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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강의5강-창세기1 이근호 140515

아빠와 함께 2014. 6. 18. 18:56

2014-05-16 01:25:41 조회 : 294         
수원강의 창세기1 140515 이름 : 이근호 (IP:119.18.9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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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140515a-(창세기1)5강 - 이 근호 목사

창세기에 보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라고 되어 있잖아요. 이 창조 하신다 할 때에 이 창조했다는 것에 대해서 사람들은 그걸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없는데서 만들었다고 이렇게 생각하거든요. 없는데서 만들었다고 생각하는데 그 말은 잘못된 말입니다. 왜 잘못됐느냐 하면, 1장2절에 보면,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하지요. 자, 1장 2절에 나오는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다 하는 이것이 창조에 속합니까? 속하지 않습니까? 이게 창조에 속해버리면 제 첫날에 빛을 창조한 게 아니고 뭘 창조했느냐 하면, 공허하고 흑암을 창조한 셈이 되잖아요.

그러면 빛을 창조한 것은 이것은 첫째 날이 아니고 둘째 날이 되어야 되고 제일 먼저 뭐가 있어야 하는가 하면, 공허하고 혼돈과 흑암 이것부터 있어야 된다 말이죠. 그러니까 창세기1장1절부터 우리가 생각하는 창조개념과 성경하고 벌써 틀어지는 거예요. 다시 이야기해서 성경은 언약을 위한 겁니다. 언약을 위했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을 위한 책이에요. 우리가 궁금증을 푸는 책이 아닙니다. “이 세상은 어떻게 있지?” 그걸 풀어주는 책이 아니에요. “누굴 위해서 만들었지?” 를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상당히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중요한 이야기를.

자식이 부모에게 “엄마! 엄마가 나를 낳은 자식이 맞아? 혹시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출생의 비밀이 있는 게 아니야? 엄마, 아빠가 낳은 건 맞는데 나는 전혀 엄마, 아빠를 닮은 게 없지?” 이렇게 이야기할 때, 부모가 하는 말이 “정 궁금하면 친자확인서 떼어보던지. 내가 너를 낳았단 말이야. 애가 누구한테 무슨 소리를 듣고 하는 소리야? 내가 너를 낳은 거 맞아.”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자식과 부모사이의 주제가 뭡니까? 누가 나를 여기 낳았지? 존재했다, 그런 이야기잖아요.

그걸 가지고 그대로 성경에 가지고 옵시다. “신이시여, 내가 여기 있는 것은 신이 창조한 거 맞지요?” 라고 묻는 것, 그거 신앙 아닙니다. 그건 바로 이방인 종교에요. 이게 언약적인 히브리종교가 아니에요. 이건 인간치고 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누가 나를 여기 존재하게 했지?” “누가 나를 만들었지?” “신이다.” “그러면 신을 위해서 살면 되겠네.” 끝! 그게 복음일까요? 이게 천지창조에 나타난 것이 그런 뜻일까요?

내가 여기 있는데 내가 없는 상태를 사람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처음부터 어렵게 해서 죄송합니다. 할 수 없어요. 이것은. 하도 인식이 잘못되었으니까. 있는 게 없어지는 것, 이걸 사람들은 뭐라고 하는가 하면, 무라고 하는 거예요. 있는 걸 사람들은 머리속으로 생각하잖아요. 내가 여기 있는데, 마이크가 여기 있는데, 마이크를 치워버렸다. 없어진다. 아! 없다, 있다, 를 자기가 알고 있다는 겁니다. ‘뭐가 있을 때는 있는 거고, 사라지면 없는 거라’는 거예요. 그런데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은 분명히 없는데서 나왔다.’ 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건 자기가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없는 데서 나왔는데 없는 내가 스스로 만들 수 없으니까 여기다 하나님을 집어넣어버리고 ‘하나님이 없는 나를 만들었다. 내 생각이 맞을걸. 창세기 보니까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느니라. 그렇지! 내 말이 맞구먼. 나는 내가 없는데서 하나님이 만들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그럼 뭐가 빠집니까? 누굴 위해서 만들었냐가 빠져버려요.

뜸들이지 않고 그냥 바로 나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생각하는 없는데서 창조하는 것이 아니고 현재 모든 우리의 존재는 나타난 거예요. 창조라 하는 것은 반드시 있다, 없다가 아니고 누가 창조했느냐를 집어넣어야 이게 창조다운 거예요.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게 창조입니다. 1장1절을 보면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거예요. 악센트를 어디에 두자? 창조했다, 에 두지 말고 하나님이 창조한 것만 창조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제가 성경의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그대로 이야기해도 듣는 분들이 “그래요, 내가 목사님 말씀에 동의한다니까요. 내가 없는데 하나님께서 있게 하셔서 내가 있다.” 이리 되는 겁니다. 그러면 없었던 내가 있는 내로 악센트가 돼요. 이게 강조가 돼버려요. “나는 없었는데 나는 있게 되었다. 하나님이 나를 창조했으니까 나를 책임지겠지.” 이렇게 나와 버려요.

결국은 아무리 성경을 봐도 결국 주인공이 누굽니까? 자기 자신이 주인공이 되는 거예요. 그런 사람에게 묻습니다. 혼돈과 공허는 누가 만들었습니까? 분명히 아무것도 없어야 되는데 혼돈과 흑암은 왜 있느냐 말이죠. 그러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없는데서 생겼다는 말은 합당치 않은 창조에요. 창세기1장에서 이야기해도 거기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끄집어낼 줄 알아야 돼요. 왜냐 하면, 모든 성경은 예수님을 위하여 적어놓은 책이기 때문에. 여기서 예수님을 끄집어내지 못하고 “나 없는데 왜 생겼지? 신이 만들었구나!” 자기를 집어넣으면 백날 창세기를 봐도 이것은 헛본 게 됩니다. 보나마자 지가 생각한 거 지가 회수한 것밖에 안돼요. 그럼 누가 중요한가, 내가 중요해요.

그 이유가 그 뒤에도 나옵니다만, 그 뒤에 나오는 것을 미리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창조하시면서 창조가 뭐냐 알려주는 자기 전개가 요한계시록까지 되는데 그게 두 가지 방법이 있어요. 뭐냐 하면, 원본과 비교한 것과 같은 인간끼리 비교한 게 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과 비교하고, 인간 대 인간으로 비교하면서 거기서 창조의 흔적을 찾아내십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인간과 비교하고 인간과 인간을 비교하게 될 때, 거기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의도에 들어가지를 못해요.

“내가 여기 있으면 되지 뭐, 내가 여기 있으면 되지.” 그러면 하나님과 내가 비교한다면 “하나님, 저 어때요? 괜찮지요?” 또는 남하고 비교해도 “저 사람보다 내가 낫지요?” 항상 되돌아오는 것은 자기 존재의 사수, 자기 가치를 유지하는데다가 한다 말이죠.

그런데 성경에서는 하나님과 우리가 비교할 때는 그 틈새에서 뭘 끄집어내느냐하면, 하나님이 형상을 끄집어내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끄집어낸다고요. 갑자기 어려워졌지요. 성경 자체가 창세기1장부터 굉장히 어려워요. “애들아, 내가 만들었다. 충성해라.” “예, 알겠습니다. 그럼 쉬운 걸로 가자.” 이리 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형상을 집어넣는다는 말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했다는 말은, 지금 갑자기 하나님의 형상이 주인공이 되는지, 하나님이 주인공이 되는지, 만들어진 우리가 주인공인지, 도대체 7일만에 창조했다는 이 우주는 그 셋 중에 누구를 위해서 만들어놨는가를 우리로 하여금 되돌아보게 하는 겁니다.

이 세상 창조는 결코 너를 위한 창조가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 자신을 위한 창조가 될 수가 없어요. 그러면 창세기1장을 다시 해 보겠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고 그 다음에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있으며, 라고 2절 나올 때에 없는데서 나 생겼다는 나 위주의 창조는 포기해라, 그런 식으로는 아예 그걸 접어라 이 말이에요. “그런 생각하지 마!” 이런 겁니다. 내가 여기 있다는 자체를 접어놔라 말이죠. 왜냐 하면, 우리가 여기 있더라도 우리가 흑암이고 혼돈하고 공허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왜? 하나님의 창조의 취지가 빠져버리면 우리는 창조 이전으로 돌아와서 공허하고 혼돈한 게 바로 우리 자신이 공허하고 혼돈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나를 창조했다고 말하지 말라 말이죠.

