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윤진

당신은 정답을 어떻게 알았습니까(박윤진)

아빠와 함께 2013. 1. 27. 21:45

"십자가지신 예수님 만이 그리스도이시다." 라는 정답이 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그 정답을 읽고 외워 그대로 말한다. 누군가 시비를 건다. 너는 그것을 어떻게 알았냐고... 보통 2가지 경우를 상정한다.

 

1. 성령의 가르침

2. 자신의 학습 능력

 

2번은 한 눈에 딱 봐도 '행위'라는 비난을 피할 수 없다. 그래서 1번을 정답으로 유도하곤 한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1번 보기가 전제하고 있는 "나"는 어떤 존재인가를 한 번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당신이 어떻게 정답을 알고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답하기를 성령이 알려 주어서 알고 있다고 하면, 그 때 나는 굳이 십자가지신 예수님의 죽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적어도 더 이상 십자가는 필요없다. 즉 하나님의 죽음에서 벗어나서 쉽게 오해하는 것처럼 '부활'의 단계로 넘어간 상태이다. 그래서 성도라는 이름으로 살아있는 나이다. 왜냐하면, 성령의 교육 상대방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 나이기 때문이다. 성령이 가르쳐 주지 않아서 그렇지 일단 성령께서 도와만 주시면 얼마든지 말씀을 깨닫고 복음 전파할 수 있는 내가 숨어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에 의해 책망을 받게 되는 [새로운 피조물]이란 하나님께서 인간 속에서 인간의 어떤 것을 개선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인간 긍정이 전혀 없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새롭다라는 말씀 속에는 [희생의 피]가 배어 있다. 새롭다라는 선언이 나올 수 밖에 없는 [죄]를 해결하는 증거가 내장되어 있다.

 

새로움은 새롭지 못함을 폭로하는 기능을 해야만 한다. 그래야 반드시 피로서만 새로운 피조물을 창조하신 분의 공로가 그대로 드러날 것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롭게 된 피조물의 가치만을 피와 단절시킨 채 지목하면 스스로 새롭게 될 수 없었던 나만 덩그러니 남는다. 그런 나를 긍정하기 시작한다. 성도라고 긍정하고, 십자가를 안다고 긍정하고, 성령과의 연합을 긍정하고, 복음을 기록된대로 잘 이야기 한다며 자신의 행위를 긍정한다. 과연 그것이 복음일까?

 

아니다! 복음은 따로 있다. 나를 통과한 것은 복음이 아니다. 복음을 기록된대로 그대로 읊조린다고 해도 그것은 죄이다! 성령이 나에게 가르쳐서 내가 그대로 전달해도 죄이다! 왜냐하면 복음과 성령은 나를 그렇게 긍정한 적이 단 한번도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 안의 비밀]이다.

 

예수 안에수 말씀은 나를 긍정하기는 커녕, 토막 살인한다. 해부한다. 왜일까? 이미 십자가에서 죽었다면 이제 부활의 영역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이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바라고 바라신 바가 아닐까? 히브리서의 말씀은 십자가 전의 죄인들에게만 해당하고 성도라고 불리우는 존재에게는 필요없기에 이제 구원받은 십사만 사천명은 삭제해도 좋은 말씀 아닐까?

 

(히브리서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이제 예수님과 한 몸된 마당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의 부활체와 한 몸되어 나와 말씀이 분리도 되지 않는 마당에 이 말씀은 너무 잔인하고 폭력적으로 말씀이 성도를 다루고 계신 것은 아닐까?

 

하나님의 말씀은 버려진 자를 감찰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말씀은 구원한 자, 성도를 감찰하신다. 그 감찰의 방법은 성도의 존재를 긍정하면서 학습하는 것이 아니다. 죽이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그대로 성도에 덧입히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원래 죽어있던 나를 되돌아보게 하고, 지금 살고 있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에 또한 덧입혀 있기 때문인 사실[만] 증거하게 한다.

 

십자가에서 죽었음으로만 생명이 덧입혀지기에 계속 자기 긍정을 고집하면서 이제는 성도라는 이름으로 살아있다고 주장하기에 말씀은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철저히 쪼개고 또 가른다. 그것이 성령이 성도를 다루는 방법이다. 그렇게 철저히 죽어 마땅한 나의 실체를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그대로 보여주신 것이다. 그것이 예수와 같은 길을 동행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예수 몸과 하나되어 갈기갈기 찢기는 것 말이다.

 

그 복음을 너는 어떻게 알았냐고? 그건 애시당초 말도 안되는 질문이었던 것이다. 십자가 칼을 들고 덤비고 있는 복음 앞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깨달음과 학습은 없다. 단 한 가지 사실만 피 속에서 터져 나온다. 그 고백을 듣고 싶은가? 이미 믿음의 선배들이 여러번 비명처럼 그 고백을 질렀다

 

이사야 : "화로다, 망하게 되었도다."

