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

5/12-네가 죽었다고 이야기 해주는 십자가가 만든 현실

아빠와 함께 2026. 5. 12. 09:08

사람들은 공간에 일단 갇혀 있어요  calender를 이미 만들고 그것을 시간이라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누구를 위한 시간이냐면 자기를 위한 시간이죠.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시간은 이스라엘에게만 알려줬어요. 율법으로 알려준 겁니다. 그렇게 되게 되면 율법이 없는 이방민족하고 이스라엘이 서로 같지 않은 이스라엘의 특이성을 드러냅니다. 그게 뭐냐 하면 이스라엘은 자꾸 어디로 가요. 기차타고 어디 가듯이 이스라엘은 어떤 목표를 향하여 가는 겁니다.
언약의 시간이 주변의 풍경을 자의적으로 생산해내요. 풍경을 만들어가면서 달리는 시간. 하나님의 스케줄에 따라서 주어지는 시간에 이스라엘이 합류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스스로 하나님의 언약을 달성하는 그 때까지 하나님이 질주할 때 백성으로서 같이 따라붙어야 돼요.
자본의 가치가 중요하지, 노동의 가치가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모든 성과에 대해서 이스라엘을 배제시켜버려요.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땅이 없는, 땅이 부재한 민족으로 만들었어요. 그게 뭐냐? 광야 생활이에요. 광야 생활을 보냈어요. 광야 생활을 보내면서 하나님께서 율법을 줬어요. 그럼 율법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시간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게 창조의 시간이에요.
결국 이 말은 ‘있다/ 없다, 어둡다/ 밝다’를 인간적 차원에서 의미만 제한해서 한 것이고, 이사야 45장에서는 “너는 있다/ 없다, 빛/어둠을 너희들 쪽에서 생각하지? 나는 너희들이 생각하는 그 다른 편에 속한다.” 그게 ‘나는 숨어있는 하나님’(45:15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이라는 뜻이에요. 나는 숨어있는 하나님이다.
진실로 숨어있는 하나님. 숨어있으니까 인간 편에서는 ‘없다’가 되죠. 그 숨어있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나타내시면서 인간 쪽에서 볼 때는 없는 데서 만들어진 창조가 되는 거예요. 그 창조 안에 섞여서 오신 분이 누구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말씀이 곧 하나님이며 하나님과 더불어서 이 세상이 창조된 거예요. 예수님이 창조되었다는 말이 아니고 그 안에 예수님이 들어있었다는 거예요. 예수님이 들어있는 거예요.
그것과 시간문제와 이게 무슨 관계 있느냐?

■순환하는 것은 멈춤이 없어요. 항상 내일되면 또 돌아와요.

■그런데 하나님의 시간은 가위로 자르는 게 있어요. 절단하는 게 있어요. 절단. 있다가 숨어버리고 있다가 숨어버리는. 1, 2, 3, 4, 5, 6 해놓고는 7일째 숨어버려요. 없고요. 1, 2, 3, 4, 5, 6 해놓고 숨어버려요.
없었던 사실이 등장함으로써 있었던 인간의 모든 것은 없음에 예속이 되는 겁니다. 없음에 양도를 해줘야 돼요, 없음에. 그게 제7안식일이에요. 내가 노동한 것은 주님의 노동을 드러내기 위한 보조적인 겁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든 하나님은 자기 이스라엘을 하나님 자신을 닮은 민족이고 싶어 해요. 그걸 왕 같은 제사장 나라, 거룩한 제사장 나라라 했어요.
이 말은, 장차 오실 하나님은 이 땅에 제사장으로 오시는 거예요. 제사장의 특징이 뭐냐? 죽음을 다루는 일이 제사죠.  그 죽음을 다루는 것이 신약에 오면 바로 ‘부활의 능력’이에요.

왜 인간이 믿음이 없는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성령으로 태어나셨다.  육은 육이기 때문에 영의 세계를 알 수가 없는 겁니다. 

두 번째, 우리들 가운데 나무보고 바다에 빠지라 하면 나무가 뽑혀서 바다에 빠질 수 있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그러면 겨자씨만한 믿음도 없는 거예요. 믿음이 없는 거예요, 인간에게는.