우리는 우깁니다. 제가 있는 것은 하나님 때문에 있었습니다. 백날 그런 소리해도 니가 그런 아양을 해도 니가 그렇게 아부를 해도 나는 그걸 창조로 보지 않는다. 왜? 공허하고 흑암에서 하나님의 손길이 있던 그 손길이 현재 너한테 남아있지 아니하면 너는 뭐라고 이야기해도 너는 그냥 공허하고 혼돈이고 흑암이 되는 거예요. 지금 있음, 없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흔적이 있어줘야 창조지, 흔적 없는 창조는 창조가 아니에요. 신약 적으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는 것은 창조가 아닙니다. 신약 적으로 말해서.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면 그건 창조된 게 아니에요. 그걸 더 쉽게 말해서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은 사람이 아니에요. 왜? 하나님이 그런 인간을 창조한 적이 없어요. 그런데 우리는 뭐라고 합니까? 생겨먹은 것은 다 창조했다고 하잖아요. 그게 바로 이방적 사고방식이에요. 그러니까 “만들어 놓고도 지옥 보내고 하나님 너무 심하다.” 너무 심하다는 말이 어디서 나왔는가 하면, 그게 있음 가지고 따지자는 거예요. 있음 가지고.

주님께서는 뭐냐 하면, 그런 인간은 만든 적이 없다는데. 나는 니 같은 인간을 자식으로 둔 적이 없다는 거예요. 그럼 우리는 뭐라고 하느냐, “만들었잖아요.” 만들었다는 차원이 아니고 누가 너를 만들었느냐를 아느냐 차원이라니까요. 창세기1장1절부터. 누가? 무슨 목적으로? 너를 만들었는가를 니가 아느냐고 묻는 겁니다. “아이고, 하나님이 만들었겠지요?” 하나님이 만든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 말미암아 우리를 만들었지요. 중간에 그리스도를 집어넣어야 돼요. 이것이 신약에 와서 등장해요. 구약에서는 뭐냐, 하나님의 형상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모든 피조물들은 자체적으로 존재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형상의 주되심을 위하여 그들은 이 땅에 생겨나게 된 겁니다. 주되심.

신약의 사도들이 12제자잖아요. 12제자 그 사람들이 다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전부 다. 이방인은 한 사람도 없었어요. 사도바울도 유대인이에요. 그 유대인들이 갖고 있는 사고방식이 뭐냐 하면, 하나님은 우리 이스라엘을 택하여 만들었다. 그겁니다. 하나님은 우리 이스라엘을 만들었다 하는 거예요. 쉽게 하겠습니다. 이방인들의 창조는 뭡니까? “내가 여기 왜 있지?” “신이 만들었구나!” 요건 이방인입니다. 그럼 유대인의 창조는 뭡니까? 하나님이 특별히 이스라엘을 만들었다. 이게 이스라엘 유대인의 사고방식입니다. 둘 다 다 틀렸어요. 왜 틀렸는가, “하나님이 특별히 이스라엘을 선택하여 천국백성 만들었다.” 라는 작자들에 의해서 누가 살해당했습니까? 바로 천지를 창조하신 예수님이 살해당했어요. 이 말은 니 생각이 틀렸다는 거예요.

12제자가 우리 이스라엘은 택한 백성이라고 그렇게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결국 그들이 주님을 배반했고 마지막에 성령이 오니까 자기가 어디서부터 잘못됐다는 것을 성령이 오니까 알아요.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입장에서  구약을 다시 해석을 하는 거예요. 십자가, 새 언약 입장에서 구약성경을 다시 해석하는 거예요. 다시 해석하니까 태초에서 나온 그 해석이 뭐냐 하면, 바로 요한복음1장1절이었습니다. 태초에 누가 있었다? 하나님이 있었다. 아닙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있는 게 아니에요. 태초에 누가 있어요? 태초에 말씀이 있었던 거예요. 세상에 말씀을 집어넣다니! 아 이것은 이스라엘에게는 용납이 안 되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들이 다 순교 당했지만.

태초에 하나님이 계셨다. 이래야 그들이 만족해요. 심지어 이방인들도 만족해요. 태초에 신이 있었다. 그건 이방인들이 만족해요. 유대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틀렸어요. 뭡니까? 태초에 말씀이 있었던 거예요. 말씀이. 그 말씀이 뭐냐, 그 말씀은 고유명사인데 그 말씀은 뭐냐, 이 땅에 와서 육신으로 오신 그 나사렛 예수님의 말씀이다 말이죠. 태초에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 예수님의 입장에서 지혜를 다시 보니까 예수님은 잠언서에 나오는 그 지혜 있잖아요. 태초에 내가 지혜로 만들었다. 그 지혜가 바로 본인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야기합니다. 이 지혜가 없으면 생명나무 없다는 그 이야기 나오지요. 그 말이 뭔 뜻이냐 하면, “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면 니한테 생명이 없다 그런 뜻이야.” 이런 뜻인 거예요.

그리고 에덴동산에 있던 생명나무, 선악나무 그 두 나무는 바로 이 예수님 자신을 미리 보여주기 위한 모형으로 만들어진 거예요. 구약 전체가 예수님의 주되심과 누락된 게 하나도 없어요. 그렇게 되면 그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은 사람이 아닙니다. 물에 빠져서 배가 뒤집어져도 상관없어요. 주께서 그렇게 하신 겁니다.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 취급을 못 받아요. 하나님이 그 사람들을 인간으로 취급할 것 같으면 지옥을 그렇게 불기둥을 만들지는 않습니다. 영원토록 못 빠져나와요. 지옥 간다는 건 뭡니까? 마귀와 합류한 거잖아요. 합류했다는 말은 마귀생각이나 니 생각이나 똑같다는 이야기입니다.

애를 수학학원 보내고 영어학원보내고 그게 문제가 아니에요. 자식을 낳았는데 자식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를 않습니다. 이게 보통문제가 아니라니까요. 인력으로 될 문제도 아니고. 왜냐 하면, 나도 예수님을 인력으로 된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똑같은 입장이에요. 모든 게 똑같은 입장이에요. 오죽했으면 사도바울이 이런 이야기를 했겠습니까? 결혼하지 마세요. 오죽했으면 사도바울이 그런 이야기를 했겠어요? 할 수만 있거든 혼자 사세요. 야, 이건 총각 처녀한테 할 소리가 아닌데. 할 수만 있거든 혼자 사는데 정 정욕에 못 이기겠다싶거든 정욕을 그 때 해소하는 차원에서만 생각하세요. 정욕을 못 이기거든 그때는 결혼 안 해서 이래, 저래 일 저지르지 말고 그냥 부부가 돼서 사는 게 낫습니다. 그러나 내가 부탁합니다마는 할 수 있거든 결혼하지 마세요. 어차피 세상은 꺼져가니까. 배를 버리고 바다로 뛰어내리라니까. 어차피 이 세상은 배라 하는 것은 지금 침몰중이기 때문에. 해경 찾지 말고 행정부 찾지 말고 그냥 바다에 뛰어내려야지. 어차피 배에 갇혀 같이 물에 빠지는데.

기다려봐야 구원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우리를 구원해 주지를 않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뛰어들지 않는 한 구원이란 없어요. 십자가에 강도 두 명 달렸잖아요. 그 구원받지 못한 강도 말을 음미할 필요가 있어요. 오늘날 이 시대에 이 교회에. 한국교회에 음미할 필요가 있어요. 그 강도가 뭐라고 했습니까? 당신부터 먼저 십자가에서 내려와 주면 그제 사 나는 당신을 믿어주겠다는 겁니다.

지금 안상홍에 있는 사람들이 돈을 모아요. 돈을 모아서 뭐하느냐 하면, 요한계시록에 보면 핵폭탄 터질 때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벙크 지어야 되지요, 비상식량 준비해야 되고, 생수준비 해야 되고, 유니폼 준비해야 되고, 터 잡아서 핵폭탄에 살아남을 시설에 들어가려고 지금 돈 모으고 있거든요. 어제 그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어요. 그 정도까지 막가는 줄 몰랐어요. 안상홍이가. 눈에 들어오지를 않아요. 왜냐 하면, 본인이 사는 게 남는 거니까. 본인 살려줄 때만 남는 거니까.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십자가 옆의 강도 있잖아요. 구원받지 못한 강도가 뭐라고 했습니까? “그딴 소리 하지 말고 예수 당신의 고상한 소리,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말은 다 때려치우고 당신부터 먼저 십자가에서 내려오게 되면 내가 당신 믿어줄게.” 이게 얼마나 합당하고 합리적인 생각입니까? 

그것에 비해서 구원받은 강도의 생각은 터무니없어도 그런 터무니가 없어요. 뭐라고 했어요? “주여, 저랑 같이 죽읍시다.” 이거잖아요. “같이 죽는데 저를 수용해주시겠습니까?” “주님 죽으시는데 저를 끼어 넣어 주시겠습니까?”  요새 이런 소리를 하는 사람이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요. 세상에. 놀라운 이야기에요. 구원받지 못한 강도에 노란리본 달아야 돼요.

