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강의

임계점

아빠와 함께 2026. 4. 1. 10:19

대전-복음이냐 교회냐(7강) 단6:17(임계점)20260330b(강의: 이근호 목사)


『복음이냐 교회냐』 78페이지 중간부터 하겠습니다. [구약 예레미야, 에스겔을 보세요.]라고 했어요. [이들이 늘 계시 받습니까? 아니지요. 계시를 받을 때는 사람이 몸이 아파요.…] 다니엘도 포함되는데요. 특히 다니엘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죠. 계시를 받을 때 사람 몸이 아파요. 마치 신병이 걸린 것처럼 몸살을 앓고, 일주일간 아프고 이렇게 아파요.

아픈 것은 장차 오실 메시아의 고통을 앞서서 같이 공감하고 있는 입장에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혈육적인 관계를 뛰어넘고, 혈육관계 말고 다른 관계가 있다.’ 이 말입니다. 혈육관계라 하는 것은 인간 대 인간으로 잘해보자는 관계 아닙니까.

사람들이 평소에 무심코 하는 말…, 아까도 집사님 가족 중에 한 말을 끄집어냈는데 ‘어머니는 옛날부터 그렇게 신앙 좋고 교회 잘 다니고 열심히 충성하더니만 지금은 왜 나이 들어서 마치 ‘아무 소용없다, 다 그냥 하나의 놀이였다’ 이런 식으로 하느냐.’ 그때 내가 얼른 말을 던졌잖아요? 보이는 것으로 자기 자신을 치장한 거죠. 메이크업한 거예요.

보이는 것들로 좋다는 것은 다 끌어서 뭐 종교생활이라든지 교회생활, 신앙생활, 좋은 것으로 덕지덕지 자기를 덮었다고요. 덮었는데, 덮는 작업도 힘든 노동이 필요하잖아요. 그런데 이제 본인 정신도 희미하고, 교회를 챙기고 했던 자기가 만든 규칙이 자기에게 짐이 되니까 꼭 필수적이 아니면 좀 놓고 싶은 거예요. 그런 것까지 다 감당이 안 되니까 못 하겠다 이 말이죠. 그럼 치장했던 것이 좀 뜯겨져나가도 본체인 내 몸만 있으면 되잖아, 이렇게 되죠.

여기서 굉장히 어렵고 중요한 게 있습니다. 자, ‘인간이 보이는 것만 챙기는 이유가 뭐냐?’ 하는 거예요. 그것은 바로 인간이 거울을 보기 때문이에요. 인간이 거울을 보면서 보이는 것에 굳히기 들어가는 거예요.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있죠.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나다. 그러면 거울에 비친 내 모습 말고 다른 나는 있다고 생각할까요, 없다고 생각할까요? 있을 수가 없다고 생각해요.

그러면 거울에 비친 내 모습 쪽에서, 역시 보이는 거죠, 누가 봅니까? 보는 나한테 보이는 것. 자기 시선의 연장이고 자기의식의 확대에 불과하죠. 거기에 추가적인 나타난 것,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지 않는다.’(히 11:3)는 나타난 것의 계열에 끝까지 합류가 안 되는 거예요. 그 낌새를 알아채질 못하는 거예요.

보이는 것 말고 다른 걸로 되어있는 관계망에 접근이 안 되는 겁니다. 접근이 될 수가 없어요. 그런데 선지자 보세요. 그들은 계시 받을 때 아프잖아요. ‘선지자는 아프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선지자에게, 네가 평소에 생각했던 거울에 비친 네 모습이 그게 너의 다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는 겁니다.

광주강의의 제목이 <우연의 폭력>이라고 되어 있죠. ‘폭력’이라는 말을 저는 우연의 ‘폭격’이라는 말로 쓰고 싶었어요. 그러면 더 난해할까 싶어서 ‘폭격’을 ‘폭력’으로 고쳤는데요. ‘우연의 폭력’이라는 것은 ‘낯선 기호들의 폭격’이라고 보면 돼요. ‘낯선 기호들’이라는 것은 낯선 기호니까 하나님께서 뭐 문자를 보낸다는 뜻은 아니고, 광주강의에서 욥기의 예를 들었다고요.

욥기에서 하나님이 예를 든 것은 인간들 보기에 다 보이는 것이에요. 평소에 욥은 자기 모습은 거울에 비치니까 똑똑하게 보는데, 왜 보이는 것들 속에서 놓친 것이 발생하는가? 욥 자기 자신이 ‘나는 어떻게 보이는데 어떻게 앞으로 더 좋게 보일까?’에 신경 쓰는 그 관계망에서 누락된 것, ‘이것은 나의 나됨에 별 의미가 없어.’하고 배제시켰던 것들을 하나님께서 주섬주섬 주워서 “너는 이걸 어떻게 보는데?”하고 질문을 던진 거예요.

분명히 보이는 것인데 내가 구축한 보이는 것의 관계망에 흡수되지 못하고 합류되지 못하고 탈락된 그러한 요소들이 ‘나타난 것이 따로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계기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욥은 선지자에 해당되는 겁니다. 선지자의 특징은 뭐냐? 자기를 구축하는 것과 상관없는 것이 자기에게 날아오는 것.

