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무니없는 구원
고린도후서 13장 5절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사도 바울이 믿는 분은 예수님이죠. 예수님을 믿었죠. 믿는다는 자를 안 믿어요, 사도 바울이.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마음과 합치되죠. 하나님이 제시한 문턱이 있어요. 구원의 문턱. 이 구원의 문턱은 인간에게 불가능성이거든요. 다른 말로 ‘마지막 문턱’. 구원의 문턱은 항상 인간에게 마지막 문턱이 되는 겁니다. 복음 전파할 때 ‘너희는 버리운 자 맞아.’라는 것을 규명해주는 것도 복음 안의 내용에 필시 들어있습니다.
버리운 자라고 하는 그 근거를 다시 한 번 재검토하는 기회를 가지면 되는 거예요. 도대체 무슨 근거에서 사도 바울이 나보고 ‘버리운 자니라’라고 그렇게 이야기하는지 그 이유가 뭐냐 하는 거예요.
사도 바울의 적은 1.개인적으로 또는 집단적으로 비난하고 공격했던 그들이 사도 바울의 적이냐? 2.모든 사람이냐? 어느 쪽입니까?
모든 사람이 사도 바울의 적이에요.
노아나 사도 바울이나 사람을 믿지 않는 이유가 이 마지막 문턱을 넘을 위인들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지난 수요 설교에서 목발 이야기했죠. 목발을 그냥 버린 자는 그게 굉장히 쉬웠는데 다른 사람은 목발 버리는 과정을 종교로 만들어버렸어요. 그리고 설교하는 사람도 목발 짚고 있고 듣는 사람도 목발 짚고 있고. 이상한데 그 이유가 있어요. 나는 내가 버리운 자라는 인식을 내 속에서 강력하게 거부하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은 너는 버리운 자라고 할지라도 심지어 그 소리를 들었다 할지라도 나는 나를 버리기 싫어요.
차라리 이런 거래에 나서는데, 주님이 나를 버렸다는 것에 동의함으로써 나는 나를 안 버리는 방식으로 나를 챙기겠다는 겁니다. 그러니 계속해서 50년, 60년 교회 다녀도 이 구원의 문턱을 넘을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조건이 뭐가 되냐 하면 ‘너희 안에 그리스도가 있지 아니하면 너희는 버리운 자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5절에. 너희 안에 그리스도가 있지 아니하면. 여기서 이제 문제가 되는 거예요. 그리스도가 너희 안에 있다 하니까 성령을 언급하고 예수님의 살아계심을 언급해서 주께서 내 안에 들어오면 너는 버리우지 않는 자, 구원의 문턱을 무사히 넘은 자라고 자기 자신을 그렇게 챙기는 겁니다.
그게 아니에요. 이 말이 그게 아니에요.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들어오기까지 주님께서는 십자가 지신 분으로 들어오는 거예요, 십자가 지신 분으로. 그냥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가 들어오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 지신 분. 모든 인간에게 적으로 규정되는. 모든 인간이 ‘그런 메시야는 없어. 그런 하나님은 없어.’ 그러니까 예수님은 십자가 지신 거예요.
십자가 지실 때 그 당시 당국자들만 예수님의 적이 아니에요. 십자가 사건이 확대되면서 예수님에 대해서 우호적인 태도를 가졌던 모든 사람들도 예수님한테는 버리운 자에요. 적입니다. 십자가 사건에 가담하지 않아도 이미 적이 되는 거예요. 구원의 문턱을 못 넘었으니까. 그 당시 유대인들이 하나님은 이해하고 메시야는 이해하는데 십자가 져야 될 이유가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십자가 지실 때에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느냐 하면 “아버지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이것은 때려죽여도 인간이 고백 못하는 거예요. 인간은 절대로 자기를 안 버려요. 자기를 왜 버려요? 내가 무엇 때문에 살아갔는데. 나를 버리기 위해서 살아왔습니까? 나를 지키기 위해서 살아왔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이 아버지께 갈 때 어떤 식으로 가느냐 하면 인간이 할 수 없는 것, 오직 예수님만 할 수 있는 것으로, 버려질 때 아버지로부터 저주 대상으로 저주 받아서 버려져서 아버지께로 간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 통로를 예수님 말고 다른 사람이 할 수 있었으면 그 사람이 메시야일 거예요. 아무도 못합니다.
