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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안의 창세기

아빠와 함께 2026. 6. 7. 10:13

그리스도 안의 창세기

Ⅰ 서론

현대과학과 철학과 성경은 다음의 차이가 난다.

과학: 장(場) → 점(입자) → 인간 → 세계

철학: 의미의 장(場) 있음 ← 언어 ← 형상 ← 인간 ← 세계 있음
여기서 철학은 현대 과학의 성과를 바탕으로 눈에 보이는 세계에서 출발하여 의미를 찾는 식이다.

반면에 성경의 세계는 ‘없음’에서 시작하기에 결국 돌아올 의미도 없다.
성경: 없음 ← 말씀(계시) ← 하나님 형상 ← 창조 세계 ← 없음

(1) 과학으로 보는 창조 세계

공간이 있는 게 아니라 장(場)이 있다. 이것이 공간 개념을 대신한다. 이 장은 비어 있는 장이 아니다. 힉스장(Higgs field)은 우주 전체에 퍼져 있다고 생각되는, 보이지 않는 물리적 장(場)이다. 질량은 여기서 생겨난다. 입자는 여기서 생겨난다. 우주 전체가 보이지 않는 “끈적한 공간”으로 채워져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어떤 입자는 이 장과 강하게 상호작용하여 움직임이 둔해지고, 그 결과 큰 질량을 갖게 된다.
반대로 어떤 입자는 거의 영향을 받지 않아 질량이 매우 작거나 없다. 예를 들면 광자(빛 입자)는 힉스장과 거의 상호작용하지 않으므로 질량이 없다. 반면에 전자나 쿼크 같은 입자는 힉스장과 상호작용을 해서 질량을 가진다. 이 입자들에 의해서 인간과 세계가 형성되었다.

(2) 철학에서 보는 창조 세계

 물질에서 형상으로
물질이 형상을 지니는 것에 주목한다. 에너지(=힘) 파동이 춤을 추고 물결치는 공간에서 임의로 형상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주형의 능동적인 형상은 수동적인 물질에다 자신의 형태를 새겨 넣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은 상호작용으로 형상이 생긴다. 질료에 형상이 부여되었던 것이 아니라 주형과 재료 형상 사이에 변조가 생긴다. 점토는 벽돌이 되지만 주형은 어떤 작용이 끝난 후에도 존속된다. 형태(주형)는 물리적 틀과 재료의 힘이 함께 변조되는 방식, 즉 공통의 체계, 연합 환경이 만들어진다. 형태와 물질은 물리적 힘의 평면에서 연속적으로 정보/형태화를 교환하면서 더불어 개체화-벽돌-의 작용을 현실화한다.

이는 결정체의 싹이 과포화된 용액 및 결정의 형성으로부터 ‘형태가 만들어짐’을 일으키는 것과 마찬가지다. 수동적인 질료와 외적인 힘 간의 불모적인 만남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주형과 재료의 공동작용이, 다시 말해 힘의 평면에서 실효화된 변조가 존재한다.

이 공통의 영역은 힘들이 교환되는 영역, 식별 불가능하고 분자적인 근방역(近傍域)의 영역에 해당한다. 이런 의미에서 주형, 변조, 기술, 예술, 사회도 자연적 개체화와 마찬가지로 ‘형태의 만들어짐’에 속한다. 이 ‘형태의 만들어짐’이 문제로 삼는 것은 질료와 형상이 아니라 힘과 재료다.

예를 들면 망막은 저마다 이차원 이미지로 덮여 있지만 두 개의 이미지는 시차로 인해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누구나 먼저 한쪽을 감고 그다음에 반대쪽 눈을 감음으로써 이를 관찰할 수 있다. 즉 두 망막 사이 두 이미지의 비정합성을 해소할 수 있는 2차원의 광학 이미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3차원에서 해소된다. 여기서 시각의 객관적 구조화가 이루어진다. 이처럼 자연은 스스로 문제를 산출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형태와 개체를 형성한다.

여기에 인간의 뇌도 합류한다. 인간의 뇌는 새로운 3차원성의 정합성을 띠기 위한 조건으로서 이 자연적 문제 제기에 호응한다. 부피, 깊이에 대한 지각, 3차원 시각은 2차원적인 대립의 해소로서 이처럼 새로운 차원, 즉 3차원성을 실증적으로 창조할 때 생겨나는데, 앞서 두 망막 이미지는 이 3차원성에 포함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어 다른 변화와 문제 제기의 원인이 된다.

해(解)는 최초의 모순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최초의 문제 속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던 새로운 차원을 창조하는 데서 생겨난다. 이것이 바로 자연에서 스스로 일어나는 창조 과정이다.

엄밀하게 말해서 ‘종합’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종합은 실효화되지 않으며, 결코 완수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관계는 오히려 항들의 특징적인 비대칭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우월한 종합이 이루어지지 않는 까닭은 애초에 비대칭이 해소될 수 없기 때문이다. 두 망막 이미지의 양립 불가능성은 여전히 존속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해결책을 제시하기 위해 요구되고 있기 때문이다. 불균등화는 차이를 보존한다. 문제가 되는 것은 모순의 해소가 아니다. 각각 이질성을 띠고 유지한다. 여전히 긴장 상태에 놓여 있으며 또다시 문제 제기를 위해 대기한 상태에 놓인다.

개체는 전(前)개체적 환경과 개체화의 출현 간의 불균등화를 실행하는 어떤 작용으로서 체계의 불균등화를 점진적으로 해소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결정체가 물질을 동화시키는 한에서 우리는 결정체의 참된 내면성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 이 물질은 결정체가 펼쳐나가는 환경의 일부로, 원래는 무정형이지만 풍부한 잠재성을 지니고 있어 질서가 부여한 특수한 배치에 따라 결정체를 점진적으로 구조화한다. 결정핵은 준안정적인 용액에 해당하는 불균등성을 해소하고 반복을 통해 결정화를 유도한다. 결정체 구조는 결정핵이 도입되는 지점으로부터 방사상으로 펼쳐지면서 점점 퍼져 나간다. 결정 개체는 이런 방식으로 형성된다.

