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강의

미친 자의식

아빠와 함께 2025. 11. 2. 09:37

광주강의20251031a 사무엘상 29장 16절(미친 자의식)-이 근호 목사


말씀은 기억하는 게 아니에요. 기억을 하지 말라고 말씀을 주시는 건데요. 왜냐하면 기억해버리면 본인이 정답을 알아야 될 사람인 것처럼 착각을 하게 되거든요. 그럼 말씀은 어디서 확인되느냐? 내가 성경을 통해서 알았던 그 기억이 전혀 말씀이 없는 실생활과 부딪치면서, 실제 세상은 내가 알았던 지식 기억을 삭제시키는 동네라는 사실을 경험케 하는 겁니다.

‘예수님 좋다’, ‘예수님 말씀 귀하다’, ‘저런 권세는 어디서 왔는가’ 그렇게 환호했던 그 시대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자기들이 원한 그러한 정치적 권력이 없을 때 아주 깔끔하게 예수님을 포기했습니다. 예수님을 변호하지도 않고요. 그걸 ‘잊었다’고 한다면 잊은 것에 해당되겠죠. ‘참 좋았다’, ‘훌륭했다’ 이건 어디까지나 과거잖아요, 과거. 기억은 과거와 관련되어 있는데 성경은 인간이 과거에 사는 존재인 것을 지적하기 위해서 성경을 주신 거예요.

인간은 자꾸 과거에 살거든요. 자기 경험한 것, 그게 기억에 남고 그 기억 속에서 ‘그게 자아다’라고 자꾸 정리정돈을 해요. ‘자기가 알았던 기억 속에 있는 내가 나다.’ 그럼 현재의 나는? 모르죠.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현재의 나를 다시 일깨우기 위해서 과거에 알았던 그 말씀에 대한 지식을 무산시키는 식으로 새로운 상황들이 자꾸 일어나는 겁니다.

‘인간 존재는 주변 변화를 자아낸다.’ 인간 존재는 주변 변화를 자아냅니다. 고요한 연못에 돌을 던져놓고 ‘내가 기억하기엔 연못이 고요했었다.’ 이건 말이 안 되죠. 그건 말이 안돼요. 물론 자기가 돌을 안 던지면 ‘연못은 고요했다’가 되겠죠.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인간 자체를 연못 속에 집어넣습니다.

이 연못이 삶의 상황이잖아요. 삶의 상황 속에 나를 집어넣어놓고, 내가 보니까 호수는 참 잔잔했는데… 갑자기 호수가 안 잔잔하죠. 누가 들어가서 그래요? 본인이 여기 들어가서 그래요. 호수의 변화는 내 존재의 개입으로 말미암아 주변에 변화가 일어나는 겁니다. 그럴 때 ‘세상은 이러이러하다’고 내가 이렇게 정리정돈을 잘 해놨는데 본인이 이 세상 속에 들어가니까 이 정리정돈한 것은 다 지나간 한때의 내 정리에 불과하지 정답은 또 새롭게 바뀌어져야 마땅하죠. 달라져야 마땅하죠.

그래서 오늘 본격적으로 질문&답변, 질문&답변 쭉 나가는데 성경구절을 하나하나 보면서 성경구절을 처음 봤던 그때와 지금 내가 그만큼 오랫동안 세상에 살면서 내가 경험하고 또 나로 인하여 변화된 환경 속에서 이 성경말씀은 어떻게 한결같이 진리가 되느냐를 확인해보면 되겠죠.

성경말씀이 굉장히 많이 나옵니다. 숫자 매긴 것만 해도 총 157로 되어 있는데, 겹치는 것도 계산하면 160, 170개가 훨씬 넘겠죠. 그 성경구절을 보면서 그때 알았던 해석과… 지금 이만큼 나이가 들고 또 세상환경이 나로 인하여 바뀌어진 속에서 이 성경 말씀은 지금 이 순간, 어제 말고 과거 말고 이 순간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해석이 우리에게 제공되는가. 그거 알면 되는 겁니다.

첫 번째 질문이 [신접하는 술법과 사울의 예언]이죠. 일단 질문을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질문> 첫째, 사무엘상 28장에서 신접한 여인에 의해 죽은 사무엘이 나타난 이유는 무엇입니까? 둘째, 사무엘상 19장 18-24절에서의 사울 왕도 여타의 선지자처럼 하나님의 신에 의해 예언도 하고 벌거벗고 있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는데 그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이렇게 두 가지 질문을 어떤 분이 하셨어요. 이 질문은 제가 창안한 게 아니고 직접 상황 속에서 주어진 질문이죠. 이 첫째, 둘째의 두 질문을 동일한 질문으로 보고 답변이 연관된다 생각하고 질문하신 이유가 뭐냐?

신접한 여인을 찾을 정도로 악한 사울 왕이라면 그 인간이 찾는 신 자체가 애시당초 하나님과 아무 상관이 없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인간이어야 그게 사울의 본질이 일관성 있게 가는 건데요. ‘결국은 신접한 여인 찾아가고 하나님께 대적하는 그런 나쁜 짓하는구먼.’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기대치가 있잖아요. ‘처음부터 나쁘더니만 역시 끝까지 나쁘네.’ 이런 게 있는데, 그렇게 되면 사무엘상 19장에 나오는, 예언도 하고 하나님의 성신이 충만해서 벌거벗은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는 그때 그 사울 왕과 지금 신접한 여인에게 찾아갈 정도로 정신적으로 피폐한 사울 왕 사이에 일관성이 깨지는 거죠. ‘사울은 나쁜 사람이야. 처음부터 나빴어. 그러니까 끝까지 나쁘지.’라는 성경을 보는 본인의 일관성이 성경에 의해서 당황스럽게 되어버린 거죠.

‘사울 왕은 하나님 신하고 아무 상관도 없어. 너무 육적이야.’ 뭐 이렇게 되어야 드라마가 짝짝 맞아지는데, 사울도 한때 성신이 임해서 예언도 했다 이 말이죠. 그러면 그런 사울이 신접한 여인이나 찾아다니면서 하나님 말씀에 위배되는 이런 행동을 할 때 ‘오늘날 성도가 과연 신앙의 일관성을 자신만만하게 유지할 수 있습니까?’ 이게 살짝 겁이 나는 거죠.

결국 모든 질문은 누구 문제다? 자기 문제에요. 자기 문제. ‘내가 사울이라면? 내가 사울이라면 한결같이 하나님의 신이 임했을 때의 그 정신을 천국 갈 때까지 계속 유지할 수 있을까? 하나님의 신이 임했던 사울도 결국은 이렇게 신접한 여인을 찾을 정도로 이렇게 하나님을 대적했다면 이거 뭐 나의 미래도 한결 같다고 주장할 수 없지 않은가?’ 불안감이 어느새 슬며시 밀려들겠죠.

그럴 때 보통 사람들이 취하는 태도는 이거에요. ‘나 성경 안 볼란다. 나 안 볼란다, 이거.’ 아담에게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 할 때 아담의 결정은 그거였어요. 이브도 마찬가지고요. ‘하지 마라 하는 것을 아예 없애버리면 누가 나한테 지적질 하는 근원 자체가 날아가버리고 그렇게 되면 내가 죄책감을 가질 하등의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이게 인간이 범죄하고 난 뒤에 자기 범죄에 대한 정당성을 제공하는 심보에요. 그 심보가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여전히 작용하고 있죠.

그러면 이 질문을 이렇게 했으니까 제 생각에 답변은 이렇습니다, 하기 전에 여러분도 같이 ‘질문한 사람이 여러분에게 찾아와서 질문한다면 여러분이 어떤 답변을 할 것인가’ 그런 생각을 가지고 한번 생각해봅시다. [첫째, 사무엘상 28장에서 신접한 여인에 의해 죽은 사무엘이 나타난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렇게 되어 있죠.

무슨 뜻입니까? 안 나타나야 정상인데 나타나서 이상하다, 이 말이거든요. 죽은 사무엘이 나타난 게 이상하다니. 하나님은 “네가 이상한데?” 그렇게 할 수 있잖아요. 아니, 죽은 자는 나타나지 말아야 된다는 것. 죽은 자는 두 번 다시 나타나지 말아야 된다는 것이 이 세상의 상식인데 나타나버리면, 우리나라 옛날 토속 종교나 다른 종교에서 무당들이 귀신 불러내는 것도 ‘그건 귀신이 아니고 진짜 인물이다’, ‘아니야 진짜가 아니야, 그건 악마의 속임수야’라고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을 내가 자신만만하게 가질 수 없다는 게 또 하나의 불안감으로 작용하는 거죠.

이 땅에 살면서 누구와 헤어졌었고 오늘 그 사람을 만날 줄 예상도 못했는데 길에서 갑자기 동창생 누구를 만나버리면, 동창생이 아니라 연락도 안 되는 일가친척을 만나버리면 우리의 마음가짐은 어떻습니까? 1번 반갑다, 2번 놀랍다. 몇 번입니까? ‘아니, 연락도 안 하시고 이렇게 오시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도 치우지 않았는데.’ 이렇게 되는 거죠. 상당히 두렵죠.

연세 많은 이모님이 왔다. ‘필시 아들이 또 돈 문제에 걸렸구나. 그래서 돈 빌릴 데 없으니 만만한 나한테 빌리러 오는구나.’ 이런 생각이 제일 먼저 들 게 아니겠습니까. 우리 집도 돈 없는데 생전 연락 안하던 이모님이 왔다는 것은 말썽쟁이 아들이 또 사고 쳐서 합의금 없어가지고 ‘내가 빨리 갚을 테니 큰 거 석 장만 필요하다.’ 이럴 수 있잖아요.

