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강의20250926a 열왕기상 12장 28절(말씀의 내성)-이 근호 목사
오늘은 새 책『신구약성경에 대한 질문과 답변』을 합니다. 여기 ‘신구약성경’이니까 이건 말씀이겠죠. 신구약성경=말씀. 말씀에 대한 질문과 답변으로 되어 있는데 말씀, 성경이 ‘있음’이죠. ‘신구약성경이 있다’는 말은 ‘말씀이 있다’는 거예요.
어디 있는데? 말씀이 어디 있는데? 말씀이 있다면 어디에 있나? 공중에 날아다니는가? 이것부터 생각을 해봐야 돼요. 왜냐하면 있음, 이 ‘있다’는 누가 이미 점령을 했느냐 하면 ‘나’, 나 같은 ‘인간’. 나 또는 같은 인간이 이미 있음에 대한 모든 개념을 독점해서 점령했어요. 이유는 눈에 보이니까. 눈에 보이는 것만 ‘있음’이 됩니다.
그럼 여기서 뭐가 빠져요? 뭐가 ‘있음’에 못 들어옵니까? 하나님, 귀신, 성령, 예수님 안 들어오죠. 예수님, 하나님이 있음에 안 들어오니까 말씀은 있어요, 없어요? 말씀은 없죠. 말씀 대신 뭐가 있는가? 인간들의 언어, 인간들의 말이 있을 뿐이죠. 인간들의 말이 있죠. 그래서 인간들은 성경이 있으면 이것을 인간들의 말로 바꿔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이야기 하는 인간의 말.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지칭들을 하는데 실은 하나님의 말씀은 없고 이미 있음을 장악하고 있는 인간에게 나와서 인간에게 회수되는 그러한 인간의 말, 인간의 견해, 의견의 일종이다.’ 이게 인간의 생각입니다.
있음을 본인들이 확보했으니까 다른 것은 일체 초를 칠 수 없죠. 틈이 보이질 않아요. 모든 것은 인간으로부터 해서 인간으로 말미암아 인간으로 돌아온다, 이게 끝이에요. 그러니까 성경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아무리 종교계, 교회에서 그렇게 이야기해도 해석이라는 걸 거쳐버리면 이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고 인간들의 견해를 수집해놓은 하나의 고(古)문서, 전통적인 고문서에요.
전통적인 고문서라 하는 것은 실용성이 뚝 떨어져요. 실용성이 뚝 떨어지기 때문에 ‘쓸모 있다’가 아니라 굳이 쓸 이유가 없다. 취미로 보는 건 괜찮지만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필수적인 것은 이미 인간들에 의해서 현재 빈번하게 활용되는 다른 책들이 있기 때문에. 예를 들어 마르크스의『자본론』같은 것. 이미 다른 철학과 사상들이 많기 때문에 성경은 순서가 뒤쪽으로 많이 밀리죠.
순서가 많이 밀리는데 그걸 아예 국가의 법으로 정해놓은 국가들이 점점 많아지죠. ‘거리에서는 포교활동하지 마라.’ 영국 같은 데는 법으로 만들었어요. 우리나라도 앞으로 거리에서 포교금지 법률이 나올 수 있어요, 민주당 주도하에. 왜? 통일교를 견제해야 되니까. 신천지를 견제해야 되니까. 안 해도 될 일을 왜 쓸데없이 하느냐는 거예요. 안 해도 될 일을. 지금 종교가 밥 먹여주는 거 아니란 말이죠.
다른 말로 하면 뭐겠어요? 하나님이 밥 먹여주는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끝났다. 인간의 노동으로 인간이 자연을 개발하고, 그 자연이 품고 있는 게 뭐냐? 에너지에요. 탄수화물, 단백질, 지방, 이 에너지를 인간이 개발하죠. 인간은 뭐로 되어 있다? 하나님의 형상? 아니죠. 세포. 세포는 어떻게 되어 있는가? 에너지바죠. 에너지를 달라고 하기 때문에. 인간이 있음을 계속 있음으로 유지하기 위해서 현재 자연에 있는 열매라든지 곡식이라든지 그 알맹이가 광합성 작용에 의해서 품고 있는 칼로리, 열량이 되는 것을 저쪽에서 이쪽으로 가공해서 이동시키게 되면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쓸모 있는 거예요. 꼭 필요한 거예요.
일단 양식을 먹어야 돼요. “선생님, 나 크면 시집 안 갈래요.” 하든지 그건 나중 문제라니까요. “커서 시집가도 애 안 낳을래요.” 초등학교 4학년이 그런 이야기하더라도 그건 나중 문제고, ‘나중에 커서 시집 안 갈래요.’ 말할 때 포함되는 근육이 움직이는 에너지는 어디서 얻는가? 자기 엄마가 도시락 싸줘서 그렇겠죠. 안 그러면 급식 줘서 얻었겠죠.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뭐냐 하면 영양분 있는 곡식을 공급받는 거예요.
성경대로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그다음 뭡니까? “무엇을 먹을까” 모든 인간은 여기에 천착되어 있어요. 천착, 매달린다. 딱 붙어있다. 이를 집요하게 찾고 있다. 여기서 나오는 공식은 ‘인간=자연’. 인간은 누구냐? 자연 연구를 통해서 물리학을 통해서 인간은 세포로 되어 있고 세포는 원자로 되어 있다는 거예요. 이게 인간들 세계에서 만든 진리에요. 진리와 같은 말로 지식. 지식, 진리의 세계에 있습니다. 이 세상은 그렇게 구성되어 있어요.
그런데 여기 오늘 책 5페이지에 보면 첫 문장이… 지금 이 책이 몇 년도에 나온 책이냐 하면 2008년도에 나온 책이죠. 2008년도니까 지금으로부터 어언 17년 전이죠. 이 책을 교재로 채택하면서 저도 조마조마해요. 얼마나 말도 안 되고 엉터리 같은 소리를 그것도 활자로 박아서 빼도박도 못 하게 해놨느냐. 17년 전에 썼던 책을 교재로 하면서 내가 또 얼마나 청문회에 나와서 구차한 변명들, 말도 안 되는 이중 삼중의 변명들을 늘어놔야 되나. “그때는 말이죠. 예, 그때는 그랬죠.” 구차한 변명을 내가 또 뭐라고 만들어내야 될지 조마조마해요. 그러나 그것은 내 소관 아니고 그때 가서 이렇게 낯 두꺼운 짓을 해야 되면 해야죠. 세월이 17년 지났으니까요. “아이고, 목사님. 말이 뭐 모순이 되노? 틀린 소리 했네요.” “글쎄요. 왜 그랬을까요, 그때?” 이런 식으로.
첫 문장이 뭐냐 하면 [근본 되시는 분이 계십니다.] 근본. 그럼 방금 이야기했던 ‘있음’이라는 단어를 인간들이 안다고 했잖아요. 눈에 보인다 이 말이죠. 여기에 대해서 요한복음 9장에서는 근본 되시는 주님께서 뭐라고 하셨느냐 하면 “보니까 소경이다.” 요한복음에 더 나아가서 하신 이야기가 있어요. “내가 바꿔줄게.” 바꿔주러 왔다는 거예요. 보는 자를 뭐로 바꾼다? 소경으로. 그다음에 보지 못하는 자를? 보는 자로 바꾸죠.
그러니까 주께서 하시는 것이 하나의 노선을 형성할 수 있어요. 모든 인간은 보잖아요. 모든 인간은 보죠. 장님이라도 옆에 가족들이나 친구들한테 어떻게 보이냐고 묻잖아요. ‘모든 자는 본다.’ 그런데 주님께서 보는 자를 뭐로 바꾼다? 소경으로 바꾼다. 주님께서 개입하면 보는 자를 소경으로 바꾸죠. 일단 소경이 되고 난 뒤에 그다음에 뭡니까? ‘본다’가 되죠.
‘모든 자는 본다.’에서의 인간을 인간1이라 하면 소경을 경유해서 ‘본다’는 것은 인간2가 되겠죠. 인간2가 되는데 중간에 ‘소경’이 있죠. 있으니까 인간은 보기 때문에 자진해서 소경 되고 싶어요, 안 되고 싶어요? ‘나 지금 보고 있지만 이것은 장님이야.’라고 생각할 사람 아무도 없어요.
따라서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인간1에서 인간2는 예상이 될까요, 안 될까요? 예상이 안 됩니다. 왜 예상이 안 되느냐? 주님이 관여하기 때문에. 주님이 관여해요. 그래서 보는 자에서 소경 되게 하는 여기에 지난 낮 설교에서 이사야 6장이 들어갔습니다. 듣는 자를 막히게 하고 보는 자를 보지 못하게 만든다. 하나님의 일관된 일하심입니다. 일관된 하나님의 일하심.