이처럼 변환은 창조와 분화를 함축한다. 이질적인 불균등화를 통한 구조화는 장을 완전히 재편하기에 이르는데, 이러한 재편은 분화를 일으키는 새로운 재구조화의 출발점 구실을 한다. 불균등화는 다음과 같은 유형의 변환적 구조화를 특징짓는다. 즉 그것은 불균등한 두 실재, 여기서는 핵과 결정체, 전개체적 환경과 변형의 담지자인 독특성 사이에서 문제적 긴장을 형성하며, 새로운 차원의 출현과 결정 개체의 형성은 이러한 문제적 긴장을 해소한다. 따라서 개체화는 동시에 대립의 해소이자 양립 불가능성의 발견이며, 새로운 형태의 창조로 이해된다.

무정형의 환경 속에서 어떤 구성된 개체도 출현할 수 없으며, 오히려 존재하는 것은 항상 ‘형태의 만들어짐’, 즉 우연의 방식, 촉발하는 사건의 방식으로 작용하는 변조, 다시 말해 환경과 핵의 불균등화에 의한 변조이기 때문이다. 개체는 개체의 결과만이 아니라 개체화의 환경이기도 하다.

따라서 개체는 결코 실재성의 단일한 질서와 관련되는 것이 아니라, 항상 변환적이다. 개체는 상이한 차원들 사이의 불균등화를 함축하고 있으며, 어떤 문제적인 것의 해소, 불균등한 것들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의 해소를 통해 산출된다. 개체는 응답으로 나타나며, 역동적인 동시에 발생적인 것으로 드러난다. 실제로 단일한 개체는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라는 것은 개체화의 다수적 과정들 뿐이다. 게다가 개체는 어떤 단일성이나 통일성도 함축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개체가 이질적인 상들의 이질성을 요구한다는 데 있으며 개체는 이 이질성으로부터 분화를 통해 생겨난다.

일자(一者)는 감산(빼기)을 통해서, 인간들이 전체성으로부터 뽑아낸 국지적·가변적 중심이라는 형식하에서 항상 n-1에서 만들어진다.

“우리는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일을 실제로 일어나게 만드는 과정에 어쩔 수 없이 관여하고 있다”라는 말이다.

 기호(=문자)

인과성(원인과 결과)이라는 논리적 관계가 신호화라는 물리적 과정을 따라 파악된다. 정보/형태화가 바로 그것이다.

인간은 비대칭적인 요소들을 갖추고 불균등한 크기의 질서들을 거느리고 있는 어떤 체계를 ‘신호’라 부른다. 그리고 그런 체계 안에서 발생하는 것, 간격 안에서 섬광처럼 번득이는 것, 불균등한 것들 사이에서 성립하는 어떤 소통 같은 것을 ‘기호’라 부른다.

문제의 해소로서 섬광처럼 번득이는 기호는 그것이 보여주는 어떤 실재성, 선재(先在)하는 어떤 실제성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적인 방식으로 어떤 대립을 불균등하게 해소한다. 여기서 불균등한 생성은 모방적 유사성을 결정적으로 대체한다. 기호라는 용어는 정보/형태화 이론을 대체하며, 기호학은 이처럼 신호를 어떤 현상의 개별화를 촉발하는 준안정적 평형에 해당하는 불균등화로, 섬광처럼 번득이는 기호로 이해함으로써 형성된 것이다.

이질적인 계열들 사이에 소통이 일어나면, 이로부터 체계 안에는 온갖 종류의 구절들이 따라 나오게 된다. 그 가장자리 사이에서 어떤 일이 ‘일어난다.’ 번개나 천둥처럼 사건들이 터져 나오고 현상들이 번득인다. 이로써 비대칭적인 것이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양자물리학에서 말하는 양자 제노 효과(Quantum Zeno Effect)가 그 예다. 어떤 양자 상태를 아주 짧은 간격으로 계속 관측하면, 그 상태의 변화가 억제되는 현상을 말합니다. “계속 들여다보면 변화가 멈춘다”라는 양자역학적 현상이다.

분기는 장의 예측 불가능한 재구조화를 표현하게 되는데, 이는 일련의 새로운 재구조화를 위한 출발점 구실을 한다. 이러한 이유에서 들뢰즈가 말하는 시간의 모델은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을 참조하게 되었다. 이 정원에서 결정화의 지점에 해당하는 각각의 분기, 각각의 독특성은 새로운 분화의 선들을 촉발한다. 이처럼 생물학적 분화는 분화를 일으키는 현실화를 통해 이루어지며 발산하는 계열, 분화의 다발, 분화들의 분화 형태를 띤다.

기호는 문제를 제기한다. 이제 이 표현은 엄밀한 의미에서 이해될 수 있다. 문제를 제기한다는 것은 수동적 종합을 산출하도록 감성을 강요하는 미분적 강도들의 문제 제기적 장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이 문제 제기적 장에서 기호는 어두운 전조, 계속되는 불일치의 뒤를 이어 나타난다. 계속되는 불일치는 생성을 구성하는 우주론적 원리의 수준에서 비대칭, 압력으로 받아들여지며, 또한 감성적 변용의 수렴이 아니라 그것의 발산 및 이질성을 보증해 주는 구성적 차이로 이해된다. 따라서 감성적인 것은 이질성으로서 비대칭적 종합의 대상이 된다. 또한 불균등한 계열 간의 소통을 보증해 주는 감성의 특권은, 감각하게 만드는 분화적 차이소(差異素)를 매개로 감성과 실재성이라는 이질적 계열들을 관계 맺게 하는 데서 성립한다.