하여튼 놀랄 수밖에 없죠. 놀랄 수밖에 없어요. 갑자기 나타났다는 거예요. 이 세상에는 산 사람만 살고 죽은 사람은 나타나지 않아야 된다는 것이 우리의 확고한 신념인데 갑자기 나타났으니까 그 당시에 나타나게 해달라는 사울도 놀랐고, 그리고 그 사건을 들여다보고 있는 성경 보는 모든 사람들도 놀라고 그러죠.

자, 그러면 ‘놀랐다’, ‘예상 밖의 일이 벌어졌다’는 것은 그 당시 사울이나 신접한 여인이나 사무엘 보고 말하는 게 아니고 이것을 기록한 성경, 이 성경을 보고 있는 오늘날 독자들에게, 성도니 성도 아니니 하면서 성경을 보고 있는 우리들을 놀라게 하잖아요. 성경이 우리를 놀라게 한다고요.

죽은 자가 살아난다면 한 이십 년 전에 돌아가신 우리 어머니, 우리 아버지도 무당 불러서, 무당이 심하다 하면 귀신 불러내는 신부나 목사 있을 거 아니겠습니까, 아니면 용한 권사님 불러서 나도 보고 싶은 부모님이나 물론 부모님도 보고 싶지만 일찍 죽은 아들 같으면 불러내서 ‘천국 가서 잘 사느냐?’ 이렇게 안부 물을 수도 있다 이 말이죠.

어쨌든 간에 예상 밖의 일이 일어났다는 것은 ‘미처 나를 방어하지 못하게 나를 방어하는 자기 방어기제가 힘들게 되었다.’라는 뜻이에요. 잠깐만요, 잠깐만요, 잠깐만요! 막 이러고 싶은 거예요. 그러니까 성경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평소에 사나 죽으나 숨 쉬나 눈 뜨나 눈 감으나 항상 자기를 지키는 데에 이 몸이, 우리 생각 이전에 우리 몸 자체가 내 몸 유기체를 지키는 데에 모든 에너지를 집중하고 있다는 것을 들통내버린 겁니다.

그렇다면 사무엘이 나타나서 사울에게 한 지적은 오늘날 누구에 대한 지적입니까? 성경을 보고 있는 모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지적으로 이 성경구절이 나와 있는 거예요. 그럼 이 문제가 어떻게 풀어지는가? 이겁니다. ‘사무엘과 사울이 같은 영역에 속하는가?’

나타난다/ 안 나타난다. ‘나타나면 함께 있을 것이고 안 나타나면 사무엘은 하늘나라 가고 사울은 이 동네에 산다.’라는 인간들의 상식이 하나님한테는 먹혀들지 않는다는 거예요. 사무엘과 사울이 함께 살아도 둘이 속해있는 영역은 같은 영역이 아니었습니다. 그 예로 열왕기상 11장 36절 보겠습니다. 여기 나오는 해석은 집에 가서 책보면 다 나와요. 그거 읽으려고 또다시 이 모임이 있는 게 아니거든요.

열왕기상 11장 36절, “그 아들에게는 내가 한 지파를 주어서 내가 내 이름을 두고자 하여 택한 성 예루살렘에서 내 종 다윗에게 한 등불이 항상 내 앞에 있게 하리라” 이렇게 되어 있죠. 여기에 ‘한 지파’, ‘내 이름’, ‘택한 성 예루살렘’, ‘내 종 다윗’, ‘한 등불’ 전부 다 이건 보편적인 게 아니라는 거죠. 보편적인 것 중에서 딱 집어서 한 곳에 집중해서 특별히 너에게만 여기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의 혜택이 집중해서 너에게 꽂혀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겁니다.

그럼 여기 솔로몬은 다른 일반 사람과 동일합니까, 동일하지 않습니까? 동일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다윗에게 준 한 등불, 약속이 솔로몬이라는 인물에 집중되어 있거든요, 집중. 응축되어 있단 말이죠. 그런데 사울은 사무엘 선지자와 자기하고 동급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것은 모든 인간들이 남들을 볼 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자기 방어하기에 편하기 때문이에요. 편하죠. 편한 거예요.

제가 글을 써볼 테니까 맞는지 틀린지 여러분들이 판정해보세요. ‘진짜 웃음은 모든 인간에게 동일하다.’ 맞습니까, 틀렸습니까? 전 세계 어디서나 모든 인간은 똑같다. 맞아요, 틀려요? 맞는 말이죠. 왜? ‘웃음’이 아니고 ‘진짜 웃음’이니까. 기분 좋아서 진짜 웃는 웃음은 그 사람이 공산주의냐 민주주의냐 자본주의냐, 어느 나라냐, 아프가니스탄 사느냐, 아프리카 어느 나라 사느냐, 흑인이냐 백인이냐, 잘 사느냐 못 사느냐, 어린이냐 어른이냐 상관없이 진짜 웃음은 똑같아요. 입 꼬리가 올라가면서 그 순간만큼은 아무 걱정 없이 마음껏 웃는 진짜 웃음은 진짜 웃음이에요. 차이점 없죠. 그렇잖아요.

본인이 기뻐서 웃는다는 것은 각자 본인에게 똑같은 모습이다 이 말이죠. 코미디에서 웃겨가지고 그 청중들이 웃는데 “네 웃음은 가짜야!” 이런 거. “지금 네 집에 애가 아픈데 웃을 쨉이 돼?” 이렇게 나오면 안돼요. 애가 아픈 건 아픈 거고, 웃는 것은 웃음이 나서 웃는 거예요. 이게 무슨 차이가 있어요? 차이가 없죠.

그러면 이걸 바꾸겠습니다. ‘진짜 슬픔은 모든 인간에게 동일하다.’ 맞습니까, 틀렸습니까? 똑같아요. 웃음이 똑같으면 진짜 슬픔도 똑같아요. 똑같습니다. 그럼 슬픔의 자리에다 전쟁을 집어넣습니다. 괄호가 편리하네요. ‘진짜 ( )은 모든 인간에게 동일하다.’ ‘진짜 전쟁은 모든 인간에게 동일하게 느껴진다.’ 맞아요, 틀려요? 맞죠. 연개소문 전쟁이나 2차 대전 전쟁이나 6․25전쟁이나 전쟁이라 하는 것은 그 공포감, 두려움, 긴장감이 동일하죠. 동네 아이들 구슬 따기, 화투장에서 하는 그 전쟁,… 똑같아요. 대통령 선거도 마찬가지 똑같잖아요. 그럼 이 괄호에다 전쟁 말고 죽음. ‘진짜 죽음은 모든 인간에게 동일하다.’ 동일하죠. 모든 인간에게 동일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남을 볼 때 ‘저 사람이 느끼는 것과 내가 느끼는 것이 동일할 수도 있다.’라고 상대를 봐요. 그래서 사울은 사무엘을 그런 식으로 생각해왔던 겁니다. 같은 인간인데 이때껏 알고 지냈던 왕과 선지자 사이인데 불러내면 나한테 불려나올 수 있는 대상으로 본 거예요. 똑같은 인간이니까.

그런데 성경에서는 똑같다는 인간의 생각에다 뭘 집어넣느냐 하면 이걸 집어넣어요. ‘전쟁’을 집어넣습니다. 지금 사울 왕이 시도 때도 없이 무당 만나서 사무엘 불러내라고 이렇게 졸라댔습니까? 아니죠. 지금 뭐할 때입니까? 블레셋과 전쟁 중이죠. 전쟁에서의 다급함, 승리해야 된다는 것. ‘여기에 대해서 나는 전쟁에서 승리해야 되고 내가 승리해야 이스라엘이 블레셋으로부터 안전하고 안전하게 되면 나는 이스라엘 왕으로서 제 역할을 다 한다. 이 다급함에 사무엘도 같이 내 다급함을 이해해줄 것이다.’해서 사무엘을 불러내려고 한 겁니다.

그럼 전쟁은 무엇으로 되어 있는가? ‘challenge(도전) 그리고 response(응수)’. 전쟁은 도전과 거기에 대한 응수 또는 응답 또는 반응. 이걸 토인비(Arnold Joseph Toynbee, 1889-1975, 영국)라는 사람이 이야기했어요. (저서『역사의 연구(A Study of History)』에서 핵심적인 개념으로 인류 문명이 단순히 환경이나 인종, 운명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도전에 대한 사회의 응전 방식에 의해 발전한다고 보았다. 강력한 사회적 정치적 도전 중 대표적 사례로 전쟁을 들었다.)

인간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에요. 토인비가 이런 이야기를 한 것은 빙하기가 끝나고 난 뒤에 갑자기 지구가 건조한 세계가 되었다는 거예요. 이전에 살만큼 그냥 살았던 사람들, 건조한 세계 전의 인간은 다 죽어버리고 문명으로 바뀐 것에 대해서 ‘건조함’이라는 자체를 자연이 주는 challenge, 도전으로 본 거예요, 도전.

이 도전에 대해서 응수하고 반응을 나타내서 대책을 세우는 사람은 '창조적 소수'라는 거예요. 창조적 소수가 등장하면서 왕이 등장하는 거예요. 성경에서는 니므롯(창 10:8-12) 같은 영웅이 등장하는 거예요. 영웅. 영웅, 왕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창조적 소수에요. 작은 숫자에요, 작은 숫자. 그럼 나머지는 잡동사니가 되는 거예요. 잡동사니.