결국 ‘소경된 자’ 이것은 두꺼운 칸막이에요. 신약적 용어로 한다면 수요일에 이야기한 것처럼 두꺼운 칸막이를 기준으로 한쪽 세계는 육의 세계, 다른 한쪽 세계는 영의 세계에요. 수요일에 언급한 것을 여기에 딱 집어넣게 되면, 영은 육에 의해서 숨겨져 있다. 마치 언약궤가 숨겨져 있는 것처럼.
영에 속한 숨겨져 있는 것이 육을 찾아온다는 것은 언약궤가 담고 있는,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접근 못하지만 언약궤가 담고 있는 영원한 생명을 자기 백성에게 주기 위해서 그 숨어있는 분이 육에 속한 인간을 찾아갈 수밖에 없죠. 찾아가게 되면 인간은 자기를 육으로 보지 않아요. 인간으로 봐요.
인간으로 보는 것을 하나님께서 이 인간을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육으로 바꿔줘야 돼요. 육으로 바꾸면 나는 어디서 못 빠져나오는 존재인가? ‘육의 세계로부터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다.’가 되겠죠. 아무리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께 도움 되는 일을 한다 할지라도. 삑- 결국 자기 한계를 드러내죠. “죽기 싫습니다.”
자, 죽기 싫다는 말은 현재 내가 확보하고 있는 나 있잖아요, 나, 이 나 외에 다른 나는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이게 인간의 한계 아닙니까. 이게 인간의 한계에요.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내가 나 외에 다른 나를 생각한 적 없는 상태에서 이 두꺼운 성경을 봤다. 그럼 거기서 나온 해석은 어떤 해석이 되겠어요? 영의 해석이겠어요, 육의 해석이겠어요? 육의 해석이죠.
결국 인간은 본인의 근본도 모르면서… 보통 선볼 때는 ‘근본도 없는 것들’ 이렇게 나오죠. 근본도 모르면서, 다른 말로 하면 근본이 아닌 채로 근본과는 별개의 붕 뜬 상태에서 내가 누구냐를 찾아가는 거예요. 뜬 상태에서. 이거는 반칙이죠. 이거는 하나님께서 거부하는 겁니다.
그런데 창세기 32장에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찾아와서 하나님의 천사를 통해 근본을 몰랐던 야곱을 공격해버려요. 그래서 마태복음 11장 12절에 “천국은 침노를 당한다.” 공격받는 거예요. ‘공격하는 쪽에서 빼앗아간다’ 이렇게 되어있어요. 그렇게 되는 겁니다.
어쨌든 간에 지금 ‘본다’에서 뭐로 바뀌어야 됩니까? 소경. 아, 몰라. 나 아무것도 모르겠어. 안 보여. 안 보여. 소경 되죠. 그런데 ‘본다’에서 소경되었다고 해서 구원되는 게 아니에요. 왜냐? 안 보인다는 내가 있음이 되잖아요. 있음. ‘안 보이지만 있는 건 마찬가지잖아. 있기는 있잖아.’ 이렇게 되겠죠. 여기에 주님께서 개입해버리면 소경 단계에서 있음 자체가… 있기는 있어요. 그런데 뭐가 있느냐 하면 나라는 게 있다고 여기는 내가 있는 것이 아니고 죽음 형태가 있죠.
나, 자아라는 것의 주체가 무슨 형태다? 죽음의 형태, 하나의 죽음의 변형체이다. 죽음 덩어리가 되는 거예요. 이해하나마나 막히기는 뭐 마찬가지니까 어려워요. ‘죽음은 물결 덩어리’. 무슨 물결이냐? 사건들의 물결입니다. 죽음은 사건 덩어리입니다. 죽음은 실체가 없습니다. 죽음은 실체가 없거든요. 맞죠? 죽음은 실체가 없잖아요. 실체가 없는데 ‘실체 없는 것이 실체로 드러나기 위해서는 사건으로 풀어진다.’
실타래 있잖아요. 실타래는 하나의 덩어리처럼 여겨지죠. 그 중 실을 뽑아서 잡아당겨보세요. 그 덩어리진 실 뭉치가 조금씩 줄어가면서 결국에는 없죠. 3차원의 공 모습이 실 되면 가느다란 1차원의 선이 되어버리죠. 그럼 3차원 어디 갔죠? 2차원 면적도 없죠? 1차원적인 실이라는 선이 있죠. 그럼 그것을 다시 감아버리면 3차원 되죠.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 이걸 ‘복합자아’라 합니다. 복합자아. 기억된 사건들의 뭉치가 지금의 나의 주체이고 자아에요. 주체고 자아라고요.
유재석이라는 사람이 사회 보는 <유퀴즈>가 수요일에 방송하는데 그 프로그램에 초등학교 4학년 여학생, 남학생이 나왔어요. 둘이 영재에요. 그 여학생에게 뭘 좋아하느냐 물으니까 자기는 롯데 야구팀을 그렇게 좋아한대요. 그럼 옆의 남학생은? 둘다 영재에요. 남학생은 나비, 나방을 연구하는 초등학교 4학년인데 말을 얼마나 잘하는지. 그런데 그 남자아이의 복합자아에 롯데 자이언트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없다고요.
그러니까 인간의 자아라는 것, 인간의 정신이라는 것은 성장하고 살아오면서 여러 가지 사건들이 실타래처럼 모인 거예요. 그런데 그 여자 애는 아마 주위에 친구나 아빠가 부산 출신일 수도 있어요. 부산 출신에다가 롯데 자이언트를 좋아하니까 그것이 사건화 되어서 자기 안에 기억으로 모인 거죠. 그런데 그 남자애는 같은 영재라도 다른 사건노선이다 이 말이에요.
결국 이 말은 뭐냐?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둘 중 어느 것이 인간의 근본입니까? 둘다 근본 아니죠. 이것을 인간은 ‘우연적 존재’라고 이야기했어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야기한 거예요, 철학에서. 인간은 우연적 존재이기 때문에 그냥 가만있지 말고 뭘 찾아야 돼요? 우연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죠. 우연은 사건이니까 사건 말고 이 사건은 도대체 어디로부터 도출되어 나왔는가? 이 필연을 찾자. 철학자들은 이걸 ‘신’이라 하는 겁니다.
이거 맞아요? 뭔가 순서가 이상하죠? 출발을 어디서 했습니까? ‘나 여기 있음’부터 출발했죠. 있음. 그러나 성경 전체를 다 보게 되면 하나님의 있음은 인간의 있음이 아니에요. 인간은 죽은 존재로 봐요. 아까 제가 언뜻 이야기했잖아요. 죽음이 모습화 된 것이 인간이에요. 그 안에 죽을 수밖에 없는 사건들의 뭉치가 인간이란 말이에요.
그러면 그 죽음은 어디서 나왔는가? 성경에서는 죽음을 ‘아담’이라고 했는데 인간에게 아담은 존재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이미 고인이 되었기 때문에. 이미 돌아가신 분이기 때문에 아담은 존재하지 않아요.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모든 인류 현재 80억 인구 전체가 아담의 몸에서 나온, 파생된 변형체에요.
변형체라는 어려운 말을 굳이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제가 주일 낮 설교에서 ‘외피’라 했잖아요, 껍데기.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보이는 것으로 둘러칠 때 외피가 되죠. 성경에서 말하는 것은, 모든 성경은 누구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누구냐를 보여주기 위해 성경이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들은 태어날 때부터 죽음사건이 우리를 죽일 수밖에 없는, 우리가 결국은 늙어죽는다는 그것과 연결, 네트워크 되어있는 죽는 사건의 과정으로서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난 거예요.
확실한 건 태어나도 언젠가는 죽잖아요. 그러니까 네트워크로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있는 거예요. 가위가지고 중간을 끊으면 그게 죽음이고 삼분의 일 지점을 끊어도 죽음이고 백 살까지 살아도 죽음이고. 그러니까 죽음과 헤어지지 않는, 태어날 때부터 죽음과 연결된 실처럼 태어난 게 인간입니다. 기쁘지 않습니까? 즐겁지 않습니까?
그런데 태어나면서 이미 생명과 연결된 네트워크가 있는 거예요. 그게 뭐냐? 기존의 아담 말고 다른 아담이 등장한 거예요. 하나님 아버지는 관심이 예수님한테 있어요, 예수님. 왜냐하면 골로새서 1장 15절에 보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형상이거든요.