인간은 기호의 입력하에서 무언가를 배우게 되는데 이는 기호를 방출하는 대상과 함께 체계를 형성하는 미분(微分)적 감성들에 의해 이념이 경험적 만남을 통해 산출되기 때문이다. 아담이 이름을 지은 것은 분류했을 뿐이지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른다(창 2:19).

이 정지상태에서 기호, 곧 의미 있는 언어가 생겨난다.

 의미론

의미는 위치에 따라 주어진다는 것이다. 문제가 되는 것이 발화행위·꿈·무의식의 생산·사회적 갈등·친족관계·신화 등과 구별되는 다른 요소들이라 하더라도, 이 요소들은 실재 속에서 주어진 어떠한 경험적 지시 대상과도 무관하며, 논리적 의미작용이나 주어진 본질을 가리키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이 요소들이 지닌 의미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의미는 이 요소들이 체계의 다른 요소들에 대해 점유하는 위치, 즉 자리에서 생겨나는 효과다. 이 요소들은 대립적이라고 부르는 상호적인 위치를 통해서만 분화된다. 다시 말해 어떤 항이 지닌 가치는 동일한 열의 다른 항들과의 차이를 통해 주어진다. 의미는 복수의 요소들 사이의 자리바꿈이나 결합을 통해 외부 작용의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이 요소들 자체는 의미작용적이지 않으며 서로 간의 위치를 규정해 주는 규칙들의 유희 속에서만 어떤 의미를 받아들인다. 이 기호는 사람들의 남성과 여성에도 적용된다.

어떻게 의미가 차이의 두 계기를 따라 실제로 생산되는가? 먼저 의미는 현실화되면서 생성된다. 이는 차이의 첫 번째 측면인 현실화에 부합한다. 다음으로 이러한 의미의 현실화 혹은 생산은 의미의 잠재적 구조를 가리키는데, 이 잠재적 구조는 차이의 두 번째 측면에 부합한다. 현실적이면서 잠재적이라는 차이의 이원성은 의미의 생산을 표면 효과로 설명한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상징계라는 세 번째 규준이다. 상징계는 변별적인 것과 독특한 것의 유희로서 보편적인 것과 개별적인 것, 일반적인 것과 특수한 것, 지성적인 것과 감성적인 것 사이의 추상적 대립을 대체하고 그 자격을 박탈시킨다.

그 자체로는 어떠한 규정된 가치를 지닌 요소들이 변별적 관계에 따라 현실화되면서 상호적으로 규정될 때, 이 관계는 상징적이다. 무의미가 떠돌아다니면서 사물과 사물, 대상과 대상을 이어주면서 의미가 발생하는 것이다.

의미는 주체의 활동으로 산출되는 것이 아니다. 역으로 상징적 평면은 의미를 의식적 활동에서 떼어 놓으며, 의식에 대해서는 하위주체적인 무의식적인 것을 의미의 생산자로 제시한다. 의식은 무의식의 공격에 의해서 빈칸을 마련하고 있고, 기호(언어)는 이 빈칸을 순환하게 하면서 전(前)개체적·비인격적 독특성들을 방출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차이가 나타나는데 이 차이에서 의미가 방출, 발생하고 경험을 대신한다. 차이는 구조를 발생의 질서로 이해한다. 이 질서에서 이념이 나온다. ‘정신적 질서’다. 각가지 다양한 이념들이 수시로 쏟아져 나온다. 그래서 세상은 전부 다양체로 구성되어 있다. 국가체제에 포함되지 않는 다수의 연결이 시공간에 역동성을 부여한다.

의미는 더 이상 초월적 난입으로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비(非)의미작용적 요소들의 결합에서 유래하는 구조의 순수 효과, 표면 효과가 된다. 따라서 인간은 의미를 선재(先在)하는 것으로 간주하지 않으면서도 의미의 생산을 이처럼 설명할 수 있게 된다. 여기서 초월론적 사상, 곧 종교가 나온다.

따라서 구조는 주체라는 습관으로 수축된 자아를 만들고 남성과 여성이라는 인식도 예외가 아니다. 남성이나 여성도 기호에 불과한 의미를 나타낸다.


 남성과 여성

여성은 본질을 갖고 있지 않는다. 곧 여성은 없다. 이 여성에 의해 태어난 모든 이(여성으로 출발하는 존재를 가진 자)는 다 죽는다. 여성 이야기는 모조리 허구(fiction)이다. 잡히는 진실(fact)은 실재 안으로 소멸될 것들이다.

여성성은 하나의 기이한 수수께끼이자 당혹스러운 스캔들로 남아 있다. 여성은 허구의 구조를 담고 있는 존재다. 여성은 냉혹한 진실이나 진정성이 있는 본질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사라지는 실재에 가깝다. 그리고 사라지는 실재에 대해서는 어떤 확정된 팩트로 있을 수 없다. 팩트 체크가 좌절되는 한계 지점이다.

여자가 절대적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남자의 중계적인 역할이 필요하다. 여성성은 더는 남성이 필요 없다. 하지만 여성 그 자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남성의 중재가 필요하다.





언어가 통하는 세계, 곧 의미의 세계라는 구조 안에서 여성은 남성의 기준 없이 정의되기 어렵다. 하지만 남성의 요소가 여성의 요소에 들어온다는 말이 아니다. 여성에게 있는 남성은 필연성이 아니다. 하지만 예외적 가능성이 연결된다. 남성이 세상 의미를 독점하고 중심점으로 행세하는 조건에서는 그러하다.

남성이 의미의 전체를 대표한다고 주장한다면 여성은 비(非)전체에 해당한다. 그런 남성의 조건에 들어오지 않는다. 하지만 남성이 의미를 잃을 때, 비로소 여성의 본래성이 드러난다.

여자가 남자의 증상이라면 남자는 여자의 재난이다.

