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

땅의 제사화

아빠와 함께 2026. 6. 9. 11:10

하나님은 이 땅을 제사화시킬 요량입니다. 이 땅을 제사가 일어나는 공간으로 아주 작심하시고 하나님께서 차후에 계속해서 말씀을 주고 있었던 거예요. 제사가 뭐냐 하면, 죽어야 산다는 겁니다. 죽어야 산다.

 

이방 민족은 관계다. ‘나는 나를 믿는데, 난 내 행복을 믿는데 좀 행복에 방해되지 않도록 우리 좋은 관계를 이룹시다.’ 이게 이방 민족인데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의 요구가 있어요. “너, 나 제대로 믿어? 제대로 믿고 사냐는 말이야.” 이걸 요구하는 거예요.

‘여호와에게 돌아오라’는 말은, ‘여호와의 노동으로, 여호와의 행함으로 네게 먼저 주어졌으니, 하나님의 행함의 결과물이 먼저 주어져 너희가 되었으니, 너희는 그 결과물로서 마땅히 너희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그게 이미 확정된 너의 소속’이라는 거예요.
‘소속’과 ‘관계’의 계열 차이를 계속해서 하나님께서는 날카롭게 분명하게 둘로 나누려고 하는 거예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에요. 야고보는 옛날 이스라엘의 약속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어떻게 완성되었는지를 전제로 해서 이 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렇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구약의 율법에 의하면, 제사법에 의하면 이게 제사입니다.
제사의 특징은 뭐냐? 아벨의 제사처럼 죽었던 분의 그 거룩한 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답게 계속 천국까지 이어가게 하신다는 그 원칙입니다. 그렇다면 그 예수님의 죽으심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 야고보는 2장 10절부터 계속 이야기합니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이게 뭐냐? 소위 ‘하나님 믿는다, 난 이렇게 행한다’에 대해 율법을 가지고 끝까지 추궁하고 또 추궁해요. 끝까지 추궁하고 또 추궁합니다. 그러면 남는 것은, ‘없는 믿음’이 나오는 게 아니고 뭐가 나오느냐 하면, ‘죽은 믿음’이 나와요. 죽은 믿음이 나올 때 죽었다가 살아나신 예수님의 십자가 효과가 어떻게 오늘날, 이스라엘은 멸망해 버렸는데 멸망해 버린 그 가운데서 어떻게 주님께서 흩어진 열두 지파라는 완료된, 완성된 진짜 이스라엘을 탄생시킬 수 있었는가를 지금 설명하고 있는 거예요.

 

내가 죽은 믿음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말씀대로 실천해서 온전한 믿음으로 바꿔야 한다는 이 발상, 이 발상이 오늘 본문을 보면서 가장 오해하는 해석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우리 인간들 속에 결여돼 있는, 빠져 있는 그 빈자리에 지옥의 실재성으로 마저 채우는 일을 하시는 거예요. “너 지금 귀신의 앞잡이야.” 이런 뜻이에요. 이 인간 세계에 왔을 때 주님께서 무슨 일을 행했느냐, 그걸 놓치면 안 되죠.

주께서 어떻게 일하느냐 하면, 없는 사람을 가지고 가진 자의 교만을 드러내고, 자식 없는 자를 통해 있는 자의 교만을 드러내고, 권력 없는 자를 들어 써서 있는 자의 교만을 들춰서 교만한 자 악한 자를 땅에서 내치는 그 작업을 하는데 이 땅, 제사화 되어 있는 이 땅에서 한결같이 그 작업을 하는 겁니다.

 

지금 우리의 믿음은 죽은 믿음이에요. 죽은 믿음 가지고 이 말씀 지킨다고요? 이건 터무니없는 위선 중의 위선입니다. 우리 믿음이 죽었어요. 그러면 죽었으니까 이것을 살려야 될 게 아니겠습니까? 살리는 방법은 백 프로 누구 소관이냐 하면, 우리 소관이 아니에요. 예수님 소관입니다. 그것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 body를 가지고, 그 몸체를 가지고 이 땅에 오시는 거예요.

“내 body, 내 몸은 내가 아닙니다.” “그러면 지금 넌 지금 왜 슬퍼하고, 세례도 주고 그렇게 하느냐?” ‘내 몸에는 소리가 있는데 그 소리가 내 몸을 지금 앞당겨 사용하고 있습니다’라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세례 요한에게는 뭐가 없느냐? 자기 믿음이 없어요. 자기 믿음이 없다는 말보다, 주님의 믿음이 내 믿음을 밀어내 버렸어요. 살아있는 믿음이 죽어 있는 내 믿음을, 나밖에 없는 내 믿음을 밀어냈다고요. 주님의 사랑이 지독한 나의 사랑을 밀어버렸어요.

 

오늘 야고보서 본문에서 말씀 가지고 뭐합니까?
끝까지, 나만 사랑해서 나오는 행함에 대해서 끝까지, 죽을 때까지 추궁할 거예요, 그 말씀이. 그게 침노에요.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 11:12). 예수님과 연결되어 있는, 말씀을 전하는 세례요한이 이 시대에 말씀으로 “다 엉터리야, 다 거짓이야, 다 가짜야!”라고 계속해서 말씀을 가지고 침노하는 것.

“너 누구냐?” “나, 하나님의 잃어버린 양이야. 내 이름은 잃어버림이야. 왜? 나는 내 맘대로 행했거든.” 내 맘대로 내 행복을 위해서 내 사랑을 위해서 살았다는 그것이 잃어버린 거예요. “그런데 그 잃어버렸다는 그것을 어떻게 알았어?” “찾아주니까 알았지.” 주님이 찾아주니까 ‘나는 잃어버린 상태에 있었구나.’ 잃어버렸다는 것은, 뭐가 없다? 소속이 없었던 거예요. 

 

인간 대 인간의 관계가 아니고 소속이에요. ‘너 지금 남하고 어떤 관계야? 너 어느 영역에서 놀고 있어?’ 우리는 지금 그걸 생각하고 있는데 주님께서는 “너 소속이 어디야?”라고 묻습니다. ‘내가 있다’로 형성된 관계에 소속이냐, 아니면 ‘내가 없다’로 만들어주신 그 세계 소속이냐는 말이지요. 내가 없는데 모든 주어지는 것들, 먹을 것, 입을 것, 하나님의 의, 용서 그 모든 것은 소속이라는 이유때문에 그냥 주신 거예요. 주님의 ‘행함!’입니다. 주님의 행함이니까 그 행함의 원천인 믿음은 어디서 나왔어요?
나의 믿음 아니지요. 누구의 믿음입니까? 주님의 믿음이고 주님의 믿음이 성령으로 오니까 우리는 이제는 나의 증인이 아니고 누구의 증인이다? 예수님의 증인, 그게 주께서 일하심의 마감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결과물이고.

하나님 아버지, 참 우리 어떻게 하루하루 삽니까? 정신머리를 어디에 팔고 사는지. 나만 편하면 되고, 나만 건강하면 되고, 나만 넉넉하면 되고, 선거 내 뜻대로 되면 되고, 이 모든 일어나는 일을 통해서 우리가 잃어버렸던 자고, 우리가 마귀에 소속된 자요, 우리가 살아서 이름이 있으니 실은 죽은 자라는 것이, 새삼스럽게 밝혀지고 발각되는 즐거움이 있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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