그 구원받지 못한 강도와 구원받은 강도와 대조해 봐라. 너희들이 어느 쪽에 속하는지. 그리고 십자가 사건은 십자가 사건만 아니고 십자가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항상 그 강도의 사건도 더불어서 함께 우리에게 제시됩니다. 어느 쪽이냐를 우리한테 묻는 거예요. 큰 교회 문 열고 가서 “너희들, 어느 쪽이야? 너희들.” “복주고 사업 잘되면 믿을 거야? 아니면 망하니까 예수 믿을 거야?” 한 번 이야기해 보는 거예요. “암 걸려서 남편 죽이니까 예수 믿는 거야? 암에서 살려주니까 예수 믿을 거야?” 한 번 취재해 보는 거예요. 둘 중에 하나밖에 없어요. 보고 믿을 것이냐, 안보고 믿을 것이냐, 둘 중에 하나밖에 없다니까요.

출발은 바로 내가 여기 존재하는 것은 신이 만들었다. 이방신. 거기다가 성경 좀 알았다고 택함 받은 우리. 이것 둘 다 아니에요. 둘 다 아니고 나부터 출발하면 안 되고 나보다 우선 되신 분이 계신데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거예요. 나는 그 분됨을 위해서 이 땅에서 창조된 게 아니고 나타나야 되지요. 나타나야 되는데 나타나는 것이 바로 내가 예수님 때문에 나타났다고 생각할 때, 결합이 될 때, 그걸 창조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게 바로 새로운 피조물의 원형이라고 봅니다. 고린도후서5장 예수 안에 선 사람은 새로운 피조물이다. 처음에도 그렇게 창조했다는 거예요.

신약 때만 그렇게 창조한 게 아니고 주님이 창조할 때는 다 그렇게 창조했는데 사람들은 그것도 모르고 이미 타락하고 난 뒤에 뒤늦게 창세기를 보니까 이건 곡해해도 모든 게 곡해에요. 자기 사는 중심으로 곡해해 버리니까 신학도 그렇게 모든 게 그렇고 전부 다 자기 어떻게 하면 살 수 있습니까? 이런 쪽으로 하니까 그리스도는 아예 없어요. 전부 자기 살기 쪽이에요.

살다보니까 기껏 나오는 이야기가 “하나님은 누가 만들었지요?” 이런 질문요. “천지를 하나님이 만들었다면 하나님은 누가 만들었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천지를 만들었다는 것도 오해하니까 하나님은 누가 만들었냐고 나오는 거예요. 왜? 창조라 하는 것은 없어서 있는 거라는 창조라고 철썩 같이 믿고 있다 보니까 “그럼 하나님 당신은 그러면 처음으로 어디서 만들었습니까?” 라고 질문을 해대는 겁니다.

또 자기중심으로 하다보니까 “선악과는 심지도 말지 선악과는 만들어놓고 왜 따먹게 했느냐, 차라리 없애버리면 우리한테 이익이지.” 그런 질문도 보세요. 이건 창조와 전혀 관계없는 질문이에요. 이방인들이 생각하고 곡해하고 있는 오히려 우리가 죄를 졌다는 티만 내고 있는 거예요. “우리가 이 정도로 나만 최우선입니다.” 하는 자기가 범죄 했던 겁니다.

그러면 창조의 반대말이 뭐냐, 없음이 아니고 흑암이죠. 창조의 반대말은 흑암이지요. 그게 어디에 나오느냐, 이사야45장7절,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 제가 말을 첨가한다면, 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걸 아주 함축적으로 아주 축약해서 말하면, 세상의 모든 것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증거 하기 위해서 천지창조가 이루어졌다, 이렇게 볼 수가 있지요.

이게 베드로전서1장9절~11절에 나옵니다.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 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 하니라” 미리 증거 한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을.

그러면 세상 전체는 뭡니까? 주님의 고난과 영광을 보여 줬지요. 그걸 한국말로 세자로 하면 세상 전체는 ‘십자가’에요. 십자가를 아는 것이 성령의 역사, 십자가를 믿는 자가 새로운 피조물, 십자가의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것은 영원한 증거물로 안치되어 있는 곳이 천국, 그것이 바로 언약의 완성, 영원한 언약궤가 지금 어디에 안치되어 있는가? 천국에 있습니다. 이 언약대로 구원받을 사람을 소집할 때, 그것이 하늘나라, 그것이 천국이에요. 소집하기 위해서 천사들을 보내가지고 주님의 재림과 더불어서 전부 다 거기에 휴거당해서 거기에 가서 언약궤 중심으로 옹기종기 모여 살면 그게 바로, 십자가마을 결국은 천국이 됩니다. 그게 천국이 되는 거예요.

너, 나 없이 전부다 십자가 보는 거예요. “주님, 공로 덕분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거예요. 그 현장. 그렇다면 거기에서 정 반대의 거리에 떨어진 저 지옥에는 뭐가 없습니까? 십자가의 은혜의 보좌가 없어요. 은혜의 보좌가 없으니까 창조 이전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창조 이전이 뭐예요? 흑암과 암울하지요. 영원히 흑암과 혼돈되기 위해서는 거기는 허무와 허물을 유발하기 위해서라도 거기에 유황불로 그들은 악마와 더불어서 못 빠져나옵니다. 저는 고생한다는 말을 더 심한 말이 못 빠져나온다는 그것이 더 심한 말입니다.

빠져나올 길이 전혀 없어요. 한 번 갔으면 끝! 한 번 갔으면 끝나요. 그래서 지금은 우리의 인생이 전부가 아니고 결국은 천국 갈 사람이냐, 지옥 갈 사람이냐가 그것이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마주칠 때, 인생의 진짜 본질이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판정 나는 거예요. 본인이 홀로 판정내리지 마세요. 본인은 그걸 보고 “머리 잘 나왔는데.”이리 판정내리시지 마시고 그리스도 앞에서 판정 내려야 돼요.

그걸 제가 지난 낮 설교에서 뭐라고 했느냐 하면, 뿌리를 반석에 꼽아야 되는데 모래위에 꽂아놓고 그저 줄기와 잎사귀와 꽃만 자랑하니까 폭풍불면 한방에 그 자랑했던 것이 모래와 휩쓸려 가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어요. 그래서 세상이 미쳤다고 했지요. 꽂을 데가 없어요. 삼성그룹의 총수보세요. 지금 어디에 꽂었습니까? 지금 코에 꽂은 것 같아요. 삼성재벌 수조원의 재산을 가지면 뭐합니까? 어디에 꽂었습니까? 자본주의에 꽂은 거예요. 그리스도에게 꽂아야 될 그걸 삼성그룹에다가 꽂아놨으니 그거 날아가면 다 날아가지요.

철학자들은 어디에 꽂아놨는가, 존재에 꽂아놨어요. “내가 여기 왜 있는가?” “신이 있다.” “신이 나를 만들었다.” 구원받습니까? 모든 철학자, 모든 이방인들 다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나이지리아 이슬람 보코하람 그 강도들도 그런 소리합니다. 영원한 신이 우리를 만들었다. 나이지리아 여학생 납치한 그 인간들. 심지어 폴리네시아에 있는 파푸아뉴기니 거기에 있는 토속 종교들 다 이거에요. 신이 우리를 만들었다. 일본의 신화 같은 거 보세요. 전부다 신에서 내려왔어요. 물론 우리나라 단군도 마찬가지고. 중국신화도 마찬가지고. 모든 민족, 종족은 신이 우리를 만들었다. 더 나아가서 우리민족을 특별히 만들었다. 마야문명이라든지, 잉카문명 다 마찬가지에요. 그게 무슨 구원입니까? 실제로 이 땅에 오셔서 33년간 사시면서 실제로 죽었다가 실제로 사흘 만에 부활하신 그것만이 복음이지 나머지는 복음이 아닙니다.

교회를 만들어요? 교회에다가 꽂을 수가 없어요. 내 존재와 가치를 교회나 교회 직분에 꽂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한 방이면 가요. 교회에 꽂았다가는 자기 교주 잡아간다고 보따리 싸고 데모해서 수련회 지킬 참이라. 아니 그리스도가 교주라면 고난 받는 걸 감사해야지 왜 지킵니까? 말도 안 되는. 교주를 왜 지켜요? 교주를. “죽여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리 해야지. 사기를 쳐요.

창세기1장에서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는 이미 우리의 존재는 빠집니다. 존재는 빠지고 창조만 있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이걸 ‘작용’이라 하는 거예요. 작용. 작용에서 뭐가 나오느냐, 출현돼요. 여기에 존재가 있고 작용하는 게 아니고 먼저 신약시대에 나타날 그리스도께서 작용을 하시니까 여기서부터 출현되는 겁니다. 그래서 출현에서 멈춰버리면 창조가 아니고 이 출현이 누구의 작용인가 연관할 때, 여기서 진짜 창조의 의미가 나오는 겁니다.