(2) 성경적 의미

인간은 모두 죽는다. 아니 살해된다. 천사에 의해서(마 13:38-42) 죽는다. 마치 유월절 그 날밤처럼(출 12:30 “이는 그 나라에 사망치 아니한 집이 하나도 없었음이었더라”). 모든 자들이 없어지고 그들이 죽은 빈자리에 유월절의 피가 차지한다. 인간은 땅에서 살 자격이 애초부터 없다. 땅은 이 인간 살해 작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땅은 없어질 자를 없애는 기능으로 작용해 왔다. “가라사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네가 밭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창 4:10-12).”

그렇다면 이 세상의 과학과 철학은 ‘있음’에 대한 ‘없음’의 저항인가, 아니면 ‘없음’에 대한 ‘있음’의 저항인가? 어떻게 ‘내가 여기 있음’이라는 전제를 빼고서 하나님의 창조를 이해할 수 있느냐가 관권이다. ‘내가 여기 있다’라는 의식으로 인해 하나님의 모든 창조와 활동을 왜곡시켜 다른 의미를 내뱉기 때문이다.

‘의미’ 곧 ‘뜻’은 이미 주기도문으로 결정 났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10).”

Ⅱ 본론

(줄거리)

창조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 말씀이고 온천지가 말씀의 기초위에 자리 잡고 있다면 하나님과 피조물의 만남의 자리도 말씀일 수밖에 없다.

“보기에 좋았다.”라고 하는 선언은 피조물이 말씀대로 위치해 있을 경우에 국한한다. 이처럼 성경 처음부터 말씀에 대한 부각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성립”은 말씀 이외에 다른 것으로 대치될 수 없음을 선언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통해 이 세상을 지배하고 통치케 하는 그 모든 행사도 하나님의 일방적인 의중에서 나온 것이기에(1:26) 하나님의 형상대로 된 피조물인 인간이 ‘좋았더라’는 평가를 받으려면 본래 하나님의 의중에 일치된 상태를 유지해야만 한다. (“그대로 되니라” 1:30)

복, 거룩, 안식은 하나님 보시기에 그 피조물이 만족스러운 상태에 놓여있을 때를 표현하는 방식이다. 만약 현 세상에 혼란과 무질서가 개입된다면 이는 필시 최초의 창조된 모습은 아닐 것이다. 그 원인은 인간이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말씀을 위배했기 때문이다.

처음 세상은 인간이 말씀을 지키는 한 행복이 극치에 이르는 환경이었고 다른 피조물과의 관계, 부부 사이도 정상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말씀에 대한 위배로 말미암아 저주와 심판과 분열과 갈등과 불안과 죽음이 초래된 것이다.

여기서 또다시 하나님 말씀이 갖는 의의가 부정적 측면에서 재확인된다. 말씀에 대한 거절은 반 창조로 내려가는데 반(反) 창조란 소멸이나 무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창조 이전의 무질서와 혼돈으로 전환되는 것을 말한다(1:2/2:7/3:19).

창조 사역에서 말씀의 역할은 세계를 무질서에서 질서로 전환하고(1일, 2일, 3일의 사역) 비어 있는 질서를 채우시고(4일, 5일, 6일의 사역) 그 채워진 존재에 축복하사 팽창하고 확산되도록 하셨다. 그런데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이 체제가 와해되고 다시 무질서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여기에 말씀을 극복하고 등장한 것이 있으니, 그것이 여호와께서 주신 약속이다(3:15).

여자의 후손이 나타나 말씀에 도전하는 세력을 와해시키고 다시는 하나님의 창조 정신과 충돌되는 것이 없게 하신다. 그 후로 세계 역사는 여자의 후손이 등장한다는 약속이 어떻게 이어지며 어떻게 성취되는가에 초점을 맞추어 진행된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그런 쪽으로 유도해 가신다. 또한 약속에 기대를 거는 자들도 하나님의 이러한 역사관에 보조를 맞추어야 한다. 이제부터 인류가 활동하고 쉬는 터전인 땅은 그 모든 변화가 약속을 위한 역사적 배경과 공간으로서만 의미가 주어진다.

인간들이 만나고 투쟁하고, 갈등을 일으키고 몸부림치고 애쓰고 죽고 죽이는 사건 하나하나는 결코 약속의 내용과 무관한 것이 아니다. 창세기 4장에 나타난 가인이 아우를 죽이는 살인사건의 경우를 봐도 그러하다.

가인의 살인 이유는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아벨의 제사를 받았고 자기의 제사는 거절한 데 있다. 하나님의 선별에 대한 가인의 불만 표시였다. 그러나 땅은 이러한 가인의 행위를 수용할 수 없어 하나님께 호소한다. 말씀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가인을 그 땅에서 추방하고 아벨을 대신하여 셋을 낳게 하신다. 이것이 바로 여자의 후손이 주어지는 방식이다. 즉 하나님이 생각한 여자의 후손만이 대신할 가치가 있다. 아벨을 대신한다는 말은 아벨의 죽음에 하나님께서 의의를 갖고 계시다는 증거이다. 역으로 가인의 보호는 아벨의 죽음이 어떠한 사고방식을 지닌 자로부터 당한 피해인가를 증명하기 위한 시도이다.

여기에 약속의 실체가 보인다. 하나님이 생각한 약속의 후손은 오직 하나님이 선택한 자에 한하고 그분은 거기에 반기를 드는 자로부터 희생되는 경험을 갖게 될 것이다. 셋의 가문이 무사히 이어지는 것을 보며 비로소 사람들은 약속의 하나님이신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게 된다(4:26).

약속의 계보는 또한 인간들이 고생스럽게 저주받은 땅에서 수고하는 어려움도 해결해 주는데(5:29) 노아의 등장이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땅의 질서 회복은 인간들의 범죄로부터 땅을 지키는 데 있었다.