전에 있는 아담의 형상, 그거는 뭐 구라죠. 그걸 상징, 표상이라 해요. 틀린 건 아니지만 그건 오실 진짜 인간을 반영하는 거죠. 설계 사무소에 보면 모델하우스를 만들죠. 아파트 알죠? 아파트에 모델하우스 있잖아요. 가짜죠, 가짜. 틀린 건 아닌데 가짜죠. 진짜가 따로 있음을 보여주는 가짜. 생명과 연결되는 인간은 나중에 나오죠. 나중에.
그래서 다시 보겠습니다. 나부터 출발해서 나는 있다. 이 ‘있다’가 ‘없다’가 된다 해도 되고 ‘없다’도 맞지만 이를 구체적으로 하면 ‘죽음’이에요. 죽음에서 다시 ‘있음’이 될 때, 첫 번째 있음은 두 번째 있음을 예상 못하는데 중간에 주님이 끼어들게 되면 첫 번째 있음, 죽을 수밖에 없는 영원한 있음이 영원한 삶으로 되는 겁니다.
영원한 삶으로 될 때 내가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고 누군가 합세합니다. 주님이 대신 하심이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님이 누구를 대신한다? 우리를 대신하심이죠. 이것이 어떻게 바뀌느냐 하면 우리가 주님을 대신해서 주님을 증거하는 증인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주님을 증거하는 신분이 돈 주고 살 수 없는 거예요. 금 한 돈 받는다고 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계약해서 될 게 아니에요. 보통 신분이 아니죠. 내가 누구를 대신해서 살고 있다는 것. 굳이 살 이유도 없는데 예수님께서 계속 살려주는 이유는 앞으로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고 나의 왕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나라는 삶을 사는 거예요.
그래서 세례 요한보고 “너 누구야?” 하니까 세례 요한이 뭐라고 합니까? “아니야. 아니야, 나라고 묻지 마! 너는 누구를 증거하냐고 물어, 나한테. 나라고 묻지 말고.” 나라고 묻지 마. 지금 나는 누구를 대리하고 있냐고 물어. 나는 그냥 그분의 음파, 소리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을 대리해서 내가 약간 앞서서 온 거다.
우리나라 옛날 조선시대 때 대감이 길에 나가면 앞에 뭐가 먼저 나갑니까? “물렀거라! 물렀거라!” 그럼 사람들이 “너 뭐야?” “내 뒤에 오시는 분 봐. 내 뒤에 오시는 분.” 세례 요한에게 예수님은 자기 뒤에 오신 분이죠. 오늘날 성령 받은 성도에게는 뒤에 오시는 분입니까, 이미 오신 분입니까? 이미 오신 분을 증거하죠. 이미 오신 분.
방금 이야기한 것을 한 문장으로 나타내보겠습니다. 요새 부쩍 자꾸 쓰게 돼요. 격언을 막 조작하는 것 같아요, 격언을. ‘내 가치보다 더 소중한 것이 말씀이다.’ 이 ‘말씀’을 바꾸겠습니다. ‘말씀의 한 조각’으로. 말씀의 한 조각, 떨어지는 부스러기 하나도 내 가치보다 더 소중해요.
내 가치는 둘로 되어 있어요. 첫 번째는 소유. 두 번째는 그동안 살아오면서 일어난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사건의 다발. 이런 사건의 다발보다 뭐가 더 중요합니까? 말씀의 조각이 더 중요해요.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것에 의하면.
소유 아시죠? 이 소유 누가 알고 있습니까? 나라가 알고 있습니다. 국민들 생활 보태주라고 이재명 대통령이 1차, 2차 민생소비쿠폰 뿌렸죠. 다 받아 챙겼습니까? 나라에서 돈 10만원 넣어준다 할 때 그걸 못 알아듣는 사람 있어요? 이상하게 그건 잘 알아들어요. 성경말씀은 못 알아들으면서. 그래서 질문 답변은 이렇게 하면서. 돈 준다 하는 것은 납득을 못하는 사람이 없어요. 소유, 내 것 되니까.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 내 가치가 포함되니까요.
두 번째는 바로 과거에 형님하고 한바탕 싸운 것. 과거에 일어난 사건. 날 버리고 도망간 남편, 이런 거. 모든 사건. 이게 우리한테는 나라는 사건의 다발을 더 굳건하게 단단하게 강화했잖아요. 그걸 누가 깹니까? 말씀의 조각이 성령이라는 드론을 띄워서 폭파시켜버립니다. “소유? 네 게 어디 있는데? 사건? 내가 일으켰는데? 네가 왜 불평해? 내가 일으킨 사건인데. 그때 엄마 일찍 돌아가신 거, 내가 일으켰어, 내가. 내가 일으켰다고.”
그래서 또 문장 하나 나가야죠. ‘말씀해석이란 반드시 잃었다가 얻게 하는 해석’이에요. 왜 그러느냐 하면 사람이 성경말씀을 해석해버리면 안에서 내성이 생겨버려요, 내성이. 내성이 생겨서 ‘나 알았다’가 돼요. 알았다.
그러면 아까 나의 특징이 두 가지 있다고 했죠. 나의 특징이 뭐냐? 소유. 소유된 소유성으로 이야기하고 두 번째는 기억이죠. 기억을 자아라 하죠. 자아. 보통 기억의 다발이라 하는데 ‘소유된 것이 나다’ 이렇게 하니까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가 와도 나한테 도달하니까 이게 ‘나는 알았다’가 돼요.
그러니까 진리가 내 안에 들어오니까 이건 진리가 되지 않고 지식이 되어버리죠. 아는 게 힘이 된다. 내 지식으로 구원받겠다는 자기 소유성. 그다음에 하나님의 진리가 인간 속에서 기억이 되니까 “아, 그때 칠판에다 문장을 썼는데 무슨 문장이었는지 돌아서면 다 잊어버리네. 그거 잊어버리지 않아야 되는데….” 그걸 왜 안 잊어버려야 되죠? 그거 안 잊어버려서 내가 얻는 이익은 뭐에요? 또 내 가치잖아요, 내 가치! 아휴, 그거 기억하면 오늘 밤에 죽어도 구원받는데. 자기 구원에 대한 욕구가 올라오는 거예요.
이번 오후설교 제목이 뭐였습니까? <사심 없는 탐욕>이랬어요. 이게 말이에요, 막걸리에요? 이게 말이 돼요? 이 말은 뭐냐? 의식적으로서는 사심이 아닌데 의식으로 감히 손댈 수 없는 무의식이 뭐로 구성되어 있어요? 탐욕으로 구성되어 있어요. 탐욕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나는 아~무 욕심 없다. 내가 너희들 돈도 못 보태주고… 서울로 결혼했는데. 아~무 욕심 없다. 이번 겨울 다가오는데 많이 춥거든. 방 얼음장 돼도 난 아~무 욕심 없다.” 무슨 뜻입니까? 아버지 집에 보일러 놔드려야겠네. 모든 말을 던질 때 그 안에 사심 없는 탐욕이 작용하는 거예요. “나 부족합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이게 무슨 뜻이에요? 죄인이라는 말을 왜 꼭 굳이 해야 돼요? 굳이 해야 돼요? 그걸 왜 굳이 이야기해야 돼요?
강의 전 먼저 오신분의 어드밴티지, 이익이 있었어요. 돌아서면 또 잊어버리니까… 아까 제가 뭐라고 썼는지 기억납니까? ‘죄가 나를 살게 한다.’ 죄가 나를 살게 하는 거예요. 이유가 뭐냐? 죄가 나를 살게 하는 이유는 죄로 인하여 말씀이 현재화되어 있음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현재가 말씀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드러냅니다. 죄로 인하여 말씀이 들어오는 거예요.
순서가, 말씀이 들어오니까 내가 몰랐던 죄가 나오면서 말씀이 우리 속까지 들어오는 거예요. 말씀이 들어오면 우리는 ‘나 있음’에서 소경이 되죠. ‘내 안에 ‘내가 있다’에서 내 안에 진짜 있는 것은 ‘죽음이 있다’. 그다음 ‘죽음이 있다’를 주님이 대신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내 안에 생명이 있고 나는 그 생명을 증거하기 위해 이 땅에 주님처럼 결국 죽어가는 절차가 아직 남아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러한 성경내용이 우리의 시시하고 사소한, 아무것도 아닌 우연적인 사건의 다발, 하나하나 다발요, 뭐 설거지 하다가 그릇을 깼다든지… 이 얼마나 사소합니까. 버스 내릴 때 환승하려면 카드 찍고 내려야 되는데 안 찍고 내려서 1500원 날아간 거, 그거 얼마나 사소해요. 그런 사소한 사소함이 전부다 뭐로 나타나요? 죄로 나타나는 겁니다.