아무도 못한다는 말은 아무도 구원의 문턱을 넘은 사람이 없다는 거예요. 예수에 관한 종교는 그렇게 많고 종류도 그렇게 많고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사람도 그렇게 많고 성령 받았다는 사람도 그렇게 많은데 구원의 문턱을 넘은 사람은 인간에겐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 시간에 왜 인간은 구원의 문턱을 못 넘는가 설명해드리겠습니다. 17년 동안 우리가 이 호텔을 이용했잖아요, 1년에 두 번씩. 그때마다 만나는 반가운 사람이 있어요. 키가 아주 큰, 식사할 때 서빙하는 사람. 지금은 승진해서 총지배인이 되었답니다. 사람이 아주 순하게 생겼어요. 그 키 큰 사람한테 장난삼아 그 사람이 서있는 발밑에 내 손을 집어넣는 거예요. 내 손을 집어넣으면서 내가 소리 지르는 거예요. “아야!”
그 사람은 순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내 손을 밟은 게 아니고 그 사람이 서 있는 자기 고유의 자리, 자기만의 고유한 자리에 내가 일방적으로 내 손을 집어넣은 거예요. 그리고 소리 지르는 거예요. 누가? 내가 질렀어요. “아야, 아프다. 너는 나를 핍박하는 자로다.” 이렇게 했어요. 이걸 자해 공갈단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고의 사고, 보험 사기에요, 이거는.
주님이 만약 그렇게 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나는 내 인생을 지키고 싶은데, 이건 나의 고유한 건데, 남은 모르지만 내가 나를 버린다는 것은 나에게 있을 수 없는데, 여기에 예수님께서 아무 의논도 없이 나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자기의 손을 집어넣는 거예요. 집어넣으면서 거기에 세례 요한이 한 소리하는 거예요.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다.”
적어볼게요. 이게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요.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다.’ 누가 지라 했습니까? 어린 양, 희생당할 어린 양이 왔다는 것은 그 희생당할 양이 짊어진 게 뭔가 있다는 거예요. 그게 바로 죄라는 겁니다. 죄인은 천국에 갈 수가 없습니다. 이건 하나님의 원수고 적이기 때문에. 소속이 마귀기 때문에.
어린 양이 세상 죄를 짊어졌다고 규정하는 것은 누구냐? 키다리 아저씨 발밑에 일방적으로 들어와서 의논도 없이 손을 넣어놓고 ‘사울아 사울아, 네가 나를 핍박한다.’ 일방적으로 쑤셔 넣은 일방적인 주님 쪽의 입장이에요. 주님 쪽의 입장이라고요! 주님이 터무니없는 거예요! 오늘 제목은 <터무니없는 구원>입니다. 도대체 구원이라는 게 터무니없는 거예요.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은 것은 우리 자신들입니다. 왜? 그래야 구원을 받기 때문에.
요한복음 1장 잠시 보겠습니다. 1장 5절에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어두움이 깨닫지 못해야 어두움이에요. 깨달으면 그것은 어두움이 아닙니다. 그 다음에 우리가 잘 알다시피 18절,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어요.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니까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그 하나님은 전부 다 조작된 거예요. 그 조작된 출처가 뭐냐 하면 ‘나는 어떤 경우라도 제가 저를 버리는 것을 거부합니다.’라는 것을 전제로 깔고 그들은 하나님을 상상해서 믿는 겁니다.
그런 일들을 모든 인간들이 하고 있는데 주님께서는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이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말씀이 육신이 돼서 우리에게 나타났거든요. 그 분이 하나님이에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한복음 1장 1절에 나오잖아요.
그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냐 하면 이 땅에서 사람들에게 버림받아야 될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으로 찾아온 거예요. 이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믿지 마라’가 아니고 ‘믿을 수 없다’는 거예요. 왜? 너무나 터무니없기 때문에. 너무나 터무니없는 일을 벌인 거예요, 하나님께서. 구원의 문턱이 그런 겁니다.
어느 누구도 자기 자신이 누군지도 모른 상태에서 덜렁 좋은 말씀 주시니까 ‘아, 내가 아는 하나님에게 자기 아들이 있는데 삼위일체 이론에 의해서 그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는구나. 그러면 아버지도 내가 잘 믿고 있으니까 아들도 덥썩 믿어야지.’라고 나선 사람은 전부 다 구원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그 펜스 안쪽에서 맴돌고 있는 사람이에요. 50년, 60년 교회 다니면서 문턱을 못 넘고 계속 맴돌고 있는 거예요. ‘이렇게 하면 기뻐하시겠습니까? 저렇게 하면 기뻐하시겠습니까?’ 자기가 자기에게 속삭이면서요. 그런 식으로 하는 겁니다.