예를 들면 마태복음 2장에 보이는 것이 나타나요. 뭡니까? 별. 상당히 참 신기해요. 사람은 사람의 말을 듣고 따르게 되어있는데 동방박사는 누구 말을 듣습니까? 별이 어떻게 움직입니까? 뭐 미국 태극기입니까? 별이 왜 움직여요? 별은 생물체가 아니잖아요. 그전까지 별이 움직인다는 것은 상상도 못해요. 움직이는 것은 인간이 움직이죠. 동물이나 인간이 움직이죠. 그것만 조심하면 돼요. 그러나 별을 조심할 필요 없죠. 별은 그냥 고정되어 있으니까. 그런데, 별 따라 움직였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보고 있다는 것 때문에 놓친 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특이하게 움직이는 존재가 나타나게 했으니 그들이 뭐냐? 선지자다. 선지자는 보이는 자기 자신의 관계망을 헐어버리고 그것과 전혀 연관이 안 된 다른 관계망을 발견하게 되어 있습니다. 동방박사가 누굴 만납니까? 피 흘리신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을 만날 때 동방박사는 너무나 순진했어요. 현재 세상의 권력자가 유대인의 왕을 죽인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생각할 필요도 없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고. 자기의 관심사는 이쪽 계열이 아니고, 나타난 자의 계열만 챙기면 그걸로 끝나는 거예요. 동방박사가 아기 예수를 만났죠.

거기에 보이지는 않는데 나타난 관계를 조정하는, 그걸 연결시키는 존재가 등장합니다, 꿈에. 누가 등장하느냐 하면 천사가 등장해요. 두 번째 시간에는 천사에 대해서 언급을 하고자 합니다. 이사야 14장 12-14절,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

15절에 “그러나 이제 네가 음부 곧 구덩이의 맨밑에 빠치우리로다” 여기에 대해서 구약의 신학자들은 바벨론으로 봐요. 거의 이구동성으로 이 ‘계명성’이 바벨론이라고. 실증적으로 역사적으로 맞는 이야기에요. 그러나 신학자들이 거기서 멈췄어요. ‘바벨론이다. 이것은 마귀가 아니다.’하고 멈췄는데 거기서 멈추면 안돼요.

어디까지 나가야 되는가? ‘이방민족을 주도하는 존재는 누구냐?’ 이것까지 물었어야 돼요. 그것은 바로 ‘짐승’입니다. ‘옛 뱀’이에요. 신학자들이 이걸 바벨론으로 한정시켜버리면 에덴동산에 나타난 뱀의 후손은 누가 돼요? 뱀의 알인 뱀 새끼가 된단 말이죠. 그걸로 멈춰야 되잖아요. 그러면 여자의 후손은 누구와 싸웁니까? 뱀 잡는 사람을 뭐라고 하죠? 땅꾼. 땅꾼이 돼요. 그럼 오늘날 성도는 누구와 싸운다? 뱀하고 싸우려면 우리는 모두다 땅꾼이 되어서 막대기하고 올가미 들고 다녀야 되죠. 그러면 영적 싸움입니까?

신학자들 중 신앙인이 없다는 것이 그런 이유 때문에 그래요. 신학자들은 자기가 신학이라는 이성적 결과물을 가지고 예언을 하려고 하는 사람들이에요. 이러면 돼요. 신학을 하되, ‘신학하는 이게 전부다 사기다’ 이러면 돼요, 어떤 목사님처럼. ‘신학, 이것도 사기다’ 이러면 문제가 굉장히 간단한데, ‘내 신학만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옳은 것이다’ 이러니까 이것은 뭐 자기의 악마성을 그대로 노출시키는 거죠.

이방민족은 배후에 마귀, 악마죠, 천사가 있어요. 천사가 있고, 천사의 졸개 귀신이 있고. 이것이 바로 나타난 것들의 계열이에요. 그리고 보이는 것은 나타난 계열의 그림자, 흔적으로서 인간세계에 보이는 것들이 있다 이 말이죠. 바벨론이라든지 앗수르, 에돔, 모압, 암몬, 그리고 블레셋 이들 이방민족의 특징, 공통점이 있어요. 전부다 뭘 노린다? 성전을 노려요, 성전을.

앗수르 같은 경우 산헤립 왕이 있을 때 랍사게 장군이 와서 유다 나라의 모든 성들은… 옛날에는 성이 있었잖아요. 군데군데 성이 있었다고요. 중세 봉건 사회도 그렇고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에요. 요새 같으면 도시죠. 기존의 성, 도시는 다 점령했어요. 서양의 성이라 하는 것은 숙소용이죠. 농사는 밖에서 하다가 안에 들어와서 거기서 잠을 자고. 혹시 적군이 오면 안 된다 싶어서 성 옆에다가 해자, 도랑을 파서 쉽게 정복 못하도록 조치하는 그게 성이잖아요.