이렇게 이걸 성경적 용어로 표현했는데 그러지 말고 이 죄악 된 세상에서 통하는 인간의 용어로 바꾸겠습니다. 바꾸면 이렇게 됩니다. ‘이익이냐 손실이냐’. <어쩔수가없다>는 영화평에 이 대목이 나왔죠. 인간의 모든 사심 없는 탐욕의 관심사는 뭐냐? 마지막 진리는 뭐냐? 내게 이익이냐, 손실이냐. 천국에서 가로막는 벽에 이걸로 딱 부딪치죠. 딱 부딪치면 혹뿔 나죠. 박아버리죠. 철판이 너무 두꺼워서 이건 도저히 뚫을 수가 없어요.
인생을 살면서 마지막 탁! 치면 이익이냐, 손실이냐. 문을 탁 치는 유명한 광고가 있어요, 남성 속옷 광고. 트라이~ 탁. 더 이상 들어갈 수 없다 이 말이죠. 왜 못 들어갈까? 왜 천국 못 들어갑니까? 생각하는 사고방식이 ‘이익이냐, 손실이냐’인데 이 의식을 그대로 가지고 감히 천국을 들어가려 하니까 자기가 자기를 대변하잖아요. 자기 증거 외에는 없어요. 평생 동안 자기만 증거하면서 지금까지 살아온 거예요. 자기만 증거하다가. 안 넣어주죠! 넣어줄 수가 없죠. 이런 사람 천국에 가면 데모할 건데. 안돼요, 안돼.
이정도로 이렇게 말씀이라는 것이 하나님이 찾아간 자와 찾아가지 않는 자를 용납하지 않고 아주 날카롭게 둘로 구분해냅니다. 구분하니까 1이 뭐가 되겠어요? 1이 2가 되죠. 1→2. 그 증거가 구약에 나옵니다. 열왕기상 11장 38절과 열왕기상 12장 28절 이 두 개를 한번 찾아보면서 어떻게 대비되는지 보겠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이 아히야 선지자를 통해 여로보암에게 하신 말씀이에요. “네가 만일 내가 명한 모든 일에 순종하고 내 길로 행하며 내 눈에 합당한 일을 하며 내 종 다윗의 행함 같이 내 율례와 명령을 지키면” 이건 하나님이 솔로몬보고 이야기한 거였죠(왕상 9:4).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내가 다윗을 위하여 세운 것 같이 너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고 이스라엘을 네게 주리라” 여기서 “다윗의 행함 같이 내 율례와 명령”이 나오죠, 율례와 명령. 이게 열왕기상 11장 38절이고요.
열왕기상 12장 28절을 봅시다. 거기 보면 여로보암입니다. “이에 계획하고 두 금송아지를 만들고 무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 신이라” 이렇게 되어 있죠.
양쪽 다 신을 부정하지는 않아요. 신을 부정하지는 않는데 열왕기상 11장에서는 하나님이 형태가 없는 말씀을 언급했고, (열왕기상 12장에서) 여로보암은 말씀이 끊어진 상태에서 눈에 보이는 우상, 금송아지를 단과 벧엘에 만든 거예요.
그렇다면 사람이 말씀이 없을 경우에는… 말씀이 없다는 말이 뭐냐? 말씀은 없잖아. 형체가 없잖아. 형체 없는 것은 난 못 믿겠다. 나는 눈에 보이고 확인될 수 있는 걸 믿겠다. 그러면 말씀이 없는 사람은 반드시 뭘 찾게 되어 있어요? 눈에 보이는데 그럴싸한, 하나님 같으면 아마 이러한 속성을 지녔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럴싸한 것을 의도적으로 만들어내겠죠.
출애굽기 20장에 나오는 십계명에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본성을 이미 간파하고 계시죠. 말씀이 없을 경우에 뭐를 추종하느냐? 한번 정리해봅시다. ‘말씀이 없을 경우에 눈에 보이는 것을 (특별히) 신성시한다.’ ‘특별히’라는 것은 ‘인간 쪽에서 의미를 부여한’. 인간 쪽에서 의미를 부여해서 신성시. 인간 쪽에서 의미니까 이건 인간에게서 나온 의미죠. 인간이 신성하다고 여기는 의미를 특별히 눈에 보이는 것과 연결시키고 결합을 시키는 거예요. 접속을 시키는 겁니다.
말씀이 있는 자는 그대로 말씀만 따르죠. 그런데 여기서 말씀이 있는 자도 둘로 나눠져야 돼요. 둘로 나눕시다. 말씀이 있어서 ‘이건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거 알면 구원되고 하나님 백성이냐? 아니에요. 이게 둘로 나눠집니다. 둘로 나눠지는 것은 출애굽기 4장에 보면 나와요.
모세가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하나님의 지시받고 내려갈 때 왜 내려갑니까? 내 백성 이스라엘을 건져내기 위해서 간다 했죠. 내 백성 내 아들 이스라엘을 건지러 간다. 상당히 추상적이에요. 그 당시에는 ‘내 아들’이라 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이스라엘 나라가 없었으니까요. 히브리인들만 있었으니까.
어쨌든 하나님의 계획은 이렇다 할 때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랐잖아요. 말씀이 있는 자잖아요. 말씀이 있는데 ‘있다, 없다’에서 ‘살았느냐, 죽었느냐’로 나누어집니다. 살아있는 모세를 갑자기 하나님께서 어떻게 합니까? 그 숙소에서 죽이고자 하죠. 그럴 때 옆에 아내 십보라가 무슨 조치를 취했느냐? 아들이 할례를 행하지 않았던 거예요. 할례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속합니다. 말씀이 현실화될 때는, 이 말씀은 반드시 죽음을 경유할 때 실효성이 있다는 이 사실을 모세 가정에 알리기 위해서 모세를 일단 죽여 버려요. 모세를 죽여 놓고 아들에게 말씀대로 할례를 행하니까 죽였던 모세가 살아났습니다.
그럼 모세는 무엇을 경험한 거예요? 말씀은 그냥 기존에 내 자아를 유지하게 하는 게 아니고 나를 죽여 버린다. 죽여 버리고 모세 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해버리니까 죽음이 나를 지배하다가 죽음이 나를 풀어줘서 다시 내가 살게 되었다는 거예요. 말씀이 살게 된 거예요. 그럼 이건 모세가 중요한 것도 아니고 이스라엘이 중요한 것도 아니고 뭐가 중요하냐? 하나님의 일관된 언약, 하나님의 할례 언약이 인간들보다 더 우선해서 하나님께서 성취하고 사수하려는 하나님의 뜻이 나타난 거예요.
그럼 다시 정리하면 ‘말씀이 있느냐, 없느냐?’ 이것이 준결승전이라면 결승전에서는 ‘그 말씀이 나를 계속 살려주는가, 아니면 죽이는가?’ 이게 결승전이에요. 우리는 말씀 이후의 세계를 예상 못하기 때문에. 예상 못해요. 그러면 방금 숙소에서 하나님이 모세를 죽인다는 이 계획에 대해서 모세가 사전에 알았습니까, 몰랐습니까? 몰랐죠. 몰랐어요.
그래서 지난 낮 예배 때 우리 교회 집사님이 기도했던 대목 중 하나를 저거다 하고 뽑았죠. 뭡니까? 구원받은 자의 특징은 뭐냐? 이해되지 않는다. 저 같은 거 왜 구원하셨습니까? 거기에 적합한 유명한 영화 대사, 납득이 안 되네, 납득이! 납득이 안돼요. 왜 내가 구원되어야 되는지. 이해가 안돼요. 이게 바로 주님을 증거하는 겁니다.
방금 제가 이 이야기했잖아요. 그런데 성령 안 받은 자가 이 이야기 듣고 저도 똑같이 이야기해요. “내 구원은 납득이 안 됩니다.” 어디서 흉내를 내고 있어. 흉내 낼 걸 흉내 내야지. “이해가 안 됩니다.” 똑같이 흉내 내고 있을 때 “당신 거 참 이해되면서도 이해가 안 된다고 흉내 내는 그거, 당신의 기억 속에 인식 속에 잡아당기느라고 애쓰고 있습니다. 한번 물어봅시다. 이해되는데 이해 안 된다고 하고 있을 때, 당신은 어떤 노력으로 이해된 걸 안 된다고 했습니까?” 한번 물어보세요. 그럼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이해된다고 하면 탈락이니까, 이해 안 된다고 해야 구원받으니까요. 내가 이해 안 된다고 한번 연습해봤습니다.” 그렇게 되겠죠.
기분상 안 된다, 된다 이거는… 아까 인간의 자아가 첫 번째는 소유, 내 것이고 두 번째는 내 기억에 들어오기를 바라는 것. 기억된 것을 치매 안 걸리고 유지되길 바라는 것. 전부다 이거는 탐욕입니다. 그것마저 납득이 안 되어야 돼요. 다시 말해서 자기에 대해서 그냥 손을 놓게 하는 거예요.