그래서 문턱을 그 누구도 넘지 못했다는 그 사실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목이 요한복음, 요한일서에도 많이 나오는데 요한복음 3장에 보면 그런 말씀이 나옵니다. 3장 32절에 “그가 그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되 그의 증거를 받는 이가 없도다” 없어요. 특히 31절에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 따로, 땅 따로 입니다. 인간은 어디에 속합니까? 땅에 속하죠. 마땅히 하늘에 속한 것을 못 알아봐야 돼요.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그 균열을 그대로 유지하고자 하는 거예요, 주께서. 인간들이 파악하는 자기 죄와 하나님이 파악하는 죄가 다르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죄인을 구원한다니까 그다음부터 자기 속에 있는 죄를 개발한다고 바쁜데 그거 소용없어요. 그 죄를 개발하는 의도 자체가 죄인데요.
그 죄 개발해서 세상 죄와 결합시켜서 그 죄 용서받고 나는 예수님 덕분으로 구원받겠다는 이러한 자기 나름의 프로젝트는 그렇게 현명하지 못합니다. 차라리 사울이 똑똑해요. 사울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다 체포하고 죽이기까지 했잖아요. 자기가 살인자 되었어요. 사람 죽인 사람이 천국 갔어요. 이게 말이 돼요, 이게? 죽일 뻔한 게 아니라 죽여 버렸어요. 내가 많은 사람을 죽였다.
그런 사람을 왜 천국에 넣어줍니까? 살인강도도 마찬가지고. 죄 많은 여인도 구원시켜주고. 왜 그렇게 해요? 죄를 지으나 안 지으나 모든 인간이, 예수님을 핍박했던 그 현장에 있었던 바리새인이나 먼발치에 있던 이방인이나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원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땅에 속했다. 다시 말해서 이 땅은 이미 마귀가 접수했으니까 마귀에 속했다. 그러니까 마귀에 속한, 땅에 속한 인간들은 마귀의 속성, 땅의 속성을 도저히 자기 마음에서 지워버릴 그런 재주가 없어요. 그 재주가 없으면서 자기는 자기대로 지키고 복음은 복음 지식으로 거기다가 덧붙이고 덧붙이고 덧붙이고. 그래놓고 구원받았다고 자기를 스스로 성도라고 착각하고.
그래가지고 구원의 문턱을 못 넘죠. 구원의 문턱을 넘을 경우는 이 아이러니, 차이나도 너무 차이나는 이 아이러니를 넘어서야 돼요. “아니, 이건 말도 안 되는 횡포입니다, 주여.” “그 횡포를 받아들일래?” “네, 받아들이겠습니다.” 이건 사람의 능력이 아니고 로마서 8장에 나온 것처럼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사람에게만 결과적으로, 결과입니다, 결과적으로 발생되는 희한한 일입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은 자기보고 미쳤다는 거예요. 내가 미쳤어, 정말 미쳤어. 자기 자신이 미친 거예요, 이거는. 왜냐? 본인이 설명할 길이 없어요. 안 믿는 사람하고 똑같아요. 나는 자기 챙기는 데에 양보가 없어요. 똑같아요. 그 당시에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을 왜 믿습니까? 하나님도 영광이고 자기도 잘 되고,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겠다는 거예요. 그러나 사도 바울은 알죠. ‘너희 속에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오지 아니하면 너희들은…’ 우리가 제일 듣기 싫어하는 말, ‘너는 잘렸어. 너는 구원의 문턱을 못 넘어. 지옥이나 가라.’
우리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어떤 능력도 제공하지 않고 ‘네가 이렇게 하게 되면 이렇게 된다’는 어떤 가이드도 없이 ‘너는 나를 핍박했다’고 일방적으로 치고 들어오죠. 그러면 이제 사도 바울 같은 경우에는, 사도 바울이 그 이야기를 들었잖아요. 그럼 사도 바울은 신나죠.
왜냐하면 그 아이러니, 인간들이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아이러니를 마음껏 반포하고 선포하는 즐거움이 있어요. ‘약 오르지?’ 이런 거죠. ‘나는 이거 받아들였는데 너는 안 받아들였지? 아니야, 너는 받아들일 수가 없어. 나도 그랬으니까. 똑똑한 나도 그랬으니까 너는 못 받아들여. 여호와나 믿어라.’