여호와 하나님은 노아를 통해 언약을 세우는데(6:18) 그 언약으로 말미암아 땅이 회생한다. 언약은 8:21-22에 나와 있는 것처럼 노아의 의(義)를 담보로 하여(6:9) 그가 드리는 제사를 흠향하시는 방식을 두고 말하는데, 이는 인간들이 생각하는 것이 어려서부터 항상 악하기에 이 언약이 동원될 수밖에 없다. 노아도 언약 안에서만 구원이 가능한 이유는 그와 그의 가족도 비완전하기 때문이다(9:20-27).

이처럼 하나님은 노아 언약(노아가 아님)을 땅의 중보자로 삼아 땅의 질서를 회복하셨다. 노아의 선택도 또한 하나님의 은혜에 기인한 것이다(6:8). 노아가 드린 번제란 정결한 것을 골라 드림으로서(8:20) 불결한 짐승(7:2)의 구원도 가능케 되었다는 사상이 들어있다.

이로써 땅은 언약에 의한 언약의 땅이 되었고, 그 이후 땅 위에서 생존하고 번식하고 복을 받으면서(9:1) 살게 된 모든 피조물은 노아언약의 은혜를 바탕으로 한 땅에 사는 것이 되기 때문에 만약 그 은혜에 배치되는 생각을 갖게 되면 땅의 이 원리 때문에 저주받게 되어 있다.

노아의 가정에서 일어난 일에서 셈은 노아의 하체를 덮어줌으로 말미암아 은혜의 원리를 바로 이해한 자로 인정받는다. 노아는 셈에게 그런 행동을 하게 한 하나님을 찬양한다(9:26). 그뿐 아니라 야벳을 창대케 하여 셈의 장막에 들게 하고, 함은 셈으로부터 지배를 받게 하여 땅의 질서를 유지케 하신다.

가나안 족속에 대한 셈 족속의 정복에 대한 정당성은 이로써 부여된 것이다. 인간은 자신들의 힘의 집결에 의하여 땅 위에서 팽창과 복의 창출을 시도해 보지만 은혜의 땅에서 그 땅의 속성과 배치되는 일이기에 하나님은 그러한 인간들의 뜻을 거부하고(11:1-9) 오직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선택해서 은혜의 땅에 합당한 의인으로 만들어 나가시기 위해 세운 아브라함 족속만이 창대할 것이라고 하신다(12:2).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내용은 “내가 지시하는 땅에서 너는 복의 근원이 되고 너의 가문은 팽창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막상 아브라함이 약속의 땅에 도착했을 때는 기근이 한창이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그 땅을 떠나 애굽으로 내려갔다.

거기서 그는 복의 근원으로서 살아남기 위해 아내를 바로 왕에게 상납하고 자신을 보호했다. 하지만 애굽에서 아브라함이 발견한 사실은 자신에게 약속한 여호와라는 신은 애굽의 바로 왕조차 다스리고 계시다는 것이다. 거기서 아브라함은 이 약속은 자신이 만들어 나가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홀로 자기(아브라함)를 사용하여 이루신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조카 롯에게 에덴동산 같은 땅까지도 양보하면서 자신의 신앙 노선을 따라간다(13:8-10).

그 뒤 가나안 땅에서 도시 왕국끼리 전쟁이 있었는데 조카 롯이 사로잡혔기에 아브라함도 참여하게 되었다. 아브라함은 자기 집에서 기른 사병(私兵)을 이용하여 승리하고 돌아올 때 소돔 성의 왕과 살렘 성의 왕 멜기세덱을 동시에 만나게 된다.

살렘 왕 멜기세덱은 가나안 땅의 소산물인 떡과 포도주를 갖고 나와 아브라함을 축복하기를 이번 전쟁을 아브라함에게 붙여서 승리케 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찬양한다. 여기에 대해 아브라함은 이번 전쟁의 승리에는 배후에 자기에게 약속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관여한 것으로 여기고 그 제사장에게 십일조를 드림으로 그의 신(神)에게 예속됨을 고백한다.

동시에 소돔 왕으로부터는 어떠한 전리품도 거절하는데 이는 이번 전쟁은 자신이 승리한 전쟁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승리한 여호와 전쟁임을 선언하는 행동을 한다.

아브라함이 자기 가족을 해치는 자를 치는 것은 결국 자기 소관이 아니라 하나님 약속의 수행이라는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 아브라함에게 여호와는 방패요 상급이 되는 것은 전쟁이라는 경험을 통해서 확인된 것이다(15:1).

이처럼 여호와를 전적으로 신뢰하는 모습은 노아의 순종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여호와로부터 의인(義人)이라는 칭호를 듣게 된다(15:6/6:9).

하나님은 이러한 아브라함을 노아의 경우처럼 언약의 본질로 세우려고 한다. 즉 복의 근원이 되게 하는 언약이다(15:8). 그 내용은 가나안 땅의 정복과 차지이다. 즉 죄에 대한 의(義)의 승리를 낳게 하는 언약이다(15:16).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복의 실체이다.

즉, 복이란 인간을 죄로부터 해방시키고 죄를 극복하게 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에게서 나오는 자손이 이 일을 수행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 자손은 결코 인간의 자연적인 생식능력에서 기인된 자손은 아니다. 하나님이 그런 방식을 거부하는 이유는 그 자손의 출생을 두고 인간들 사이에 공과(功過)에 대한 시비가 일어나기 때문이다(16:4).

그 누구도 자신의 공로라고 내세울 수 없게 하는 것이 아브라함 언약의 중요한 특징이며, 이러한 점에서 그러한 자가 곧 아브라함 언약에 적합한 인물이 된다. 또한 할례가 ‘구별됨’과 ‘거룩함’을 상징하는 표징으로서 아브라함 언약의 속성을 나타내는 것이라면(17:13-14) 그 할례 정신을 영원히 구현할 수 있는 자식이 태어나야 한다.