사도바울 : "나는 죄인 중의 괴수다."

베드로 : "주여 저를 떠나소서 저는 죄인입니다."

 

주님께서 싸늘하게 응답하셨다. "너는 나를 핍박하는 자다!!!"

 

죄인 중의 괴수가 복음 빙자해서 죄만 뿌릴 뿐이다. 그 죄를 주님께서 누군가에게 복음으로 듣도록 조치하신다면, 정말 기적이며, 기적이기에 내가 조정할 수 없는 일이다. 십자가 지신 분이 지금도 그렇게 그 죄인을 다루시겠다는데 내가 어쩌랴?

 

성령이 성도를 간섭하는 것은 책망의 형태를 띤다. 칭찬, 교육, 훈련등 인간 긍정은 조금도 없다. 계속 십자가로 십자가로 몰아부친다. 그래서 성령의 가르침은 십자가의 [다 이루었다]에 닿아 있다. 그래서 성령의 가르침은 십자가의 다 이루었다 속의 죄와 의와 심판으로 책망하는 것 외에는 없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성령께 부탁하신 모든 것이다.

 

요한복음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마귀가 먹이를 가장 많이 얻는 곳이 어딜까? 바로 십자가 밑이다. 십자가 이후 나라는 죄인의 괴수는 이미 신이 되어 버린다. 복음을 소유하고, 복음을 전파하고, 경건하여서 성령도 직접 상대한다. 누군가에게 모범이 되고, 교사가 되어서 하나님의 일꾼이 된다. 하나님의 백성을 자처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성도 개념을 인간이라면 누구나 상상할 수 있는 신인합일체이다. 인간의 자리가 분명히 배려되어 있는 개념이다. 펄펄 살아 뛴다. 결국 십자가는 과정이요, 통과의례가 되고 만다. 더 이상 머물러서는 안되는 곳이다. 이러한 모습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 지심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했던 바울이 전한 복음과 [다른 복음]이다.

 

또 시비가 있을 것이다. 아니,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읽고 계속 쓰라! 시비하고 욕하라! 제발 십자가에서 나오라고 간절히 바란다고 애걸하라! 이제 성도는 살았다고 부디 죽을 때까지 주장해 달라.

 

괜찮다. 이 모든 것을 주님께서 넉넉히 이기셨다. 이런 평안이 바로 세상이 알 수도 없다고 하신 바로 그 평안이다.

 

요한복음 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이미아 (IP:115.♡.204.137) 11-09-17 23:32 
괜찮다. 이 모든 것을 주님께서 넉넉히 이기셨다. 이런 평안이 바로 세상이 알 수도 없다고 하신 바로 그 평안이다.

요한복음 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아멘.
 구득영 (IP:203.♡.97.131) 11-09-17 23:35 
윤성숙님,
어떻게 글을 그렇게 정반대로 읽으시나요?
"십자가지신 예수님 만이그리스도이시다" 라는 질문이 필요없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하려면 반드시 먼저 질문을 던짐으로서 가능하지요.
저처럼 이런 글을 간절히 기다리는 놈도 있음을 함부로 여기시지 마시기 바랍니다.
 유상준 (IP:121.♡.254.22) 11-09-18 02:22 
성령이 오셔서 생각나게 하는 것은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한 것이다.
육의 한계(정체)를 절절이 알도록 매일 죽여 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성도의 삶이란
성도라고, 구원 받았다고, 자처 하는 순간 말씀이
육을 해부하여 숨어있는 죄를 찾아 보여 주시므로
매일 죽음을 맛보는 삶 인 것이다.

이러한 것만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몫 박혀나니"  이다.

지속되는 성도의 삶이란 없다.
"나는 매일 죽노라" 일 뿐.
 김대식 (IP:124.♡.86.13) 11-09-18 09:22 
까탈스러운 자아 vs 주의 주 되심

예수님만 있으면 된 것이다. 나머지는 배제다.
무시해 버리면 된다. 나도 목사도 눈에 보이는 것 모두 다 무시해버리면 된다.
실상은 이미 샛별처럼 떳다. 나머지는 모조리 다 허상일 뿐이다.
십자가만 밝히 보이는데 십자가 외의 것을 접붙일려고 한다.

십자가 믿는 나, 목사 시키는대로 하는 나. 등등
그러다가 주님의 질투에 된통 당하는 것이다.

이런 까탈스러운 주체는 주의 주 되심의 재료가 되기 위해
늘 소모품으로써 작용해야 한다.

내일 아궁이에 던지기 위해, 오늘 귀히 입히시듯이 ....

(마 6:30, 개역)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신직수 (IP:115.♡.195.217) 11-09-18 09:22 
아!! 화로다. 정녕 죽은 나였구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