하나의 예를 들면, 창세기1장에서 하나님께서 몇 일만에 창조를 완성했지요? 7일 만이죠. 6일은 왜 안 되는 돼요? 왜 8일은 안됩니까? 왜 9일은 안되지요? 이것에 대해서 아무도 의문을 갖고 있지 않지요. “아이고, 하나님이 했겠지. 중요한 것은 우리가 있다는 게 중요하지. 그게 뭐가 중요해?” 아닙니다. 우리가 있는 것보다도 이 7일이 더 중요해요. 7일은 작용과 관련된 어떤 분과 관련되어 있는 지시되는 어떤 숫자에요. 그리고 우리는 이 작용에 의해서 출현된 겁니다.

이 7일의 완성은 뭐냐, 안식일이고 안식일의 주인은 누굽니까? 마태복음12장에서 안식일의 주인공은 누구죠? 바로 예수님이죠. 예수님을 창세기1장에서는 7일이라는 작용으로 하신 분으로 나타난 거예요. 다시 이야기할게요. 내가 먼저 있고 내가 뭔가 물을 마신다. 작용한다. 이건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잖아요. 뭔가 작용할 때는 내가 먼저 있고 작용하잖아요. “하나님이여, 제가 무엇을 하나님께 해야 됩니까? 헌금하면 됩니까? 기도하면 됩니까?” 항상 내가 먼저 존재하고 난 뒤에 이 존재가 어떻게 잘해야 따라서 이 존재가 구원받느냐, 안 받느냐 결정된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그게 아니고 제가 존재라 하지 않고 출현이라 했지요. 나타났지요. 나타난 게 스스로 나타난 게 아니고 누가 나타나도록 작용을 했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이 출현된 나타남은 어디에 같이 매여 줘야 돼요. 작용하시는 그 분과 이게 늘 관계가 유지되어야 되겠지요. 그렇지요? 그렇다면 출현해야 될 이 인간들이 독자적으로 어떤 작용을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안 돼요. 작용하시는 그 어떤 분의 그것에 구애받아야 돼요.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어떻게 된다? 정녕 죽으리라. 이거 아담과 하와가 둘이 의논해가지고 “우리가 하나님께 법 만들어드리자.” 자기들이 만든 법입니까? 아니지요. 그러면 여기서 의문해 봅시다. 왜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했으면 그것으로 끝! 끝났으면 끝난 건데, 왜 따먹지 말라는 그 조항을 왜 첨가합니까? 보기에 심히 좋았다면서. 보았으면 그걸로 “인간 있나?” “예, 있습니다.” “아, 보기 좋네.” “보기 좋지요?” 끝! 그러면 그 다음부터 어떤 자유를 주고 어떤 간섭도 하지 말아야 돼요. 마귀도 뱀도 오지 말아야 돼요.

우리의 창조의 선입감이 이 안에 물론 타락한 창조지만, 내 자유, 내 존재 위주, 내 존재 우선, 이런 것 같으면 하나님이 쓰잘데기 없는 간섭을 하지 말아야 돼요. 그리고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해서 팍팍 밀어줘야 됩니다. 여러분들이 자식이 공부 잘하면 어떻게 됩니까? 공부 잘하는 애 간섭합니까? “뭐 사줄고? 뭐 사줄고?” 다 해주고 싶잖아요. “니 마음대로 해라, 니가 사달라는 대로 다 사줄게.” 그렇게 될 때, 우리는 스스로 뿌듯하고 훌륭한 좋은 엄마라고 아빠라고 자부심을 갖고 있잖아요.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만들어놓고 보기에 좋았다면, 우리 인간이 무슨 짓을 해도 어떻게 됩니까? 간섭은커녕 다 도와줘야 돼요. “니하고 싶은 대로 다 해줄게. 코끼리 다루고 싶어? 코끼리 니한테 꼼짝 못하게 해줄게.” 왜? 다스리고 정복하라, 했으니까. 문화 사명. 창세기1장28절. 선교단체에서 매일 하는 이야기. 다스리고 정복하라. 만날 대학교 청년한테 이것밖에 몰라요. 본문 이거 하나밖에 없어요. 세상은 넓다. 우리는 개혁한다. 이런 거. 시련은 있으나 실패는 없다. 이런 거. 하면 된다. 전부 다 이런 이야기가 창세기1장28절에 다스리고 정복하라. 하여튼 못 다스려서 환장을 했어요. 환장을. 필리핀도 못 다스리고, 아프가니스탄도 못 다스리고 환장을 했어요. 나이지리아에 들어가서 선교하려고 하는 사람이 한 두 명도 아닐 거예요. 줄 섰을 거예요. 돈만 주면. 자금만 대주면 가겠다고.

아예 징기스칸이 따로 없어요. 여러분들이 서양사람 보게 되면 참 징기스칸이 보통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징기스칸이 어디까지 왔느냐 하면, 나오스 베트남까지 침범했어요. 더운 나라에 왜 옵니까? 제대로 살지. 남을 정복하는 게 취미에요. 통치는 안했어요. 징기스칸 특징이 뭐냐 하면, 정복을 하되 자율권을 줬고 지배는 하지 않았어요. 거기서 나온 드라마가 기황후 아닙니까? 정복하되 통치는 안했다고요.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고. 그냥 싸우는 게 본성에 맞아요.

이게 오늘날 우리 인간들에게 다 있습니다. 못 먹는 감 찔러나 본다고 그저 힘만 있으면 그것가지고 시비 걸고 찔러보고 정복욕을 갖고 있는 거예요. 목회한다고 괜히 아파트 한 바퀴 돌아가지고 모든 아파트 주민들 다 이 교회에 교인들 되게 하옵소서. 통성기도하게 만들고. 이게 정복욕이에요. 정복욕. 그것이 창세기4장에 나오는 라멕, 가인의 후예들이에요. 타고난 본성입니다. 야쿠자보세요. 조폭보세요. 양아치보세요. 양아치가 깡패들 마냥 양아치가 아닙니다. 가게 세 받아가는 것도 양아치 속성이 나올 수 있고, 뭐든지 조금만 약하면 무조건 함부로 대하고 강하면 고개 숙이고.

하나님께서 모든 장치들, 선악과, 생명나무, 에던동산 이 모든 장치는 인간하고 상관없습니다. 그것은 예수님만 살아있었던 거예요. “건드리지 마! 내거 건드리지 마! 내가 하는 지시 건드리지 마!” 왜? 니가 주인공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 그러면 누가 주인공입니까?” “주인공이 궁금해?” “궁금해요.” “궁금하면 내가 뱀 보내줄게.” 자, 숨어있는 주인공이 마지막을 향하여 그 주인공이 점차, 점차 드러나는 그 발자국을 밟아갑니다. 결국 인간은 말려들었어요. 그리스도가 그리스도답게 인간의 모습으로 오실 때까지 인간은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출현이 돼요.

작용하시는 예수님께서 최초로 뭐라고 했습니까? 작용이 누구라고 했습니까? 말씀. 잠언서에서는 이게 지혜. 이것이 이스라엘 언약에서는 하나님의 이름, 창세기4장에서는 여호와의 이름. 창세기4장26절 볼까요.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되어있지요. 어떤 사건의 출현 때문에 여호와의 이름과 연관시켜서 불렀어요. 어떤 사건입니까? 죽은 아벨대신에 셋이 등장했을 때, 출현했을 때, 그런 출현을 할 수 있도록 작용하신 분이 누구다? 여호와의 이름이라는 거예요.

이렇게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면서 동시에 “우리는 그 여호와의 이름을 위해서 증거 하기위해서 출현된 존재입니다.” 라고 할 때만이 그것이 창조라는 말을 할 수가 있는 거예요. 이게 창조에요. 그냥 없는데서 생겼다고 창조가 아니고 그냥 없는데서 생겼다고 하면, 흑암은 공허는 그럼 누가 만들었어요? 그걸 신이 만들었다고 하면 안 되는 거죠. 그런 것도 다 하나님에게서 나타난 거죠. 나타난 걸 통해서 창조될 때는 반드시 창조된 것은 하나님의 작용하심, 원래 작용하시는 작용 자와 관련성이 있어줘야 돼요.

그냥 내가 있다는 자체로 창조됐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냥 나타난 거다 이리 보면 돼요. 나타난다 했는데,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나온다. 만물이 어떤 혼돈에서 나오지만, 만들어진 것은 그리스도에 의해서 창조되었다고 이렇게 하는 거예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는 말은 틀린 말이 아니고 맞는 말이고 그리고 그 창조를 설명하기 위해서 혼돈하고 공허하고 흑암이 있어야 되는 것도 당연한 조치인 겁니다.