여기서 우리가 발목 잡혀있는데요. ‘버리운 자니라’는 일종의 욕설이죠. 그런데 욕설을 합당한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솔직한 인간의 마음으로서는 도저히 성사될 수 없는 거예요. ‘너 잘렸어. 너는 아니야.’ 이걸 어떻게 받아들입니까? 그런데 아이러니하게 ‘너는 버리운 자니라’가 복음 안의 내용에 들어있는 거예요. “아버지여, 아버지여 나를 어찌하여 버리시나이까.” “함께 버림받자, 야. 함께 버림받자.”
만약에 그 키 큰 직원의 발밑에 내 손을 넣고 “아야”할 때, 그 키 큰 직원이 진짜 성령을 받았다면 어떻게 됩니까? “아이고, 선생님 죄송합니다.” 이렇게 될 거예요. 왜 본인이 죄송해요? 횡포는 내가 했는데. “아이고,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내 무게가 많이 나가죠? 눌려서 얼마나 아팠을까요? 그 아픔에 제가 동참하겠습니다, 평생 동안.”
이게 말이 돼요? 이상한 말 아닙니까? 그럼 제가 손을 빼면서 그 사람에게 뭐라고 하겠어요?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어? 당신 미쳤죠?” 그게 ‘나는 미쳤어~’에요. 당신 미쳤어. “나는 주의 사랑에 미쳤습니다.” 뭐 이렇게 나온단 말이죠.
땅에서 통하는 이야기와 하늘에 속하는 이야기가 이렇게 차이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여기서 덧붙이고 싶은 것은 이 이야기에요. 도대체 왜 인간은 자기를 버리지 못하는가? 상당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인데 왜 이성과 합리에 발목잡혀있어서 복음인 ‘너는 버리운 자니라’를 적극적으로 거부하고요. 나는 십자가를 믿는 게 아니고 착한 예수님을 믿겠다고 일방적으로 바꿔치기하는 그 의도가 어디서 나왔는가?
그걸 현대 정신분석학에서 밝혀주고 있어요. 꼭 오징어 같이 생긴 플로우차트(flow chart, 흐름도. 프로세스의 논리적 순서를 도형과 화살표로 표현한 다이어그램)를 제시한 사람이 있습니다. 라캉(Jacques Lacan, 1902-1981)이라는 사람이에요. 라캉은 인간이 어떻게 존재한다고 했느냐? 두 가지로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자아이상(ego ideal), 두 번째는 이상(적) 자아(ideal ego). 이 두 가지를 나누어서 생각했습니다.
라캉은 거울에 대해 연구를 했죠. 인간은 태어나면서 자아가 형성되는데 ‘나 이렇게 되고 싶어’하는, 이렇게 되고자 기대하는 모델이 있어요. 태어나서 자아가 생기면서 내가 이렇게 되고 싶다는 이상도 같이 생기는 거예요. 자아이상. 이것을 라캉은 쉽게 말해서 ‘웃기고 있네’ 이렇게 봤어요. 상상의 세계기 때문에.
특히 여기 뭐가 많이 투입되느냐 하면 신데렐라, 백설공주, 인어공주 같은 여러 가지 동화가 많이 개입돼요. 왕자가 나타나서 힘든 나의 신세를 뽀뽀 한 방으로 완전히 역전시켜서 나로 하여금 왕비 되게 하는 이런 거요. 열두 시 땡 쳐서 갔는데 갑자기 유리 구두 한쪽이 벗어져서 그 유리 구두에 발이 맞는 동네 처녀를 찾았고 발이 딱 맞았다는 이런 이야기가 자아이상과 관련되어 있는데 자아이상 속에서 자기의 부정성이 나타나지 않아요. 자기는 항상 착해요. 훌륭하고. 내가 나를 포기하거나 잃어버리는 것은 있을 수가 없어요. 왜? 나는 정당하니까요. 나는 의롭고 정당한데 그걸 왜 버려요? 미쳤어요? 말이 안 되잖아요.
이상(적) 자아는 뭐냐 하면 이 사회에서 강요받은 모델이에요. 이걸 ‘자아’라 하지 않고 ‘주체’라고 이야기합니다. 주체라는 것은 남이 나의 자리를 지명해주는 게 주체입니다. “김 기사, 운전해.” 그 사람 이름이 ‘김 기사’가 아니에요. 그런데 그 김 기사가 만약 사표를 내면 그 다음부터 김 기사라 하면 안 되죠. 자신의 이름을 불러줘야 돼요.