모든 성은 다 점령했는데 마지막 남은 성, 히스기야가 있던 성 예루살렘 성은 점령 못했어요. 거기에 누가 있습니까? 성전이 있었고 히스기야 왕은 산헤립이 보낸 편지를 누구한테 보여줬습니까? 성전에 가서 하나님한테 보여줬어요. ‘하나님, 이런 내용이 왔습니다. 이런 내용이 왔는데 응답해주세요.’ 응답은 이사야 선지자가 해줬어요. 응답을 어떻게 하는지 왕도 모르고 다만 응답은 이거에요. ‘하나님이 해결하십니다.’ 이게 응답이에요. (왕하 19:1-7, 대하 32:20)

이게 상당히 어려운 이야기인데요. 미가 7장 7절을 봅시다. “오직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보며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나니 나의 하나님이 나를 들으시리로다” 지금 성도가 아닌 일반 사람들은 이걸로 성에 찹니까? 일반 사람들은 이게 성에 안 차요. ‘어떻게? 어떻게 하실 건데? 구원하시는 것은 고맙습니다만, 어떻게 하실 건데요?’

어제 오후기도에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는데 우리가 원하는 것은 절대로 주시지 않는다. 그 이유가 뭐냐? 우리가 원하는 것을 제공해버리면 우리가 원하는 것이 행함이 되어버려요. 내가 소망하는 것이. 그럼 은혜 안에 뭐가 섞입니까? 우리 행함이 섞여버리면 그것은 마귀가 주는 것이지, 주님의 피에서 나온 게 아니에요.

자, 여기서 여러분들이 진짜 오늘 이것은 꼭 알고 계셔야 돼요. 우리는요, 용서받을 자격이 없기에 용서를 하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용서 안에 뭐가 포함되어 있어요? 굳이 저를 용서할 필요가 없다는 요소가 포함이 되어야 돼요.

그러면 주께서 뭐라고 합니까? 너보고 용서하는 게 아니고, 너를 대신한 주를 생각해서 너를 용서하는 거예요. 주님이 하신 일을 드러내기 위해서 주님이 우리를 용서하는 거예요. 주님 덕분에 용서를 받는 거예요, 주님 덕분에. 그래야 우리의 행함이 주님의 온전한 공로에 안 섞이게 돼요.

이 원리를 그대로 보는 거예요. 미가 7장 7절에서, 나는 여호와를 오직 바란다. 우리는 이걸로 성에 안 찬다니까요. ‘그럼 어떻게? 어떻게 우리를 구원할 건데요? 그 방법을 좀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주세요, 구체적으로. 납득이 되도록.’ 이렇게 요구한단 말이죠.

시편 123편 2절, “종의 눈이 그 상전의 손을, 여종의 눈이 그 주모의 손을 바람 같이 우리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며…” 이걸 보면 그동안 우리들의 신앙생활이라는 게 얼마나 엉터리로 해왔는지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어제 주일에 제 아내한테 어떤 분이 전화를 했어요. 연세가 76세나 되는 여자 목사님이에요. 이런 이야기를 했답니다. “그동안 사람들 지옥만 보냈습니다.”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는지 본인이 설명을 해요. 예수님은 아버지한테 갔는데, 자기는 하나님께 가라고 했다는 거예요.

좀 더 구체적으로 시편 25편 15절, “내 눈이 항상 여호와를 앙망함은…”, 21절, “내가 주를 바라오니…” 너무나 모호하지 않습니까, 여러분들 어떠세요? 시편 보면서. 이런 시편 기도는 평소 교회에서 새벽기도마다 전부 다 하고 있잖아요. ‘하나님을 바랍니다. 하나님이여, 도와주소서.’ 다 하는데, 지금 정작 궁금한 것은 뭐냐? ‘도와줄게.’라는 응답 받아도 문제가 되는 게 ‘어떻게? 어떻게? 뭐 구체적으로 어떻게?’

가서 귀인을 만나가지고 ‘나는 당신을 양자로 삼았기 때문에 나 죽고 난 뒤에 유산을 25억 남기겠다.’ 이런 거. 뭐 그런 거라든지 획기적인 거, 깜짝 놀랄만한 어떤 거, 주께서 준비하신, 입 꼬리가 올라갈 정도로 기쁜 그런 걸 줘야 되는데, 여기 미가 7장 7절에 ‘나는 하나님을 바란다.’ 그래, 바라면 뭐? 막연하지 않습니까? 그게 무슨 우리 신앙에 활력소, 박카스가 되겠어요. 차라리 우황청심환 하나 먹는 게 낫겠다.

지금 이방민족은 짐승이 다루고 있습니다. 왜 짐승이 다루고 악마가 다뤄야 되느냐 하면 패가 갈리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누가 다루느냐? 여호와가 다뤄요. 그러면 여기서 이스라엘과 이방민족이라는 인간은 빠져야 돼요. 빠지고 대기하고 있고 싸움은 누가 하느냐?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싸움이에요. 어떤 국가의 운명은 주님께서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달려있어요.