그 잡동사니 100명 뽑아봐야 비창조적이에요. 도전에 대해 대응할 수 있는 자질과 의지, 집념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에요. 맨날 ‘아, 어쩌지? 어떻게 해야 되지? 어쩌지?’ 이러면서 눈치만 봐요, 눈치만. ‘창조적인 소수자, 영웅, 그런 신화적인 영웅이 나타나서 우리가 해내지 못한 위대한 업적을 해내게 되면 우리는 그 사람의 공로를 치하하고 그 사람의 영웅적인 권력 아래에서 새로운 세대의 미래를 개척할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다.’ 그런 태도를 가진 자들이에요.

열왕기하 1장 8-9절을 보겠습니다. 전부다 성경 이야기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저희가 대답하되 그는 털이 많은 사람인데 허리에 가죽 띠를 띠었더이다 왕이 가로되 그는 디셉 사람 엘리야로다” 이렇게 되어 있죠.

이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 열왕기하 1장 1절에 “아합이 죽은 후에 모압이 이스라엘을 배반하였”거든요. “아하시야가 사마리아에 있는 그 다락 난간에서 떨어져 병들매 사자를 보내며 저희더러 이르되 가서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이 병이 낫겠나 물어 보라 하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럼 이건 엘리야한테 물은 게 아니죠. 그때 엘리야가 창조적 소수자가 되어서 먼저 지적합니다. “아니, 물을 신이 없어서 우상한테 묻냐? 너는 반드시 죽는다.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반드시 죽는다.”라고 할 때 그때 여러분 아시다시피 부하 50명을 보내서 엘리야를 데려오라고 세 번씩 이야기했죠. 세 번씩. 첫 번째 50명 죽었죠. 두 번째 50명 죽었죠. 세 번째 50명은 어떻게 됩니까? 살려 달라 해가지고 그야말로 죽은 채로, 살았지만 죽었다 치고 그 엘리야와 함께 내려오는 거예요.

그럼 거기 갔던 150명, 그리고 왕은 뭡니까? 엘리야의 예언 앞에서는 뭐가 돼요? 잡동사니가 돼요, 잡동사니. 잡동사니 되는 거예요. 역사가 없다는 말은 새로운 사실을 제공한 자가 없다는 거예요. 그럼 창조적 소수는 뭐냐? 이런 자연적인 어려움, 전쟁 같이 정치적인 어려움이 오기 전까지는 이러한 일, 이러한 인물이 나타날 줄 예측도 못했는데 이걸 도전으로 여기고 거기에 반응을 나타내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게 나타날 때 이것을 creative, 창조적이라 합니다. 인류의 역사는 그렇게 시련과 어려움을 통해 역사적으로 간다.

그러면 이 창조적 소수, 영웅에 대해서 밑의 잡동사니들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영웅들이 하는 생각, 태도, 행동, 말을 닮아내려고 애쓰죠. ‘아, 저분은 저렇게 해서 인간의 능력이 아니고 인간의 능력을 초월한 능력을 구사했으니 우리도 그 비슷하게 가자.’ 닮아내려고 애를 쓰겠죠.

그러면 이 창조적 소수 앞에 모든 사람은 뭡니까? 자발적인 종속이 되겠죠. 그게 ‘문명’이에요. 문명. 그게 수메르 문명, 이집트 문명이에요. 이집트 문명, 수메르 문명의 특징이 뭐냐 하면 절대 군주한테 모든 수백만 인민들이 일벌레같이 명령 하나에 죽고 명령 하나에 살고 꼼짝 못해요. 자발적이에요, 자발적. 눈물 흘리면서 김정은 보고 싶어하는 것과 똑같아요.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거예요, 자발적으로. 그래야 왕국의 결속력은 단단해지거든요.

그러면 ‘아이고, 왕 된 사람 좋겠네.’ 이렇게 생각하겠죠. 사울 왕이 바로 그걸 노린 거예요. 사울 왕이 계속해서 이스라엘을 지킬만한 어떤 기적적이고 영웅적인 것을… 초반에 영웅적인 행동했잖아요. 기도해서 블레셋을 물리쳤잖아요. 그러니까 사무엘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 자기들끼리 감시를 해서 ‘사울 왕 험담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가만두지 않고 우리가 죽여 버리겠습니다.’ 할 정도로 자진해서 충성모드로 들어간 거예요. 그리고 사울 왕을 진정한 이스라엘 왕으로 신봉했고.

누가 거기에 대해서 인정하지 않았습니까? 사무엘은 인정하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저 사울 왕은 왕이 없어야 되는데 나온 것이기 때문에 항상 이것은 이스라엘의 치부, 취약점, 허점에 대한 상징으로 사울을 생각한 거예요. 왕이 없어야 되잖아요. 왕 달라 해서 세운 왕이 누굽니까? 사울이죠.

사무엘은 ‘네가 백날 해도 왕 아니야. 하나님이 세운 왕 아니야. 이스라엘 백성이 생각하는 이스라엘 자체가 하나님이 원하는 나라가 아닌 것을 지적하기 위해서 너 하나 임시방편으로 사용하는 거야.’ 이게 사무엘 생각이에요. 그래서 어지간한 왕 같으면 한번 실수한 것은 봐줄 만한데 그런 것 없습니다. “내 그럴 줄 알았어. 그래서 당신은 버려진 거야. 순종이 제사보다 나은 거 몰라?” 일부러 사무엘이 전쟁하는데 늦게 가잖아요.

특히 그 징후가 있었어요.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아버지 말 안 듣고 승리했죠. 아버지 지시 없이 움직였잖아요. 그때 누가 화났습니까? 아버지가 화났어요. 블레셋을 이긴 것보다도 아버지 지시 없이 움직인 것에 대해 아버지가 화를 낸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새로운 영웅적인 것, 이걸 아까 창조적이라 했죠, 창조적인 게 계속 나오지 않으면 그때부터는 전에 창조적 소수였던 자가 백성들을 압제하고 지배하고 득달합니다. 꼼짝 못하게 인위적으로 묶는 노릇을 해요. 그럴 때 토인비의 의견에 의하면 한 국가와 문명이 무너지는 것은 외부세력이 세서가 아니라 내부세력에 이미 균열이 일어나서 그렇다는 거예요.

왕은 창조적 소수 아닙니까? 그럼 한번 창조해야 돼요, 계속 창조가 나와야 됩니까? 계속 나와야 되잖아요. 계속 나온 왕이 누구냐 하면 다윗 왕이에요. 다윗이었습니다. 계속 나오는 거예요, 계속. 그 창조성이. 인간의 인위적인 것으로 어떻게 수습할 필요도 없이 하나님이 그와 함께 있어 계속 하나님의 일이 지속적으로 나올 때 그게 바로 이스라엘이에요.

그런데 사울 왕은 뭡니까? “나는 이미 한번 너희들을 구원해줬잖아. 나 그런 자야!” 심지어 사울 왕이 그때부터는 내리막길로 가는데 블레셋 골리앗과 싸울 때 누가 이겼습니까? 사울이 이겼습니까, 소년 다윗이 이겼습니까? 누가 이겼어요? 실무진에서 이겼잖아요! 간부급 말고 중령 말고, 실무진에서 소년 다윗이 이겼잖아요.

그 말은 뭐냐? 그때 이기고 난 뒤에 사울 왕에게 지배받던 사람들이 뭐라고 노래지었느냐 하면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 했어요. ‘당신은 이제 맛 갔다’ 이런 뜻이에요. 맛 갔을 때 계엄하지 말고 그냥 물러나면 되는데 그때부터 사울은 죽어라고 뭘 했느냐? 이제는 블레셋이 적이 아니고 자기 자리에 연연하기에 이를 공격하는 이스라엘의 내부적인 새로운 창조적 소수가 자기 적으로 등극해서 내란, 내전이 일어나게 되는 거예요. 블레셋은 적도 아니라. 다시 말해서 평소에 하나님의 적은 적이 아니고 내 적일 때 적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사울 왕은. 벌써 낌새가 맛이 갔죠.

그런데 사무엘이 사울 몰래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서 다윗에게 이미 기름을 부어 왕이 되게 했어요. 그럼 한 나라의 왕이 몇 명입니까? 두 명이죠. 왕이 없는 게 아니고 창조적 소수를 하나님이 새로 심어놓은 거예요. 그러면 사울 왕은 어떻게 돼요? 왕이 아니죠. 그게 아까 제가 언급했던 열왕기상 11장 36절,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약속이, 인간세계에서 인간들이 평가하고 논의하고 기대하는 그 모든 것을 능가한 하나님의 말씀이, 자체적으로 계속해서 이스라엘을 이스라엘 되게 하나님이 말씀으로 작용을 하는 겁니다. 말씀으로 작용하는 거예요.

그러면 사무엘 입장에서는 왕이 누구입니까? 다윗이 왕이에요. 사무엘 입장에는 다윗이 왕이에요. 죽은 자를 불러내고 골백번 불러내도 다윗이 왕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했기 때문에. 그렇다면 전쟁 패배에 직면해서 사울이 신접한 여인에게 부탁해가지고 사무엘을 불러낸 것은 하나님의 말씀 활동을 위해서 하나님이 신접한 여인, 사울, 사무엘을 한 조로 활용하신 거예요.