거룩과 의인의 존속이 왜 그리 중요한지는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불심판에서 생생하게 드러난다. 의인이 하나도 없는 소돔과 고모라의 최후 시점에서 롯만 생존할 수 있었다는 것은 복의 근원 자격으로 서 있는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생각해서 취한 조치였다(19:29).

‘악’에서의 건짐이라는 그 행위의 배후에는 대리 의인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이상의 사실은 아브라함이 그날 왕 아비멜렉에게 아내를 주었을 때도 드러나는데 자칭 의인인 아비멜렉 가문에(20:4) 갑자기 태가 닫히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는 고의는 아니었지만 남의 아내(사라)를 그 왕이 취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아브라함 존재의 가치를 깨닫게 하시는데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지 아니하면 너는 죽게 되고 만약 기도하게 되면 태가 열리게(복이 회복) 된다는 것이다. 이상의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죽은 태의 열림은 바로 복의 회복을 말하는 동시에 그 복의 근거가 자신에게 있지 않음을 보여준다.

드디어 사라의 태가 열리면서 이삭이 태어난다. 이삭이 태어남으로 약속 사역의 중심이 이삭으로 옮겨짐과 동시에 복의 전수에 있어 어떤 특정한 형(形)을 구성하게 된다.

소위 장자권(복의 상속권)이 약속 성취를 이룰 때 어떤 위상(位相)을 점하는가에 대한 정형(定形)이 아브라함과 이삭의 관계에서 수립된다. 복의 근원으로서의 아브라함과 그 복을 물려받을 이삭 사이에서 서로가 무엇을 알게 되며 무슨 변화가 수반되는 것일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제물로 하여 제사 드리기를 요구하셨다. 아브라함은 이러한 요구에 순응했다. 여기서 아브라함은 다음과 같은 생각을 가지게 된다. 즉 장자란 바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정상화되도록 번제의 제물로 등장하는 것이라고(창 4:4-5의 가인과 아벨의 제사에서 볼 수 있고 또 8:21의 노아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장자의 희생을 통해서 복이 인간 세상에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게 아니라 여호와의 이러한 지시를 경외하는 것으로 복은 주어지고(22:12) 번제의 제물은 따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신 것(여호와 이레)으로 말이다. 이 제물 외에 어떠한 제물로도 복의 근원으로서 가치가 없다(인간의 제물이라도 안됨 – 22:14).

아브라함의 시선은 이제 [여호와 이레(준비하심)]를 지향하는 여호와의 사역에 모아진다. 복의 근원은 바로 거기서부터 나온다. 이삭의 존재는 바로 [여호와 이레]를 가르치기 위해 준비되었던 것이다. 그 속성과 역할이 복에 끼치는 영향을 알리기 위함이었다. 아브라함의 입장에서는 자기에게 기대를 거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오직 [여호와 이레]를 바라보는 믿는 자의 표본으로 서 있다.

자기는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다만 믿는 자의 선조로서만 위치를 점하고 있을 뿐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자기(아브라함)의 이름과 존재를 동원하여 아브라함 언약을 만들어 낸 것이다(마치 노아를 이용하여 노아언약을 세운 것같이).

이렇듯 아브라함과 이삭 사이에서 복의 전수는 장자에게만 주어지고 그 장자란 바로 여호와에게서 자신의 언약을 표현할 수 있도록 선택된 자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복을 제공하는 아브라함 언약은 내용상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복은 이제 아브라함의 순종을 근거로 하여 아들 이삭으로 하여금 아브라함에게 준 약속을 이루게 한다(22:16-18).

이삭에게서 나타난 언약의 모습을, 아브라함은 죽었다가 여호와께서 친히 준비하신 일 때문에 다시 살아난 내용으로 보았다. 즉 그는 자손의 번창과 대적의 문을 여는 것을 부활의 시각을 바탕으로 하여 다시 보게 된 것이다(22:17-18). 즉 수많은 자손이란 바로 이삭처럼 다시 살아난 자의 많음이요, 대적이란 바로 인간으로부터 죽음을 초래케 한 세력을 두고 말한다.

그래서 사라가 죽고 난 뒤에 그는 자신과 사라의 부활을 기약하면서 그 땅을 앞당겨 자기 소유로 삼고자 나선다. 정식으로 값을 주고 사게 되므로 후일에 이 땅의 소유권 시비에 하자가 없게 한다(23:18).

이제는 이 가나안 땅에서 나그네나 이방인이 아니라(23:4)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언젠가는 언약 족속의 땅이 될 것을 아브라함은 이미 맛보고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 언약은 이삭을 통해 내용이 보다 풍부해지고 구체화 되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이제 이삭의 하나님도 되신다. 이삭의 앞으로의 운명은 번제물로 여호와께서 친히 준비하신 자의 모습을 띠면서 진행된다.

그의 후손은 번제물 되었던 운명에 동참하게 된다. 여호와께서 친히 준비하신 것으로 말미암아 번제가 열납되면서 인간 세상에 언약의 복이 지속된 이 시점에서 그 이삭의 언약(아브라함 언약)이 존속하는 한 죽음의 세력은 이쪽을 이길 수 없을 것이다.

장자란 이처럼 세상을 위한 화목 제물로서 인간이 저지른 범죄에 대해 책임지는 존재로 등장하며 그 방법은 하나님이 제시한 언약을 존속시키는 것뿐이다.

24:60에 보면 이삭에게서 나온 자손이 원수의 성문을 열 수 있는 복을 받게 된다. 그러나 실제로 리브가는 아기를 낳지 못하는 여성이다(25:21). 그렇다면 원수의 성문을 열 수 있는 자는 여자의 자연적인 출산력의 개입 없이 태어난 자식일 것이다. 이것 또한 언약의 요소로 들어간다.