그래야 빛이 있으라 함에, 빛이 있으라, 이게 첫날이지 공허하고 혼돈한 것이 첫날이 아니고 빛이 있으라 함에 첫날이죠. 그러면 아까 7일이 안식일의 주인이 예수님이라 했잖아요. 그럼 첫째 날은 7속에 포함이 됩니까? 안 됩니까? 7일 되려면 1이 있어야 되고, 1만 있으면 안 되지요. 2가 있어야 되고 3이 있어야 되고, 4가 있어야 되고, 5가 있어야 되고, 6이 있어야 되고, 7이 있어줘야 이 작용 자, 장차 오실 안식의 주인공 되시는 예수님과 연관된 연관성이 벌써 창세기1장부터 나타나고 있습니다.

쉽게 정리를 해보게 되면, 하나님이 창조라고 해서 터트려 놓은 것들은 그 있음으로 마감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하나의 출현, 나타남으로 나온 것으로 봐서 반드시 작용 자로 돌아가야 된다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이리해야 돼요. “무엇 때문에 이렇게 만들어놨습니까?” 라고 물을 수 있어야 돼요. “왜 저를 만들어놨지요?” 물을 수 있어야 돼요. 자기 엄마, 아빠한테 물으면 안돼요. 자기 엄마, 아빠도 몰라요. 엄마, 아빠 이전에 계신 분에게 물어야 돼요. 결국은 우리가 여기서 존재라 하는 것은 다른 게 아니고 존재라 하는 것은 확인차원입니다. “나, 오늘도 살았다!” 우리 어머니가 치매 걸렸는데, 우리 어머니가 하는 이야기가 늘 “오늘 집에 또 쌀이 있다.” 쌀만 있으면 돼요. 나 또 산다. 하루에 5끼 내지 6끼 잡셔요. 무조건 쌀 있으면 밥해서 잡셔요. 틈만 나면. 아침 먹고 돌아서 또 점심 때 됐다 해서 점심 먹고 교회오고 그러는데.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내가 여기 있음밖에 몰라요.

그런데 우리는 뭐냐 하면, 내가 또 살았다를 확인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살려주심을 확인하기 위해서 살아있는 겁니다. 주께서 오늘도 살려주심. 주님이 먼저 계시고 주님이 지금도 나를 살리는 작용을 했습니다, 라고 고백을 하기 위해서 지금도 우리가 살아있는 거예요. 더 쉽게 말해서 “주님 살아 계신 거 맞지요?” 라는 말을 하라고 살아있는 거예요. 우리가.

“오늘도 숨 쉬고 있는 것이 주께서 살아있다는 증거 맞지요?” 라고 하면서 우리는 숨을 쉬고 있는 거예요. 지금 우리가 의식이 있다는 것은 주님이 의식 있게 한 거예요. 그래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확인하기 위해서 사는 겁니다. 그러면 이 작용하시는 이 분이 만든 천지창조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걸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한 자로 쓰겠습니다. 크게 쓰겠습니다. ‘터’에요. 터. 그냥 있음이 아니지요. 여기 컵이 있잖아요. 터라 하는 것은 마당, 넓은 마당을 의미하는 겁니다.

‘터’라고 이렇게 표현한 것은 거기서 이질적인 것이 나오더라도 사실은 같은 터에서 나왔다는 것을 잊지 말라고 제가 터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질적인 것이 뭐냐 하면, 바로 뱀이 등장하지요. 사단. 사단이 등장하고 그리고 죽음이 등장하고 그리고 생명이 등장하더라도 그 터는 어디서 나온 거다? 모두 같은 터에서 나온 겁니다. 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나온 거예요. 출현된 겁니다.

우리가 창세기를 볼 때, 이리 생각하지 않고 내 존재중심으로 생각해버리면요, 우리는 원망밖에 할 게 없어요. “주님이여, 왜 저를 자꾸 힘들게 하십니까?” “제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힘들게 하십니까?” “저 양반은 착한 일했잖아요. 그럼 힘든 것도 해소돼야지 착한 일했는데도 불구하고 내 이 어려운 문제 해결 안 되면 저는 무슨 보람으로 계속 착한일할 수 있는 어떤 이유도 없지 않습니까? 제가 이렇게 성의를 표현할 때는 표현해 줘야 섬기는 재미가 나고 보람을 느끼는데 이렇게 나오시면 제가 힘을 내겠습니까?” 라고 할 때는 이건 터가 아니에요. 이건 뭡니까? 이건 자기 존재만 우선시하는 거예요. 터가 아니고. “그럼 니가 창조했나?” 묻습니다. “그럼 니가 창조하지.” “하나님, 어떤 악한 사람이 와서 나한테 이렇게 사기를 쳤습니다.” 하면 악한 사람이 오더라도 너도 같은 터에서 나왔다는 것을 인정하라는 겁니다. 같은 터에서. 같은 터에서 나왔다고 같은 편이 아니에요.

여러분, 지옥을 누가 만들었어요? 하나님이 만들었지요. 천국 누가 만들었습니까? 하나님이 만들었지요. 서로 성질이 대비가 되지요. 하지만, 누가 만들었어요? 하나님께서 같은 터에서 나오게 하신 거예요. 다 하나님이 만드신 겁니다. 터라고 제가 언급한 것은 내 중심으로 보지 말고 터 중심으로 봐야 비로소 우리의 위치와 위상이 제대로 볼 수가 있다 이 말입니다. 이런 취지에서 이 말씀드린 겁니다. 세상은 내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고 터 중심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한 마당 중심으로.

여러분, 아벨이 등장하고 그 다음에 누가 등장합니까? 가인이 등장하지요. 아벨은 우리가 보기에도 아벨은 억울한 사람이에요. 제사를 잘 드렸는데 오래 살아남는 게 아니고 제사 잘 드렸다는 그 이유 때문에 형한테 죽고 더 억울한 것은 그 죽인 형이 사형 당한 게 아니고 무기징역을 당했어요. 형은 일찍 죽지 않고 오래 살았어요. 얼마나 억울합니까? 그러니까 억울하다는 생각이 뭐냐 하면, 터를 생각한 게 아니고 내가 아벨이라면 ‘야, 분통 터질 일이네.’ 이리 되는 거예요.

터를 먼저 염두에 둬야 우리의 역할, 우리의 사명, 우리의 임무, 이런 것이 전체적인 관계 속에서 파악이 되는 겁니다. 전체적인 관계. 나 말고 반대되는 쪽과 같이 더불어서 생각을 해줘야 내가 해야 될 일이 뭐고 내 위상이 뭐고, 내 자리가 뭐냐 하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거예요. 눈만 뜨면 자기만 생각한다면 그것은 결국은 하나님 앞에 원망할 수밖에 없는 일들이 계속 생겨납니다. “도와줘야 일할 힘이 생기지, 도와주지도 않는데 무슨 재미로 합니까?” 이리 나올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창세기2장,3장은 터를 깔아 놔요. 그 터는 그리스도 작용 자에 있는 것이지 절대로 너를 위하여 만든 에덴동산도 아니고 너 잘되라고 선악과 만든 것도 아니고 다른 이유 때문에 그렇게 장만을 했습니다. 10분 쉽시다.
 공은주 (IP:218.♡.196.154) 14-05-28 18:06 
수원140515b-(창세기1장)5강 - 이 근호 목사

창세기1장에서 하나님께서 7일 만에 창조했다는 것은, 왜 8일이 아니고 왜 9일이 아니고 왜 7일이냐, 이건 장차 이 세상을 창조하신 그 창조 분의 사역, 그 분의 하실 일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시간과 공간이라는 것도 예수님 중심으로 돌아가야지 우리의 시간과 공간은 애초부터 그런 게 없습니다. 애초부터 시간과 공간은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고 주님에 의한 건데, 예수님 본인은 시간과 공간이 필요 없어요. 왜? 처음이고 나중이기 때문에.

그래서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처음과 나중이 이렇게 같이 만나게 돼요. 만나게 되면 이런 게 있잖아요. 빳빳한 종이가 있잖아요. 탄력성이 아주 강한 종이를 돌돌 말아보는 거예요. 돌돌 말아버리면 둥그렇게 되지요. 그리고 손을 딱 떼면 휙 하고 금방 다시 풀리지요. 말려있는 것을 탁 풀면 처음이고 나중이 되는 겁니다. 창세기와 요한계시록이 만나서 탁 풀면 창세기, 요한계시록이 펼쳐지고 모으게 되면 그리스도 하신 일로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게 시간입니다. 처음이고 나중인 모든 시간은 우리 주님한테는 시간이 필요 없고 주님이 펼치는 그 세계를 위해서는 시간이 꼭 필요한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세상을 늘 출현시키는 이 작용 자가 관여하게 되면 시간과 플러스 묵시가 같이 섞여서 역사를 진행시키지요. 사람들한테는 눈에 보이는 것은 뭐냐 하면, 시간이니까 시간을 가지고 나와 결부하게 되면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걸 ‘역사’라고 합니다.