첫 번째 시간은 이 문장 쓰고 마치겠습니다. 성경해석은 원리가 있는데 모든 성경말씀이 오게 되면 우리로 하여금 ‘잃었다가 얻는 작업의 반복’이죠. 아, 나 같은 인간은… 성령도 안 받아놓고 받은 척 하면서 ‘이해 안돼.’라고 하는 그 인간은 내가 잃어버려도 마땅한 인간이죠. 그런데 잃어버려도 마땅한 것은 어떤 경우에 일어납니까? 이미 얻었기 때문에 이런 인간, 자아는 잃어버려도 마땅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
이 모든 일은 근본 되시는 주님의 작업입니다. 10분 쉽시다.
광주강의20250926b 열왕기상 12장 28절(말씀의 내성)-이 근호 목사
이번 수련회 글 교정보시면서 ‘부활이 먼저냐, 십자가가 먼저냐’ 그 부분이 상당히 어렵다 했는데 그것 못지않게 어려운 질문을 하겠습니다. 이거는 객관식으로 할게요, 너무 어려워서. 1번, 2번, 3번 셋 중에 어느 거냐? 말씀, 성경이죠, 말씀 주심이 1.기회인가? 2.제안인가? 3.협박인가?
우리 장로님이 말씀해주시면 좋겠는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말씀을 주시는 것은 우리에게 기회를 주시는 거예요? 제안인가요? 협박하시는 겁니까? 사실은 4번이 또 있죠. 1번, 2번, 3번 다 아니고요. 사실은 이거에요. 4.심판이다!
말씀 주심이 심판입니다. 이사야 6장에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한다. 말씀 주신 것이 심판이에요. 그런데 인간들은 정답이 심판이라는 것은 우린 얼추 뭐 들은 적 있다 하는데 왜 1번, 2번, 3번을 거론하는가? 인간이 하나님을 상대하면서 말씀에 대해서 어떠한 선입견 같은 게 있는데 그게 1번, 2번, 3번 중 하나가 되는 거예요.
‘하나님, 저 구원받으라고 기회를 주신 것 맞죠? 왜?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니까요.’ 이런 식으로. 유대교 같은 경우 뭐라고 하는가? ‘하나님은 우리에게 언약으로 제안하신 것 맞죠? 이 말씀대로 행하면 복을 받고, 못할 경우에만 네가 저주받는다, 이거는 하나의 거래죠? 흥정이고 제안이죠?’라고 유대인들은 생각할 거예요. 불신자들은 분노를 일으키면서 ‘지금 신이라고 우리 연약한 인간을 협박하십니까! 삐쳐서라도 나는 그런 하나님을 안 믿습니다. 나는 차라리 절에 가서 부처를 믿겠습니다. 나는 협박 공갈하는 신은 싫어.’ 셋 중 하나죠.
세 가지 전부다 본인 자아의 가치에 대해서 하나님 쪽에서도 내 가치를 인정해준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이런 1번, 2번, 3번의 아이디어가 나오겠죠. 4번은 “너 피고는 들으라!” 이렇게 되죠. “피고, 이 죄인은 들으라.” 이렇게 되죠. 그럼 여기에 대해서 이사야 6장에서 이사야는 뭐라고 합니까? 답변은 뭡니까? “화로다. 망하게 되었다.”죠.
‘화로다. 망하게 되었다.’가 죄인으로서 나올 수 있는 하나님의 계시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화로다. 망하게 되었다.’를 통해서 계시가 인격화되죠. 계시 자체가 인물화됩니다. 지난 수요일에, 숨어있는 언약궤가 숨어있는 엘리야를 이동시키는 언약적 힘을 발휘하잖아요. 엘리야보다 먼저 숨어있는 것이 언약궤였다. 언약궤가 인격을 통해서 이스라엘에 나타나는 거예요. 나타난 이유는 뭐하기 위해서? 심판하기 위해서에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 뭐하기 위해서? 심판하기 위해서. 내 말을 믿지 아니한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느니라(요 3:18). 최종 심판하기 위해서.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고전 16:22). 주의 말씀 자체가 모든 말씀은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고 그 증거하시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나타날 때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심판을 받는다.
그 말은 “이 소경들아.” 또는 “이 피고들아.” 또는 “이 죄인들아.”를 전제로 하는 거예요. 이러한 말씀의 취지에 합당한 거기에 대한 반응은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맞습니다. 저는 개입니다.” 이런 반응들. 말씀은 이렇게 인격적으로 심판자, 심판주의 모습으로 나타나서 말씀해석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성경말씀을 우리 인간 쪽에서 접근할 때는 어떻게 접근하느냐? 인간 쪽에서 접근할 때는 어떻게 접근하는지 그걸 제가 여러분에게 시연해보이겠습니다. 실제로 보여드리겠습니다. 여기 A4용지가 있잖아요. A4용지가 있으면 세로로 반을 접어요. 접습니다.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게 아니에요. 다시 펼쳐서 가로로 반을 접어요. 중간을 접습니다. 그럼 칠판 전체를 접힌 A4용지라 해봅시다. 그럼 칠판 전체가 4등분으로 나뉘겠죠.
성경을 어떻게 보느냐? (구약지도 그리기, 강의 동영상 6분 30초~18분 30분. 그림은 첨부파일 참고. 첨부파일 3개 출처는 문서 하단에 기재) 칠판 왼쪽 끝부분(이스라엘 기준 서쪽)을 중간 쯤 해서 나누어보는 거예요. 이게 지중해에요. 이집트에서 지중해로, 밑에서부터 위 세 줄기로 물이 빠지잖아요. 지중해 아래가 애굽, 이집트에요. 성령 안 받아도 다 이해되는 거예요. 그리고 지중해 기준으로 오른쪽 아래, 물에 빠진 사람이 손가락 두 개를 내는 것처럼, 물에 빠졌는데 몸은 안 보이고 손가락 2개만 내보이면서 ‘구해주세요’하는 것처럼 그리면 이게 홍해. 칠판 가장 오른쪽(이스라엘 기준 동쪽)에는 큰 고래 같은 게 있는데 고래에서 더듬이 두 개가 나와요. 고래는 페르시아만, 더듬이 두 개는 유티. 유프라테스 강, 티그리스 강. ‘무슨 일이 있나?’하고 더듬이 두 개가 나오는 거예요.
페르시아만부터 창세기가 시작돼요. 지리죠, 수평적인 지리. 지리인데 역사는 페르시아만, 갈대아 우르부터 시작해서 지중해 근처 헤브론, 브엘세바까지 내려오는 거예요. 이게 창세기에요. 창세기 끝에 이집트로 내려가거든요. 이집트로 내려가다가 이집트에서 다시 구출당해서 홍해를 건너왔는데 여기 산이 있어요. 시내산. 이 시내산에서 출애굽기, 레위기. 레위기에서 율법을 받고 쭉 올라옵니다. 올라오는데 중간에 갈릴리 바다, 갈릴리 바다 위에는 헐몬산이 있어요. 2814m 헐몬산에서 갈릴리 바다까지 50km. 갈릴리 바다에서 사해까지가 총 105km. 사해도 물이 흐르는 사해와 저장된 사해가 있고 그 둘 사이는 20km. 사해에서 홍해까지는 160km, 이렇게 되어 있어요. 거리가. 홍해에서 쭉 올라갑니다. 올라가면서 민수기. 민수기에서 방황해요. 방황하는데 방황하다가 800m 더 되는 느보산에 갑니다. 가데스 바네야 광야를 거쳐서 에돔 세일, 모압, 암몬 이 동네를 정복하면서 느보산에 도착. 느보산에서 인구를 또 한번 세요. 시내산에서 세고 인구 수를 두 번 셉니다. 이 과정이 신명기, 민수기. 신명기에서 넘어가면 여호수아. 여호수아가 여리고성을 정복하면서 남쪽에서 북쪽으로 갔다가 다시 남쪽으로 가면서 여기서 땅 분배. 여호수아. 여호수아 다음에 뭡니까? 여호수아 다음에 죄를 짓죠. 사사기. 죄를 지어요. 죄지으니까 올라갔다 내려갔다 스프링 사사기. 사사기에서 룻 나오죠. 여성 룻. 스프링에서 꽃이 피는 거예요. 사사시대에 아름다운 여성이 하나 등장하죠. 여성이 등장하면서 여기서부터 사무엘상하. 사울, 다윗, 솔로몬. 여기서부터 열왕기상하를 거쳐서 둘로 나눠지는데 북은 B.C.722년에 앗수르에 잡히고 나중에 앗수르가 바벨론으로 바뀌잖아요. 바뀔 때 B.C.586년에 남쪽 유다가 바벨론에 잡혀갑니다. 열왕기상하, 역대기상하. 그리고 난 뒤에 어떻게 되느냐? 에스라, 느헤미야. 다시 원래 있던 쪽으로 내려오는 거예요. 구약성경 끝. 구약성경 끝났죠.