이삭이 가진 아기는 하나가 아니라 둘이다. 원수의 성문을 열 장자는 그렇지 못하는 자의 조상과 함께 태어나며 또한 그쪽을 섬김으로 오히려 장자로서 입증되는 운명을 갖게 된다(25:23).

하지만 정작 그 두 아들(에서와 야곱)뿐 아니라 그 부모까지도 각자의 기호에 따라 살아간다. 야곱이나 리브가나 이삭은 언약 편에 서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편에서 장자권을 이해하려고 했다. 야곱은 장자권을 팥죽으로 뺏을 수 있다고 여기고 있으며, 이삭은 먼저 난 자를 장자로 보고 있고, 더 나아가서는 창세기 12:3에 근거하여 자신이 복의 근원인 줄 알고 자기의 기쁜 뜻대로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가지고 오는 자를 복 주고자 한다(27:4).

에서는 아예 장자권의 의미도 모르고 있으며 리브가는 속임을 통해서라도 주어질 수 있다고 여기고 있다. 이삭이 받은 언약은 이와 같이 인간의 무지(無知) 안에서 싹 터면서 언약이 그들의 무지와 인간적인 생각을 고발할 수 있는 증거와 여지를 확보해 놓게 된다.

즉 하나님이 언약을 이루시는 방식과 인간이 생각한 언약 성취 방법이 얼마나 다른가 하는 이 점이 바로 언약이 고발의 요소를 갖게 되는 핵심적인 것이다. 언약은 빼앗고 속임 당하는 그런 혼란 속에서 진정한 희생자와 섬긴 자가 누군가를 알게 하고 차후에 이 세상에 등장할 민족도 섬기는 자를 잇는 민족과 섬김을 받기 원했던 자를 추종한 후손들의 민족으로 양분되리라는 것이다.

야곱과 에서의 갈등 속에서 인간적인 선입감으로 언약을 이해한 이삭의 한계가 드러난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삭의 시도를 좌절시킨다. 그 이유는 진정한 언약 안에서의 장자는 자연적인 출산 시기와 무관함을 보이기 위함이다. 언약의 의의를 표현할 수 있는 자가 장자가 된다.

이삭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이삭에게 많은 재산 증식이 일어나고 땅은 가나안 땅에서 확장이 되는데 이는 모두 언약이 갖는 영향력 안에 있기 때문이다(26:1-33). 그만한 영향력을 가진 축복이 야곱에게 돌아가자 에서는 야곱을 제거할 의사를 가지게 된다.

여기서부터 야곱의 환난은 시작되는 데, 이는 그 동안 자기가 자라온 세계에서 형성된 복의 개념을 그대로 야곱이 지니고 있었던 것에도 그 원인이 있다. 예를 들면 삼촌의 집에서 오랜 세월을 보내는 동안에도 그의 인생 목표는 번창과 부유한 자가 되는 것이었다(30:43).

이러한 복의 이해는 아버지의 집을 떠난 후 벧엘에서의 경험 속에서도 계속된다. 27:28에서 아버지 이삭이 자기에게 축복하기를 풍부한 곡식과 포도주를 준다고 했기 때문이며, 이 사실을 마치 확인이라도 하듯이 벧엘에서는 하나님이 사다리를 보여주시고 천사를 분주히 그 위에 왕래시킴으로 하늘의 복이 마구 야곱에게 떨어지는 광경을 봤고, 네 자손이 온 땅에 편만할 것이라는 소리도 실제로 들었기 때문이다(28:14).

그러나 27:29에 나타난 축복은 야곱의 축복이 아니라 야곱 언약에 준 축복이었다. 왜냐하면 야곱에게 많은 형제들이 없어서 그러하다. 야곱 자신도 그 언약 안에 있음으로써 복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는 요셉에게서 이루어진다. 벧엘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이나 이삭 때처럼 야곱도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신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떠나지 않고(28:15) 그를 아브라함 언약 정신에 합당한 인물로 변화시켜 가신다. 즉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신 진정한 장자로 세우시는 것이다. 야곱에서부터 시작하여 하나님이 그를 이스라엘로 변화시키실 때까지 말이다. 하나님이 그와 함께한다는 말은 천사를 그에게 보내겠다는 말과 같다(32:1).

많은 무리의 천사가 야곱을 지키게 되며 야곱이 어디를 가든지 동행하게 된다. 언약의 성취는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어 이루어 가시는데 다만 야곱을 사용하실 뿐이다. 얍복 강가에서 야곱은 손해 보기 싫어하면서 평소의 사고방식대로 열심히 살해자와 싸우며 밤새도록 버텨낸다.

살해자는 쉽게 그를 굴복시킬 수 없음을 깨닫고 그 몸의 일부를 파손시킨다. 이때 그가 평범한 인간 존재가 아님을 깨닫고 살려 달라고 그에게 애걸복걸한다. 인간을 이기려다가 그만 하나님마저 이겨 보려고 덤벼든 셈이 되었다. 여기서 하나님은 그에게 축복하기를 인간도 이기고 하나님마저 이겼다는 이름으로 그의 생존을 지켜준다.

이겼기에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로 만들어 주신 것이다. 이러한 이름은 단순히 야곱만의 이름이 될 수가 없다. 야곱에게 언약하신 그 하나님을 따르는 자들의 이름, 또는 하나님을 뵙는다고 할지라도 생존할 수 있는 무리의 이름으로 세워진다.

야곱은 죽음과 생존 사이에 축복이 놓여있음을 알게 되었으며 그 축복은 인간 쪽에서 쟁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과 싸워서 지게 된 그 사실에 근거하고 있음도 알게 되었다.

이것은 야곱의 축복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전폭적인 낮아지심이며 야곱을 이용하여 사다리를 통해 왕래한 천사의 낮아짐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죽을 수 있었던 상황에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통해 살았다는 명확한 증거는 브니엘(하나님과 대면 했는데도 살았다)이란 지명에서 보여진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환도뼈의 힘줄을 먹지 않음으로 증명된다.