베드로전서 5장 8절에 보면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그다음 뭐가 나옵니까?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그 사자 누가 풀어놨어요? 주님이 풀어놓은 거예요. 왜 그러느냐 하면 이스라엘에게 일어났던 그 상황, 그 틀이 끝까지 가요. 중간에 변동되는 게 아니에요. 이스라엘을 괴롭히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주변에 이스라엘만 노리는, 예루살렘만 노리는, 예루살렘이 없는 쪽에서 예루살렘을 노리는 쪽을 붙여요.

예루살렘은 출애굽기 24장에 보면 주의 이름으로 하나님과 만남의 장소가 성소에서 제단이 있는 곳이에요. 그게 성전이고. 그것을 시기하게 만드는 거예요. 이방민족의 우두머리 마귀가 그게 시기 나는 거예요. 얼마나 그게 샘이 나고 질투 나고 시기 나는지,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니까 나가면서 귀신이 하는 말이 “당신은 이 세상을 구원하러 왔습니다.” 막 고함을 지르는 거예요. 왜? 자기는 이미 잘렸으니까. 초나 치자 이 말이거든요. “입 다물어.”

무슨 말이냐 하면, 십자가를 빼버리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마귀, 귀신이 하는 것은 ‘어떤 위인이 와서 인간을 건진다.’ 이걸 강조했지, 구원자가 맥없이 이 땅에서 패배자가 된다는 이 요소를 빼버리는 거예요. ‘좀 더 힘센 사람 없어? 아, 와서 우리를 건졌으면 좋겠다.’ 이것은 마귀의 아이디어에요. 인간의 종교적 아이디어라고요.

그러나 우리 주님의 가는 길은 뭐냐? 종교로 해서 구원받으면 안 되기 때문에 종교마저 날아가 버려야 돼요. 종교가 마지막 인간의 희망인데 그 희망이 절단 나야 돼요. 어두움은 일체 어두워져야 돼요. 빛이 오매 어두움은 철저하게 절대적 어두움이어야 하는 겁니다. 어떤 인간도 어두움에서 빛을 발견할 수가 없고,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선지자가 아파요. 그리고 메시아가 아파요. 그리고 너무 아프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일을 안 당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고백했다면… 오늘날 된통으로 진짜 주님이 찾아온다면 ‘제발 구원이고 뭐고 간에 그것은 싫고 이 고통에서 면제만 해주길 나는 소원합니다.’라는 자기의 한계가 드러나겠죠.

두 번째 제목을 미리 정해보면 이렇습니다. ‘임계점’. 한계가 임하는 지점. 임계점, 거기서 탈출해야 되고 벗어나야 돼요. 그러면 임계점을 우리가 느껴야 되고 알아야 되겠죠. 마귀가 우는 사자라 할 때, 마귀가 우리한테 이야기하는 것이 임계점이거든요. 마귀를 돌파하면 되는데, 돌파하기 전에 마귀는 ‘이래도 돌파할 수 있겠어?’하고 마귀가 제안을 하는 거예요.

인간이 마귀를 돌파한다? 이거는 턱도 없는 소리입니다. 마귀는 인간에게 꿈쩍도 안 합니다. 인간이 어떤 묘수를 쓰고 자기의 낮춤과 어떤 절대적 자기부인을 한다 할지라도 마귀는 ‘더하지 왜? 그 정도야, 네 수가? 그 정도밖에 안 돼? 턱도 없어. 너 그래가지고는 나의 임계점을 못 뚫어.’

인간이 마귀의 임계점을 못 뚫는 이유는 하나님이 그렇게 허락하신 거예요. ‘나는 이렇게 이렇게 해서 신앙생활하고 이렇게 해서 예수의 피를 믿었습니다.’ 그 자체로서 마귀의 손아귀를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그럼 벗어난 사람은 뭐냐? 내가 한 게 아니고 누가 하셨다? ‘주님이 하셨다.’ 듣고 보니 굉장히 간단하죠?

‘주님이 하셨다’를 주님이 알고 있기 때문에, 악마의 시험과 악마의 임계점이 더욱 두껍게, 더욱 완벽하고 철저하게 우리를 덮친다는 사실을 성도만이 기뻐합니다. 그것을 감사합니다. 왜냐하면 행여나 우리가 ‘나는 이렇게 기도했고 이렇게 이렇게 신앙생활 했더니만 하나님께서 구원해줬다.’ 그게 평생 동안 우리에게서 늘 올라오기 때문이에요.

이게 유명한 노래 <싹 트네>에요. ‘싹 트네~ 싹 터요~’하는 애들 교회 노래 있죠. 싹 튼다는 거예요. 싹 트기만 해봐라. 마귀밥이 돼서 싹 튼 거 아주 군화발로 밟아버리죠. 언제 싹 텄지? 할 정도로. 그러니까 젊을 때 신앙생활 잘 한 싹 있잖아요, 싹 다 마귀가 밟아버렸어요. 그 싹에 마귀의 군화발 자국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나는 지난 날 이렇게 신앙생활 잘했다는 자체가 그게 주의 일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그게 마귀 일이에요. 마귀가 좋아하는 일이에요.