‘스스로’ 숨어계시는 분이에요. 인간의 요구에 맞춰 조절해서 잡았다 하면 빠지고 잡았다 하면 빠져버려요. 
단절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안식일 지켜도 그 단절이 무슨 뜻인지 몰라요. 그래도 이스라엘을 주께서 계속 끌고 갑니다. 망할 때까지. 왜? 그들이 생각하는 풍경과 다른 풍경을 만들기 때문에. 여리고성 함락할 때 안식일 맞춰서 이미 날짜를 정했어요. 다른 날은 한 바퀴 돌았는데 특별히 제 일곱째 날은 일곱 바퀴 돌고 나팔 부니까 이게 다 무너진 겁니다.
그럼 성이 무너졌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 무너뜨리고 난 뒤에 어떻게 견고한 성이 무너졌는지 생각할 거 아니겠어요. 생각할 때 무슨 요소를 집어넣었겠습니까? 그때 형사들이 와서 “야, 이 성이 왜 무너졌지?” “팀장님” “왜?” “이건 안식일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지!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안식일에 의미를 부여하는 거예요. 안식일.

그러면 안식일의 풍경은 여리고성 만나기 전까지는 어떤 풍경이냐 하면 그냥 제사하는 풍경이에요. 그런데 제사가 무엇을 새롭게 만들어내는가? 현실을 만들어내고 제사가 새로운 역사를 구성하는 동인(動因), 힘이 되는 거예요. 동력이 되죠. 뭐가? 안식일이. 시간이요. 자, 다시 이야기할게요. 1, 2, 3, 4, 5, 6일에 일을 누가 합니까? 내가 하죠. 안식일 의미를 놓쳐버리면 안식일 지킨 내가 역사를 만드는 힘이 되잖아요. 그게 안식일 못 지키는 거예요. ‘안식일은 내가 노동했다 하는 그것이 단절되고 안식일의 주인님이 역사를 만들지, 우리는 내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 위해서 6일 동안 노동했다.’ 가 돼요.
내 앞에서 너는 너 존재가 소멸된 상태이기를 바라는 거예요. 이 말은, 네 존재가 의식되면 내 존재가 가리워진다.

“오직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그것은 보조적이고 뒤따라오는 것이지, 중점적인 머리 부분은 그 나라에요. 그 나라 의에요. 그런데 이 대목에서 그의 나라를 뭐로 나타내느냐, 이 땅에서? 그의 의로 나타낸다는 거예요. 그의 나라=그 의. 그의 나라를 의로 나타낸다는 말은 그의 나라가 의를 남기기 위해서 모든 죄를 심판하는 식으로 우리에게 찾아옴을, 그것을 네가 요청하라. 기도하라 그 말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속히 임하기를 네가 기도 내용으로 삼아라 이 말입니다.
이방민족은 순환하는 시간을 따르고 있습니다. 항상 뺑뺑이 순환하는 시간을 따르는 반면 약속의 땅도 마찬가지인데 주님께서는 여기서 순환하는 것이 아니고 순환을 단선(單線)으로 만들어요. 순환을 단선으로 만든다고요.
시간이 단선이 된다는 말은 시간위주가 되고 인간위주는 아니라는 겁니다. 내 시간이 이해 안 되거든 너희들 다 기차에서 내려라 이 말이에요. 그럼 시간위주라는 말은 오늘 강의에서 제일 어려운 건데 뭐냐 하면 ‘공간위주를 포기하라’에요.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 내부에 작동하고 있는 안식일이 실제 역사와 현실을 만들어내는 것이지, ‘하나님, 저 목축지 제가 할래요.’, ‘내가 이거 할래요.’ 그건 이방적 사고방식이에요.