“사울 너는 분명히 잘리고 다윗이 왕이라고 했어, 안 했어? 그런데 사울은 아직도 그걸 못 받아들여? 그럼 네가 쫓아낸 무당까지 찾아가게 하고 사무엘까지 불러낼 거야.” 중요한 것은 ‘죽은 자가 어떻게 살아나느냐’ 그 문제가 아니에요. 무슨 문제냐 하면 ‘전쟁’ 문제입니다. 누구와의 전쟁? 하나님과 모든 인간과의 전쟁. 하나님과 모든 인간과의 전쟁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이 틈에서 새롭게 창조된다는 것을 말해주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아까 처음 강의 시작할 때 이야기했죠. ‘말씀을 잊어버렸습니다.’ 하셨는데, 말씀은 기억하면 안 되죠. 내가 사울이 되면 안 되니까. 말씀이 뭐라고 하나 기억하면 안 되잖아요. 하나님께서 우리의 왕을 누구로 지목했습니까? 예수님으로 지목했죠. 예수님으로 지목했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을 지목할 때 있는 그 약속가지고 매일같이 이 남은 세상, 우리 수명이 있는 한 사울처럼 말씀으로 지적받아야 되죠. 지적받아야 돼요.

너는 아직도 네 자신을 지키려는 방어기제가 아주 활발하구나. 하나님께 기도해서 뭐라도 어떤 해답을 얻고자 하는데 그 해답 얻어서 뭐할 건데? 해답 얻어서 뭐할 건데?” 해답을 우리가 가질 이유가 없어요. 우리는 해답에 의해서 준동될 뿐이고 사용될 뿐이지. 그걸 눈치 채야 돼요. 해답은 주님이 살아계셔서 움직이고 우리는 그 움직임에 빨려 들어가는 거예요.

그래서 복음을 듣고 이렇게 안다 하지만 막상 응용문제에 들어가면 그 말씀 알았던 것이 응용문제하고 연계가 잘 안돼요. 응용문제를 잘 못 풀어요. 그래서 제가 하나 준비했습니다. 제가 어떤 예를 들 테니까요, 이 예를 듣고 이 사례에 속한 사람의 문제점이 뭔지를 여러분이 한번 생각해보세요.

어떤 사람의 간증인데요. 라원기 목사라고 별처럼 빛나는 교회 목사에요. 간증이기 때문에 시간관계상 빨리 하겠습니다. 의미도 없는 건데. 자기가 서울 신도시 일산에 교회 개척을 하려고 갔는데 개척할 적당한 장소가 있어서 계약을 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어떤 방이 비어있는 거예요. 계약한 상가에 홀이 있고 또 빈 방이 있어요. “저 빈 방은 뭡니까?” 하니까 중개사가 “저기 교회 들어오려고 애썼는데…” “아, 교회 들어오면 이건 덕이 안 되니까 나는 안 들어오겠습니다.” 했어요. 그랬더니 중개사가 “그게 아니고 교회 들어오려고 했는데 들어오려고 했던 그쪽 교회가 중도금도 못 내고 사정이 안돼서 교회 안 들어온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진짜 안 들어옵니까?” “진짜 안 들어옵니다.” 그래서 계약금 400만원 주고 계약을 했다 이 말이죠. 계약금 주고 계약을 해서 있는데 며칠 뒤에 키 작고 예쁘장하게 생긴 어떤 여자 분이 와서 “목사님 되십니까?” “예.” “여기 교회 들어온다면서요?” “예.” “안됩니다! 우리가 들어갑니다.” 하는 거예요. 보니까 중도금도 못 내서 못 들어오는 그 교회 목사 사모가 안 된다는 거예요. 만약에 목사님이 여기 들어오시면 나는 엎어져서 죽여라 하고 옆에 누워있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끼리 싸우면 세상 사람들에게 덕이 안 된다 해가지고 바로 며칠 전에 계약했기 때문에 주인한테 가서 계약금 낸 거 다시 돌려 달라 하니까 그 사람이 “계약한 건 못 돌려줍니다.” 사정이 이렇고 기간도 얼마 안 지났는데 돌려 달라 하니까 400만원 중에서 100만원 돌려주고 300만원 날아갔답니다. 그 가게가 마음에 들었는데….

다른 데 또 비슷한 가게 가니까 어떤 사람이 “파리 바게트를 하는데 교회 들어오게 되면 파리 바게트 하면서 가게를 같이 공유해서 당신은 교회하도록 하겠습니다.” 하는 거예요. 그런데 자기가 기도하는 가운데 ‘주여 감사합니다. 드디어 가게 얻었습니다.’ 하니까 하나님께서 ‘그 빵집 안 된다. 본점에서 허가 안 한다.’ 이런 응답을 받아서 그 다음날 과연 그 이야기 듣고 자기한테 잘해주려는 사람에게 가서 “그거 안 됩니다. 내가 기도하다 보니까 아마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빵집 안 된다고 할 거예요.” 빵집 안 되면 뭐도 날아가요? 자기도 그 동네에 개척교회 못 얻는 거예요.

그래서 또 라원기 목사가 기도했어요. ‘나’ 아닙니다. ‘라’입니다. 라원기 목사가 또 기도하니까 하나님이 응답해서 ‘네가 포항에 말씀 증거하러 가잖아.’ 포항에 기독교 대학 있죠? 한동대학교에서 가끔 설교하는 모양이에요. 꿈에 엿장수 가위하고 호박엿이 보이는 거예요. ‘받아먹어라’ 비슷하게. 사도행전에서 나오는 것처럼. 그래서 엿 자르는 가위하고 호박엿이 왜 있을까 자기가 해석해보니까 하나님 뜻은 뭐냐? ‘일산 개척교회 잘라라! 미련두지 말고 잘라라. 그리고 호박엿이라 하는 것은 네가 한동대학교에 복음 전하는 것도 얼마나 맛있는 엿을 주는 그런 일이냐. 그러니까 아예 잘라버리라.’ 그래서 ‘하나님 이제 마음 정리했습니다.’

정리를 했는데 내가 일산에 개척 교회한다는 소리를 어떤 청년이 듣고 자기 엄마한테 얘길 했던 모양이에요. 엄마가 신실한 교인이라서 새벽 기도 나가는데 그 신실한 여자 분에게, 이름도 몰라요, 만난 적도 없는데, 갑자기 목돈이 생긴 거예요. 목돈이 생겨서 ‘하나님 목돈 생긴 거 누구한테 어떻게 쓰면 되겠습니까?’ 할 때 아들 생각나서 ‘어떤 목사가 일산에 개척한다는데…’ 엄마가 그걸 알고 라원기 목사를 만나서 “이거 응답 받아서 드립니다.”하고는 2100만원을 쓰라고 줬어요. 300만원 빼고, 2100 빼기 300하면 얼마 남죠? 1800만원 남죠. 그걸로 다른 데 개척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는 거예요.

그 라원기 목사 하는 말이 “여러 성도님들 어려울 때 주께 기도하면 주께서 기도 응답해주십니다.” 이게 결론이에요. 별처럼 빛나는 교회. 유튜브에 아주 자랑삼아서 나왔습니다. 머리는 허연데 나이는 오십대 중반 쯤 되는 사람이에요. 아…, 이 문제점이 뭐죠?

제가 생전 하지도 않은 짓까지 해야 되겠어요. 여러분들 잠깐 따라해보세요. 두 손 모으고 누구한테 간절한 마음으로 절해보세요. 나마스떼. 방금 누구한테 간구했습니까? 자기 욕망에 간구한 거예요, 자기 욕망에. 자기 욕망에 비는 거예요. 우리가 복음 안다고 생전 기도 같은 거 나 몰라라 하고 내 배 째라 하고 살았기 때문에 몰랐는데, 절 앞에 있는 부처한테나 천주교 성당에서 마리아한테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발적인 종속이에요, 시키지도 않는데 두 손 모으고 절해요.

‘나마스떼’는 산스크리트어인데요. 인도나 네팔 불교에서 하는 인사에요. ‘당신에게 경배드립니다.’ 뭐 그런 뜻이에요. 종교 없는 인간은 그냥 막 살잖아요. 자기 자신을 모르고 있는 거예요. 그러나 종교인들은 집중해요. 자기 방어기제에 집중해버리면 불교나 천주교라든지 빌면서 부처한테 또는 마리아한테 비는 것은 자기 욕망을 대상화시켜서 비는 거예요, 자기 욕망을 대상화시켜서.

우리는 안하니 뭐 그런 거 없는 줄로 알고 있지만 몇십 년 동안 한 번씩은 해보세요, 이거. 아주 간절하게 해보세요. 해보면 그 간절함이 뭐냐? 내 욕망을 있는 대로 다 끄집어내서 손끝에 모아서, 중국 권법입니다, 손끝에 모아서 그땐 누가 시키지도 않는데… 이건 말리지 마! 내 정성을 모아서 내 욕망을 여기다 형성시켜서 욕망에다 사정사정하며 비는 겁니다.

여러분, 사울이 얼마나 답답했으면 신접한 여인까지 찾아가서 사무엘을 불러냈겠습니까? 자기 욕망을 본인이 뚫고 지나갈 수 없었던 거예요. 뚫고. 10분 쉽시다.

 

 

 

 

광주강의20251031b 사무엘상 29장 16절(미친 자의식)-이 근호 목사


아까 연못 이야기했잖아요. 내가 포함이 된다는 거예요. 내가. 내가 포함되어버리면 내가 포함된 그 세계는 제대로 객관적인 관찰대상이 될 수 없어요. 왜냐하면 내가 포함되었으니까. 나까지 포함해서 나를 관찰해야 되는데 그걸 누가 막느냐 하면 나의 자의식이 그걸 막아요, 내 자의식이.