자, 그렇다면 문제가 되는 것은 49페이지에도 나왔듯이 ‘혈육적’이라 했는데, 결국 혈육적인 것을 우리가 스스로 나에서 떼낼 수 없다는 논리에 들어가죠. 떼낼 수가 없어요. 떼낼 수가 없는데, 그러면 선지자는 왜 이렇게 몸이 아프고 계시가 임하는가? 임하는 그 근거, 계열은 뭔가?

그것은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 아니고 나타난 계열이 있고, 나타난 계열과 인간이 보이는 것이 똑같은 현실을 이루는 거예요. 그러면서 인간은 나타난 것은 모르고, 즉 실상은 모르고 보이는 것으로 짜여진 짜임새 있는 이 허상이 실상인 줄 알고 있는 이 임계점, 한계에 전부다 막혀있는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하나님이라고 생각하고, 자기 백성이 이렇게 막혀있는데 자기 백성을 데려가는 좋은 아이디어 있으면 추천해주시기 바랍니다. 어떤 아이디어가 있겠어요? 지금 문제가 어디 있느냐 하면, 이거에요. ‘내가 거울을 본다’ 여기에 있어요. 내가 거울을 본다. 거울이 없으면 내가 누군지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거울이나 연못이나 하여튼 비치는 게 없으면 내가 알아요, 몰라요? 모르죠.

인간은 외부의 것으로 반사시켜서 자기를 파악해요. 자기규정을 그렇게 해요, 외부의 것에 반사시켜서. 모습으로는 거울이고, 의견으로서는 타인이고. 그러니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방해물이 뭐냐? 마귀가 지금 나를 장악하고 있잖아요. 마귀가 나를 노리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방법은 간단해요. 뭐만 없애면 됩니까? 나를 없애면 되죠.

나를 없애면 되는데, 이 ‘나를 없앤다’는 말은… 자아라는 것을 규정하기 위해서 타인이 있었고 거울이 있었어요. 어릴 때는 거울이고 나중에 커서는 타인이에요. 더 커서는 AI가 있고. 그러면 나를 없애는 방법은 뭐를 없애면 돼요? 타인과 나와 형성된 이 관계망을 없애면 되겠죠. 이것을 무의미화하면 되겠죠.

여러분이 하나님이라면 방법을 찾아봅시다. 나와 타인 사이에… 타인은 누구냐 하면 어릴 땐 아버지, 어머니죠. 아버지, 어머니가 ‘너는 천하보다 귀하다’고 했어요. 이게 ‘나’가 된 겁니다. 나는 ( ). 이 괄호에 (천하보다 귀하다)가 들어가겠죠. ‘나는 (천하보다 귀하다)’.

괄호가 자꾸 바뀌어요. 이것을 ‘인간은 변위체’라 해요. 자꾸 바뀌어요, 안의 내용이. ‘나는 ( )다.’ 바뀔 때마다 타인이 교체가 돼요. 아버지, 어머니가 ‘너는 (귀하다)’하다가, 청소년 때는 친구가 ‘너는 (둘도 없는 친구다)’가 돼요. ‘친구’가 들어가겠죠. 들어갈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없애는 차원에서 이 괄호 안의 내용도 같이 없애주는 겁니다.

어떤 타인이 와서 ‘참 좋은 친구다, 친구다’ 하는데 그 친구로 인하여 뭘 당할 때 내가 없어집니까? 배신당할 때. 친구로부터 배신당할 때. 하나밖에 없는 내 친구가 내가 어떤 조그마한 건물주 되는 것을 그렇게 방해해요. 또 자기 남편이 여자와 바람이 났는데, 그 아내가 자기 남편과 바람난 여자한테 상담하는 거예요. <대한민국에서 건물주 되는 법>이라는 드라마에 보면 그런 내용이 나와요.

드라마 보는 하나의 팁이 있는데, 이런 팁은 필요도 없는 팁이지만, 그 사람이 되기 위해서 어떤 관계망을 형성하는가 보면 돼요. 내가 지독하게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지독하게 나를 사랑해주는 것을 용인하고 협조하는 사람을 ‘친구’라고 불러요.

그런데 이 친구 중에서 갑자기 결혼할 상대자가 나타났어요, 남자에게. 결혼은 아직 안했고 한눈에 반해서 연애하는 사이라 합시다. 그때 남자 입에서 무의식적으로, 무의식도 골치 아픈데요, 자기도 모르게 무의식적인 발언이 나와요. “당신(여자)하고 엄마가 물에 빠져도 엄마는 안 건지고 당신을 건지겠다.”

왜냐? 그런 질문을 또 하거든요, 마지막 단계에서. 프로포즈가 될까, 안될까 결정되는 마지막 최종 면접시험에서 이 질문을 한단 말이죠. ‘당신 엄마하고 내가 물에 빠지면 누구를 건지겠는가?’하는 질문이 나오기 때문에, 선수 쳐서 그 질문에 답변을 미리 하는 거예요. 여자가 하는 말이, “당신은 그럼 죽잖아.” “나는 이 세상에서 없어져도 괜찮아. 당신만 산다면 나는 죽어도 좋아.” 이게 프로포즈의 꽃의 단계입니다. 다이아몬드는 비싸서 안되고, 3만원짜리 꽃에 담겨있는 진심이 되는 거예요. 하여튼 요 임계점만 넘으면 ‘넌 내 거야’ 되니까 무슨 수를 안 쓰겠어요. 다 한단 말이죠.