이거 아는데 성령이 필요합니까? 무슨 성령이 필요해요? 자, 그러면 신약성경을 한번 보겠습니다. 제가 지금 계속 이야기하는 것은 성령이 필요치 않은 성경해석은 어떻게 접근하느냐 그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이스라엘을 기준으로 서쪽에 지중해가 있고 동쪽 골짜기 지대를 북쪽부터 보면 뾰족 튀어나온 헐몬산, 2814m. 헐몬산에서 물이 흐르는 줄기대로 똑바로 내려옵니다. 수직으로 똑바로 내려오면 홍해까지 갑니다. 그런데 중간에 사해에서 스톱이 되고 헐몬산과 사해 사이에 갈릴리 바다가 있죠. 사해는 -412m, 갈릴리 바다는 -216m. 그럼 홍해는 0m.(지중해의 평균 해수면을 기준으로 해발 측정한 값) 사해가 -412m로 더 낮으니까 홍해 0m로 흘러갈 수 없지요. 그럼 사해와 홍해 사이의 물은 사해 쪽으로 모이니까 그 사이는 광야. 요단강 동편 지형인 바산 골란, 길르앗, 암몬, 모압, 에돔 세일은 아까 했으니까 넘어가고요. 이제 지중해와 동쪽 골짜기 지대 사이에 중앙 산악지대는 북쪽에서부터 상부갈릴리, 하부갈릴리, 에브라임 산지(블레셋은 나중에 에브라임 산지에 귀속이 돼요), 그 밑에 베냐민 산지. 그다음에 길쭉하고 비스듬하게 유다 산지가 있고 유다 산지 옆쪽으로 유다 광야. 하부갈릴리와 에브라임 산지 사이에 이스르엘 평야(중앙 산악지대에 유일한 평야)가 있어요. 그다음 서쪽 해안평야 지대를 북쪽에서부터 살펴보면 샤론의 꽃으로 익숙한 샤론 평야, 블레셋 평야.
이거 성령 없이도 알 수 있죠. 그다음 예수님께서 활동하신 갈릴리 지방, 데가볼리 지방 등 지명들이 있잖아요. 구약에는 구약 지명들이 있겠죠. 그 지명을 이렇게 파악하는 것. 이렇게 하게 되면 어떻습니까? 성경해석 되었어요? 성경해석이 되는 겁니까? 지금 이걸 아는 것은 성령하고 아무 상관도 없죠. 성령하고 아무 상관이 없어요.
지금 제가 하는 말은 이런 뜻이에요. 지금까지 여러분들 다 아는 이야기했으니까 지우고요. 인간이 성경책을 접근할 때 어떻게 접근하는가? 어떻게 접근하느냐 하면 첫째는, 아까 했죠? 지리적 접근. 여러분 누구 만날 때 “어디 사십니까?” 묻죠. 미국가면 “당신은 어디서 왔습니까?” 묻잖아요. “어딧 사십니까? 어느 나라 사람입니까?” 물어요. 지리가 되면 그다음에는 역사적 접근을 하죠.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이렇게 지리적이고 역사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성경해석에 도움이 되느냐 하는 겁니다. 도움이 될 수 있느냐?
성경해석을 할 때 지리적이고 역사적인 해석이 오히려 성경해석을 방해하는 게 아닙니까? 없애자는 말을 하는 게 아니에요. 이걸 없애자는 말을 하는 게 아닙니다. 인간은 안 없어져요. 육이 있는 이상 없어지지 않는데 어떤 작용을 하느냐 하면 방해되는 작용을 한다는 것을 제가 지금 말씀드리는 겁니다. 지리 알고 역사 알고… 성경 보면 나오잖아요. 역사 나오죠, 이스라엘 역사. 지리 나오잖아요. 그걸 파악하는 것. 지리적, 역사적 해석이 방해가 된다는 거예요.
이유가 뭐냐 하면 인간 대 인간의 만남에서 무엇이 궁금하죠? 무엇이 궁금합니까? 1.어디 사십니까? 2.그동안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았습니까? 역사가 나오죠. 전유성이라는 사람 혹시 들어봤어요? 어제 죽었죠. 젊은 사람들은 전유성을 잘 몰라요. 전유성 죽었을 때 사람들이 전유성에 대해서 알아요? 인간이 전유성에 대해서 아는 건 뭡니까? 그동안 어떻게 살았는지를 알죠.
그럼 내가 전유성에 대해서 안다는 말은 이런 뜻이에요. ‘나는 □로 살고 있음을 남들에게 말할 태세가 되어 있다.’ 나는 무엇 무엇으로, 남들에게 나를 소개할 때 이런 식으로 소개할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다는 거예요. 나는. 그런데 전유성 개그맨이 죽었잖아요. 그럼 ‘나’ 대신에 그 자리에 전유성을 집어넣으면 ‘전유성은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죽었다’ 이걸 아는 거예요.
이거 알면 전유성에 대해서 우리가 아는 겁니까? 오히려 그 안다는 게 전유성 씨한테… 죽었던 전유성이 화가 나서 벌떡 일어날 수 있어요. “네가 나를 알아?” 할 수도 있잖아요. 전유성은 진미령하고 살았다. 진미령하고 살았는데 혼인신고 안하고 살아서 헤어질 때 아주 깔끔했다, 뭐 이런 거. 살아오면서 진미령을 얼마나 괴롭혔을까? 지는 돈도 못 벌면서. 그다음 진미령은 과연 장례식에 참석할까? 이런 거. 그럼 다른 사람은 뭐라고 해요? “진미령이 누군데?” “진미령 몰라? <하얀 민들레> 불렀던 가수.”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은 아는데 젊은 사람들은 진미령도 모르고 전유성도 모르고 다 모르는 거예요. 그 시대 사는 사람만 안단 말이죠.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뭐냐? ‘나는 내가 살면서 나한테 사건으로 접속이 된 자들만 안다.’가 됩니다. 그러면 ‘나는 지리적으로 역사적으로 나는 나를 정리했다.’ 왜 정리하느냐? 남들에게 내가 누군지 알리기 위해서는 그런 식으로 정리할 수밖에 없거든요. 내가 나를 정리하는 식으로 성경을 우리가 대합니다.
그렇게 대해서 예수님을 믿으려하니까 어떻게 해야 돼요? 예수님에 대해서 누군지 알아야 될 거 아닙니까? 그 아는 출발점이 뭐냐? 내가 남들에게 나를 소개하는 그 요건을 동원해서 예수님도 내 요건에 맞추어서, “예수님은 어디서 살았지? 예수님은 교육을 어떻게 받았지? 열두 살에서 서른 살까지는 붕 뜨는데 그동안 인도 가셨나? 어디로 가셨지? 그 대목은 왜 없지? 왜 이렇게 성경이 친절하지 못해? 열두 살부터 서른 살 때 까지, 광야에서 세례 요한 세례주기 전 18년의 기간은 왜 빠졌지?” “빠진 게 있대.” “어디?” “그게 에티오피아 성경에 보면 있대.” “그거 찾아야지. 그럼 에티오피아 성경은 왜 성경에 못 들어갔지? 아하! 로마제국에서 일부러 정경에서 뺐구나. 이런 나쁜 인간들.” 이렇게 쭉쭉 가짜 뉴스들이 퍼지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런데 왜 예수님을 알려고 해요? 이유가 뭡니까? 왜 예수님을 알려고 합니까? 내가 전유성을 왜 기억하고 있어요? 왜 알아야 됩니까? 전유성 만난 적도 없으면서. 대구에서 가까운 청도에 왔을 때도 안 만났어요, 제가. 청도에 극장 만들었을 때도 안 만났어요. 그런데 왜 전유성에 대해서 알아야 돼요? 같은 시대를 살았잖아요. 같은 시대를. 같은 시대니까 나라는 자아를 구성하는데 어쩔 수 없이 들려오니까 안에 사건으로 부착이 된 거예요. 스티커 붙이듯이 내 인생에 턱턱 붙이는 거예요. 이게 딱 붙어있는 거예요. 붙어있는데 내가 모를 리가 있어요? 붙어있는데.