‘인간은 자신의 자의식에 미쳐 날뛴다.’ 이게 어디에서 잘 나타나느냐 하면 술을 거하게 먹고 취했을 때 그 사람에게서 나오는 모든 문장과 언어가 누구 이야기입니까? 자기 이야기에요. 술 먹었을 때. 자기 이야기이고 자기 방어에요. 방어하는 방법은, 내 인생에서 모든 힘든 것은 누구 탓이다? 남 탓이다. 내가 너 만나가지고 내 인생 조졌다는 걸 맨 정신에는 못하고 술김에 이야기하죠.

아까 응용문제를 일단 풀어봅시다. 응용문제를 풀어봐야 되는데 어떻게 푸느냐 하면 성경을 통해서 풀 수가 있어요. 이겁니다. ‘해와 달과 별이 내 행위로 노선이 바뀔까요?’ 이 대자연이 내 행위로 바뀝니까, 안 바뀝니까? 안 바뀌죠. 안 바뀌는 이유는 해와 달과 별이 누구의 말을 듣느냐 하면 주 예수님의 말을 듣고 있어요. 해와 달과 별이 막 떨어집니까, 내가 기도하면? 그래요? 내가 시험 잘 못치면 갑자기 해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으로 변합니까? 아니죠.

소년 다윗이 골리앗을 이겼습니까? 아니죠. 하나님이 골리앗을 이겼죠. 바로 사울과 다윗의 차이가 그 차이에요. 다윗은 말합니다. “이번 전쟁은 내 전쟁이 아니고 이번 전쟁은 여호와 하나님의 전쟁이다.” 했어요. 그럼 골리앗이 등장한 것은 의도적으로 누가 등장시킨 겁니까? 하나님이 등장시킨 거예요. 하나님이. 골리앗을 등장시켜서 현 이스라엘 상태가 하나님이 원하는 이스라엘 상태가 아닌 것을 지적하기 위해서 등장시켰잖아요. 지적하기 위해서.

그런데 사울과 이스라엘은 그걸 왜 몰라요? 모르는 이유가 뭡니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이스라엘이 만들어지는데 이스라엘을 가운데 두고 이스라엘에 속한 인간들, 이스라엘과 사울은 자신의 가치와 의미를 방어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이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나를 지켜내기 위해서. 내가 아는 나를 지켜내기 위해서. 내가 나를 안다는 것은 아까 ‘나마스떼’ 기도한 것처럼 내가 아는 내가 어려울 때 내 속에 있는 것이 내 앞에 대상물로 등장해요. 그게 나의 욕망입니다. 나의 욕망.

그러니까 지금 라원기 목사도 그렇고 일반인도 마찬가지고 우리도 마찬가지고 ‘나를 내 앞에서 치워버리면 된다.’ 내 앞에서 나를 치워버리면 돼요. 간단하죠? 왜냐하면 내가 자꾸 나한테 비니까. 내 결정체, 내 안에 내 자아의 결정체인 욕망에다가 자꾸 사정하고 부탁하니까. 욕망을 모으고.

이런 겁니다. 어떤 사람보고 “사진 좀 찍어주시겠습니까?” 보통 관광지에서 그러잖아요. “예. 찍어드리겠습니다.” 사진을 찍으면 그 사람 있는 데에다가 사진을 찍어야 되잖아요. 그런데 사진 찍는 사람이 자기가 보이는 곳에다 사진기를 딱 두고 그 자리에 자꾸 오라는 거예요, 그 자리에. 찍을만한 자리에 사진기를 두고 당신이 여기 오라는 거예요.

인간은 자기에 대해선 자기가 아니까. 내가 뭘 원하고 뭘 기대하고 뭘 목표로 하고 뭘 소망하는지. 담임 맡지 않고 편하게 계속 근무할 수 있는 것, 이런 거 있잖아요. 내가 원하는 그 자리에 하나님이 와달라는 거예요. 내가 간절히 원하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오는 자리에 만약에 해와 달과 별이 온다면? 너는 빠지고! 내가 너 부른 게 아니야. 해와 달이 오면 그다음부터 나는 해와 달과 별과 같이 하나님에 의해서 어떻게 되든 어떻게 망가지든 쭈그러들든 일방적으로 다루어지는 그 자리가 내 자리가 되어야 되기 때문에 그렇게 되면 내 욕망이 어떻게 돼요? 허물어지잖아요. 내 욕망을 가졌다는 자체가 이거는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짓이 된다고요.

그럼 내가 없어지잖아요. 내가 없어지면 내 방어기제의 본능은 어떻게 돼요? 충돌되니까 그건 싫다는 겁니다. 내가 하나님 믿고 예수 믿고 한 보람이 없어진다는 거예요. 내가 망가지고 부서지기 위해서 하나님 믿고 예수 믿은 거 아니잖아요. 내 욕망을 달성하기 위해서 예수 믿잖아요. 하나님 믿고. 그러니까 하나님마저 내 시키는 대로 하라는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 아시다시피 성경은 말씀은 누구에 대해 증거하는 겁니까? 주일 설교에서 했는데요. 자꾸 기억 안 난다 하니까 다시 해볼까요? 요한복음 5장 39절,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해서, 영생이 하나의 포부고 영생이 하나의 목표가 되고 노림수가 되고 기대가 되죠.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해서 성경을 보는데, 미안하다. 성경은 내게 대해서 증거한다.” ‘미안하다’는 말은 없지만. 미안할 것도 없죠. 성경은 내게 대해서 증거하는 거예요. 성경은 네 욕망이나 기대에 부응하는 책이 아니고. 가위하고 호박엿 주는 게 아니에요. 성경은 예수님에 대해 증거하는 거예요.

그리고 요한복음 19장 30절,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이 성경을 누가 이루었습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죠. 끝났잖아요. 이 두 구절로 끝났잖아요.

이것을 설명한 것이 에베소서 2장 8-9절,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믿음은 너에게서 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니 누구든지 그 믿음과 구원에 대해서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너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너의 행함에서 나온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준 선물이니 누구든지 영생에 대해서 자랑치 못하게 함이라. 행함이 아니라 오직 은혜이기 때문에.

그러면 요한복음 5장 39절을 ①이라 하고 요한복음 19장 30절 “다 이루었다”를 ②라 한다면 ①+②가 아까 에베소서 2장 8-9절에 나오는 그 구절, ③. 이게 바로 천국의 입학시험이에요. 미리 빼돌린 천국의 문제지죠.

“성경은 누구에 대해서 이야기했어요, 어린이 여러분?”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한 거예요!” “그럼 여러분들이 잘 지켰습니까?” “아니요!” “참새반 이야기해보세요. 지켰어요?” “아니요, 선생님!” “그럼 누가 지켰어요?” “예수님 홀로 다 지켰어요.” “그럼 세 번째, 그걸 어떻게 알게 되었죠?” “하나님의 선물로 믿음으로 알게 되었어요.”

이거 외에 뭐 있어요? 없잖아요. 이거 외에는 없죠. ①번, ②번, ③번은 결국 뭘 이야기합니까? 누굴 배제한다? 인간을 배제하는 거예요. 인간을. 인간이 자기 자신을 배제해야 되는데 인간은 이미 욕망의 화신, 마귀의 화신이 되어서 자기 자신을 배제할 수 없잖아요. 없죠.

그럼 아까 교재 나눠드린 것 한번 봅시다. [야스퍼스(Karl Jaspers, 1883-1969, 독일)가 말하는 한계상황이란 인간으로서는 어쩌지 못하는 처지(어떻게 할 수 없는 것)를 일컫는다. 죽음이나 극복 못할 재난, 질병 등이다.] 드라마나 영화에 보면 많이 나오죠. [야스퍼스에 따르면, 우리는 한계상황에 부딪혔을 때 진정한 자신으로 거듭날 기회를 얻는다.] ‘거듭남’, 기독교 용어죠.

그러니까 이 사람의 이야기에 의하면 ‘우리가 하다하다 제대로 못할 때 그때 은혜의 순간이 오는 것이다. 그때가 구원의 순간이다.’ 지금 그 이야기를 야스퍼스가 하고 있는 거예요. 아시겠죠? 어려울 때, 편할 때는 예수 안 믿다가 어려울 때 예수 믿는 순간이 온다는 거예요. 맞습니까? 어려울 때 구원받는 순간이 오는 게 아니고, 자기의 욕망이 노골화된 순간이 오겠죠. 자기의 어두운 욕망, 괴물이, 내가 괴물을 통제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 그 순간이 오겠죠.

[그는 인간의 삶을 네 단계로 나눈다. 가장 낮은 수준은 현존이다.⓵ 여기서 우리는 생존에 매달리며 살아간다.] 이건 뭐 뉴스 시간에 또는 유튜브에 나오는 99% 내용이죠. 어떻게 하면 돈 벌수 있느냐? 어디에 집 지으면 행복하고 편안하게 살 수 있느냐? 어떻게 처신하면 이 세상에서 출세할 수 있느냐? 그 이야기가 야스퍼스에 의하면 제일 낮은 수준, 생존의 수준이라는 거예요.

[살아남느라 바득바득한다는 점에서 보면, 인간은 여느 생명체들과 차이가 없다.] 그러니까 바퀴벌레나 짐승, 뭐 거미, 박쥐, 아메바, 바이러스, 코로나 바이러스하고 인간하고 똑같죠. 인간의 기본은 같죠. 유기체가 스스로 자기 방어하는 거니까요. 본능이니까.