그러면 주체에서 사표 내면 갑자기 어디로 돌아와요? 자아로 돌아와요. 주체가 “김 기사, 운전 잘하면 내가 남편한테 이야기해서 당신을 정식 직원 되게 해줄게.” 이게 무슨 이상입니까? 사회에서 출세를 보장하고 네 주체가 힘을 발휘하는 것. 물론 월급은 더 올라가겠죠. 힘을 발휘해서 사회의 한 일원으로서 남들이 ‘너 누구냐?’고 묻지 않고 ‘당신 뭐하는 사람이냐?’고 묻는 거요. 그 흐름에 참여시켜주는 것이 이상 자아입니다.
상견례할 때 멀쑥하게 가만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한식 앞에 두고. 뭐 대화를 해야 될 게 아니에요. 대화를 하는데 삐질삐질 땀이 나요. 전에 이야기했죠? 상견례 끝나고 안사돈이 집에 가서 한복 집어던졌다고요, 성질나고 스트레스 받아서.
“저 실례지만 사돈 하시는 일이 뭡니까?” 거기에 대해서 ‘내 이름은 000입니다.’ 이건 말이 안돼요. 당신의 자아를 묻는 게 아니고 당신의 주체를 묻는 거예요. 남들이 당신이 뭐하는 사람인지 알아야 한 달 수입이 얼만지 파악이 딱 된다 이 말이죠. 파악이 되면 ‘내 딸이 얼마 벌어야 돼?’ ‘내 아들이 도대체 얼마 벌어야 돼?’ 완전 인공지능처럼 데이터가 주루룩 나오잖아요.
그래서 “실례지만 뭐하십니까?” 묻는 거예요. “경비 섭니다.” “경비요?” ‘아이고, 꼴난 경비.’ 이러지는 않아요. 사돈 간에 격식이 있으니까요. “아이고, 경비하면서 아들 키운다고 고생 되게 했습니다.” 딴에 위로한다고. 그럼 저쪽에서 뭐라고 합니까? “여보, 일어서자.” 일어서니까 “아이고, 볼 일 있었습니까?” “다른 약속이 있어서요.” 무슨 약속? 상견례 자리보다 더 중요한 약속이 어디 있습니까? 나가버려요. 이제 결혼은 파토날 위기에 처한 겁니다.
자아를 물어야 되는데 주체를 물은 거예요. 누가요? 남들이. 사람들은 자아로 살지 않고 주체로 살기 때문에 그다음부터 인생의 목적이 ‘인정받기’입니다.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기 위해서 이 세상에서 투쟁하는 것을 ‘인정투쟁’이라고 합니다.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이 그 이야기했어요. ‘인간은 인정받기 위해 산다.’
그런데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사회의 모든 이론은 이거에요. 자아이상과 이상 자아. 정신분석학에서는 이 둘 다를 정신병으로 봅니다. 자아 이상, 자아에 문제 있는 것은 정신병이에요. 커서 사회에 들어왔는데 아직도 어릴 때 동화 찾고 있는 이것은 정신병이에요. 그런데 이상 자아는 정신병이라 하지 않고 좀더 세분화해서 이걸 신경증 환자라고 합니다. 히스테리라는 것은 이유도 없이 몸이 아픈 것. 잠을 못 이루는 것, 히스테리입니다.
히스테리는 인정받아야 될 주체가 인정에 흠집 생기고 누락이 생겼을 때 주체에 의해서 몸이 통제되다가 맞추어서 살았던 주체의 영역 중 한 영역이 결함에 의해 거덜 났죠. 그러니까 누가 아파요? 내 몸이 아픈 거예요, 내 몸이. 물론 감사와 기쁨은 다 날아가 버렸어요. 내 몸이 아픈 거예요. 이것은 신경증 환자에요. 특히 우울증 같은 것도 여기서 생기거든요.
그럼 정신분석이니까 해결책이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해결책은 뭐냐? 너의 부정성을 자백하고 고백함으로써 솔직하게 ‘나는 이런 문제가 있다’고 자백하는데, 남이 하면 안돼요. 그렇게 하면 또 인정받으니까. 내가 나에게 내 잘못을 자백하는 거예요. 내가 나에게 ‘나는 이런 문제가 있다’ 자백하는 거예요. 그럼 남들 보기에 마음을 많이 겸손히 낮춘 거죠. 이게 정신분석학에서의 해결책이에요.