500년 전에 사람이 붙어있는 게 아니에요. 500년 전에는 나 있지도 않았어요. 태어났기 때문에 떡떡 붙어있는 거예요. 전유성, 고영수. 고영수는 아직 안 죽었습니다만. 개그계의 대부. 젊은 사람들은 몰라요. <뷰티풀 썬데이> 그런 노래도 나 클 때 다 붙어있는 거예요, 덕지덕지. 붙어있는 것으로 우리는 ‘나는 지금 이렇게 이렇게 압니다. 그게 나입니다.’라고 소개하는 거예요. 그런 식으로 남들에게 알려주듯이 나라는 것은 이렇게 압축해서 ‘이게 접니다.’ 소개할 때 동원되는 요소가 지리적이고 역사적인 거예요.
그래놓고 뭘 연구해요? 성경에서 예수님 나오니까 “자, 예수님 좋은 분이구나. 예수 믿어야지. 예수 한번 슬슬 연구해봐?”하고 나온 것이 아까 그런 거예요. 지리적이고 이런 거. 성경 역사를 탐구하고 어디서 태어났고 출신은 뭐고 그걸 또 분석하고. 그럼 성경말씀이 살아있는 게 아니고 인간 본인의 지식이 살아있는 거예요.
거기다가 고고학까지 막 동원해서 예수님이 실제로 죽었다는 증거 어디 있을까? 천주교에서 얘기하는 예수님 죽고 난 뒤 둘둘 말았던 베옷의 탄소동위원소를 조사해보니까 그게 예수님 당시의 연대냐, 아니면 그 후대 연대이냐? 16세기 연대냐? 또 이것 때문에 논쟁이 되는 거예요, 또.
성경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니나 잘하세요. 너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면서.” 너 자신이 나를 알려고 하는 것은 남들에게 나를 소개하고 싶고 내가 이렇다고 내가 스스로 정리한 그것이 마치 자신의 근본이나 되는 것처럼 남들 앞에 소개해왔던 겁니다. 이것은 바로 거짓된 거예요. 내가 나를 몰라요. 모릅니다.
자, 그렇다면 지금부터 성경해석은 어떻게 하느냐? 예수님이 분명히 나타났어요.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미지의 인물이에요. 보기는 보아도 몰라요. 비밀이 나타났다고 해서 비밀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더 비밀스러워요.
나타나지 않았으면 사람들은 상상을 해요. 메시아가 어떤지 자꾸 상상을 하는데… 구름타고 오셨고 뭐 이러면서 상상을 하잖아요, 유대인들이. 그런데 막상 나타남으로써 인간이 상상해왔던 모든 것이 거짓인 것이 한꺼번에 확 탄로나버린 거예요.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기위해 구성한 모든 것이 이것은 다 우상에 불과하고 거짓에 불과한 겁니다.
아까 보셨다시피 여로보암 왕이 금송아지 만든 것 아시죠? 말씀에 막히니까 있음, 눈에 보이는 것들을 조합해서 뭔가 내 속에 있는 신성한 것, 거룩한 것, 고상한 것을 집결시켜서 아마 신은 이런 모습일 거라고 내 안에 내 의식이 조작하며 만들어낸 그 예수상. 예수, 성령, 삼위일체를 그렇게 만들어낸 겁니다. 실제로 예수님이 와 닿을 때 이사야의 고백, “화로다 망하게 되었다.”하는 그 고백은 하나님의 언약의 능력이 아니면 있을 수가 없어요.
예수님이 찾아왔을 때 아까 심판한다 했잖아요. 그 심판한다는 말을 제가 두 번째 시간에 달리 이야기하겠습니다. ‘채권자의 자격으로 채무자를 찾아오신다.’ 빚을 요구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빚을 갚아야 될 채무자 입장이고 주님은 빚 청산을 요구하는 채권자 입장으로 오신 겁니다.
이 빚이라는 것은 마태복음 5장에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18절).”고 되어있거든요. 이룬다. 그게 뭐냐? 율법의 일점일획이란 율법대로 살지 않으면 저주가 임한다는 거예요. 율법대로 살지 않으면 저주가 임해요.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 쪽에서는 양보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럼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뭉쳐보면, 솜사탕을 손으로 눌러보면 작아지듯이 압축을 시켜보는 거예요. 하나님의 모든 율법을 하나로 딱 압축시키면 하나님의 의가 돼요.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의를 요구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율법을 주신 거예요. “율법대로 살아서 하나님의 의를 이루어야 네가 나와 영원히 살 수 있는 인간이다. 존재다.”라고 하나님 쪽에서 일방적으로 선언한 거예요. 일방적으로.
그래서 주님께서 그걸 다 아시고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33)”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앞에 뭐라고 했느냐 하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지옥 갈 사람들이 그 일하고 너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지 않거든 차라리 너는 태어난 것을 후회하라” 이 말이에요.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할 생애를 보내거든 차라리 죽어라. 자살하라.” 이 말이에요. 왜? 살아도 소용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는 요구가 있잖아요. 율법대로 그 의를 이루었느냐를 요구하는 입장에서 “나는 이처럼 개 키우면서 열심히 바르게 잘 살았습니다.” 하는 말이… 이건 지금 하나님이 요구하는 것과 대답이 완전히 어긋나는 거예요. 맞질 않는다고요. 평생 살아도 소용없는 인생이에요. 아무리 살아도 소용없어요, 인간은.
우리 인간들의 본심은 이렇습니다. 여기서 우리 인간들의 본심을 이야기해야 돼요. ‘나는 나를 지키고 싶다.’ 여기서 지키고 싶은 ‘나’라는 것은 구체적으로 나의 가치, 나의 의미, 나의 권리, 또는 나의 자율성 이걸 나는 지키고 싶어요. 그 ‘나’가 굉장히 수상합니다. 이런 나, 이런 인간을 하나님이 만드신 적이 없어요.
이거는 분명히 중간에 마귀가 들어간 거예요. 가인처럼. 가인이 동생을 왜 죽입니까? 죽인 이유가 뭐에요? 자기 가치, 자기의 의미를 챙기고 싶어서 죽여야 되는 거예요. 사심 없는 탐욕이에요. 본인이 죽이고 싶은 게 아니라 자기 속의 욕심이 그걸 강변하고 요구하고 있는 거예요. 자기 행동이 제 마음대로 안돼요.
지킬 게 있는데, 내 가치, 권리, 의미, 자율성이 있는데 이게 만약에 외부로부터 침해를 받으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의 의식적 행동은? 분노죠, 분노. 화, 분노, 격분 이런 게 올라오죠. 갑자기 뭐가 싹 날아가 버렸어요? 그의 나라와 그의 의가 흔적도 없이 홀라당 흔적도 없이 날아가 버렸어요. 흔적도 없이.
내 사심은 하나님 나라 의를 사수하고 주님의 증인 되고 싶어요. 그런데 예상치도 못한 사태, 사건이 일어나게 되면… 오늘 제목을 이걸로 하면 어떨까, 여러분들의 의견을 묻습니다. ‘홀라당’. 수십 년 비축해놓은 나의 모든 믿음이 홀라당. 회까닥. 없어. 없고 남는 건 뭡니까? 남는 건 분노와 격분이에요. 네가 뭔데 내 교정권을 빼앗아 가? 네가 이 집안 대장이야?
인간은 자기를 못 지켜서 환장해요. 심지어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에요. 스트레스는 기본이고요. 그래서 어떤 드라마에 보면 결혼한 지 30년 기념으로 좀 사는 부부가 비싼 요트 빌려서 바다로 나가요. 남편이 농담 반 진담 반 아내한테 하는 말이, “여보, 당신은 지금 나를 물에 빠뜨리고 싶지?” “그래? 소원이야?” 답 듣지도 않고 순간적으로 밀어버렸어요. 얼마나 헤어지고 싶었으면. 네가 먼저 말했다, 네가. 내가 말한 게 아니고 네가 먼저 말했어.
그런 마음이 드는 이유가 뭡니까? 그 나라 의를 위해서 그렇게 했습니까? 뭐 때문에 그렇습니까? 너는 나를 불편하게 한다. 너의 존재가 나를 불편하게 한다. 내가 연애할 때는 그런 생각 안했는데 내가 살아오면서 안에서 자아라는 암세포가 커졌어요. 커지니까 인간의 마지막 담, ‘나한테 이익이냐, 나한테 손실이냐.’를 생각하죠. 나한테 이익이 되면 나에게 선이 되고 나한테 손실이 되면 나한테 악이 되죠. 마귀가 그렇게 만들었어요. 따라서 나의 가치, 의미, 사심 없는 탐욕이 순간적으로 밀어버리게 했죠. 물론 드라마 이야기입니다.