여러분께 질문을 하겠어요. 엄마하고 아들하고, 결혼도 안한 아들인데 둘이 너무 잘 살다가 갑자기 엄마가 암에 걸렸어요. 엄마가 암에 걸려도 곱게 걸린 게 아니고 지독한 고통 가운데 걸렸어요. 그때 아들이 하는 말이 ‘엄마가 너무 지독한 고통 가운데 있으니까 엄마는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 하는데, 나는 엄마와 내가 함께 사는 관계가 너무 좋아서 고통스럽더라도 엄마가 계속 고통 가운데 살았으면 좋겠다는 나의 이기주의를 용서해주시옵소서.’

이 아들 말이 할 말입니까, 안 할 말입니까? 둘 중에 하나다. 1번-할 말이다, 2번-안할 말이다. 지금 누가 누구를 사랑하는 거예요? 이 대사가 <우리가 사랑이라고 믿는 것은 (Hope Gap)>이라는 2022년도 영화에 나오는 대사에요. 주인공 여자가 암에 걸렸을 때, 아들은 엄마를 사랑하는 표현을 이렇게 하는 겁니다. ‘나 엄마 없으면 못 사니까 너무 보고 싶으니까 고통스럽더라도 참고 계속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이게 엄마를 욕보이는 건지….

자기는 진심이죠. 인간의 진심은 무의식에서 나오기 때문에… ‘옳다, 옳지 않다’는 것은 의식 차원에서 판단되지만, 무의식 차원은 충동이라 해서 ‘옳다, 그르다’가 적용이 안돼요. 취중진담이라고 그게 적용이 안 된다고요. 그러니까 이런 대사나 주변에 있는 모든 이야기는 한 마디로 이 세상에 뭐가 없다? ‘해답’이 없어요. 해답 자체가 없어요.

해답이 없다는 말은 진실도 없고 진리도 없다는 거예요. 백 사람이면 백 사람 다 자기 나름대로의 진실이고 진리고. 보편적인 진리와 진실은 없어요. 왜냐하면 인간은 의식되는 자아가 무의식까지 통제가 안 되고 관리가 안 되기 때문에.

전에 이야기했지만 여기서 다시 한 번 이야기합니다. 부부생활에서 제일 갖춰야 될 덕목은 뭐냐? 반드시 휴전선, 중립 지역을 만들어놓고 서로가 이 선을 넘으면 안돼요. 선을 넘기 전까지는 의식으로 통제가 되지만, 선 너머는 충동의 지역이기 때문에 입에서 무슨 소리가 나올지 몰라요. ‘갈라서!’ 이렇게 할 때, 갑자기 무슨 소리가 나올지 모르는 거예요.

자기는 이 선을 넘었는데 저쪽에서 안 넘을 경우에는 대화라는 게 서로 사맛디 아니할쎄. 훈민정음을 만들든지 해야지… ‘나라말싸미 듕귁에 달아 문자로 서로 사맛디 아니할쎄, 이런 젼차로 어린 백셩이 니르고저 홀배이셔도… ’ 이런 까닭에 백성들이 말하고자 하여도 서로 맞지를 않으니까 전화 통화가 안 되는 거예요. 자기 주장하기 바빠서.

아까 프로포즈한 남자의 경우도 의식적으로는 ‘나는 없어도 당신을 살리겠다. 나는 죽지만.’ 무의식적으로는 뭡니까? 인간은 무의식적으로 통제, 관리가 안 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의 무의식을 자기가 죽일 수 없습니다. 이게 육입니다.

자, 그럼 해결점은? 결국 정리해보면, 인간의 자아는? 자아 덩어리가 실타래라면 엉켜있고 뭉쳐서 얽혀있는 실타래를 하나하나 다 들춰보면 이건 타인의 인정이죠. 타인의 지시, 타인의 명령입니다. 타인의 명령으로 자아를 만드는데 이렇게 타인의 말을 듣고 그렇게 구성된 자아는 인간의 욕망, 충동, 인간의 무의식을 놓치는 거예요.

욕망, 충동은 누가 쥐고 있습니까? 이건 누가 쥐고 있죠? 마귀가 쥐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은 마귀의 한계점을 벗어날 수 없어요. 마귀의 한계점을 벗어날 수 없는 이유가, 인간의 이성, 윤리, 도덕, 착함은 자아 수준이기 때문에 자기를 수정하고 정신 차려서 바짝 하지만, 인간의 충동은 우연적 요소기 때문에 이것은 어떻게 다룰 수 없어요.

그래서 20년 동안 바르게 살아도 21년 째 무슨 일이 폭발할지 본인도 모르는 거예요. 술 한 잔 먹고 무슨 짓을 할지. 뭐 평소에는 점잖은 사람이라 하는데, 평소에 점잖지. 마그마가 짓눌려 있으니까요. 이게 폭발해버리면 소용없는 거예요.

