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각 정리

2014년 7월 14일 오전 08:24 (사단의 활동)

아빠와 함께 2014. 7. 14. 08:41

공익광고에 이런 게 있지요. 운행하는 승용차 안의 풍경인데
조수석에 앉아 있는 엄마는 립스틱을 바르고 있고 애들은 책도 보면서 재미있게 가고 있는데
갑자기 유리창 깨진 파편이 튀면서 앞으로 쏠리면서 립스틱은 날라 가고 아빠도 죽고 애도 죽고,
나중에 깨보니 꿈입니다. 안전벨트 하라는 공익광고에요.
안전벨트 안하면 그렇게 된다는 것, 안전벨트가 여러분을 안전하게 지켜준다는 광고예요.

그런데 성령 받은 열 두 사도는 이 땅에서 안전벨트가 없습니다.
안전벨트가 없어요. 왜, 나를 지킬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그동안 나를 지켜왔던 것, 안전벨트 역할을 한 것은 누구입니까?
사탄이 나를 지켜주는 안전벨트 역할을 한 거예요.
교회 다니면 주님이 나를 지켜줄 것이고 절에 가면 부처가 나를 지켜 줄 것이다.
그 부처, 그 예수가 바로 사탄이었던 거예요.
나를 왜 지켜야 되지요? 도대체 나는 나를 왜 지켜야 되는 겁니까?
사도바울이 안전벨트용으로 했습니까? 안전벨트 매기 위해서 교회 온 것을 가지고 자기 배만 채운다고 한 거예요.

빌립보서 3장 18절에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자기 바디(body)죠,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사도바울은 이 땅에서의 어떤 안전벨트도 필요치 않았습니다.
안전벨트요? 없어요. 세례요한을 지켜준 안전벨트 없습니다.
우리 자신을 지키려고 할 때는 먼저 내가 누구이기에 지킬만한 가치가 있는지 자기가 파악을 해보죠.
그런데 사람들은 내가 누군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내가 지킬만한 가치가 있다고 단정하고 모든 행동에 나섭니다.
그런데 창세기 2장 이후에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왜곡된, 이미 사탄과 한패거리가 된 그 존재로서의 나거든요.
그러면 내가 나를 지키면 안돼요. 내가 나를 지키면 안 된다 그 말이지요.
나를 위로하고 나를 보호하려고 하면 안돼요. 그것은 곧 내 속에 있는 사탄을 보호하려는 셈이 되어버려요.

자기 배만 섬기는 것과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 대칭이 되어 있어요.
죄송하지만 이게 대칭이 되어 있다고요. 예수 믿어서 복 받자, 이게 안 된다니까요.
사도바울의 설교에서는 이게 용납이 안돼요.
예수 믿고 잘 되자가 아니라 예수 믿는 것 자체가 잘 된 거예요.
그 다음에 따로 잘 될게 남겨지면 안돼요.
“내가 사나 죽으나 주의 것입니다. 주님이 이렇게 저의 주님이 되심을 고백합니다.”
이걸로 잘 된 것으로 끝! 그것으로 잘 된 것이 끝났어요.

“이렇게 주님을 잘 섬깁니다.” 했기 때문에 그 보상책으로 내가 잘되는 것을 남겨두면 안돼요.
그것은 예수님을 잘 섬기는 것처럼 하지만 실제로는 우회를 해서
결국은 어디로 귀속되느냐 하면, 역시 내가 잘 되는 쪽으로 귀속되어 버립니다.
이것은 사탄의 짓이라니까요.

-로마서93강-"사단의 활동"

위치대칭-인간중심의 현실관-너와 나의 대칭-존재우선-인간이 주체
위상대칭-참된 현실관-땅과 하늘의 대칭-말씀우선-인간은 말씀의 결과물.객체

눅1;79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어두음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취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