자기 자신을 지키는 것, 내가 나를 지키고 싶다는 이게 나쁜 짓입니까? 어떻습니까? 나쁜 짓입니까? 인간세계, 말씀이 없는 세계에서는 이게 너무나 인간적이에요. 너무나 인간적이고 당연한 거고 이거는 필연적이에요. 우연적 존재 속에서도 필연은 뭐냐? 나는 나를 지키는 것, 이건 고치지 못해요. 아니, 말을 잘못했다. 고칠 필요가 없어요. 이래야 내가 살아요.
그러니까 인간은 내가 안 죽고 싶고 살고 싶고 내가 없어지지 않고 싶고 심지어 죽는다 할지라도 천국에 짠!하고 내가 다시 나타나길 원해요. 천국에. 구원된 자로 나타나길 원합니다. 오늘 첫 번째 질문 신접한 여인 술법 이야기인데 근본이 중요하지, 뒤에 문제는 근본만 되면 다 풀려요. 질문답변 여러분들이 다 할 수 있습니다, 이 근본만 되면.
여기서 지난 수요일에 제가 언급했던 걸 다시 한번 해볼게요. 마태복음 4장 19절에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이야기하셨습니다. 베드로 뿐 아니라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거예요. “너는 이제부터 사람 낚는 어부가 되라” 했습니다. 성경을 보면 “나는 율법을 다 이루러 왔다” 했잖아요. 그럼 율법을 이루었다 했으면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집중 강화하고 또 반복해서 이야기할 것은, 우리 인간들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의 율법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는 바르게 살아야 되잖아요. 착하게 살아야 되잖아요. 그걸 강요하는 것 같은데 이것 보세요. “너는 사람 낚는 어부가 된다.”
이게 왜 ‘바르게 살아야 된다’에 끼어듭니까? 이게 어울려요? 어울리지 않잖아요. 그러니까 성경을 보면서도 뭐가 작동하느냐 하면 ‘나는 어떻게든 나를 지켜야 돼.’ 예수님을 믿든지 십자가를 믿든지 보혈의 피를 믿든지 무조건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해서 복음이 시키는 대로 나는 나를 지키면 이게 남는 장사라는 생각이 들겠죠.
그런데 이 말씀 보세요. “너는 사람 낚는 어부가 되라.” 이거는 나를 지키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완전히 노선이 달라요. 다른 노선이에요. 그래서 베드로와 제자들은 예수님 십자가 지시고 난 뒤에 나를 지키기 위해서 예수님처럼 잡혀서 십자가에 안 죽기 위해 어디 갔습니까? 일곱 명 고기 잡으러 갔잖아요. 거기서 뭘 낚았어요? 사람 낚았어요, 고기 낚았어요? 고기 낚았잖아요.
제가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바로 예수님의 말씀이 진리인데 이 진리의 내용을 채우는 것은 사도 바울과 사도 베드로와 사도들의 편지라는 겁니다. 신약은 바로 그렇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말씀을 툭 던져놔요. 그 던져놓은 말씀은 인간으로서 조합이 안돼요. ‘착하게 살라는 이야기인데… 착하게 살아야 된다. 율법은 다 이루어야 된다. 그러니까 이거는 바르게 살라 이 말씀이죠?’라고 오해해요.
바르게 살겠습니다, 할 때 뭐를 지금 안 빠뜨리고 있어요? 나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나를 지켜야 되고 내가 손실나면 안되고 내가 지옥가면 안 된다는 그 본성으로 강하게 바르게 살기에 집중하겠죠. 그런데 예수님은 누구한테 죽었어요? 자기를 지키는 인간들의 대변자, 사두개인과 바리새인 그들의 손에 죽었잖아요. 그럼 무엇은 끝난 거예요? 인간들이 나를 지키는 그런 자는 지옥의 자식, 마귀의 자식이고 천국에 올 수 없다는 것을 주님께선 분명히 하신 거예요. 말씀을 지켜서 구원받는다는 것은 인간에게 없다.
그럼 남는 것은 뭐냐? 너는 사람 낚는 어부가 되라. 이건 뭐 불가능하죠. 불가능.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불가능한 일이에요. 그 불가능함이 가능이 되는 내용이 바로 갈라디아서, 로마서, 그리고 베드로전후서, 요한일서, 이서, 삼서에 나오는 겁니다. 그걸 한국어로 두 자로 이야기하겠어요. 이미 짐작하시는 분이 있을 거예요. ‘사랑’.
사랑이라 할 때 인간의 사랑과 자꾸 개념이 겹치니까 모호하잖아요. 그래서 로마서 9장에 나오는 단어로 바꾸겠습니다. ‘긍휼하심을 입은 자’. 피동태죠. 수동태죠. 이것은 줘야 받죠. 안 주면 못 받는 거예요. 안 주면 못 받는 것. 우리가 달라는 것을 왜 안 주느냐? 우리가 그 나라 의를 구하는 식으로는 왜 구원이 안 되느냐?
분명히 주께서 그 나라 의를 구하라 했잖아요. 우리는 뭘 못 벗어나요?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 마실까를 벗어날 재주가 없어요, 우리는. 우리 자신을 알아야 돼요. 우리는 구원 받고 싶어도 이미 심판 안에 있기 때문에 죄 안에 있기 때문에 어떤 노력을 해봐야 우리는 하나님 율법에 위반되는 짓만 할 뿐이지, 죄만 드러낼 뿐이지 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걸 하나님께서 심판주로 오셔서 말씀으로 분명히 하신 거예요.
그럼 남는 가능성은 뭐냐? 인간들이 요구하는 가능성이 아니고 주께서 일방적으로 하실 가능성이에요. 뭐냐 하면 긍휼하심을 베푸시는 거예요. 그럼 듣는 인간은 뭐라고 합니까? 또 나를 지키고 싶은 거예요. “그럼 긍휼하심을 안 주면 저는 어떻게 돼요?” 이런 답변이 나오겠죠. 긍휼하심을 안 주면 어떻게 되느냐? 긍휼하심을 베푸는 자, 예수를 내가 만들어내야 되겠죠. 그럼 긍휼하심을 내게 주지 않는 그런 하나님은 때려치우고 긍휼하심을 주는 예수님을 내 쪽에서 바꾸는 거예요. 바꾸는 방법은 주일 낮 설교에서 분명히 했어요. 몽둥이로 개 패듯이 패버리는 겁니다. 이게 십자가 사건의 반복이에요.
그래서 오늘 강의의 결론은 뭐냐?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이 십자가, 하나님 살해사건과 연관되어 있는 자는 누가 뭐래도 합격입니다. 합격이에요. 내가 하는 모든 것이 주의 십자가 사건… 십자가 사건이 뭡니까? 누가 누구를 죽였다? 인간이 하나님을 개 패듯이 죽인 사건에 내가 좋든 싫든 관계없이 이미 일부로 가담되어 있음을 내가 발견할 때, ‘우리는 내가 가짜 예수, 가짜 하나님을 믿기 위해서 나 하나 지키고 내가 원하는 메시아, 예수를 제작해냈구나.’ 그러한 모습을 보일 때 요한일서나 사도 바울의 생각을 드러내는 겁니다. 바로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하심을 입은 자에게만 이런 이해 안 되는 희한한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한번 정리해보세요. 내가 십자가를 믿는 게 아니고 십자가 사건에 흡수 통합되어버렸어요. 흡수 통합되어버리니까 당시 십자가 사건 때 내가 없었더라도 성령에 의해서 성령이 2025년 9월에 우리에게 십자가 사건을 덧입혀버리니까 ‘아, 내가 알던 예수는 나 좋으라고 내가 조작한 가짜 예수였구나. 그럼 진짜 예수는 뭐냐? 나를 안 다치기 위해서 우리는 진짜 예수를 내 말 잘 듣는 예수로 변경하려고 내가 시도했구나.’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 반복해서 우리에게 터져 나오는 거예요. 뭐 ‘감사합니다’라는 말 외에는 우리가 할 게 없습니다.
그럼 끝으로 내일되면 어떨까요? 내일되면 내일치의 사건이 또 기다려요. 걱정할 필요 없어요. 내일까지 살지 안 살지 모르겠지만 산다면 오늘 일어난 일이 내일 또 일어나요. 그래서 죽을 때까지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하심을 드러내는, 감사로 이어지는 사건이 십자가 중심으로 계속 이 현장에서 벌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내가 십자가 외에는 너희들이 알지 않기를 원하노라.” 너무나 큰 사이즈로 이야기해버리니까 성도는 살아가면서 조금씩 그 일부 일부를 체험할 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의 주제를 파악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자신이 나를 지키기 위해서 어떤 것도 마다하지 않는 집념의 존재인 것을 저희들이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 피 흘리는 예수와 십자가 지신 예수까지 조작할 수 있는 그러한 시도를 하는 우리. 그런데 그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를, 이미 사랑과 긍휼을 입었기에 비로소 깨닫게 해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