빨리 인생이란 동영상 짧게 끝내고, 인생이란 건 스냅 사진이거든요, 빨리 끝내고 주님을 만나야 돼요. 그런데 나만의 공간을 가져버리면 인간은 그 공간에 주저앉게 돼요. 나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나는 얼마나 아름다운 과거를 보냈던가. 이게 기억이잖아요, 기억.
부활이라는 것은 공간을 포기한 거예요
세 번째가 아주 충격적인 거예요. 누구든지 내 살과 내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영생이 없다.  증거와 사실관계가 같이 짜여져야 소송에 승리할 수 있는 거예요. 하늘에서 제시한 증거 내용과 그게 사실적으로 합치될 때 된다 이 말이죠. 예수님께서 내 살과 내 피를 마시라 했단 말이죠. 그러니까 그 이야기를 들었던 현지 사람들의 반응이 뭐였습니까? 어렵도다. 누가 이것을 믿을 수 있느냐.(요 6:60)  내가 믿을 만한 것만 골라 믿겠다는 생각이었어요. 그것은 안식일 자체가 단절이라는 생각을 못한 거예요.

 

인간이 하나님을 믿어요? 주께서 용납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숨어계시는 분이고 피해가시는 분이에요. 따라잡으면 피해 버리고 따라잡으면 피해 버려요. 언제까지? 주님의 살과 피가 흐르고 찢겨질 때까지. 어떤 인간도 믿는 자가 하나도 없다고 할 때까지 하나님께서는 계속 인간을 피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을 피해서 예수님이 십자가 지셨잖아요. 드디어 하나님께서는 성공하셨어요. 무슨 일에 성공했습니까? 이 세상에 인간치고 날 믿는 사람 아무도 없다는 것. 아무도 없다.

그러면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와 예수님하고 대화할 때 대화내용이 누가복음 9장에 이미 누설이 되었죠. 누가복음 유튜브에 나와 있어요. 그게 뭡니까? 그때 대화내용이 ‘예수님이 언제 돌아가십니까?’ 이거에요. 엘리야와 모세가 ‘언제 돌아가셨습니까?’

그럼 여기서 물을 수 있는 것이 엘리야와 모세는 무슨 수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었느냐는 거예요. 십자가 지기 이전의 사람인데 어떻게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을 수 있느냐. 다른 말로 하면 어떻게 하나님이 만든 단절, 시간적 단절을 어떻게 점프해서 뛰어넘어서 주님의 완성된 시간 속에 합류될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애굽에서 나왔던 그들이 단선이 돼요. 단선이 된다는 말은 공간이 사라진다는 말이에요.  내가 터 잡아 살 공간을 우리는 공간이라고 이해했던 거예요.
그래서 이 사람들이 애굽으로 돌아가자는 이유는 거기는 공간이 있기 때문이에요. 광야에는 공간이 없어요. 공간이 없고 시간만 있어요. 어떤 시간? 매일같이 만나가 내리는 시간만 있어요. 만나만 계속 내려주는 거예요. 그런데 만나를 신명기 8장에서는 뭐로 보느냐 하면 내가 너희에게 떡을 준 게 아니고 말씀을 주었다는 거예요.(8:3)
만나가 떡이라면 인간 육신에 들어와서 육신으로 소화되면 끝나는 거예요. 그러나 말씀이 되면 새로운 현실을 창조합니다. 새로운 현실을 뚫고 나가죠. 새로운 현실을 뚫고 나가요. 인간이 단선이 되어서 단선이 쭉 이어지게 되면 이 단선은 하나님의 언약이 하나님의 언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언약이 완성이 된다는 거예요.
따라서 단선이 지나가는 모든 노선에는 인간에게 믿음 없음이 노출되어야 돼요. 믿음 없음을 노출시키기 위해서 여리고성 같이 인간 힘으로 점령할 수 없는 것. 이스라엘 사람들이 매일같이 부딪쳐야 되는 게 뭐냐 하면, 자기가 아는 힘과 자신의 믿음으로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그쪽으로 가는데 그쪽이 바로 약속의 땅이라는 거예요. 그냥 땅이 아니고 약속의 땅이라는 겁니다.
그럼 여러분들 어떻게 하겠습니까? 여러분들은 하나님 믿을 재주도 능력도 없고 하나님께서 함께 동행하신다면 그다음부터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겠어요? 이 말씀 지키는 것을 누구한테 넘기겠습니까? 누구한테 넘기겠어요? 동행하시는 주님한테 넘기면 되죠! 바로 그거하면 되는 거예요.
“너 성령으로 태어났어?” “아닙니다.” “너 믿음 있으면 나무 한번 뽑아볼래?” “못합니다.” “내 살과 피를 먹으라.” “어렵도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결국 뭐냐 하면 이 말씀을 보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뭐냐 하면, 나는 못한다. 나는 할 수 없다. 나는 안 믿는다. 다시 말해서, 나의 무능성이에요.