그 낮추는 방법이 카톨릭 신자 같으면 어떻게 돼요? 어떻게 낮추겠습니까? 성당에서 고해성사를 하죠. 할 수 없는 말은 하나님과 통하는 사제한테 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요한복음에서 ‘네가 죄를 사하면 내가 대신 사해줄게’ 그 비슷한 얘기 있잖아요. 마태복음에도 나오고. 그렇게 해주는 거예요. ‘이런 죄를 지었습니다, 이런 죄를 지었습니다.’
그래서 명동성당에서는 광고판 하나 붙였어요. ‘죄를 지은 경로는 이야기하지 마세요.’ 하지 마시고 이런 죄를 지었다고만 이야기해야지, 듣는 신부가 더 병들겠어요. 죄 지은 경로를 얘기해버리면 이건 자기 죄를 고백하는 게 아니고 남 탓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죄를 고백하러 왔는지, 아니면 누구를 고소하러 왔는지 분간이 안 되는 거예요.
고린도 교회에도 똑같은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고린도전서 6장 2절,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치 못하겠느냐” 그다음 3절을 봅시다.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 일이랴”
구원의 문턱을 넘은 사람들은 무엇이 날아가야 된다? 같은 세상에 사는 남들로부터의 인정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왜? 이 세상은 아이러니를 모르니까. 아이러니를 모르니까요. 터무니없는 구원의 문턱이에요. 인간의 지헤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말도 안되는 터무니없는 문턱을 넘어선 사람은 그걸 모르는 대법원 판사나 지방법원 판사한테 상담가한테 오은영 박사한테 물을 필요가 있어요, 없어요? 그들이 뭐 안다고요? 그들도 정신병자인데.
그래서 교회나 성당은 이런 이야기를 들어주면서 “이제 속이 좀 시원하십니까?” “아이고, 속이 시원합니다.” 기도원에 기도하면서 제단 앞에서 ‘주여, 이런 죄를 지었습니다.’ 그럼 기도원 원장이 “이제 속이 좀 시원합니까?” “속 시원합니다.” 이게 바로 자기를 버리지 않는, 우회적으로 종교적인 방식을 통해서 기어이 행복한 자아, 괜찮은 주체를 내가 버리지 않아도 되는 나로 스스로 자기하고 협상하고 타협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은 때려죽여도 나를 포기할 생각이 없습니다. 문턱을 넘지 못해요.
요한복음 8장 보겠습니다. 8장 21절에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문턱을 못 넘은 유대인들이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거기에 대한 해석을 합니다. 어떻게 해석하느냐? ‘저가 우리가 가지 못하는, 합류하지 못하는 데 간다고 하니까 이것은 필시 자결하러 가는 것이다.’고 하죠. 이게 무덤 안의 인간의 한계에요. 죽을 때까지는 이 자아이상 또는 이상 자아를 꿈꾸면서 살겠다는 겁니다.
어릴 때부터 성당을 열심히 다닌 천주교 신자인 정신분석가, 철학자가 결국은 나이가 육십 되어서 고백합니다. “나는 신을 믿지 않습니다. 하지만 신을 믿는 사람을 존경합니다.” 왜냐하면 그동안 성당에서 가르쳐준 모든 내용을, 자기가 정신 분석학에서 다 배웠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나를 버릴 필요가 없는 데에 필요한 모든 지식을 성당에서 그동안 짬짬이 성경 인용하면서 배웠는데, 성경 내용이 기껏 그거였었어? 그럼 더는 성당이나 교회 갈 필요 없어. 교회가 정신 분석하는 이 수준을 못 따라가니까요. ‘회개하세요. 반성하세요. 복 주십니다.’ 이거는 정신 분석학에서 하고 있잖아요.
‘내가 문제입니다. 내 탓이요, 내 탓이요, 다 내 탓이요.’ 교회나 성당에서 장사하기 위해서 그런 것을 컨셉으로 판매하고 있잖아요. 지금도 판매하고 있어요. “목사님, 왜 일이 안됩니까?” “기도가 부족해서요.” “왜 기도 응답이 없습니까?” “네 죄를 회개 안 했으니까.” 그러면 또 머리를 굴리는 거예요. 내 죄를 회개하면 정작 내가 목표로 잡는 나의 기도, 내 가정 행복과 남편 건강은 보장된다. 오케이. 사람이 이 세상에서 발을 못 빼는 이유는 본인에게서 본인이 발을 뺄 수 없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본인에게서 본인이 발을 못 빼요. 뺄 수가 없습니다.