하나님의 방법은 뭐냐? 이 타자까지 다 죽여 버립니다. 이 타자, 자아 이걸 다 죽여 버려요. 하나님이 타인과 자아를 부정한다고 해서 자아가 스스로 자기를 부정할까요? ‘졌습니다’ 이렇게 됩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 패배했습니다. 손들고 나옵니다.’라는 말을 누가 하느냐? 인간 내부에 있는 마귀가 시켜서 ‘이때는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야. 다시 해봐.’하고 찬송가까지 불러요. ‘천부여 의지없어 손들고~’ 손들고 부르니 뭐합니까? 그때가 5초 내지 6초인데 내일 되면 내일 또 몰라요.

아예 무의식까지 합쳐서, 그리고 자아까지 합쳐서, 타자까지 합쳐서, 육까지 가족까지 합쳐서 몽땅 없애는 방법은 뭐냐? 그게 바로 ‘사랑’입니다. 그게 사랑인데, 왜 사랑이 되느냐 하면 사랑의 출처가 기존에 인간과 엮인 출처에서는 일체 사랑이 안 나옵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4장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 것이 아니다’를 사랑의 내용으로 품어버려요. 너는 내 사랑받고서도 나를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 ‘너는 사랑한 적이 없다’를 둘둘 말아서 포장지로 사랑이 되는 겁니다.

사랑 대목을 한 번 봅시다. 고린도전서 13장 1절,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 그다음 2절로 뜁시다. “내가 예언하는 능”, “모든 비밀과 지식을 아”는 것,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 야, 대단한 믿음이다. 그다음 뜁시다. 3절,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사도행전에서 사람들이 내 거다 하지 않고 다 내놨다 했죠. 가난한 사람들이 가져갔다 했죠.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할지라도. 그리고 그 다음 봅시다.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심지어 문둥병자가 먹던 음식을 먹고 문둥병자를 치료하면서 자기도 문둥병 걸리는 천주교 성자라 하는 사람, 리스트에 많죠. 할지라도 뭐가 없으면? “사랑이 없으면”.

사랑은 인간의 행함과 섞입니까, 안 섞입니까? 안 섞이는 거예요. 보이는 것과 섞이지 않고, 보이는 것과 절단되고 끊어져 있는 거예요. 그다음 13장 13절 봅시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했죠. 그러면 소망과 믿음, 소망과 사랑 이것이 전부입니까? 아니죠. 믿음과 소망이 있더라도 그 원천은 뭡니까?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사랑은 어디 있습니까? 이건 선물이다. 없다는 뜻이에요. 사랑은 없는 거예요. 이 세상에 사랑은 중앙시장에 안 팝니다. 장날에 안 팔아요. 사랑은 없는 겁니다. 사랑을 받으면 그 사람은 ‘내가 생각하지 않는 나’가 되어버려요. 내가 생각하지도 못한 나가 돼요. 그럼 내가 생각하지도 못한 내가 새삼스럽게 사랑을 받아서 나오는 그 행위와 행세와 마음가짐은 뭐냐? ‘무엇이 사랑이 아니었다.’를 신나게 드러내는 행동이에요. 신나게.

“이거 성심당 빵인데 좀 드세요.” “아이고, 웬 사랑.” “사랑 아니거든요.” “돈 아쉬워요? 그럼 내가 오만 원 빌려드리겠습니다.” “아이고, 웬 사랑을…” “사랑 아니거든요!” 내가 구제할지라도 사랑이 아니고, 설교해도 강의해도 사랑이 아니고, 심지어 목숨을 바쳐도 사랑이 아니거든요. 내 목숨 그게 무슨 소용 있습니까. 내 선교가 무슨 소용이 있어요. 사랑이 아니에요.

그럼 뭐가 사랑이냐? 이걸 사랑이 아니라고 누가 떠밀어요. 수넴 여자를 뒤에서 떠밀듯이, 엘리야가 떠밀듯이. 자꾸 사랑이 나로 하여금 그렇게 하게 하셨어요. 뭐라고? ‘사랑이 아닙니다.’라고 이야기하라고. 이건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의 특징은 유한이 아니고 무한에서 시작해서 무한으로 나와요. 누가복음 10장에 나옵니다. “혹시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더 보태드리겠습니다.”(35절)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거든요. “이 사람이 치료받을 때, 현재 시점에서는 모르겠는데 비용이 더 들면 그것까지 제가 대겠습니다.”

이것은 마치 엘리사, 엘리야 이야기에서 밀가루통과 기름통에서 밀가루, 기름이 계속해서 나오는 것처럼, 오병이어처럼 유한을 통해서 무한이 나오기 때문에 인간은 악마에 의해서 유한한 존재의 임계점을 가졌지만 무한은 사랑의 무한으로 주어졌기 때문에 사랑이 사랑을 드러내기 위해서 자기 백성을 놓치지 않고 자기 백성을 천국까지 반드시 이끌고 가십니다.

