니다.
주님께서 차려주시는 눈물의 밥상을 받습니다.

우리의 처참함과 상관없이
물과 피를 쏟으신 단 한 분의 의인이신 예수님의 죽음만이
천국백성 만들기의 처음과 끝임을 다시한번 새겨주시는
성령님께서 베푸신 천국잔치였습니다.

고맙습니다.

 

 

-머리 식히려고 화평교회(오용익 목사님)사이트에 들어갔다가 여려번 보았던 글이지만 다시 읽고

 이번에는 여기에다 올려놓고 다음에 다시 봐야지 하고 옮겨놓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분들의 멘트가 달려있어 더욱 맘에 듭니다
 구자근 님은 오목사님 사모님 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