요한복음 8장 23절 계속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니까 이 두 세계가 다른 영역에 있기 때문에 말이 통하겠어요, 안 통하겠습니까? 안 통하죠. 말이 안 통한다고 멈추지 마시고 안 통하는 이유가 뭐냐? 아이러니. 모순됨.
전혀 납득되지 않는 다른 하나님, 독생자 하나님이 우리에게 전해준 내용이 성경 전체에요.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말씀을 했어요. 그런데 교회는 알아듣지 못하는 말씀을, 자기의 부정성, 문제성을 어떻게 해소해서 편안해보려고 일방적으로 신학자나 목사나 주석가한테 그걸 얻어들으려 했고 목사는 거기에 맞추어서 그런 설교를 해온 거예요.
계속해서 부정성 봅시다. 정신 분석학에서 인간은 왜 신경증 또는 정신병에 걸려 있는가? 이상 자아 또는 자아이상. 여기 ‘자아이상’은 예를 들어 이런 겁니다. ‘나는 나폴레옹이다.’ 이런 거. 아마 어릴 때부터 나폴레옹 되고 싶어했던 모양이죠. 커서도 사회 나가서도 그 일하고 있는 거예요. 나폴레옹과 자기를 동일시하는 거예요.
그게 자기 상상의 세계인데 상상의 세계는 이 세상 사회에 의해 억압되어야 마땅하거든요. 억압이 뭐냐? 프레스(press), 누르는 거잖아요. 자기 집에서는 그렇게 해도 돼요. 그러나 밖에 나와서까지 ‘나는 나폴레옹이다’ 그런 소리하면 안 되죠. 상견례 가서 “뭐하십니까?” “나는 프랑스 황제입니다.” 이거는 상견례 완전히 깽판 놓는 거잖아요. ‘내 아들은 후계자입니다.’ 뭐 이런 소리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가 억압한 것을 다른 사람이 대신, 내가 억압한 자아이상과 이상자아를 누가 해주길 바라는 것, 그게 바로 환상인 거예요. 그 환상을 실감나게 현실화시킨 나라가 무슨 나라게~요? 이게 어느 나라겠습니까? 북한이죠. 그리고 통일교고. 그리고 누가 또 있습니까? 신천지고. 전광훈 목사도 마찬가지고요. 임영웅도 거기 들어가고. 김호중도 거기 들어가요. 나오기만 해봐요, 지금. 돈 막 법니다. 소위 스타. 뉴진스도 마찬가지고 블랙핑크.
어릴 때 자아이상을 상실하게 되면 세상에 나가도 꿈을 잃어버리는 거예요. 꿈을 잃어버리면 살아도 너무 각박하고 스트레스를 받아요. 어릴 때 꿈은 사회 나가서 발설하진 못하지만 내부적으로 이 꿈을 내가 담고 갔으면 휴, 숨통이나 트이겠다. 그 숨통이 대리만족하는 거예요. 도착증이라 하는데 그 숨통이 개, 고양이, 인형입니다. 말 잘 듣거든요. 말 잘 들어요. 고양이, 개는 대변만 치워주게 되면 막 꼬리 흔들고요. 말 잘 들어요.
그러나 사회는 아무도 내 말 안 들어요. 그럼 쉼을 얻으려면 어디 가야 됩니까? 내가 살고 있는 집이 아니고 개가 살고 있는 거기서 내가 위로를 받는 거죠. “오늘 이런 일이 있었어, 이런 일이.” “멍! 멍!” “알았어. 사료 줄게.” “야옹.” “그래, 그래, 그래.” 고양이를 집에서 키우기 힘드니까 길냥이를 키우는데, 구두 신고 오다 냄새 나서 보니까 그 고양이들이 싼 똥을 밟은 거예요. 사료를 줘서…. 도대체 이 사회 전체가 통째로 미쳤어~ 펜스를 넘지 못하는 신경증, 정신병자들이 자기들끼리 맴돌고 있는 사회에요, 이 사회가. 땅의 세계에요, 땅의 세계.
요한일서 보겠습니다. 복음이라는 것은요, 예수님에 대해서 아는 것도 있지만 그와 동반해서 내가 태어났던 세상이 어떤 세상이냐를 복음을 통해서, 버림받는 예수님을 통해서 버림 안 받으려고 아주 몸부림치는 이 사회가 퍼뜨렸던 환경 있잖아요, 그 정신병 환경까지 아울러 보는 거예요.