[그렇지만 인간에게 ‘의식’이 있다.⓶] 이게 2단계. [이 단계에서 우리는 과학에서처럼 분명하게 맞고 틀림을 가려내 합리적으로 살아가려 한다.] 합리적으로 살아간다. 맞고 틀리고. ‘맞고 틀리고’라는 것은 아까 ①번을 바탕으로 해서 맞고 틀리는 거죠. 그러니까 뭡니까? 내가 생존하고 내가 배부르고 행복한 데에 보탬이 되면 맞는 거고 그렇지 않으면 다 틀린 것, 잘못된 거라 그렇게 되는 거예요.

야스퍼스가 이런 말할 때 그냥 쉽게 한 게 아니고 공부 많이 하고 한 말이에요.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회사생활 열심히 하니까 봉급이 올랐다. 그러면 그것은 맞는 일입니까, 틀린 일입니까? 내가 열심히 했더니만 회사에서 인정받아서 보너스를 받았다. 이게 나한테 맞는 일이에요, 나한테 틀린 일입니까? 나한테 맞는 일이죠. 그럼 남들한테는 맞는 일이에요, 틀린 일이에요? 100% 틀린 일이죠. 100%.

남들한테는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자기한테는 맞죠. 그러나 남한테는 화나는 이야기입니다. ‘그래, 너는 출퇴근 거리가 회사하고 가까우니까 지각이라는 게 뭔지 모르지? 일찍 다니니까 회사에서 널 좋게 봤는데 나는 2시간 걸린다. 열심히 오지만 가끔은 지각한다. 네가 열심히 한다고 해서 네가 나보다 훌륭하다는 이야기는 하지 마.’ 뭐 이렇게 반박 들어오겠죠. ‘그리고 너는 집에 애가 하나잖아. 나는 셋이다. 그 셋 키우려 해봐라. 정신없어. 그래서 회사에 좀 소홀했다. 일찍 퇴근할 수도 있고. 너는 애 하나라서 어린이집 보내면 끝났지?’ 이런 거. 그러니까 인간에게는 자기한테 유리하면 그게 선이 되고 그와 동시에 남들로부터 욕 얻어먹는 짓을 하고 있는 거예요. 자기한텐 관대해요.

세 번째 단계는 정신 수준인데요. [그 다음에는 ‘정신’수준의 생활이다.⓷ 여기서는 ‘이념’이 중요하다. 세상의 바람직한 모습은 어떠해야 하며, 옳고 바람직한 인생은 무엇인지에 대한 이론과 가르침에 매달린다.] 이념이 뭐냐 하면 ‘인생 사는 목적이 뭐냐? 의미가 뭐냐?’ 이런 거 찾는 거예요. ‘가치가 뭐냐?’

‘어떻게 하면 취직 안하고 유튜브해서 월수입 300 보장되는 거 없나? 태국이나 전 세계 돌아다니면서 여행해서 그거나 찍을까?’ 이런 생각하는 거. 그건 1단계에요, 1단계. 뭐 이념 없습니다. 그냥 자기 목숨 유지하기 위해서 돈 버는 거예요. 돈 버는 것. 그런데 이념이라 하는 것은 그게 아니고 가치나 의미를 조정한다든지 ‘바르게 하는 게 뭐냐’.

이념에 뭐가 포함되느냐 하면 ‘나만 살지 말고 두루두루 잘 살수 없는가? 아프리카에 물이 없다는데 아프리카 우물 파는 데에 돈 좀 보태면 얼마나 내가 사람 사는 것처럼 하는 거냐.’ 그래서 아프리카 우물 판다는 데에 돈 보냈는데 그 돈 어디 갔습니까? 하마스 테러 자금으로 빠졌잖아요. 아프리카 우물 파는데 돈 보탰는데 그것가지고 하마스 테러집단 총 사는 데 보탠 거예요.

그러니까 결국 ③번은 누굴 위로하는 겁니까? 타인에 대한 배려, 사랑이 누굴 위로하는 거예요? 자기 스스로를 고매한 인격으로 만들기 위해서 나름대로 애쓰고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스스로 지금 격려하고 있는 거예요. 아까 제가 뭐라 했어요? 인간은 자기 자의식에 미쳐 날뛴다 했죠. 크게 다시 적어놔야겠다. 잊어버리겠다. ‘인간은 자기 자의식에 미쳐 날뛴다.’

이게 ①번(현존), ②번(의식), ③번(정신)이에요. 그래서 야스퍼스는 ④번을 준비했어요. ④번 ‘실존’인데요. 그래서 야스퍼스를 최초의 실존주의 철학자라 얘기합니다. 실존은 가장 높은 수준이에요. [이 모든 단계를 넘어선 가장 높은 수준이 ‘실존’이다.⓸ 실존에 이르려는 사람은 ‘진정 나다운 나’로 거듭나려고 노력한다. 위기와 도전 앞에서 내가 어떤 모습을 보였는지를 살펴보라. 겁먹고 주눅 들어 물러서는 순간, 우리 마음은 비참함과 비루함에 사로잡힌다. 굳은 결기로 의연히 위험에 맞설 때는 어떨까? 스스로 자유의지에 따라 온갖 고통과 위기를 기꺼이 받아들이려 할 때, 비로소 우리에게 ‘나답다’라는 확신이 찾아든다.]

이게 지금 야스퍼스 이야기였잖아요. 야스퍼스보다 좀 더 이른 시기, 한 60년 정도 이른 시기에 우리나라에 최제우(1824-1864)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최제우라는 사람은 19세기 초 사람인데, 양반집 사람이지만 집안이 6대째 벼슬을 못한 몰락 양반가문이었어요. 벼슬 경쟁률이 세서 과거 합격률이 3300대 1인가 그래요. 양반들만 쳐도 그만큼 세요. 벼슬 못한 양반들은 어중간해서 빌어먹지도 못하고 지극히 가난한 거예요. 그것도 1, 2대가 아니라 6대째 벼슬 못한 양반집 자녀가 최제우입니다.

최제우가 얼마나 집안이 가난했는지 힘들게 살다가 벼슬 못한 아버지 돌아가시고 아버지가 한학자였으니까요, 최제우는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훈장하며 살다가 그것도 어려워서 점도 치다가 그것도 어렵고. 그러다 1860년 깨달음을 얻어요. 경주에 와서 깨달음을 얻을 때 그가 누굴 만나냐 하면 이분을 만나요. ‘한울님’. 한울님을 만나요. 신비체험을 해요. 이 한울님. 조율 한번 해볼까요? 조율? 노래 있죠.

한울님을 만나 신비체험을 하는데 그 신비체험을 하면서 하늘로부터 이걸 받았어요. ‘영부’와, 용어 자체가 벌써 음산하죠? ‘주문’을 받았어요. 영부가 부적 같은 것인데 한울님 외부로부터 신비체험하면서 이 부적을 무슨 글자인지 막 받아 적었어요. 그런데 일반인들은 해독 안 해도 괜찮아요. 이 글자를 태워서 물에 타마시면 질병이 사라지고 마음에 근심이 없어져요. 1년 반만에 신도 수가 만 삼천 명으로 늘어났습니다. 이제 배고픈 거 끝났어요. 주문도 받았고. 주문 외우고 영부 부적을 불에 태워서 물에 타마시면 모든 설움과 아픔이 없어지는 거예요. 이게 동학인데,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할 것 없이 서민들이 이 동학을 믿었습니다.

한울님이 가르쳐주신 진리가 있는데 ‘오심즉여심(吾心卽汝心)’. ‘내 마음이 곧 네 마음이다, 제우야.’ 이런 거. 한울님이, 내 마음이 곧 네 마음이다. ‘제가 어떻게 한울님의 진리를 전파할까요?’하니까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시천주(侍天主) 사인여천(事人如天). 괜히 최제우가 한학을 해가지고… 하늘을 섬기고 이 하늘을 섬기는 마음으로 나를 섬기는 것처럼 남들도 섬겨버리면 너는 군주 공동체를 만들 수 있다.

그러면 이 최제우라는 사람이 주장하는 것은 모든 인간은 다 깨끗하고 순결한 마음이 있는데 그게 한울님이라는 거예요. 따라서 양반 따로 없고 평민 따로 없고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게 37살 때에요. 1864년 3월 10일 41살 때 대구에서 처형되었습니다. 가만두지 않죠. 양반 없고 상놈 없고 모든 인간은 한울님의 순수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하나 되었다고 하니까. 최제우 죽고 난 뒤에 최시형, 손병희가 드디어 천도교를 세워서 3․1운동 때 기독교 신자들하고 같이 태극기 흔들었습니다. 유관순하고.

자, 여기서 오늘 사울이 왜 신접한 여인을 찾아왔는가? ‘대화를 하려면 상대가 있어야 한다.’ 대화를 하려면 상대가 있어야 되거든요. 이걸 현대 정신분석학에서 프로이트, 라캉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니 현대 정신분석학이 이 사람들보다 더 똑똑한 거예요. 더 정확하게 말합니다. ‘대화를 하려면 상대가 있어야 된다.’ 이 말을 현대 정신분석학에서는 ‘타인 속에서 나를 발견하기 위해 나는 대화한다.’ 이렇게 바꿔버렸어요.

그 이유가 남들과의 만남에서 내 속에 있는 욕망은 구체화되기 때문에. 구체화되거든요. 대전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죠. 사람은 도구를 통해서 점차 자기가 구체화된다고요. 자기 자아가 도구를 통해서 구체화되어요. 남과의 만남을 통해서 전에 몰랐던, 희미했던 내가 점점 더 형성돼요, 나라는 게. 사물 도구도 마찬가지고 타인과의 만남도 그래요.