시간은 그냥 시간이지만, 내가 시간 속에 내 나름대로의 시간을 생각한다면 그건 뭐냐 하면, 역사가 돼요. 그러면 처음의 나가 누구냐 하면, 처음의 나가 아담입니다. 주님의 시간이 아담이 출현함으로 말미암아 아담에게 주님 위주의 시간이 아담과 이렇게 결합되면 아담 나름대로의 뭐가 생깁니까? 아담의 역사가 생기겠지요. 그게 바로 인류의 역사입니다. 인류의 역사.

인류의 역사가 뭐로 되어있는가 하면, 아담 플러스 하와로 되어있어요. 아담 +하와, 아담 플러스 하와로 되어있다 말이죠. 그런데 아담은 뭐냐 하면 죽음이에요. 흙이고. 하와는 뭡니까? 이름이 생명이고. 죽음과 생명이 결합된 체 역사를 만드는 겁니다. 이 생명은 여자의 후손의 이름으로 진행하고 이 죽음은 뱀의 후손의 이름으로 진행시키는 겁니다. 그러면 방금 이야기한 것을 간단하게 요약해보면 니가 인간의 역사는 무슨 일들이 사건들이 연결, 연결될 것인데 그 사건은 질적으로 둘 중에 하나다. 질적으로는 뭐냐 하면, 뱀의 후손을 드러내는 점과 여자의 후손을 드러내는 점이 한데모인 그런 사건, 사건들의 중첩, 그게 우리의 역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전에 이야기했지만 여러분, 장갑 한 짝만 삽니까? 장갑을 두 짝 사야 되겠습니까? 두 짝 사야 되지요. 항상 어떤 사건을 해석할 때는 좋은 사건이 아니에요. 사건이 있을 때는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요렇게 되고, 마귀의 입장에서는 이렇게 된다 하고, 마귀의 일과 하나님의 결합된 사건이 계속 항상 모든 사건은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인류의 역사는 무슨 사건이냐 하면, 말씀의 역사, 말씀의 사건, 말씀의 진행 전개과정, 이렇게 표현해도 괜찮은 겁니다.

성경해석의 원리가 이미 장착이 되어있습니다. 이제 모든 것은 풀린 거예요. 뭐냐 하면, 정과 반, 옳은 분과 거기에 반대되는 것, 둘 다 풀어내면 성경해석이 되는 겁니다. 옳은 것 반대. 인간이 보기에 옳은 것은 옳은 게 아닙니다. 인간보기에 반대는 나쁜 게 아니에요. 인간은 아예 반대에 들어가 버려요. 반대에 들어가 버리고 우리의 하나님 이름께서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일과 하나님이 보시기에 다른 일을 두 개를 이렇게 합니다. 그렇게 되면 나온 게 대표적인 것이 뭐냐 하면, 아벨이 되고 이쪽의 반대는 가인이 되겠지요.

그런데 아벨은 그냥 자살해 죽는 것이 아니고 가인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지요. 가인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잖아요. 그럼 이쪽이 뭐냐 하면, 죽임을 당할 때, 이게 생명이고 생명이라고 느껴지는 이것은 죽일 때 이게 뭐냐 하면, 저주가 되고 영원한 죽음이 되는 겁니다. 인류의 역사라 하는 것은 항상 생명과 저주, 생명과 심판, 같이 이것이 출현되도록 주께서 작용하는 겁니다.

창조라 하는 것은 터인데, 그 터 위에서 작용이 되어버리면 항상 그 터 위에 군데, 군데에 사건이 벌어지는데 그 사건은 출현이고 그 출현을 일으킨 어떤 작용 자가 계시고 그 작용 자는 아까 창세기4장에서 하나님의 이름이죠.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하나님께서 일을 일으키고 일으킨 현상은 뭐냐, 어떤 사건이 터지면 사건은 반드시 둘 중에 하나다 말이죠. 한 쪽은 죽음이고, 다른 한 쪽은 생명이고. 반드시 두 개다 포함된 그러한 대립되는 성질을 드러내면서 사건이 이루어지는 겁니다.

창세기5장에 보면, 내가 이 인간들이 육신이 됨으로 내가 하나님의 신이 그들과 함께 다시는 있지 않겠다고 했잖아요. 그리고 창세기5장에 보면, 아담의 후손들은 죽었더라, 죽었더라, 죽었더라, 해놓고 에녹에 와서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께서 그를 그냥 죽음을 보지 않고 에녹과 함께 동행을 했기 때문에 그냥 데려가지요.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는 생명과 사망, 그리고 축복과 저주, 그것이 같이 동반해서 같이 일어나는 사건들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제가 지난 시간에 했던 것을 그림으로 그리면 제가 토스트 이야기했지요. 식빵 이야기했습니다. 식빵이 이리 있는데, 식빵을 얇게 썰어보는 거예요. 단면들이 나오지요. 상상할 수 있겠지요. 관통하는 게 같이 A는 A끼리, B는 B끼리 같이 연결되겠지요. 요 끊어진 단면들, 하나의 사건이라 보시면 됩니다. 그 사건이 계속해서 이어져 나갈 때 예를 들면, 진도에 배 침몰한 사건이 날 때, 그 속에서 신자와 불신자가 따로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신자와 불신자로 사건을 통해서 구분되는 겁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목사가 쫓겨나왔다. 이것도 사건이잖아요. 또 애가 몸이 아프다. 이것도 사건이지요. 사건 속에서 계속 생명에 속한 사람과 여자의 후손에 속한 사람과 뱀의 후손에 속한 사람과 구분되도록 주께서 그렇게 작용을 해주시는 겁니다.

마태복음10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12제자를 택하시고 일을 나서시면서 하는 말씀이 뭐냐 하면, 너희들이 내 권능을 가지고 전도하게 될 때, 너희들의 평화를, 복음을 전할 때, 거부하거든 먼지를 떨어버려라, 그리고 하신 말씀이 11장에 들어가면 이 시대가 소돔과 고모라보다 더 심하게 심판받을 것이다, 라고 했지요. 그렇다면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 받은 이유가 뭐지요? 그들이 악하기 때문에 멸망했잖아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12제자를 보낸다는 것은 악을 선으로 바꾸는 게 아니고 오히려 악함을 더 노출시키는 그런 계기로서 12제자를 파견한 겁니다. 일종의 약을 올리는 거예요.

복음전해서 안 받아들이면 소돔과 고모라보다 더 심하게 저주받는다는 것을 비로소 노출시키는 거예요. 그걸 가지고 아까 제가 뭐라고 했는가 하면, 그걸 ‘확인’이라 해요. 확인. 그걸 확인하는 거예요. 확인 작업이 되겠지요. 12제자가 한 전도는 다른 게 아니고 확인 작업이었습니다. 죽었니? 살았니? 건드려보는 거예요. 전도 참 쉽지요? 욕심 안내면 돼요. 이건 “어린아이에게는 나타나시고 소위 슬기롭고 지혜로운 자에게는 감추시니 옳소이다. 참 잘하셨습니다. 하나님.” 예수님께서 이렇게 나오시는 거예요. “정말 하나님 아버지 일 잘하셨습니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은 아버지의 뜻입니다.” 그 뒤의 말이 뭐냐, “수고하고 무거운 짐은 다 개나 줘버려라.” 똥개한테나 다 줘버려라. 그러니까 니가 짊어질 이유가 없다. 나한테 책임을 묻습니까? 어떤 책임 추궁을 합니까? 건드려 보라는데 그냥. 죽었니? 살았니? 시체야, 살았니? 건드려보라는 거예요. 이게 뭐가 힘들어요?

자, 이 시간에 할 것은 터에서 뭐로 채워지느냐를 보여주는 겁니다. 이 터에서 채워지는데 있어서 인간은 주인공이 아닙니다. 인간은 조연이에요. 조연을 해야 됩니다. 그리고 인간과 더불어서 조연이 또 등장해요. 누구냐? 뱀, 사단이 등장합니다. 그러니까 이 창조가 인간위주가 아니지요. 감독은 따로 있고, 큐 사인 떨어져야 돼요. 메가폰(확성기) 딱 준비해가지고 “자, 자, 준비하시고. 조명 놓고, 큐 들어갑니다.” “자, 뱀, 사단!” “에덴 투” “자, 아담! 아니 좀 참았다가. 하와! 선악과 따먹어! 옳지. 따먹는 자세 좋고. 옳지, 그림 나오네. 남편 꼬셔야지. 좋았어.” 이리 되는 거예요. 따먹어야 돼요. 한 3일 참으면 4일째는 괜찮아요? 3일째 안 따먹을 거 버티면 4일째는 따먹을 마음이 싹 가시는 겁니까? 그런 겁니까?