요한일서 5장 18절부터 보게 되면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여기 ‘범죄하지 않는다, 죄 짓지 않는다’고 되어 있죠. 중요합니다. 죄의 개념이 두 종류입니다. 하나는 아이러니한 차원에서 의미하는 죄. 그리고 구원의 문턱을 넘지 못한 인간세계에서 규정하는 죄. 그것은 선악체계의 죄에요.
그런데 문턱을 넘은 자의 죄는 뭡니까? 이미 생명의 고귀함을 모르는 게 죄에요. 거저 주신 생명의 고귀함. 내 살과 내 피를 먹고 마시는 자는 영생을 얻는다. 이미 영생 안에 살고 있는 그 환경을 거부하는 게 죄가 되겠죠. 그러니까 같은 ‘죄’라는 단어도 소속이 어디냐에 따라서 그 개념이 차이나는 거예요.
제가 끝으로 이야기할 것은, 차이나는 둘 중 성도는 한 쪽을 택한다? 아니면 두 개를 다 본다? 어느 쪽입니까? 두 개를 다 보라고 주님께서 이 세상에 아직도 우리를 남겨둔 겁니다. 신났죠. 신났어요. 이게 사도 바울입니다. 사도 바울이 사도행전 마지막에 하는 말이 이거에요. “내가 복음을 전했는데 이 복음을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실컷 복음 전해놓고, 그 끝모습을 내가 이미 알거든. 사도행전 28장 26절에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을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 나의 고침을 받을까 함이라”
다시 말해서 ‘고침을 받으면 안돼. 네가 이 말 듣고 반성해서 돌아오면 안돼.’라는 취지로 말씀을 전했다는 말이죠. 이게 이사야에 나오거든요. ‘네가 돌아오면 안돼. 내가 가야 돼.’ 끝으로 이사야 55장 8-9절을 보는데, 요한복음 3장에서 거듭나지 아니하면 네가 하늘나라 못 간다 할 때 뭐가 거듭남인지를 이사야 55장 8절, 9절에서 보겠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내가 손을 내밀어 키다리 직원에게 밟혔는데 그 분이 하는 말이 “죄송합니다. 내가 고유의 내 자리 지킨 게 잘못이었습니다. 이 자리는 내 자리라고 여겼는데 그게 아니고 문턱을 넘다 보니까 이 자리가 주님이 십자가 지신 자리였군요.”라고 고백이 되신다면 감히 말합니다. 여러분은 버려진 자가 아니라 버려졌다가 주께서 찾아오셔서 문턱을 넘은 사람입니다.
그렇게 장담할 수 있는 이유는 이게 내 머리에서 안 나온 생각이기 때문에. 지금껏 살아왔던 내 일상생활은 자아이상과 이상 자아에요. 나 되고 싶어, 되고 싶어. 사회에 나가서 ‘나 저 사장 되고 싶어.’ 이런 거. 뭐든지 내 뜻대로 되고 싶던 이랬던 나. 이런 부정성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 꾹 밟으니까 스트레스를 더 받는 거예요.
스트레스를 보상하기 위해서 환상적인 쇼핑을 한다든지 환상적인 프로야구라든지 축구라든지 월드컵이라든지 어떤 세상적인 게임을 해서 ‘이겨라, 이겨라’하는 그런 것. 음악, 미술, 모든 예술 분야. 자기가 끌어올려보는 텐션, 그 텐션을 통해서 자기 안에 억누르는 것 대신 발산하는 계기로서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는 방식이 삶의 방식으로 굳어졌죠.
그런데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이걸 버리라는 게 아니에요. 정신병, 신경증 이런 건 못 고쳐요. 타고났기 때문에 고치는 게 아닙니다. 이걸 버리는 게 아니라, 그 틈 사이에 그렇게 난리치고 살아보려고 애쓰는 이 자리가 주께서 십자가에 피를 흘렸던 주의 귀한 자리라는 것을 공감하면 돼요. 못난 내가 주님의 죄 사함으로 다 이루었던 예수님이 주가 되시기 위해서 주님께서 필요로 한 자리인 것을, 주님 앞에 아낌없이 제공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모든 것을 만드신 하나님. 그런데 갑자기 우리가 마귀 들어서 이 자리만큼은 빼고 모든 것은 하나님이 하셨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내놓을 수 없습니다. 이건 나의 정당성입니다. 이건 나의 의입니다.’라고 우기던 저희들. 이제는 그것마저 주님의 십자가의 의미와 마귀로부터 승리를 드러내는 재료로 이 시간 기꺼이 고마운 마음으로 바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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