그래서 우리 친척 가운데 자기 아내 죽고 난 뒤 1년 만에 죽은 남편이 있어요. 우리 가까운 친척이에요. 사촌 친척 가운데서. 나보다 나이 적은데 죽고 남편도 1년 뒤에 죽었어요. 심장이 상해서 죽은 거죠. 왜요? 왜 갑자기 심장이 상하죠? 내가 깔아놓은 내가 많아요. 내가 거미줄 던지듯이 그렇게 많아요. 그게 뚝 끊어져버리면 나는 힘들어 못 살아요.

대화라는 것은 그 속에 있는 나의 욕망을 내 말을 통해 다시 확인하고 점검하고 관리하고 다루는 거예요. 그렇다면 오늘날 누구든지 각자 스스로에게 창조적 소수가 되는 겁니다, 인간은. 자기가 신이 되는 거죠. 자기가 왕이 되는 겁니다.

‘나마스떼’. 이게 뭡니까? ‘나는 당신을 경배합니다. 존경합니다.’ 그런 이야기를 왜 하느냐? 내 안에 있는 선함이 당신에게 있다고 이야기함으로써 내 선함을 저쪽 안에서 내가 확인할 수 있거든요. 내가 얼마나 선한지를, 내가 이렇게 두 손에 기를 모아가지고 정성을 바침으로서 받는 사람 속에 내 사랑과 선함이 그쪽에 있음을 내가 발견하면서 나는 태어날 때부터 순수하고 선한 한울님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어요.

왜 우리가 말씀을 보고 복음을 안다 하면서도 실생활에서는 그것이 적용 안 되는가? 응용이 안 되는 이유가 뭐냐? 실생활에서 그런 것을 잊어버린 이유가 나를 위해서 실생활에 종사하라고 내 욕망이 나에게 그걸 시켰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우리가 해와 달과 별을 조종하지도 못하면서. 우리가 나무 한 그루보고 움직여 바다에 빠지라 한다고 바다에 빠뜨릴 재주도 없으면서 무조건 세상은 내 기대대로 내 의도대로 움직여줘야 그것이 나한테 선한 것처럼 그렇게 생각되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 교재에 보면 이렇게 쓰여 있죠. 야스퍼스 이야기 다 해놓고 뒤에다 내 이야기를 집어넣었죠. [-그런데 이런 태도는 잠시 여유를 가질 때에 다시 자아를 조작하면서 나오는 결과물이 아닐까?-]

여기서 ‘잠시 여유를 가진다’는 말을 왜 했냐 하면 아침부터 나가서 돈 번다고 힘들게 살 때는 야스퍼스 같은 이런 여유 있는 느긋한 도인 같은 생각 자체가 들지 않아요. 그러나 잠시 여유 있을 때, 연금도 한 육백 나와서 든든하고 ‘아휴, 심심해 미치겠다.’ 이럴 때는 몇 번째 단계라고요? ③번을 거쳐서 애들 장가 시집 다 보내고 여유 있고 날씨도 좋겠다, 가을날 선선할 때 갑자기 ‘인생이 무엇이냐’ 뭐 이런 거 물어가면서 할 때, 그때 잠시 여유 있을 때 무슨 생각합니까? ‘나 평생 돌아보면, 못 살았다는 생각은 안 드네?’

제가 지난 수요일에 아는 친척을 오랜만에 만나서 나름대로 전도를 했어요. 만날 이유가 있어야 되기 때문에 전도를 하니까 그분이 하는 말이, 나는 그걸 믿는데 내 딸한테 이 비슷한 이야기를 해줬더니만 그 딸과 사위가 한통속이 되어서 달려드는데 이렇게 한답니다. “내가 뭐 잘못되었는데?” 이렇게 나온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순간 우리 친척, 친척이라고 하니까 또 근지럽다, 누군지 궁금하니까, 우리 숙모님이 팔십 된 숙모님이 교회를 오래 다녔는데 순간 말문이 막힌 거예요.

내가 속으로 답답했죠. 그걸 예상도 못하고 얘기했습니까? 이쪽 이렇게 나오면 저쪽 저렇게 나오는 걸 미리 알아야지. 청문회 그냥 가면 안 되잖아요. 숙모님이 답변이 딱 막혔다는 거예요. 그래서 숙모님한테 또 메모지 끄집어내어서 “자, 성경에 보면 시편 51편 나오죠. 우리가 죄를 짓는 게 아니고 우리가 죄에서 태어났습니다.”하고 몇 군데를 찾아 드렸어요. “숙모님, 내 이야기 그냥 듣지 말고 녹음하세요.” 하니까 숙모님이 “난 녹음 같은 거 할 줄 모른다. 전화 받는 거밖에 못한다.”해서 할 수없이 메모지에 다 써줬거든요.

참… 무엇이 감사할 일이냐 하면 성도로 하여금 성경을 보고 지식을 확보하는 것이 아니고 실제 목숨이 살아있는 현실 속에 던져져서 이걸 실습시킨다는 거예요. 실습을 시켜서, 전도를 해가지고 기 한번 팍 죽이려 했는데 막상 훅 들어오니 자기 쪽에서 말문이 막혀버렸어요. “엄마, 아무리 생각해도 나 죄 지은 거 없는데?” 갑자기 진지하게 들어오니까 뭐라고 답변해야 됩니까? 답변할 수가 없죠. ‘다 내 탓이요. 너 같은 것이 저주받는 대상이란 걸 미리 이야기 못한 내 탓이요.’ 그런 이야기는 할 수 없고요.

이제 다시 교재 봅시다. 다시 이야기하면, 별처럼 빛나는 교회 라원기 목사의 문제점은 뭐냐? 본인을 모른다는 거예요. 본인을 모르니까 본인을 치울 생각을 못하고 있어요. ‘나는 주의 종이고 하나님이 나를 지켜주고 도와줘야 하나님도 이익이고 나도 이익이다.’ 자기는 하나님의 외주사업, 하청업자 뭐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자기 자신을 모르고. 그것하고 두 손 모아 절하는 ‘나마스떼’하고 차이점 있어요, 없어요? 없죠. 없어요.

그러니까 만약 라원기 목사가 진짜 복음을 아는 사람이라면 ‘내가 개척교회를 하고자 한다’는 기대죠, 의도죠, 목적이고요. ‘개척교회를 하고자 한다. 하나님이 도와주시면 좋겠습니다.’하는 그걸 뭐로 봐야 돼요? 한 자로 뭐로 봐야 됩니까? ‘죄’로 봐야죠. 죄.

아…, 예전에 미처 몰랐죠. 개척교회 바르게 하고 주께서 도와줘서 많은 사람이 기도하면 응답받는다는 이것이 죄인 줄을 그 사람은 몰랐던 겁니다. 모르기 때문에 이렇게 난 은혜 받고 산다고 자신만만하게 간증 유튜브를 올리죠. 이게 죄인 줄 모르기 때문에.

다시 한번 사울과 사울의 예언. 사울의 예언 같은 경우에는 사무엘상 19장에 나오는데 이게 언제 신을 받은 거냐 하면 다윗을 죽어라고 추적할 때 받은 거예요. 추적할 때 사울이 벌거벗었고 자기도 이해 안 되는 예언을 했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지금 다윗하고 너하고 동격이 아니라는 거예요. 동격이 아니다.

배제당하기 위해서 사울이 있다는 사실을 사울이 몰랐죠. ‘다윗 너 죽었어. 현상 걸었어. 너는 내 손에 죽어야 돼. 왜? 이스라엘 왕은 둘이 될 수 없고 하나밖에 없는데 내가 왕이야.’ 그런 모든 행위 자체가 사울은 다윗을 저하고 같이 왕위를 탐내는 사람이라고 본인이 착각해서 그래요. 동격 아닙니다. 예수님하고 우리 동격 아니에요. 우리는 죄인이고 예수님은 의인입니다. 깔끔하게 정리되었죠?

이걸 정리하는 의미에서 하나만 더 쓰고 다음 2번 질문으로 넘어가겠습니다. ‘개인적인 것은 모두 정치적이다.’ 이게 무슨 뜻인지 이제 이해되시죠? 내 개인이 개인의 왕국을 세우고 누가 왕 노릇한다? 그 개인의 왕국에서 왕은 누구다? 나다. 나의 모든 행동은 내 왕국을 지키기 위한 정치적 행위다. 심지어 가족끼리도.

자, 그다음 2번 봅시다. [욥기와 엘리후에 대해서]. [질문> 이근호 목사님, 욥기와 엘리후에 대해서, 특히 엘리후에 대해서 간략하게 설명을 부탁합니다.] 자, 질문한 의도. 아까같이 그렇게 보는 거예요. 질문한 의도가 뭐냐? 질문한 의도는 ‘친구가 분명히 세 명 나왔는데 왜 세 명군에 엘리후는 포함되지 않습니까? 그 이유가 뭡니까?’ 그게 궁금한 거예요. ‘욥 빼고 친구는 전부다 한통속이어야 되는데 왜 유별나게 엘리후는 빠져 있습니까?’ 그 질문에 관한 거죠.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친구는 전부다 생각이 동일한데 엘리후는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네 번째에 등장시킨 겁니다. 엘리후를 네 번째 등장시킨 이유는 이렇습니다. 하나의 도표로 그리면 이래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서 인간은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창세기 3장 24절에 의해서. 생명나무를 따먹을 수 없는 것은 인간 취급하지 않습니다. 그럼 하나님과 인간은 끊어져 있죠.