백화점에 옷이 좋은 거 있는데 한 3일 봤으면 4일째는 안사고 싶어요? 아니면 더 사고 싶어요? “주여, 3일 참았습니다. 제 신앙으로서는 3일 참았으면 많이 참은 거니까 4일째 사더라도 사치했나니, 육신의 정욕을 찾나니 그런 잔소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3일이나 참았는데. 저도 양심이 있지 그냥 사지 않았습니다. 많이 견디고 했으니까 봐주세요.” 이리 하잖아요. 

다시 말해서 우리가 안사면 안산만큼 욕망이 증폭돼요. 계속 쌓이게 돼요. 쌓이게 되면 안에 스프링이 있어요. 스프링이 있어가지고 폭발적으로 사게 되어있습니다. 카드 확 긁어버립니다. 5일째 가다가는 내가 우울증 걸리겠어. 쏴버려야 돼요. 주께서 좋은 옷을 걸어놓은 것은 우리보고 사라고 걸어놓은 겁니다. 아이고, 오늘 또 위험한 말 나온다. 또. “아이고, 니가 참아 봤자지. 일주일 봐줬다고 착한 줄 알아?” 결국은 살 걸 가지고. 우리는 조연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거에요. 그 일에 대해서 감사해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이 죄를 짓고 싶어서 노리는 게 아니고 죄가 지으라고 다가오게 되어있어요. 우리 코앞에 들이 내미는 것은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감독의 큐 사인 없이는 그런 죄가 우리에게 오지 않습니다. 인간은 아무리 참아도 평생 동안 죄를 안 지을 수가 없게 되어있어요. 왜냐 하면, 죄를 지으라고 만든 몸이기 때문에. 이렇게 쉽게 이야기하고 이제부터는 상당히 난해한 예를 하겠습니다.

창세기2장에 나오는 이야기거든요. 뭐냐 하면, 흙으로 몸을 만드시고 몸에다가 생기를 불어넣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세요? 그 전에 뭐라고 했는가 하면, 하나님이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었다고 했어요. 창세기1장 27절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만들었잖아요. 창세기2장의 요 이야기를 우리가 모른다고 치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었다. 라고만 딱 들으면 이 몸 전체가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되어있지요. 그러면 이리되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었다고 하니까 이게 뭐냐 하면, 이 존재 전체, 이 덩어리 전체가 하나님의 형상이다, 이리 된다 말이죠. 1장을 보게 되면.

그런데 2장을 보니까 만든 작업 순서가 나오지요. 흙에서 몸이 되고 생기를 집어넣었다. 그러면 하나님의 형상은 존재도 아니고 덩어리도 아니고 뭐냐 하면, 우리에게 하나의 과정을 통해서 형상됨이 우러나오도록 사골이 우러나오듯이 우리가 사골이라면. 이 표현이 적당하네요. 제가 해도.

우리가 인간이라면 우리 인간의 삶에서 뭐가 나온다? 하나님의 형상이 우러나오도록 하는 거예요. 12시간 푹 골까요. 평생을 살면서 우러나오도록 하는 겁니다. 시누이하고 올케하고 싸우면서 형상이 튀어나오게 하고 아버지, 엄마 싸우면서 형상 우러나오게 되어있고 모든 매사가 형상이 우러나오도록 되어 있어요. 왜냐 하면, 형상대로 만들었기 때문에. 형상대로 만들었다고 하니까 우리가 2장을 모르니까 “감사합니다. 전체가 형상 맞지요? 잘 간수하겠습니다.” 자꾸 형상을 간수하려고 해요. 그게 바로 개혁주의 신학입니다.

개혁주의 신학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했기 때문에 “간수 똑바로 해! 그 형상을 빛내고 광택 내! 그러면 그게 성화과정이고 그게 거룩이고 그런 사람이 구원받는다.” 이게 개혁주의 신학입니다. 맞지요? “예수 믿고 새사람 되었으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본받아야지.” 이리하잖아요. 이게 개혁주의 신학이에요. 이게 칼빈신학이에요. 청교도신학이고. 청교도신학은 제가 부산강의에서 했기 때문에 음성강의 다 되어있어요. 보시면 청교도 조직신학 1시간20분만에 다 해버렸어요. 들어보셨습니까?

하나님께서 흙에서 몸, 생기지요. 방향표가 흙에서 몸, 몸에서 생기잖아요. 하나님의 형상은 어떻게 하는가 하면, 인간을 죄 짓게 만들어가지고 생기에서 몸으로 몸에서 흙으로 되돌아가면서 여기서 과정을 통해서 우러나오게 되는 겁니다. 이것은 내가 저항할 수 없어요. 하나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말릴 수가 없어요.  지금 인생사는 게 이 과정입니다. 생기에서 몸으로, 몸에서 흙으로 돌아가게 되는 겁니다.

생기라 하는 것은 하나님이 떠나버린 겁니다. 하나님이 떠나버리니까 뭐가 생겨요? 몸이 뭐가 돼요? 몸이 육신이 되어버려요. 창세기6장에 보면 뭡니까? 내가, 사람이 육신이 됨으로 뭐가 함께 있지 않겠다. 육신이 될 경우에는 하나님의 신이 함께 있지 않잖아요. 여기에 보세요. 처음에는 몸을 만들어놨는데 몸이 뭐로 변했습니까? 몸이 죄로 말미암아 몸이 아니고 육신으로 변한 거예요.

육신이 돼서 육신의 끝이 뭡니까? 결국 흙으로 났으니 흙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그러면 사람이 육신이라면 구원은 끝났네. 구원이 안 되겠네요. 아, 요거 참 어렵네요. 창조에서 창조를 무 창조로, 창조를 원형으로 돌리면서 숨겨져 있던 하나님의 형상이 나오게 되는데, 그 숨겨진 하나님의 형상이 나오는 그 모든 작업이 바로 무슨 작업이냐 하면, 구원 작업이 되는 겁니다.

구원 작업은 창조보다 더 월등해요. 구원 작업은 창조를 근거로 해서 배경으로 해서 구원의 추가적인 요소가 들어오면서 이 구원이 이루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창조의 완성은 뭐다? 구원이라는 말이 합당한 말이 맞아요. 지금 교회에서 하는 거와는 다르지만. 성경에서 창조의 완성이 구원이라는 말이 합당합니다. 또 다른 말로 하면, 구원하기 위해서 먼저 창조가 있어야 된다. 십자가를 위해서 창세기1장이 있어야 된다. 그 말도 합당한 말이에요.

하나님께서는 창조를 해놓고 이 창조를 구원으로 이끌기 위해서 창조를 무효로 돌리는 작업을 구약 내내 해주시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이걸 원형으로 돌릴 때, 그 돌리는 작용 자가 있어야 되지요. 작용하는 분이 있어야 되는데, 그게 뭐냐 하면 그게 언약이고 언약 이전에 있었던 것이 바로 약속입니다. ‘약속’이라 하는 것은 애초부터 주어진 것이고, 언약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약속은 이미 하나의 프로젝트고 프로젝트를 역사 속에서 현실화 시킬 때 그걸 ‘언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야, 12시에 만나자.” 이건 약속이고 만나기 위해서 커피숍에 나서는 요 모든 행위는 언약이고, 그 나설 때 하나님의 이름이 나서는 거예요.