그 이후 야곱은 진실로 섬긴 자는 자기가 아니라 하나님 그 자신임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런 모습의 하나님에게 모든 것을 거는 것이다. 자기가 언약을 이룬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 안에서 이루신 것이다. 섬기는 자세로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아브라함 언약을 바로 이해했다고 볼 수 있다.

야곱은 적으로 여기던 형 에서를 마치 자기의 주인처럼 섬기게 된다(33:5–11).

이런 사실에 눈이 어두운 야곱의 아들들은 무력으로 여동생의 수치를 복수하려다 야곱의 입지를 곤란하게 해서 그곳(하나님이 야곱의 하나님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알게 되어 값을 주고 사게 된 땅)을 떠나게 된다(33:18-20/ 34:30).

아직 아들들에게는 이스라엘 하나님의 이미지가 힘의 정복으로만 비쳐진 것 같다. 이 11 아들의 본질은 마지막 12째 아들의 출생을 통해서 밝혀진다. 12번째 아들은 난산을 통해서 태어난다. 어머니 라헬은 그 아들의 출산을 마지막으로 목숨을 거둔다. 그래서 이름을 베노니라고 짓는다.

슬픔 속에서 출생한 자식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이스라엘로 달라진 야곱의 눈에는 그가 슬픔의 아들로 해석되지 않는다. 오히려 오른손의 아들(베냐민)로 보여진다. 오른손, 즉 하나님의 능력으로 출산한 아들로 본다.

마치 얼마 전에 야곱이 이스라엘로 바뀔 때의 자아의 죽음을 연상케 하는 자식인 것이다. 야곱식의 의식구조가 다 무너지고 깨어졌을 때, 외부적으로는 실패로 보이겠지만 야곱은 그것이 자기에게 찾아온 하나님의 올바른 처리 방법임을 안다.

이 베냐민을 통해서 지금까지 낳았던 11아들 모두가 아버지 야곱처럼 새롭게 변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베냐민만이 이름이 바뀌고 새 이름이 주어졌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축복의 아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축복의 아들로 간주한 야곱 시절의 잘못은 이제 베냐민의 경우를 통해서 보이듯이 뭔가 새로운 시각으로 달라질 필요성이 있게 되었다. 즉 야곱의 아들들이 이스라엘의 아들로 전환할 계기가 다가온 것이다.

야곱의 아들 중에 요셉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이 아들이야말로 27:29에 나오는 축복을 성취할 수 있는 자이다. 그런데 다른 형제들이 이 아들이 지닌 가치를 이해하지 못하고 시기하여, 그들의 손에 의해 애굽나라 종으로 팔려 가게 하신다.

이삭의 축복에 의하면 형제들의 주가 된다고 하지만 그는 지금 종이 된다. 결국 하나님은 요셉을 종으로 만듦으로써 형제들이 어디서 아브라함 언약을 오해하고 있는지를 밝혀내려 하시는 것이다. 형들의 요셉 추방은 하나님이 주신 꿈을 가진 자가 추방되므로 결국 하나님 자체의 추방인 셈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요셉을 단순히 꿈 가진 자로서만이 아니라 급기야는 꿈의 해석자로서 등장시켜 요셉의 배후에는 역사의 흐름을 주관하는 분이 있음을 나타낸다.

이로써 요셉뿐 아니라 그 형제들에게 야곱 하나님의 실상을 알게 하시는데 45:5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그러면 그 생명 보존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45:8에 보면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내는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바로가 자기의 주가 아니라는 말이다) 애굽 온 땅의 치리자로 삼으셨나이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구원하는 것은 이삭의 경우에는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신 수양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야곱 집안의 경우에는 형제들에 의해서 배척당한 형제 하나가 그들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구출시켰다. 여기서 주의 개념에 새로운 변화가 주어진다.

즉 주란 하나님의 언약 때문에 땅에서 비언약적 사고를 가진 자로부터 배척당한 그 당사자를 하나님은 인정하시고 그를 배척케 한 그자들은 그 주로부터 지배받는다는 역사법칙과 원리가 정해져 버렸다(참조: 빌 2;5-11).

이것은 이미 야곱에게 내린 축복의 일환이었다. 따라서 비록 요셉이 애굽에서 낳은 자식이라 할지라도 야곱의 하나님을 이해해야 한다. 그들이 애굽에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야곱의 축복에 참여하게 된 사정은 그 운명의 배후에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긴다는 장자의 원리가 작용했음을 알려주기 위해 손을 어긋맞게 해서 축복한다.

마지막으로 야곱은 12아들을 불러 놓고 말하기를 언약의 기준에 따라 저주와 축복을 한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각자 운명을 통해 아브라함의 하나님과 이삭의 하나님과 야곱 하나님의 모습을 보이게 하는(부정적이든지 긍정적이든지) 사명이 있기 때문이다.

언약은 요셉에게 찾아온 죽음까지도 극복할 능력이 있는 것이다(50:24-26).

Ⅲ 결론

성경 지식이 어떻게 삶의 변화를 일으킬까? 그것은 고통이다. 난데없는 고통이 찾아들면서 ‘내가 있음’은 실은 ‘나의 없음’을 알리는 신호인 것이다. 이로써 성도의 행복은 자동으로 파기된다. 그 대신 주님 고통이 나의 존재 자리를 대신한다. 이는 십자가 사건으로 인해 온 우주는 이미 주님의 고통으로 가득 차 있고 성도는 그 일부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모든 일들이 십자가 사건에서 퍼져나간 파동임을 창세기의 모든 구절이 증명한다.

성도는 이미 창세기라는 현실 안에서 사는 동시에 십자가 사건 안에 살고 있는 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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