하나님이 만약 ‘우리’라면, 천군천사 있으니까 ‘우리’의 형상이라면, 인간에서는 우리가 형성 안 됩니다. 인간에서는 ‘나’가 형성돼요. 그러면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은 전부다 적이 됩니다. 적. 그런데 하나님께서 3명의 친구를 욥에게 붙여줬어요. 그럼 욥과 3인의 친구 사이에 무슨 대화가 오고가고 있느냐?

‘내가 하나님과 우리가 되고 너는 하나님의 적이 된다’라는 이야기를 양쪽에서 서로 대포로 쏘고 있어요. 서로 양쪽에서. “내가 옳다.” “아니야, 우리가 옳아.” “욥아, 회개해야 돼. 하나님은 우리 편이야.” “아니야, 하나님은 내 편이야. 너희들이 오히려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거야.” 이 싸움을 하는 거예요.

그럴 때 주께서 준비하신 네 번째 친구 엘리후가 등장합니다. 이것이 바로 위험하다는 거예요. 위험하다. ‘위험하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우리나라 옛날에 돈 있는 자는 부자죠. 돈 없는 자는 가난한 자입니다. 맞죠? 돈 있는 자는 힘이 있고 돈 없는 자는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돈 없는 자에게 돈 있는 자가 돈 벌수 있는 그런 요건과 기회를 조성해주면 돈 없는 자는 굉장히 고맙게 여기는 겁니다. 고맙게 여기면 여기서 적과 아군이 성립됩니까, 성립 안 됩니까? 성립이 안 되죠. 고마우니까.

포드 자동차 회사에서 노동자가 특별한 기술도 필요 없어요. 그냥 나사 조이라면 나사 조이고 틀 넣는 사람은 틀만 넣으면 되는데 각자 맡은 일만 하니까 능률이 올랐어요. 능률이 오르니까 그 당시에 포드T 자동차 생산이 많이 됐죠. 많이 생산되고 많이 팔리니까 단가를 내릴 수 있는 거예요. 단가를 내리니까 수입이 많아지잖아요. 수입이 많아지니까 이들에게 봉급이 많이 돌아가죠. 봉급을 많이 받은 노동자가 자기도 자기가 만든 자동차를 살 수 있는 여건이 되었어요. 그럼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가 적입니까, 동지입니까? 동지가 된 거예요. 그러니까 자본가와 노동자가 적이 아니고 같은 동지가 되기 때문에 어떠한 위험요소가 없는 겁니다.

그런데 위험요소라 하는 것은 바로 코로나 질병 같은 것, 온난화. 이렇게 되면 어때요? 이제는 돈 있고 없고가 아니라 지구환경이 나빠지면 이건 못 살죠. 살 수가 없죠. 옛날에는 ‘돈 없는 자가 반란을 일으켜서 돈 있는 자본가를 물리친다.’ 마르크스가 그렇게 생각했잖아요. 내부적인 위험에서 세상은 완전히 바뀔 것이라고 마르크스는 예언했는데 그 예언이 틀렸어요.

이건 돈 있고 없고가 아니라 지구환경 문제에서 똑같이 위험에 처해있는 거예요. 돈으로 해결될 수 없는 거예요. 그 위험에 처해 있다고요. 이걸 ‘위험사회’라 하는데 위험사회는 상당히 민주적이라고 표현하는 거예요. 어떤 대책이 없으니까.

엘리후의 등장은 이겁니다. 지금 욥이 잘났느냐, 친구가 잘났느냐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 보시기에 너희들 둘 다 위험사회에 속해 있다는 걸 알려주는 것이 바로 네 번째 엘리후의 등장입니다. 이 말은 엘리후에 의하면 누가 의로운지 죄인지는 하나님 입장에서 유보되어 있다는 거예요. 하나님 선에서 결재되었다 할지라도 그걸 아는 점에 있어서는 이게 유보되어 있는 거예요. 몰라요.

개인은 자기 자신이 죄인지 의인지를 모르고 막상 자기 생각과 다른 사람을 붙들고 ‘너는 내 생각과 다르니까 너는 나의 적이야.’라고 인간 대 인간 붙들고 싸운다고 한평생을 그렇게 힘들게 살아가는 거예요. “하나님, 저 승리한 거 맞죠? 제가 이긴 거 맞죠?” 하나님이 “너 누구하고 상대했나?” “저 인간하고요. 저들과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같은 인간 붙들고 싸우는 거예요.

엘리후는 ‘인간 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 위험하다.’ 이렇게 본 겁니다. 자기 의가 없으면서 의롭다고 주장하는 자체가 잘못이다.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 보시기에 의로운 자가 누가 있느냐? 욥도 마찬가지고 없다.’ 그게 엘리후에요. 욥과 세 친구는 의인은 없는데 너하고 비교해서는 내가 상대적으로 의롭다는 걸 주장하니까 이게 위험하다 이 말입니다, 그게. 자기 분수도 모르고.

그러니까 엘리후의 입장에서 거듭난다는 것은 인간에게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인간으로 태어난 자체가 죄인일 뿐 아니고 죄인인 주제에 ‘남하고 비교해서 그래도 내가 더 낫지 아니하냐?’ 그 죄까지 짓는 게 문제라는 거예요. ‘‘나는 잘못되었습니다. 부족합니다.’ 이게 문제가 아니라, 그래도 이런 회개할 줄 아는 나는 회개 못하는 너보다 낫다.‘ 이게 문제라는 거예요, 이게.

그러고 난 뒤에 하나님께서 엘리후를 먼저 선발대로 보내고 그다음 누가 등장합니까? 폭풍 속으로. 바로 그렇게 폭풍 속에서 누가 이야기해요? 하나님이 나타나죠. 폭풍 속에 나타날 때 욥에게 나타납니다.

아까 강의한 것 다시 한번 봅시다. 열왕기상 11장 언급했죠. 다윗에게 하나님이 약속을 주고 등불을 주고 택한 예루살렘을 주고 하나님의 언약을 다윗에게 준다 했죠. 그게 뭡니까? 집중이죠. 하나님이 집중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집중이 된 사람은 죄인으로 태어난 모든 인간이 겪어야 될 절차와 과정을 샘플로서 먼저 겪게 하시는 겁니다.

욥이 구원 못 받는다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엘리후가 구원받는다는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엘리후 본인도 본인 구원받는다는 이야기를 한 게 아니에요. 인간은 똑같다는 거예요. 맞아요. 똑같은데 폭풍 속에서 하나님이 엘리후에게 나타났습니까, 욥에게 나타났습니까? 욥에게 나타났죠. 엘리후가 지적하는 욥에게 나타났다고요. 이 얼마나 놀라운 거예요.

욥은 지적받을 만해요, 엘리후한테. 같은 인간들끼리 싸운다고 누가 잘났다 하는 그 자체가 참 꼴 사납다. 맞아요. 맞는데 하나님이 집중하는 하나님께서 의도대로 찾아오심. 찾아오기 이전까지 욥은 두루뭉술 나는 남들보다 낫다 했잖아요. 집중해서 딱 오니까 그 집중이 욥과 욥의 친구 네 명, 엘리후까지 포함해서 네 명까지라도 차별화시키는 거예요.

엘리후도 욥의 자리에 들어설 수 있어요, 없어요? 못 들어섭니다. 그게 메시아적이에요, 메시아적. 성도가 택한 백성이에요, 여러분. 성도는 자기가 구원받으려고 교회 가서 악착같이 믿었던 사람이 아닙니다. 그건 자기 행함에서 나온 믿음이기 때문에 선물로 준 게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딱 집어서 딱 지정해가지고 ‘너는 내 사람이다’라고 했기 때문에 생긴 신분이 성도에요.

그러니 성도는 새삼스럽게 나는 너보다 잘났다든지 훌륭하다든지 그걸 내세울 이유도 없고 그럴 필요조차 없습니다. 그만큼 여유가 있어야 돼요, 여러분. 허리 똑바로 펴고! 가슴 꼿꼿이 세우고! 그 이야기하는 사람 있어요, 대전 가면. 엘리베이터 탔는데 “허리 똑바로 세우세요.” 당당하게 걸을 수 있는 이유가, 우리가 아니라 말씀이 우리를 노리고 들어오기 때문이에요.

말씀이 노리고 들어와요. 말씀이 노리고 들어오거든요. 남한테 어떤 욕을 먹고 비난을 얻어먹더라도 우리의 신분은 달라진 게 아니고 그거 하나하나가 삶의 환경이고 절차인 줄 아시기 바랍니다. 하나의 과정이에요, 과정. 그게 바로 엘리후 (질문에 대한 해석)입니다.

그래서 비록 이 책에서는 그런 이야기 안했지만, 주님께서 허락하는 한 광주 모임을 통해서 전에 질문했던 것을 다시 그 질문의 의도와 그에 대한 성경적 해석을 같이 지금 이 시점에서, 과거는 잊어버리고 이 시점에서 우리 삶 속에서 다시 만들어봅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앞에서 예수님 앞에서 자기 욕망을 실현하려고 정성을 모을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 자체로 말씀에 의해서 지적받는 기쁨과 즐거움과 감사가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성도라는 자리가 곧 말씀의 자리인 것을, 내 자리가 아니라 말씀의 자리로 교체된 것을 날마다 점검하고 느끼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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