하나님은 언약을 약속하셨고 자기 약속인 언약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역사 속에 실천해서 이 땅에 투입된 분이 여호와이름이고, 여호와이름이 다른 말로 하면 주가 되고, 그래서 예수님을 주 예수 그리스도. 홀로 언약을 다 이루어내신 홀로 약속을 다 이루어내셔서 창조를 구원으로 완성하신 분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고백, 그 고백을 하게 만드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은 뭐가 재료가 됩니까?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에 뭐가 돼요? 재료가 되고 도구가 되고 그게 하나의 자재가 되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구원받는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생기가 떠나고 육신이 되고 육신의 흙으로 돌아가면서 누가 첨부가 되는가, 여기에 하나님의 언약이 첨부되게 되면, 돌아가더라도 구원받아요. 이렇게 흙이 되더라도 구원받아요. 그렇게 나를 죽이시는 분이 하나님의 언약이신 여호와 하나님, 우리 주님께서 그렇게 죽이심을 고백할 때, 그 사람은 주 안에 있는 사람이고 구원받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조상이 선악과 따먹은 것에 대해서는 “우리가 실수했었습니다.” 라든지 “안 그래야지.” 그런 말 하지 마세요. 당연히 했어야 될 조치였습니다. 하나의 영화스토리 전개를 위해서 필요한 조치였던 것입니다. 뱀, 마귀, 이단, 적그리스도, 다 필요한 소품들이에요. 우리에게 필요한. 애들이 태권도로 떠드는 것도 소품이고. 이 세상 모든 것이 하나도 필요 없는 게 하나도 없어요. 다 협력하여 선을 이루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의 할 일은 간단하지요. 살 때까지 살다가 흙으로 돌아가게 되면 돼요. 왜냐 하면, 그렇게 하시는 분이 누구시다? 우리 주님이 하신다는 고백을 내뱉으면서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나님의 형상이 노출되고 계속 우러나오는 거예요. 우리가 사골이니까. 내가 우러나오는 게 아니고 주님께서 우려내시는데 주님이 십자가로 우려내시고 우리는 그 동반해서 우리의 죄가 우러나고. 죄와 십자가의 은혜가 늘 만남이 형상이란 작용 자에 의한 작업이라는 것을 드러내면서 우리는 성도로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이렇게 보니까 우리 인생은 창세기1장, 2장에서 떠난 적이 없지요. 3장에서 떠난 적이 없지요. 다시 말해서 우리는 말씀에서 떠난 적이 없습니다. 창세기  요한계시록 안에서 우리는 절대로 떠난 적이 없어요. 모든 것이 요 스케줄 안에서만 이루어져요. 멀리 갈 것도 없어요. 성경 안에서 놀면 됩니다. 성경 안에 일이 지금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되는 겁니다.

지금 머리카락이 허옇게 쉬었는데 저도 염색했는데 우리는 확인만 할 뿐이에요. 권사님도 확인하면서 “아이고, 흙 다 되었네.” 확인만 해주면 돼요. 확인. 성도의 삶은 확인 작업입니다. “주께서 이렇게 하셨습니다.” “내가 늙었다.” 하면 안 되고요. “주께서 늙게 하셨기 때문에 저는 늙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늙은 역할을 맡은 거예요.

창세기2장, 3장에 우리는 옛날이야기로 배웠지, 성경 볼 때에 “아이고, 창세기 옛날 구닥다리 이야기” 옛날이야기가 아니고 현재진행형이에요. 애가 태어났잖아요. 창세기2장의 저촉을 받습니다. 또 산부인과에서 애가 태어나면 또 창세기2장. 선악과, 우리가 선악과 따먹은 자로 태어난 거예요. 이미 우리 자식이 있으면 자녀가 이미 선악과 따먹었어요. 선악과 따먹었기 때문에 자기가 신이에요. 애들 치고 신이 아닌 애가 없어요. 모두가 자기가 절대자에요. 추사랑(추성훈의 딸)도 마찬가지고. 모든 애들이 자기밖에 몰라요.

치매 걸린 노인네들도 뭘 할 줄 아는가 하면, 요양사가 오게 되면 인물로 계급을 따지게 되어있어요. 치매 걸려도. 이쁜 요양사, 못난 요양사 구분할 줄 압니다. 저 애들요, 귀신같아요. 못난 선생님과 예쁜 선생님 구분할 줄 알아요. 주일학교 선생님들, 애들은 뭐로 구분하느냐, 못난 선생님과 예쁜 선생님으로 구분합니다. 성질 좀 나빠도 이쁘기만 하면 돼요. 왜 그러느냐, 뭘 따먹었어요?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기만 한, 칸트는 그걸 가지고 미적 공통성이라 했어요.

칸트의 판단력비판에 보면, 미적 공통성, 미적으로 인간은 동일하다. 미적으로 인간은 동일하기 때문에 인간은 이웃사랑을 해야 된다. 왜? 너나 나나 똑같은 공통점이 있기 때문에. 어떻게? 아름답게. 아름답게 행동하게 되면 누구도 감동한다? 이게 칸트의 윤리에 나옵니다. 이건 언제 부산강의에서 칸트 할 때 하겠지만. 인간은 먹음직도 보암직도 이게 선악과가 이렇게 탐스러워요. 여기에 대해서는 아담도 마찬가지고 하와도 마찬가지고 그 뒤에 아벨 태어나고, 가인 태어났으면 마찬가지 또 따먹고 또 따먹고 이쁜데 따먹지요. 이쁘니까 따먹는 거예요. 이쁘니까. 못생겼으면 따먹지도 않아요. 꽃이 못생긴 꽃은 보지도 않아요. 예쁜 꽃 같으면 카메라 들이대고 같이 찍고 난리 나잖아요.

사람이 자기가 서글퍼질 때 더욱더 이쁜 걸 찾게 돼있습니다. 이게 보충논리인데요. 항상 인간의 모든 행동은 미흡한 것을 보충하기 위해서 행동한다. 라캉의 철학입니다. 인간의 모든 행동은 행동을 주시하라, 원리가 있는데 그게 뭐냐 하면, 반듯이 빼먹은 것을 마저 채우는 식으로 행동하게 돼있어요. 그게 신학적으로 증명이 됐는데요. 그 말이 신학적으로 인간은 지금까지 교회사에서는 모든 신학은 요 한가지로 끝납니다. 뭐냐 하면 회복신학.  대표적인 것이 통일교에요. 통일교는 회복교회입니다. 통일교만 회복교회가 아니고 지방교회 워치만리도 회복교회. 그리고 감리교의 생태신학도 만물은 새롭게 창조되는 것이 아니고 회복된다고 이야기했어요. 회복 못해서 환장한 거예요.

인간이 이방인 적인 타고난 본성이 뭐냐 하면, 이미 자기가 “이 정도 했으면 좋겠습니다.”라는 자기 기준 자기가 정해서. 이건 조연이 마치 주인공이라. 조연이.  지가 전지현도 아니고 김 수현도 아닌 게 자기가 주인공도 아닌 게 자기가 주인공 노릇을 다해요. 해가지고 자기가 주님보고 지시해요. “주님이여, 이러시면 안 됩니다. 저 사람 복 줘야 되고요. 유병언도 암에 걸려 죽어야 되고요.” 자기가 현실에서 자기가 지휘감독 다해버려요. 그게 안 되잖아요. 안되니까 다른 걸로 보충하는 거예요. 다른 걸로. “에이, 유 병언 장남 잡히지도 않고. 에이 더러워서 술 한 잔 먹어야겠다.” 술 한 잔 먹는 이유가 뭐예요? 세상에 장남이 안 잡히니까 꿀떡! 화가 나가지고 때워요. 내가 미는 대통령 후보가 안됐을 때는 무엇으로 때워요? 술로 때우는 거예요. 오늘도 술 이야기하는데 참석 안하셨네요. 다 듣고 계실 거예요.

반드시 인간은 자기가 세상을 관장해야 되고 자기가 챙겨놓은 상상을 매일같이 아침에 눈만 뜨면 상상해요. “오늘은 요렇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고 굳혀 놓고 그게 안 되잖아요. 술로 먹던지 다른 걸로 취미생활 하던지 골프 치던지 하여간 스트레스 풀고 어느 정도 균형 맞혔다 싶으면 “회복되었네.” 하고 잠자리에 들잖아요. 이게 인간의 행동입니다. 아주 제대로 봤지요. 회복했을 때 그게 뭐냐 하면, 회복된 수준을 뭐라고 하느냐 ‘아름다움’이에요. 칸트에 의하면 아름다움. 성경으로 하면 먹음직, 보암직도 한. 그러니까 자기가 자신 보기에 ‘그래, 이만하면 내가 살만한 가치를 내가 보유하고 있다고, 이만하면 내 자신에 대해서 내가 점수 쳐줄 수 있어.’ 하고 서로 자기 절대화에 빠지면서 오늘도 평안히 잠자리에 드시는 시간. 그렇게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주님이 나와요? 어딜 나와요? 주님의 형상이 나온다고요? 우러나오지 않아요. 바로 우리 육신이 이런 거예요. 다시 말합니다. 아직도 선악과는 진행 중입니다. 우리는 먹음직, 보암직,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거리, 그것이 목표가 되고 마음대로 잘 안 되니까 회복을 외치면서 회복될만한 취미생활로 매우는 식으로 땜질하는 식으로 그런 식으로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보내는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새 언약의 영이 오게 되면, 그런 가운데서 우리에게 말합니다. 그게 바로 죄가 되면 그 죄가 있는 곳에 그 죄를 용서하시는 예수님의 용서와 사랑과 자비도 함께 일어나는 현장으로서 이 시장 터에서 우리를 지금도 활용하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확인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주의 증인의 모습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의 세계에서 벗어난 적이 없는데 우리는 성경 몇 장 읽고 다시 세상으로 눈 돌립니다. 주여, 이제는 세상에서 말씀을 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