나의 무능성. 그 무능성이 뭐냐? 무능한 자가 무능성을 아는 그 능력을 가지고 부활의 능력이라 하는 거예요. 그게 부활의 능력이에요. 참 쉽죠잉? ‘부활을 믿읍시다.’가 아니에요, 지금. ‘내가 안 해도 하신다.’가 부활의 능력이에요. 나는 하고 싶어도 이거는 방해만 되죠. 하고 싶어도 안한 게 되고 해도 안한 게 되고 전부 마찬가지지만.
베드로가 예수님 따라갈 때, ‘살아있는 내가 살아있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이게 단절이 안 되는 거예요. 한쪽이 죽어야 되는 거예요. 한쪽이. “너는 나를 따라오지 못한다. 왜? 네가 살아있다고 우기고, 나는 죽으러 가기 때문에. 네가 죽는데 따라갈 수 있느냐?” “제가 따라가겠습니다.” “안 돼!” 너는 나를 따를 수가 없어요. 이게 단절되기 위해서는 반대가 되어야 돼요. 반대가 뭡니까? “너는 나를 세 번씩이나 부인할 것이다.”에요.  
도무지 우리는 자기 부인이 안 되는 사람입니다. 살아있으니까 움직이고 움직이니까 성과 내다보고. 아까 했죠? 성과 내다보고 있으니까 내 인생은 성공일까, 실패일까를 점검하고. 맨날 하는 일이 그 일 빼고 뭐 다른 일 있습니까? 다른 일 있어요? 내 자식 잘 키웠어 못 키웠어, 뭐 이런 거. 내 평생 잘 살았나, 맨날 생각하는 게 이거밖에 없어요. 자기 단절이 안돼요.
그런데 이스라엘 역사를 쭉 한번 보세요. 하나님이 만든 풍경, 그 현실은 항상 누가 먼저 반발하고 반항하느냐? 하나님과 동행하는 백성들이 반발하고 반항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지 않는 이유가 바로 부활의 능력, 죽은 분의 능력이에요. 죽은 분의 능력. 살았다고 우기는 세상 속에서 그 살아있는 것 때문에 죽임을 당한 그 분의 능력이 진정코 유일하게 살아계신 분이에요. 그 살아계신 분이 매일같이 우리를 살려주고 있습니다. 매일같이.

그래서 우리는 맨날 십자가야. 맨날 십자가에요.   

완벽에 완벽을 기하는 이 시대. 이게 얼마나 단절을 모르는 시대인지요.  으로 살아가요. 자기는 어떤 단절도 거부하기 때문에. 그래서 교회 안 다니는 건 물론이고요. 성경 안보는 것은 물론이고요. 자기 완전에 빠지는 것.
그게 뭐냐? 지금 우리는 묵시의 세계에 살고 있는 증거입니다. 이것이 순환하는 과학적 자연세계 속에서 자기가 악마로 완전한 악마로 점점 더 만들어지는 거예요. 누가 나를 밭떼기해 간 사람이 없어요. 살아있기에 살겠다는 겁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뭡니까? 죽은 분의 능력이 오직 자기 택한 백성에게 찾아와서 네가 죽었다고 이야기해주는 그 고마움. 그 고마움을 우리 간직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세상 주님의 십자가가 만드는 현실 속에서 참으로 지옥 같고 참으로 모두 다 마귀의 자식 같은 이 현상은 십자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주께서 의도적으로 조성한 현실인 것을 우리가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