정리하면, 사랑이라 하는 것은 나를 생각하지 못하게 하는 거예요. 사랑받고 거울 보세요. ‘저건 내가 아니야.’ 이러면 돼요. 내가 아는, 내가 파악하는 나는 전부다 가짜니까. 내가 가짜라는 것을 아는 그 가벼움, 즐거움. 가짜기 때문에 어떤 행동에 대해서 책임을 집니까, 안 집니까? 책임을 안지죠. ‘가짜가 가짜 값 했다’로 끝나는 문제에요.

보통 여자들이 시집가면 뭐라고 얘기 듣습니까? 시집와서 며느리 값하라 하잖아요. 며느리 값하죠. 가짜 며느리, 가짜 아내. 가짜 남편. 왜? 진짜는 내 소관 아니니까. 어차피 보이는 세상에서의 모든 것이 허상이기 때문에. 실상은 따로 있거든요. 허상을 보여줌으로써 자기의 임계점을 보여줌으로써 실상을 간접적으로 소개하는 기능, 이게 성도의 남은 삶입니다. 이게 선지자의 모습이에요.

선지자의 특징은 이거에요. ‘모든 것이 오류다’. 왜? 뭐가 잘못되었는데? 뭐가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함께 안 있겠대. 임마누엘 안 하겠대. 나 너하고 상대하지 않겠대.’ 이렇게 돼요. 그럼 인간하고 상대할 사람은 누가 있느냐? 여기에 한나 예를 들어봅시다. 이거하고 마치겠습니다. 사무엘상 1장에 한나가 어떤 식으로 변환되는가 한번 보세요.

1장에서 한나가 아기가 없다? 뭐 별 문제없어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누굴 붙여주는가? 6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므로 그 대적 브닌나가 그를 심히 격동하여 번민케 하더라” 브닛나가 아들을 낳게 만들어요, 하나님께서. 성태케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니까.

브닛나는 아들 있음의 존재가 되고 한나는 아들 없어요. 아들 없으니까 인간이 자기가 안다고 여기는, 있다고 여기는,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인간들로 봐서는 보이는 것으로 판정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성태케 했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존재는 아들이 있고 ‘너는 필요 없어.’하면 아들이 없다,라는 쪽으로 판정을 이미 내려버린 거예요. 그런 판정을 하나님께서 허락해요. 우는 사자와 같이 마귀가 찾으니까요. 여기 ‘대적’이라고 되어 있어요. 대적. 대적이 그런 식으로 하도록 하나님께서 조치를 해요.

그렇다면 보이는 세계에서 나타난 세계와 끊어져있는 임계점을 어떻게 돌파할 수 있는가? 그것은 이런 수모를 한나가 다 받는 거예요. ‘그래, 나 저주받았다.’ 한나가 처음부터 이랬습니까? 원통, 절통, 분통해서 통곡의 기도를 하러 갑니다. 따지러 갔는데, 2장을 봅시다. 2장에서 한나가 뭘 알고 있느냐 하면 6절,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기서 누가 빠집니까? 인간 본인의 기대나 소망이나 소원은 여기서 완전히 접촉이 끊어졌죠. 보이는 계열이기 때문에 나타난 계열에 합류되지 못하고 끊어졌죠. 끊어졌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나타난 것을 증거하기 위해 보이는 것을 쓰셨잖아요. 그래서 1장에서 한나가 기도해서 낳은 아들을 어떻게 합니까? 자기와 분리시키죠. 자기와 분리시킵니다. 자기 소유가 안 되게 해요. 마치 마리아가 예수님을 떠나야 하는 것처럼.

한나가 떠났다는 말은 한나에게 사무엘이 소유물이 안 된다는 말이죠. 그럼 어떤 상태입니까? 원수가 조롱했던 상태하고 똑같은 상태인데, 그때는 원통, 분통, 절통했었는데 이쪽은 도리어 감사하죠. 왜냐하면 ‘너는 보이는 것들과 접속하고 같이 놀아.’ 그런데 주께서는 나를 통해서 보이지 않는, 사무엘을 잉태하는 비밀의 계열, 하나님의 언약 계열에 속해서 거기에 사용당해졌다는 것. 소속이 이미 주님 소속이라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된 겁니다. 감사의 제사를 드리죠.

따라서 이와 같은 과정이 우리로 하여금 더 이상 우리 생각할 필요 없고 진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새롭게 만든 우리로써 다루는 방법이에요. ‘나는 사랑한 적이 없습니다. 나는 가짜입니다. 나는 오류입니다.’ 그걸 서슴없이 말할 수 있다는 게 하나님이 만든 새로운 피조물이에요. 하나님이 만든 새로운 피조물이어야 나올 수 있는 고백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 우리에게 칼이 되어서 우리를 찌를 때 참 아프지만 그게 과정인 것을, 필히 그래야 천국 백성이 된다는 그 과정을 우리는 이제는 받아들여서 계속해서 주의 하는 일로 인하여 다른 종족의 사람으로서 주의 사람의 증인으로서 가볍게 세상을, 주님을 증거하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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